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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몽골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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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몽골
1. 개요2. 역사적 관계
2.1. 고대2.2. 원나라 역사의 귀속 논쟁2.3. 명-북원2.4. 명-오이라트 관계2.5. 청나라2.6. 20세기2.7. 21세기
2.7.1. 2020년대
3. 문화 교류4. 경제 교류5. 대사관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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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몽골의 관계.

2. 역사적 관계

역사적으로 중국 몽골 두 나라는 농경민인 한족 유목민 몽골족이라는 서로 다른 문화와 생태로 구분되었다. 전근대 중화제국들의 주적이 몽골 초원의 유목민들이었고,. 중국에서 오랑캐라고 멸시하듯 몽골도 중국인을 "호자"(ᠬᠤᠵᠢᠶ᠎ᠠ , хужаа)라고 부르며 멸시하기도 했다. 고대의 선비족부터 시작하여 중세의 요나라( 거란)와 몽골 제국을 거쳐 명나라 초기의 오이라트 제국과 명나라 중후기의 (명나라 말기인 1635년에 만주족과 일체화된) 내몽골 그리고 청나라 초중기의 준가르까지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중국 왕조와 몽골계 유목민족의 대립은 계속 이어져왔다.

2.1. 고대

사마천의 <사기>에서 나온 흉노의 조상이 중원에서 북방으로 올라간 사람들이라는 설명이 나온다. 해당 내용은 사마천이 왜곡한 내용이 아니라 사실이 맞다. 문제는 현대 중국에서 사마천의 역사 기록을 현대 민족주의 관점에서 어떻게 해석하는가이다.

니콜라 디 코스모가 사마천의 사기에 해당 내용을 분석한 바에 따르면 만리장성의 기원은 주나라의 여러 제후국들이 북방의 반농반목 민족[1]들의 영토를 점령하고 이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건설한 것이라고 한다. 당시 만리장성은 명나라 때 만리장성보다 좀 더 북쪽에 건설되었는데, 만리장성 건설을 통해 전국시대 제후국들이 확보한 해당 북방 지역은 북방 민족(이른바 북적, 서융, 동이 등등) 입장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지역이었지만, 중화권 입장에서는 말을 사육할 수 있는 목초지로 활용할 수 있던 지역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중화권 우세는 북방에서 기마 유목민 문화가 보급되면서 급속히 뒤집어지고, 중국인들은 과거에 자신들에게 밀리던 유목민들이 한나라 등등 중화 왕조를 압박하자 이들을 갖가지 야만적인 이미지로 폄하했다는 것이 그 논지이다. 결론적으로 몽골 고원을 중심으로 한 기마유목민들의 고유의 문화 및 정체성을 지니게 된 계기는 중화권과 분리된 것에 있다. 그리고 흉노 연맹 일부의 조상 중 일파가 중국 북부에서 몽골 고원으로 이주한 것과, 몽골족의 조상이 중국인이라는 주장의 타당성 이 두가지는 별개이다. 몽골어족 언어는 중국티베트어족 언어와 근본적으로 다르다.[2]

2.2. 원나라 역사의 귀속 논쟁

칭기스 칸과 그 후계자들이 건설한 거대한 제국은 1268년 카이두의 반란을 계기로 동유럽과 카자흐스탄 일대의 킵차크 칸국, 중동의 일 칸국, 중앙아시아의 차가타이 칸국, 중국과 티베트를 아우르는 원나라 그리고 오고타이 칸국 이렇게 다섯 개의 나라로 쪼개졌다. 이 중 원나라와 오고타이 칸국을 제외하면 나머지 세 나라는 현지 무슬림들의 영향으로 이슬람으로 개종하였고 몽골 전통 문화를 보존한 것은 오고타이 칸국과 원나라 밖에 없다. 그러나 오고타이 칸국은 카이두라는 인물 개인의 군벌 정권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결국 남는 것은 원나라 하나이다. 이 때문에 오늘날의 독립국 몽골과 중국 사이에는 원나라 역사가 어디에 귀속되는지 관련해서 계속 논쟁을 벌인다.
몽케가 시작해 쿠빌라이가 마무리한 송과의 길고 지루한 싸움으로 인해 카간의 지도력이 중국으로 제한되었다. 따라서 카간은 제국의 중심지를 카라코룸에서 대도(오늘날의 북경)로 옮겼다. 주요 목적은 당나라 때 달성했던 중국 통일을 복원하는데 있었다.

...
쿠빌라이가 동생 아리크부카를 군사적으로 제압하고 제5대 칸이 되어 통치했다고는 하지만, 1259년 몽케의 죽음으로 몽골 제국의 통일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차가타이 칸국 킵차크 칸국 뿐만 아니라 일 칸국까지도 처음에는 대칸의 권위를 인정했지만 실제로는 독립 국가로 발전해갔다. 이들 독립 국가에서 몽골인 지배계급은 서서히 지역 주민인 튀르크인과 이란인에 가려 사라졌다. 유일하게 일 칸국만이 대칸의 정치적 동맹자로 남았다.
말의 세계사 / 피타 켈레크나
성립 초창기 무슬림들을 적극 박해하였던 일 칸국 역시 가잔 칸 치세에 몽골 지배층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현지 주민들과 몽골 지배층 사이의 급속한 동화가 이루어진다. 멸망 직전까지 지배층 몽골족과 피지배층 한인, 남인 사이의 구분이 엄격했던 원나라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이러한 일 칸국의 역사가 어느 나라 역사로 귀속되는가 관련해서 이란과 몽골 사이에는 별 다른 갈등이 없음에도, 중국과 몽골 사이에서 원나라 귀속 관련하여 계속 분쟁이 일어나는 이유가 있다.[3] 상술한 것처럼 원나라와 오고타이 칸국 이외에 다른 몽골 제국 국가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하였고, 오고타이 칸국은 카이두의 반란 세력 정도로 불러야한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몽골 제국 자체에서 비중이 낮은 편이다. 몽골 입장에서도 원나라를 자신의 자랑스런 중세사로 기념하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하나의 중국 이데올로기를 강조하는 중국에서는 원나라, 그리고 원나라의 후신을 자처한 청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왕조라는 점 때문에 원나라를 꼭 자국의 역사로 독점하고 싶어한다.
몽골의 역사에 대한 중국의 기존 관점은 한족 민족주의에 기초하여 원제국의 역사를 부정적으로 다루었다. 즉 전통적인 중화사상 화이관(華夷觀)에 입각하여 오랑캐의 역사는 중국의 역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이후 만주족의 청나라와 몽골족이 세운 원제국의 역사를 중국 역사에 편입하면서부터 다민족국가의 구성원으로서 중화민족의 범주에 포함시켰다.
#

원나라는 내치에 있어서 중국의 관료제/경제구조를 상당부분 계승한 것은 사실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지폐의 일종인 교초를 들 수 있다. 원나라는 금나라에서 발행한 교초 발행을 적극 확대하였다. 그러나 원나라와 밀접한 관계였던 일 칸국에서는 종이로 된 돈이 현지 상인들의 극렬한 반발에 부딪혀 도입되지 못하였다. 중화 문화권 이외 지역에서는 종이로 돈을 거래한다는 개념이 생소했던 것이다.[4]

그러나 내치가 아니라 외교 관련해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쿠빌라이 칸 치세에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 지역들이 분리된 이후에도 원나라의 외교에는 중화 왕조의 이미지 대신 몽골 대칸의 이미지가 홍보되었다. 비교하자면 일 칸국은 페르시아계 현지인들을 외교관이나 행정관으로 적극 등용했던 것과 반대로 원나라가 부마국이나 속국에 파견하는 다루가치들 중 한족은 드물었고 대개 몽골인이나 색목인이었다. 원나라의 위구르인들은 몽골 황족들의 가정 교사 역할을 맡았고 티베트 불교 팍파는 몽골 문자 파스파 문자를 고안했다. 원나라는 외교 뿐만 아니라 황위의 정통성 관점에서 중화권의 전통적인 천자 관점보다는 대칸으로서의 권위를 더 내세웠다. 물론 원나라에서 데려온 위구르인 등등 중앙아시아인들이 현지 중국의 행정 체계를 한꺼번에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었다. 당시 원나라의 인구비를 살펴보면 몽골인 100만, 색목인 수백만, 한인 1천만, 남인 6천만가량이었다. 그데 아무리 몽골군이 강하다고는 해도 몽골인과 색목인으로 7천만 명을 지배하기란 불가능했다. 결국 군대를 항상 국경지대에 배치했던 송나라 등 한족 왕조들과 달리 원나라는 점령군으로서 모든 성마다 군대를 주둔시켜야 행정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명나라에서 편찬한 원사에 따르면, 쿠빌라이 칸은 남송을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하면서 몽골의 전통을 벗어나 원조를 자처하면서 중국식 연호를 사용하였고[5] 국자감을 세우고 과거제도를 시행하면서 유교적 국가체제를 설립했다. 여기에다 전왕조의 역사서인 송사 금사, 요사를 집필하면서 중화왕조를 자처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페르시아계 유대인 역사가 라시드 앗 딘이 저술한 집사에는 이와 다른 내용을 볼 수 있다. 원나라는 페르시아계 권신 아흐마드 파나카티를 고용하여 기존 중국식 세금징수 체계 대신에 중동식 세금징수 체계를 도입하였고, 이 때문에 남방의 중국인들이 크게 반발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몽골 제국은 자신들의 역사를 중국인들이 아니라 주바이니, 라시드 앗 딘 하마다니 같은 페르시아인들이 기록하게끔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원나라가 시행한 과거 제도가 제대로 된 과거 제도가 아니다 보니 당시 한족 지식인들 중 관직을 포기하고 경극 각본 제작으로 입에 풀칠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당시 이들이 제작한 경극이나 시에는 몽골족이나 색목인들에게 품은 증오나 원망을 담은 내용이 적지 않다.
추워서 따뜻한 강남을 향하고 寒向江南暖
배고파서 배부른 강남 향하네 飢向江南飽
강남이 나쁘다 말하지 말게 莫道江南恶
강남이 좋다 말해야 하네 須道江南好
가을 기러기(秋雁) / 게혜사(揭傒斯)[6]

겉으로 남쪽으로 날아가는 가을 기러기를 다루는 시이지만 또 다른 뜻을 담고 있다. 원나라 당시 북방에서 온 몽골족들이 강남의 재물을 포탈하여 부자가 되었음에도 원나라의 남인들을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사람들이라며 무시하는 모순을 비판하는 내용의 시이다.

2.3. 명-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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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가 수도 대도(칸발리크)를 상실하고 초원으로 퇴각하는 과정에서 중국 각지에 퍼져있던 몽골인 상당수가 몽골 고원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명나라 군에게 포위되어 한족으로 위장하여 살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상당수의 몽골인들이 한족으로 편입되었고, 정식으로 투항한 몽골인 귀족들 역시 홍무제의 명령에 의해 무조건 한족과 결혼할 것이 요구되었다. 홍무제는 색목인들이 주로 믿던 이슬람이나 기독교, 유대교 관련해서는 관용적인 태도를 유지했지만 몽골 귀족들이 숭상하던 티베트 불교는 무자비하게 탄압하였고, 명나라 내에서 혼혈 정책과 더불어 티베트 불교가 사멸하면서 명나라 내 몽골인 투항자들의 정체성도 한족과 동화될 수 밖에 없었다. 오늘날에도 북방 한족의 혈통과 문화에는 이런저런 몽골의 영향이 남아있다.

2.4. 명-오이라트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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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5세기 동안 명나라는 오이라트라 불리는 몽골족의 일파와 몇 차례 접전을 벌였으나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 이후 몽골 정벌을 포기하고 16세기부터는 북쪽 국경을 따라 장성을 쌓는 수비 위주의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오늘날 남아있는 만리장성 유적 중 상당부분은 명대에 몽골족의 침략을 막기 위해 건설된 것이다.

명나라는 1473년부터 산시 일대에서 4만여 명을 동원하여 장성을 쌓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485년까지 거의 960킬로미터에 달하는 토성과 망루, 요새를 건축하기에 이르렀다. 1482년에는 몽골군이 침입해 왔다가 성벽에 막혀 공격을 포기하고 물러갔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될 점은 원나라와 명나라 초기까지 변경 일대에는 만리장성이 없었다는 점이다. 예전에 진시황이 만든 장성은 오래 전에 무너졌으며, 그 이후 한나라와 금나라를 비롯한 여러 왕조가 장성을 다시 쌓았다. 그러나 금나라가 세운 장성들은 명나라의 북방 국경보다 훨씬 북쪽에 있었으며 오랫동안 버려져 있던 상황이었다. 명나라 중기부터 쌓기 시작한 장성은 서북방의 오르도스 일대에 국한되었으며, 동쪽 일대의 장성은 1540년대 이후부터 축성되었다.

2.5. 청나라

오늘날의 만주는 세 개의 생태 지대에 걸쳐 있었다. 서부는 초원인데 일반적으로 몽골인들이 차지하고 있으며, 목축 유목민들은 주로 양과 말로 생계를 유지한다. 북쪽은 삼림으로서 시베리아의 연장이다. 이 지역에서는 수렵채집민들이 살았는데 대단히 다양한 부족 집단이 있었다. 남만주, 즉 랴오닝은 농민들을 부양하는 기름진 경작지를 가지고 있는데, 농부들은 주로 남쪽에서 이주해 온 한족이었고 만주족은 일부였다. 만주족이 지닌 힘의 비밀 중 하나는 이 세 지대 모두에서 자원을 끌어들이는 특별한 능력이었다. 그들은 몽골의 기병, 만주의 기병 및 보병, 식량과 의복을 공급하는 한족 농민 모두를 활용했다.
하버드 C.H. 베크 세계사 / 1부 유라시아 대륙의 제국과 미개척지들 / 피터 C 퍼듀

청은 중원의 한족이 아닌 만주족이 통치하는 국가였고 오히려 후금시절 만몽 연합정권의 성격을 가지고 중국을 다시 정복했으며, 청은 주변부 지역들과 독특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청나라는 중원과 남부에서는 명나라를 계승한 중국의 천자를 칭하고, 북방에서는 몽골 제국을 계승한 칸이 되는 여러 얼굴을 가진 왕조였다. 청나라의 순치제 시절 만주족들은 삼국지 연의에 나오는 도원결의 이야기를 본떠 몽골 차하르부와 공식적으로 의형제 관계를 맺었는데, 만주는 유비라 칭하고 몽골은 관우로 칭했다. 만주족의 청나라는 중국을 점령한 이후에도 몽골인들이 이반할 것을 우려하여 거듭해서 삼국시대 인물 관우에게 관성대제(關聖大帝)라는 칭호까지 하사했는데, 이는 청나라 치하 중국인들을 달래는 의미 이외에도 만주족들과 호형호제하는 몽골족들을 존중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만몽 연합정권에 해당하는 청나라는 만주와 몽골을 비롯해 중국, 티베트, 위구르 지역을 포괄하는 대제국이 되었다. 티베트는 스승의 민족으로 존중해 주었고, 위구르는 전략적 요충지, 만주는 성지 취급하여 만주족 외의 민족은 출입금지, 몽골은 일찍 복속된 내몽골과 후에 정복된 외몽골을 따로 취급, 분리했고 칭기즈 칸의 성씨를 계승하는 내몽골의 보르지긴 황족과 만주의 황족은 정략 결혼을 했으며 청의 황제는 칸위를 겸했다.

파일:Dzungar khanate map.png

외몽골은 반 독립지나 다름 없었다. 청나라가 티베트와 위구르 지역까지 진출한 이유는 준가르 홍타이지국이 동튀르키스탄 지역을 기반으로 하여 코코노르호 일대(오늘날의 칭하이성에 해당하는 지역)와 외몽골의 몽골인들을 계속 공격하여 압박했던 데 있었다.
준가르 갈단 칸의 공격으로 할하 연맹은 산산조각이 났다. 중국 측 연대기에는 도처에서 할하 몽골족들이 "천막과 재산, 말, 양을 버리고 남쪽으로 밤낮을 쉬지 않고 도주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다른 할하 부족들은 북쪽으로 도주했다. 그들은 셀렌긴스크에서 새 러시아 특사 표도르 알렉세예비치 골로빈을 포위했으나 결국 격퇴당했다. 몇몇 추장들은 갈단 칸으로부터 보호해준다면 러시아의 통치에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골로빈은 차르에 대한 '영원한 충성'을 요구한 반면, 몽골인들은 단시 한시적 동맹을 원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러시아의 요구를 거절하고 흥기하던 갈단 칸 세력이 합류하기 위해 방향을 돌렸고, 일부는 갈단 칸이 패배할 때까지 러시아와의 관계를 유지했다. 할하 부족들은 공격받는 동안 통합을 이루지 못하고 러시아와 중국과 준가르 세 방향으로 갈라졌다.
중국의 서진 / 피터 C. 퍼듀

청나라의 만주족들은 외몽골 할하 부족들이나 코코노르호 지역(오늘날의 칭하이성)의 호쇼트 몽골인들을 내몽골인들과 다르게 별로 신뢰하지 않고 있었다. 청나라는 외몽골 할하 부족장들에게 서열을 정하여 전쟁을 막는 선에서 간접적인 지배를 하는 선에 그쳤다. 박지원 열하일기에서는 몽골 사신단의 존재가 묘사되면서 동시에 베이징에서 한인 지식인들과 다름없이 관료로 사는 몽골인들에 대한 묘사도 나온다. 내몽골 차하르부는 청나라의 귀족 계급으로 대우받았으며, 할하부는 조공을 바치는 외부 세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내몽골의 차하르부가 만주족들과 호형호제하면서 좋은 대접을 받았던 것과는 별개로 이 시기 내몽골의 중국화는 가속화되었다. 팔기군은 내몽골 각지에 주둔하는데 팔기군 기지 근처에는 둔전을 만들어 식량을 어느 정도 자급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만주족 기인들은 엄연히 청나라의 귀족 계급이라서 직접 둔전에서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하기가 입장상 곤란했다. 또한 척박한 내몽골 땅에서 훈련이랑 농사를 동시에 병행하기도 힘들었다. 결국 내몽골에 주둔한 만주, 몽골 팔기군은 자신들이 받은 둔전을 한족이나 회족들에게 임대하여 대신 경작하도록 시키는데, 이러한 농업 임노동자들은 팔기군 기지에 군수품을 납품하는 다른 한족, 회족 상인들과 함께 도시를 만들면서 내몽골 각지에 한족 인구가 뿌리내렸다.

둔전제도는 청나라 이전 명나라도 실시되었던 방식이었으나 청나라와 명나라의 둔전은 근본적으로 달랐다. 명나라 둔전은 명나라 당시 군인들의 사회적 계급이 낮았기 때문에 군인들이 굶어 죽든 말든[7] 제대로 관리되지 않았다. 반면 청나라의 둔전은 상술한 대로 귀족 계급인 만주 기인들을 먹여 살려야 했고, 청나라 조정에서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아메리카 대륙의 옥수수와 고구마, 호박, 땅콩, 담배 등이 전래되면서 내몽골과 코코노르의 둔전 경작자들은 기존 만리장성 이북에서 재배되던 조와 수수 외에도 갖가지 다양한 식량 작물을 재배할 수 있게 되자, 결정적으로 둔전에서 밀이나 보리 대신 몰래 담배나 아편을 재배하면서 내몽골의 한족 농민들도 상당한 수준의 소득을 올릴 수 있게 되었다. 내몽골 지역의 농사가 수익성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한족들의 러시가 이어졌고, 결국 이는 내몽골과 외몽골이 분단되는 계기가 되었다.

2.6. 20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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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족의 독립혁명으로 청나라가 망하고 외몽골 역시 독립을 선언하지만, 중국은 근대국가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청나라와 그 소속부 지역, 민족들의 관계에 대해 서구권 속령의 개념으로 이해, 도입하였다. 구 청나라의 모든 영토와 민족에 대한 지배권이 자신들에게 있음을 주장, 위구르, 티베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국제 사회에서도 이를 승인하여 몽골을 독립국가로 인정해주지 않았다. 그러던 중 소련이 몽골의 독립을 도왔으며 중화민국과 전쟁을 치르던 중국공산당을 지원하는 대가로 외몽골의 독립을 보장해준 것이다. 소련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독립국 몽골도 없었을 것이다.

그 후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두 나라 모두 제2세계 국가에 속하게 되었고, 그 후 1950년 현재의 국경선을 확정하고 중국 정부가 몽골 인민공화국을 공식 인정하면서 갈등이 봉합되는 듯 했다. 하지만 1960년대 중국과 소련의 관계가 나빠진 가운데 몽골이 소련의 편을 들면서 다시 다시 사이가 틀어졌고, 국경지대에서는 이따금씩 총격전이 벌어지곤 했다고 한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는 뵈르탈라 몽골 자치주, 바인골린 몽골 자치주가 있다. 한족들의 이주가 계속되면서 해당 자치주 내 몽골인 인구 비율은 소수에 불과하다.

2.7. 21세기

몽골이 체제를 전환하고 민주화된 현재에도 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대만한테 하듯이 하나의 중국을 주장하며 몽골에게는 합병 의도를 보이지는 않는다. 민족과 언어가 다른 것도 있고 몽골 위쪽에 만만치 않은 러시아가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몽골을 이용해서 중국을 견제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는 듯.[8]

현재까지도 은연 중에 중국이 몽골에 가하는 압박이 상당히 많은 탓에 몽골은 중국에 대한 불만이 매우 많다. 중국 역시 옛날에 워낙 몽골에게 자주 털렸던지라 감정이 별로 좋지 않다. 대표적인 사례가 몽골에 대한 중국 항구 이용 문제이다. 몽골은 내륙국이라서 자원을 수출하려면 어쩔 수 없이 타국의 항구를 이용해야 한다. 그러나 몽골과 가장 가까운 중국은 반중감정을 가진 몽골을 좋아할 리가 만무해서 몽골의 이러한 항구 이용 요청을 거절하고 있다. 몽골에 어느 정도 우호적인 러시아의 경우에도 하필 이미 극동 항구가 포화 상태이다. 그래서 라선 북한의 항구를 개발하려고 공을 들이는 상황이다.

거기다가 몽골은 국토가 상당히 척박하여 식량의 자급자족이 어렵다 보니 중국으로부터 수입하는 식량의 양이 엄청나게 많기 때문에 중국이 이를 악용해 몽골을 압박할 수 있어 이에 대한 불안감도 있다. 사실 과거 중국에서 만리장성이 생긴 이유 역시 만리장성 이북은 농업에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은 토지와 기후를 가진 쓸모없는 땅이기 때문이다. 이들을 넘어서 중국에 과하게 의존적인 경제 문제 또한 존재한다.[9] 특히 몽골의 무역 상대국들을 보면 몽골의 수입의 39.9%, 수출의 84%를 중국에 의존하는 상황이라 # 중국의 영향을 받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어 당연히 불안하게 여긴다.

항구의 경우 홍콩에서 항구를 쓰도록 빌려줘서 그나마 숨통이 트였다. 울란바토르 - 홍콩 간 화물기 및 중국을 종단하는 국제 화물철로로 재운송한다. 그런데 달라이 라마 14세가 몽골을 방문하자 중국이 반발하며 2016년 12월 1일부터 몽골에게 화물비 징수를 하는 등 보복에 나섰다. # 게다가 몽골의 광산전기공급도 차단시키는 등 여러 가지로 보복에 나서서 몽골이 타격을 입었다. # 결국 백기를 들었고, # 방중한 몽골 외무장관은 다시는 달라이 라마를 절대로 초청하지 않겠다고 밝혀 중국도 제재를 해제하면서 개선되었다. #

근래에는 중국에서 칭기즈 칸 중국인이라고 주장하여 관계 악화에 일조하고 있다.

중화민국 청나라 시절 영토를 계승했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몽골도 자국 영토라고 보고 있었다. 다만 대만의 현실적인 처지상 이를 관철할 국력은 전무하고 2012년 대만 정부가 몽골의 독립을 승인하는 것으로 헌법을 해석하여 현재는 명목상으로도 몽골 영유권을 주장하지 않는다.

2.7.1. 202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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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전직 대통령이 중국 정부가 내몽골에서 중국어 교육 정책을 강화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자 중국 정부는 내정간섭이라고 비판했다. #

프랑스에서 열리는 칭기즈칸 전시회에 중국 정부가 칭기즈칸, 제국, 몽골이라는 단어를 삭제하고 전시회 책자와 지도에 대한 편집권한을 요구했고 이로 인한 갈등으로 인해 전시회가 3년 이상으로 연기되었다. #

2021년 4월에 리커창 중국 총리는 오윤엔델 몽골 총리와 전화통화를 하며 사막화 방지에 중국과 몽골이 협력하기로 했다. #

2021년 7월 27일에 왕이 외교부장은 방중한 몽골의 바트체첵 외교부 장관과 회담에서 코로나19 방역 협력 확대와 다자주의 지지 등에 합의했다. #

여담으로 오늘날 몽골의 민족주의자들은 중가리아 지역에 관해서도 과거 준가르 홍타이지국의 영토였다며 아쉬움을 드러내고 있다.

3. 문화 교류

차를 마시는 문화는 중국에서 몽골로 전파되었고, 대신 몽골에서는 증류주 양조 기술을 중동에서 중국으로 전파했던 바 있다.

4. 경제 교류

2021년 기준 몽골 수출의 83%가 중국을 대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

2020년 몽골이 중국에 양 3만 마리를 지원하기로 하고, 중국은 양국간 물류 유통, 인원 왕래를 위한 신속통로 구축을 추진하기로 약속했다. # 그래서 양 3만 마리중 약 4천마리를 몽골에서 중국으로 보내자 중국에서는 몽골에 감사를 표했다. #

중국은 호주와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몽골로부터 석탄을 수입하려고 하지만, 품질, 비용 등에서 문제를 겪고 있다. #

5. 대사관

몽골은 베이징에, 중국은 울란바토르에 대사관을 두고 있다.

6. 관련 문서



[1] 이들은 기마유목민이 아닌 마사이족 비슷하게 도보로 소를 치며 사는 유목민 및 수렵채집민 집단 등이 섞여 있었다. [2] 물론 신해혁명 이후 내몽골인 남성 상당수가 한족 여성들과 통혼한 것은 사실이므로 현대 내몽골인들의 조상 중에 중국인이 많다는 주장 자체는 틀린 말은 아니다. [3] 이러한 연유에서 서구 학계는 중국사에서 원나라를 설명함에 있어서 이른바 정복왕조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4] 여담으로 마르코 폴로 동방견문록에 나오는 교초 관련한 서술은 당대 유럽에서 다소 허황된 이야기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5] 쿠빌라이 칸은 주역을 몽골어로 번역시킨 후 원(元)이라는 국명을 직접 선택하였다. [6] 번역출처는 이야기 중국문화사 / 지세화 편저 [7] 농담이 아니라 명나라 위소군 상당수가 굶어 죽거나 탈영하였다. 대표적으로 이자성이나 장헌충 같은 명말 반적들 상당수가 이렇게 굶어 죽을 뻔한 상황에서 탈영한 군인 출신이었다. [8] 만약 몽골이 예전에 중국으로 합병됐다면 현재의 내몽골 자치구와 합쳐져 위구르, 티베트와 비슷한 위치가 됐을 것이다. [9] 무엇보다 국력에서부터 몽골은 중국에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매우 열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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