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8-30 10:32:11

해티 맥대니얼

<colbgcolor=#000000> 해티 맥대니얼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역대 아카데미 시상식
파일:oscar_logo.svg
여우조연상
제11회
( 1938년)
제12회
( 1939년)
제13회
( 1940년)
페이 베인터
(제저벨)
해티 맥대니얼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제인 다웰
( 분노의 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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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
Hollywood Walk of Fame St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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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4a1a1><colcolor=#FFD700> 이름 해티 맥대니얼
HATTIE MCDANIEL
분야 파일: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영화 심볼.jpg 영화
입성날짜 1960년 2월 8일
위치 1719 Vine Street
}}}}}}}}}}}} ||


}}} ||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해티 맥대니얼
Hattie McDaniel
파일:inspired-2014-02-01-hattie-mcdaniel-main.jpg
출생 1893년 6월 10일
캔자스 주 위치타
사망 1952년 10월 26일 (향년 59세)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국적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직업 배우, 싱어송라이터, 코미디언
신장 157cm
활동 1920 – 1952
배우자 하워드 힉맨(1911년~1915년 사별)
조지 랭포드(1922년~1925년 사별)
제임스 로이드 크로포드(1941년~1945년 이혼)
래리 윌리엄스(1949년~1950년 이혼)

1. 개요2. 어린 시절3. 경력4. 말년과 죽음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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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980x.jpg
미국의 배우. 최초의 아카데미 시상식 흑인 수상자로 유명하다.

2. 어린 시절

캔자스 주 위치토에서 태어나 후에 콜로라도 주 덴버로 이주하여 자라왔다. 15세인 1910년부터 쇼 비지니스 경력을 시작하여 자신의 가족이 이끄는 악극단과 함께 여행을 다녔다. 또한 1920년대에는 보드빌 가수로서 공연을 하였고 나중에 35세가 된 1931년에는 헐리우드로 이주하였다.

3. 경력

1932년 《The Golden West》로 영화배우 데뷔를 하였다. 여러 차례 조연과 단역을 맡으며 무명생활을 전전하다가 1939년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주인공 스칼렛의 하녀이자 자상하고 충직한 유모인 마미 역을 맡아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하여 유명해졌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최초의 아카데미상 수상자라는 기록을 남겼다.

1930년대와 1940년대 동안 많은 영화들에 출연하였는데 대표작으로 메이 웨스트 케리 그랜트 주연의 《난 천사가 아니다》(1933), 아이린 던 주연의 《쇼보트》(1936), 캐롤 롬바드 프레드릭 마치 주연의 《낫씽 세이크리드》(1937), 진 할로우 클라크 게이블 주연의 《사라토가》(1937), 베티 데이비스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가 주연한 《우리의 삶에서》(1942), 《 남부의 노래》(1946) 등이 있다.

1947년부터 1952년에 건강이 악화될 때까지 코미디 라디오 드라마 "뷸라"(Beulah)에 출연하였다. 고용된 주인집과 주변 인물들의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하는 가정부 뷸라의 이야기는 큰 인기를 끌었다. 도로시 댄드리지와 비비안 댄드리지 자매와 어머니 루비 댄드리지도 조연으로 나온 바 있다. 1950년부터 1953년까지 3시즌에 걸쳐 TV 시트콤 버전이 ABC에서 방영됐는데, 맥대니얼은 시즌2에서 여섯 에피소드에 출연했다.

4. 말년과 죽음

1952년 유방암으로 인해 57살의 나이에 사망했다. 그후 할리우드 묘지에 안장하려고 했지만 흑인이라는 이유로 안장이 허가되지 못했다가 무려 47년이 지난 1999년에 안장되었다. 이는 영국 출신의 유명 사업가인 타일러 캐시티가 1998년에 공원묘지를 인수해 ‘할리우드 포에버’로 개칭한 다음에 맥대니얼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 많은 영화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주고 할리우드 영화사를 빛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여 자신이 직접 나서서 그녀의 한을 풀어주기로 했던 것이 바탕이 된것이라고 한다.

5. 기타

  • 질 와트의 전기를 바탕으로 한 영화가 제작될 예정이다.
  • 클라크 게이블과 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제작 당시에 이미 스타였던 게이블이 마미 역할에 적극 추천하며 캐스팅에 힘써줬다. 그리고 맥대니얼이 흑인이라는 이유로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석 못 하게 되자, 게이블은 연기 잘 해서 받는 상인데 인종이 무슨 상관이냐며 '맥대니얼이 참석 못 하면 나도 시상식을 보이콧하겠다'고 강하게 반발하여 결국 맥대니얼이 참석하게 되었다.[1] 은인 수준의 친구였던 셈. 게이블은 맥대니얼 장례식에도 참석했다.


[1] 클라크 게이블은 스타로 성공하기 전까지 밑바닥 인생을 전전하며 힘들게 살았다. 그래서 비슷한 처지인 흑인들과 친분을 나눌 기회가 많았고, 그 시대 대다수 백인들과 달리 흑인에 대해 열린 태도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