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성
李仁星 | Lee In-su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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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F5F5,#000000><colcolor=#888,#ddd> 출생 | 1912년 9월 28일 ([age(1912-09-28)]주년) |
작고 | 1950년 11월 4일 (향년 38세) |
본관 | 경주 이씨 (慶州 李氏)[1] |
호 | 아소(我笑)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기념 사업회 | 이인성 기념 사업회[2] |
소재지 |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로 22길 33 |
[include(틀:지도, 장소=대구광역시 중구 달성로22길 33[수창동 61], 너비=100%, 높이=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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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 | http://www.leeinsu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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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근대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tablewidth=100%><tablebgcolor=#fff,#1f2023><tablebordercolor=#fff,#1f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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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외면했던 38세
요절 화가… “누가 천재를 쏘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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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양화계의
거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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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연혁
1912년( 양력) 9월 28일 대구 출생1928년(17세) 수창보통학교 졸업, '촌락의 풍경'으로 세계아동미술전람회 특선
1929년(18세) 수채화 '그늘' 제8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 입선
1930년(19세) 일본 수채화 연맹(日本水彩畵聯盟) 회원. 향토회 참가(1934년까지), 제9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 '겨울 어느날' 입선
1932년(21세) 일본 다이헤이요 미술학교(太平洋美術學校) 입학,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 '카이유' 특선, 13회 일본 제국미술전람회(제전) '여름 어느날' 입선
1933년(22세) 제12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 '초하의 빛' 특선, 제14회 일본 제국미술전람회(제전) '초하의 뜰' 입선
1934년(23세) 제13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 '가을 어느날' 특선, 제15회 일본 제국미술전람회(제전) '여름실내에서' 입선
1935년(24세) 제14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 '경주산곡에서' 창덕궁상(최고상), 제22회 일본 수채화회전 협회상
1936년(25세) 제17회 일본 제국미술전람회(제전) '한정' 입선, 대구 이인성 양화연구소 개소
1937년(26세) 제16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부터 추천작가 선임 및 출품
1945년(34세) 이화여자중등학교 미술교사
1947년(36세) 이화여자대학교 서양화부 출강
1948년(37세) 국화회(國畵會) 회화연구소 개설
1949년(38세) 제1회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서양화부 심사위원
1950년(39세) 작고[3]
EBS 한국 미술의 걸작 - https://youtu.be/usjL4hN9FsE?si=ByKd-KiaqsqwnKC2
일본에서 작품 사려고 줄 선 조선의 화백 [살롱 드 경성_Ep.3 이인성] f.김인혜 작가 - https://youtu.be/3zEvvvVbleE?si=8VILtuTFp_eGtvlb
3. 수상 경력
1928년 '촌락의 풍경' 세계아동미술전람회 특선1929년 수채화 '그늘' 제8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 입선
''<그늘>1933년작. 원화 아닌 자료만 존재.''
1930년 제9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 '겨울 어느날' 입선
1931년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 '세모가경' 특선
''<세모가경>1931년작. 원화 아닌 자료만 존재.''
1932년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 '카이유' 특선, 제13회 일본 제국미술전람회(제전) '여름어느날' 입선
''<카이유>1932년작. 종이에 수채 58Cm x 78cm''
''<여름 어느날>1932년작. 원화 아닌 자료만 존재.''
1933년 제12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 '초하의 빛' 특선, 제14회 일본 제국미술전람회(제전) '초하의 뜰' 입선
1934년 제13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 '가을 어느날' 특선, 제15회 일본 제국미술전람회(제전) '여름 실내에서' 입선
''<가을 어느날>1934년작. 캔버스에 유채 196cm x 162cm ''
''<여름 실내에서>1934년작. 캔버스에 수채 90cm x 71cm ''
1935년 제14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 '경주산곡에서' 창덕궁상(최고상), 제22회 일본수채화회전 협회상
''<경주의 산곡에서>1935년작. 캔버스에 유채 196cm x 131cm ''
1936년 제17회 일본 일본 제국미술전람회(제전) '한정' 입선
''<한정>1936년작. 200호 캔버스에 유채. 자료 망실 ''
1937년 제16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 부터 추천작가 선임 및 출품
1998년 월간미술 주간 <근대 유화 베스트10>에서 '경주의 산곡에서'1위 선정
2000년 대구시 <이인성 미술상> 조례제정
2003년 11월 문화 관광부 '이달의 문화인물' 선정
4. 작품 활동 및 대표작
<해당화>
1944년.캠버스에 유채.146Cm x 229cm
<아리랑고개>
1934.종이에 수채.78cm x 58cm
<이화의 오후>
1948.종이에 수채.68Cm x 48cm
<어느 나루터>
1947.종이에 수채.52Cm x 37cm
파일:1_<계산성당>1930년대.종이에 수채.36x45Cm_450.jpg
<계산성당>
1930년대.종이에 수채.45Cm x 36cm
파일:1_<빨간장미>1943.캔버스에유채.46x38cm_450.jpg
<빨간장미>
1943.캔버스에 유채.46cm x 38cm
<정물-항아리와램프>
1937.캔버스에 유채.117cm x 73cm
<파란배경의 과일>
1944.나무판에 유채.30Cm x 21cm
<노란옷을 입은 여인>
1934.종이에 수채.60Cm x 75cm
<여인좌상>
1937.종이에 수채.58cm x 78cm
<누드 앉아있는>
1940.나무에 유채.33cm x 24cm
<빨간 옷을 입은 소녀>
1947.캔버스에 유채.27Cm x 45cm
<어린이>
1945.종이에 수채.23cm x 41cm
<중절 모를 쓴 자화상>
1950.나무판에 유채.22cm x 26cm
<파란배경자화상>
1933.나무판에 유채.24cm x 33cm
<조부상>[4]
1934.나무판에 유채, 49cm x 61cm
<장난감을든소녀>
<첨성대여인>
1934.종이에 수채.36cm x 24cm
<애기 업은 모녀-어부바>
1937.종이에 수채
<미인 춘몽1>
<부채-물동이>
1938.종이에 수채.전주합죽선
<합작도- 서동균,이인성>
1933.종이에 수채.34cm x 132cm
- 전시회 -
2000년 호암갤러리( 리움미술관) ‘이인성 작고 50주기 회고전’ 개최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덕수궁) 이인성 탄생 100주년 기념전
2019년 대구미술관 이인성 : 화가의 고향
2021년 대구미술관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웰컴 홈: 향연》
이인성 탄생 100주년 기념전
국입 현대 미술관 제작 - https://youtu.be/4Ez1QhQDP1o?si=a7Ld2UvBDd_-be5w
MBC 제작 - https://youtu.be/pnBo_JLFAaM?si=cc3VEUJjgvvAzBE6
2019년 이인성 특별전 《화가의 고향, 대구》展 Making Film
대구미술관 제작 - https://youtu.be/UdHLfXieCxU?si=fJD6qT922YJxA2Qb
《소장품 100선》 이인성 : 사과나무
대구미술관 제작 - https://youtu.be/cbG0Ho52ddc?si=-BWkbl5Qx7fkP0NT
5. 위상 및 평가
이인성은 1912년 대구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초등학교 5학년 때 화가 서동진의 눈에 띄었다.서동진(1900~1970)은 대구에 서양화 재료를 처음 도입했던 미술가이자 독립운동가 이상정(1896~1947)의 계성학교 제자였으며 스승의 영향 아래 일찌감치 일본에 건너가 미술 공부를 했다.
그의 작품은 수채화에서 날카로운 지적인 특성을 보였으며 독자적인 강한 개성으로 한국의 풍토적인 감각을 살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 근대화단에서 약관의 나이로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혜성처럼 나타난 이인성은 1930년대 일제 강점기에 '조선의 지보(至寶)', '양화계의 거벽(巨擘)'으로 불리며 명성을 떨쳤다. 1949년에 열린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심사위원을 맡았다.
그의 작품과 예술세계는 그 동안 몇 차례의 추모전과 유작전을 통해 일부가 공개된 적은 있으나 작가가 심혈을 기울인 대작들과 예술성 짙은 현존 작품들이 대대적으로 한자리에 전시될 기회는 많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비슷한 연배의 이중섭, 박수근 등이 국민적인 화가로 부상하는 동안에도 조선미전 연속 6회 입선(1931-1936) 이후 불과 26세의 나이로 추천 작가에 올랐던 이인성에 대한 일반인의 인지도는 높지 않았다.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이나 화단에서는 그의 천부적 재능과 조형적 감각에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
특히, 이인성이 우리 근대화단의 신미술 도입과 정착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작가로서 맨 앞자리에 설 만하다고 여겨지는 이유는
- 첫째, 초창기 근대화단에서 수채화가로서의 감각적인 기량과 기법의 숙련으로 탁월한 예술적 업적을 일궈냈다는 점,
- 둘째, 능수능란한 기량으로 정물화나 풍경화도 많이 제작하였지만 특히 인물화에서 한국적인 인물 표현을 정립하였다는 점,
- 마지막으로 서양의 인상주의나 후기 인상주의의 화풍을 나름대로 발전시켜 향토적인 서정주의의 한 전형을 이루었고, 해방 이후 그의 향토적 소재와 화면구성, 색감 등이 박상옥, 류경채 등 여러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쳐 50년대부터 70년대까지 국전(國展)의 한 지류를 형성하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근래에 미술 평론가들이 '한국 근대 유화 베스트10'에 1위로 선정한 <경주의 산곡에서>(1935)를 비롯하여 <가을 어느날>(1932), <복숭아>(1939), <해당화>(1944) 등 불후의 명작들과 근대 화단에서 가장 뛰어난 수채화가로서의 진면목을 보여 주는 <카이유>(1932), <아리랑 고개>(1934), <여름 실내에서>(1934) 등 정물화, 풍경화 외에도 작가 자신을 그린 몇 점의 <자화상>과 아내와 딸, 여학생 등 주변 사람들을 소재로 하여 모델의 특징을 예리하게 포착한 개성 넘치는 인물 초상화 등 다양한 장르와 기법을 보여주는 그의 작품이 일반인에게 널리 소개되고 전시되는 기회가 좀더 자주 생겨 그에 대한 지속적이고 객관적인 평가가 이루질 것을 기대해 본다.
조선의 고갱이라 불린 남자!! 한국 서양화의 지평을 연 인물, 천재 이인성!! https://youtu.be/q6AMyYYiqtA?si=D8bylO4A-mWtiWEg
《위대한 서사》 이인성미술상 20주년 기념 특별전 티저 영상 - 대구 미술관 https://youtu.be/RXeOGE_vyc0?si=r7L1wA4X_1O96w8R
이인성은 수채화, 유화, 한국화를 두루 제작했다. 서동진 문하에서 그림을 배우고 조선미전을 통해 이름을 알리던 시기에 이인성은 주로 성당이나 신식 건물이 있는 도시 풍경을 소재로 삼은 수채화를 그렸다. 1
일본 유학시기에 이인성은 양질의 재료와 일본에 소개되는 서양미술을 접하며 작품세계에 변화를 맞는다. 그는 대구에서 활동하던 초기와 마찬가지로 인상주의적인 수채 풍경화를 제작하면서도 전통적인 원근법과는 다른 원근 표현을 구사했고, 석고 데생을 하며 연마한 실력으로 입체감과 견고함이 느껴지는 인물을 그렸으며, 빛에 의해 계속 색이 변하는 나뭇잎 등을 경쾌한 터치로 묘사했다. 또한 그는 일본의 신세대 수채화가들과 마찬가지로 과슈를 사용한 불투명 수채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이 시기 이인성의 작품 중에는 폴 세잔(Paul Cézanne), 피에르 보나르(Pierre Bonnard) 등 후기인상주의 작가들을 연상시키는 것들도 있다. 그의 '여름 실내에서'(1934)는 선명한 원색이 사용되고 보색대비가 나타나서 이 시기 변화된 그의 색채 감각을 엿볼 수 있는 작품으로 꼽힌다. 이 작품은 실외 풍경을 주로 그리던 이인성이 실내를 소재로 삼았다는 점에서도 의의를 지닌다.
이인성은 유학 후반기와 귀국 후에 조선의 향토색이 표출된 작품들을 제작했다. '가을 어느 날'(1934), '경주의 산곡에서'(1935), '한정'(1936) 등이 이에 해당한다. 유화 '가을 어느 날'은 천을 휘감은 반라의 여인이 바구니를 들고 아이와 가을 들녘을 걸어가는 장면을 그린 그림으로, 일상적인 사물과 식물, 평범한 한국인 모델을 통해 향토적인 정서가 표출되었다. 작품 속 강렬한 원색의 사용은 폴 고갱[Paul Gauguin)을 연상시킨다고 평가받는다. 조선미전에서 창덕궁상을 받은 '경주 산곡에서'는 아이를 업은 소년과 바위에 앉은 소년이 그려져 있으며, 먼 배경에는 첨성대가 있고 화면 아래쪽에는 깨진 기왓장이 있다. 이 같은 작품들은 고국의 향토와 문화에 대한 이인성의 관심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미래보다는 과거에 집착하는 회고취향과 붉은 흙 등 이인성이 사용한 색채가 일본인 심사위원들이 요구했던 것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논쟁의 대상이 된다.
귀국 후에도 이인성은 향토적인 소재를 주로 그렸고, '춤'(1938), '뒷마당'(1939)과 같이 한복을 입은 인물들을 소재로 할 뿐만 아니라 '사과나무'(1930년대 말), '복숭아' 등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소재들도 그렸다. 1940년대에는 사실적인 인물화, 풍경화, 정물화를 제작하는 양상을 보였다. 이인성은 이 시기에 가장 안정적인 조건에서 작품 제작을 했지만, 일본에서 유학할 때만큼의 실험 정신은 표출하지 않았다고 평가받는다.
이인성은 유화, 수채화 등 서양화 외에 한국화를 제작하기도 했으며, 사군자, 화훼화, 산수화 등 다양한 화목을 그렸다.
이인성은 다양한 소재와 색채, 양식과 기법을 모색하고 수용하며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형성한 화가로 평가받는다. 이인성이 향토적인 소재로 그린 작품은 일본에서 권장하는 조선의 향토색에 부합하다는 점에서 논쟁의 여지가 있고 후반으로 갈수록 반복적인 소재를 사용한 경향이 나타나지만, 그가 한국적인 정서와 소재를 서양화로 표현하고자 했다는 의의는 간과할 수 없다.
참고문헌
• 국립현대미술관
• 송희경, 「이인성의 동양화와 그 시대성」, 『한국문화연구』 22, 2012, pp. 87-117.
• 신수경, 「이인성의 1930년대 회화 연구」, 『한국근현대미술사학』 6, 1998, pp. 229-274.
6. 이인성 미술상
화가 이인성을 기리기 위하여 1999년 대구광역시 조례로 제정한 미술상.수상자는 5천만원 상금과 상패가 수여되고, 대구미술관 개인전 개최 등의 지원한다.
<시상 일시>
매년 11월 4일 (이인성의 기일)
<연원 및 개최 경위>
이인성 미술상은 한국 근대 미술사에 큰 업적을 남긴 서양화가 이인성의 작품 세계와 예술 정신을 기리고 한국 미술 발전에 기여하고자 대구광역시에서 제정하여 수여하게 되었다.
<행사 내용>
이인성 미술상은 여러 장르가 혼재한 현대미술의 흐름 속에서 평면 작업에 중점을 두고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작업을 지속하는 작가를 대구미술관에서 매해 선정하고 있다. 5명의 심사위원을 선정하고 11명의 추천위원들로부터 추천을 받아 5인의 심사위원들이 최종 수상자를 선정한다. 이를 통하여 회화를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한국 현대미술의 균형 있는 발전을 이루고자 하는 데 목적을 둔다.
<역대 수상자>
1회 - 수상자 없음
2회 - 2001년 수상자 김종학
3회 - 2002년 수상자 이강소
4회 - 2003년 수상자 이영룡
5회 - 2004년 수상자 황영성
6회 - 2005년 수상자 김홍주
7회 - 2006년 수상자 김구림
8회 - 2007년 수상자 이건용
9회 - 2008년 수상자 김차섭
10회 - 2009년 수상자 안창홍
11회 - 2010년 수상자 최병소
12회 - 2011년 수상자 이상국
13회 - 2012년 수상자 정종미
14회 - 2013년 수상자 홍경택
15회 - 2014년 수상자 김지원
16회 - 2015년 수상자 이태호
17회 - 2016년 수상자 홍순명
18회 - 2017년 수상자 최민화
19회 - 2018년 수상자 공성훈
20회 - 2019년 수상자 조덕현
21회 - 2020년 수상자 강요배
22회 - 2021년 수상자 유근택
23회 - 2022년 수상자 윤석남
24회 - 2023년 수상자 권오봉
25회 - 2024년 수상자 허윤희
7. 이인성 기념 사업
7.1. 이인성 기념 사업회
한자 : 李仁星 記念事業會영어공식명칭 : Lee In Sung Momorial Foundation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설립 목적] 이인성 기념사업회는 서양화가 아소(我笑) 이인성(李仁星)[1912~1950]의 공적을 기리고, 예술의 재조명을 통하여 한국 근대미술을 재해석하며 더불어 한국 회화계의 발전에 이바지하고자 설립되었다.
[변천] 이인성 기념사업회는 2003년 10월 16일 개소하였다. 2005년 4월 9일 이인성 기념사업회 대구사무소를 개소하였으며, 2015년 2월 11일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 대우아파트 상가에서 이인성 아트센터 개관식을 하였다. 2017년 12월 이인성 기념사업회를 국세청에 비영리법인으로 등록하고, 2000년 이인성 미술상을 제정하였다. 2021년 현재 이인성 기념사업회장은 이인성의 아들 이채원이 맡고 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이인성 기념사업회는 자서전 출판, 학술 대회 개최, 『아소논총』 발간, 『아소전작도록』 발간, 자료 조사 및 관리, 홍보, 기념사업, 아소장학회 운영 등을 진행하고 있다. 슬라이드 대여 사업, 달력 제작 사업, 후원회 운영, 기념품 제작 등의 수익사업을 하고 있다.
[현황]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로22길 33[수창동 61]에 있는 이인성 기념사업회는 ‘이인성로(路)’ 지정, 이인성 아카이브 형태의 공간 조성, 이인성 대구 생가 복원 추진 등의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故 이인성 화백의 공적을 기리고, 그의 예술의 재조명을 통해 한국근대미술을 재해석하며 이와 더불어 한국 회화계의 발전에 이바지하고자 이인성 기념사업회를 설립.
본 기념사업회는 미술 작품 및 자료를 수집, 연구, 전시, 보존하고 이를 국제간 미술교류를 통해 한국회화의 세계화를 추진함 으로써 미술문화의 창달에 기여함을 그 목적으로 한다.
+ 홈페이지 : http://www.leeinsung.com
7.2. 이인성 동상
대구광역시 달서구 두류동에 위치한 두류공원 인물동산 내에 이인성의 동상.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화가.
[개설]
이인성(李仁星)[1912~1950]은 1912년 8월 18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태평로3가에서 태어났다. 11세에 수창공립보통학교[현 대구수창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이인성은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여 산격동의 풍경을 그렸다.
[활동 사항]
이후 1936년에 귀국, ‘이인성 양화연구소’를 개설하여 후진을 양성하였다. 1939년에는 아카데미극장 옆 골목에 아루스다방을 열어 그림을 그렸다. 이인성은 1944년 이화여자중등학교[현 이화여자고등학교]의 미술 교사로 재직하다가 1945년 이화여자대학교 미술과에 출강하였다. 1949년 제1회 대한민국 미술전람회가 개최되자 서양화부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었다.
[묘소]
이인성의 묘지는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산84-2 망우역사문화공원에 있다.
[상훈과 추모]
이인성이 사망한 지 약 4년 후인 1954년 7월 3일 백문영 등 대구광역시의 화우들이 영남일보사 맞은편 백향다실에서 ‘이인성 화백 유작 전시회 및 추도식’을 거행하였다. 서울 천일화랑에서는 김중현, 구본웅과 함께 ‘3인 유작전’이 열리기도 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7.3. 이인성 사과 나무 거리
[위치]
대구 북구 산격동 469 에 조성된 '이인성 사과나무 거리'
대구를 대표하는 화가인 이인성 화백의 추억이 깃든 산격동에 ‘이인성사과나무거리’가 조성돼 있다.
‘조선의 고갱’으로 불린 이인성은 동향인 이쾌대와 함께 일제강점기에 활약한 서양화가다.
이인성 사과나무 거리에는 아파트 담벼락에 그의 작품 ‘경주 산곡에서’,‘가을 어느 날’,‘노란 옷을 입은 여인’,‘카이유’,‘해바라기’,‘소녀’,‘자화상’ 등 12점의 거대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대구 북구 이인성 사과나무 맛집골목 (대구 북구청 제작)
https://youtu.be/syyw4PuQ3rY?si=SDqH24tLLU3Zk78l
7.4. 이인성 아르스 기념관
[위치]대구 중구 남성로 24 '이인성 아르스 기념관' 조성중. 2024년 12월 완공 예정.
기념관은 이인성 화백의 유가족이 70년 넘게 보관해 오던 작품과 그림도구 780점을 모두 기증하기로 하면서 추진됐습니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이인성 작가가 활동했던 일제강점기 시절의 시대상을 반영해 대구 근대의 옛 감성과 현대의 세련됨이 균형을 이루는 공간으로 잡았습니다.
1층은 이 화백의 주요 작품들을 일본 유학 전부터 귀국 이후까지 시간대 순으로 소개하고, 그의 작업실을 모티브로 한 공간도 조성됩니다.
1937년 그가 직접 운영을 했던 대구 최초의 다방인 '순다방 아루스'도 그대로 재현한 휴식공간도 만들어집니다.
기념관 조성 사업에는 총 27억 원이 투입됩니다.
관련 기사 - https://youtu.be/xYEnC_er8Nw?si=t6o1GEuzyLuY3F0B
(김민재 기자 | [email protected])
(뉴스 방영일 | 2024/07/17)
8. 어록
천재의 요절 An early death of a genius."누가 天才를 쏘았는가…"
해방직후
좌익이다 우익이다. 싸움이 벌어져 드디어 정판사건이 터진 서울의 밤 일곱 시께.
일찌감치 통행금지가 내려진 골목길을 술취한 취객 하나가 걷고 있었다.
주위의 정적쯤은 아랑곳없이 기분 좋게 취한 그 사내는 비틀거리면서 언덕길을 오르고 있었다.
『누구냐. 정지.』
돌연 거리를 차단하고 있던 치안대원이 지나가던 사내의 발걸음을 막아 세운다.
사내는 놀란 듯 우뚝 선다.
『누구냐.』
『지나가던 취객이요.』
『뭐라구. 지금이 무슨 시간인데 장난하려 들어. 누구야.』
『취객이요. 술취한 취객이요.』
사내는 껄껄 웃어제낀다.
『웃지마라. 누구야.』
『나말이요.』
손전지 불 밑에 드러난 사내의 얼굴은 생각 보다는 곱게 생겼다.
악의없는 참하게 생긴 얼굴이라는 것이 한눈에 드러난다.
치안대원은 울컥 화가 치밀어 오른다.
『정지. 정지. 누구야.』
『나말요. 나. 천하의 나를 모르오.』
『이 대한민국에서 제일 가는 나를 모르오. 난 이인성(李仁星)이요. 천하의 천재 이인성이요.』
『뭐라구.』
치안대원은 어이가 없었지만 사내의 기세가 너무나 등등하여 혹시 고위층의 인물인가 행여 겁도 나서 일단은 치밀던 화를 자제하고 집으로 보내 준다.
그러나 그 치안대원은 좀체로 치밀던 화가 풀리지 아니한다. 그래서 경비소로 돌아온다.
『누구 저기 위에 사는 이인성이라는 사람알어.』
『알지.』
앉아서 사무근무를 하던 사내가 시큰둥하게 대답한다.
『그 사람 뭐하는 사람이야.』
『뭐하긴 뭐해. 환쟁이지.』
『환쟁이. 아니 그 자식이 환쟁이야.』
사내는 뛰쳐 나간다. 그리하여 씩씩거리며 좀전의 사내가 들어간 집 대문을 발길로 걷어찬다.
『누, 누구요.』
술취해 자리에 누워있던 이인성은 옷도 채 입기전에 문을 열고 나서려는 순간 사내의 입에서는 한마디의 욕설이 튀어나온다.
『더러운 쌕끼.』
가슴에 품었던 치안대원의 총이 잠결에 튀쳐나온 이인성의 이마를 향한다. 방아쇠를 잡아당긴다.
『타앙.』
한발의 총성이 정막을 찢는다. 이인성은 쓰러진다.
이상은 우리나라가 낳은 천재화가 이인성이 죽는 순간을 나 나름대로 소설체로 표현해 본 것이다.
이인성은 그렇게 죽었다.
해방된 조국에서 기쁨에 술취해 돌아오던 이인성은 같은 동포의 총에 맞아 죽었다.
이인성은 그렇게 죽었다.
그렇게 죽었다. 그 손끝이, 그 손끝에서 나온 그림이 일본인의 눈을 놀라게 했던 이인성의 마술적 재능이 총한방에 죽고 말았다. 자신을 서슴지않고 천재라고 표현하던 이인성이 통행금지에 걸려 죽었다.
환쟁이 이인성은 그렇게 죽었다. 하지만 이십년이 흘러간 지금 그의 그림은 남아서 우리에게 기쁨을 주고, 천재의 재능을 엿보이게 하고 있다. 여러가지로 따지지 말라.
예술가가 무슨 특권이 있다고 통행금지 이후에 다닐 수 있담 하고 따지지 말라.
자기가 뭐라고, 뭐 대단한 인물이라고 통행금지 이후 다닌담 하고 따지지 말라.
그렇게 말하는 너는, 나는 그리고 우리는 위대한 천재화가를 죽인 사람들이다.
우리는 십자가를 메고 가는 예수를 찬미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를 향해 돌을 던졌던 바리새인을 욕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또한 그시대에 살아있었다면 그시대의 이단자인 예수에게 침을 뱉고 돌을 던졌을는지 모른다.
이조백자는 지금에 와서는 위대한 예술품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전에 그들을 백정 취급하였다.
그들을 따로 살게 했고, 그들끼리 혼인케 하였으며, 열병걸린 전염병환자 취급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빚었다. 그들의 한을 도자기로 빚었다. 수백년 지나서 그 이조자기는 그들을 멸시하였던 우리들의 유일한 자랑스런 유산으로 남아있다. 우리 문학의 고전도 마찬가지다.
춘향전도, 흥부전도, 심청전도 멸시받았던 하위계급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내려온 구화문학이다.
말하자면 하위문화들의 소산이다. 그것을 우리는 배운다. 배우고 있다. 자연스럽게 배우고 있다.
왜 그들을 죽은 다음에 추모하는가. 왜 이인성이 죽은 지금에 그들을 위해 기념비를 세우는가.
왜 그들을 우리곁에 살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가.
살아서 명동에서, 무교동에서 술취한 이인성을 보지 못하게 하는가.
왜 살아있는 천재 이인성이 우리 곁에서 시대의 예언을 내려주는 그 신의계시를 듣지 못하게 하는가.
나는 아르헨티나의 작가 아소트리아스의 경우처럼 - 그의 집 1㎞ 근처에는 다음과 같은 푯말이 붙어있다고 한다.
여기엔 우리의 위대한 작가 아소트리아스가 글을 쓰고 있는 구역입니다. 경적을 삼가해 주십시오 라고. -
거국적인 대접을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죽일 필요야 없지 않는가.
예술가는, 천재의 예술가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는 신에게서 태어날 뿐이다.
왜 신에게서 태어난 그를 죽여야만 하는가.
나는 총을 쏘지 않았다라고 자위하지 마라.
나는 그 시대에 살고 있지 않았다고 자위하지 마라.
나는 하층계급을 멸시했던 양반계급이 아니야 라고 자위하지 마라.
나는 바리새인이 아니니까라고 자위하지 마라.
먼훗날 그대들은 평가를 받을 것이다. 예술가와 더불어 살지 못하고, 예술가를 추모만 했었던 바보와 같은 할아버지들이었다고.
(중략)
예술가를 추모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위대한 민족은 천재와 더불어 살고 있다.
천재들을 추모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위대한 민족은 천재와 더불어 살고 있다.
이웃으로서 그들의 숨결을 들으며 살고 있다. <來週水曜字에 계속>
글 최인호 - 한국일보 1974년 6월 5일 <젊은이 세계>
9. 여담
대구 삼덕동 화실에서 (1942~1945)
이인성이 만든 대구 최초의 다방인 '아루스'(ARS)에서 시인 백석과 함께 (1938)
맨 오른쪽부터 시인 백석, 이인성, 무용가 조택원, 의사이자 수필가인 정근양
* 일찍 요절하여 다른 화가에 비해 작품의 수가 적은 편이고 만약 오랜 기간 활동을 했다면 대한민국 미술계가 어떤 방향으로 변화 했을지 모른다는 의견이 다수 존재한다.
* 또한 그림의 크기 역시 매우 큰 대작이 있는 반면 (<경주의 산곡에서> 196cm x 131cm ,<가을 어느날> 196cm x 162cm ,<해당화> 146cm x 229cm) 평균적인 크기가 작은 편에 속하는 작품이 대체적으로 많으나 이 또한 명성에 걸맞게 크기에 비해 거래가가 높게 형성이 되어있다.
* 이인성은 유화, 수채화, 한국화 등 두루 제작했다. 삽화를 비롯 수묵화 및 스케치 등 대표작 이외의 다양한 종류의 그림을 그렸다고 하며 상당히 수준이 높은 편이고 이를 증명하듯 중학교 미술 교과서에 등재된 그림 또한 서양화가 아닌 동양화 였다.
* (재)수성문화재단 수성아트피아는 대구시티발레단과 공동기획으로 천재화가 이인성을 주제로 한 창작발레 ‘카페 아루스’ 공연을 2017년 10월 17일 대구오페라하우스에서 열었다. 공연은 창작 발레답게 미술, 연극, 음악, 영상, 낭송 등이 결합된 융합 공연으로 펼쳐졌다. 이인성의 생전 글들을 시처럼 낭송하기도 하고, 이인성의 예술혼과 고단한 삶의 여정을 한 편의 이야기로 풀어내는 연극적인 요소도 선보였다.
* 극단 구리거울이 천재 화가 이인성의 삶에 주목한 공연 '다만 나 혼자 기뻤다'는 2024년 10월 25일과 26일, 그리고 31일부터 11월 2일까지 대구 소극장 소금창고 무대에 올랐다. 공연은 극단 구리거울이 기획한 대구 예술가 시리즈 3탄으로 이인성의 맏딸 '애향'의 시선으로 본 화가 아버지의 고독과 고뇌를 담았다.
[1]
중시조 36세손, 족보명은 이규의.
[2]
2000년
3월 ~ 현재
[3]
평소 술을 즐겨하며 호탕한 성격이었는데 이게 화근이 되었다. 1950년 11월 늦은 밤. 6.25가 한창이던터 심야 통행금지가 시행되던 시기지만 음주후 밤길에 귀가중인 이인성은 경찰을 마주했고 이에 호통을 치자 경찰들은 높으신 분인지 알고 그냥 보내줬다. 이것을 목격한 어느 시민이 환쟁이라고 말하자 경찰들이 집까지 쫓아온 뒤 잡아간다고 소리쳤고 소동 중 한 경찰이 공포탄으로 (당시 경찰 주장) 쏜 게 실탄이 들어 있어 오발 사고가 났다. 사건 후 경찰들은 본인들이 저지른 잘못을 숨기고자 간첩이니 친북이니 주장하였고 이에 지인들이 필사적으로 항의 했다. 향후 과실치사 정도의 경찰 면직 처분으로 솜방망이 처벌 마무리 됐다. 전쟁중이던 당시 비전투 지역인 후방에서 일어난 사고로 그 시절 치안이 얼마나 엉망인지 알 수 있다.
[4]
안동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김병우(金炳宇, 1879-1936) 선생. 훗날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까지 받은 그의 초상화를 손주사위 이인성이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