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14:24:21

이호준/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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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마추어 시절2. 프로 경력
2.1. 해태 타이거즈 시절2.2. SK 와이번스 시절
2.2.1. 2000~01 시즌2.2.2. 2002 시즌2.2.3. 2003 시즌2.2.4. 2004 시즌2.2.5. 2005 시즌2.2.6. 군입대2.2.7. 2007 시즌2.2.8. FA2.2.9. 2008 시즌2.2.10. 2009 시즌2.2.11. 2010 시즌2.2.12. 2011 시즌2.2.13. 2012 시즌2.2.14. FA
2.3. NC 다이노스 시절
2.3.1. 2013 시즌2.3.2. 2014 시즌2.3.3. 2015 시즌2.3.4. 2016 시즌2.3.5. 2017 시즌
3. 연도별 성적
3.1. 투수 성적3.2. 타자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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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마추어 시절

1993년 말에는 고졸 선수 스카웃을 둘러싸고 프로와 대학 간의 갈등이 극심했다. 동료 선수들과 함께 동국대학교로 진학하기로 되었던 주형광, 연세대학교에 가등록 상태로 국제대회 중에 일본으로 급파된 LG 스카우트와 계약한 김재현 등이 대표적이었지만, 김재현과 마찬가지로 연세대학교 가등록 상태였던 이호준 역시 만만치 않은 파장을 일으켰다. 고졸 선수 입단 교섭 마감일인 11월 15일[1]을 막 넘긴 가운데 해태 타이거즈 김경훈 스카우트가 연세대 숙소에 잠입해 계약을 이끌어 낸 것이다. 이러한 처사에 화가 난 각 대학 팀들은 프로와 대학 사이에서 진로 문제로 물의를 빚은 선수가 속한 고교 팀의 선수들을 사건이 발생한 시점부터 5년 동안 스카웃하지 않기로 결의했으나 이는 대학 팀들이 제 발목을 도끼로 자르는 격이어서 실질적으로 제대로 시행된 적이 없었고 1996년 말 프로 출신들에게 아마야구 지도자 자리가 정식으로 개방[2]되면서 사실상 폐기되었다.

중고교 야구부 시절부터 힘들다고 가출이나 합숙소 탈출 등을 자주 했다고 하는데, 이때의 버릇이 남은건지 아니면 프로로 오는 과정이 부드럽지 못해서였는지 몰라도 입단한지 얼마 안 되어 프로선수가 된 이후에조차[3] 어릴때처럼 계속 숙소를 나가고, 집을 나가고 하는 짓을 자주 했다고 한다. [4] 오죽하면 프로에서 별명이 빠삐용. 그렇게 10년 동안 부모 속을 썩인 결과, 직업도 경찰[5]이었고 동네에서도 성격 무서운 걸로 유명해서 어릴때 가출하고 돌아온 이호준을 야구 방망이로 패기도 하고 달래기도 했다는[6] 그의 아버지가, 프로가 된지 한참 되어서도 적응을 못하고 수원의 한 중국집으로(?) 가출을 했다가 돌아온 이호준을 붙잡고 엉엉 울면서 "네가 애비한테 원하는게 뭐냐? 애비가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되냐"며 눈물로 호소하는 바람에 강해보이기만 하던 아버지의 약한 모습에 큰 충격을 받고 겨우 반성했다고 한다.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고교 광주일고 선배 방수원이 해태 코치 시절때, 아주 잘하는 유망주가 종일 술을 마시고, 다른 데 가서 자고, 비실비실하게 와서 방탕한 생활을 하니, 처방을 했는데도 똑같았으며 열심히만 하면 대선수가 되는데 속이 상했다고 말했다. 이호준 아버지한테도 부탁을 했다고.

2. 프로 경력

2.1. 해태 타이거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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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 타이거즈[7] 시절

이상윤, 선동열, 문희수, 김기태, 이강철, 이종범, 박재홍 등의 선수를 배출한 광주일고 출신으로 처음에는 해태 타이거즈 투수였으나, 1군 성적이 너무 처참한 데 이어 부상까지 입으며 1996년에는 타자로 전향한다.[8][9]

타자로 전향한 첫 해에도 딱히 돋보이는 성적을 올리지는 못했다. 그러나 1997년 김성한이 해태의 타격코치로 부임하면서 당시 유망주였던 장성호와 더불어 짬뽕 한 그릇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지옥훈련을 했다고 한다. # 덕분에 1997년 많은 경기에는 출전하지 못했지만 적은 타수에도 불구하고 홈런을 8개나 치면서 장성호와 더불어 전년도(96년)에 비해 일취월장한 모습을 보이며 당시 붙박이 지명타자였던 박재용의 자리를 위협하며 한국시리즈 엔트리에도 승선, 데뷔 첫 우승반지를 얻게 된다.

타이거즈 암흑기의 시작이었던 1998년에는 좌익수와 지명타자를 번갈아가며 출장해 붙박이 4번타자로 발돋움하며 팀내 핵심타자였던 이호성[10] 홍현우, 최훈재보다 뛰어난 .303에 19홈런 77타점을 기록. 1번타자로 .312에 15홈런을 기록한 장성호와 더불어 이종범이 떠난 타선의 중추노릇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해태는 투수진에 비해 부실했던 타선으로 인해[11] 마지막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5위를 기록하면서 14년연속 4강에 실패한다.[12] 당시 해태팬들은 이종범이나 홍현우만큼 화려하지는 못하지만 이 어린 두 명의 타자들이 성장하는 재미를 보는 것이 낙이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99년에는 외야로 컨버전한 장성호와 새로 영입&입단해 포지션을 두고 경쟁한 양준혁, 트레이시 샌더스, 정성훈과 같은 선수들로 인해 1루, 3루, 우익수, 지명타자를 전전했으나[13] 이러한 잦은 포지션 이동에도 불구하고 .276 16홈런 55타점이라는 준수한 기록을 남기며 타격능력에 있어 뚜렷한 재능을 드러냈다. 만일 제대로 된 포지션에 붙박이로 활용되었다면 보다 좋은 성적을 기대할 수 있었을 테지만 당시 해태 타이거즈가 외국인 용병으로 타자를 선호한 팀이었기 때문에 그로인한 희생양으로도 볼 수 있다. 외국인 타자가 안 좋았다면 모르겠지만 그해 뽑은 타자 2명이 모두 미친 성적을 보여주는 바람에...

2.2. SK 와이번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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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 와이번스 시절

2.2.1. 2000~01 시즌

그러나 2000 시즌 부진하면서 장성호에게 밀렸고, 더군다나 잠수함 투수가 거의 전멸하다시피 한 해태[14]와 타선이 매우 빈약했던 SK[15] 간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며 2000년 6월 1일 성영재와 트레이드되면서 SK 와이번스로 이적한다.[16]

이적 후 강병철의 양아들로 많은 기회를 받았는데, 2000년 손목부상으로 시즌 아웃되었고 2001년에는 부진하였다.

2.2.2. 2002 시즌

그러나 2002년 드디어 기량이 만개, 26홈런을 치면서 SK의 중심타자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2.2.3. 2003 시즌

2003년에는 36홈런 102타점을 기록함으로써 홈런 4위에 올랐는데, 이게 대단한게 1~3위 그리고 바로 아랫순위인 5위는 각각 이승엽(56홈런), 심정수(53홈런), 마해영(38홈런) 그리고 양준혁(33홈런)이라는 당대의 대타자들이었다. 하지만 그 해 이승엽의 아시아 신기록 56개 홈런으로 인해 조금 묻힌 편.

2.2.4. 2004 시즌

2004년에는 30홈런 112타점으로 2년 연속 30홈런-100타점을 기록하면서 시즌 타점왕에도 올랐다.
2004년 시즌 후 프로야구 병풍 사건에 연루되었으나[17]

2.2.5. 2005 시즌

지금도 불리는 별명인 '로또준'은 원래 당시에 로또 맞은듯 홈런을 치고 타점을 쓸어담는다고 하여 붙은 것이었다.
이 별명이 생긴 계기는 2005 시즌 하위권에 처진 팀을 플레이오프에 올렸기 때문인데, 6월에만 11홈런을 쏘며 날아다녔기 때문.[18]
2005년까지 입영을 연기하고 정상적으로 경기에 출장하였다.

2.2.6. 군입대

그리고 2006년에 공익 근무를 시작했지만 근무한지 얼마 안 된 상태에서 무릎 문제로 2007년에 의병 제대했다.[19]

2.2.7. 2007 시즌

2007년에 팀에 복귀하여 우승에 기여하였다.

2.2.8. FA

FA시장의 최대어로 떠오르면서 4년간 최대 34억의 FA 계약을 맺으면서 SK에 남게 되었다.

2.2.9. 2008 시즌

2008년에는 팀의 4번타자임에도 불구하고 존재감이 심하게 없었다. 2008년에 무릎 부상으로 한 해를 통째로 쉰 탓에 SK 최고의 먹튀(팀내 최고 연봉)였음에도, 팀은 압도적으로 1위를 해 버린다. 그 후 복귀했으나, 없는 게 팀에 도움이 될 만큼 SK 구단 역사상 최악의 먹튀로 자리매김했다.

2.2.10. 2009 시즌

2009 시즌에 결국 소원대로(?) 팬들에게 신나게 까였다. 최종 성적은 타율 .298, 16홈런, 55타점. 4번 타자임에도 불구하고 겨우 55타점이라는것은 문제가 심각하다. 주로 테이블 세터로 나온 정근우 박재상, 하위 타선인 나주환보다도 적다. 타석대비 타점 수는 아주 나쁜편은 아니지만 상대에게 위협이 되어야 할 4번 타자치고는 너무나도 형편없는 성적이다. SK 팬들은 2009 시즌 이호준이 4번 타자로써 날려먹은 기회/실책으로 인한 패배만 아니었으면 정규 시즌 1위도 가능했을 거라고 말하기도. 사실 타점이 적기는 하지만 아주 나쁜 성적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렇게까지 심하게 까이는 이유는 FA 계약 이후 2008년을 통째로 날려먹은 게 크다. 의외로 눈에 띄지는 않지만 SK는 FA 제도가 시작되고 나서 쪽박을 차본적이 없는 팀이다. SK가 FA로 다른팀으로 보낸 선수도 밥값은 하는편.[20] 그러다보니 SK 팬들의 FA 먹튀에 대한 면역력이 지나치게 약하다는 지적이다.

시즌 후반 SK가 13연승을 달리는 동안 줄곧 선발 라인업에서 제외되어 있었다가 선발로 출장한 9월 16일 잠실 LG전에서 SK는 연장혈투 끝에 2-2로 비겨서 연승 흐름이 한번 끊겼다. 전날 경기에서 15안타를 친 SK는 이날 8회까지 단 3안타의 빈공에 시달렸다. 결국 이게 다 로또효과 때문이라며 또 까였다. 부연하자면 로또효과는 이호준만 없으면 팀 타선이 괴물로 변하는 것을 말한다. 또, 로또함수라는것이 있는데 이는 상대팀과의 점수 차가 커지면 커질 수록 이호준의 타율이 올라가는 공식이다. 상대팀과의 점수 차가 10점 차가 넘어가면 그때부터 이호준은 배리 본즈급 타자로 돌변한다. 지독할정도로 영양가 없는 성적을 보고 비꼴때 쓰는 말이다.

시즌 내내 대차게 까였지만 한국 시리즈 6차전 선제 홈런포를 날리면서, 한국 시리즈를 7차전까지 끌고갔다. 하지만 팬들은 여전히 깐다.

2.2.11. 2010 시즌

2010시즌 복귀해서 대타로 나올 때마다 안타를 쳐냈다. 고원준에게 노히트 노런으로 지고 있을 때 안타를 쳐내 팀을 굴욕에서 구출하기도 했다. 홈런도 적절할 때 몰아치기도 하는 등 명불허전 로또였다.7월 5일 두산과의 경기에서는 희생플라이로 팀을 승리하게 만들었다. 물론 로또타임. 양신의 은퇴경기에서는 아슬아슬한 리드를 이어나가던 팀의 승기를 굳히는 타점을 먹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여하튼 2010시즌 후반기에 살아나면서 명실상부 팀의 4번타자가 됐다.

삼성 라이온즈와의 2010년 한국시리즈 전 경기에서 선발 1루수 겸 4번타자로 출장하여 13타수 2안타 1볼넷 2타점 2득점, 타율&장타율 .154, 출루율 .214를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4승으로 우승했다.

2.2.12. 2011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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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3. 2012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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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성적은 127경기 426타수 128안타 18홈런 78타점 타출장 .300/.407/.488. 시즌 후 두 번째 FA 자격을 얻었고, 이후 NC 다이노스로 이적하며 SK에서의 마지막 시즌이 되었다.

2.2.14. FA

시즌 성적을 믿고 FA를 신청한 이호준은 원소속팀 SK와의 최종협상일인 11월 16일까지 합의를 도출하지 못한 채 그대로 시장에 나오게 됐다. 마지막 협상에서 SK가 제시한 조건은 계약기간 2년, 총액 12억 원(계약금 4억+연봉 4억). 그간 이호준의 FA로이드로 학을 뗀 SK 팬들은 별로 아쉬워하지 않는 분위기다.

결국 협상 결렬 다음날인 17일, 옵션 포함 3년 20억 원에 NC 다이노스로 이적했다. 더 많은 금액을 제시한 구단도 있었으나,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김경문 감독의 말에 끌렸다고 한다. # 다른 팀도 아니고 NC로 가버리게 되면서(1군 진입 후 2년간 전 소속팀에 보상선수 대신 현금보상) SK 입장에선 보상선수 대신 현금만 받을 수밖에 없게 되면서 SK 팬들은 가는 순간까지 팀에 엿을 먹였다면서 분통을 터뜨렸다.

2.3. NC 다이노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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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에서의 첫 번째 FA 때 먹튀의 이미지를 얻은지라 두 번째 FA인 NC에서는 어떨지 주목되었으나, 오히려 중심 타선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줌과 동시에 주장 및 고참으로서 젊은 선수단을 상당히 잘 이끌었다는 평을 받았다.[21] 그런 긍정적인 평가 덕에 팬들로부터는 '호부지'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2.3.1. 2013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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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성적은 126경기 442타수 123안타 20홈런 87타점 타출장 .278/.362/.475. 영입 당시에는 반신반의하는 수준이었지만 팀의 고참과 중심 타선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홈런은 리그 7위, 타점은 리그 6위의 기록.

2.3.2. 2014 시즌

4월 5일 팀 시즌 첫 그랜드슬램을 때려내며 4타점을 올리는 대활약을 했지만 팀은 이민호, 임창민, 손민한이 차례대로 털리며 팀은 리드를 지키지 못하고 패배했다.

그 후 한동안 부진했으나 5월 7일 넥센전에서 5타수 4안타(2홈런) 7타점으로 맹활약했다. 첫번째 홈런은 NC 창단 사상 첫 백투백투백 홈런이었고 두번째 홈런은 시즌 2번째이자 개인 통산 8번째 그랜드슬램, 그리고 NC의 첫 원정 그랜드슬램이었다.

5월 20일 마산 SK전에서 다시 친정팀에게 대못을 박는 결승 스리런 홈런을 때려 2-8 대승에 일조했다.

6월 17일 마산 롯데전에서 김성배의 공을 받아쳐 나성범을 불러들이는 적시타로 통산 1000 타점을 기록했다. 이는 역대 11번째 기록.

10월 19일 LG와의 준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솔로 홈런을 때려냈으나 이미 3:13으로 크게 지고 있던 9회말에 나온 홈런이어서 묻혔다.

10월 24일 준플레이오프 3차전에서는 6회초 2:2 동점 상황에서 역전 솔로 홈런을 때려냈고, 이 경기의 결승타가 되었다. 개인 통산 10번째 포스트시즌 홈런이 되었다.

시즌 이후 주장직을 이종욱에게 넘기게 되었다.

2.3.3. 2015 시즌

저는 이제 로또의 세계를 완전하게 은퇴하려합니다. - 불암콩콩코믹스 공룡시대 中

4월 5일 마산종합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한화 이글스와의 홈경기에서 중간계투로 등판한 배영수를 상대로 투런홈런을 쳤다.

5월 15일 경 0.336(8위) / 9홈런(8위) / 41타점(1위)을 기록하며 뛰어난 타격감을 보이며 NC의 타선을 이끌고 있다. 5월 26일 시점으로 13홈런 52타점으로 타점 부문 선두를 지키고 있으나 이날 테임즈가 3홈런 8타점이라는 미친 활약을 선보여 2위 테임즈와 2점 차로 좁혀졌다. 그래도 300홈런 달성에 단 두 개만 남겨놓아 기록 달성은 시간 문제일 듯.

5월 30일 광주 KIA 타이거즈전에서 7회 초 4:5 2사 만루에서 홈런을 쳐 8:5 역전을 만들었다. 이제 통산 300홈런에서 -1개. 재미있게도 이 날 먼저 경기 치른 삼성의 이승엽도 홈런 하나를 쳐서 통산 400홈런에 단 1개를 앞두게 되었다.

6월 11일 현재 스탯은 타율 0.320, 홈런 14(리그 8위), 타점 64(리그 1위), OPS 1.004(리그 7위)로 커리어 하이 시즌을 질주중이다.

6월 18일 kt 위즈와의 경기에서 1회초 정성곤을 상대로 300홈런을 기록했다. 홈경기가 아니라 아쉽지만, 아홉수를 극복했다는 면에서 큰 의미가 있다. 공은 구단 관계자에게 무사히 회수되었다.[22] 그리고 이날 1099타점으로 김동주를 넘어서 타점 단독 4위가 되었다.

6월 19일 마산종합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한화 이글스와의 홈경기에서 선발로 등판한 배영수를 상대로 301호 홈런을 날려 1100타점을 돌파했다. 통산 홈런순위도 박재홍을 제치고 하루만에 7위로 점프...[23]

9월 15일 kt와의 홈경기에서 만루 홈런을 기록하면서 시즌 100타점을 넘겼고 이로서 NC 다이노스는 KBO 역사상 최초로 한 시즌에 클린업 트리오 세 타자 (나성범 - 135 , 테임즈 - 142, 이호준 -110)가 100타점을 넘긴 팀이 되었다. [24]

최종성적은 0.294 24홈런 110타점 장타율 .510 출루율 .381 OPS .891

2.3.4. 2016 시즌

이호준은 무려 3억원이 인상된 7억5000만원에 도장을 찍으며 최고 대우를 보장받았다. FA 당시, 3년 20억이라는 헐값에 계약했기 때문에 구단에서 더 올려준 듯. 선수협회 새 회장이 되었다. 프로야구선수협 새 회장에 이호준 "사랑받는 협회로"

개막전 양현종을 상대로 2회 무사 1루인 상황에서 시즌 개막축포를 쏘아올렸다.[25]

4월 29일 롯데전 5번 선발 출전해 2사 1루 상황에서 테임즈가 고의4구로 2사 1,2루가 된 뒤 타석에 들어섰고,손승락의 2구 째를 받아쳐 그대로 담장을 넘겨버린다!팀의 승리를 이끄는 쓰리런포. 개인 통산 312호 홈런으로 KBO 통산 홈런 단독 6위에 올라섰다.

6월 19일 kt전에서 팀 타선의 대폭발과 함께 홈런을 추가하며 통산 홈런 5위에 올라섰다. 이제 7개를 더 치면 무려 심정수를 넘어선다. 게다가 이 페이스로 1년만 더 뛰면 양준혁까지 넘을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7월 14일 두산전에서 통산 3번째 1300타점을 달성했다

7월 한달간 타율 0.149, 무홈런, 5타점에 그치면서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결국 8월 1일자로 1군에서 말소되었다.

8월 16일 1군 복귀 경기에서는 안타를 기록하지 못했지만 다음날 경기에서는 4타수 2안타 3타점으로 활약했다.

8월 21일 두산 베어스전에서는 3회 투런 홈런을 쳐내며 1군 복귀 첫 홈런을 쏘아올렸다. 시즌 14호.

8월 25일 한화 이글스전에서는 7회 시즌 15호 홈런을 때려내며 통산 1800안타에 달성했다. 역대 12번째.

9월 22일 한화 이글스전에서는 시즌 20호 홈런을 포함해 4타수 2안타 1타점으로 활약했다. 이로써 이호준은 토종 최고령 한 시즌 20홈런 달성에 성공했고, 통산 329호 홈런으로 통산 홈런 순위에서도 심정수를 제치고 4위에 입성했다.

10월 5일 넥센 히어로즈전에서는 4번 타자로 나서 4타수 2안타 1홈런 2타점을 기록했다. 홈런은 시즌 21호 홈런.

10월 21일 LG와의 플레이오프에서 9회 대타로 나와 PO 최고령 출전 기록을 세운 동시에 동점 안타까지 치며 대타로만 6타수 5안타를 기록함에 동시에 소사의 승리, 임정우의 세이브를 날려버렸다. 김지용은 블론세이브를 기록했고 뒤이어 팀은 손시헌 거르고 나온 용덕한의 끝내기 안타로 승리.

시즌 최종 성적은 .298 .396 .502 OPS 0.902 21홈런 87타점 wRC+ 125.7을 기록했다. 불혹의 나이에도 상당한 성적을 기록했다.

시즌이 끝나고 자신의 3번째 FA 자격을 얻었으나 신청서는 제출하지 않았다. 이제 40이 넘어가는 나이인 만큼 장기 계약도 힘들고 본인도 욕심을 내고 싶지 않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미 7억 5천이라는 팀 내 최고 연봉을 받고 있고, NC의 대우가 확실한 만큼 FA를 신청하지 않더라도 이호준에게는 아쉬울 것이 없는 상황이다.

2.3.5. 2017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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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구단 신년회 자리에서 이번 시즌을 끝으로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 이로써 이번 시즌이 이호준의 현역 마지막 시즌이 된다. 169개 남겨둔 통산 2000안타 달성도 어렵게 되었다.

이후 은퇴 선언 인터뷰 당시 추가로 선수협 20억원에 대한 해명까지 자세하게 했다. # 쉽게 요약하면 승부조작이 다시 발생하면 선수들 초상권으로 들어오는 20억원을 내놓겠단 의미였다고.

선수협 메리트 부활 안하면 보이콧 #논란으로 여기에 단장들까지 추가증언으로 #선수협이 비난받으면서 동시에 선수협 회장인 이호준까지 비난받고있다. 여기에 이호준이 #그런적 없다고 해명하면서 논란이 더 커지는중이다.

스프링캠프는 김경문 NC 감독이 젊은 선수들을 위주로 데리고 가겠다고 하여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개막 엔트리에서 제외되었으며 4월 3일 선수협 회장직에서 사퇴했다.

김경문 감독의 리빌딩 선언을 포함해 왼쪽 팔 부상까지 겹치면서 2군 경기에서도 나서지 못하고 재활을 하다가 5월 13일부터 실전 경기에 나섰다. 고양 다이노스에서 2경기 6타수 3안타 1타점 1볼넷 1삼진을 기록했고, 16일 시즌 처음으로 1군 엔트리에 등록되었다.

5월 23일 넥센 히어로즈전에서는 6번 지명타자로 나서 6타수 1안타를 기록했다. 그리고 9회에는 1루수로 나서면서 2008년 이후 무려 9년 만에 수비를 했다. 그리고 유격수 땅볼, 2루 땅볼을 모두 안정적으로 포구하는 기염을 토했다.

6월 4일 LG 트윈스 전에서 5대5 9회 무사 1,3루에서 중견수 희생 플라이를 쳐냈다. 이후 1루수 스크럭스의 대주자 이재율이 중견수로 가고 지명타자 모창민이 1루수비를 보게 되어 임창민과 교체되었고 임창민의 세이브로 이 타점은 결승타점이 되었다.

6월 8일 팔꿈치 염증으로 인해 1군에서 말소되어 재활군으로 향했다.

6월 9일 최영필(1974년생)이 은퇴를 선언하고, 6월 23일 조인성(1975년생)이 웨이버 공시되자 KBO 리그 최고령 선수가 되었다.

7월 4일 다시 1군에 복귀했다.

7월 5일 LG 트윈스전에서는 6번 지명타자로 나서 첫 타석부터 1타점 적시타를 쳐냈다. 이후에도 2루타와 내야 안타를 때려내며 5타수 3안타를 기록했지만 팀은 12-5로 대패했다.

7월 9일 두산 베어스전에서는 2회 첫 타석에서 2루타를 때려내며 역대 세 번째 3200루타를 달성했다. 이후에도 안타 두 개를 더 기록하며 4타수 3안타 1득점을 기록했다.

19일 한화 이글스전에서는 2회 모창민에 이어 백투백 홈런을 때려내면서 시즌 첫 홈런을 기록했다.

20일 경기에 선발 출전하면서 통산 10번째이자 최고령 2000경기 출장을 달성했다[26] 타석에서의 기록은 4타수 1안타.

21일 SK 와이번스전에서는 6번 지명타자로 나서 3타수 2안타 2타점을 기록했다.

22일 경기에서도 4타수 2안타 2타점의 활약을 이어나갔다.

23일 경기에서마저 4타수 2안타 2타점의 매서운 타격감을 보여주면서 이번 SK와의 시리즈에서만 6안타 6타점을 기록했다.

8월 3일 한화 이글스전에서는 2회부터 대타로 출전하여 동점을 만드는 2타점 적시타를 쳐냈다. 이후 타선에 폭발로 역전승을 거두었다.

8월 5일 삼성 라이온즈전에서는 2회 첫 타석에서 백정현을 상대로 우측 담장을 넘기는 솔로 홈런을 쳐냈다. 시즌 2호 홈런. 5회에도 안타를 쳐내며 멀티 히트를 기록했다. 주로 대타로 나와 거진 좋은 활약을 보이는 편이다.

8월 10일 롯데 자이언츠전에서는 김태군의 대타로 8회 투입되었으나 박진형에 헛스윙 삼진을 당하며 물러났다.

8월 15일 KIA 타이거즈전에서는 3회 양현종을 상대로 솔로 홈런을 때려냈다. 시즌 3호이자 통산 333호 홈런.

20일 넥센 히어로즈전에서는 본인의 고척 스카이돔 마지막 경기의 첫 타석에서 좌측 담장을 넘기는 솔로 홈런을 때려냈다. 시즌 4호 홈런.

8월 26일 홈 경기에서 9회 상황에서 박진태를 상대로 시즌 5호홈런을 때렸다.

9월 2일 LG 트윈스전에서는 4회 2루 도루에 성공하며 역대 최고령 도루 기록을 다시 세웠다. 이전 펠릭스 호세의 41세 4개월 14일을 넘은 41세 6개월 25일의 나이로 달성한 기록. 타석에서는 4타수 1안타를 기록했다.

9월 24일 LG 트윈스전에서는 3대 1로 끌려가던 9회 무사 1, 3루 상황에서 대타로 나와 끝내기 역전 쓰리런 홈런을 때려냈다. 침체된 분위기 속에 어렵게 순위 싸움을 계속하던 팀에게 베테랑다운 선물을 안겨주었다.

9월 29일 넥센 히어로즈전에서는 4번타자로 선발 출장해 앤디 밴 헤켄을 상대로 3회 동점 투런 홈런을 날렸다. 이후 5회에 안타를 쳐낸 이후 대주자와 교체되면서 총 3타수 2안타를 기록했다. 이호준의 홈런으로 4-8 역전승을 거두며 팀은 3위 희망을 계속 이어가게 되었다.

대망의 은퇴 경기가 열리는 9월 30일 넥센 히어로즈전에서 4번타자로 다시 한번 출전하며 5타수 2안타 1타점 1득점을 기록하며 은퇴 경기를 제대로 즐기며 3위 결정전을 최종전까지 끌고 갔다.

파일:대형 이호준 그림.jpg

또한 NC 다이노스가 자체적으로 ' 어느 실패한 투수 이야기'라는 이름의 영상을 제작하였는데 보다보면 제법 뭉클해진다. 여기에 외야에는 NC 프런트가 6개월 동안 준비한 대형 이호준 캐리커쳐가 이목을 집중시켰다.

정규시즌 마지막에 은퇴 경기를 치렀으나 포스트시즌 엔트리에는 들었고, 대타로, 지명타자로 나와 그럭저럭 해주었다.

플옵 4차전 경기 중반 김태군의 대타로 나와 만 41세 8개월 13일로 포스트시즌 출전 최고령 기록을 깼으나 결과는 담백한 땅볼 아웃. 이후 박광열과 교체되었다. 팀이 14 대 5로 패하며 이 타석이 현역 마지막 타석이 되었다.

결국 이를 끝으로 길었던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3. 연도별 성적

3.1. 투수 성적

역대 성적
<rowcolor=#fff>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1994 해태 8 12⅓ 0 0 0 0 - 10.22 16 7 9 4 14 14
<rowcolor=#373a3c> KBO 통산
(1시즌)
8 12⅓ 0 0 0 0 - 10.22 16 7 9 4 14 14

3.2. 타자 기록

역대 성적
<rowcolor=#fff>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6 해태 17 18 .167 3 1 0 1 3 6 0 6 .389 .375
1997 54 126 .278 35 9 1 8 20 26 0 8 .556 .321
1998 121 422 .303 128 27 1 19 77 64 5 33 .507 .354
1999 107 312 .276 86 16 1 16 55 48 5 27 .487 .333
<rowcolor=#fff>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0 SK 61 190 .232 44 9 0 10 25 23 1 16 .437 .291
2001 80 286 .234 67 17 5
(3위)
8 30 44 4 21 .413 .287
2002 129 444 .288 128 24 2 23 64 76 5 49 .507 .358
2003 133 473 .290 137 20 1 36
(4위)
102
(5위)
86 9 78 .564 .389
2004 133 497 .280 139 22 2 30
(3위)
112
(1위)
87 7 73 .513 .368
2005 105 354 .271 96 16 1 21 65 59 5 55 .500 .367
2006 공익근무요원 복무[27]
2007 101 351 .313 110 22 1 14 71 56 3 34 .501 .368
2008 8 25 .200 5 2 0 0 2 1 0 1 .280 .231
2009 103 299 .298 89 14 1 16 55 40 0 36 .512 .369
2010 85 194 .278 54 9 0 8 46 19 1 21 .448 .342
2011 114 368 .253 93 12 0 14 62 41 2 45 .399 .333
2012 127 426 .300 128 26 0 18 78 55 3 77 .488 .407
<rowcolor=#fff>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13 NC 126 442 .278 123 25 1 20 87 46 2 61 .475 .362
2014 122 424 .271 115 20 0 23 78 59 3 70 .481 .371
2015 131 449 .294 132 25 0 24 110 48 0 68 .510 .381
2016 119 399 .298 119 20 0 21 87 46 3 67 .506 .396
2017 77 164 .299 49 10 0 7 36 13 1 21 .488 .366
KBO 통산
(22시즌)
2053 6663 .282 1880 346 17 337 1265 943 59 894 .491 .362


[1] 당시 고졸 선수들은 연고 지역 선수들에 한해 무제한 스카웃이 가능했으나 계약 기간을 11월 1일부터 15일까지로 제한하고 있었다. [2] 이후 프로선수 출신 아마야구 지도자 1호가 한대화다. [3] 이게 중요하다. 중고교 운동부시절 가출해본 선수는 꽤 있으나 프로가 되고 나서 가출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4] 심지어 프로데뷔 4년차에도 두어번 집을 나갔다고 한다. [5] 동네경찰 순찰차를 동원해서 가출한 이호준을 잡은 적도 있다고 한다. [6] 아버지의 증언으로 더 무서운 건 그렇게 두들겨 맞고 '아버지 다신 안 나갈게요'라면서 반성하던 이호준이 일주일도 안 되어 또 나간 적도 있다는 것이다. [7] 투수사진은 투수로 첫 데뷔한 94년의 모습이며, 타자사진은 1996년~1999년 사이 [8] 투수 시절 당시 LG 소속이었던 김재현에게 20홈런째를 허용, 20-20 기록 달성에 도움을 줬다. 그리고 김재현은 투수에서 타자로 전향시킨 계기를 마련해 준 값이라며 이호준의 FA 계약금 일부를 내놓으라고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9] 여담으로 이 시절에 2군감독이었던 김성근을 속여서 용돈을 받아서 나이트로 간 적도 있었다고 한다. [10] 사실 이 시절의 이호성은 하락세가 두드러진 시점이었다. [11] 타고투저현상이 본격적으로 두드러진 98년임에도 팀 최다홈런이 이호준의 19개 홈런, 팀 최고 타율이 .312를 기록한 장성호였을 정도로 타선이 빈약했다. 사실 93년 이후, 김성한, 한대화, 이순철과 같은 중심타자들이 모두 빠져나가 이종범 홍현우에 절대적으로 의지하던 해태 타이거즈의 타선에서 이종범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하고 홍현우가 살짝 아쉬운 한해를 보냈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로 볼 수 있다. [12] 85~97, 해태는 1995년에는 4위를 했음에도, 1989년 단일리그 시행 이후 유일하게 4위를 하고도 포스트시즌을 못나간 당시 제도의 희생양이었다. [13] 99년 이호준이 3루수비를 하는 모습 # [14] 언더핸드 에이스 이강철이 삼성으로 이적했고, 이강철의 보상으로 받아온 박충식은 부상으로 제대로 쓰지 못했다. 유동훈 박진철이 있긴 했으나 전년도 활약의 반등으로 매우 부진했다. 전통적인 투수왕국 해태였지만, IMF로 모기업이 파산하면서 투수자원의 유실이 계속되는 바람에 2000년에는 쓸 만한 투수가 최상덕, 오봉옥, 이대진 정도밖에 없었을 정도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15] 전신인 쌍방울부터가 알짜 선수는 진작에 팔려나갔고 그나마 있는 전력들도 심성보의 당뇨 발병, 조원우의 부상으로 난국을 맞이한 상태였다. SK로 바뀌면서 나름 타선을 보강하긴 했으나 장광호, 김충민, 추성건 등 주전급은 아니었던 선수들이 주로 합류했고, 이진영, 윤재국, 채종범 등의 신인들은 완전히 성장하지 못한 상태였으며, 김성래, 김호 등의 노장은 덤이었다. 그나마 SK에서 좋은 모습을 보인 타자는 중도영입된 틸슨 브리또 정도밖에 없었다. [16] 성영재는 병역비리에 부진이 겹쳐 2002년을 끝으로 방출된 반면, 이호준은 이후 SK의 중심타자로 10년을 쏠쏠하게 활약하며 이 트레이드는 해태의 대손해로 남았다. 그러나 이 트레이드는 이호준의 앞길을 터주기 위한 성격도 분명 존재했다. 2000년 해태는 유격수 홍세완의 입단으로 인해 정성훈 3루수 고정, 김종국 2루수/유격수 병행, 홍현우 2루수/1루수 병행, 장성호 1루수/좌익수 병행 식으로 포지션 연쇄 이동이 발생하면서 이호준의 활용범위는 직전 시즌에 비해 더욱 줄어들고 말았다. 반면 SK는 1루 주전이던 김성래가 노장으로 은퇴를 앞두고 있었기에 충분한 기회를 얻을 수 있던 상황. 실제 김성래는 이호준이 입단한 직후인 그해 8월 도중 은퇴했다. 아직까지 트레이드에 부정적 인식이 있던 당시였지만, 이를 이해하였는지 이호준은 자신을 트레이드시켰던 김응용 감독에게 섭섭함을 표한 적이 없으며, 경기장에서 90도로 인사하거나 은퇴 후에는 팔순 잔치에 참석하는 등 현재도 각별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다. [17] 병역기피 혐의에 대해서는 이미 공소시효가 지났기에 공소권 없음 처리되었으나, 팀 동료들에게 병역기피 브로커를 소개시켜준 혐의에 대해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승부조작 브로커였던 마모씨가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것과 비교해 보면 그 활약상(...)을 짐작할 수 있다. [18] 하지만 2005 시즌의 마무리는 좋지 못했는데, 시즌 마지막 경기였던 LG와의 경기, 만루에서 병살타를 치며 결정적인 찬스를 날려멱었고, 시즌 내내 2위였던 SK는 3위로 떨어진 후 4위 한화에게 패배하며 그대로 시즌을 마감했다. [19] 훈련소에 있을 때 부터 이미 무릎부상 때문에 훈련 못하고 뒤에서 항상 열외되었다. [20] 하지만 2011년 이후 SK에서 FA 자격을 얻어 타팀으로 이적한 이승호, 정대현, 윤길현, 정상호가 차례차례 망하거나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이것도 옛말이 되고 말았다. [21] 10여년 전 일본프로야구에 신규로 참가한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에도 야마사키 타케시라는 선수가 이호준과 비슷한 역할을 해냈다. 공교롭게도 둘의 플레이 스타일도 제법 비슷하다. [22] 수원KT위즈파크의 경우, 외야 관중석 석재 마감된 부분에 공이 맞고 도로 그라운드로 튕겨나오는 일이 잦은 편. 다행히도 이호준의 300호 홈런볼도 그라운드로 튕겨나왔고, 좌익수가 아무 생각 없이 회수해서 볼보이에게 넘기려는 것을 중견수 이대형이 챙겨서 NC 덕아웃으로 전달했었다. [23] 박재홍 해설은 이 날 엠스플 중계를 위해 마산에 왔다. 즉 박재홍 해설이 보는 앞에서 박재홍의 기록을 경신한 것이다. [24] 두 번째는 5년 뒤인 나성범 - 양의지 - 에런 알테어. 팀은 같은 NC 다이노스다. [25] 2016시즌 1호 홈런이다. [26] 20일 기준 41세 5개월 12일. 종전 기록은 이숭용의 40세 6개월 6일. [27] 병역비리 연루로 입대 후, 1년 만에 의병 전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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