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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클럽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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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축구 선수 이근호의 클럽 경력을 정리한 문서.

2. 인천 유나이티드 FC

인천광역시 출신으로, 만수북초 5학년에 축구를 시작해 부평동중을 거쳐 하대성, 김승용, 백종환 등과 함께 임종헌 감독 아래서 부평고 황금 세대의 마지막 멤버로 활약했다.

부평고 졸업 후 지역 연고 팀이자 당시 신생팀 인천의 스카웃을 받고 프로 선수가 됐다. 하지만 1년 차엔 2군에만 머물며 N리그 이적을 고려했지만, 박이천 당시 2군 감독의 지도를 받으며 점차 성장했고, 2년 차 동계 훈련에선 최태욱이 떠나고 남은 등번호 11번을 물려 받는 등, 기대를 받는 선수로 성장했다.

그러나 여전히 1군에선 자리를 잡지 못했다. 대신 3년차, 2군에서 20경기 7골 7어시스트라는 돋보이는 활약을 펼쳐 2006년 R리그 MVP까지 차지하고 다른 팀의 관심을 받게 된다.

3. 대구 FC 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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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윤주일과 트레이드 상대로 대구 FC로 이적했다.

대구 FC에서 활동하는 2시즌 동안 이근호는 46경기 19골 9도움을 기록했으며, 외국인 용병 공격수들과의 득점 경쟁에서 가장 돋보이는 한국인이었다. 이 때의 활약으로 대구 FC의 엠블럼에 있는 태양 문양에서 따온 명칭인 태양의 아들이라 불리며 대표팀에도 승선해 맹활약을 펼친다.

3.1. 2007 시즌

등번호 22번을 달았다.

2007시즌 초반 변병주가 이끄는 총알축구의 선봉장이었으며, 대구 FC 유일의 국가대표선수였다.[1] 루이지뉴, 장남석, 이근호가 주축이 된 삼각편대를 중심으로, 후방에서 하대성 에닝요가 찔러주고, 진경선이 백업을 해주는 역할로 대구는 공격력의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당시 리그에서 이근호가 기록한 스탯만 봐도 태양의 아들이란 별명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잘 알수 있는데, 2007년 득점 랭킹 10위 가운데 국내 선수는 단 두 사람 이근호(8위/20경기 8득점) 우성용(9위/26경기 8득점) 뿐이었다. [2]

결국 리그컵과 FA컵을 포함해 시즌 29경기 10골 3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리그 베스트 11에 선정, 본격적으로 리그와 대표팀에서 주목을 받는 시즌이 됐다.

3.2. 2008 시즌

장남석이 9번으로 옮기자, 등번호 10번을 달았다.

리그 26경기 11득점을 기록하며 리그 득점 랭킹 5위에 오른다. [3]

하지만 국가대표 차출 이후 복귀했을 때 경기를 설렁설렁 뛴다라는 비판을 종종 받곤 했다. 일부 팬들은 스타 의식에 빠진건 아닌지 걱정할 정도. 그래서 당시 악의를 품은 이들이 붙인 별명이 이그노어였다.

리그컵과 FA컵을 포함해 시즌 35경기 15골 6어시스트를 기록하는 엄청난 활약을 펼치며 국내 선수 득점 및 공격포인트 1위를 기록하며 2년 연속 리그 베스트 11에 선정됐고, 리그 MVP 이운재를 제치고 조선일보 제정 2008 윈저어워드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

4. 주빌로 이와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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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FC와의 계약이 끝난 이후 K리그에서 전북, 수원, 서울, 성남 등 우승권 클럽들이 이근호와의 계약을 노렸다. 이근호는 주전 출장을 할 수 있으며, 향후 유럽 3대 리그로 진출하기에 용이한 유럽의 리그로 이적하길 원했고 겨울 이적 시장이 열렸을 때 프리미어리그 블랙번 로버스, 프랑스 리그 앙의 FC 지롱댕 드 보르도 파리 생제르맹, 네덜란드 에레디비지에의 빌럼 II, 덴마크 슈퍼리가의 오덴세 BK 등 여러 팀[4]에 입질을 했으나 진출에 실패한다.

결국 3월이 넘어서 K리그 팀과는 계약이 어려워진 이근호는, 국가대표팀에 계속 남아있기 위한 기량을 유지하기 위해 2009년 4월에 일본 J리그 주빌로 이와타와 3개월 단기 계약한다. 입단 초기에는 브라질리언이 아닌 한국인을 영입한다며 주빌로 이와타에 대한 혐한들의 비아냥도 있었지만 데뷔전 멀티골을 포함해 초반 6경기에서 6골 3도움이라는 호성적을 내면서 하위권에 머물던 주빌로 이와타를 단숨에 중위권까지 끌어 올리며 에이스가 되었다.

2009 6월, 유럽의 여름 이적 시장이 열리자 그 전 겨울 이적 시장에서 영입 전까지 갔다가 무산된 PSG에서 다시 입질이 들어왔다. PSG는 이근호의 에이전트 측에 선수를 영입하고 싶으니 주빌로 이와타와의 관계를 정리하면 좋겠다는 입단 의향서를 보냈고 에이전트와 이근호는 그 말대로 주빌로 이와타와의 관계를 정리했다. 하지만 2009년 7월 19일까지 PSG는 이근호에게 아무런 제의를 하지 않아 이적이 불발되었고[5] 다시 주빌로 이와타와 1년 계약을 맺게 되었다.

PSG에게 이근호가 두번이나 물을 먹자 여론은 "J리그보다 K리그가 좋다더만 결국은 J리그에서 뛰냐?"라며 이근호를 욕하는 부류와 "에이전트가 계약도 제대로 못한다."며 에이전트를 비난하는 부류, 그리고 " 역시 프랑스 놈들이라 계약을 엿같이 한다."라며 PSG를 욕하는 부류로 나뉘고 있다.

2009년 후반기 팀에 복귀해서도 좋은 활약을 계속해서 보여줬다. 복귀전 득점, 시즌 중반 4경기 연속골 등 2009시즌 J리그에서 24경기 12골 5도움을 기록하며 주빌로의 태양이라는 호칭과 함께 팀의 에이스 역할을 톡톡히 했다.

2009년 초반까지만 해도 국대 No.1 공격수로 불리며 최종 예선에서 이근호의 파트너로 정성훈, 박주영 그리고 이동국 등이 경쟁하는 구도라며 언론에서 설레발을 떨정도의 최고의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적 이후 K리그보다 압박의 강도가 덜한 J리그에서 뛰고[6] 이적 파동으로 마음고생을 하면서 폼이 심각하게 하락했다.

이러한 여파는 2010 시즌이 되어 심각한 부진으로 이어졌다. 리그 12라운드 동안 리그에서 한 골밖에 기록하지 못하였다. 게다가, J리그 진출 이후 1년 반 동안 A매치에서 1골밖에 기록하지 못하는 허정무호에서도 점차 입지를 잃어갔고, 결국 2010년 5월 31일 발표된 남아공 월드컵 국가대표 최종 엔트리에서 구자철, 신형민과 함께 탈락하였다.[7]

5. 감바 오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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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이후 FA가 된 이근호는 2010년 6월 J리그 감바 오사카로 이적했다. 하지만 첫 시즌 활약은 두드러지지 못했다.

2011 아시안컵 이후 조광래호에 선발돼 약 1년 만에 A매치 득점을 하고 복귀한 2011 시즌서 화려하게 부활한다. 시즌 첫 경기인 ACL 조별 E조 1라운드 멜버른 빅토리 FC전 1골 2도움을 기록했고, 2차전 텐진전에서도 골을 기록했다. 이후 4월 야마가타전부터 3경기에서 1골 4도움을 기록하는 등 몸을 끌어올렸고, 6월 22일 리그 선두 가시와레이솔전부터 7월 27일 가시마 앤틀러스전까지 8경기 7골 4도움을 기록하는 맹활약을 펼쳤다. 이 기간에 5경기 연속골을 기록하기도 했다. 또 제주와의 챔스 경기에서는 도움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러한 활약에 힘입어 국대에서도 세르비아, 가나와의 평가전에 연달아 출전하며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조광래식 만화축구 하에서 스코어러 역할은 물론 왕성한 활동량, 미들과의 연계한 상대 공격진 예봉차단 임무까지 몽땅 떠맡은 박주영을 빠른 스피드로 보좌하며 또 다른 공격옵션이 되었고 상대팀 공격진의 섣부른 전진을 막아내는 역할도 준수하게 이행했다.

2011 시즌 J리그 득점왕에 가까이 가기도 했으나 이루지는 못했고 리그 32경기 15골 15도움, 챔스 7경기 2골 3도움으로 J리그 공격 포인트 1위와 J리그 베스트 11 후보에도 오르는 등, 커리어 하이 시즌을 맞으며 시즌을 마감한다.

6. 울산 현대 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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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시즌이 끝나고 군문제 해결을 위해 K리그로 복귀하기 위해 전북, 수원, 울산과 접촉했다. 그러나, 시즌 초반 감바 오사카와 가계약을 체결한데에 따른 위약금 문제와 국내로 복귀할 경우 대구 FC에게 줘야하는 FA 보상금 약 15억원이 문제가 생기며 이적에 차질이 빚어졌다.

결국 2012년 1월, 울산 현대로 3년 계약을 맺으며 K리그에 복귀했다. 감바 오사카와의 위약금 문제는 이근호 본인이 자비로 위약금을 내며 해결했고, 국내 소유권 보유하고 있던 대구 FC에게는 울산 구단이 이적료 10억과 이진호를 트레이드하며 성사되었다. 등번호 11번을 달았다.

국내 복귀 이후에는 그야말로 사기유닛의 재림. 머리까지 노랗다!! J리그 득점왕 근처까지 간 게 플루크는 아니었다는 듯이 종횡무진하고 있다. 다만, 골 결정력은 여전히 부진했으나 몸상태가 절정에 올라간 시즌 후반엔 그런 것도 없어졌다.

국대에서는 이청용의 공백으로 인해 붙박이 주전으로 복귀. 활약도 점차 나아지더니 최강희호에서는 이동국과 함께 맹활약중이다.

2012 시즌 김신욱과 함께 빅 앤 스몰 조합의 정수를 보여주고, 마라냥, 김승용, 하피냐 등과 최강의 공격진을 꾸리며 팀을 AFC 챔피언스 리그 무패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러한 성적을 인정받아 2012년 AFC 올해의 선수상을 수여받았다. 이는 1991년 김주성 이후 21년만이며, 현행 체재로 개편된 2002년 이후로는 한국인 최초 수상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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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기존의 대표팀 주력이던 유럽파들이 부상과 부진을 이겨내지 못하는 힘든 상황에서 한국 국가대표팀에서 빠질 수 없는 에이스로 발돋움했다.

K-리그 33경기 8골 6도움, ACL 12경기 4골 6도움, FA컵 2경기 1골, 클럽월드컵 2경기 1골 등 총 시즌 49경기 14골 12도움을 기록했다.

6.1. 상주 상무 FC (군 복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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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종료 후 입대를 선택, 13~14 시즌은 K리그 챌린지의 상주 상무에서 보내게 되었다.

6.1.1. 2013 시즌

2013년 K리그 챌린지에서 이근호의 활약상은 한마디로 2부 리그에서 혼자 메시 놀이 했다.

챌린지 원년인 2013년 리그 25경기 15골 6도움을 기록, 개인 프로 커리어 첫 득점왕과 MVP를 수상했다.

6.1.2. 2014 시즌

2014년 상주 상무 FC K리그 클래식으로 승격하면서 2년 만에 1부 리그로 복귀했다.

그러나 이근호의 활약상은 주춤한다. 일단 클래식과 챌린지는 리그 수준이 다른 데다가, 상주가 품고 있는 근본적인 한계점인 입대와 전역에 따른 스쿼드 변경이 걸림돌이 되었다.

2013년 11월 김재성, 김형일, 백지훈 등이 전역했고 상주 돌풍의 주역 이상협 최철순마저 2014년 4월 전역하면서 졸지에 절름발이 팀이 되어 버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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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7월 25일 올스타전에 참가했다. 그런데 올스타전 홍보용 티저 동영상에서 상주에서 서울 월드컵 경기장까지 트랙터를 몰고 상경한다는 개그 컨셉을 선보이며 빵 터진 네티즌들의 폭발적인 호응을 얻어냈다. 맛스타 홍보는 덤 [8]

K리그 올스타 with 박지성 팀 티저 영상 / 영상=프로축구연맹

2018년 아시안게임 축구로 회자되는 원사 손흥민 짤의 원본이 바로 이 시절의 이근호가 국대로 뽑혔을때 나온 사진이다. #

7. 엘 자이시 SC

상주 상무 FC에 있는 동안 월드컵에서 득점을 한 게 중동 클럽들의 관심을 받기 충분했다. 결국, 2014년 9월 5일 카타르 스타스 리그 소속의 엘 자이시 이적이 확정되었다. 9월 16일 상주 상무에서 제대한 뒤 9월 18일부터 엘 자이시에 합류할 예정이다. 엘 자이시는 아랍어로 군대, 육군을 의미한다.

그러나 2015 AFC 아시안컵을 다녀온 뒤로 폼이 확 죽어버렸다.

그런 가운데 7월 24일, 전북 현대 모터스에서 이근호를 임대했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링크

7.1. 전북 현대 모터스 (임대)

2015년 7월 24일 전북 현대 모터스로 6개월간 임대 이적했다. 등번호 33번. 이동국의 골을 돕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이적 초기만 해도 폼이 전혀 돌아오지 않은 듯, 매우 좋지 못 한 경기력을 보이며 욕을 잔뜩 먹었으나 나중에는 적응이 되었는지, 완전히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특히 이동국이 더 이상 나이를 숨길 수 없고, 실질적 포지션 경쟁자인 한교원은 이근호에게 밀려 풀백 기용까지 고려하고 있으니 사실상 윙어 자리를 레오나르도와 함께 자리 잡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제는 완전 이적 가능성인데 현재로서는 주급이 높아서 어렵다고 보인다.

2015년 기록은 15경기 4득점 1도움.

전북에서의 임대 종료 이후 원 소속팀인 엘 자이시로 복귀했으며 얼마 후 소속팀과의 계약 해지로 FA가 되었다. 관련 기사 이후 전북 현대 모터스 울산 현대 두 곳중 한군데로 복귀를 타진했지만 엘 자이시로부터 계약 해지서를 18일이나 지나서야 받게 되어 절차가 늦어졌고 이 때문에 K리그 복귀가 사실상 무산되었던 상황이었다.

8. 제주 유나이티드 FC

3월 25일 제주 유나이티드 FC로 이적했다는 소식이 나왔다. 기사 2016년 제주 유나이티드에서 활약하다 다음 시즌 전북 현대 모터스로 이적했던 로페즈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영입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리그 개막하고 입단한 몸이라 다른 선수들과 호흡이 맞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빠른 스피드와 돌파력으로 제주에서는 좋은 활약을 보여주고 있다.

10월 23일 35라운드 전남 전에서 2도움을 기록하며 리그 통산 42번째 30-30 클럽에 가입하게 된다. 역대 제주 소속 선수 중 최초의 기록자가 됐다.

11월에 결혼할 예정이라고 한다![9]

9. 강원 FC

12월 9일 갑작스럽게 승격 구단 강원 FC로의 이적을 확정지었다는 기사가 떴다![10]

왜 아챔 나가는 구단을 떠나 다이렉트 강등될지도 모르는 도민구단으로 가나 했더니 강원이 잔류를 위해 돈을 어마어마하게 썼다고 한다. 상세한 액수는 밝히지 않았지만 3년 20억 이상이라고 한다. 본인에 의하면 선수 생활 마지막을 강원 FC에서 보낼 것이라는 듯.

9.1. 2017 시즌

드디어 개막한 K리그 클래식 첫 경기에서 상주 상무를 상대로 2골을 집어넣었다. 완벽한 윙어의 모습을 보여줬고, 헤딩으로도 득점을 만들어냈다. 또한 정조국 - 이근호나 문창진 - 이근호 이 연계가 나오면서 팀의 핵심적인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 이후 강원 FC 최고의 윙어로서 맹활약했고, 상주 상무 경기 이후 FC 서울전에서 1골을 넣으면서 현재까지 3골 2도움이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2017년 5월 22일, 슈틸리케호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지역예선(아시아)/최종예선/A조 이근호를 국가대표로 선발했다. 이근호가 강원 FC 역사상 최초의 국가대표 선발 선수라는 명예로운 기록을 남겼다.[11] 슈틸리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 감독은 '지난 주말 (강원의) FC서울 원정 경기를 현장에서 지켜봤는데 이근호가 예전의 날카로움을 되찾았다. 이번 명단을 구성할 때 과거 우리와 함께한 경험까지 모든 것을 고려했다.'고 발탁 배경을 밝혔다.

수원 삼성 블루윙즈전 2골으로 1:3에서 3:3으로 따라잡은 극적인 무승부를 도왔다.

대구전에서도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결승골 장면에서 스프린트 다음 결정적 패스는 백미.

스플릿 이전 정규 33라운드 전 경기 출전 3036분이라는 엄청난 출전 시간을 기록했다!!![12]

37라운드 FC 서울전에서 김승용에게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리그 통산 16번째 40-40 클럽에 가입하게 됐다.

시즌 최종 성적은 37경기 8골 9도움으로 리그 베스트 11에 선정됐다. 역대 강원 소속 선수 중 최초로 K리그 클래식 시즌 베스트 11 수상자가 됐다.

한편 시즌이 끝난 뒤 이근호의 도움으로 AFC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쟁취했던 울산 현대에서 이근호의 재영입을 추진했으나, 강원 측에서 20억이라는 어마어마한 이적료를 제시하면서 결국 영입을 철회했다.

9.2. 2018 시즌

시즌을 앞두고 김승용, 김오규와 함께 부주장에 선임됐다. 하지만, 주장 정조국이 주전 경쟁에서 밀려 주로 조커로 나서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거의 매 경기 주장 완장을 달고 나오는 실질적 주장이다.

시즌 개막전 인천 유나이티드와의 경기에서 맹활약하며 어시 하나를 추가했고 연이은 FC 서울전에서도 이웅희의 자책골을 유도하면서 맹활약했다.

3라운드에서는 엄청난 드리블을 앞세워 상주 상무를 괴롭혔고 어시 하나 적립하며 활약했다.

4월 21일 전남 원정에서 멀티 도움을 기록하며 도움 단독 선두에 올랐다.

5월 19일 경남 FC와의 경기에서 부상을 당해 아웃됐다. 리그는 휴식기라 당장은 영항 없지만 대신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에 출전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번 시즌 전반기에서 지난 시즌보다는 활약이 저조했다. 이번시즌 아직까지 골 없이 4도움 만을 기록중

5월 28일 이근호가 친청팀 울산 현대로 이적한다는 단독 기사가 나왔다. 그러나 팀 간 협상에서 난항을 겪고 있어 이근호의 행선지가 어디일지는 기다려봐야 알 듯 하다.

10. 울산 현대 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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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20일, 길고 긴 협상 끝에 울산과 '2.5+1년' 계약을 맺었다. 이근호가 35세가 되는 2020년 말까지 울산에서 뛴 후, 1년 계약 연장을 검토한다는 옵션이다. 선수 소개 멘트는 울산의 영광재현, 내가 이끈다였다. [13]

10.1. 2018 시즌

강원 FC전에서 0:1로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헤딩 동점골을, 2:2로 맞선 상황에서 역전골을 집어 넣으며 친정 팀에 비수를 꽂았다. 팀은 3:3 무승부.

10.2. 2019 시즌

하지만 2019 시즌 들어서는 무릎 부상으로 시즌 초반을 날려 먹었고, 9라운드 경남 FC전에서 교체 명단에 포함되어 경기 종료 직전 주니오와 교체 투입되면서 시즌 최초로 그라운드를 밟았다.

13라운드 성남 FC전에서 주니오의 프리킥이 수비벽 맞고 흐른 것을 그대로 밀어 넣으면서 이 경기의 결승골이자 시즌 마수걸이 골을 성공시켰다.

16라운드 포항 스틸러스와의 동해안 더비 경기에서 '이근호 DAY'를 진행해 사비로 준비한 1억원 상당의 경품을 울산문수축구경기장을 찾아준 팬들에게 선물했다. [14]

ACL 16강 1차전 우라와 레즈 원정에서 주민규의 헤딩 동점골을 어시스트하는 등 좋은 활약을 보였다. 그러나 울산은 홈에서 굴욕적인 0-3 패배를 당하며 탈락했고, 전북까지 상하이 상강과의 승부차기 끝에 패배하며 2019 시즌 ACL에서 K리그는 전멸했다.[15]

28라운드 인천 유나이티드전에서 측면에서 날아온 빨랫줄 같은 크로스를 좋은 헤딩골로 마무리하며 다시 앞서가는 득점을 성공시켰다.

10.3. 2020 시즌

2020년 7월 25일 상주 상무와의 경기에서 후반 86분 이동경에게 준 패스가 골로 연결되어 1어시를 적립, K리그1,2 통합 통산 10번째 50-50 클럽에 가입하였다.

24라운드 상주 상무 전에서 후반 72분 교체투입되었다. 투입된 지 7분만에 날카로운 크로스로 비욘존슨의 헤딩골을 어시스트했다.

27라운드 광주 FC전에서 좋은 호흡으로 이동경의 추가골을 어시스트했다.

AFC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주로 교체로 출전하며 우승에 기여했다. 한편 2012년 울산의 아챔 무패 우승시절 MVP였던 그는 2020년 울산에서 다시 AFC 챔피언스리그 무패 우승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우승이 현역으로서 마지막으로 트로피가 된다.

시즌이 끝나고 울산이 베테랑 선수들을 정리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이근호도 포함되어있다.

결국 2021년 1월 18일 친정 대구 FC와 임대 협상 중이라고 단독보도가 나왔다.

11. 대구 FC 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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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 19일에 1년 임대를 통해 07~08시즌 대구의 전성기를 이끈 태양의 아들의 대구 복귀가 확정되었다. 등번호는 대구 첫 입단시에 달았던 22번이다.

11.1. 2021 시즌 (임대)

시즌 개막 전 국제축구선수협회인 FIFPro에서 시상하는 FIFPro Merit Awards 최종 후보에 올랐다.

개막전 수원 FC와의 경기에서 교체 출전하며 대구 복귀전을 치렀다.

3라운드 광주 FC와의 홈경기에서 교체 출전함으로서 K리그 통산 300경기 출전을 달성했다. 후반 40분에 상대 페널티 박스 근처에 있는 상태에서 광주에게 역습을 당하자 전력질주하여 순식간에 대구의 골문 앞으로 진입, 이순민의 슈팅을 몸으로 막아내는 살신성인의 슈퍼세이브를 한 차례 보여주면서 대구 팬들의 심금을 울렸다. 영상

3월 21일자 리그 6라운드 울산 현대 전에 선발로 나왔다.[16] 후반 10분경에 찾아온 절호의 찬스를 날려먹었지만 팀이 선제골을 먹히고 난 직후인 후반 30분경에 세징야가 만들어준 찬스를 놓치지 않고 받아먹어 동점골을 기록해 원 소속팀에게 비수를 꽂는 대구 복귀골을 신고했다.[17] K리그 통산 74호골로 부천의 레전드 이원식을 넘어 통산 득점 단독 21위에 올랐다. 그리고 세징야의 역전골까지 관여하면서 대구의 첫 승을 이끌었다.

5월 1일의 리그 13라운드 수원 FC 원정에서는 74분에 경기의 행방을 결정짓는 4번째 쐐기골을 꽂아넣으며 팀의 4:2 승리에 기여했다.

AFC 챔피언스 리그 조별리그 1차전 후반 시작과 함께 교체 투입돼 박스 우측에서 크로스를 올려 세징야의 역전골을 어시스트했다. 하지만, 팀은 2:3으로 역전패 당했다.

2차전 유나이티드 시티 FC전에는 선발 출전하여 전반 42분 상대 진영에서 소유권을 얻자마자 에드가에게 패스했고, 에드가가 논스톱 슈팅으로 골을 기록하며 이근호는 두 경기 연속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그리고 후반 32분에는 역습 상황에서 안용우에게 크로스를 전달해 멀티 어시스트를 기록하고 후반 34분 오후성과 교체되어 나왔다.

6차전에서 다시 만난 유나이티드 시티 전에서는 코너킥 상황에서 흘러나온 볼을 다시 밀어넣어준 롱 패스를 홍정운이 머리로 받아준 것을 날아차기로 골망에 꽂아넣으며 추가골을 만들어냈다.

FA컵 4강전에선 후반에 츠바사와 교체되어 들어와서 라마스의 데뷔골이자 결승골을 어시스트하는 활약을 했으나 이후 찾아온 결정적인 슛이 골대에 맞으며 팬들의 탄식을 샀다.

36라운드 수원 삼성과의 홈경기에선 라마스의 프리킥을 머리로 집어넣어 선제골을 기록하고 후반 시작과 동시에 에드가와 교체되었다.

FA컵 결승전 2차전에서 후반 85분에 투입되었지만, 경기를 뒤집진 못했고 결국 준우승을 했다. 여담으로 리그, 챔스를 우승해본 이근호가 못 든 트로피가 FA컵이었는데 결국 무산되었다. 23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하여 선수로서 FA컵 우승은 이룰 수 없게 되었다.

2021 시즌 기록은 리그와 FA컵, ACL을 합쳐 42경기 출전 4골 4도움. 그야말로 대구는 뽕값은 다 뽑은 셈. FA컵을 끝으로 임대가 종료되었는데 임대를 더 늘릴지 울산으로 복귀할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11.2. 2022 시즌

2022년 1월 10일 대구는 이근호 완전 영입을 공식 발표했다. 계약기간은 1년이다.

AFC 챔피언스 리그 플레이오프 부리람 유나이티드와의 경기에서 승부차기 3번 키커로 나와 골을 성공 시켰다.

태국 부리람에서 개최되는 AFC 챔피언스 리그조별리그에 참가하여 1차전 산둥 타이산과의 경기에서 전반 15분 오른쪽 측면에서 황재원이 깔아차주는 크로스를 해주었고 이근호가 그걸 살짝 방향만 바꿔 선제골 넣었다. 그리고 5차전 산둥과의 리턴매치에서도 후반 56분 산둥수비수들과 대구 공격수들이 볼경합 도중 튀어 나온 볼을 반대편에 있던 이근호가 이번에도 방향을 바꿔 헤더로 골을 기록하였다.

6차전 라이언 시티 세일러스와의 경기에서 후반 시작과 함께 안용우와 교체되어 들어왔다. 그리고 후반 54분 왼쪽 측면에서 홍철이 올린 크로스가 제카를 지나가 이근호 앞으로 스쳐 지나갔고 이근호가 몸을 던져 공을 라이언 시티 골문안으로 집어 넣었다. 그리고 이 골을 기점으로 갑자기 폭우가 내리기 시작해 한 시간 정도 경기가 지연되었고 이후 재개 된 경기에서 온몸을 던져 공격과 전방 압박을 하다 대구가 역전골을 넣은 이후 홍정운과 재교체되어 나왔다.

8월 16일부터 김진혁에서 세징야로 주장이 바뀌면서 부주장을 오승훈과 함께 역임하게 되었다.

33라운드 FC 서울 홈 경기에서 후반 68분에 황재원이 올려준 크로스를 헤더로 양한빈을 맞고나온 볼을 침착하게 넣어 시즌 첫 골을 기록하였다.

38라운드 성남 FC와의 원정경기에서 교체투입 되어 팀의 4번째 골을만들어냈다.

22시즌 기록은 리그와 FA컵, ACL을 합쳐 40경기[18] 출전 5골 1도움. 이번 시즌을 끝으로 계약이 만료가 되는데 차기 시즌에 어떻게 될지는 정해지지 않았다.

현재 소속 선수들 중 몇몇이 계약만료나 상호 합의 해지, 이적 등으로 팀을 떠난 상황에서 차기 시즌을 준비하는 대구의 남해 1차 전지훈련에 참여한 것을 볼때 적어도 다음 시즌까지는 동행할 것으로 보인다.

11.3. 2023 시즌

지난 시즌에 이어 부주장직을 연임한다.

FA컵 3라운드 천안과의 홈경기에서 선제골이자 시즌 첫 골을 넣으며 다음 라운드 진출에 기여했다.

11라운드 울산 현대와의 홈경기에서 후반 시작과 동시에 바셀루스를 대신해 교체 투입되었으나 팀은 이미 전반에만 3골을 허용한 뒤였다. 별다른 활약 없이 팀은 0:3 패배했다.

12라운드 포항 스틸러스와의 홈경기에선 37분에 케이타의 동점골을 어시스트하며 시즌 첫 도움을 기록했다. 그리고 이 도움으로 인해 1부에서의 40-40 기록을 달성했다.

13라운드 광주 FC 원정에서 왼쪽 윙어로 선발 출전하여 63분을 소화하고 이용래와 교체되었다. 팀은 박세진, 고재현의 골로 2:0 승리를 거두었다.

16라운드 FC 서울과의 홈경기에서 후반 89분 세징야를 대신하여 교체투입되었다. 팀은 세징야의 선제골을 잘 지키며 1:0 승리를 거두었다.

17라운드 전북 현대 모터스 원정에서 팀이 0:1로 지고 있어 후반 87분 조진우를 대신해 교체투입되었다.

20라운드 수원 삼성 블루윙즈와의 홈경기에서 56분 부상당한 이용래를 대신하여 교체 투입되었으나 이후 경합 과정에서 부상을 입어 무릎이 부은 듯한 모습을 보였고 수원의 거친 태클까지 당하면서 결국 80분 박세진과 다시 교체되었다.

23라운드 광주 FC 원정에선 22분에 황재원의 크로스를 키퍼가 제대로 처지하지 못하고 티모를 맞고 튕겨 자기한테 떨어지자 그대로 빈 골문에 집어넣으며 동점골을 기록, 팀을 패배에서 구하며 리그에서 첫 골을 기록했다.

27라운드 FC 서울 원정에선 24분에 세징야의 프리킥을 조진우가 받아서 떨궈주자 백헤더로 받아서 동점골을 기록,[19] 리그 2호골을 기록한 후 후반 시작과 동시에 에드가와 교체되었다.

34라운드 전북 현대 모터스와의 홈경기에서 1대1 상황에서 교체로 출전하였지만 1대2로 패배하였다. 경기 종료 후 과거 임대로 뛰었던 전북이기도 해서 전북 팬들에게 인사를 하였고 전북 팬들도 이근호 이름을 외쳤다.

35라운드 친정팀 울산 현대와의 원정경기에서 선발로 나와 선수로서 마지막으로 문수의 땅을 밟았지만 경기력은 그리 좋지 못했으며, 0대0으로 전반을 마치고 후반 시작과 동시에 교체되었다. 그러나 팀은 0대2로 패배하였다. 경기 종료 후 가장 오래 뛴 친정팀인 울산 현대이기에 울산 현대 팬들에게 인사를 하였고 울산 현대 팬들도 이근호 선수의 은퇴의 아쉬움과 그리움으로 이근호 이름을 크게 외치며 작별인사를 하였다.

36라운드 광주 FC와의 달빛 더비 홈경기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32분에 교체 아웃되었고 팀은 1대1로 비겼다.

37라운드 포항 스틸러스와의 경북 더비 원정경기에서 전반 45분에 교체 아웃되었고 팀은 0대1로 패배하였다. 포항팬 중 한 팬이 LED로 이근호를 응원하는 글을 보여주는 훈훈한 일도 있었다.

시즌 마지막 경기인 38라운드 인천과의 홈경기에서 선발로 출전했으며, 60분동안 경기를 소화하고 박세진과 교체되며 선수 커리어를 마무리지었다. 이후 발표된 38라운드 베스트11에 선정되었다.

12. 은퇴

2023년 10월 16일 대구 구단은 이근호 선수가 공식적으로 현역 은퇴를 선언한다고 발표했다. 파이널 라운드 5경기 후 시즌 마지막 홈경기이자 데뷔했던 고향 팀인 인천 유나이티드와의 리그 최종전에서 은퇴식을 가진다고 밝혔다. #



이후 미디어데이 인터뷰에서 최원권 감독은 대구에서 좀 더 뛰는 것이 어떻겠냐고 이근호를 만류하였지만, 선수 본인이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고사하였다고 한다. 또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지도자 과정을 준비할 계획이라고 하였다. # 나중에 지도자를 할텐데 아마 지도자는 대구 FC, 울산 현대, 강원 FC, 인천 유나이티드 FC, 전북 현대 모터스, 제주 유나이티드 FC같은 친정팀 중 한팀에서 지도자 생활을 할 것으로 보인다.

[1] 물론 당시 선수들 기준이다. 오장은, 홍순학, 진순진 등의 선수들이 국가대표 경력이 있었다. [2] 참고로 같은 해 득점 랭킹 안에 든 외국인 공격수들의 면면을 살피면 몰라 뭐야 그거 무서워 소리가 절로 나올 이름들 투성이다. 26경기 26공격포인트를 기록하며 역대급 데뷔시즌을 보여준 득점왕 까보레를 필두로 K리그 역사상 최고의 공격수중 한명인 데얀, 신으로 불리운 사나이 모따, 까보레와 함께 경남의 돌풍을 이끈 뽀뽀, 대전의 6강 플옵 진출을 이끈 데닐손 슈바, 이해가 커리어 하이였던 스테보 등 K리그를 거쳐간 무수한 외국인 공격수들 가운데도 믿고 쓰는 정도가 아닌 역대급 소리를 들을 쟁쟁한 선수들이 휩쓸 때였다. [3] 여담으로 한가지 재미있는 기록이 있는데 이해 득점 랭킹 10위 안에 대구 선수가 무려 세 사람이나 있었다. 이근호 장남석(6위/24경기 10득점) 그리고 에닝요(10위/19경기 8득점). 훗날 전북에서 닥공 축구의 핵심 멤버로 활약하며 60-60 클럽에 가입한 그 선수 맞다. 울산으로 이적한 루이지뉴(7위/19경기 9득점)까지 합친다면 대구FC는 그야말로 공격수의 산실인 셈이었다. 갈락티코스도 아닌 일개 시민구단에서 득점 랭킹 10위 안에 공격수 3명이 들어간다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결과인데, 당시 변병주 감독이 극단적인 공격축구를 표방했기 때문에 벌어진 현상이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해 팀 득점 1위였지만 실점도 독보적인 1위라 리그 순위는 11위에 그쳤다. [4] FA로 풀린 이후 빌럼 II와 계약 성사 직전까지 갔으나 파리 생제르맹이 이근호의 영입을 추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이근호 측에서 계약을 무산시켰고, 그 후 파리 생제르맹과 계약 성사 직전까지 갔으나 비유럽인 등록 기간 문제로 이 역시 무산된다. 당시 파리 생제르맹 측에서 다음 이적시장이 열릴 때 까지 6개월간 뛸 팀을 추천해준다며 알려준 팀이 덴마크의 오덴세였으나 정작 오덴세 측에서는 6개월 계약은 맺어줄 수 없다는 입장을 표했다고 한다. [5] 폴 르구엔 감독이 경질되면서 이근호는 더 이상 팀의 우선 타겟이 아니게 되었고, 만일 이적한다 하더라도 PSG는 이미 공격수 보강을 마친 상황이여서 주전 출장을 보장받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6] 압박의 강도가 덜하니 골 넣기는 K리그보다 수월하지만 장기적으로 선수의 성장에는 좋지않은 영향을 미친다는게 중론. 베어백 재임 시절 국대 원톱 이었던 조재진은 K리그 시절 골 결정력은 떨어졌지만 왕성한 활동량과 몸싸움으로 동료들에게 많은 기회를 제공해주던 선수였는데 J리그 진출 이후 장점이던 왕성한 활동력을 잃어 버렸다. [7] 강민수는 곽태휘의 부상으로 인하여 대체선수로 뽑혔다. [8] 실제로 트랙터는 서울에 있는 트랙터 업체 본사에서 옮겨다 놓았다. 이근호는 올스타전 후반에서 말년 병장다운 구라빨을 세우며 상주에서 서울까지 자신이 몰고 왔다고 허풍을 쳤다. [9] 여담으로 이근호 선수는 백종원의 3대 천왕 짝꿍 특집편에 이휘재의 짝꿍으로 출연했는데 이휘재의 소개로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되었다고 밝혔다. [10] 이로써 17시즌 기준 K리그 12개 팀 중 절반이 넘는 7개 팀에서 뛰어본 선수가 되었다. 지금까진 모은 유니폼은 10개로 그 풍운아 이천수와 동일한 숫자다. 17시즌 만 32세로 선수생활 몇년 더 할수 있어서 추가할 가능성도 높다. [11] 런던올림픽 대표까지 포함하면 당시 강원 소속이던 오재석이 있다. [12] 놀랍게도 1위가 아닌 2위다. 경고누적과 지친 체력으로 인해 2위이다. 1위는 광주 FC의 송승민. [13] 결국 이근호는 영광 재현을 이끌었다. [14] 여담으로 유튜브 K리그 콘텐츠 채널인 아싸풋볼의 바로 앞 번호가 차량 경품에 당첨됐다고 한다. [15] 우라와의 2차전에 이근호는 결장했다. [16] 작년까지만 해도 임대 이적 시 원 소속 구단과의 리그 경기에서는 특별한 조항을 넣지 않는 이상 출전이 불가능했으나, 올해부터 이 규정이 폐지됐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다. [17] 임대 신분이어서 그런지 세레모니는 하지 않았다. [18] # 선수 본인의 이야기에 따르면 대구의 이번 시즌 모든 경기 엔트리에 들어 경기장을 찾았다고 한다. K리그에서는 31경기 출전. [19] 처음엔 파울로 인해 득점이 취소됐으나, 온필드 리뷰 후 득점이 인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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