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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에르하르트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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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7년 2월 4일 | |
독일 제국 바이에른 왕국 퓌르트 | ||
사망 | 1977년 5월 5일 (향년 80세) | |
서독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본 | ||
소속 정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1]
|
|
병역 | 독일 제국군 육군 하사 전역 | |
재임 기간 |
1963년
10월 16일 ~
1966년
12월 1일 (만 3년 1개월 17일) |
|
종교 | 개신교 | |
서명 |
|
|
독일연방공화국 제2대 연방총리 취임 선서 |
[clearfix]
1. 개요
루트비히 에르하르트[2]는 독일연방공화국(구 서독)의 제2대 총리이다. 1949년부터 1963년까지 콘라트 아데나워 내각 하에서는 경제부 장관으로 일명 라인강의 기적을 주도하면서 명성을 얻었고, 이를 바탕으로 콘라트 아데나워의 후계자로 취임한다. 하지만 아데나워와의 당내 정치 투쟁에 총리 재임기 내내 시달려야 했고, 집권 기간 불어닥친 경제 사이클 악화 등의 불운으로 인해 지지율이 하락하여 불과 3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밖에 재임하지 못하는 등 여러모로 불운이 따른 정치인.대한민국에 큰 영향을 끼친 독일인 정치인이기도 하다. 당시에는 동독과 서독 간의 체제 경쟁의 일환으로 동서독이 각각 남북한에 경제 지원을 하였는데, 에르하르트는 남한 경제 발전의 청사진을 박정희에게 제시하고 차관 제공과 함께 경제고문을 한국으로 파견하였다. 이러한 에르하르트의 지원은 남한 경제개발계획의 밑거름이 되기도 하였다.
2. 생애
2.1. 전반기
1897년 2월 4일 바이에른 왕국의 영토인 퓌르트(Fürth)에서 포목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업을 잇기 위해 아버지가 운영하는 포목점에서 견습생으로 경험을 쌓아가고 있었지만, 전 세계를 휩쓴 제1차 세계 대전의 소용돌이가 그를 덮쳤고, 형제들과 함께 독일군에 징집되어 참전했다.전쟁이 끝을 향해 달려가던 1918년 이프르 전투에서 어깨에 폭탄 파편을 맞는 부상을 당했다. 어깨 절단까지도 고려가 될 만큼 심각한 부상이었지만 다행히도 절단은 피할 수 있었다.
이후 전간기에 아버지의 기업을 이어받아 운영하는 한편, 대학교에서 경제학으로 학위를 수여받았다. 2차 대전의 와중에 종전 이후 펼칠 경제정책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였지만,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참패 이후 총력전을 선언하면서 모든 국력을 전쟁에 쏟아붓고 있던 나치 정권하에서 이런 연구는 공식적으로 발표될 수 없는 것이었다.
급기야 1944년에는 더 극단적인 논문을 작성했다. 그 논문은 0의 시간(Stunde Null)[3], 즉 독일의 패전을 전제조건으로 삼고, 전후 독일이 어떤 경제정책을 펼쳐 나가야 할 지에 대한 논의를 담고 있었다.
패배주의는 즉결처형감으로,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이후 장군들조차 우습게 처형되던 시기에 이런 논문은 말 그대로 목이 당장 잘려나가도 할 말이 없는 그런 내용이었다. 그런데도 단순히 이런 논문을 작성한 것으로도 모자라서, 이 논문을 독일 곳곳에 들고 다니면서 주변의 친구들과 동료들에게 보여주었다.[4] 다행히도 그를 게슈타포에게 고발한 친구들은 없었고, 그 덕분에 무사히 살아서 종전을 맞이하였다.
2.2. 연합국 군정기
이 시기에 평범한 기업인이었던 그의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5] 미/영국군의 점령 지역에서 현지 경제 고문으로 임명되었고, 그 후 양국의 점령 지역이하나의 구역으로 통합됨에 따라 이 지역의 경제 위원회에서 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1948년에는 라이히스마르크에서 독일 마르크로의 화폐개혁을 성공적으로 시행하였다. 이로써 명성이 높아졌고, 확고한 시장경제 신봉자였던 자신의 신념에 따라 연합군에 의해 실시되고 있던 고정 가격제와 생산 통제 정책도 폐지시켰다.[6]
2.3. 경제부 장관
콘라트 아데나워와 아직은 사이가 좋았던 시절 |
라인강의 기적을 진두지휘하며 사회적 시장경제(Social Market Economy)[7]를 도입하였다. 이때 전후 복구 기간 그가 내세운 슬로건이 Aus der Asche fliegt ein Phönix auf(잿더미에서 불사조는 날아오른다). 다만, 에르하르트 본인의 성향은 시장경제를 보다 중시하는 질서자유주의[8]에 더 가까운 입장으로, 경제성장을 촉진하는 경제정책이야말로 최고의 복지정책이며, 국가의 복지 지원은 가능한 최소한의 수준으로 유지해야 한다고 봤다. 또한, 기업들의 경제력 집중, 독점 등으로 공정한 경쟁, 공정한 시장 질서를 저해하는 행위가 나타날 경우에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하지만, 기업들의 운영에는 되도록 개입할 필요는 없다고 보고 있었다. 하지만 연금개혁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하던 아데나워 총리의 주장에 밀렸으며 독일은 이때 비스마르크 시기부터 도입한 복지정책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였고, 복지국가로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였다.
하지만 경제 운영 방식을 둘러싼 투 톱의 지엽적인 논쟁은 뒤로 한 채, 1950년대 내내 독일은 전쟁의 아픔을 딛고 경제 성장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에르하르트는 이런 경제 성장의 아이콘과 같은 존재로 독일 국민들의 인식에 자리잡았다. 상당한 끽연가인 그의 담배에서 나오는 연기는 힘차게 돌아가는 서독 공장의 굴뚝 연기를 연상시켰고, 뚱뚱했던 그의 체형은 전후 풍요로움의 상징처럼 인식되면서, 독일 국민들은 '뚱보 에르하르트(Fett Erhard)'라는 애칭으로 그를 즐겨 불렀다.[9]
또한 족발(Eisbein)을 즐겨먹는다든지, 축구를 사랑해서 키커와 같은 스포츠 잡지를 열심히 구독하는 서민적인 모습 또한 그의 높은 인기에 한 몫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인기를 바탕으로 1958년부터는 부총리가 되어 아데나워 내각의 2인자 자리로 부상하였고, 마침내 1963년 아데나워의 뒤를 이어 서독의 제2대 총리로 취임하였다.
2.4. 연방총리
그는 Wohlstand für Alle(모두를 위한 번영)이란 슬로건을 내세우며 독일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오죽하면 사회민주당이 1959년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통해서 100년 가까이 당의 강령으로 삼아온 마르크스주의를 포기하고, 사회적 시장경제를 인정하기로 결정했을 정도였다. 당시 사회민주당이 공산주의를 지향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부분적인 계획경제, 즉 민주적 사회주의를 고집하면서 노동자 계급을 위하는 계급정당으로 남았던 반면, 기독교민주연합은 사회적 시장경제를 내세우는 국민정당으로서 높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국민들의 높은 기대 속에 총리 자리에 오른 에르하르트의 집권기는 그다지 순탄하지 못했다. 취임 직후 경제 침체기가 오면서 경제부 장관으로 그가 누렸던 인기는 싸늘하게 식어버렸고, 외교 문제에 당내 장악력까지 불안하다보니 불과 3년만에 그는 총리직에서 내려와야만 했다. 그가 총리로서 단명했던 이유는 크게 분류하자면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대통령보다 훨씬 강한 여당 내부 장악력을 가질 필요성을 요구받는 게 내각책임제의 총리 자리이지만 그는 당내 기반이 그리 튼튼하지 않았다. 아데나워는 총리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여전히 기민당의 대표였고 그를 낙마시키기 위해 집요하게 노력했다.
그리고 2007년에야 밝혀진 사실이지만 그는 기민당의 당원조차 아니었다. # 심지어 아데나워와 사이가 크게 나빠지기 전에는 아데나워가 집요하리만치 입당을 권유했지만 그것도 모두 물리쳤다고 한다. 대체 왜 그가 기민당에 입당하지 않았는지는 본인이 밝히지 않고 사망한 이 시점에서 영원한 미스테리이긴 하지만, 대다수 역사학자나 정치학자들의 추정은 그의 비정치적 성향 탓으로 보고 있다.
이런 비정치적인 성향은 총리직을 수행하는 기간 내내 그를 괴롭혔다. 한 언론인은 그의 재임기간을 회상하면서 "정치가 성품에 해롭다는 것이 일반적인 통념이지만, 그는 반대로 성품이 정치에 해로움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을 정도였다.
두번째로는 외교문제를 들 수가 있다. 이 당시 미국은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그 위신이 상당히 떨어진 상태였고, 유럽에서는 우리만의 마이 웨이를 가자는 드골주의가 떠오르고 있었다.[10]
하지만 에르하르트는 대서양주의라고 불리던 그의 친미 행보를 꿋꿋이 이어나갔다. 당연히 이는 많은 반발, 특히 아데나워가 여전히 장악하고 있던 여당 기민당 내에서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거기다 그가 그토록 믿었던 미국마저 그에게 일종의(?) 배신을 저지르고 말았다. 이 시기 미국은 치솟는 베트남 전쟁의 비용으로 인해 독일에 머무르던 자국군 주둔 비용을 독일에게 많이 전가시키고자 했다. 당연히 독일은 난색을 표했고, 에르하르트는 린든 B. 존슨과의 정상회담자리에서 자신의 의견을 존슨에게 설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막장으로 치달은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내외부의 비판에 시달리고 있던 존슨에게서 에르하르트는 그만하라는 일종의 역정 비슷한 호통을 듣고 입을 닫고 만다.
마지막, 그리고 결정적으로 에르하르트의 발목을 잡은 것은 바로 아이러니하게도 경제 문제였다. 이 시기에 접어들면서 독일의 경제성장률은 한 자릿수 후반대에서 초반대로 떨어졌고, 반대로 실업률은 0%에서 2~3%로 오르기 시작했던 것. 지금에야 이런 게 고도성장기가 끝나면 당연히 발생하는 현상으로 받아들여졌겠지만 그 당시만 해도 독일 내부의 반응은 "으악! 다시 공황이 시작되나 보다!" 정도의 히스테리였다.[11] 게다가 지금도 일시적인 사이클일 수 있다고 이해한다 정도지 이런 경제 지표 악화는 당연히 결코 정권에 좋은 상황이 아니다.
그리고 마침내 1966년 약간의 불경기와 더불어 예산부족문제가 발생하자 에르하르트는 증세를 결정하였다. 하지만 이와 같은 그의 결정에 반발하여 당시 연정을 이루고 있던 자민당 소속의 장관들이 모두 사임을 하였고, 기민당과 자민당의 연정은 붕괴에 이르고 말았다. 결국 12월 1일 에르하르트는 총리직에서의 사임을 발표했고, 그의 후임자로 쿠르트 키징어가 사민당과의 대연정을 구성하면서 총리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2.5. 사망
이후 여전히 연방 하원의원직은 유지하였지만 별다른 정치활동은 보여주지 않았다. 심지어 경제부 장관으로 14년, 총리로 3년을 근무했지만 집 한 채 장만하지 못해 호텔 단칸방을 빌려 생활했다. 그러다 독일의 어느 중견 기업인이 모금운동을 벌여 뮌헨 근처에 작은 집 하나를 마련해줬다. 그곳에서 에르하르트는 말년을 보냈고, 1977년 5월 5일에 죽음을 맞이하였다.3. 어록
원래 나는 타고난 정치가 타입이 아니다.
나는 정치적 야망이 전혀 없으며 정당 정치에 몸담고 싶지도 않다.
정치가는 모름지기 전술가, 수완가들과 함께 일해야 하며 술책에 정통해야 한다고 사람들은 믿는다. 하지만 그건 내 스타일이 아니다.
권력은 내가 보기에 항상 덧없으며 위험하고 잔악하며 한마디로 어리석다.
지난
6년 간 독일에서 일어난 일은
기적과는 다르기 때문에 이 개념을 전파하고 싶지 않다.
시장경제의 원칙에 따라
인간의
창의력과
자유, 그리고 에너지를 다시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받은 모든 독일 국민의 성실한
노력 덕분이다.
1954년, 라인강의 기적에 대해 논하면서
1954년, 라인강의 기적에 대해 논하면서
사람의 책임감을 느슨하게 하고 개인적인 업무능력을 떨어뜨리는 이른바
복지국가보다 더 비사회적인 것은 없다.
1957년, 아데나워의 연금 개혁안에 반대하면서
1957년, 아데나워의 연금 개혁안에 반대하면서
타협이란 모든 사람이 가장 큰 과자 조각을 얻었다고 생각하게 과자를 나누는 기술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약속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행동으로 이미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일본과 손을 잡아라. 독일은 프랑스와 16번을 싸웠다. 독일 사람들은 지금도 프랑스에 한이 맺혀 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우리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가 프랑스 드골 대통령을 찾아가 악수했다. 한국도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공산주의를 막는 길이기도 하다.
1964년, 박정희 대한민국 대통령에게 한 조언.
1964년, 박정희 대한민국 대통령에게 한 조언.
4. 동시대인들의 평가
에르하르트와 의견 차이가 있을지라도 나는 그의 편이다.
콘라트 아데나워
콘라트 아데나워
에르하르트는 총리가 되어서는 안 돼!
콘라트 아데나워
콘라트 아데나워
에르하르트는 거짓 정치를 거부하는 나의 상징이며 시장 경제의 분명한 상징이다.
귀도 베스터벨레[13]
귀도 베스터벨레[13]
루드비히 에르하르트에게 사회시장경제는 결코 정적인 개념이 아니었다. 그는 이를 결코 완성할 수 없는 과제라고 여겼다. 그는 이것을 우리에게 유산이자 과제로, 그리고 계속되는 도전으로 남겨놓았다.
헬무트 콜
헬무트 콜
5. 여담
- 연설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바이에른 사투리가 상당히 강했다. 정확히는 프랑켄 억양.
- 고향의 축구팀 SpVgg 그로이터 퓌르트의 열혈팬이었다.
- 자신의 상관이기도 했던 아데나워와 사이는 극악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데나워가 에르하르트를 일방적으로 싫어한 것에 가까웠다고 한다. "에르하르트는 총리가 되어서는 안 돼!"라고 일갈했던 아데나워와 달리, 에르하르트는 아데나워를 꽤나 존경했고 그래서 아데나워의 마음을 얻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한 모습도 보여주었다고 한다. 후일 에르하르트의 한 측근은 에르하르트가 "도대체 아데나워가 왜 나를 그리도 싫어하는지 모르겠다."라는 식으로 아쉬움을 토로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다만 아데나워 역시 인간 에르하르트를 싫어한 건 아니었다. ( 유럽중심적 사고관을 가진 본인과 달리) 친미 성향의 대외관을 가진 정치인 에르하르트가 못미더웠고 여기에 에르하르트의 성격까지 총리가 되기에는 지나치게 유약하다고 보았을 뿐.
- 신경질적이고 냉소적인 아데나워와 비교되어서 그런지, 낙천적인 성격으로도 상당히 유명했다.
- 말솜씨가 수려한 편이었다. 본문에 언급된 불사조 이야기나 모두를 위한 번영 뿐만 아니라 '고도 경제성장', '서방과 같이 번영의 양탄자를 탑시다' 같은 신조어 및 슬로건도 그가 만들었다고 한다. 이러한 말빨이 선거에 있어서 도움이 됐던 것은 당연지사.
- 에르하르트는 박정희에게 "분단국으로서는 경제번영만이 공산주의를 이기는 길이다"라고 말했다.
[1]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의 내각에서 경제부 장관을 맡아
라인 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경제 성장 정책을 총괄하고 그의 뒤를 이어
기독교민주연합이 주도하는 내각의 총리로 부임했기에 다들 기민련 소속인 줄 알았지만 놀랍게도 한평생 그 어떤 정당에도 소속된 적이 없었다. 이는 오늘날 사람들은 물론이고 당대 서독 시민들도 착각했던 부분으로,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연히 기민련 당원인 줄 알았다고 한다. 공식적으로는 무소속이었으나 1966년 3월부터 1967년 5월까지 사실상 기민련 대표나 다름없었는데, 이 기간 동안 누구나 기민련 소속인 줄 알았기에 당적 문제가 불거지지 않다가 훗날 문제로 비화했다.
[2]
실제 발음은 '[ˈʔeːɐ̯haʁt\]\(에어하르트)'에 가깝지만,
국립국어원에서는 '에르하르트, 루트비히'로 규정용례를 제시하고 있다.
[3]
독일 내부에서 독일이 2차대전에서 패배한 직후를 이렇게 부른다.
[4]
후일 이 논문을 받아 본 한 친구는, "에르하르트는 이 논문이 유포됐을 시 자기가
어떤 위험에 처할 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듯 보였다."라고 증언했다.'
[5]
일설에 의하면 에르하르트가 당시 미군 사령관에게 자기가 경제전문가라고 자기를 발탁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6]
이에 분노한 연합군 측이 그를 불러 '어떻게 당신 멋대로 군정 정책을 변경하냐?'라고 질책하자 '변경이라뇨? 폐지했는데요?'라는 패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7]
국가의 기본 경제체제는 자본주의이고, 경제 운용에 있어서 되도록 시장의 원리와 민간기업에 맡기지만, 공정한 시장 질서의 확립이나 각종 복지 및 사회보장 제도에 있어선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할 필요가 있다는 이념.
[8]
참고로 독일의 질서자유주의는
복지국가 자유주의와
자유시장 자유주의 사이에 있는 사상이다. 전후 서독의 질서자유주의자들 가운데에는
자유시장 자유주의에 기반을 두면서도
신자유주의와 갈라져 공정한 시장 질서의 확립을 위한 정부의 역할을 지지하는 이들이 있었는가 하면, 가톨릭 사회교리 및
기독교 민주주의의 영향으로 정부의 역할을 각종 복지 및 사회보장 제도로까지 확대하려고 하는 이들도 있었다. 전자가 발터 오이켄, 루드비히 에르하르트 등이고, 후자가 알프레드 뭘러-아르막 등이었다.
[9]
다만 에르하르트 본인은 '나 그렇게 안 뚱뚱한데'라면서 이 별명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실제로 에르하르트는 180cm 정도의 키에 80kg 중반 정도의 몸무게로 엄청난 비만까지는 아니었다.
[10]
전임 총리인 아데나워 역시 독일 내에서는 가장 대표적인 드골주의자였다.
[11]
사실
독일이라는 나라가 1차 대전 직후의
초인플레이션과 1930년대의
대공황이란 엄청난 경제위기를 두 번이나 겪었고, 그 결과
나치당이 힘을 얻어 2차대전을 일으켜 나라가 두 토막 난 상황이었으니, 지금까지의 호황에 흐뭇해하던 독일 국민들 입장에서는 트라우마가 다시 살아날 만했다.
[12]
1970년대 초반
기민당을 이끈 지도자이다.
빌리 브란트에 대항하여 총리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패배.
[13]
前
독일 자민당 대표. 독일 최초의 동성애자 당수이며, 메르켈과의 소연정에서 외무장관 및 부총리를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