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7-04 19:53:48

왕손(동진)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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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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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fff> 포중장공(褒中壯公)
王遜 | 왕손
시호 장(壯)
작위 포중현공(褒中縣公)
왕(王)
이름 손(遜)
소백(邵伯)
출신 위흥군(魏興郡)
생몰 ? ~ 323년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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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진의 관료로 자는 소백(邵伯)이다. 위흥군 출신.

2. 생애

군에서 효렴으로 천거되어 이부영사(吏部令史)가 되었고 전중장군(殿中將軍)으로 전임되었으며, 뒤에 상락군태수(上洛郡太守)까지 승진하고 위흥군태수로 전임되었다.

혜제의 재위 말엽에 서남이(西南夷)가 배반한 상황에서 영주자사(寧州刺史) 이의(李毅)가 죽자, 영주의 백성들이 이의의 딸을 추대하며 여러 해 동안 영주를 수비했다. 310년, 영주 치중(治中) 모맹(毛孟)이 조정으로 가서 새로운 자사를 파견해달라고 요청했는데, 처음에는 조정으로부터 대답을 받지 못했다. 이에 모맹은 다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임금이 죽고 부모가 죽었을 때 위태로운 성의 문을 닫고 만 리에서 슬프게 하소연하는데 불쌍히 여기고 구원해주지 않았습니다. 이미 신포서 진나라에서 통곡하지 않은 유감을 부끄러워하는데 다시 기양(杞梁)의 아내가 성을 무너뜨렸음에도 효험이 없는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사는 것이 죽느니만 못하니 신에게 죽음을 내려주십시오.

조정에서는 결국 모맹의 주청을 받아들여 왕손을 남이교위(南夷校尉), 영주자사로 파견하고 군에서 곧바로 진수하게 했다. 왕손은 영주로 부임하려다가 도중에 도적을 만나서 1년이 지나 영주에 도착했다.

영주는 밖에서는 성한 이웅의 압박을 받고 있었고 안에서는 서남이의 침공을 받고 있어 관리와 장병들이 달아난 상황이었다. 왕손은 영주의 상황을 파악하고 나쁜 것을 바로잡았으며, 흩어진 백성들을 모으고 형벌을 독단으로 내렸으며, 풍속을 지도하였다. 왕손이 아직 영주에 도착하지 않았을 때 동연(董聯)을 수재로 천거했는데, 건녕군(建寧郡) 공조(功曹) 주열(周悅)의 재주가 변변치 못하다고 생각해서 임명하는 문서를 내리지 않았다. 왕손이 영주로 도착하면서 주열은 왕손에게 붙잡혀 죽었다. 뒤에 주열의 아우인 주잠(周潛)이 왕손을 죽이고자 모의할 때 건녕군태수였던 조혼(趙混)의 아들 조도(趙濤)를 대신 자사로 세우려고 했지만 음모가 발각되어 모두 주벌되었다. 또한 법령을 따르지 않은 호족들을 처벌하기도 했다. 왕손은 이민족들을 정벌하여 1천여 명을 붙잡아 죽이고 말과 소, 양 수만 여 마리를 노획하였다.

뒤에 왕손은 아들인 왕징(王澄)을 건강으로 보내 낭야왕 사마예에게 제위에 오르도록 권하는 표문을 올렸다. 왕손은 영주자사, 남이교위를 그대로 받았고 산기상시(散騎常侍), 안남장군(安南將軍), 가절(假節)이 더해졌으며, 포중현공(褒中縣公)에 봉해졌다. 왕손은 영주자사로 재임하면서 영주의 지세를 고려하여 행정구역을 나눌 것을 청하는 표문을 올렸다. 그리고 왕손의 주청에 따라 상가군(牂柯郡)을 분할하여 평이군(平夷郡)을 설치하고 주제군(朱提郡)을 분할하여 남광군(南廣郡)을 설치하고 건녕군을 분할하여 야랑군(夜郞郡)을 설치하고 영창군(永昌郡)을 분할하여 양수군(梁水郡)을 설치하고 익주군(益州郡)을 진녕군(晉寧郡)으로 고쳤다.

월수군태수(越巂郡太守) 이조(李釗)가 이웅(李雄)에게 사로잡혔다가 돌아오자, 왕손은 다시 이조를 월수군태수로 삼았다. 이웅이 이양(李驤)과 임회(任回)를 파견하여 이조를 공격하자, 이조는 한가군태수(漢嘉郡太守) 왕재(王載)와 함께 성한군에 맞섰다. 그러나 이조는 온수(溫水)에서 성한군과 전투를 벌여 패배하였고 왕재는 이웅에게 월수군과 한가군을 항복하였다. 성한군이 여수(瀘水)를 건너 영주로 침공해오자, 왕손은 요숭(姚崇)과 찬침(爨琛)을 보내 성한군의 침공을 막게 했다. 요숭과 찬침은 당랑(堂狼)에서 전투를 벌여 성한군을 대파하였으며, 여수까지 추격하여 성한의 군사 수천여 명이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그러나 요숭이 길이 멀다는 이유로 여수를 건너지 않자, 왕손은 여기에 분노하여 장수들을 붙잡아 가두고 특히 요숭을 붙잡아 채찍으로 때렸다. 왕손은 결국 분통이 터져서 밤에 죽었다. 사후 장(壯)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왕손이 죽은 뒤, 영주의 백성들은 왕손의 아들인 왕견(王堅)을 자사로 추대하였다. 조정에서는 왕견을 남이교위, 영주자사, 가절로 제수했으나 도간이 영릉군태수(零陵郡太守) 윤봉(尹奉)을 영주 자사로 삼도록 하는 표문을 올려 영주 자사로 해임된 왕견은 건강으로 돌아가다가 도중에 죽었다. 왕견이 죽은 뒤 왕손의 작위는 큰형 왕징이 잇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