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10 08:32:41

구보(전진)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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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茍輔
(? ~ 385)

전진의 인물. 자는 불명. 진주(秦州) 남안군(南安郡) 출신.

2. 생애

건원 20년(384년) 10월, 신평(新平) 태수를 지내던 구보는 후진 요장으로부터 공격을 당하자 성을 더이상 지킬 수 없어 항복하려 하였다. 그때 신평군 출신인 요서(遼西) 태수 풍걸(馮傑), 연작(蓮芍) 현령 풍우(馮羽), 상서령 고의(髙義), 문산(汶山) 태수 풍묘(馮苗)가 간했다.
"천하가 혼란하면 충신이 나타난다 하였습니다. 과거 전단은 성 하나를 지킴으로써 제나라를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의 진나라는 여전히 여러 주(州)의 주요한 지역과 군국(郡國)의 수백개의 성들을 모두 보유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갑자기 역신(叛臣)이 될 수 있습니까?"
구보가 웃으며 말했다.
"나의 뜻도 그대들과 같소. 다만, 오래 전투가 지속되면서 구원이 없을까 두렵고, 무고한 우리 군의 백성들이 피해를 입을 것이 걱정되어 항복하려 하였거늘, 그대들이 능히 지킬 수만 있다면 내 어찌 이 한 목숨을 아까워하겠는가!"
이후 성벽에 의지하여 다시 굳게 지켰다.

구보가 항복하지 않자, 요장은 토산과 땅굴을 만들어 공성을 하였고, 구보 또한 성 안에서 이것들을 만들어 대응하였다. 어떤 자는 지하에서 싸우고, 어떤 자는 토산 위에서 싸우니, 요장의 무리 중 전사한 자가 10,000여 명에 달하였다. 이쯤에서 구보는 거짓 항복을 청하여 요장을 성 안으로 유인하려 했는데, 요장이 입성하려다 이를 알아채고 물러나자, 구보는 말 위에 오른 뒤 복병을 일으켰다. 요장은 돌아가는 도중에 구보에게 습격당해 하마터면 사로잡힐 뻔했고, 이번에도 다시 요장의 병사 10,000여 명이 전사하거나 사로잡혔다. 하지만 그럼에도 구보의 군세는 여전히 후진군에 비해 열세였고, 구원군조차 오지 않아 결국 식량과 화살이 다 떨어져 곤궁한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건원 21년(385년) 4월, 요장이 사자를 보내 구보에게 말하였다.
"나는 지금 의로움으로 천하를 얻고자 하는데, 어찌 충신을 원수로 삼겠는가! 나는 이 성만 얻어 요새로 삼으려 하니, 경은 단지 남녀의 무리만 이끌고 돌아가도록 하라."
구보는 요장의 말이 옳다 여겨 무리 15,000여 명을 이끌고 성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성 밖으로 나갔을 때, 요장은 포위를 풀어주지 않았고, 오히려 구보의 무리를 공격해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모두 생매장하여 죽였다. 이때 요서태수 풍걸의 아들인 풍종(馮終)만이 홀로 탈출하여 장안으로 도망쳤고, 천왕 부견은 그를 신평태수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