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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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張翰생몰연도 불명
서진의 인물. 자는 계응(季鷹). 양주 오군(吳郡) 오현(吳縣) 출신. 동오에서 대홍려 지낸 장엄의 아들.
2. 생애
장한은 탐욕스럽지 않고 문장을 잘 짓는 재주가 있었으나, 제멋대로 행동하길 좋아하는 성격이라 당시 사람들은 그를 "강동보병(江東步兵)"이라 불렀는데, 장엄이 266년에 사망한 것을 고려하면 오나라에는 출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회계(會稽) 지역의 명사 하순이 서진 조정의 부름을 받고 수도인 낙양으로 향하면서 오군을 지나게 되었는데, 이때 장한을 만나 초면임에도 서로 대화를 나누고 곧바로 친해지게 되었다. 하순이 낙양에 간다는 것을 알게 된 장한은
"나도 북쪽 수도에 볼 일이 있소."
라며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고 즉시 짐을 싸서 하순을 따라 나섰다.영녕 원년(301년) 6월, 제왕 사마경이 낙양에 입성해 황제를 참칭한 조왕 사마륜을 몰아내고 혜제 사마충을 복위시켰다. 정권을 잡은 사마경은 스스로 대사마에 오르고, 장한을 불러 대사마부 동조연(東曹掾)으로 배속시켰다. 장한은 동향인 고영을 찾아가 말했다.
"천하가 뒤숭숭하여 화란이 그치지 않고 있소. 이런 시기일수록 사해(四海)에 걸쳐 명성이 높은 이들은 사직을 구하기 어려울 것이오. 나는 본래 산 속에 살던 사람이라 이 시대에 바라는 바가 없어 사직할 것이니, 그대는 앞으로 현명하게 대비하고, 후일을 도모하도록 하시오."
그러자 고영이 장한의 손을 잡고 슬퍼하며 말했다."나 역시 그대와 더불어 남산(南山)에서 고사리를 뜯고 삼강(三江)의 물을 마시며 살고 싶소."
과연 장한은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고영은 끝내 수도에 남아 일부로 매일 술에 취한 채 정무를 돌보지 않았다. 고향으로 돌아간 장한은 〈수구부〉(首丘賦) 등 여러 글을 쓰면서 시간을 보냈고, 영녕 2년(302년) 12월에 사마경이 패망하자 사람들은 모두 장한의 혜안을 칭찬했다.효심이 깊었던 장한은 어머니가 사망하자 몸을 상할 정도로 과하게 애도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에 57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그가 남긴 글 수십 편은 세상에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