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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엽(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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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시인
신동엽
申東曄|Shin Dong-yup
파일:껍때기는가라.jpg
출생 1930년 8월 18일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사망 1969년 4월 7일 (향년 38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국적
[[대한민국|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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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
아호 석림(石林)
직업 시인
수훈 은관문화훈장(2003년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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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colbgcolor=#fff,#1f2023>부여부소공립학교 (졸업)
전주사범학교 (중퇴)
단국대학교 문리학부 (사학 / 학사)
건국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 석사 수료)
본관 평산 신씨
배우자 인병선
가족 아버지 신연순, 어머니 김영희
장남 신좌섭, 차남 신우섭, 장녀 신정섭
등단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 (1959) }}}}}}}}}


1. 개요2. 일생3. 기타

[clearfix]

1. 개요

껍데기는 가라.
사월(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과 아사녀가
중립(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漢拏)에서 (白頭)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신동엽(申東曄)은 대한민국 시인이다.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호는 석림(石林)이다. 동시대에 활동한 김수영( 1921년 11월 27일 ~ 1968년 6월 16일)과 함께 1960년대를 대표하는 참여시인으로 평가받는다.

2. 일생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태생이다. 1944년 부여국민학교 (현 부여초등학교) 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전주사범학교에 진학했으나 중퇴한다. 이후 단국대학교에 입학해 사학을 전공했으며, 1953년에 졸업했다.[1]

1950년 국민방위군에 징집되었고, 1951년 국민방위군이 해체되어 집에 돌아오는 길에 배가 고픈 나머지 를 함부로 먹었다가 디스토마에 감염되었는데, 이는 그의 요절의 원인이 되었다.

1953년 단국대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의 자취방에 살다가 돈암동 네거리에서 헌책방을 운영했다. 이때 이화여고 3학년이던 인병선[2]을 만났고 1957년 결혼했다. 결혼한 그 해인 1957년, 인병선은 서울대학교에 입학했으나, 수학하는 대신 가난한 시인과의 삶을 택하고 학교를 중퇴한다. 그리고 신동엽의 고향인 부여로 내려갔다.

인병선은 부여에서 양장점을 열어 가정의 생계를 책임졌고, 신동엽은 충남 보령시의 주산농업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러나 1958년부터 폐결핵을 앓기 시작했고, 교편에서 물러난 후 처와 자식들을 다시 서울 돈암동 처가로 돌려보냈다. 자신은 부여에서 요양하며, 이때 글에 집중한다.

1959년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조선일보 1959년 3월 24일자를 통해 두 번째 작품을 발표하는데, 그게 바로 6.25 전쟁 전후기의 빨치산을 애틋하게 노래한 < 진달래 산천>이다.[3]

다행히 1960년부터 다시금 건강이 좋아졌고, 신동엽 역시 다시 서울로 올라갔으며, 이때 교육평론사에 입사한다. 이번엔 돈암동이 아니라 성북구 동선동에 자리잡는다.

그리고 그해 4월에 <<학생혁명시집>>(교육평론사)을 편찬하며 4.19 혁명의 정신을 기렸다. 이때의 기억을 되살려 신동엽은, <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껍데기는 가라>를 창작했다.

1961년에 명성여고 야간 교사로 취직하여, 안정된 직장 덕에 비교적 시작(詩作)에 몰두할 수 있었고 1963년 시집 <<아사녀>>를, 1967년에 장편 서사시 <금강>을 발표한다.

그러나 1969년에 지병인 간 디스토마 간암이 악화되어, 아내와 2남 1녀의 자식을 남겨둔 채, 4월 7일에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만 38세 젊은 나이로 사망한다.[4] 묘지는 처음엔 당시 파주군 금촌읍 월롱산 기슭에 안장했다가, 1993년에 고향인 부여군의 능산리 고분군 근처 산으로 이장했다. 사후 부여읍내에 있는 생가를 복원하고 신동엽문학관을 세웠다.

그의 부인 인병선의 덕으로 우리가 시인 신동엽을 알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인병선은 신동엽이 죽고 나자, 혼자 2남 1녀를 키우기 위해 출판사에 다니며 생활하면서도, 신동엽의 육필 원고를 모아 유고집 발간에 힘을 썼다. 그 결과 1975년 6월에 <<신동엽전집>>(창작과비평사)이 출간되지만, 불과 한 달만에 긴급조치 9호 위반의 이유로 당국에 의해 판매금지되었다.[5] 1979년 3월에는 시선집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창작과비평사)가 출간되었다.

1982년 12월에 신동엽 시인의 문학과 문학정신을 기리고 역량 있는 문인을 지원하기 위해 유족과 창작과비평사 공동 주관으로 '신동엽 창작기금'이 제정되었다. 2004년부터는 '신동엽창작상'으로, 2012년부터는 '신동엽문학상'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3. 기타

  • 국어 교과서에 실린 시 <껍데기는 가라>가 유명하다. 수능 대비 모의고사 문제에도 자주 출제될 정도로 중고등학생들에게는 익숙한 작품. 최근에는 작품의 참여시적 성격과 더불어 서정시적인 면모도 높이 평가되어 재평가받고 있다. 짧은 시들 중에는 명시가 많다. '껍데기는 가라', '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아니오', '원추리', '진달래 산천' 등등 하나 같이 간결한 언어 선택으로 높은 경지를 보여주는 수작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조금 긴 시들은 완성도가 떨어지는 모습('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 등등)도 보인다. 서사시인 '금강'은 동학 농민운동을 다룬다. 신하늬라는 독자와 시인 자신의 창작된 투사체가 역사 속 실제 인물인양 이야기에 등장하면서 몰입해서 시를 읽을 수 있는 문학적 장치였다는 찬사와, 역사성과 고증이 결여되어 있다는 비판이 엇갈린다.
  • 2013년 5월 3일, 생가 바로 옆에 신동엽문학관이 생겼다.
  • 인병선은 신동엽이 죽은 뒤에 고생해가며 세 자식(2남 1녀)을 키웠다고 한다. 남편과 결혼 때문에 대학 진학도 포기했는데 요절한 남편 때문에 출판사 일도 하고 짚풀 문화학자로 유명함에도 신동엽의 아내로만 알아주는 게 속상했다고. 생전 무명 시인이던 남편의 굴레가 너무나도 커서 유품은 모조리 문학관에 기증했다.
  • 큰아들 신좌섭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인데 그도 서울대 의대를 다니다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뛰어들어 경찰에게 쫓기는 통에 어머니 속을 긁었다고. 둘째아들 신우섭은 광운대학교를 졸업하고 사업가로 일하고 있으며, 딸 신정섭은 서울대학교 미대와 독일 카셀대학을 졸업하고 화가로 활동하다 결혼한 뒤에 캐나다 이민갔다.


[1] 정확히는 1949년 단국대 사학과에 입학하였으나 곧 한국 전쟁이 터졌고, 전쟁 기간 동안 대전, 부산 등지에서 전시연합대학에 다니면서 역사학을 공부했다. [2] 1935~.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로서 일제강점기에는 친일파로 변절하였다가 해방후 다시 좌익으로 돌아와 월북을 한 인정식의 딸이다. 시인, 민속학자로서, 우리 조상들 짚풀 문화에 대한 연구를 하여 짚풀연구학자로도 이름이 높다. 현재 혜화역 인근 짚풀생활사 박물관 관장을 하고 있다. [3] 이때는 6.25 전쟁이 끝난 지 불과 6년밖에 안 됐고, 당국에 의해 빨치산의 완전 진압이 선언된 지도 불과 4년밖에 안 됐던 시기였다! 아마 사람들은 그냥 6.25 전쟁의 동족상잔의 비극을 읊은 시 정도로 여겼던 듯하다. [4] 동료 문인들이 임종을 지키기 전부터 이미 배에 물이 가득 차서 누워있을 수가 없었을 수준으로 병세가 악화되어 있었다고 한다. [5] 물론 지금은 다시 출간되고 있다. [6] 2006년 7월 28일에 SBS 예능 프로그램 있다! 없다?에 방송되었다. [7] (중략) 껍데기는 가라 동엽 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