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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어: Italo-brasileiros
이탈리아어: Italobrasiliani
1. 개요
이탈리아계 브라질인들은 브라질에 거주하는 이탈리아 출신 후손들을 의미한다. 브라질 백인 중 실질적으로 제일 인구가 많은 집단에 속하며, 이탈리아 디아스포라 가운데서 가장 규모가 큰 집단이기도 하다. 인구 규모는 3200만명 가량으로 추산되며, 오늘날에도 일부 인구는 모어로 베네토어를 사용한다고 한다. 이탈리아인들이 이민이 집중된 시기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사이에 기간[1]이었는데, 당시에는 아직 피렌체의 언어를 중심으로 한 표준 이탈리아어가 이탈리아 대중에게 완전히 보급되기 이전에 해당했다.2. 이민사
- 이탈리아계 브라질인들이 건설한 마을 중 하나인 노바 베네사(Nova Veneza), 새로운 베네치아라는 뜻이다.
초창기 이주민들은 대부분은 농민인 경우가 많았고 주로 19세기 중순부터 본격적인 개발이 이루어지던 브라질 남부 평야 팜파스 지대에 정착했다. 브라질 정부는 이탈리아인 이주자들이 브라질까지 오는 배편 비용을 댔고 현지 농장주들은 1년치 임금을 선불로 주고 자급할 수 있는 경작지를 내어주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1870년대 이후 이탈리아에는 포도나무뿌리진디병으로 포도원들이 망하면서 많은 농부들이 파산했는데 이렇게 파산한 농부들이 1년치 연봉 선불과 함께 인생역전을 노리고 브라질로 이민하였다. 상파울루에 정착한 인구도 많았는데 1901년 당시 상파울루 내 공장들의 직원 중 81%가 이탈리아인이었다.
1884년부터 1893년 사이 510,533명, 1894년부터 1903년 사이 537,784명, 1904년부터 1913년 사이 196,521명의 이탈리아인이 유입되었고, 1914년도 이후로는 10년 단위 이민자 인구가 10만 이하로 감소했다. 브라질로 이민 온 유럽계 인구 중 절반은 본국으로 돌아갔지만, 그럼에도 상당수의 이탈리아인들이 브라질에 성공적으로 정착했다. 1940년 이루어진 브라질 인구 통계에서 1,260,931명이 이탈리아 출신 부친을 두었다고 대답했으며, 1,069,862명이 이탈리아 출신 모친을 두었다고 답했다. 해당 통계들을 조합하면 1940년 당시 이탈리아계는 브라질 전체 인구의 약 3.8%를 차지했다.
이민을 들어오는 사람도 많았지만 이민 정착이 실패한 이후 이탈리아로 다시 돌아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농장을 건설하려다가 실패하는 경우도 많았으며, 노예제 잔재가 남아있던 브라질의 농장주들은 이주노동자들을 가혹하게 다루는 일이 많았고, 이렇게 돌아간 사람들을 중심으로 소식이 전해지자 한 때 프로이센(독일)과 이탈리아 정부에서 브라질 이민을 제한하기도 했다.
1903년부터 1920년 사이의 기간동안 이탈리아에서 브라질로 이민한 인구는 306,652명이었는데, 이는 같은 기간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인구 953,453명, 미국으로 이주한 인구 3,581,322명에 비해 상당히 적은 수치였다. 그럼에도 이탈리아계 브라질인이 이탈리아 디아스포라 가운데서 가장 규모가 큰것은 1990년대 이전에 브라질의 출산율이 미국과 아르헨티나에 비해서 월등히 높았기 때문인 영향이 컸다.[2]
2.1. 출신 지역
이탈리아계 브라질인들은 이탈리아 남부, 중부, 북부를 가리지 않고 각지에서 왔는데, 특히 베네토 지방 출신이 많았다.베네토 | 북부 | 365,710명 |
캄파니아 | 남부 | 166,080명 |
칼라브리아 | 남부 | 113,155명 |
롬바르디아 | 북부 | 105,973명 |
아브루초 | 남부 | 93,020명 |
토스카나 | 북부 | 81,056명 |
에밀리아로마냐 | 중부 | 59,877명 |
바실리카타 | 남부 | 52,888명 |
시칠리아 | 남부 | 44,390명 |
피에몬테 | 북부 | 40.336명 |
풀리아 | 남부 | 34,833명 |
마르케 | 중부 | 25,074명 |
라치오 | 중부 | 15,982명 |
움브리아 | 중부 | 11,818명 |
리구리아 | 북부 | 9,328명 |
사르데냐 | 남부 | 6,113명 |
1876년부터 1920년 사이의 이탈리아 출신 이민자들을 대상으로 한 출신 지방 집계, 총합 : 1,243,633 / 출처 : 브라질 지리학 통계 학회.
3. 문화
브라질 남부 지방에 정착한 이탈리아계의 경우 이탈리아 내 출신 지역의 방언과 풍습을 보존한 경우가 많지만, 상파울루와 리우 데 자네이루를 중심으로 한 인구 밀집 지대인 브라질 동남부에 정착한 인구는 여타 브라질인들과 급속한 동화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다만 식문화 쪽에서는 브라질인들이 오히려 이탈리아계에게 동화되었는데, 파스타나 피자는 말할 것도 없고 쌀을 주식으로 하던 기존의 브라질 요리와 마찬가지로 유럽에서는 쌀을 많이 먹는 편이던 북부 이탈리아 요리가 조합이 잘 맞는 편이었다.유럽인 대량 이민 이전 브라질의 노예 농장주들은 노예들에게 쌀과 콩만 줬다.[3] 즉 부유한 농장주나 귀족들이 먹는 음식은 포르투갈 요리와 흡사했지만 일반 노동자나 농민들이 먹던 음식들은 형편없던 수준이었는데, 이탈리아인들의 이민 이후 도입된 이탈리아 요리의 영향으로 브라질 요리는 균형잡힌 발전이 가능했다.
미국의 경우 독일계 이민자들이 동화 속도가 빨랐던 반면 이탈리아계가 비교적 동화 속도가 느렸던 것이, 브라질에서는 완전 반대 방향으로 나타났다. 1940년대 히우그란지두술 지방에서 집계한 통계에 따르면, 지역 인구 중 독일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인구는 393,934명이었으나 이탈리아어를 사용하는 인구는 295,995명이었다. 이탈리아 출신 이민자가 몇 배 더 많았음에도, 40년대 해당 지방에서는 독일어를 모어로 쓰는 인구가 더 많았다.
물론 브라질 내에서 독일계와 이탈리아계가 서로 따로 논 것은 아니고 서로 통혼이 흔했는데 브라질 남부 시골 지방의 이탈리아와 독일인 혼혈 주민들이 체격이 좋은 사람이 많아서 한 때 세계 모델 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도 했다.
4. 유명인
- 가브리엘 마르티넬리
- 네투 무라라
- 다나카 마르쿠스 툴리오
- 둥가
- 레오 보나티니
- 루카스 레이바
- 루이스 펠리페 스콜라리
- 루이스 펠리피 하무스
- 마우리시오 쇼군
- 브루노 라마스
- 아일톤 세나
- 알레산드라 암브로지우
- 에데르 마르틴스
- 이자벨 굴라르
- 이자벨리 폰타나
- 자이르 보우소나루
- 카미야 유우
- 티아고 모타
- 호드리구 산토루
- 필리페 루이스
- 펠리페 마싸
- 헤낭 로디
- 조르지뉴
- 알렉스 텔리스
- 에메르송 팔미에리
- 유미르 지오다투[4]
- 우구 카우데라누
- 에두아르다 피오레시[5], 마누엘라 피오레시, 카롤리니 피오레시[6]
- 하파에우 벨롤리
- 시키뉴 스카르파 : 브라질의 부자이자 셀레브리티로, 멀쩡한 자기 벤틀리를 마당에 파묻겠다는 노이즈 마케팅스러운 장기기증 캠페인을 벌였다.
- 에메르송 피치파우디
- 카티아 스코델라리우[7]
- 에우다 루사르두[8]
- 알레산드루 만시니
- 페페
- 명 바우지니
- 루이스 카를루스 사롤리[9]
- 카를루스 아우구스투
5. 관련 문서
[1]
이때 이탈리아인들이 남미로 이주한 경우가 꽤 많다.
엄마 찾아 삼만리도 주인공의 모친인 가난한 남부 이탈리아 여성이 아르헨티나로 이민가서 돈을 번 이야기이며, 19세기말의 소설(정확히는 사랑의 학교라는 소설의 일부)인데, 당시 이탈리아 통일 후 가난했던 남부 이탈리아의 상황을 보여준다.
[2]
예들 들면 미국에서 베이비붐이 절정에 달했던 1950년대 후반에 출산율이 3.7명이었는데, 동시대 브라질에서는 6명을 훌쩍 넘는 출산율을 기록했었고 미국의 출산율이 인구대체수준을 밑돌게 된것이 1970년대 중반인데 브라질은 2000년대 중반으로 브라질이 30년 넘게 늦다.
[3]
당시에는 영양학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돈을 아끼겠다고 한 짓으로, 이 때문에 노예들이 영양 불균형에 중노동이 겹쳐 상당수가 몇 년 못 가 죽으면서 결과적으로 농장주들에게 큰 손실이 되었다.
[4]
헤일리 비버의 외할아버지로 브라질 음악계의 거물.
[5]
통칭 두다. 한국인 남편과 함께 브라질에 거주하며 유튜브 패밀리김을 운영한다. 여동생들이 나오기도 한다.
[6]
종종 이탈리아식 손짓을 하기도 한다.
[7]
카야 스코델라리오의 어머니로, 딸과 영어로 대화한 적이 전혀 없다고 한다.
[8]
다리오 아르젠토의 어머니이자
아시아 아르젠토의 할머니로 사진사였다.
[9]
통칭 카이우 주니오르.
라미아항공 2933편 추락 사고 당시 샤페코엔시를 이끌던 감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