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서(宋書) | ||||
{{{#!wiki style="margin: -0px -10px; margin-top: 0.3px; margin-bottom: -6px" {{{#d1d5ef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본기(本紀)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181818,#e5e5e5 |
1·2·3권 「무제기(武帝紀)」 | 4권 「소제기(少帝紀)」 | 5권 「문제기(文帝紀)」 | |
유유(劉裕) | 유의부 | 유의륭 | ||
6권 「효무제기(孝武帝紀)」 | 7권 전폐제기(前廢帝紀)」 | 8권 「명제기(明帝紀)」 | ||
유준(劉駿) | 유자업 | 유욱(劉彧) | ||
9권 「후폐제기(後廢帝紀)」 | 10권 「순제기(順帝紀)」 | |||
유욱(劉昱) | 유준(劉準) | |||
※ 11권 ~ 40권은 志에 해당.
송서 문서 참고
}}}}}}}}}}}} - [ 열전(列傳) ]
- ||<-6><tablewidth=100%><tablebgcolor=#3f51ba> 41권 「후비전(后妃傳)」 ||
조안종 · 소문수 · 장애친 · 장궐 · 사마무영 · 호도안 · 원제규 · 노혜남 · 왕헌원 · 하영완 · 심용희 · 왕정풍 · 진묘등 · 강간규 · 진법용 · 사범경 42권 「유목지등전(劉穆之等傳)」 43권 「서선지등전(徐羨之等傳)」 44권 「사회전(謝晦傳)」 유목지 · 왕홍 서선지 · 부량 · 단도제 사회 45권 「왕진악등전(王鎮惡等傳)」 46권 「조륜지등전(趙倫之等傳)」 47권 「유회숙등전(劉懷肅等傳)」 왕진악 · 단소 · 상정 · 유회신 · 유수 조륜지 · 왕의 · 장소 유회숙 · 맹회옥 , 맹용부, · 유경선 · 단지 48권 「주령석등전(朱齡石等傳)」 49권 「손처등전(孫處等傳)」 50권 「호번등전(胡藩等傳)」 주령석 · 모수지 · 부홍지 손처 · 괴은 · 유종 · 우구진 호번 · 유강조 · 원호지 · 장흥세 51권 「종실전(宗室傳)」 유도린 · 유도규 · 유준고 52권 「유열등전(庾悅等傳)」 53권 「장무도등전(張茂度等傳)」 54권 「공계공등전(孔季恭等傳)」 유열 · 왕탄 · 사경인(1) · 원담 · 저숙도(2) 장무도(3) , 장영, · 유등지 , 유병지, · 사방명 · 강이 공계공 · 양현보 · 심담경 55권 「장도등전(臧燾等傳)」 56권 「사첨등전(謝瞻等傳)」 57권 「채곽전(蔡廓傳)」 장도 · 서광 · 부륭 사첨 · 공림지 채곽 58권 「왕혜등전(王惠等傳)」 59권 「은순등전(殷淳 等傳)」 60권 「범태등전(范泰等傳)」 왕혜 · 사홍미 · 왕구 은순 · 장창 · 하언 · 강지연 범태 · 왕준지 · 왕소지 · 순백자 61권 「무삼왕전(武三王傳)」 유의진 · 유의공 · 유의계 62권 「양흔등전(羊欣等傳)」 63권 「왕화등전(王華等傳)」 64권 「정선지등전(鄭鮮之等傳)」 양흔 · 장부 · 왕미 왕화 · 왕담수 · 은경인 · 심연지 정선지 · 배송지 · 하승천 65권 「길한등전(吉翰等傳)」 66권 「왕경홍등전(王敬弘等傳)」 67권 「사령운전(謝靈運傳)」 길한 · 유도산 · 두기 · 신념 왕경홍(4) · 하상지 사령운 68권 「무이왕전(武二王傳)」 유의강 · 유의선 69권 「유담등전(劉湛等傳)」 70권 「원숙전(袁淑傳)」 71권 「서담지등전(徐湛之等傳)」 유담 · 범엽 원숙 서담지 · 강담 · 왕승작 72권 「문구왕전(文九王傳)」 유삭 · 유굉 · 유창 · 유휴인 · 유휴우 · 유휴업 · 유휴천 · 유이부 · 유휴약 73권 「안연지전(顏延之傳)」 74권 「장질등전(臧質等傳)」 75권 「왕승달등전(王僧達等傳)」 안연지 장질 · 노상 · 심유지 왕승달 · 안준 76권 「주수지등전(朱脩之等傳)」 77권 「유원경등전(柳元景等傳)」 78권 「소사화등전(蕭思話等傳)」 주수지 · 종각 · 왕현모 유원경 · 안사백 · 심경지 소사화 · 유연손 79권 「문오왕전(文五王傳)」 유탄 · 유위 · 유혼 · 유휴무 · 유휴범 80권 「효무십사왕전(孝武十四王傳)」 유자상 · 유자훈 · 유자방 · 유자욱 · 유자란 · 유자인 · 유자진 · 유자원 · 유자우 · 유자맹 · 유자운 · 유자사(劉子師) · 유자소 · 유자사(劉子嗣) · 유찬 81권 「유수지등전(劉秀之等傳)」 82권 「주랑등전(周朗等傳)」 83권 「종월등전(宗越等傳)」 유수지 · 고침 · 고기지 주랑 · 심회문 종월 · 오희 · 황회 84권 「등완등전(鄧琬等傳)」 85권 「사장등전(謝莊等傳)」 86권 「은효조등전(殷孝祖等傳)」 등완 · 원의 · 공기(孔覬) 사장 · 왕경문(5) 은효조 · 유면 87권 「소혜개등전(蕭惠開等傳)」 88권 「설안도등전(薛安都等傳)」 89권 「원찬전(袁粲傳)」 소혜개 · 은염 설안도 · 심문수 · 최도고 원찬 90권 「명사왕전(明四王傳)」 유우 · 유홰 · 유숭 · 유희 91권 「효의전(孝義傳)」 공영 · 유유(劉瑜) · 가은 · 곽세도 · 자원평 · 엄세기 · 오규 · 반종 · 장진지 · 왕팽 · 장공 · 서경 · 손법종 · 범숙손 · 복천여 · 허소선 · 여제민 · 손극 · 하자평 92권 「양리전(良吏傳)」 왕진지 · 두혜도 · 서활 · 육휘 · 완장지 · 강병지 · 왕흠지 93권 「은일전(隱逸傳)」 대옹 · 종병 · 주속지 · 왕홍지 · 완만영 · 공순지 · 유응지 · 공기(龚祈) · 적법사 · 도잠 · 종욱지 · 심도건 · 곽희림 · 뇌차종 · 주백년 · 왕소 · 관강지 94권 「은행전(恩倖傳)」 대법흥 · 완전부 · 왕도륭 · 양운장 95권 「삭로전(索虜傳)」 96권 「선비토욕혼(鮮卑吐谷渾)」 삭로 토욕혼 97권 「이만전(夷蠻傳)」 임읍국 · 부남국 · 가라타국 · 가라단국 · 반황국 · 반달국 · 사파파달국 · 사자국 · 가비려국 · 고구려 · 백제국 · 왜국 · 형옹주만 · 예주만 98권 「저호전(氐胡傳)」 99권 「이흉전(二凶傳)」 구지 · 저거몽손 유소(劉劭) · 유준(劉濬) 100권 「자서전(自序傳)」 심약 (1) 본명이 사유(謝裕)로 유유의 휘를 범하여 자인 경인(景仁)으로 표기되었다.
(2)본명이 저유지(褚裕之)로 유유의 휘를 범하여 자인 숙도(叔度)로 표기되었다.
(3) 본명이 장유(張裕)로 유유의 휘를 범하여 자인 무도(茂度)로 표기되었다.
(4) 본명이 왕유지(王裕之)로 유유의 휘를 범하여 자인 경홍(敬弘)으로 표기되었다.
(5) 본명이 왕욱(王彧)으로 유욱의 휘를 범하여 자인 경문(景文)으로 표기되었다.||<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3f51ba><tablebgcolor=#3f51ba> ||
{{{#!wiki style="margin: -0px -10px; margin-top: 0.3px; margin-bottom: -6px" {{{#ece5b6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본기(本紀)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
1권 「송본기상(宋本紀上)」 | 2권 「송본기중(宋本紀中)」 | 3권 「송본기하(宋本紀下)」 | |
유유(裕) · 유의부 | 유의륭 · 유준(駿) · 유자업 | 유욱(彧) · 유욱(昱) · 유준(準) | ||
4권 「제본기상(齊本紀上)」 | 5권 「제본기하(齊本紀下)」 | |||
소도성 · 소색 | 소소업 · 소소문 · 소란 · 소보권 · 소보융 | |||
6·7권 「양본기상·중(梁本紀上·中)」 | 8권 「양본기하(梁本紀下)」 | |||
소연 | 소강 · 소역 · 소방지 | |||
9권 「진본기상(陳本紀上)」 | 10권 「진본기하(陳本紀下)」 | |||
진패선 · 진천 · 진백종 | 진욱 · 진숙보 | |||
}}}}}}}}}
- [ 열전(列傳) ]
- ||<-6><tablewidth=100%><tablebgcolor=#000000> 11·12권 「후비전(后妃傳)」 ||
조안종 · 소문수 · 장애친 · 장궐 · 사마무영 · 호도안 · 원제규 · 노혜남 · 왕헌원 · 은숙의 · 하영완 · 심용희 · 왕정풍 · 진묘등 · 강간규 · 진법용 · 사범경 · 진도정 · 유지용 · 배혜소 · 왕보명 · 하정영 · 왕소명 · 유혜단 · 저영거 · 왕순화 · 장상유 · 치휘 · 왕영빈 · 정영광 · 완영영 · 서소패 · 장요아 · 심묘용 · 왕황후 · 유경언 · 심무화 · 장여화 13·14권 「송종실급제왕전(宋宗室及諸王傳)」 유도린 · 유도규 · 유의경 · 유준고 · 유의진 · 유의강 · 유의공 · 유의선 · 유의계 · 유소 · 유준(濬) · 유삭 · 유굉 · 유탄 · 유위 · 유창 · 유혼 · 유휴인 · 유휴우 · 유휴무 · 유휴업 · 유휴천 · 유이부 · 유휴범 · 유휴약 · 유자상 · 유자훈 · 유자방 · 유자욱 · 유자란 · 유자인 · 유자진 · 유자원 · 유자우 · 유자맹 · 유자운 · 유자사(劉子師) · 유자소 · 유자사(劉子嗣) · 유찬 · 유우 · 유홰 · 유숭 · 유희 15권 「유목지등전(劉穆之等傳)」 16권 「왕진악등전(王鎮惡等傳)」 유목지 · 서선지 · 부량 · 단도제 왕진악 · 주령석 · 모수지 · 부홍지 · 주수지 · 왕현모 17권 「유경선등전(劉敬宣等傳)」 유경선 · 유회숙 · 유수 · 손처 · 괴은 · 상정 · 유종 · 우구진 · 맹회옥 · 호번 · 유강조 18권 「조륜지등전(趙倫之等傳)」 19권 「사회등전(謝晦等傳))」 조륜지 · 소사화 · 장도 사회 · 사유 · 사방명 · 사령운 20권 「사홍미전(謝弘微傳)」 21권 「왕홍전(王弘傳)」 22권 「왕담수전(王曇首傳)」 사홍미 왕홍 왕담수 , 왕훈, 23권 「왕탄등전(王誕等傳)」 24권 「왕유지등전(王裕之等傳)」 25권 「왕의등전(王懿等傳)」 왕탄 · 왕화 · 왕혜 · 왕욱 왕유지 · 왕진지 · 왕소지 · 왕열지 · 왕준지 왕의 · 도언지 · 원호지 · 장흥세 26권 「원담전(袁湛傳)」 27권 「공정등전(孔靖等傳)」 28권 「저유지전(褚裕之傳)」 원담 공정 · 공림지 · 은경인 저유지 29권 「채곽전(蔡廓傳)」 30권 「하상지전(何尙之傳)」 31권 「장유전(張裕傳)」 채곽 하상지 장유 , 장승, 32권 「장소전(張邵傳)」 33권 「범태등전(范泰等傳)」 34권 「안연지등전(顔延之等傳)」 장소 범태 · 순백자 · 서광 · 정선지 · 배송지 · 하승천 안연지 · 심회문 · 주랑 35권 「유담등전(劉湛等傳)」 36권 「양흔등전(羊欣等傳)」 37권 「심경지등전(沈慶之等傳)」 유담 · 유열 · 고침 · 고기지 양흔 · 양현보 · 심연지 · 강이 · 강병지 심경지 · 종각 38권 「유원경전(柳元景傳)」 39권 「은효조등전(殷孝祖等傳)」 40권 「노상등전(魯爽等傳)」 유원경 은효조 · 유면 노상 · 설안도 · 등완 · 종월 · 오희 · 황회 41권 「제종실전(齊宗室傳)」 소도도 · 소도생 · 소요광 · 소요흔 · 소면 · 소경선 · 소적부 · · 소탄 · 소탄지 42·43권 「제고제제자전(齊高帝諸子傳)」 소억 · 소영 · 소황 · 소엽 · 소고 · 소장 · 소삭 · 소감 · 소봉 · 소예 · 소갱 · 소구 · 소현 44권 「제무제제자·제문혜제자·명제제자전(齊高帝諸子·文惠諸子·明帝諸子傳)」 소장무 · 소자량 · 소자경(卿) · 소자향 · 소자경(敬) · 소자무 · 소자륭 · 소자진 · 소자명 · 소자한 · 소자륜 · 소자정 · 소자악 · 소자문
소자준 · 소자림 · 소자건 · 소자하 · 소소수 · 소소찬 · 소보의 · 소보현 · 소보원 · 소보인 · 소보유 · 소보숭 · 소보정45권 「왕경칙등전(王敬則等傳」 46권 「이안인등전(李安人等傳)」 왕경칙 · 진현달 · 장경아 · 최혜경 이안인 · 대승정 · 환강 · 초도 · 조무 · 여안국 · 주산도 · 주반룡 · 왕광지 47권 「순백옥등전(荀伯玉等傳)」 48권 「육징등전(陸澄等傳)」 순백옥 · 최조사 · 설연 · 우종 · 호해지 · 우완지 · 유휴 · 강석 육징 · 육혜효 · 육궐 49권 「유고지등전(庾杲之等傳)」 50권 「유환등전(劉瓛等傳)」 유고지 · 왕심 · 공규 · 유회진 유환 · 명승소 · 유이 · 유규 51·52권 「양종실전(梁宗室傳)」 소경 , 소매 소발 소앙 소욱, · 소의 · 소부 · 소창 · 소융 · 소굉 , 소정인 소정의 소정덕 소정립, 소수 · 소위 · 소회 · 소담 53권 「양무제자전(梁武帝諸子傳)」 소통 · 소종 · 소적 · 소속 · 소윤 · 소기 54권 「양간문제자·원제제자전(梁簡文帝諸子·元帝諸子傳)」 소대기 · 소대심 · 소대관 · 소대림 · 소대련 · 소대춘 · 소대성 · 소대봉 · 소대아 · 소대장 · 소대균 · 소대위 · 소대훈 · 소대구 · 소대흔 · 소대지 · 소대원 · 소방등 · 소방제 · 소방구 · 소방략 55권 「왕무등전(王茂等傳)」 왕무 · 조경종 · 조의종 · 석천문 · 하후상 · 길사첨 · 채도공 · 양공칙 · 등원기 · 장혜소 · 장징 · 풍도근 · 강현 · 창의지 56권 「장홍책등전(張弘策等傳)」 57권 「심약등전(沈約等傳)」 58권 「위예등전(韋叡等傳)」 장홍책 · 유역 · 정소숙 · 여승진 · 악애 심약 · 범운 위예 · 배수 59권 「강엄등전(江淹等傳)」 60권 「범수등전(范岫等傳)」 61권 「진백지등전(陳伯之等傳)」 강엄 · 임방 · 왕승유 범수 · 부소 · 공휴원 · 강혁 · 서면 · 허무 · 은균 진백지 · 진경지 · 난흠 62권 「하창등전(賀瑒等傳)」 63권 「왕신념등전(王神念等傳)」 64권 「강자일등전( 江子一等傳)」 하창 · 사마경 · 주이 · 고협 · 서리 · 포천 왕신념 · 양간 · 양아인 강자일 · 호승우 · 서문성 · 음자춘 · 두즉 · 왕림 · 장표 65권 「진종실제왕전(陳宗室諸王傳)」 진의 · 진상 · 진혜기 · 진창 · 진담랑 · 진백무 · 진백산 · 진백고 · 진백공 · 진백인 · 진백의 · 진백례 · 진백지 · 진백모
진숙릉 · 진숙영 · 진숙견 · 진숙명 · 진숙경 · 진숙헌 · 진숙제 · 진숙문 · 진숙달 · 진숙탄 · 진숙표 · 진숙웅 · 진숙중 · 진숙엄 · 진숙신 · 진숙우 · 진숙평 · 진숙오 · 진숙흥 · 진숙선 · 진숙목 · 진숙검 · 진숙징 · 진숙소 · 진숙광 · 진숙순 · 진숙모 · 진숙현 · 진숙륭 · 진숙영
진심 · 진장 · 진윤 · 진억 · 진언 · 진경 · 진건 · 진념 · 진지 · 진전 · 진번66권 「두승명등전(杜僧明等傳)」 두승명 · 주문육 · 후진 · 후안도 · 구양위 · 황법구 · 순우량 · 장소달 · 오명철 67권 「호영등전(胡穎等傳)」 호영 · 서도 · 두릉 · 주철무(1) · 정령세 · 심각 · 육자륭 · 전도집 · 낙문아 · 손창 · 서세보 · 주부 · 순랑 · 주경 · 노실달 · 소마하 · 임충 · 번의 68권 「조지례등전(趙知禮等傳)」 조지례 · 채경력 · 종원요 · 한자고 · 화교 · 유사지 · 사기 · 모희 · 심군리 · 육산재 69권 「심형등전(沈炯等傳)」 심형 · 우려 · 부재 · 고야왕 · 요찰 70권 「순리전(循吏傳)」 길한 · 두기 · 신념 · 두혜도 · 완장지 · 견법숭 · 부염 · 우원 · 왕홍궤 · 심우 · 범술증 · 손겸 · 하원 · 곽조심 71권 「유림전(儒林傳)」 복만용 · 하동지 · 엄식지 · 사마경 · 변화 · 최령은 · 공첨 · 노광 · 심준(峻) · 공자구 · 황간 · 심수 · 척곤 · 정작 · 전완 · 장기 · 고월 · 척곤 · 왕원규 72권 「문학전(文學傳)」 구영국 · 단초 · 변빈 · 구거원 · 왕지심 · 최위조 · 조충지 · 가희경 · 원준 · 유소(昭) · 종영 · 주흥사 · 오균 · 유협 · 하사징 · 임효공 · 안협 · 기소유 · 두지위 · 안황 · 잠지경 · 하지원 · 서백양 · 장정견 · 완탁 73·74권 「효의전(孝義傳)」 공영 · 유유(瑜) · 가은 · 곽세통 · 엄세기 · 오규 · 반종 · 장진지 · 구걸 · 사각수 · 왕팽 · 장공 · 서경 · 손법종 · 범숙손 · 복천여 · 허소선 · 여제인 · 손극 · 하자평 · 최회순 · 왕허지 · 오경지 · 소예명 · 소교처양 · 공손승원 · 오흔지 · 한계백 · 구관선 · 손담 · 화보 · 해숙겸 · 한영민 · 유풍 · 봉연백 · 오달지 · 왕문수 · 악이지 · 손법종 · 유도민 · 등담공 · 도계직 · 심숭소 · 순장 · 길분 · 견염 · 조발호 · 한회명 · 저수 · 장경인 · 도자장 · 성경준 · 이경서 · 사린 · 은불해 · 사마고 · 장소 75·76권 「은일전(隐逸傳)」 도잠 · 종소문 · 심도건 · 공순지 · 주속지 · 대옹 · 적법사 · 뇌차종 · 곽희림 · 유응지 · 공기 · 주백년 · 관강지 · 어부 · 저백옥 · 고환 · 두경산 · 장영서 · 오포 · 서백진 · 심인사 · 완효서 · 등욱 · 도홍경 · 제갈거 · 유혜비 · 범원엽 · 유선 · 장효수 · 유승선 77권 「은행전(恩倖傳)」 대법흥 · 서원 · 완전부 · 기승진 · 유계종 · 여법량 · 여문현 · 여법진 · 주석진 · 육험 · 사마신 · 시문경 · 심객경 · 공범 78·79권 「이맥전(夷貊傳)」 임읍 · 부남 · 중천축국 · 사자국 · 고구려 · 백제국 · 신라 · 왜 · 부상국· 하남왕국 · 탕창 등지 · 무흥국 · 형옹주·예주만 · 고창 · 쿠처 · 우전국 · 파사국 · 연연 80권 「적신전(賊臣傳)」 후경 , 왕위, · 웅담랑 · 주적 · 유이 · 진보응 (1) 본명이 주철호(周鐵虎)로 당태조로 추존된 이호(李虎)를 피휘하여 무(武)로 개칭되었다.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00><tablebgcolor=#000> ||
<colbgcolor=#3f51ba><colcolor=#fff> 유송의 반역자 謝晦 | 사회 |
|
시호 | 없음 |
작위 |
무창현공(武昌縣公) → |
성 | 사(謝) |
이름 | 회(晦) |
자 | 선명(宣明) |
생몰 | 390년 ~ 426년 4월 22일 |
출신 | 진군(陳郡) 양하현(陽夏縣) |
국적 | 동진 → 유송 |
부친 | 사중(謝重) |
형제자매 | 5남 중 3남 |
자녀 | 1남 2녀 |
[clearfix]
1. 개요
동진 및 유송의 인물. 동양태수 사랑의 손자. 표기장군 사마도자의 장사를 지냈던 사중(謝重)의 아들. 유유가 진군장군이던 시절 그 휘하에서 장사를 지냈던 사현(謝絢)의 동생.사회는 풍류와 자태가 아름답고, 말솜씨가 뛰어났으며, 눈썹과 눈이 선명하고, 머리카락은 칠흑같이 검었다. 또, 문장의 뜻을 두루 섭렵하였고, 박학다식하여 유유 휘하에 있을 때 뭇 막료들 중 가장 많은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사회는 초기에 건위장군 맹창(孟昶)의 휘하에서 중병참군을 지냈다. 의희 7년(411년) 3월, 유유가 노순과 서도복을 평정한 공으로 태위, 중서감에 올랐을 때 유목지에게 물었다."맹창의 보좌관 중 누가 우리 부(府)에 들어올만한가?"
이에 유목지가 사회를 천거하니, 유유는 즉시 명을 내려 사회를 참군으로 삼았다. 당시 유유가 죄수들을 심문해야 하는 일이 있었는데, 형옥참군이 갑자기 병들어 사회로 하여금 그 일을 대신 처리하게 하였다. 사회는 마차 안에서 심문조서를 한 번 훑어 본 것이 전부였음에도 재촉하여 판결을 내렸다. 비록 감옥이 번잡할 정도로 처리해야할 재판이 터무니 없이 많이 밀려있었으나, 사회는 심문과 변론을 빠르게 진행하면서도 착오를 하나도 범하지 않았다. 유유는 그 능력을 범상치 않게 여겨 사회를 형옥적조로 임명했다가 예주치중종사(豫州治中從事)로 옮겼다.의희 9년(412년) 3월, 유유가 표문을 올려 의희토단(義熙土斷)을 주청하고, 그 일환으로 교치군현[1]을 시행하였다. 유유는 사회에게 교치군현의 백성 호구 수를 반으로 갈라 양주와 예주로 고르게 분배하라는 임무를 맡기고 태위주부에 임명하였다.
의희 11년(415년) 3월, 유유가 형주자사 사마휴지를 정벌하자 주부 사회도 종군하였다. 유유의 군대가 마두(馬頭)에 진을 쳤을 때, 유유는 사위인 진위장군 서규지가 파총(破冢)에서 노궤에게 패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노여워하며 장수들을 거느리고 장차 장강을 건너려 했다. 노궤와 사마문사(司馬文思) 또한 형주군 40,000명을 이끌고 강가 언덕에 자리잡고 굳게 수비하니, 유유군은 도저히 상륙할 수 없었다. 이에 유유가 갑옷을 입고 친히 상륙을 시도하려 하자, 여러 장수들이 말렸지만 그럴수록 유유의 분노는 더욱 커져만 갔다. 그때 사회가 유유를 끌어안고 말리니, 유유가 외쳤다.
"내 경을 참하겠다!"
사회가 답했다."천하에 이 사회는 없어도 되지만 공이 없어서는 아니 됩니다. 사회가 죽는 것 따위 무슨 상관 있겠습니까!"
때마침 건무장군
호번이 유격병과 함께 강진(江津)에 도착해 형주군을 공격하여 노궤와 사마문사는 군대를 후퇴시켰다.의희 12년(416년), 사회는 유유의 북벌에 종군하여 안팎으로 중요한 업무를 도맡아 처리하였다. 당시 유목지가 수도 건강(建康)에 남아 내정을 처리하면서 종종 사자를 보내 유유에게 진언하였는데, 그때마다 사회는 유목지와 다른 견해를 내놓았다. 결국 유목지는 분노하여 사회에게
"공(公)이 다시 돌아올 때가 있을 것 같은가?"
라는 말을 전하며 역정을 내었다. 이후 유유가 사회를 종사중랑으로 삼으려 했으나, 유목지가 집요하게 반대하여 그만두었다. 이후로도 유목지는 살아있는 동안 사회의 승진을 번번이 가로막았다.의희 13년(417년) 11월, 건강에 있던 유목지가 마침내 사망하였다. 북벌군을 이끌고 있던 유유는 유목지의 부고 소식을 전달받고는 통곡하며 몹시 슬퍼하였다. 사회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담담한 태도를 유지했으나, 심복을 보내 유목지의 죽음을 재차 확인했을 정도로 속으로 무척 기뻐하였다. 과연 유목지가 죽고 나니 사회는 곧바로 종사중랑으로 승진하였다.
의희 14년(418년) 6월, 태위 유유가 상국, 송공(宋公)에 오르고 9석을 수여받자, 사회는 우위장군에 임명되고 시중을 겸하였다.
2.2. 무제 재위기
영초 원년(420년) 6월, 유유가 남교(南郊)에 돌로 제단을 쌓고, 공제 사마덕문으로부터 제위를 선양받아 송(宋)의 황제로 즉위할 때, 사회는 유격군을 이끌고 경비를 맡아 송무제 유유가 법가(法駕)에 올라 건강성에 들어갈 때까지 호위하였다. 이후 중령군에 임명되고 시중은 전과 같게 하였으며, 무창현공(武昌縣公)에 봉해져 식읍이 2,000호에 달했다.영초 2년(421년), 사회가 남군태수 왕화에게 봉해진 작위를 북해태수 왕구(王球)에게 봉하는 실수를 저질러 시중에서 면직당했다.
영초 3년(422년) 정월, 무제 유유가 사회를 영군장군, 산기상시로 삼아 전성(殿省)에 숙직하게 하고, 숙위병을 전부 통솔케 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3월, 무제의 몸이 편치 않으니, 사회는 태위 유도린, 사공 서선지, 상서복야 부량, 호군장군 단도제와 더불어 나란히 입궁해 약으로 무제의 병을 살폈다.
영초 3년(422년) 5월, 무제 유유가 태자 유의부를 불러 사회를 경계하라는 등의 유조를 남기고 서전(西殿)에서 붕어하였다. 소제 유의부가 즉위한 뒤, 사회는 영 중서령(領中書令)이 더해져, 서선지, 부량과 함께 보정에 임하였다. 이때 보정을 맡은 서선지의 조카 오군태수 서패지(徐佩之)도 정사에 참여하여 시중 왕소지, 정도혜(程道惠) 등과 붕당을 결성하였는데, 사회는 병을 이유로 서패지의 무리를 손님으로 맞이하지 않고, 그들과 친목을 도모하지도 않았다. 서패지 무리는 사회가 꾀병으로 자신들을 만나려하지 않는다고 여겨, 서선지의 뜻을 사칭해 부량에게 조서로 사회를 죽이자고 권했지만, 부량이 거절하여 실패하였다.
2.3. 유의륭 옹립
경평 2년(424년) 5월, 소제 유의부의 막장짓을 더이상 두고 볼 수 없었던 사회와 서선지 등의 대신들은 남연주자사 단도제, 강주자사 왕홍(王弘)을 입조케 하고, 그들과 더불어 소제 유의부의 폐위를 모의하였다. 먼저 사회는 집안 사람들을 모두 내보내고, 단도제를 비롯한 장수와 병사들을 영군부 내로 모아 동숙하였다. 당시 소제 유의부는 화림원(華林園)과 천연지(天淵池)를 오가며 놀기 바빴기에, 사회는 다음 날 아침에 단도제와 함께 병사들을 거느리고 운용문(雲龍門)으로 들어가 황궁을 장악해버렸다. 숙위병들이 막으려는 움직임을 보이면 중서사인 형안태(邢安泰)가 꾸짖으니, 감히 이들을 막아서려는 자가 없었다. 사회와 단도제는 황궁 깊숙이 진입하여 환관 2명을 죽이고, 아직 잠에서 깨지 못 한 소제 유의부를 붙잡다가 유의부의 손가락에 상처를 냈다. 이후 그들은 유의부를 부축해 동각(東閣)으로 나가 옥새와 인수를 거둔 뒤, 유의부를 태자궁(太子宮)으로 보내 폐위시키고 영양왕(營陽王)으로 삼았다.경평 2년(424년) 6월, 상서복야 부량이 백관들을 인솔해 강릉(江陵)에서 온 형주자사 의도왕 유의륭을 영접하였다. 녹상서사 서선지는 사회에게 형주의 통치를 맡겨, 그를 외부 지원 세력으로 삼기 위해 녹조명(錄詔命)으로 사회를 행 도독형상옹익녕남북진7주제군사(行都督荊湘雍益寧南北秦七州諸軍事), 무군장군, 영 호남만교위(領護南蠻校尉), 형주자사로 삼았다. 여기에 더해서 정예병과 옛 장수들을 모두 사회에게 배속시키니, 병기와 군수물자가 심히 성대하였다.
경평 2년(424년) 8월, 유의륭이 마침내 황제에 즉위하여 사회를 사지절로 삼는 동시에 서선지가 임시로 사회에게 내렸던 관직들을 전부 정식으로 승인하였다. 자신에게 내려진 직위가 실제 행해지지 못 할까 근심하던 사회는 문제 유의륭의 승인을 받자마자 곧바로 신정(新亭)으로 향했다. 사회는 건강을 떠나면서 석두성을 바라보고
"오늘에서야 벗어나는구나!"
라며 기뻐하였다. 이후 위장군으로 승진하고, 산기상시가 더해졌으며, 작위는 건평군공(建平郡公)으로 진봉되니, 식읍이 4,000에 달했다. 다만 사회는 작위는 굳게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사회는 유의부의 피살 사건에 어느정도 관여한 바가 있어, 문제 유의륭이 그의 형제를 죽였다고 앙심을 품을까 항상 두려워하였다. 이에 사회는 문제의 심복인 시중 왕화와 친하게 지냄으로써 화를 면하고자 하였으며, 두 딸을 팽성왕 유의강(劉義康), 신야후 유의빈(劉義賓)에게 각각 시집 보냈다. 또, 문제의 심복인 중령군 도언지가 양구(楊口)에 이르렀을 때, 도언지는 사회를 만나 성심을 보였고, 사회도 도언지를 후히 예우하였다. 이때 도언지는 말과 예리한 검, 이름난 검을 선물로 주었고, 이를 받은 사회는 크게 안심하였다.
2.4. 사회의 난
원희 2년(425년) 말, 문제는 서선지, 부량을 주살하고 사회를 토벌할 생각으로 북벌을 공표하였다. 그리고 경구(京口)의 흥녕릉(興寧陵)을 들를 준비를 한다며 함선을 정비하기 시작하였다. 부량은 사회에게 서신을 보내 조정의 많은 대신들이 북벌에 반대하고 있어, 곧 황제가 만유종(萬幼宗)을 보내 북벌에 대해 논의할 것이라 전했다. 그러나 북벌을 준비하는 것 치고 조정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기에, 문제의 계획이 밖으로 서서히 누설되기 시작하였다.원희 3년(426년) 정월, 사회의 동생인 황문시랑 사작(謝㬭)이 사회에게 사람을 보내 황제가 형주를 토벌하려 한다 일렀다. 하지만 사회는 이를 믿지 않았고, 자의참군 하승천(何承天)의 북벌은 없고 조정에서 형주를 토벌하러 올 것이라는 간언 또한 무시하였다.
때마침 강하내사 정도혜가 심양(尋陽) 사람으로부터 "조정에서 장차 큰 처분을 내릴 것이고, 그 일은 이미 심사가 끝났다."라는 내용의 서신을 취득하였다. 정도혜는 그 서신을 봉함하여 보국부(輔國府)의 중병참군 악경(樂冏)을 보내 이를 사회에게 보였다. 서신을 읽은 사회가 하승천에게 물었다.
"만유종이 아직 이르지 않았는데, 2 ~ 3일간 아무런 소식이 없으면 정말로 오지 않는다고 보아야 하는가?"
하승천이 답했다."칙사가 아직까지 오지 않을 이유가 없어, 정도혜의 말대로 그 일은 이미 정해진 것이니, 어찌 의심의 여지가 있겠습니까?"
결국 확실한 물증이 잡히고 조정이 자신을 토벌할 것이라 확신한 사회는 하승천에게 계책을 물었다. 이에 하승천은 국경 밖으로 나가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 상책이고, 심복을 보내 의양(義陽)에 주둔케 한 뒤, 사회가 스스로 대군을 이끌고 하구(夏口)에서 관군과 싸워, 만약 패하면 의양으로 도망쳐 국경을 나가는 것이 차선책이라 답했다. 사회는 두 계책을 모두 거부하며 외쳤다."부족하나마 결전을 벌인 후에 달아난다 해도 어찌 늦겠는가!"
이후 하승천에게 명해 격문을 짓게 하고, 장수 안소(顔卲)를 불러 거병을 모의하려 했는데, 안소가 독약을 먹고 자결하였다. 결전을 벌이기로 결심한 사회는 계엄령을 내려 사방의 병력을 끌어모았으며, 거병하여 사마
유등지를 장사, 남군태수로 삼고, 남만사마 주초(周超)를 사마, 남의양태수로 삼아 병력 3,000으로 강릉을 지키게 하였다. 문제 유의륭은 조서를 내려 서선지, 부량, 사회가 소제 유의부와 여릉왕 유의진을 살해한 죄를 묻고, 그들을 주살할 것을 명했다. 사도 서선지는 부엌으로 들어가 스스로 목을 메어 자결하였고, 부량은 성문을 나와서 도망치다가 둔기교위 곽홍(郭泓)에게 체포당해 광막문(廣莫門) 앞에서 주살되었다. 사회의 아들 사세휴(謝世休) 역시 주살당했고, 동생 사작과 사작의 아들 사세평(謝世平), 조카 사소(謝紹) 등은 투옥되었다.
악경이 사람을 보내 사회에게 서선지와 부량 2공이 죽고, 사작 등은 이미 주살당했다 보고하였다. 사회는 먼저 서선지와 부량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 다음에 아들과 동생을 위해 위문하였다. 이후 사회가 직접 사당(射堂)에 나가 병사를 점검하고 지휘를 상세히 하달하니, 사회군에 자진입대하는 자들이 모여 2 ~ 3일만에 정예병 30,000명을 모을 수 있었다. 사회는 동생 사둔(謝遯)을 경릉내사로 삼아 후방을 지키게 한 뒤, 친히 20,000명을 거느리고 강릉에서 출발해 주함을 정렬하니, 강진에서 파총까지 그 깃발이 해를 가렸다. 사회는 도중에 상주자사 장소(張卲)를 공격하려다 하승천이 간하여 그만두고, 서신을 보내 장소에게 함께할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장소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원희 3년(426년) 2월, 문제 유의륭도 수도 건강을 사도 왕홍과 팽성왕 유의강에게 맡기고 진군을 개시했다. 사회가 강구(江口)에 이르렀을 때, 중령군 도언지도 팽성주(彭城洲)에 도착하니, 파릉(巴陵)을 점거하고 있던 유등지는 두렵고 나약해 감히 진군하지 못 했다. 참군 유화지(劉和之)가 단도제가 도착하기 전에 싸워야 한다 주장했으나, 유등지는 겁을 내며 소장 진우(陳祐)에게 큰 자루를 만들게 하고, 거기에 수천 개의 모(茅)를 담아 돛대에 매달았다. 마침 장마철이었기에 유등지는 사회에게 이것으로 적의 함선들을 불태울 생각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날씨가 갤 때까지 전쟁을 늦춰야 한다 변명하였다. 사회는 유등지의 변명이 그럴싸하다 여겨 군사 행동을 멈추었다.
사회군이 움직이지 않은지 15일째 되는 날에 사회의 중병참군 공연수(孔延秀)가 군사 3,000명을 이끌고 팽성주에 있던 도언지의 장수 소흔(蕭欣)을 대파하고, 팽성주 입구에 설치되어 있던 목책을 부쉈다. 도언지의 장수들은 모두 하구로 물러날 것을 권유했지만, 도언지는 은기(隱圻)로 퇴각하였다. 사회는 다시 긴 표문을 올려 문제 유의륭에게 자신의 전공을 자랑하였다.
2월 19일, 단도제의 군대가 도착해 도언지의 군대와 합류하고 연안에 함선을 대었다. 사회는 단도제가 끌고온 함선의 수가 많지 않은 것을 보고 방심하여 즉시 출전하지 않았다. 그 날 해질녘에 갑자기 동풍이 크게 일자, 단도제의 나머지 함선들이 일제히 돛을 올려 순식간에 팽성주 인근의 장강을 앞뒤로 가득 메웠다. 이 광경을 본 형주군은 사기가 크게 꺾여 싸울 마음을 잃었다. 단도제의 수군이 파릉과 팽성주 사이에 위치한 기치주(忌置洲)의 뒤쪽에서부터 함선을 늘어놓고 진격하니, 사회의 형주군은 허망하게도 일시에 무너져내렸다.
병사들이 모두 흩어지자, 사회는 야밤에 파릉에서 작은 배를 얻어 강릉으로 도주했다. 문제 유의륭은 옹주자사 유수(劉粹)에게 명해 강릉을 습격케 하였는데, 유수의 군대가 사교(沙橋)에 이르렀을 때 주초가 군사 10,000명을 이끌고 성에서 나와 유수군을 역으로 덮쳐 대파하였다. 그러나 대패한 사회가 강릉으로 돌아와 주초에게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 하고 거듭 사과만 하니, 주초는 그 날 밤에 사회를 버리고 도언지에게 투항하였다. 계략이 다한 사회의 곁에는 동생 사둔을 비롯한 몇 명의 측근을 제외하면 남은 이가 없었다. 이에 사회는 북위에 귀순하기로 결심하고, 사둔, 조카 사세기(謝世基) 등 7명과 함께 북으로 향했다.
사둔은 덩치가 커서 말을 탈 수가 없었기에, 사회의 무리는 말을 타고 있음에도 사둔을 기다리면서 천천히 이동하니, 결국 이들은 연두(延頭)에서 수주(戍主) 광순지(光順之)에게 붙잡혀 함거로 수도까지 압송되었다. 사회는 함거에 갇힌 와중에도 《비인도(悲人道)》라는 시를 지어 읊었다. 한편, 마두에 이른 도언지는 순순히 투항해온 하승천을 감형주부사로 삼고, 일전에 투항한 주초는 참군으로 삼았다. 이때 유수가 서교 전투에서 주초에게 패한 사실을 도언지에게 알리자, 도언지는 그 자리에서 즉시 주초를 체포해 도성으로 보냈다.
원희 3년(426년) 2월 30일[2], 사회는 동생 사둔, 조카 사세기, 사세유(謝世猷), 심복 공연수, 하음(賀愔), 두응기(竇應期), 장건(蔣虔), 엄천기(嚴千斯) 등과 함께 주살당했다. 먼저 잡혔으나 아직 죽임을 당하지 않았던 동생 사작 등과 사회를 배신했던 주초 역시 사회와 더불어 주살되었다. 사회가 사망했을 당시, 그의 나이 37세였다. 사회를 따랐던 유등지는 면직되어 금고형에 처해졌고, 은도란(殷道鸞), 하승천, 왕현모는 사면받았다.
사회가 거병할 때, 북위의 장수 왕혜룡은 군사 10,000명으로 사릉수(思陵戍)를 함락시키고 항성(項城)을 포위하는 등의 활약을 보이며 사회를 원조하였으나, 반란이 진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갔다.
3. 기타
-
사회가 형주로 떠날 때, 당숙 광록대부 사담(謝澹)을 찾아가 자못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그에게 작별 인사를 올렸다. 사담이 그의 나이를 물었고, 이에 사회가 35세라 답하니, 사담이 웃으며 말했다.
"과거 순중랑(荀中郎)은 27세의 나이로 북부도독(北府都督)에 올랐는데, 경은 이와 같으니 이미 늙었네."
사회는 이 말을 듣고 무척 창피해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