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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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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대 훈족 군주
아틸라
Attila
파일:attachment/64144649494.jpg
르네상스 시기의 작품
별호 훈족의 아틸라(Attila the Hun)
고대 노르드어 Atle, Atli
독일어 Etzel
헝가리어 Attila hun király[1]
부친 문주크(Mundzuk)
생몰년도 406년 ~ 453년
재위기간 445년 ~ 453년[2]

1. 개요2. 일생
2.1. 초기 일생2.2. 즉위2.3. 동로마 원정과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2.4. 동로마와의 교섭 실패와 암살 기도2.5. 호노리아의 청혼2.6. 갈리아 원정과 카탈라우눔 전투의 참패2.7. 서로마 원정과 이탈리아 침공2.8. 죽음과 사후
3. 인격
3.1. 사람됨과 인품3.2. 생김새와 인종 논란
4. 평가
4.1. 유럽에서4.2. 헝가리에서4.3. 튀르키예에서4.4. 몽골에서
5. 창작물에서

[clearfix]

1. 개요

5세기 중반 시기 훈족(Huns)의 왕. 형인 블레다의 뒤를 이어 왕이 되어서 훈족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인물이다. 아틸라는 게르만족 뿐 아니라 동로마 제국 서로마 제국까지 침략하여 악명을 떨쳤다. 그는 특히 이전의 훈족 지도자들과는 달리, 동로마의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서로마의 심장부였던 로마 인근까지 진격하여, 서양인들에게는 잔혹한 파괴자라는 인상을 남겼다.

그가 훈족의 왕좌에 앉았던 시간은 고작 8년 정도에 불과했지만, 재위 기간 온 유럽을 전란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서양에서는 일반적으로 "훈족의 아틸라(Atilla the Hun)'라 불린다. 당대 서양에서는 신의 채찍이라고도 불렸다. 위쪽 이미지 속 메달을 잘 보면 가장자리에 DEI ATILA FLAGELVM이라는 명문이 있는데, 라틴어로 '아틸라, 하느님의 채찍'이라는 뜻이다.

서고트 알라리크 1세, 반달족 가이세리크에 이어 서로마의 붕괴를 앞당긴 세 번째 인물로 서로마뿐만이 아니라 동로마 등 유럽 전역에 악명을 떨쳤다.

2. 일생

2.1. 초기 일생

아틸라는 훈족의 왕이었던 루아(Ruga)의 둘째 조카였다. 루아에게는 문주크(Mundzuk)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문주크에게는 블레다(Bleda)와 아틸라 등의 두 아들이 있었다.

435년 11월, 루아가 사망하자 그의 맏조카이자 아틸라의 형이었던 블레다가 뒤를 이어 훈족의 왕이 되었다. 아틸라가 그의 형인 블레다와 함께 공동으로 훈족을 통치하였다거나 혹은 아틸라가 이때에도 정치상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등의 이야기가 있으나 이는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훗날 전 유럽에 명성을 떨친 아틸라의 위상을 높이 봐서 나온 설일 가능성이 높다. 당시의 아틸라는 그저 형의 휘하에서 독립적인 세력을 가진 강력한 이인자 정도로 간주해야 옳을 것이며, 당시 훈족의 왕이었던 블레다야말로 훈족의 최고 권력자였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3]

438년경, 블레다와 아틸라 형제는 도나우 강변의 마르구스 외곽에서 동로마 사절단과 회담 했는데, 이것이 아틸라가 역사의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이때 재미있게도 블레다와 아틸라는 동로마 측 사절단에게 위압감을 주려는 생각이었는지 말을 탄 채로 회담 하였고, 동로마 사절단도 이에 질세라 마찬가지로 말 위에 앉은 채 블레다 형제를 맞이했다. 양측은 협상 끝에 그동안 동로마가 훈족에게 해마다 지급하던 황금의 양을 350파운드에서 700파운드로 인상하는 등의 내용을 골자로 한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에는 그 외에도 도나우강 유역에 훈족과 동로마 양측의 안전을 보장하는 자유시장을 개설하고 동로마 측이 더 이상 훈족 도망자들을 받아주지 않기로 하는 등 훈족에게 유리한 내용이 많았다.

이후 440년 겨울, 블레다와 아틸라는 마르구스의 주교가 훈족 왕족들의 무덤을 도굴하고 다닌다고 주장하며 자유시장을 공격하여 그곳에 있던 동로마 상인들을 살해하고 그 인근에 있는 비미나키움을 점령했다. 441년에는 마르구스의 주교가 훈족에게 항복하여 그 땅이 점령되었고, 442년에는 도나우강 인근의 요충지였던 나이수스마저 훈족의 수중에 떨어졌다.

훈족이 마르구스와 나이수스를 점령할 당시에 아틸라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분명치 않은 구석이 있다. 전투가 한창인 와중에도 아틸라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동로마인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자신에게 보상금을 지급하고 훈족에서 동로마로 망명해 온 몇몇 귀족들을 돌려보낼 것을 요구해 왔다. 동로마 측이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아틸라는 동로마의 몇몇 요새를 공격하여 빼앗았다. 어쩌면 아틸라는 블레다가 동로마와 싸우는 와중에 나름의 이득을 취하려다가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자 결국 블레다와 합세해 버린 듯하다.

2.2. 즉위

444~45년에 형 블레다가 의문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면서 아틸라는 마침내 훈족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블레다의 사망에 대해서는 사냥 중에 사고로 죽었다는 설과 이것을 가장해 아틸라가 암살했다는 설로 나뉘는데, 블레다가 죽기 전에도 아틸라와 대립 구도가 있었다는 점에서 후자 쪽을 추정하는 경우가 많다.

아틸라 이전의 훈족은 여러 부족이 왕이라는 하나의 대표적인 통치자를 중심으로 뭉친 연합 체제에 가까웠으나, 아틸라의 통치 아래 훈족은 단일 권력자의 통제를 받는 왕국으로 거듭났다. 아틸라는 블레다 왕 아래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거느린 이인자의 위치에 있었으나, 자신이 왕위에 오른 후에는 독립적인 세력을 갖춘 이인자의 존재를 허용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오레스테스, 콘스탄티우스, 에우독시우스, 오네게시우스 등을 비롯한 로마와 그리스 지역 출신의 유능한 외국인 관료들과 지식인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하여 측근으로 삼았다. 이는 그가 서방에서 가장 체계적이었던 로마의 관료 체제를 일부나마 받아들이고자 했던 흔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또한 그는 다른 강대한 세력과 맞서고자 스키리와 게피드 같은 외부 세력과도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는 등 외교적인 안목도 발휘하였다.

2.3. 동로마 원정과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

앞서 언급했듯이, 블레다 시대인 442년, 훈족은 동로마의 발칸 반도를 공격하여 나이수스의 요새를 점령하였다. 훈족은 동로마로부터 금을 지불받는 조건으로 철수하였으나, 동로마는 시칠리아 원정군이 귀환하면서 어느 정도 병력에 여유가 생기자 약속했던 금을 지불하지 않으려 했다. 이에 분노한 아틸라는 447년 동로마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였다. 아틸라는 형인 블레다가 생전에 동로마의 변경을 두들겨대며 금을 뜯어내는 정도로 만족한 것과는 달리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진격하고자 하는 거대한 야심을 품고 있었다.

그에 따라 아틸라는 훈족과 이란 및 게르만 일대에서 끌어모은 대규모 병력을 거느리고 진격하기 시작하였다. 아틸라의 대군은 동쪽으로 치우친 경로를 택하여 동로마의 강력한 요새들을 교묘히 피해 갔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지나치는 도시마다 철저한 파괴와 약탈을 일삼으며 진군하며 동로마 측의 저항 의지를 짓밟았다. 이는 유목민족 특유의 기동력을 살려서 신속한 전격전을 펼쳤던 훈족의 기존 전술과는 상반된 것이었다. 훈족의 이와 같은 파괴적인 공격으로 동로마의 도시인 싱기두눔(오늘날의 베오그라드)이 함락되었으며 발칸 반도 일대 또한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 이와 같은 전술은 훗날 아틸라가 떨치게 될 악명에도 어느 정도 일조하였다.

훈족의 군대가 다가오는 와중에 동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큰 지진이 일어났다. 그로 인하여 많은 건물이 무너졌으며 인명피해도 극심했다. 특히 성벽을 비롯한 방어시설이 크게 훼손되었기에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민들은 거의 패닉 상태에 빠져들었다. 동로마의 황제였던 테오도시우스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훈족의 군세에 직접 노출되는 상황만은 피하고자, 게르만족 출신의 지휘관이었던 아르네글리스쿠스로 하여금 트라키아에서 아틸라를 필사적으로 막도록 하였다. 이 싸움에서 아르네글리스쿠스는 분투 끝에 훈족에게 적지 않은 피해를 주는 데 성공하였다.

결국 동로마 군대는 패배하였고, 아르네글리스쿠스 또한 전사하였다. 그러나 아르네클리스쿠스가 목숨을 바쳐가며 시간을 벌어준 덕분에 동로마는 지진으로 훼손된 성벽을 어느 정도 재건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테오도시우스 2세가 쌓은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실로 난공불락의 철옹성이었다. 그에 반하여 훈족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견고한 성벽을 파괴할 만한 공성 장비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포위망을 구축하고도 섣불리 공격을 시도하지 못했다. 더욱이 말라리아와 이질 따위의 전염병이 훈족 진영에 퍼지면서 전선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훈족으로서는 딱히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킬 방법이 없었지만, 제국 입장에서도 당장 수도 코 앞까지 닥쳐온 훈족을 격파할 방법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에 따라 양국 간에 강화협상이 시작되었다. 여러차례 사신들이 오간 결과 아틸라는 이전에 비해 8배 이상 늘어난 금 6천 파운드, 훈족 포로들의 석방, 훈족을 배반하고 동로마 측에 가담한 이민족들의 신병, 도나우강 하류 일대의 영토를 대가로 받아 갔다. 동로마는 그 막대한 금액을 감당하기 위해 원로원에까지 세금을 부과해야 했고, 자신들을 위해 싸워준 이민족들을 아틸라에게 넘겨주었을 뿐 아니라 영토까지 떼어주면서 그 위상이 크게 손상되었다. 그럼에도 수도를 지키기 위해서는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당시 동로마가 아틸라를 상대로 보여준 약한 모습이 의아하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동로마는 동쪽의 강적이었던 사산 왕조 페르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기동 야전군의 4할을 동부전선에 주둔시켜야 했으므로 북방의 이민족들을 상대로 전력을 집중할 수 없는 상태였음을 고려해 볼 필요는 있다. 이에 대해서는 피터 히더 교수의 저작인 《로마제국 최후의 100년》을 참고할 만하고 당시 동로마군의 배치는 여기를 참조할 것. 물론 거대한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소국보다 많은 병력이 있어야 하고 그만큼 넓은 범위에 병력을 배치할 수밖에 없다는 건 어떠한 국가나 가진 딜레마이자 숙명이고, 저 병력을 훈족을 상대하는 데에 끌어와 소모했을 때 이어질 또 다른 외교적, 안보적 위협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상기하자면 의미 없는 가정일 뿐이다.

2.4. 동로마와의 교섭 실패와 암살 기도

449년, 아틸라는 동로마에 더 많은 영토를 요구하고자 사절을 파견하였다. 당시 훈족 사절단의 대표는 경호를 담당했던 스키리 왕 에디카, 그리고 아틸라의 측근이었던 오레스테스 등이었다.[4] 이때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의 측근이었던 환관 크리사피우스가 몰래 에디카를 만찬에 초대하여 아틸라를 암살하고 로마에 귀화한다면 막대한 부를 나누어 주겠다고 제안하였다. 에디카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으며, 우선 아틸라 암살에 협조할 이들을 구하기 위해 금 50파운드를 요구했다.

그해 초여름, 동로마에서는 훈족에 사절을 파견하였다. 이 사절단은 표면적으로는 아틸라의 요구에 따라 포로를 반환하고, 아틸라의 심복이자 비서관이었던 콘스탄티누스를 동로마 측 여인과 혼인시켜 양국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한다는 임무를 받았다. 막시미누스와 프리스쿠스 등을 포함한 동로마 제국의 사절단 가운데에는 아틸라의 암살을 지시받은 통역관 비길라스도 끼어 있었다. 그는 에디카가 받은 금 50파운드를 보관하는 임무도 맡고 있었는데, 에디카가 동로마 측으로부터 금을 받아온 것을 행여라도 아틸라가 눈치챌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동로마 측은 보안을 유지하기 위하여 비길라스를 제외한 다른 사절들에게는 아틸라 암살 계획을 전혀 알려주지 않았다.

사절단은 13일간, 이 여정 끝에 오늘날의 불가리아의 소피아, 즉 세르디카에 도착하여 연회를 즐겼다. 이 자리에서 동로마 사절단, 그리고 에디카와 오레스테스 등을 비롯한 훈족 측 사람들은 각기 동로마 황제와 훈족 왕을 기리며 술잔을 들이켰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비길라스가 신성한 동로마 황제를 한낱 인간인 훈족의 왕과 비길 수 있겠느냐는 실언을 하였고, 그 자리에 있었던 훈족들은 모두 화를 내었다.[5] 언변이 좋은 막시미누스가 급히 화제를 돌리며 분위기를 누그러뜨렸지만, 오레스테스 또한 어째서 에디카가 혼자서 크리사피우스를 만났는지 의혹을 제기하고 나섰다.

본래 아틸라는 이곳에 와서 직접 사절단을 맞이할 계획이었으나 결국은 오지 않았다. 그에 따라 사절단은 아틸라를 만나기 위해, 훈족과 동로마의 접경지대였던 나이수스로 이동해야 했다.[6] 이미 세르디카에서 비길라스가 자신을 험담하는 등 망언을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아틸라는 사절단에게 악감을 품었다. 이 때문에 아틸라는 사절단을 자신의 막사로 불러 고함을 질러대며 욕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훈족들은 동로마의 사절단에게 술과 음식 및 숙소를 내주는 등 융숭히 대접했다.[7] 사절단 일행은 아틸라의 행렬을 뒤따라 북쪽을 향해 여행했으며, 마침내 오늘날 헝가리 티소 강에 위치한 아틸라의 궁전에 도달하였다.[8] 아틸라는 그곳에서 사절단을 위한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다.

그런데, 이즈음에 에디카는 돌연 변심하여 자신의 주군인 아틸라에게 동로마의 암살 계획을 모두 털어놓고 말았다. 에디카가 어째서 갑자기 마음을 돌렸는지는 알 수 없다. 애초부터 아틸라를 제거할 마음을 품지 않았다는 말도 있고, 암살 계획 자체가 영 엉성했던 데다 암살자라는 작자가 술에 취해 아틸라를 모독하는 대형 사고까지 친 만큼 암살이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고 여기고 변심했을 수도 있다.

사건의 전말을 알고 아틸라는 그 자리에서 통역관 비길라스에게 금 50파운드의 출처를 강하게 추궁하면서,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비길라스와 함께 온 그의 어린 아들을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하였다. 비길라스는 동로마 황제가 자신에게 아틸라의 암살을 지시했음을 털어놓았고, 자신은 죽어도 좋으나 아들만큼은 살려달라고 빌었다. 암살자가 엉성한 자였기에, 에디카의 계산은 정확했던 셈

놀랍게도 아틸라는 암살자에게 관용을 베풀었다. 그는 동로마 황제의 암살 의도를 전혀 모르고 있었던 사절단들에게는 아무런 위해를 가하지 않았다. 또한 비길라스의 어린 아들에게 에디카를 매수하는 데 쓰인 금 50파운드를 그대로 주어 돌려보냈고, 자신을 암살하려 했던 비길라스에게는 그 두 배인 금 100파운드를 넣은 자루를 그 목에 매달아서 동로마 황제에게 보내었다. 아틸라는 자신을 암살하려던 이들을 오히려 멀쩡히 돌려보냄으로써 동로마 황제에게 치욕과 망신을 주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이처럼 건재하다는 사실을 과시하여 무언의 압력을 가한 셈이었다. 처형할 명분은 충분했지만, 비길라스를 처형하면 공범인 에디카 역시 살려둘 수 없고, 그러면 아틸라의 부하가 적국에 매수되어 암살 음모를 꾸몄다는 것을 감출 수가 없어 자신의 체면과 위신이 크게 깎이는 꼴이 된다. 또한 이처럼 중요한 업무에 고작 비길라스 같은 얼간이를 동원할 만큼 허술한 동로마 제국에 장난기가 발동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처럼 동로마 제국과 훈족 간의 교섭이 암살 기도 사건 때문에 별다른 소득 없이 끝나버린 후, 이듬해 450년에 동로마의 테오도시우스 2세가 낙마 사고로 급사하였다. 그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마르키아누스는 테오도시우스의 측근이었던 환관 크리사피우스를 숙청하였으며, 그동안 훈족에게 해마다 바치던 연례 공물을 폐지하였다. 이렇게 양국의 관계는 거의 끊어져 버렸으나, 아틸라는 이에 그다지 개의치 않았다. 그의 관심사는 이미 동로마가 아닌 서로마 제국에 쏠렸기 때문이다.

2.5. 호노리아의 청혼

당시 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누이 호노리아는 라벤나의 별궁에서 시종인 에우게네스와 통정하여 임신하였을 뿐 아니라, 에우게네스를 황제로 추대하려는 반역을 꾀하였다. 결국 이 사실이 발각되면서 에우게네스는 처형당했고, 호노리아 자신은 동로마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내져 사실상 유폐 생활을 하였다.[9] 궁지에 몰린 호노리아는 450년, 환관 히아신스를 통하여 금반지를 아틸라에게 보내서 청혼하였다.

이와 같은 제안은 아틸라에게도 매우 구미가 당기는 것이었다. 비록 아틸라가 동로마로부터 금을 뜯어가며 세를 과시하긴 했지만, 사실 동로마의 국력은 여전히 만만히 볼 수준이 아니었다. 더욱이 호노리아가 아틸라에게 청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동로마에서는 테오도시우스 2세가 낙마사고로 급사하였고, 그보다 더욱 강경한 마르키아누스가 동로마 황제가 되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훈족은 동로마에서 더 이상 금을 뜯어내기가 곤란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아틸라는 동로마와는 달리 그 세력이 크게 쇠퇴한 서로마를 상대로는 원하는 만큼 이득을 챙길 수 있다고 판단했다.

아틸라는 이미 아내들을 여러 명 거느렸으나,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그는 호노리아의 청혼을 받아들이고 서로마 제국 영토의 절반을 지참금으로 요구하였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살아있던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이 사건의 내막을 알고는 기절초풍하였다. 그는 행여라도 아틸라가 또다시 동로마를 공격할 것을 염려하여 호노리아와 히아신스를 서로마로 돌려보내 버렸다. 한편, 누이의 매국 행위에 격분하여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아틸라와 내통한 히아신스를 고문하고는 죽여버렸으며, 아틸라의 요구를 거절하고 훈족과 맞서 싸우겠다는 결의를 드러냈다.[10]

2.6. 갈리아 원정과 카탈라우눔 전투의 참패

451년, 아틸라는 마침내 군사를 움직였다. 그는 훈족 기병들로 구성된 자신의 주력군을 동쪽으로 파견하여 사산 왕조 페르시아에 반기를 든 아르메니아인들을 지원하였으며, 아틸라 자신은 직접 게피드족, 스키리족, 동고트족, 슈바벤족, 알레만족 등 다양한 이민족들로 구성된 혼성군을 거느린 채 당시에 서로마의 세력권이었던 오늘날의 독일 프랑스 지역, 즉 갈리아 일대를 침공하였다.[11] 당시 아틸라가 거느린 군대의 수는 정확하지 않다. 많게는 10만 정도까지 추산되지만, 실제로는 3~5만 정도를 넘지 못했으리라 추측하는 견해도 있다.

당시 아틸라의 행군로는 기록이 부실해서 불분명하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가 라인 강을 넘어서 모젤 강을 따라 진군하며 여러 주요 도시들을 공격하여 무너뜨렸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프랑크족도 아틸라의 군세에 합류하였다. 이들은 모젤 강변의 주요 도시였던 트리에를 함락시켰으며, 그해 4월에는 갈리아 지방에서 전통 있는 주요 도시인 메스를 공격하여 무참히 파괴하였다. 훈족의 갈리아 침공으로 인하여 서로마 그리스도교 사회에서 훈족과 아틸라가 떨치던 악명은 극에 달하였고, 그를 '신의 징벌'이라 불렀다는 전승도 여기서 비롯하였다.

그해 6월, 아틸라의 군대는 마침내 오를레앙에 이르렀다. 그때 마침 서로마의 군사령관이었던 명장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가 서고트족의 왕인 테오도리크 1세와 손을 잡고는 갈리아 내에 있는 약소한 여러 부족을 포섭해 연합군을 편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아에티우스 또한 군대를 거느리고 오를레앙으로 진격하여 아틸라의 앞을 막아섰다. 각기 여러 이민족을 거느린 아틸라와 아에티우스의 군대는 오를레앙의 카탈루니아 평원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는 후에 카탈라우눔 전투라 불렸다.

아틸라는 싸움에 앞서 관례에 따라 주술사들에게 소의 창자와 뼈로 점을 치게 하였는데, 주술사들은 이 싸움에서 훈족은 끔찍한 피해를 볼 것이나 그 대가로 적장을 죽일 수 있을 것이라 예언했다고 한다. 아틸라는 그 적장이 아에티우스가 분명하다고 믿었다. 한편 요르다네스의 기록에 따르면, 아틸라는 전투를 개시하기 직전에 자신의 군대 앞에서 일장 연설을 늘어놓으며, 로마의 군대는 지금껏 자신들이 물리쳐왔던 적들처럼 손쉽게 쓸어버릴 수 있을 것이라 호언장담하였다. 당시 아틸라가 아래처럼 말했다고 한다.
내가 적에게 첫 창을 던지리라. 이 아틸라가 싸우는 전장에서 편히 쉴 수 있는 이는 오로지 죽은 자들뿐이다.

아틸라의 진영이 먼저 서로마 군단의 진영을 공격하며 싸움이 시작되었고, 이 격렬한 전투에서 과연 서로마 군단의 지휘관이 전사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틸라의 예상과는 달리, 아에티우스가 아니라 서고트 왕인 테오도리크였다. 아틸라는 처음의 목표와는 달리 전투의 유리한 고지였던 언덕을 점령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서로마 군단과 서고트 전사들의 격렬한 저항으로 인하여 심각한 피해를 보고 말았다.

결국 훈족의 공세는 실패로 돌아갔다. 아틸라는 도랑과 수레로 방벽을 형성해서 그 뒤로 진영을 숨길 수밖에 없었으며, 훈족 군대는 아에티우스에게 포위당하였다. 아틸라는 그동안 숱한 싸움을 치르면서 이와 같은 대패를 당해본 일이 없었기에 큰 충격을 받았던 모양이다. 전승에 따르면, 이 싸움에서 패배를 직감하자 아틸라는 자신의 진영이 함락될 시에 스스로 불에 뛰어들어 자결하기 위해 장작더미까지 쌓아 놓았다고 한다.

그러나 아에티우스는 싸움에서 거의 다 이긴 상황에서 어째서인지 아틸라가 무사히 후퇴하도록 내버려두었다. 그 이유는 여전히 명확하지 않다. 다만 요르다네스의 서술에 따르면, 아에티우스는 훈족의 세력이 갑자기 붕괴한다면 이민족 간의 세력 균형이 무너져서 서로마의 국방에 악영향을 가져올 것을 염두에 두고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 전해진다. 결국은 다른 이민족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필요악인 훈족의 소멸을 막고자 했다는 것이다. 어찌 되었든 간에, 그 덕분에 아틸라는 절체절명의 위기로부터 목숨을 건져서 돌아갈 수 있었다.[12]

2.7. 서로마 원정과 이탈리아 침공

아틸라는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참패를 당한 후, 훈족의 본거지인 오늘날의 헝가리 지역으로 귀환하였다. 서로마 군단에 참패를 당한 탓에 딱히 영토나 전리품도 획득하지 못하였다. 아틸라가 거느린 게르만 족들은 그로 인하여 불만이 쌓였는지, 귀환길에 오르면서 갈리아 침공 중에 사로잡은 포로와 인질들을 잔혹하게 학살했다고 한다. 더욱이 아틸라가 자신의 주력인 훈족 기병을 파견해서 지원해 주었던 아르메니아의 반란도 사산 왕조에 무참히 진압당하는 등 악재가 겹쳤다.

헝가리로 돌아온 아틸라는 다시 동로마에 금을 요구하였으나, 이미 서로마에 패배한 여파가 큰 탓에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하였다. 결국 아틸라는 다시 군세를 정비하여서 서로마 침공을 재개하기로 마음먹었다. 지난 패전으로 입은 피해를 매우 빠른 속도로 복구해 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이번의 타깃은 갈리아 지방이 아니라, 서로마 제국의 본토였던 이탈리아 반도였다.

452년, 아틸라는 혼인 지참금을 가져가겠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북부 이탈리아를 공격해 왔다. 당시 아틸라의 행군로는 기록에 정확히 남아있지 않으나, 아마도 과거 로마를 약탈했던 서고트족의 임금 알라리크의 진격로를 답습하여 오늘날 이탈리아 슬로베니아의 국경선을 이루는 클라겐푸르트 협곡을 지났다고 추측한다. 아틸라는 그곳에서 아퀼레이아라는 도시에 이르러 3달에 걸친 공세를 퍼부었다. 아퀼레이아는 난공불락의 요새였기에 알라리크도 피해 갔던 곳이었지만, 훈족의 끈질긴 공격에 결국 성벽이 무너졌으며 그 도시는 초토화되었다.[13]

아틸라의 군대는 아퀼레이아를 거쳐 포 강을 따라서 서쪽으로 이동하여 파두아, 비첸차, 베로나 등의 도시들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는 많은 전리품을 뜯어갔다. 이미 아퀼레이아가 훈족의 무자비한 공격에 파괴당하여 쑥대밭이 되었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기 때문에, 브레시아와 베르가모 등의 지역은 싸워보지도 않고 훈족에게 항복하며 길을 내주기까지 하였다.

지난번 싸움에서 훈족을 물리쳤던 아에티우스는 급히 이탈리아로 돌아왔으나, 이미 서고트 등을 비롯한 이민족들의 지원이 끊어졌기 때문에 휘하에 거느린 병력이 턱없이 모자라 훈족을 막을 수는 없었다. 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서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라벤나를 떠나서 옛 수도인 로마로 옮겨갔는데, 그가 라벤나를 버리고 달아난 것인지, 혹은 로마를 훈족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그곳으로 간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동안에 아틸라는 지금의 밀라노이자 제국의 옛 수도였던 메디올라눔을 점령하였다. 아틸라는 그곳에서 스키타이의 족장들이 옥좌에 앉은 로마 황제에게 엎드려 절하는 광경을 묘사한 그림을 보고는, 화가에게 명령하여 이를 옥좌에 앉은 아틸라에게 로마 황제가 황금이 든 자루를 공물로 바친다는 그림으로 바꾸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 그림은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이후 아틸라는 파비아를 거쳐 민키아 강변으로 이동하여 그곳에 주둔하였다. 이때 교황 성 레오 1세가 직접 민키아 강변으로 가서 아틸라를 만나 강화를 제안하였다. 아틸라는 레오 1세와 만난 후에 돌연 이탈리아에서 철수하였는데, 당시 두 사람 간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당시 아틸라의 수하들은 철군을 만류하였으나, 아틸라의 결심을 꺾지는 못했다.

당시에 아틸라가 교황의 중재를 받아들이고 군사를 돌린 이유는 명확하지 않은데, 아마도 당시에 훈족이 회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고 추정한다. 특히 당시 서로마 일대에서 기승을 부리던 전염병이 주된 원인으로 지목된다. 전설에서는 레오 1세가 아틸라에게 신의 권능을 보여주며 겁을 주어 강화를 맺도록 한 듯이 전한다. 성인들의 기적에 대한 전승에 따르면 레오 1세가 사제들 몇 명만을 대동하고 아틸라 앞에 나섰을 때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가 칼을 들고 호위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실상은 막대한 재물을 싸 들고 가서 협상을 벌였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레오 1세의 결단력과 외교술이 큰 힘을 발휘했음은 사실이고, 레오 1세는 이후 반달족의 침략 당시에도 협상으로 로마를 구했다. 그 업적으로 레오 1세는 사후에 성인으로 추앙받았다.

아틸라는 세계 정복을 꿈꿨고 로마 제국 공격뿐만 아니라 사산 왕조 페르시아 공격을 계획했다는 설이 있다. 동로마 사절단이 아틸라를 섬기는 옛 로마인과 연회를 벌였는데, 옛 로마인들은 아틸라가 이제 사산 왕조를 치리라는 추측성 발언을 한다. 실제로 아틸라가 사산 왕조의 아르메니아 합병을 막고자 파병한 적이 있긴 한 모양이다. 하지만 일부 군대일 뿐 아틸라는 본대를 이끌고 갈리아를 쳤기에 정말로 페르시아 정벌을 생각했을 가능성은 작아 보인다. 게르만족을 대상으로 한 지배권 확대와 로마에서의 공납에 더 관심을 두었을 가능성이 크다.

2.8. 죽음과 사후

요르다네스의 기록에 따르면, 헝가리 지역으로 돌아온 아틸라는 동로마 측에 공물을 요구하면서 그 속주를 공격할 것처럼 위협을 가하였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452~53년에 걸친 겨울, 서고트족을 공격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기록들은 아틸라의 실제 동선이라 보기에는 지나치게 중구난방인지라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신빙하기 어렵다는 견해가 주를 이룬다.

453년 봄, 아틸라는 오늘날 헝가리의 티소 강에 위치한 자신의 목조 궁전에서 일디코(Ildico)[14]라는 젊고 아름다운 여인과 결혼하였다.[15] 그리고 그날 밤에 아틸라는 갑작스럽고도 허망하게 삶을 마감하였다.

요르다네스의 기록에 따르면, 아틸라는 신부 일디코와 동침하던 중, 엎드린 자세로 동맥이 터지는 바람에 코피가 쏟아져나와 질식사했다고 한다. 그는 죽어가면서 피를 많이 흘렸으나 상처는 전혀 없었다고 한다. 아틸라가 신부와 첫날밤을 지낸 다음 날 아침, 시종들은 아틸라가 일어나지 않자 그를 살피기 위해 침실에 들어갔다가 이미 피를 흥건하게 흘린 채 죽은 아틸라와 겁에 질린 채 비탄에 잠긴 일디코를 발견하였다. 아틸라의 진정한 사인은 여전히 의문이다. 혹자는 심장마비나 뇌출혈로 인한 복상사로 보기도 한다. 동로마 제국의 역사가 마르켈리누스는 아틸라가 신부에게 살해당했다고 보았으나 그 주장에 별다른 근거는 없다. 그리고 아틸라의 최후 순간 함께 있었던 일디코는 그 뒤로 어떻게 되었는지 기록이 없다.

아틸라의 장례식은 들판 한가운데에 비단으로 쳐놓은 대형 천막에서 거행되었다. 엄선된 뛰어난 기수들이 죽은 왕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천막 주변에서 말을 달리는 의식을 치렀고, 사람들은 아틸라의 정복 전쟁과 그 위업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다. 아틸라의 부하들은 임금의 죽음을 눈물이 아닌 전사의 피로써 기리기 위해, 자신들의 얼굴에 상처를 내거나 머리털을 잘랐다.[16] 훈족 사람들은 아틸라의 시신을 금으로 만든 관에 안치했는데, 관 속에는 망자의 신분에 걸맞은 보석과 말갖춤(마구) 등 값비싼 보물들이 부장되었다. 이들은 아틸라가 묻힌 곳을 비밀로 하기 위하여 관을 한밤중에 매장하였으며, 관을 매장한 이들도 모두 죽였다고 한다.

아틸라가 사망한 후에 훈족의 위세는 급격히 무너졌다. 아틸라의 뒤를 이어 훈족의 왕이 된 장남 엘라크가 자신의 두 아우인 뎅기지크 및 에르나크와 내분을 일으켰다. 엘라크는 아버지인 아틸라가 그랬던 것처럼 단독으로 훈족의 왕이 되기를 원하였으나, 그의 아우들은 각기 자신만의 세력 지분을 나눠 가지기를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454년에 뎅기지크와 에르나크는 형과의 세력다툼에서 패하여 훈족의 땅에서 쫓겨났다.

이후 454~55년 사이에 아틸라와 동맹을 맺었었던 게피드의 왕 아르다리크가 동로마의 지원을 등에 업고 훈족의 지배에 반기를 들었다. 엘라크는 네다오 강 전투에서 아르다리크에게 패하고 전사하였으며, 훈족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17] 한편 도나우 강 하류로 밀려났던 뎅기지크는 동로마와 2년에 걸친 전쟁을 벌였다가 469년에 전사하였고, 그 두개골은 전리품이 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전시되었다.

막내아들 에르나크는 동로마의 속방이 되는 조건으로, 오늘날 루마니아 동쪽의 도브루자를 얻고는 그곳에 정착하였는데 이후의 행적은 기록에 전하지 않는다. 동로마 제국의 사절단으로서 아틸라를 직접 알현했던 프리스쿠스의 기록에 의하면, 아틸라는 아들들에게 무심했지만 에르나크에게만은 한없이 자애로웠다고 하는데, 일찍이 그는 '아틸라 일가는 몰락하겠지만 막내아들에 의해 가계가 이어질 것이다.' 하는 점괘를 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점괘가 맞았다.

허무한 죽음을 맞음으로써 훈족은 급격히 몰락했고 직접 로마 제국을 멸망시키지는 못했지만, 아틸라 사후 20년 만에 서로마 제국은 멸망하게 된다.

3. 인격

3.1. 사람됨과 인품

후대의 기록에 보이는 아틸라의 성품은 의외로 관대함과 소박함, 그리고 잔혹함과 교활함이 공존하는 복합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 후대의 많은 정복군주들처럼 매우 현실주의적인 성격이었으나 세상을 전란에 빠뜨린 장본인인지라 긍정적인 기록은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그러나 이런 기록들에서도 아틸라가 지닌 의외의 면모를 약간은 찾아볼 수 있다.

《비잔티움사(History of Byzantium)》를 편찬한 것으로 유명한 동로마의 역사가인 프리스쿠스는 449년에 동로마의 사절 중 한 사람으로서 훈족에 파견된 일이 있었다.[18] 당시에 프리스쿠스는 다른 사절들과 함께 아틸라의 연회에 초청받았는데, 그곳에서 목격한 아틸라의 모습과 행동거지를 상당히 자세히 묘사한 바 있다.

프리스쿠스의 묘사에 따르면, 아틸라의 용모는 당시 동로마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에 추하고 매력이 없는 편이었다.[19] 그러나 프리스쿠스가 본 그의 몸가짐은 상당히 검소하고 절제적이며 또한 금욕적이었다. 프리스쿠스는 자신이 남긴 기록에서 훈족과 고트족을 모두 스키타이 혹은 야만인이라 칭하며 무시하였으나, 아틸라의 성품과 인격만큼은 의외로 상당히 높게 평가했다.

아틸라는 자신의 부하들과 사절단들에게는 값비싸고 귀한 음식들을 베풀었고, 금은으로 만든 화려한 술잔으로 대접하였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목기로 만든 접시와 술잔을 사용했으며, 연회 중에는 고기 몇 점을 먹었을 뿐 사치스러운 음식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그의 옷차림은 정갈하되 검소하고 소박해서, 옆구리에 검을 차지도 않았고, 또한 다른 훈족이나 고트족들과는 달리 부츠에 걸쇠가 걸려있지도 않았다. 또한 다른 이들이 보석과 귀금속으로 만든 말굴레를 사용했던 것과는 달리 아틸라 자신은 수수한 모양새의 말굴레를 사용했다고 한다.[20]

마찬가지로 프리스쿠스의 증언에 의하면,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라틴어와 훈어 및 고트어를 구사하며 재주를 부리던 난쟁이 광대인 제르코[21]의 재미있는 공연을 보고 자지러지게 웃는 와중에도 아틸라만큼은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고 묵묵히 구경만 하다가 자신이 특히 귀여워하는 막내아들인 에르나크가 걸어오는 것을 보고서야 겨우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22]

또한 앞서 이야기하였듯이 아틸라는 훈족의 통치 체계를 혁신하기 위하여 외국 출신의 인물들을 대거 등용하여 측근으로 삼았다. 이들은 자신들의 조국에서조차 받을 수 없던 대우를 아틸라에게 받았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충성을 다했다고 하였는데, 이를 보건대 사람을 다루는 능력도 상당히 출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런 면과는 별개로 전장에서는 그 누구보다도 잔혹한 인물이었다. 그는 동로마 원정 당시에 보여준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많은 병력을 동원하여 적을 천천히 짓밟는 전술을 구사하였다. 이는 도시 약탈과 파괴 및 무수한 살상을 동반하는 것이었다. 당시에 아틸라가 벌였던 전쟁의 참상은 그를 증오하던 로마인들이 기록한 것이 대부분인지라 과장되거나 왜곡된 내용도 일부 있는 듯하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해 보면 그만큼 당대인들의 시각으로도 아틸라의 전쟁 방식은 매우 참혹하고 잔인했던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3.2. 생김새와 인종 논란

훈족에 사절로 파견되어 직접 아틸라의 모습을 목격했던 동로마의 역사가인 프리스쿠스는 아틸라의 외모 자체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은 따로 남기지 않았다. 한편 요르다네스는 아틸라의 모습에 대하여, 작은 키(150cm 남짓)[23]에 어깨는 떡 벌어졌으며, 머리는 컸고, 눈은 깊이 들어가 박혔으며, 피부가 거무스레하고, 코는 납작했으며, 숱이 적은 턱수염을 길렀다고 묘사했다. 이런 상세한 묘사는 현존하지 않는 프리스쿠스의 기록을 참조한 내용이라고 본다.

아마도 오늘날의 관점으로도 그다지 잘생긴 용모와는 거리가 있었던듯 싶다. 다만 앞서 언급하였듯이, 프리스쿠스는 그 외모와는 별개로 아틸라를 검소하고 금욕적이면서도 가족들과 부하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훌륭한 성품으로 묘사하였다.

한편 요르다네스의 기록만 보면 튀르크계나 몽골계 중간쯤의 유목민 같아 보이지만 다른 유럽 지역의 여러 기록을 보면 오히려 아틸라와 훈족을 아리아계처럼 묘사한 기록도 있다. 훈족을 다룬 서양 측의 기록에는 동양인으로 추측되는 묘사가 많다. 그러나 동양 측에서는 서양인처럼 붉은 머리에 큰 코로 묘사하기도 한다. 훈족이 게르만족이나 로마인들과 싸울 당시 아틸라가 이끌던 훈족 기병 중에는 훈족에 복속된 게르만족 전사들도 많았다고 한다.

한편 2018년의 논문에 따르면 훈족 흉노족과 스키타이인의 혼혈이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아틸라가 유라시안이라 황인 같기도 하고 백인 같게도 보이는, 소위 말하는 '섞인' 외모가 아니었냐는 설이 있다.

4. 평가

4.1. 유럽에서

로마인들과 게르만족에게 아틸라와 그가 이끄는 훈족은 가히 공포이자 신이 내린 심판이었다. 이전의 유럽에서는 그토록 무자비한 학살과 약탈을 자행했던 족속들이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동안 로마인들 또한 수없이 많은 야만족과 싸워 왔으나, 아틸라처럼 한 지역을 타깃으로 삼아 완전히 초토화하는 악질적인 행동을 의도적으로 여러 차례 일삼는 경우는 흔치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당시 유럽인들은 아틸라와 그의 군대를 신의 심판이 현실화라고 묘사하였으며 아틸라를 '공포의 대왕'이라고 지칭하기도 하였다. 여기에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확산과 로마 제국의 쇠퇴, 이민족의 침략 등으로 인하여 신음했던 당시 사람들의 사고관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이쯤 되면 세상을 멸망시키기 위해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악마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 이후 후신이라고 할 만한 몽골 제국도 동유럽 침공 당시 비슷한 악명을 듣게 된다.

아틸라와 훈족들이 얼마나 무시무시했는지 유럽의 여러 전설에도 상당히 자주 등장한다. 게르만 계열 전설에는 위엄 있고 강대한 군주로 묘사되고[24], 바이킹 계열 전설에선 술고래 정도 이미지로 묘사된다. 참고로 바이킹들은 술고래와 대단한 전사를 동일시했다. 일례로 북유럽 신화에서 가장 강력한 전사인 토르는 술을 매우 잘 마시기로 유명하고 거인왕 로키와 주량으로 겨루기도 한다. 그리스도교 전설에서는 대단한 악당이면서도 교황 성 레오 1세가 신의 기적과 위엄을 설파하자 알아서 자리를 피하는 분별력이 있는 인물로 묘사한다. 당연히 이는 그리스도교의 프로파간다로, 실제로는 강화 협상으로 물러난 것이다.

한편, 아틸라의 공포성이 유럽권에 널리 각인되어 아틸라를 통칭하는 말인 '훈족의 아틸라(Atilla the Hun)'는 대체로 성격이 거칠고 포악한 사람을 이르는 은어나 수식어로 쓰였으니, 서양권에서 아틸라의 악명이 얼마나 자자했는지 짐작할 만하다.[25]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이 벨기에 학살을 벌였음을 두고 미국에서는 독일군을 훈족에 빗대었다.

4.2. 헝가리에서

유럽에서의 일반적인 평가와 달리 헝가리에서 아틸라는 국가적 영웅이다.[26] 12세기부터 이미 헝가리 왕족들은 아틸라의 후예라고 자칭했고, 헝가리의 전설에서는 아틸라를 훌륭하고도 고귀한 왕으로 묘사하였다. 헝가리에서는 '드디어 아틸라의 무덤을 찾았다!'는 기사가 여러 차례 올라온 적이 있고 가장 최근은 2014년이었다. # 물론 저 중에 진짜 아틸라의 무덤으로 밝혀진 것은 없다.

아틸라의 훈 제국의 수도가 헝가리 땅에 있긴 했다. 하지만 혈통적으로는 사실 헝가리인인 마자르족과 훈족은 별로 연관이 없다고 보는 게 일반적인 학자들의 의견이고, 따라서 다른 유럽 국가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헝가리인 중에서도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상당히 어이없어하는 경우가 많다. 어떻게 보면 페니키아와 혈통 상 전혀 상관없는 튀니지에서 한니발 바르카를 영웅시하고 중국에서 단순히 중원을 차지했을 뿐인 칭기즈 칸 쿠빌라이 칸을 중화 영웅으로 삼는 것과 비슷한 맥락인 셈.[27] 아무튼 다른 유럽 나라에서는 헝가리의 이런 주장을 기이하게 보는 편이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헝가리에서는 '다른 나라에서 뭐라고 왜곡하든 아틸라는 위대한 왕이며 헝가리의 조상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헝가리에서는 지금도 아틸라(Attila, 어틸러)라는 이름은 지금도 상당히 많이 쓰이는 이름이다. 2014년 출생자 기준으로는 남자 이름 중 아틸라는 26위. 기독교권에서 가장 흔한 이름인 요한의 헝가리어인 야노시(János)보다도 많다. 한국도 그렇지만 전통적으로 흔했던 이름들이 현대에는 사장되는 추세인 국가가 많다.

4.3. 튀르키예에서

이스탄불의 아틸라 흉상.

튀르키예에서도 튀르크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아틸라가 위대한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아틸라 치세의 훈 제국이 오스만 제국 이전에 유럽 정복에 적극적으로 나선 튀르크계 국가라는 점에서 튀르키예인들에게 아틸라는 튀르크족의 유럽 정복의 선구자로 여겨진다. 이 때문에 튀르키예에서도 아틸라라는 성이나 이름이 흔한 편이다.

4.4. 몽골에서

몽골인들은 자신들을 흉노의 후예라고 여기는데[28] 이들은 훈족이 흉노의 후예라는 설도 사실로 여기므로 훈족 또한 자신들의 역사로 여겨 헝가리인들 및 튀르키예인들과 마찬가지로 아틸라를 위대한 영웅으로 추앙한다. 다만 아무래도 아틸라가 몽골 초원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유럽 땅을 다스렸던 군주인지라 몽골 초원을 다스렸던 묵돌선우, 칭기즈 칸 등에 비하면 덜 존경받는 감이 있다.

5. 창작물에서

위의 각주와 같이 아틸라의 외모, 인종에 다룬 기록이 부족한 이유로 현대의 여러 작품들에서는 그 생김새가 다양하게 묘사된다.
  • 1954년 작 영화인 《아틸라(Attila)》에서는 당대의 명배우였던 안소니 퀸 소피아 로렌이 각기 아틸라와 호노리아 공주를 연기했다. 실제 역사와는 다른 점이 많아서 아에티우스가 아틸라를 상대로 분전하다가 최후를 맞이하며 호노리아 또한 로마군에게 살해당한다. 작중에서 아틸라는 로마를 정복하기 위해 자신의 뜻에 반대하는 형인 블레다를 제거하는 등 비정하고 잔혹한 인물로 묘사되지만, 한편으로는 어린 아들의 죽음에 절망하는 등 인간적인 모습도 조금 묘사된다. 최후에 아틸라는 서로마를 거의 정복하기 일보직전까지 갔으나 교황 레오 1세와 만나 기독교적인 기적을 체험한 후 스스로 물러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1956년에 한국에서도 개봉되었으나 당시의 한국에서는 아틸라라는 인물이 너무나 생소한지라 《침략자》라는 제목으로 개봉하였으며 80년대에는 《로마제국의 최후》라는 제목을 달고 비디오로 출시되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2019년에 국내에서 다시 《아틸라》라는 제목의 DVD로 출시되었다.
  • 2001년 작 미니시리즈인 《훈족의 아틸라(Attila the Hun)》에서는 제라드 버틀러가 아틸라를 연기했다. 작중에 등장하는 아틸라와 훈족의 모습은 백인과 같은 외모로 묘사되며, 영화 내용이나 전개가 매우 우수하나 작중 로마군 고증이 완전 개판이다. 기원후 5세기인데 로마 군단병들의 복장이 무려 400년 전에 입었던 로리카 갑옷이다. 사실 1~2세기에도 로리카 세그먼타타는 결코 로마군이 일괄적으로 입었던 제식 무장은 아니었다. 영화적 묘사와 달리 고대 군대에 복장통일 따위는 없었다. 이 영화에서 아틸라는 전쟁신의 검을 얻고 블레다를 내쫓아 훈족의 왕이 되지만, 카탈라우눔에서 검이 부러지는 바람에 전투에서 패한다. 그 후 일디코와 재혼하지만,[29] 일디코는 훈족에게 몰살당한 부족 출신이었고 결국 아틸라는 일디코에게 독살당한다.
  • 아틀란티카》에서는 아틸라를 모델로 용병을 만들었는데 용병 성별 균형을 맞추려는 이유 때문인지 여체화해 등장했다. 다만 용맹한 여전사의 이미지가 상당히 부각된 탓에 이건 여캐가 아니고 남캐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호불호가 갈리는 편이다.
  • 임페리얼 가드》의 스페셜 캐릭터 모굴 카미르는 아틸라의 패러디다. 아예 그가 살던 행성 이름 자체가 아틸라다.
  • 문명 5》 확장팩 신과 왕에서 부디카와 함께 커버 이미지를 장식했으며 훈족 문명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아틸라는 중앙아시아 계열의 유목민 모습으로 표현되며, 시도 때도 없이 전쟁할 정도로 전쟁을 좋아하는 성향의 지도자이면서 도시를 다른 지도자들보다 빠른 속도로 잿더미로 만들 수 있는 특성이 있다. 여담으로 그의 훈족 문명에 관련된 음악은 모두 흉노에 관련된 '이릉사한'의 멜로디에 기초한다. 가끔 AI가 너무 호전적이어서 주변 국가와 도시국가들에 선전포고하며 어그로 끌다가 주변 문명에게 역으로 다구리 맞아 멸망하는 일도 있다. 물론 그 전에 공성추러쉬로 개작살내는게 대부분이지만... 인게임에서 아틸라는 추바시어를 사용하는데 훈족의 언어를 고증할 수 없기 때문에 튀르크계인 추바시인의 언어를 사용했다. 여담으로 훈족의 수도명 또한 아틸라의 궁정(Attila's Count)로 나온다.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정복자》에선 캠페인 미션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미션 제1편과 제6편에서 직접 조종 가능한 영웅 유닛으로도 나온다. 근데 훈족의 특수 유닛인 타칸이 아니고 비잔틴의 카타프락토이 베이스 유닛으로 나온다. 어? 능력치도 센 데다가, 카타프락토이라서 창병에게 보너스 데미지가 안 박힌다. 같은 카타프락토이 영웅인 벨리사리우스조차도 창병한테 죽는 걸 생각하면 메리트. 참고로 이 캠페인의 화자는 아틸라의 군세에 포로가 되어 옆에서 아틸라를 지켜봤던 한 성직자인데, 마지막에 해골을 바라보며 "그때가 그리워..."라는 상당히 오싹한 발언을 한다. 다만, 결정판에선 고유 유닛으로 승격한듯, 카타프락토이와 다른 외관으로 변했다.
  • 크리에이티브 어셈블리》의 < 토탈 워: 아틸라>에서 주인공이자 지옥에서 기어나온 대마왕으로 등장. 다만 시대적 문제로 인해 훈족의 초기 지도자는 아틸라가 아니다. 유닛들의 모델링, 게임의 OST 등 전반적인 컨셉으로 알 수 있듯이 이번 편의 유목제국 팩션[31]들은 중앙아시아계 유목민을 모티브로 하여, 흑발 직모에 누런 피부, 째진 눈과 커다란 광대를 지닌 모습으로 나온다. 하지만 아틸라만큼은 곱슬머리 튀르크계 유목민의 모습에 유럽식 왕관을 쓰고 있는데, 북유럽 전설에도 등장하는 만큼 유럽인들에겐 오랜 시간에 걸쳐 지역화되고 대중화된 캐릭터다 보니, 고증과 상관없이 유니크 스킨(...)이 적용된 것으로 보인다. 성우는 그리스 출신 배우 파노 마스티(Pano Masti). 성우는 그리스인인데, 캐릭터는 그리스에 패악질을 하고 돌아다닌다[32]
    작중에서는 거의 주인공에 가까운 캐릭터인만큼, 아틸라가 탄생하면 관련 시네마틱 영상이 뜨는 등 대접이 후한 편이다.[33] AI가 훈족을 잡고 있는 상태에서 아틸라가 즉위하게 되면 군대의 유지비를 -100%로 삭감해버리는 엄청난 버프를 준다. 반면에 플레이어가 훈족을 잡을 때에는 그런 버프가 없다.
  • 다잉라이트에 이름이 비슷한 사람이 나오는 바람에 자기의 명을 거역한 좀비들의 사지를 찢는다는 드립이 나왔다
  • Fate 시리즈》에 세이버 클래스로 TS되어 등장했다. 알테라 항목 참조. 정식 오픈 전 PV때부터 진명이 아틸라일 것이라는 추측이 많았는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캐릭터성과 과거 등은 많이 어레인지 되어서 원전의 기록과는 달리 사지를 찢지도 않고 천연 속성으로 변했다. 대신 만화로 보는 페그오에서는 시도때도 없이 가챠나 랭킹전 등을 나쁜 문명으로 규정하여 파괴한다 그리고 니벨룽의 노래의 에첼 이야기도 Fate 세계관에서는 정사가 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정략결혼 상대인 크림힐트도 나왔는데, 둘은 서로 기억이 잘 나지 않으며 어쩌면 카게무샤끼리 결혼했을 수도 있다고 언급한다.

[1] 어틸러 훈 키라이 [2] 블레다가 사망한 후 아틸라의 단독통치를 기준으로 한 기간. 루아가 사망한 후 아틸라가 블레다와 공동통치를 했다는 가설이 사실이라면 재위기간이 435년으로 앞당겨질 수 있다. [3] 사실 역사 속의 유명한 군주들이 권좌에 오르기 전에도 실권을 쥐고 있었으리란 가설은 후세 사람들에게는 꽤 매력이 있어서인지 람세스 2세도 파라오가 되기 전 아버지와 공동으로 통치했을 것이라는 설이 있었다고 한다. [4] 그는 본래 로마인이었기에, 아틸라가 죽은 후에는 다시 서로마로 돌아와서 실권자로 행세했다. 재미있게도 오레스테스의 아들인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는 훗날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으나 결국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폐위되었다. [5] 어째서 비길라스가 이런 의심을 사기 딱 좋은 짓을 했는지는 의문이다. 술김에 생각 없이 내지른 말일 수도 있겠지만, 애당초 훈족에게 좋지 않은 감정이 있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둘 만하다. [6] 나이수스는 본래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출생지로 유명한 곳이었으나, 443년경에 블레다의 공격을 받아 과거의 영광은 온데간데없이 초토화된 상태였다. 동로마 사절단의 일원이던 프리스쿠스의 기록에 따르면, 한때 기념물이 세워졌던 도시는 폐허가 되었고, 죽은 이들의 해골이 도처에 널렸으며, 젊고 건장한 이들은 모두 도망치는 바람에 노약자들만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7] 심지어 어떤 곳에서는 여자들을 보내서 시중을 들게 하였다고 한다. 사절단도 이것만큼은 부담스럽게 여겨서 정중히 거절하였다. [8] 프리스쿠스의 묘사에 따르면, 이 궁전은 나무로 지어졌다고 한다. [9] 이는 호노리아의 어머니였던 갈라 플라키디아의 입김이 거세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딸의 목숨을 보존시키는 동시에 서로마 정계에서 영향력을 완전히 없애버리기 위해서였다. [10] 이후 호노리아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다. 설마 살아남았다고 하더라도, 훗날 발렌티아누스가 시해당했을 당시에 함께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 [11] 당시 아틸라가 직접 거느린 군대에 훈족 기병은 이미 아르메니아로 보냈기 때문에 그다지 많지 않았고, 대부분은 훈족의 세력권에 편입된 여러 민족들로부터 끌어모은 병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원래 중앙아시아의 기마민족들은 인구가 적었기 때문에, 아틸라뿐 아니라 훗날 몽골 제국도 이런 식으로 세력권 현지인을 동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12] 아틸라조차도 아에티우스가 자신을 공격하지 않고 물러난 것을 의아하게 여겼다고 한다. 아틸라는 이를 함정이라 생각하여 서고트족이 물러난 후에도 한동안 진을 거두지 않으며 방어선을 유지했다고 한다. [13] 아퀼레이아는 상당히 번영한 도시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당시 아틸라의 공격으로 인하여 완전히 쑥대밭이 되는 바람에 오늘날까지도 이전의 영화를 되찾지 못하였다. [14] 정확한 정체는 미상이다. 부르군트 출신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딱히 근거는 없다. [15] 아틸라는 이미 그 이전에도 수차례 결혼하여 많은 아내들을 두었다고 한다. 보통 이런 결혼은 부족과 선린우호와 연합을 위해 하는 정치적인 경우가 많고 일디코도 마찬가지. [16] 지도자가 죽었을 때 장례식에서 부하들이 스스로 얼굴에 상처를 내서 피를 내는 관습은 유라시아의 다른 유목 민족들에게서도 종종 볼 수 있다. [17] 엘라크를 무찌루고 훈족의 본거지를 차지한 게피드 족 또한 동고트에게 패배하면서 남쪽으로 밀려나 쇠퇴하게 되었다. [18] 앞서 언급했던, 동로마 황제가 몰래 자객을 끼워 넣어서 보냈던 바로 그 사절단의 일원이었다. [19] 사실 이 부분은 현존하는 프리스쿠스의 기록에는 없다. 다만 요르다네스가 아틸라의 외모를 묘사한 대목에서 프리스쿠스의 기록을 참고했으리라 보는 것이 다수의 견해이다. [20] 역사학자 피터 히더는 이런 아틸라의 검소함에 대하여, 스스로 세속적인 욕망에서 벗어난 초월적인 지도자라는 점을 부하와 로마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연출한 것이 아니었을까 추측하기도 하였다. 이런 점은 마케도니아/ 헬레니즘 제국 알렉산드로스 대왕과도 닮았다. [21] 이 인물은 아틸라의 형인 블레다의 총애를 받던 훈족의 궁중 광대였다. 아틸라는 제르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는지 후에 그를 추방하였다. [22] 프리스쿠스에 따르면, 아틸라는 자신의 다른 아들들에게는 별다른 애정을 표하지 않았으나 에르나크만큼은 예외적으로 각별히 애정을 표했다. 이는 에르나크가 훗날 위기에 처한 훈족의 명맥을 이어나갈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 예언은 기묘하게 적중해서, 아틸라 사후에 훈족이 사분오열할 당시 아틸라의 다른 아들들인 엘라크와 뎅기지크는 각기 게피드와 동로마와의 전투에서 전사하였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에르나크는 결국 동로마에 항복하여 다뉴브의 작은 영지를 받고 그곳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냈다. [23] 출처 [24] 대표적으로 니벨룽의 노래, 에첼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25] 아틸라와는 역사적인 접점이 없는 멕시코에서도 혁명가 에밀리아노 사파타를 싫어했던 대지주들은 그를 남쪽의 아틸라(El Atila del Sur)로 불렀다. [26] 아틸라를 패배시킨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는 아틸라와는 반대로 유럽에서의 일반적인 평가가 매우 좋지만, 헝가리에서는 자국의 영웅인 아틸라에게 패전이라는 굴욕을 준 적의 수괴 마왕으로 여겨진다. 후술할 튀르키예에서 아에티우스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다. [27] 그나마 쿠빌라이 칸은 명분이 아주 없지만은 않다. 칭기즈 칸은 중화문명에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쿠빌라이 칸은 분명하게 중국식 천자가 되고 싶어 했고, 실제로 중국식 국호인 '원(元)'이라는 국호를 따로 만들어 황제가 되었다. 아예 그를 시작하여 천원제까지 모든 몽골의 대칸은 대칸 칭호와 함께 중국식 황제 칭호를 같이 가졌다. 즉, 쿠빌라이 칸은 몽골의 대칸임과 동시에 중국의 황제였던 셈이다. 하지만 칭기즈 칸은 중국 정복을 시도한 것과 사후 원나라 황제로 추존된 것을 제외하면 정말로 중국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 그나마 몽골족이 나라 없는 민족이라면 모르겠는데 그것도 아니고.. 물론 내몽골은 중국 소속이긴 하다만. [28] 다만 유전적으로 몽골족은 흉노보다는 흉노에게 복속되었던 동호와 더 가까운 계열로 밝혀졌다. 그래도 일단 흉노가 몽골초원을 통치하긴 했으며, 한참 후인 몽골 제국 시절 동호의 후예인 몽골족과 흉노의 후예인 튀르크 제민족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혼혈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래서 현대 몽골족 중 몽골초원 서부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생물학적으로 튀르크 제민족 혈통이 강한 편이다. [29] 첫째 부인은 아틸라와 블레다의 결투가 벌어질 무렵 죽었다. [30] 1870년 작품 [31] 훈족 백훈족 외에도 이아지게스, 록솔라니, 부디니, 사비르, 아바르, 마자르가 있다. [32] 공교롭게도 자신들이 훈족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헝가리와 터키는 역사적으로 그리스가 속한 정교회 문화권과 대립했던 나라이기도 하다. [33] 영상 속의 구절인 "아틸라는 어둠과 절망 속에서 태어났다네"라는 구절은 토탈 워 유저들 사이에서도 종종 회자되는 문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