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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원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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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간문제 효원제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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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C499><colcolor=#ece5b6>
소량 제3대 황제
효원제 | 孝元帝
출생 508년 9월 16일
소량 단양군 건강현
(現 장쑤성 난징시)
즉위 552년 12월 13일
소량 강릉
(現 후베이성 징저우시)
사망 555년 1월 27일 (향년 47세)
소량 강릉 동각죽전
(現 후베이성 징저우시)
능묘 영릉(潁陵)
재위기간 소량의 황제
552년 12월 13일 ~ 555년 1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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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c499><colcolor=#ece5b6> 본관 난릉 소씨
역(繹)
부모 부황 고조 무황제
모후 문선태후
형제자매 8남 6녀 중 7남
배우자 부인 7명
자녀 6남 4녀
아명 칠부(七符)
세성(世誠)
작호 상동군왕(湘東郡王)
묘호 세조(世祖)
시호 효원황제(孝元皇帝)
연호 승성(承聖, 552년 ~ 55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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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초기 행적2.2. 재위
3. 사후4. 평가5. 후예와 여담6. 가족7. 매체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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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남북조시대 양나라(梁)의 3대 황제.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효원황제(孝元皇帝). 휘는 소역(蕭繹). 자는 세성. 아명은 칠부. 재위 기간 동안 승성(承聖)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2. 생애

2.1. 초기 행적

천감 7년(508년) 8월 6일(508년 9월 16일)에 태어났으며 양무제 소연과 원영영[1] 사이에서 태어난 7남이다. 7살에 상동왕에 책봉되었다.

태청 원년(547년) 정월, 형주, 옹주 등 9주 군사 도독을 맡고 형주 자사가 되었으며 태청 3년(549년), 하남왕 후경이 대란을 일으키고 소연을 유폐시켰다가 소연이 굶어 죽자 소역은 작은 아들을 우문씨가 권력을 잡고 있던 서위에 볼모로 보내고, 고씨의 북제와 화의를 맺었다. 이에 서위는 볼모를 받지 않고 형제 관계를 맺길 원했고 북제는 소역을 양나라 상국으로 임명했다. 6월, 소역은 후경을 토벌할 작정으로 군대를 모집하고 하동왕, 상동자사였던 소예[2]에게 3번이나 사람을 보내 식량을 빌려달라고 했다. 하지만 소예가 모두 거절하자 소역은 무력으로 소예를 공격했다. 이에 소예의 아우였던 악양왕, 옹주자사 소찰[3]은 소역의 근거지였던 강릉을 공격해서 형 하동왕 소예를 구원하려다가 오히려 패배하고 도망쳤다. 그래서 소찰은 서위에 구원을 보내 번국이 되기를 원했다.

대보 원년(550년) 4월, 평남장군 왕승변이 장사를 함락시키고 소예를 죽였다.

대보 2년(551년) 6월, 후경은 파릉에서 대패하고 건강으로 도주했으며 소역은 군사를 이끌고 계속 추격했다. 7월, 후경은 간문제 소강을 협박하여 예장왕 소동에게 양위하게 하고 소동을 황제로 세웠다가 11월, 소동을 폐하고 스스로 한(漢)나라 황제가 되었다.

대보 3년(552년) 3월, 왕승변과 시흥 태수 진패선의 공격을 받고 후경은 가죽 주머니에 두 아들을 넣어 동쪽으로 달아났다. 배를 타고 장강을 건너 북쪽으로 도주할 생각이었지만 추격병이 계속 쫒아왔다. 이에 빨리 도주하기 위해 자기 자식들을 강물에 집어 넣고, 나름대로 오래 갔지만 지쳐 잠든 사이에 부하들에게 살해당했다.

후경의 부하들은 그의 시체를 소금에 절인 후, 그의 처자와 함께 건강으로 보냈다. 왕승변은 후경의 머리를 베어 강릉으로 보내고 그의 팔은 북제(北齊)로 보냈다. 이는 후경이 북제의 전신인 동위(東魏)에서 반역하여 이탈한 장수이므로 북제와의 화평을 위해 그를 죽였다는 증거로 보낸 것이다. 그리고 후경의 시체는 건강 거리에 매달아놓았으며 그의 처자는 모두 참살되었다. 매달아놓은 그의 시체는 백성들이 달려들어 붙어 있는 살을 모두 뜯어먹었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왕망보다 더 처참했다. 늦게 도착해 살을 먹지 못한 백성들은 억울해하다가 남은 뼈를 불태워 물에 태워 마실 정도로 후경에 대한 적개심은 대단했다. 후경의 머리는 강릉에 있던 소역이 받아서 후경에 의해 폐위당하여 비참하게 아사한 아버지 무제 소연의 원혼을 달래는 제물로 사용되었다. 그 다음에는 3일 동안 강릉 거리에 매달았다가 삶아서 색칠한 다음 무기 창고에 보관했다. 이것은 후경이 저지른 악업의 크다큰 대가였다.

후경의 난은 평정되었으나, 양나라의 국력은 크게 쇠약해지고, 영토의 반 이상이 서위와 북제에 넘어갔다. 파촉 지방, 형주 지방, 장강 이북 지방을 서위와 북제에 상실함으로써 영토는 장강 이남으로 한정되었다.

4월, 황제를 칭했던 무릉왕, 태위, 익주 자사 소기는 소역에게 화해를 구걸했으나, 거절당하고 7월에 토벌을 당한 후에 다음해(553년) 피살되었다.

2.2. 재위

11월, 소역은 강릉에서 황제에 즉위하고 폐허가 된 수도 건강 대신에 자신의 근거지 강릉으로 천도했다. 그는 강릉을 건강을 모델로 그대로 개축했는데 성벽의 표격, 대전, 성문 이름까지 모두 건강과 같았다. 그는 효성이 지극해 아버지가 죽은 정전에서 일을 보지 않고, 용광전에서 업무를 처리했다.

승성 2년(553년) 3월, 서위(西魏)의 사신을 접견했다. 하지만 대우가 북제의 사신보다 못하다는 구실로 서위의 승상이자 권력자였던 우문태는 불만을 품었다. 이를 구실로 살해당한 소예의 동생이었던 옹주 자사 소찰의 지지와 지원하에 50,000명을 출병시켜 원제 소역을 공격했다. 소역의 조카뻘이었던 소찰은 강릉과 가까운 요충지 양양을 서위에게 스스로 바치고, 서위군과 함께 형주 강릉을 공격해왔다. 소역은 진양문에서 열병하고 비파문으로 친히 나가 항전하였다.

승성 3년(554년) 11월, 강릉이 포위되고 외성 서문이 열려서 서위군이 들어오자 소역은 절망하며 "10,000권의 책을 읽고 오늘 이렇게 일생을 마치는구나. 죽을 바에 책들이 무슨 소용인가? 문무의 도가 오늘 밤에 끝장나는구나."라면서 내성 안 동죽각전에 비치된 고금도서 14만 권을 모두 불살라 없애고[4] 내성으로 퇴각했다. 이것은 진시황 분서갱유보다 심하고 항우 함양 파괴[5]에 비견할 만하다. 결국 12월, 내성마저 함락되면서 사로잡혀 궁중 주의고에 구금되었다가 머지않아 소찰의 지시에 의해 결국 피살되었다{승성 3년(554년) 12월 19일, 555년 1월 27일}. 소찰은 천으로 그의 몸을 감아 부들돗자리에 싸고 흰 띠로 묶어 강릉 진양문 밖에 매장했으며 그가 죽을 때의 나이는 47세였다. 황제 임에도 불구하고 천으로 싸인 돗자리로 감싸 매장된 것은 그의 최후가 얼마나 비참했는지 보여준다.

3. 사후

서위는 소찰을 황제로 세우고 강릉성을 두 구역으로 나누어 동쪽에는 소찰을 거주하게 하고, 서쪽은 강릉 총관이 지휘하는 서위군을 주둔시키면서 서위의 괴뢰 국가 후량을 탄생시켰다. 나중에 서위가 멸망하고 우문씨의 북주가 들어섰지만 서위의 역할은 그대로 북주에게 계승되었다. 북주에서 사신을 보내 사소한 일로 소찰을 꾸짖자 소찰은 충격으로 병을 얻어 죽었다. 소찰의 아들 소규가 즉위하자 북주와 관계가 좋아지면서 신뢰를 얻어 서쪽에 있던 강릉 총관과 북주군은 철수했다. 그러나 북주가 멸망하고 양씨의 수나라가 들어서고 소규의 뒤를 이은 소규의 아들 소종 때 수나라는 다시 강릉 총관과 병력을 주둔시킨다. 결국 수나라는 남조의 진나라를 치기 앞서 군대를 보내 후량을 멸하면서 양나라는 완전히 사라진다. 그 후 수말당초 양의 황족 소선 등에 의해서 양나라 부흥 운동(후소량)이 전개되었으나, 당나라가 세워지면서 모두 진압되어 후소량마저 멸망된다.

4. 평가

소역은 어려서부터 총명해서 이미 대여섯 살 때부터 사서오경을 암송하여 무제 소연의 칭찬을 받았다. 장성해서는 많은 책을 읽었고, 눈병으로 한쪽 눈을 잃고도 그만두지 않았다. 또 책 수집을 즐겨 많은 책들을 모아 창고에 보관했는데 이것은 그의 만행으로 없어졌다. 그래서 중국사를 공부하는 사람 가운데는 "무능한 주제에 죽을 때는 혼자서 죽을 것이지 귀중한 책들은 왜 태우느냐?"며 그를 비판하는 사람이 적지 않고 일각에선 소량 최악의 황제로 칭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다만 위진남북조시대의 주요 기록과 도서들은 당말 황소의 난 당시 황소 880년 장안에 입성하고 당 황실의 도서관이 파괴되어서 상당히 사라졌다고 신당서 예문지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문헌파괴를 소역의 탓으로만 돌릴순 없다.

서화, 문장에 뛰어나 저작을 남겼으며 조서도 붓만 들면 바로 완성했다. 현재 남아있는 〈양직공도〉가 그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단, 소역이 그린 원본은 소실되었고 북송 시대인 1077년의 난징박물원 소장 모사본만 현전한다.[6] 역대제왕도권〉으로 유명한 나라 화가 염입본도 양직공도로부터 영감을 얻어 〈 왕회도〉라는 그림을 그린 바 있다.

하지만 나약하고 원대한 계획이 없었으며 의심이 많고 과단성이 없었다. 황로 사상을 숭상해서 강릉이 서위군에게 포위됐을 때도 태평스럽게 < 노자>를 강의하여 백관들은 갑옷을 입고 그의 강의를 들어야 했다. 또 여색은 즐기지 않았지만 미신을 깊이 믿어 금기하는 것이 많았다. 벽이 무너지거나 집이 기울어져도 때가 아니라는 이유로 수리를 미뤘다. 억지로 꾸미는 것을 좋아하고, 시기심이 많았으며 잔인했다. 강릉이 포위당했을 때 감옥에는 수천 여명의 사형수들이 갇혀 있었는데 관원은 그들을 풀어 군사로 충당시키고, 무기를 주어 싸우게 하자고 건의했으나 오히려 그들을 모두 몽둥이로 때려 죽이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원제 소역이 곧 죽는 바람에 이것은 집행되지 않았다.

5. 후예와 여담

소역의 아들들은 소역과 함께 대부분 서위군 또는 후경에게 피살되었거나 아니면 요절했다. 원제 소역의 남자 자손 중에 살아남은 사람은 소역의 장남 소방등의 외아들이었던 손자 소장이다. 소장의 아들이자 소역의 증손자가 훗날 당태종 시절 감찰어사를 지냈던 소익이다. 당 태종은 왕희지 글씨 매니아였는데 그 중 1품이라는 난정서를 얻고 싶어했다. 사실 난정서는 왕희지 사후 대대로 후손에게 전해져 오다가 7대손이었던 지영에게 귀속되었다. 지영은 영흔사 승려였기 때문에 그가 100세의 나이로 입적하자 난정서는 그의 제자 변재가 가지게 되었다. 변재는 나름 스승의 가보이자 유품을 지키기 위해 상자에 넣고 영흔사 대들보에 몰래 구덩이를 파서 숨겨두었다. 마침 월주 영흔사 변재 선사가 이를 가지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그래서 그를 불러 캐물었으나, 그는 자신의 스승 지영이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모른다고 시치미뗐다. 당 태종은 그의 의도를 깨달았지만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일단 돌려보내고 신하들과 의논했다. 이에 방현령은 소익을 추천했다.

소익은 영흔사로 가서 변재를 만나 바둑, 거문고, 투호 등 잡기로 그와 금방 친해졌다. 소익은 자주 영흔사에 방문하면서 친분이 어느 정도 쌓이자 자신의 증조 할아버지 소역이 그린 양직공도를 꺼내 서화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소익은 난정서 이야기로 화제를 옮겼고 소익은 계속된 전란으로 난정서가 사라졌다는 결론을 내렸다. 결국 변재는 도발에 걸려서 스스로 꺼내서 보여주고 말았다.

이에 변재가 잠시 절을 비운 사이에 칙명을 빌미로 난정서를 받아내고, 이것을 장안으로 급히 보냈다. 이 공으로 소익을 추천한 방현령은 금채 1,000단을 받았고 소익은 원외랑으로 승진하며 많은 상품과 장원, 저택을 받았다. 변재는 황제를 속인 죄가 있었으나, 80이 넘은 고령이었고, 난정서를 얻은 기쁨에 겨워있던 당 태종은 용서하고 오히려 비단 3,000단과 쌀 3,000석을 값으로 쳐주었다. 하지만 변재는 그것을 3층 보탑 건립비로 사용하고, 스승의 유품을 잃은 자신을 책망하며 식음을 전폐하다가 머지않아 숨을 거두었다. 그 후 난정서는 당 태종의 소릉에 배장되었으나, 훗날 당나라 멸망 후 군벌 온도가 도굴하면서 유실되고 말았다.

6. 가족

원제에게는 정비 서씨[7]와 귀빈(貴嬪) 왕씨(王氏), 귀인(貴人) 원씨(袁氏), 귀비(貴妃) 하씨(夏氏), 양인(良人) 왕씨 등의 후궁이 있었는데, 서씨의 경우 얼굴이 박색이라는 이유로 3년에 한 번 정도밖에 찾지 않을 정도로 멀리했다. 이에 서씨는 원제가 행차한다는 말을 듣고 얼굴 화장의 반을 지우고 원제를 맞았고, 원제가 왜 얼굴 반쪽만 화장했느냐고 물었더니 " 당신은 어차피 눈도 하나밖에 없어서 내 얼굴 다 못 볼 텐데 얼굴 다 화장해서 뭐하나요."라고 울분에 찬 대답을 해 원제의 분노를 샀다.

또 서씨는 술을 좋아해서 원제의 옷에 구토를 한 적도 있고 원제가 멀리하는 후궁과는 자주 술을 마시며 가깝게 지냈지만 원제의 총애를 받아 그의 아이를 낳은 후궁은 자신이 칼을 들고 찾아가 상처를 입히기도 했다. 후궁들만 찾는 원제에게 항의라도 하듯 형주(荊州)의 요광사(瑤光寺)라는 절에 있는 지원(智遠)이라는 승려와 사통하기도 했고, 남편의 측근으로 미남으로 소문이 자자하던 기계강(曁季江)에게 추파를 던지기도 했으며, 하휘(賀徽)라는 자의 용모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그를 보현니사(普賢尼寺)라는 절로 불러다 간통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후궁 귀빈 왕씨가 죽자 원제는 서씨 때문에 왕씨가 죽었다고 책임을 돌렸고, 서씨 소생의 아들인 소방등(蕭方等)까지도 아버지로부터 사랑받지 못했다. 소방등은 549년 후경의 토벌에 반대하던 상주자사 소예와 싸우다 패하고 죽었고, 이때 원제는 아들의 죽음에 별로 슬퍼하는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다고 한다. 아들이 죽은 것에 충격을 받아 병을 얻은 서씨는 아들이 죽은 해 5월에 원제로부터 자결을 명령받고 우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7. 매체

인지도는 낮지만 김용 무협소설 연성결에 등장한다. 직접 등장하지는 않고, 다만 그가 모았다는 보물을 찾기 위해 여러 인간쓰레기들이 싸우는 꼴이 나오는데 뒤끝 쩌는 그가 보물에 발라 놓은 독약으로 모두 죽고 보물에 손대지 않은 주인공 적운만 살아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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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6><tablewidth=100%><tablebgcolor=#000000> 11·12권 「후비전(后妃傳)」 ||
조안종 · 소문수 · 장애친 · 장궐 · 사마무영 · 호도안 · 원제규 · 노혜남 · 왕헌원 · 은숙의 · 하영완 · 심용희 · 왕정풍 · 진묘등 · 강간규 · 진법용 · 사범경 · 진도정 · 유지용 · 배혜소 · 왕보명 · 하정영 · 왕소명 · 유혜단 · 저영거 · 왕순화 · 장상유 · 치휘 · 왕영빈 · 정영광 · 완영영 · 서소패 · 장요아 · 심묘용 · 왕황후 · 유경언 · 심무화 · 장여화
13·14권 「송종실급제왕전(宋宗室及諸王傳)」
유도린 · 유도규 · 유의경 · 유준고 · 유의진 · 유의강 · 유의공 · 유의선 · 유의계 · 유소 · 유준(濬) · 유삭 · 유굉 · 유탄 · 유위 · 유창 · 유혼 · 유휴인 · 유휴우 · 유휴무 · 유휴업 · 유휴천 · 유이부 · 유휴범 · 유휴약 · 유자상 · 유자훈 · 유자방 · 유자욱 · 유자란 · 유자인 · 유자진 · 유자원 · 유자우 · 유자맹 · 유자운 · 유자사(劉子師) · 유자소 · 유자사(劉子嗣) · 유찬 · 유우 · 유홰 · 유숭 · 유희
15권 「유목지등전(劉穆之等傳)」 16권 「왕진악등전(王鎮惡等傳)」
유목지 · 서선지 · 부량 · 단도제 왕진악 · 주령석 · 모수지 · 부홍지 · 주수지 · 왕현모
17권 「유경선등전(劉敬宣等傳)」
유경선 · 유회숙 · 유수 · 손처 · 괴은 · 상정 · 유종 · 우구진 · 맹회옥 · 호번 · 유강조
18권 「조륜지등전(趙倫之等傳)」 19권 「사회등전(謝晦等傳))」
조륜지 · 소사화 · 장도 사회 · 사유 · 사방명 · 사령운
20권 「사홍미전(謝弘微傳)」 21권 「왕홍전(王弘傳)」 22권 「왕담수전(王曇首傳)」
사홍미 왕홍 왕담수 , 왕훈,
23권 「왕탄등전(王誕等傳)」 24권 「왕유지등전(王裕之等傳)」 25권 「왕의등전(王懿等傳)」
왕탄 · 왕화 · 왕혜 · 왕욱 왕유지 · 왕진지 · 왕소지 · 왕열지 · 왕준지 왕의 · 도언지 · 원호지 · 장흥세
26권 「원담전(袁湛傳)」 27권 「공정등전(孔靖等傳)」 28권 「저유지전(褚裕之傳)」
원담 공정 · 공림지 · 은경인 저유지
29권 「채곽전(蔡廓傳)」 30권 「하상지전(何尙之傳)」 31권 「장유전(張裕傳)」
채곽 하상지 장유 , 장승,
32권 「장소전(張邵傳)」 33권 「범태등전(范泰等傳)」 34권 「안연지등전(顔延之等傳)」
장소 범태 · 순백자 · 서광 · 정선지 · 배송지 · 하승천 안연지 · 심회문 · 주랑
35권 「유담등전(劉湛等傳)」 36권 「양흔등전(羊欣等傳)」 37권 「심경지등전(沈慶之等傳)」
유담 · 유열 · 고침 · 고기지 양흔 · 양현보 · 심연지 · 강이 · 강병지 심경지 · 종각
38권 「유원경전(柳元景傳)」 39권 「은효조등전(殷孝祖等傳)」 40권 「노상등전(魯爽等傳)」
유원경 은효조 · 유면 노상 · 설안도 · 등완 · 종월 · 오희 · 황회
41권 「제종실전(齊宗室傳)」
소도도 · 소도생 · 소요광 · 소요흔 · 소면 · 소경선 · 소적부 · · 소탄 · 소탄지
42·43권 「제고제제자전(齊高帝諸子傳)」
소억 · 소영 · 소황 · 소엽 · 소고 · 소장 · 소삭 · 소감 · 소봉 · 소예 · 소갱 · 소구 · 소현
44권 「제무제제자·제문혜제자·명제제자전(齊高帝諸子·文惠諸子·明帝諸子傳)」
소장무 · 소자량 · 소자경(卿) · 소자향 · 소자경(敬) · 소자무 · 소자륭 · 소자진 · 소자명 · 소자한 · 소자륜 · 소자정 · 소자악 · 소자문
소자준 · 소자림 · 소자건 · 소자하 · 소소수 · 소소찬 · 소보의 · 소보현 · 소보원 · 소보인 · 소보유 · 소보숭 · 소보정
45권 「왕경칙등전(王敬則等傳」 46권 「이안인등전(李安人等傳)」
왕경칙 · 진현달 · 장경아 · 최혜경 이안인 · 대승정 · 환강 · 초도 · 조무 · 여안국 · 주산도 · 주반룡 · 왕광지
47권 「순백옥등전(荀伯玉等傳)」 48권 「육징등전(陸澄等傳)」
순백옥 · 최조사 · 설연 · 우종 · 호해지 · 우완지 · 유휴 · 강석 육징 · 육혜효 · 육궐
49권 「유고지등전(庾杲之等傳)」 50권 「유환등전(劉瓛等傳)」
유고지 · 왕심 · 공규 · 유회진 유환 · 명승소 · 유이 · 유규
51·52권 「양종실전(梁宗室傳)」
소경 , 소매 소발 소앙 소욱, · 소의 · 소부 · 소창 · 소융 · 소굉 , 소정인 소정의 소정덕 소정립, 소수 · 소위 · 소회 · 소담
53권 「양무제자전(梁武帝諸子傳)」
소통 · 소종 · 소적 · 소속 · 소윤 · 소기
54권 「양간문제자·원제제자전(梁簡文帝諸子·元帝諸子傳)」
소대기 · 소대심 · 소대관 · 소대림 · 소대련 · 소대춘 · 소대성 · 소대봉 · 소대아 · 소대장 · 소대균 · 소대위 · 소대훈 · 소대구 · 소대흔 · 소대지 · 소대원 · 소방등 · 소방제 · 소방구 · 소방략
55권 「왕무등전(王茂等傳)」
왕무 · 조경종 · 조의종 · 석천문 · 하후상 · 길사첨 · 채도공 · 양공칙 · 등원기 · 장혜소 · 장징 · 풍도근 · 강현 · 창의지
56권 「장홍책등전(張弘策等傳)」 57권 「심약등전(沈約等傳)」 58권 「위예등전(韋叡等傳)」
장홍책 · 유역 · 정소숙 · 여승진 · 악애 심약 · 범운 위예 · 배수
59권 「강엄등전(江淹等傳)」 60권 「범수등전(范岫等傳)」 61권 「진백지등전(陳伯之等傳)」
강엄 · 임방 · 왕승유 범수 · 부소 · 공휴원 · 강혁 · 서면 · 허무 · 은균 진백지 · 진경지 · 난흠
62권 「하창등전(賀瑒等傳)」 63권 「왕신념등전(王神念等傳)」 64권 「강자일등전( 江子一等傳)」
하창 · 사마경 · 주이 · 고협 · 서리 · 포천 왕신념 · 양간 · 양아인 강자일 · 호승우 · 서문성 · 음자춘 · 두즉 · 왕림 · 장표
65권 「진종실제왕전(陳宗室諸王傳)」
진의 · 진상 · 진혜기 · 진창 · 진담랑 · 진백무 · 진백산 · 진백고 · 진백공 · 진백인 · 진백의 · 진백례 · 진백지 · 진백모
진숙릉 · 진숙영 · 진숙견 · 진숙명 · 진숙경 · 진숙헌 · 진숙제 · 진숙문 · 진숙달 · 진숙탄 · 진숙표 · 진숙웅 · 진숙중 · 진숙엄 · 진숙신 · 진숙우 · 진숙평 · 진숙오 · 진숙흥 · 진숙선 · 진숙목 · 진숙검 · 진숙징 · 진숙소 · 진숙광 · 진숙순 · 진숙모 · 진숙현 · 진숙륭 · 진숙영
진심 · 진장 · 진윤 · 진억 · 진언 · 진경 · 진건 · 진념 · 진지 · 진전 · 진번
66권 「두승명등전(杜僧明等傳)」
두승명 · 주문육 · 후진 · 후안도 · 구양위 · 황법구 · 순우량 · 장소달 · 오명철
67권 「호영등전(胡穎等傳)」
호영 · 서도 · 두릉 · 주철무(1) · 정령세 · 심각 · 육자륭 · 전도집 · 낙문아 · 손창 · 서세보 · 주부 · 순랑 · 주경 · 노실달 · 소마하 · 임충 · 번의
68권 「조지례등전(趙知禮等傳)」
조지례 · 채경력 · 종원요 · 한자고 · 화교 · 유사지 · 사기 · 모희 · 심군리 · 육산재
69권 「심형등전(沈炯等傳)」
심형 · 우려 · 부재 · 고야왕 · 요찰
70권 「순리전(循吏傳)」
길한 · 두기 · 신념 · 두혜도 · 완장지 · 견법숭 · 부염 · 우원 · 왕홍궤 · 심우 · 범술증 · 손겸 · 하원 · 곽조심
71권 「유림전(儒林傳)」
복만용 · 하동지 · 엄식지 · 사마경 · 변화 · 최령은 · 공첨 · 노광 · 심준(峻) · 공자구 · 황간 · 심수 · 척곤 · 정작 · 전완 · 장기 · 고월 · 척곤 · 왕원규
72권 「문학전(文學傳)」
구영국 · 단초 · 변빈 · 구거원 · 왕지심 · 최위조 · 조충지 · 가희경 · 원준 · 유소(昭) · 종영 · 주흥사 · 오균 · 유협 · 하사징 · 임효공 · 안협 · 기소유 · 두지위 · 안황 · 잠지경 · 하지원 · 서백양 · 장정견 · 완탁
73·74권 「효의전(孝義傳)」
공영 · 유유(瑜) · 가은 · 곽세통 · 엄세기 · 오규 · 반종 · 장진지 · 구걸 · 사각수 · 왕팽 · 장공 · 서경 · 손법종 · 범숙손 · 복천여 · 허소선 · 여제인 · 손극 · 하자평 · 최회순 · 왕허지 · 오경지 · 소예명 · 소교처양 · 공손승원 · 오흔지 · 한계백 · 구관선 · 손담 · 화보 · 해숙겸 · 한영민 · 유풍 · 봉연백 · 오달지 · 왕문수 · 악이지 · 손법종 · 유도민 · 등담공 · 도계직 · 심숭소 · 순장 · 길분 · 견염 · 조발호 · 한회명 · 저수 · 장경인 · 도자장 · 성경준 · 이경서 · 사린 · 은불해 · 사마고 · 장소
75·76권 「은일전(隐逸傳)」
도잠 · 종소문 · 심도건 · 공순지 · 주속지 · 대옹 · 적법사 · 뇌차종 · 곽희림 · 유응지 · 공기 · 주백년 · 관강지 · 어부 · 저백옥 · 고환 · 두경산 · 장영서 · 오포 · 서백진 · 심인사 · 완효서 · 등욱 · 도홍경 · 제갈거 · 유혜비 · 범원엽 · 유선 · 장효수 · 유승선
77권 「은행전(恩倖傳)」
대법흥 · 서원 · 완전부 · 기승진 · 유계종 · 여법량 · 여문현 · 여법진 · 주석진 · 육험 · 사마신 · 시문경 · 심객경 · 공범
78·79권 「이맥전(夷貊傳)」
임읍 · 부남 · 중천축국 · 사자국 · 고구려 · 백제국 · 신라 · · 부상국· 하남왕국 · 탕창 등지 · 무흥국 · 형옹주·예주만 · 고창 · 쿠처 · 우전국 · 파사국 · 연연
80권 「적신전(賊臣傳)」
후경 , 왕위, · 웅담랑 · 주적 · 유이 · 진보응
(1) 본명이 주철호(周鐵虎)로 당태조로 추존된 이호(李虎)를 피휘하여 무(武)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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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梁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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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4·5·6·7·8·9·10·11·12·13·14·15·16·17권 「무제기(武帝紀)」 18·19권 「간문제기(簡文帝紀)」
소연 , 소정덕, 소강
20·21권 「원제기(元帝紀)」 22권 「경제기(敬帝紀)」
소역 , 소동 소기 소연명, 소방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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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래는 석씨 성을 가진 궁녀로 무강후 석영보의 딸이었다. 남제 시안왕 소요광의 시첩이었다가 소요광이 죽자 동혼후 소보권의 후궁이 되었다. 그리고 소보권이 죽고 남제가 멸망한 후 소연의 후궁이 되어 아들을 낳자 소연이 무척 기뻐하며 '원'이라는 성과 '영영'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2] 무제 소연의 장남인 소통의 차남. [3] 소통의 3남. [4] 소역이 모두 정성들여 수집한 것으로 이 때 영원히 소실된 책들도 수없이 많았을 것이다. [5] 의외로 분서갱유의 피해는 심하지 않았다. 책을 수거하거나 불태웠어도 수거한 책은 함양에 학자들 연구 및 열람용으로 보관해주었는데, 문제는 나중에 항우가 함양을 통째로 불태워버렸다. [6] 비단에 그린 것으로, 원래는 25개국 사신을 그렸지만 일부만 남아 있어 현재 확인되는 것은 12개국이다. [7] 이름은 소패(昭佩), 즉 서소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