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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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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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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渾
(223 ~ 297년 9월 4일[1])
1. 개요2. 생애
2.1. 오나라 정벌 이전2.2. 오나라 정벌2.3. 오나라 정벌 이후
3. 미디어 믹스

[clearfix]

1. 개요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이자 서진의 장군, 대신으로 왕창의 맏아들이며, 왕륜의 형이다. 자는 현충(玄沖)으로 병주 태원군 진양현 사람.

아내는 종염이고, 아들은 왕제 등, 딸은 왕영숙 등이 있다. 그의 동생으로는 왕담, 왕륜이 있고, 조카로는 왕승 등이 있다.

2. 생애

2.1. 오나라 정벌 이전

아버지의 작위인 경릉후를 이어받았으나 조상 막하에 초빙되었던 전적이 문제되어 고평릉 사변 직후 잠시 면직된 바 있었으며, 사마소의 참군사가 된 후로 황문시랑, 월기교위 등으로 승진했다가 서진 개국 후에는 양렬장군의 관직을 더해 서주자사로 전임되었다. 서주자사를 지내면서 기근이 들자 백성들을 구휼해 식읍 1천 8백호가 증가해 받았다.

동중랑장 감회북제군사, 정로장군 감예주제군사 등 예주 방면의 군을 통솔하다가 안동장군 도독양주제군사가 되어 회북의 손오 전선을 맡았는데, 손호의 폭정 때문에 차츰 진으로 넘어오는 오나라 사람들이 늘어났다. 278년에 환성에 있던 오나라의 군사들이 진을 공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양주자사 응작을 파견해 거점과 물자를 불태우고 수천 병사와 군선에게 손해를 입히는 전공을 세웠다.

2.2. 오나라 정벌

본격적으로 손오 정벌이 개시되자 강서로 나아갈 것을 명령받았고 양주자사 주준, 사마 손주를 앞세워 오의 승상 장제와 대장군 손진을 죽이고 수급, 포로를 도합 7800여구 얻는 공을 세웠다. 그러나 왕혼이 남하 공략에 열중하던 와중에 서쪽으로부터 장강을 타고 온 왕준의 군세가 때마침 불던 순풍을 타고 석두성(건업)으로 육박해 손호를 사로잡는 데 성공하자 왕혼은 사전에 합의한 바를 어겼다며 분개해 왕준이 손호를 자기 진영으로 거쳐 가도록 했음에도 불구하고 상소하여 왕준이 공과 재물을 탐해 계획을 어그러뜨렸다는 글을 올렸다.

사실 이 행위는 자업자득에 가까운 측면도 있는데, 왕준이 장강 하류의 군사를 깨뜨렸다는 소문을 듣고 하운이 주준을 통해 재빨리 강을 건너 건업으로 가자고 건의하면서도 주준에게 왕혼이 자기 보신 때문에 일의 중요함에 어두워 따르지 않을 것이라 했는데, 그 말대로 듣지 않았다.

결국 왕준이 건업 근처에 이른 것을 알자 글을 보내 함께 석두성에 입성하자고 전했고, 왕혼의 부장 주준과 하운이 왕준에게 선공을 양보할 것을 타진했지만 듣지 않았으며, 왕준과 공을 다투었고 이 때도 주준과 하운이 왕혼에게 간했지만 듣지 않았다.

2대에 걸쳐 군공을 쌓은데다 왕혼의 아들 왕제 사마염 부마라서 조정에서 왕혼의 위세는 가충과 견줄만큼 지대했기에 이 탄핵에서 감히 왕준을 변호하는 이는 몇 없었으며, 사마염조차 직접 왕준을 책망할 정도였다. 이 사건으로 왕준은 죽는 날까지 왕혼과 몹시 불편한 사이가 되었는데, 어쩌다 왕혼이 찾아왔을 때는 신변을 염려해 집 안팎을 삼엄하게 경계했다고 한다.

2.3. 오나라 정벌 이후

천하통일의 공적으로 작위가 경릉공으로 올라가면서 식읍 8천 호가 증가되었고 한동안 옛 손오 지역의 민심을 안정시키는 것에 힘썼으며, 이 때 왕혼의 집에 빈객이 끊이질 않았고 손오 지역의 민심을 안정시킨 후에 중앙으로 복귀했다.

279년에 사마유가 당시 조정에 인질로 왔던 남흉노의 왕자 유연을 훗날의 화근이 될 것이니 미리 없애야 한다고 건의했는데, 이미 유연이 왕혼과 친분을 맺은 사이라 왕혼은 단지 의심만으로 인질을 해쳐 흉노와 불화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반대했다.[2]

282년에 사마염의 동생인 제왕 사마유 순욱 풍담 등이 시기해 봉지인 산동으로 돌려보내라 청하고 사마염이 이를 재가하자 사마준과 함께 이를 반대해 제왕을 태자태보로 삼자고 건의했지만 사마염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들 왕제도 사마염에게 간곡히 호소했으나 거꾸로 노여움만 사 벼슬이 국자좨주로 깎였고, 이 때부터 사마염의 총애를 잃은 왕제는 실의에 빠져 왕혼보다도 일찍 세상을 떠났다.

285년에는 상서좌복야, 산기상시의 작위에 올랐으며, 290년에 사도가 되었다가 혜제 등극 후 시중을 겸직했다. 양준 일파가 주살당한 뒤 특별히 병사를 지니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문관이 한때의 총애에 의지해 병권을 갖는 것은 옳지 않다면서 이를 반납했으며, 초왕 사마위가 사마량과 불화해 밀명을 받자 왕혼과 손을 잡고자 했지만 이에 응하지 않고 천여 병사를 집 주변에 풀어 방비한 채 은둔했다가 사마위가 주살되자 그 병사들을 이끌고 관에 출두해 녹상서사의 관직을 더했다.

이처럼 팔왕의 난 전반기까지도 군권을 호령하며 뛰어난 처세를 자랑하는 노대신으로 명망이 높았으나 재상의 자리에 오른 뒤로는 점점 그 명성이 잦아들었다고 하며, 왕제를 비롯해 아들들이 모두 자신보다 일찍 세상을 떠나 경릉공으로 있다가 297년에 7월 21일에 죽으면서 손자인 왕탁이 작위를 이었다. 시호는 원공(元公)이다.

3. 미디어 믹스

3.1.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파일:external/kongming.net/265-Wang-Hun.jpg
삼국지 11
파일:external/san.nobuwiki.org/0043.jpg
삼국지 12, 13, 14

아버지 왕창과 마찬가지로 삼국지 4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는데 전반적으로 아버지보다는 떨어지는 능력치. 무력에선 우위를 점하나 정치, 매력에서 밀린다. 또한 왕준을 모함한 전적 때문인지 왕준보다 능력치가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 그래도 행적에 비해서는 매력이 높은 편이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72/무력 77/지력 72/정치력 68. 병법으로는 돌파, 제사, 몽충, 정란을 가지고 있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75/무력 77/지력 72/정치력 74/매력 70으로 특기는 징병, 진정, 혼란, 기합, 삼단, 명사, 제독. 총 7개다.

전 능력치가 70을 넘었고 아버지 따라 명사 특기를 들고 나온다. 손오 정벌에 공헌한 점을 반영하였는지 제독 특기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외엔 특기가 별 게 없어서 활용도는 미묘. 무력이 77이면 나쁘진 않지만 막상 일기토에 쓰기엔 특기도 2개(기합, 삼단) 밖에 없고, 통솔 75에 무력 77이면 나름대로 준수하지만 전장에서 쓸 특기는 진정, 혼란 밖에 없다. 그나마 매력도 70은 찍어주고 징병 특기가 있으니 징병 셔틀로는 그럭저럭 쓸 만하다.

삼국지 11의 특기는 잉여급으로 불리는 수장이나, 역사 시나리오에서 왕혼이 활약할 무렵엔 오나라 진영에 그만한 능력치를 갖춘 장수들이 거의 없을 테니[3] 수상에서는 무적을 자랑하게 된다. 물론 영웅집결 시나리오 같은 경우는 그냥 그만그만하게 굴릴 만한 장수 수준이지만, 왕창처럼 육성으로 강화시켜 운용하는 재미를 기대할 수 있다.

삼국지 12에서는 짤렸다가 파워업키트에서 다시 등장했는데 일러스트는 오른쪽 손가락을 위로 올리면서 오군을 깔보고 있다. 하지만 지력이 63으로 전작에 비해 너프되고 전법이 좀 약한 기동력약화이라서 좀 밀린다.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통무지정 순으로 74/71/63/74. 특기는 상업 2, 순찰 1. 전수특기는 상업이고 전법은 창병속공진.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78, 무력 76, 지력 72, 정치 74, 매력 70으로 전작과 달리 통솔력이 4, 무력이 5, 지력이 9 상승했다. 개성은 소탕, 수전, 교련, 주의는 할거, 정책은 수군육성 Lv 3, 진형은 어린, 안행, 투석, 전법은 분전, 견제, 투석, 구축, 강습, 친애무장은 없고 혐오무장은 왕준이다.

3.2. 삼국전투기

남승우로 나온다. 아버지의 캐릭터였던 사나다 시로와도 살짝 비슷하다. 부장[4]으로 강하균을 데리고 있다.이상용이랑 진승남도 못 나왔는데 처음 언급된 삼국 통일 (4)편의 타이틀 컷을 장식하기도 했으며, 소개컷에서는 능력은 있지만 소심하고 쪼잔하다고 서술되어 있다.

삼국 통일 편에서 처음 등장. 오 정벌 당시 수춘 루트로 진격하였으며, 오의 선봉이었던 심영을 박살내고 장제군을 대파시키며 승상 장제까지 죽이는데 성공했다. 이후 부장이 장제군의 패배로 패닉 상태에 빠진 오를 바로 친다면 무혈입성할 수 있다고 제안했지만 왕혼은 멋대로 움직였다가 실패라도 하면 안 되며 왕준이 도착하고 같이 들어가도 늦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왕혼의 생각과는 달리 왕준은 왕혼을 무시하고 그대로 자기만 건업으로 진격해서 손호의 항복을 받아 낸다. 왕혼은 이에 제대로 분노하여 오 멸망 이후 명령위반자에 반역자라며 왕준을 모함하기도 했다.


[1] 음력으로는 7월 21일 [2] 그 유연이 훗날 서진을 멸망시키고 오호십육국의 막을 연 주역이 된다(...). 비록 본의가 아니었다고 해도 평생 서진을 위해 싸운 공신이 그와 더불어 멸망에 일조한 셈이니 역사의 아이러니. [3] 물론 심영은 빼고 [4] 이 기세를 몰아 건업까지 진격해야 한다고 건의하는 걸로 봐서 주준이나 하운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