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8-28 10:48:31

육납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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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기타

1. 개요

陸納
(? ~ 395)

동진의 인물로 자는 조신(祖言). 본적은 양주 오군(吳郡) 오현(吳縣)으로, 삼국시대 오나라의 명문가인 오군 육씨 집안 출신이다. 동진의 사공 육완의 아들.

2. 생애

어려서부터 청아한 지조가 있어 정결함이 보통의 사람보다 뛰어났다. 진동대장군 무릉왕 사마희에게 출사하여 그의 속관이 되는 것으로 관직 생활에 발을 들였으며, 이내 주(州)의 수재로 천거받았다. 육납의 명성을 흠모하던 회계내사 왕술은 그를 불러 건위장사로 삼았고, 이후 여러 차례 승진하여 황문시랑, 양주별가, 상서이부랑, 오흥태수를 역임했다.

육납이 오흥태수로 부임하러 가는 도중, 환온에게 인사차 고숙(姑孰)에 들렀다. 이때 육납이 환온에게 물었다.
"공께서는 술을 몇 잔까지 마실 수 있습니까? 또, 고기는 얼마나 많이 드실 수 있습니까?"
환온이 답했다.
"내 나이가 들어 술은 3되만 마셔도 취하고, 고기는 사슴고기 10점만으로도 배부르오. 경은 어떠한가?"
육납이 말했다.
"평소 잘 마시지 않아 2되가 한계이며, 고기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고는 이어서 말하길,
"바깥에 작은 예(禮)를 갖추면 먼 곳의 군(郡)이라도 지킬 수 있습니다. 이에 저는 공과 함께 취함으로써 아래로 정을 펼치려 합니다."
라며 환온을 연회에 초대하니, 환온은 이를 흔쾌히 수락했다. 이후 육납이 연회를 열자 환온은 왕탄지, 조이 등 명망 높은 대신들과 함께 그 자리에 참석하였다. 하지만 음식으로 술 한 말(斗)과 사슴고기 한 반(拌) 밖에 나오지 않아 연회에 참석한 손님들은 모두 당황했다. 육납이 말했다.
"명공께서 근래에 이르시길 술은 3되만으로 취한다 하셨고, 저 또한 2되 밖에 마시지 못해, 오늘 술 한 말만 준비한 것입니다."
환온과 함께 온 손님들은 육납의 진솔함과 소박함에 감탄했다. 이내 육납이 명을 내려 손님들을 위한 술과 요리를 추가로 가져오게 하면서 연회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환온과의 친목을 다지고 오흥군에 부임한 육납은 일을 하면서도 녹봉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동진 조정의 부름을 받고 좌민상서, 양주대중정에 임명되어 도성 건강(建康)으로 돌아갔다. 이후 태상을 거쳐 이부상서로 옮겨지고, 봉기도위, 위장군을 겸했다.

아들 육장생이 병에 걸려 간병을 이유로 사직하려 했는데, 이때 마침 육납의 조카 육금(陸禽)이 법을 어겨 형을 받자, 육납은 아예 이 일을 빌미로 조정에 자신을 면직시켜 달라 청했다. 하지만 효무제 사마요는 조서를 내려 약간의 강등만 하고, 특별히 아들의 간병을 허락했다. 이후 육장생의 병세가 어느정도 호전되자 다시 관직에 복귀해, 상서복야, 상서좌복야를 역임하고 산기상시가 더해졌다.

태원 14년(389년) 9월, 상서령으로 옮겨지고 산기상시 직책은 전과 같이 하였다. 육납은 항상 근면하고 정도를 굳게 지켰는데, 섭정을 맡은 회계왕 사마도자는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고 방종했다. 이에 육납이 궁궐을 바라보고 말하길,
"어린 나이에 덕이 없으면 벼슬길에 나아가지 말고 집에 머물러야 하는 법이거늘, 저 보잘것없는 아이가 기어이 궁궐을 쳐부수려 하는구나!"
라며 한탄했다. 이 말을 들은 조정의 대신들은 모두 그의 충량함에 감복했다.

태원 20년(395년) 2월 4일, 좌광록대부, 개부의동삼사에 임명되었으나 조서를 받들기도 전에 사망하니, 조정에서는 그에게 내린 관직을 그대로 추증해주었다. 아들 육장생이 육납보다 먼저 사망해 직계 자손은 끊겼고, 육납의 조카 육도륭(陸道隆)이 후사를 이었다.

3. 기타

  • 육납은 조정에서는 명망높은 대신이었으나 가정에서는 폭력적인 면이 있었다. 일례로 동진의 명문가인 진군 사씨 집안의 수장이자 명망높은 재상인 사안이 육납의 집을 방문하기로 했지만, 조카 육척(陸俶)은 감히 이 소식을 육납에게 알리지 않고 홀로 사안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결국 이 사실을 모르다가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한 육납은 사안이 오자 황급히 차와 과일만을 대접했으나, 미리 준비를 마친 조카 육척은 진수성찬을 내놓으며 자신을 과시했다. 그렇게 사안이 돌아간 후, 육납은 노발대발하여,
    "너는 숙부를 빛내기는 커녕, 나의 행실을 더럽히려 드느냐!"

    라고 소리치며 몽둥이로 육척을 40회 정도 후려쳤다. 이와 같은 조치는 자주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