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등재 기준
이 문서는 상위 문서인 작위 요구자의 정의에 따른 현재 오세아니아의 작위 요구자들을 나열한 목록 문서이다.- 해당 국가가 현재까지 존재하거나,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적법한 근거를 가지고 해당 작위를 주장한 사례가 있었던 경우.
- 혈통을 통해 세습되는 왕위나 작위와 같이 만약 해당 정권이 존속했다면 해당 정권의 주권을 이어받을 수 있는 누군가를 특정할 수 있는 경우에 해당하는 경우에만 등재하며, 계승권을 실제로 주장하는지 아닌지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 작위 이외에 영토에 대한 권리 주장.
- 작위 소유자가 공식적으로 해당 작위를 포기, 또는 해체한 경우.
- 식민국가나 피정복국가가 독립하고, 상대국이 해당국가를 인정한 경우에 해당하면 등재하지 않는다. 토론 합의
토론 합의에 따라, 근대 이후 공화국의 독재자가 직위를 자손에게 계승했거나 계승하려 시도한 경우는 등재하지 않는다. 단 근대 이후 공화국의 독재자라도 '몽골의 칸' 등 세습 군주의 칭호를 자칭한 경우는 등재한다.
2. 현재 작위 요구자 목록
2.1. 뉴기니 영주
관련 칭호 |
독일 황제(
카이저) 프로이센 국왕 뉴기니 영주 |
작위 요구자 |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폰 프로이센 |
전임자 | 루이 페르디난트 폰 프로이센 |
후임자 | 카를 프리드리히 폰 프로이센 |
계승 실패 원인 |
1918년 독일 제국 멸망 1919년 뉴기니 상실 |
2.2. 라파누이 국왕
관련 칭호 |
라파누이 국왕 (=이스터 국왕) |
작위 요구자 | 발렌티노 리로로코 투키 |
전임자 | 시메온 리로 카잉가 |
계승 실패 원인 | 1888년 왕국 멸망 |
2.3. 미국
미국령 오세아니아 지역의 여러 작위 요구자들.2.3.1. 하와이
하와이의 여러 작위 요구자들.2.3.1.1. 카우아이 국왕
관련 칭호 | 카우아이 국왕 |
작위 요구자 | 카우무알리 |
계승 실패 사유 | 1810년 왕국 멸망 |
2.3.1.2. 하와이 국왕
관련 칭호 | 하와이 국왕 | |
작위 요구자 |
(
데이비드 카와나나코아의 후손) 쿠엔틴 카와나나코아 |
(칼로쿠오카마일레의 후손) 오와나 살라자르 |
전임자 | 에드워드 아브넬 카와나나코아 | 노아 칼로쿠오카마일레 |
후임자 | 킨카이드 카와나나코아 | |
계승 실패 원인 |
1893년 왕국 멸망 1898년 미국에 합병 |
미국의 힘이 대단하여 하와이가 독립할 가능성은 없어보이나, 하와이의 왕으로 인정되면 지금까지 내려오는 하와이 각 왕가 방계들이 가진 엄청난 부동산들의 소유권을 독식할 수 있게 된다.[2] 그래서 현재 하와이 왕실은 하와이를 미 연방 산하의 입헌군주제 자치주로 만들어주길 원하고 있으나, 현행 미국 헌법 상 귀족 신분이 인정되지 않으므로 왕실이 공인받을 길은 마냥 요원하기만 하다.[3][4] 과거 스위스의 주들 중 하나인 루체른 주가 프로이센 왕국과의 동군연합 형식으로서 스위스 연방 산하의 입헌군주제 자치주로 존재했던 것처럼[5] 해달라는 주장인데, 처음부터 군주제 국가인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으로 역사를 시작하는 등[6], 귀족주의적인 요소에 대해선 초기부터 히스테리적으로 배척해왔던 미국이 이를 승인해줄 리가 만무하여[7] 현실은 시궁창이다. 다만, 연방 정부와 하와이 주 정부는 구(舊) 왕실 측에게 옛 왕궁인 이올라니 궁전을 포함한 왕실 관련 부동산에 대한 권리를 부분적으로 인정해주고 있다.
2022년 12월 13일에 하와이 왕위 요구자들 중 한 사람인 애비게일 카와나나코아가 후사없이 사망하면서[8], 그녀의 가문 계통으로는 왕위 요구자가 더 이상 없게 되었다. #
2.4. 아베마마 국왕
관련 칭호 | 아베마마 국왕 |
작위 요구자 | 템 토카타케 |
계승 실패 원인 | 1911년 왕국 멸망 |
2.5. 타히티 국왕
타히티 왕국 국장 | ||
관련 칭호 | 타히티 국왕 | |
작위 요구자 | 레오폴 포마레 | 주앵빌 포마레[10] |
계승 실패 원인 | 1842년 왕국 멸망 |
2.6. 피지 대추장
관련 칭호 |
영국 국왕[13] 피지 대추장 |
|
작위 요구자 |
(
윈저 왕조) 찰스 3세[14] |
(
하노버 왕조)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5세 |
전임자 | 엘리자베스 2세 |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4세 |
후임자 | 웨일스 공 윌리엄 | 에른스트 아우구스트[15] |
계승 실패 원인 |
1901년 왕조 교체(하노버 왕조) 1987년 쿠데타 이후 영연방 입헌군주제 폐지(윈저 왕조) |
본래 피지 대추장은 최초로 피지를 통일한 원주민 군주 세루 에페니사 다콤바우의 칭호였으나, 그는 통일국가를 안정적으로 통치하는데 실패하여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에게 반강제적으로 해당 칭호를 양도해야 했고, 이로써 피지는 영국 국왕이 원주민 추장들의 우두머리인 대추장으로서 군림하며 지배하는 식민지가 되었다.[16]
피지의 지배자가 된 영국인들은 피지 원주민들을 게으르다고 멸시해서[17] 그들의 관점에서 부지런하다고 여긴 인도인들을 대거 이주시켰고, 그들은 영국 식민당국과의 유착을 통해 피지의 경제를 장악하게 되었다.
1970년 영국의 식민지배가 종식된 이후에도 피지는 영연방 왕국으로서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를 대추장으로 모셨고, 경제권을 인도계 피지인들이 장악하고 있는 것도 여전했으나, 원주민들이 선거에서 승리하여 내각을 구성하면서, 정권을 장악한 원주민과 경제권을 장악한 인도계라는 이중 권력구조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구조는 1980년대 중반까지 지속되었으나, 1987년 총선에서 인도계 정당인 피지 노동당이 승리하여 정치권력까지 인도계가 장악하자, 시티베니 람부카가 이끄는 원주민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인도계 내각을 축출했고, 영국 정부가 이를 비판하며 민주주의 회복을 촉구하자 군부는 2차 쿠데타를 일으켜 피지 대추장 칭호를 공식적으로 폐지하고 공화국을 수립했다.
영국 왕실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피지 대추장 칭호를 계속 사용했고 원주민 추장들로 구성된 추장 평의회도 지속적으로 엘리자베스 2세를 자신들의 주군으로 모셨는데, 군부는 추장들의 권위를 존중해서 이를 묵인했으나, 법적으로는 어떠한 권한도 없는 비주권군주로서만 인정했다.
이러한 상황은 람부카 군사정권이 퇴진한 이후에도 지속되었고, 인도계 총리들이나 원주민이지만 인도계에 우호적인 프랭크 바이니마라마 군사정권[18]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2012년에는 아예 추장 평의회마저 폐지되며 피지 대추장 칭호는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또한 2022년에는 람부카가 선거에서 승리하며 민주적으로 재집권에 성공하여, 피지 대추장 칭호의 부활 가능성은 더더욱 낮아졌다.[19]
윈저 왕조(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 이전의 하노버 왕조에서도 피지 대추장위 요구자를 배출하고 있는데, 이쪽은 하노버 왕국의 왕위 요구자이자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의 공위 요구자이기도 하며,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3세 때부터 영국 하노버 왕조의 작위들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물론 최근까지 해당 칭호를 보유했던 윈저 왕조도 되찾을 가능성이 희박한 상황에서, 하노버 왕조가 피지 대추장위를 되찾을 가능성은 0에 가깝다.
2.7. 호주
호주의 여러 작위 요구자들.2.7.1. 국가
2.7.1.1. 호주 국왕
관련 칭호 |
하노버 국왕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국왕 호주 국왕 |
작위 요구자 |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5세 |
전임자 |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4세 |
후임자 | 에른스트 아우구스트[20] |
계승 실패 원인 | 1901년 왕조 교체 |
2.7.2. 지방
2.7.2.1. 코코스 제도 영주
관련 칭호 | 코코스 제도 영주 |
작위 요구자 | 존 조지 클루니스-로스[22] |
전임자 | 존 세실 클루니스-로스 |
계승 실패 원인 | 1978년 호주 정부에 의해 영주직이 박탈됨. |
이후로 클루니스-로스 가에 의해 헤어에게서 빼앗은 노예와 그 후손들로 이루어진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비인간적인 폭정이 실시되었다. 그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어서 주민 전체가 클루니스-로스 가의 소유물인 농노가 되어 오랫동안 엄청난 착취에 시달려야 했고, 영주의 폭정을 피해 달아나는 것도 엄금되었다.
2021년 현재는 마지막 영주인 존 세실 클루니스-로스의 아들인 존 조지 클루니스-로스가 이 섬에 다시 정착했고, 조개 양식을 하면서 펑범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호주 정부가 이곳을 자국령으로 합병하기만 했을 뿐, 철저하게 개무시하고 있는 중이라서 현지인들 중 소수가 존 조지 클루니스-로스를 다시금 이곳의 영주로 추대하고 있지만, 정작 본인은 공식적으로 영주 직위를 포기하지만 않았을 뿐, 이곳을 자기 가문이 재통치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아마 조상들의 원죄 때문에 영주직의 수행을 꺼리는 것일 수도 있고, 속 편하게 누가 태클을 걸 일도 없는 작위 요구자 신세로 명목상의 영주로만 남는 것에 그냥 만족하는 듯하다.[26] 어찌보면 그렇게 나름 양심이 있는 모습을 보인 덕분에 일부에게나마 영주로 추대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존 조지 클루니스-로스가 현지인들의 존경을 받는 것과는 별개로 현지 여론은 클루니스-로스 가문의 영주위 요구를 결사반대하는 상황이다.
2.7.2.2. 헛리버 공작
관련 칭호 | 헛리버 공작 |
작위 요구자 | 그레미 1세 |
전임자 | 레너드 1세 |
계승 실패 원인 | 2020년 공국 멸망 |
위의 코코스 제도와 달리 역대 군주들이 현지 주민들과 외국인들에게 모두 좋은 평가를 받았으며, 헛리버 공국의 전성기에는 헛리버 공국의 존재가 호주 서부로 많은 관광객이 오게 하였기 때문에[28], 헛리버 공국의 멸망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레너드 1세가 헛리버 공국을 세운 것 자체는 그 과정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29],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가 종식되어 구 헛리버 공국 영지를 포함한 호주 서부 지역으로 오는 관광객이 다시 늘어나고 구 헛리버 공국 영지의 농작물 수익성이 다시 좋아진다 해도, 헛리버 공국이 재건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물론 캐슬리 가문에서 명목상의 헛리버 공위가 계속 이어지고 헛리버 공궁을 포함한 헛리버 공국의 유적이 지속적으로 보전됨으로써, 헛리버 공국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차원에서 구 헛리버 공국 지역을 찾아오는 관광객이 생겨날 수는 있을 것이다. 허나 이렇게 된다 해도 헛리버 공국 땅이 이미 호주 정부로 넘어갔을뿐더러 헛리버 공국이 있었던 곳은 헛리버 공국이 세워지기 전까지만 해도 캐슬리 가문의 사유지인 점을 제외하면 엄연히 호주의 영토였기 때문에, 헛리버 공국이 재건되기에는 부족할 것이다.
물론 이 나라가 세금 관련 분쟁 때문에 건설되었던 걸 생각하면, 헛리버 공국의 실제 재건 가능성과 별개로 이후의 공위 요구자들이 작위 요구 주장을 호주 정부를 상대로 경제적 문제와 관련해서 양보를 얻어내기 위한 레토릭으로 사용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예를 들면, 헛리버 공국 건설의 배경이 된 밀 농사와 관련해서 세금 감면을 요구하거나,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범유행으로 인해 입었던 경제적 피해에 대한 지원을 요구하는 차원에서, 헛리버 재독립이라는 떡밥을 끌고 올 수도 있다. 마침 건국 당시에도 써먹었던 수법으로, 영국 국왕의 신하라면, 국왕과 대적한 전적이 있어도 반역으로 간주하지 않는 법[30]을 이용하는 방법이 있으니, 영국 정부가 이 법을 폐지하지 않는 이상에야[31]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다.
[1]
릴리우오칼라니는 출산한 적이 없다.
[2]
이런 현상을 단편적으로 그린 영화로
디센던트가 있다.
[3]
미국 헌법 제1조 10절 1항: 어느 주라도 조약, 동맹 또는 연합을 체결하거나, 나포 허가장을 수여하거나, 화폐를 주조하거나, 신용 증권을 발행하거나, 금화 및 은화 이외의 것으로써 채무 지불의 법정 수단으로 삼거나, 사권 박탈법, 소급절차법 또는 계약상의 채무에 해를 주는 법률 등을 제정하거나, 또는 귀족의 칭호를 수여할 수 없다.
[4]
만일 헌법 개정으로
하와이 왕실이 연방정부의 공인을 받게 되면, 이 항목에서 빠지게 되지만, 그럴 가능성은 한없이 낮다. 이미 하와이가 정식 주로 승격받으면서
하와이 원주민들이 잃어버렸던 자신들의 권리를 모두 찾은지라 왕실을 인정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설령 완전한 독립을 요구하더라도 왕실 후손을 제외한 다른 원주민들은 타히티 원주민들처럼 공화정으로 독립하는 걸 원할지도 모른다. 물론 현재 원주민들이 딱히 차별을 받거나 착취를 당하는 것도 아니고(오히려 원주민들이 하와이의 몰락한 백인 기득권 세력을 대신하여 인종차별의 새로운 가해자가 된 상황),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의 한 주로 남는 것이 매우 이득이라서,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와는 달리
하와이는 독립 여론이 전무한 편이며, 간간히 제기되는 독립 떡밥도 그냥 연방정부한테 잘 좀 도와달라는 시위용에 불과한 상황이다.
캘리포니아나
텍사스에서 연방정부를 상대로 떼쓰기를 시전할 때 독립국 드립치는 것과도 같은 상황이고, 따라서 진지하게 하와이의 독립을 주장하는 여론은 거의 없다.
[5]
참고로 현행 스위스 헌법에서는 군주제, 신분제가 완전히 폐지돼서 이런 식으로 군주제 자치주를 두는 게 불가능하다.
[6]
그것도 그냥 평화롭게 독립한 게 아니라,
영국을 상대로
전쟁까지 치르고서 독립했다.
[7]
미국 헌법에서 신분제 자체가 금지돼 있으므로 하와이를 미국의 입헌군주제 자치주로 인정하려면 개헌을 해야 한다. 개헌 자체가 어려운 일인데 미국 정치인들이 건국 정신을 거스르는 개헌에 선뜻 나설 리가 없다.
[8]
애비게일 카와나나코아는
동성애자이며, 동성 결혼 후에 입양이나, 대리모를 통한 대리 출산, 정자 기증을 통한 출산으로도 별도로 자녀를 얻은 적이 없어서 후사가 없었다.
[9]
여담으로 이 사람은
보물섬의 저자인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과도 인연이 있던 사람이었다.
[10]
레오폴과 주앵빌 모두 마지막 왕인 포마레 4세 여왕의 후손들이다.
[11]
이는
하와이 섬이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으며, 한때
하와이 왕국이라는 단일 국가의 지배하에 있었다는 이유로,
하와이 제도 전체를
하와이라고 부르게 된 것과 같은 이유다.
[12]
1993년에
프랑스 정부가 이곳에서
핵실험을 강행한 탓이 크다. 이 때문에 당시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의 대통령인 테마루가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었던
자크 시라크를
핵에 미친 놈이라며 조롱한 일도 있었다. 당연히 시라크는
방방 뛰었지만 현지에서는 테마루의 인기가 드높아지고 반
프랑스 여론이 부쩍 늘어났다.
[13]
영국 국왕은
피지 대추장이라는 작위 외에도
오스트레일리아 국왕 및
뉴질랜드 국왕,
자메이카 국왕,
도미니카 연방 국왕,
세인트키츠 네비스 국왕 및
맨 섬의 영주,
노르망디 공작,
앤티가 바부다 국왕,
캐나다 국왕 등의 작위를 칭하고 있는데, 현재 공식적으로 칭하는 작위 중에서 명목 상의 작위가 된 건, 이 피지 대추장 작위와 노르망디 공작 뿐이다.
[14]
현재
영국의 국왕이다.
[15]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5세의 아들.
[16]
물론 대추장 본인은 피지가 아니라 영국 본토에 상주하고 있으므로, 실질적으로는
총독이 파견되어 통치했다.
[17]
피지와 같은
열대 지방에서는 과중한 노동을 하다가는 금방
일사병으로 쓰러져 죽는다. 이걸 원주민들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휴식을 취했는데 영국
백인들은 이를
인종주의적 관점에서 게으르다고 임의로 단정한 것이다.
[18]
2006년 피지 쿠데타를 주도하여 집권했는데 람부카 군사정권과는 달리, 원주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인도계 차별 반대를 명분으로 내세워 집권했다.
[19]
같은 해에
엘리자베스 2세가 사망하여, 마지막으로 해당 칭호를 보유했던 인물마저 역사 속 인물이 되었다. 엘리자베스 2세 후임인
찰스 3세부터는 피지에서
영국을 비롯한
영연방 왕국 국왕이라는 외국의 군주로 대우 받게 되었다.
[20]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5세의 아들.
[21]
성씨에 Königlicher Prinz von
Großbritannien und Irland를 추가했다.
[22]
코코스 제도 최후의 영주인 존 세실 클루니스-로스의 아들.
[23]
사족으로, 헤어가 뭣 때문에 노예들을 데려왔느냐면, 바로 자기만의
하렘을 건설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데려온 노예들은 잡일을 맡기거나 다른 노예를 감시할 목적으로 데려온 극소수의 남자들을 빼면 전원이 여자들이었고, 대부분은
동남아시아에서 납치해온
말레이인이었으나
중국인들도 있었고, 소수의
흑인들도 있었다.
[24]
아이러니하게도 헤어를 처음
코코스 제도에 데려다 준 배의 선장이 존 클루니스-로스의 남동생이었다. 사실 클루니스-로스가 먼저 자신의 장모와 함께 처음 이곳에 발을 들였고, 코코스 제도에 영구히 정착해서 전원 생활을 꾸리길 원했다. 그래서 섬에 재도착했을 때 엉뚱하게도 헤어가 이 섬을 스틸하고 정착하고 있자, 오랜 꿈의 실현을 위해 그의 노예들을 빼앗고 그를 추방했다.
[25]
오랫동안 실시해 온 폭정에 대한 인과응보였는지 존 세실 클루니스-로스는 이때
호주 정부로부터 받은 돈도 얼마 못 가 탕진하고 가난뱅이로 전락했다.
[26]
위의 개요 문단을 봤으면 알겠지만, 작위 요구자라는 신분은 진짜로 그 작위를 내놓으라고 요구하는지의 여부와는 전혀 상관없다. 그래서
공화주의자이거나 작위 요구 문제에 대해
아오안인 사람도 공식적으로 작위 요구권 포기를 선언하지 않는 한 일단은 작위 요구자로 분류되는 거다.
[27]
공가 스스로 헛리버 공국 해체를 결정한 것이지만 헛리버 공작 칭호를 공식적으로 포기하지는 않았다.
[28]
이탈리아 통일로 세워진
사보이아 왕조
이탈리아 왕국과 현
이탈리아 공화국 정부 모두
산마리노를 자국령으로 합병하려는 시도를 한 적이 없었던 이유가 이것이다. 산마리노도 산악 지대에 위치한 미니 국가라는 점이 관광객들의 관심을 불러모았기 때문에, 이 자체를 관광 자원으로 쓰고자 독립을 보장해준 것이다.
[29]
물론 캐슬리 가문을 지나치게 몰아붙인 호주 정부의 책임이 크긴 하지만, 레너드 1세 또한 편법적인 방법을 썼으며, 당시 기준으로 보면 호주의 어느 농민이 뜬금없이 자기가 군주라고 우겨댄 것이었기 때문에 헛리버 공국 건국 자체는 분명 문제가 있었다.
[30]
실제로는 현대적인
입헌군주제 체제 하에서 사문화된 법이지만, 어쨌든 영국 정부가 이 법을 폐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법을 어떤 식으로든 들먹이면 분명히 법적인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 초대 공작인 레너드 1세도 본인이
변호사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 법의 존재를 알고 있어서, 일부러
엘리자베스 2세에게 칭신하고
공작을 자칭한 것이다.
[31]
이 법을 폐지하겠다는 얘기는 곧 왕실을 폐지하겠다는 소리나 다를 바 없으므로, 무슨 이유로든간에 영국이
공화정을 채택하지 않는 이상, 법이 폐지될 일은 절대로 없다. 무엇보다도 호주는 아직도 영국의 국왕을 자국의 군주로 인정하는
영연방 입헌군주제 국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