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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LTIMATE WARRIO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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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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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054b5> WWE 명예의 전당 헌액자 | |
본명 | 워리어(Warrior)[1] |
출생일 | 1959년 6월 16일 |
출생지 | 미국 인디애나 주 크로포즈빌 |
사망일 | 2014년 4월 8일 (향년 54세) |
사망지 | 미국 애리조나 주 스코츠데일 |
신장 | 188cm (6' 2") |
체중 | 129kg (285 lbs) |
가족 | 배우자 데이나 비엘, 슬하 2명 |
피니시 무브 |
고릴라 프레스 워리어 스플래시[2] |
유형 | 파워하우스 |
테마곡 | Unstable |
주요 커리어 |
WCWA 텍사스 헤비웨이트 챔피언 1회 WCWA 월드 태그팀 챔피언 1회 WWF 챔피언 1회 WWF 인터컨티넨탈 챔피언 2회 NWE 월드 헤비웨이트 챔피언 1회 |
2. 개요
그 누구도 혼자 전설이 될 순 없다. 얼티밋 워리어는 팬들이 만든 전설이다.
나와 같은 전설들이 탄생하기 위해선 팬들의 선택이 필요하다. 팬들은 또 다른 전설을 만들 수 있다.
모든 사람은 언젠가 심장이 마지막으로 맥동하는 날이 오고, 그 폐가 더 이상 기능하지 못해 마지막 숨결을 내뱉는 순간이 온다.
하지만 그 사람이 일생 동안 다른 이들의 심장을 더 강렬히 뛰게 만들었고, 그들에게 삶 자체보다 더 웅장한 맥동을 안겨줬다면,
그의 존재는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그를 기리는 이야기꾼들에 의해,
사람들이 그에게 품은 의리에 의해,
그와 관련된 기억에 의해,
그에게 품은 경의에 의해.
그는 죽지 않는 불멸의 존재로 영원히 살 것이다.
얼티밋 워리어의 영혼은 영원할 것이다.
2014년 4월 7일자 RAW에서 한 마지막 연설[3]
나와 같은 전설들이 탄생하기 위해선 팬들의 선택이 필요하다. 팬들은 또 다른 전설을 만들 수 있다.
모든 사람은 언젠가 심장이 마지막으로 맥동하는 날이 오고, 그 폐가 더 이상 기능하지 못해 마지막 숨결을 내뱉는 순간이 온다.
하지만 그 사람이 일생 동안 다른 이들의 심장을 더 강렬히 뛰게 만들었고, 그들에게 삶 자체보다 더 웅장한 맥동을 안겨줬다면,
그의 존재는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그를 기리는 이야기꾼들에 의해,
사람들이 그에게 품은 의리에 의해,
그와 관련된 기억에 의해,
그에게 품은 경의에 의해.
그는 죽지 않는 불멸의 존재로 영원히 살 것이다.
얼티밋 워리어의 영혼은 영원할 것이다.
2014년 4월 7일자 RAW에서 한 마지막 연설[3]
WWF(지금은 WWE), WCW에서 활동한 미국의 프로레슬러.
19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기간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인터컨틴넨탈 챔피언과 월드 헤비웨이트 챔피언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당시 WWF를 AFKN으로 지켜보며 큰 인기를 누리던 한국에도 헐크 호건과 마초맨 랜디 새비지등과 함께 높은 인기를 구가했었다.
"레슬링 옵저버 선정 가장 과대평가된 선수"에 3년 연속(1989, 1990, 1991)으로 선정되는 등 레슬링 스킬이나 경기력 측면에서는 혹평도 있던 레슬러. 그러나 지금까지도 헐크호건과 함께 특유의 쇼맨십과 캐릭터, 스토리 라인으로 WWF 흥행기에 최선봉에 섰던 당대의 스타 레슬러라는것을 부정하긴 어렵다. 사망후 그의 이름을 딴 상도 만들어졌을 정도.
3. 커리어
3.1. CWA, UWF
원래 보디빌더 출신으로 로드 워리어즈(리전 오브 둠)를 누를만한 태그팀을 물색하던 릭 배스맨에게 픽업됐는데, 이때 파트너로 함께 뽑힌 인물이 스티브 보든이다. 훈련을 받은 이들은 파워팀 USA라는 이름의 선역 태그팀으로 제리 제럿의 CWA에서 데뷔하지만 반응이 시원찮았고, 몸자랑하는 악역 블레이드 러너즈로 기믹을 바꿨지만 여전히 반응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CWA의 올드비인 필 히커슨과 갈등까지 빚자 제리 제럿은 이 둘을 해고해버린다.그렇게 흘러들어간 곳은 UWF였지만, 프로레슬링에 대한 의지가 높았던 보든과 달리 헬위그는 적극적이지 않은 자세와 동료들과의 불화로 구설수에 오른 끝에 결국 UWF를 떠나 보든과 각자 다른 길을 걷게 된다.
3.2. WCCW
텍사스의 WCCW에 들어온 헬위그는 락커룸에서 흡사 전사 같아 보인다는 평가와 함께 딩고 워리어라는 링네임을 얻게 된다. 1986년 랜스 본 에릭과 팀을 이뤄 태그팀 챔피언에 올랐지만 불과 1개월만에 타이틀을 잃었으며, 1987년 1월 WCCW 헤비웨이트 챔피언 토너먼트에 참가하여 결승전에서 밥 브래들리[4]에게 패배했으나 바로 다음달에 밥 브래들리를 꺾고 WCCW 챔피언에 오른다.그렇게 한 단체의 챔피언에 오르긴 했으나 워리어의 기량 및 인간관계에 대한 백스테이지에서의 평가는 여전히 좋지 않았고, 워리어도 적은 수입에 대해 불평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 때 신일본 레슬링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해줄 외국인 용병 레슬러로 워리어를 낙점하고 접근해왔지만 없던 일이 되어버리고, 워리어는 WWF로 가게 된다. 이 때 신일본 레슬링에서 제안했던 캐릭터는 다름아닌 빅 밴 베이더. #
3.3. WWF
전사 중의 전사라는 의미로 후일 그를 유명하게 만들어줄 얼티밋 워리어라는 링네임과 함께 1987년 테리 깁스를 상대로 데뷔전을 치르며 WWF의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워리어는 당시 오락적인 요소를 중시하던 WWF의 흐름과 딱 맞아떨어졌으며 경쾌한 음악과 함께 달려나오는 인상적인 등장씬 등과 함께 큰 인기를 모았다.1988년 레슬매니아 4를 통해 레슬매니아 무대에 첫발을 들여놓으면서 허큘리스를 4분 30초만에 꺾어버리는 강력한 모습을 보여줬고, 동년 섬머슬램에서는 15개월간 장기집권 중이던 홍키 통크 맨을 31초만에 초살시켜버리며 인터컨티넨탈 챔피언에 등극한다.
게다가 WWF 레슬매니아 3에서 헐크 호건에게 패배한 걸 제외하면 좀처럼 꺾이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던 앙드레 더 자이언트마저 WWF 서바이버 시리즈(1989)에서 시작하자마자 크로스라인으로 링 밖으로 보내 카운트아웃으로 제거해 버리는 등 강력한 푸시를 받는다.[5][6]
수그러들줄 모르는 기세로 치고 올라가던 워리어는 1990년 레슬매니아 6 메인이벤트에서 WWF 챔피언 헐크 호건과 서로 타이틀을 걸고 경기를 펼치게 됐는데, 이 경기에서 헐크 호건을 꺾고 WWF 챔피언에 오르게 된다.[7] 사실 이것은 호건이 영화 촬영을 위해 자리를 비워야 했던 관계로 내려진 결정이었다. 훗날 호건은 이 경기에 대해 워리어가 빨리 경기를 끝내고 집에 가고 싶어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정작 호건의 대안으로 워리어가 챔피언에 오르자 예상 외로 흥행 실적은 하향세를 탔고, 게다가 워리어는 경기를 리드해 나가는 타입이 아니었기에 대립 상대가 릭 루드, 커트 헤닉, 테드 디비아시, 랜디 새비지같은 베테랑 워커들로만 한정 되었다.
결국 WWF에서는 호건을 다시 불러왔고, 1990년 섬머슬램에서는 헐크 호건과 어스퀘이크의 일반 경기, 워리어와 릭 루드의 WWF 챔피언쉽 철창 경기가 더블 메인이벤트로 잡힌다. 분명 순서상으로도 메인이벤트는 워리어와 릭 루드의 경기였지만 이목은 호건의 경기에 집중됐으며 메인이벤트 수당 또한 호건과 어스퀘이크에게 돌아갔다. 메인이벤트를 뛰었음에도 추가 수당을 받지 못한 릭 루드는 불만을 품고 WWF를 나가게 된다.[8]
이래저래 타이틀을 방어해나가던 워리어는 WWF 로얄럼블(1991)에서 서전 슬로터를 상대로 방어전을 치르던 도중 경기 막바지에 마초킹 랜디 새비지[9]와 셰리 마텔의 도움을 받은 슬로터에게 패배하고 챔피언 밸트를 빼앗기게 된다.
이에 레슬매니아 7에서 워리어는 자신을 방해했던 마초킹과 패자는 은퇴한다는 조건을 걸고 싸워서 승리하여 새비지를 은퇴시켰고[10], 그 뒤 떠오르는 신성이었던 언더테이커와 대립하게 되지만 무슨 이유에서였던 건지 한창 대립에 물이 오르려던 찰나 워리어는 제이크 로버츠, 언더테이커는 헐크 호건으로 각각 상대가 바뀌면서 흐지부지되어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테로이드 파동이 WWF를 휩쓸면서 호건의 인기가 예전보다는 떨어지게 되자, 빈스는 다시한번 호건의 대안으로 워리어를 고민하게 된다. 사실 레슬매니아 7은 걸프 전쟁 역풍을 제대로 맞아 흥행에서 심각할 정도로 재미를 보지 못했던 PPV[11]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리어는 빈스 맥마흔에게 레슬매니아 7의 수당을 제대로 지급해달라는 요구를 했고 다급해진 빈스는 워리어에게 55만달러의 보너스를 지급한다.
이외에도 빈스는 워리어의 이런 저런 요구를 다 들어줬고 이런 상황 속에 워리어는 호건과 팀을 이뤄 WWF 섬머슬램(1991)의 메인 이벤트에서 서전 슬로터, 커널 무스타파, 제너럴 아드난을 상대하게 된다. 특별 심판은 시드 비셔스였는데, 빈스는 썸머 슬램이 끝나자 바로 워리어를 해고한다. 시드가 워리어를 충분히 대체할 수 있을거라고 판단했기 때문.
하지만 사그라들지 않은 스테로이드 파동으로 인해 호건의 인기는 나날이 추락했으며, 호건은 레슬매니아 8의 메인 이벤트에서 시드 저스티스를 상대로 은퇴전을 치러 하비 위플맨의 난입으로 DQ승을 거뒀지만 시드 저스티스와 파파 샹고에게 두들겨맞게 됐고 그 순간 워리어가 뛰어들어와 호건을 구해준다. 헐크 호건은 훗날 DVD에서 "타 경기장에 비해 엄청나게 긴 후저 돔의 출입구를 대번에 뛰어온 워리어는 링에 올라올 무렵 체력이 다 소진되어 있었다."고 멘션을 덧붙였다.
한편 이때쯤 죄수 기믹인 네일즈가 빅 보스맨과의 대립이 끝나고 워리어와의 대립이 형성되려고 했으나, 네일즈가 맥맨 부자와의 폭력사건으로 방출돼서 불발되었다.
예전과 같이 호건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빈스의 판단으로 돌아오게 된 워리어는 레슬매니아 8을 계기로 시드와 대립하나 스테로이드 양성 판정으로 징계를 받게 된 시드가 불만을 품고 WWF를 떠나면서 허공에 붕 뜬 신세가 된다. 파파 샹고가 시드의 땜빵으로 워리어와 대립하지만 팬들의 반응은 최악에 가까웠다.
당시 WWF는 스테로이드 파동이 아직 가시지 않은지라 약물 사용에 민감한 상태였고, 우람한 근육을 지닌 워리어와 브리티시 불독 데이비 보이 스미스는 그 용의선상에 올라 있는 상태였다. 이로 인해 당시 브렛 하트가 안정적인 인물로 낙점되어 하이 미드카더급에서 메인이벤터로 급부상하게 된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빈스는 1992년 11월 스미스가 영국에서 성장 호르몬을 구해 워리어에게 제공했다는 빌미로 둘을 함께 해고시켜버렸고 워리어는 이에 대해 부당해고라며 소송을 걸었으나 결국 패소했다.
해고당한 워리어는 인디 및 일본 단체에서의 활동을 노렸지만 몸값을 너무 비싸게 부른 탓에 그를 찾는 이는 많지 않았다. 주당 10만 달러를 요구하는 것은 양반이거니와 어떤 이벤트에서는 아예 매출의 50%를 달라고 하기도 했으며, 이렇게 비싼 돈을 줘서 애써 섭외하면 이벤트 직전에 안 나가겠다고 땡깡을 부려서 추가 보너스를 줘야 하는 등 악명이 자자했다. 또한, 애리조나에 워리어 대학이라는 이름의 프로레슬링 도장을 차렸으나 오래 가지 못하고 망했다.
1996년 레슬매니아 12를 앞두고 디젤과 레이저 라몬의 WCW 이적이 확정되면서 WWF의 메인이벤터진에 큰 공백이 생길 위기에 처하자 빈스는 메인이벤터들이 받는 액수를 뛰어넘는 거액으로 다급히 워리어를 불러왔다.
레슬매니아 12에서 워리어를 상대하게 된 HHH는 재미있는 경기를 만들기 위해 워리어와 경기 내용을 상담하려 했지만 거부당했으며, 결국 딸리는 짬밥 때문에 찍 소리도 못 하고 '시작하자마자 페디그리 - 씹힘 - 고릴라 프레스 - 워리어 스플래시'라는 경기내용으로 1분 30초 남짓한 시간에 허무한 패배를 당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HHH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클릭 멤버들도 워리어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품게 된다.[12][13][14]
이후 워리어는 골더스트, 오웬 하트, 제리 롤러 등과 대립을 펼쳤으며 이때도 4~6분만에 초살시켜버리는 무적 패턴의 경기는 여전했지만 예전에 비하면 확실히 취급은 좋지 않았다. 심지어 1996년 5월 PPV였던 WWF 인 유어 하우스 8: 비웨어 오브 독에서 워리어와 오웬 하트의 경기는 다크 매치로 돌려지기도 했다. 워리어는 자신에 대한 취급 때문에, 회사 내부에서는 워리어의 독선적인 성격과 높은 임금 등으로 인해 서로 불만이 쌓여가고 있었으며 이런 와중에 워리어가 6월에 열렸던 하우스쇼를 펑크내는 사태[15]까지 일어나자 빈스는 진짜 마지막으로 워리어를 해고하기로 마음먹는다.
기묘하게도 하우스쇼 펑크 사태 이후 1996년 6월 30일 부친이 별세하여 워리어는 7월 1일자 RAW에 나오지 못했는데, 워리어가 3살 때부터 아버지와 헤어져 살았다는 건 널리 알려진 이야기였기에 대부분은 이를 변명으로 치부했다. 그럼에도 워리어는 일방적으로 복귀를 주장하여 7월 8일 RAW에 등장, 오웬 하트에게 DQ승을 거두지만 WWF 회장 역할을 맡고 있던 고릴라 몬순이 등장하여 워리어의 징계에 대해 알렸다. 하우스쇼 불참에 대한 위약금 25만 달러를 내지 않는 이상 복귀할 수 없다는 게 징계의 골자였는데 이는 사실상 해고나 다름없는 조치였다.
열받은 워리어는 다시금 부당해고에 대한 소송을 걸었고 덤으로 저작권 소송까지 얹었으며, 소송에서 이기기 위해 본명까지 워리어로 바꿔버리는 강수를 둔다. 흔히들 성을 바꿀 것을 강요당한 부인이 워리어와 이혼했다고 잘못 알려져 있는데, 워리어의 전처였던 샤리 린 타이리는 1982년에 결혼하여 1991년 3월, 불과 레슬매니아 7 이틀 전에 이미 이혼한 상태였다. 워리어는 2000년 데이나와 재혼하여 두 명의 딸을 뒀는데 이들은 얌전히 워리어라는 성씨를 쓰고 있다. 부당해고에 대한 소송은 여전히 별 성과가 없었지만 저작권 소송에서는 성과를 거둬 얼티밋 워리어라는 이름의 소유권을 가져오게 된다. 대신 타 단체에서는 얼티밋 워리어라는 이름은 쓸 수 없다는 조건[16]이 붙었기에 완벽한 승리라고 보긴 힘들지만.
3.4. WCW, 잠정적인 은퇴
이후로 은퇴나 다름없는 상태로 지냈기 때문에 과거의 인기는 바닥까지 떨어졌다. 우리나라에선 워리어가 알통이 터져 죽었다는 괴소문이 나돌기도 했지만 당시만 해도 멀쩡히 잘 살아있었다. 자금 사정이 곤궁해지다 보니 2004년에는 자신이 레슬매니아 6에서 따냈던 WWF 챔피언 벨트를 이베이에 내놓기도 했다. 경매 시작가는 23500 달러였는데 최종 낙찰가는 불명.
3.5. NWE
4. 말년 활동
보수 정치단체 소속으로 초청 강연활동 등을 해왔다. 본인 자신이 스테로이드의 피해자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그 부작용에 대해서도 강조하고 있고 당시 선수들에게 스테로이드를 권유했(다고 생각됐)던 WWE에 대해서 쓴 소리를 날리곤 했다.아랍인과 무슬림에 대한 편견과 반감이 이라크 전쟁으로 증폭됐고, 워리어는 총을 드는 대신 이라크 국기를 태우고 온갖 저급한 말을 강연회나 자신의 블로그에 싸지르는 걸로 분노를 갈음했다. 어느 강연회에서는 소수자인 한 무슬림 학생을 향해 "네 나라로 돌아가!"라 외치기도 했다. 2005년에는 코네티컷 대학의 공화당원들에게 접근해서 강연회를 열었는데 호모포비아적인 발언을 거침없이 쏟아내다가 강연을 듣던 대학생들과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대학생들 중에서 한 명은 동성애자가 왜 사회에 문제가 되는 것인지를 설명해달라고 요구했으나 얼티밋 워리어는 질문은 자신의 강연이 끝나고 난 뒤에나 하라고 역으로 화를 내었다. 나중에는 코네티컷 대학의 공화당원들이 얼티밋 워리어를 강연회의 강사로 세운 것에 대해서 학생들에게 사과를 할 정도였다.
그런데 한때 사이가 좋지 않았던 WWE와의 관계가 점차 개선되었던 것인지, WWE 게임의 모델로 나오면서 점차 WWE에서 워리어의 이름이 언급되기 시작했고, 마침내 2014 WWE 명예의 전당의 첫 번째 헌액자로 선정되어[22] 명예의 전당 당일과 레슬매니아 30, 연이어 그 다음날 RAW까지 3일 연속 WWE 쇼에 출연하며 건재를 과시하는 듯 했는데...
5. 사망
불과 하루 뒤인 2014년 4월 8일 갑자기 사망소식이 전해지면서 전세계 프로레슬링 팬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사망 당시에 얼티밋 워리어의 나이는 향년 54세.애리조나의 호텔에서 나와 집으로 가기 위해 차를 타러 가던 도중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결국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다. 사인은 죽상동맥경화성 심혈관질환(arteriosclerotic cardiovascular disease), 속칭 심장마비라고 부르는 심근경색증이다. 미국의 제일 흔한 사망 원인인 성인병이라서 외부 요인(스테로이드 약물)같은 것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은 없다고 한다.[23]
이 때 낸시 그레이스라는 앵커는 워리어의 사인이 밝혀지기도 전에 스테로이드 오남용과 약물 사용으로 인한 것이라고 단정성 발언을 해 논란을 일으켰다. 영상[24] 애당초 낸시 그레이스의 발언 자체가 아무런 근거 없는 경솔한 발언이기도 했고, 상식적으로 워리어는 현역에서 은퇴한 지 오래이며 중년으로 접어든 상태에서 약물까지 써서 근육을 키울 이유가 없다. '프로레슬러=스테로이드 약물'이라는 편견이 문제였다고 볼 수 있겠다[25].
다만 워리어는 왕년에 업계의 별명이 "아나볼릭 워리어"였으며, 걸어다니는 아나볼릭 스테로이드라는 의미로 보디빌더 시절부터 약물을 달고 살았고 여러 약물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26] 스테로이드가 사망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지만 간접적인 원인은 되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실제 스테로이드를 금지한 이유가 당장 문제가 생긴다기 보다는, 장기적으로 몸의 호르몬 체계를 무너트리고 체내 메커니즘을 엉망으로 만들어 각종 부작용을 유발한다는 점인데 실제 당시 활동했던 프로레슬러들 중에는 젊은 나이에 급작스레 갖가지 이유로 돌연사하는 등 요절하는 경우가 많았던 점을 상기해보자.[27]
앙드레 더 자이언트(47) - "미스터 퍼펙트" 커트 헤닉(45) - 빅 보스 맨(41) - 어스퀘이크(42) - 마초맨 랜디 새비지(59)에 이어 얼티밋 워리어(55)의 죽음으로 과거 WWF(현재 WWE)의 1980년대의 주역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고 있는 상황속에 프로레슬링 팬들은 애석함을 금치 못하고 있다. 게다가 이들은 하나같이 60살을 못채우고 갔다. 참고로 같은 년도에 前 WWE 소속 선수 킹 V[28]가 4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다만 앙드레 더 자이언트는 거인증을 고려하면 요절은 아니라고 한다.
헐크 호건과의 극적인 화해도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2011년 랜디 새비지의 죽음을 계기로 둘의 키배는 극심해지고 있었는데 호건은 인터뷰를 통해 레슬매니아 6에서의 경기를 회고하며 당시 워리어가 보여줬던 프로답지 않은 자세를 비판했고, 이에 워리어는 비밀을 폭로하겠다며 호건의 코카인 사용이나 호건의 전처인 린다가 다른 레슬러와 관계를 가졌다는 내용의 글로 대응했다. 애초에 워리어와 같이 일했던 레슬러 중 사이가 좋은 이를 찾아보기가 힘들긴 하지만, 참다못한 호건은 소송을 불사하겠다고 선언했을 정도.
그러나 그토록 미워했던 호건과의 관계도 워리어의 레슬매니아 30 출연과 명예의 전당 헌액 과정 중 평화롭게 극적으로 마무리 되었다. 레슬매니아 백스테이지에서 호건이 워리어를 찾아가서 화해를 요청했고, 이를 워리어가 흔쾌히 받아들인 것. #영상 이 일이 있고 불과 48시간도 지나지 않아 워리어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생각하면... 인생이란 정말 알 수 없다.
얼티밋 워리어 사후 그의 관련 상품들의 판매량이 큰 폭으로 올라서 심지어 존 시나를 능가했을 정도라고 한다. 일시적인 현상이긴 했지만 그래도 대단한 건 사실이다.
2015년 WWE에서는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었던 워리어의 업적을 기려, 몸이 불편함에도 이를 극복하고 다른 아이들에게 희망이 된 장애인 및 난치병 환자 소아에게 주는 '워리어 상'(Warrior Award)을 만들었다.[29] 1회 수여자로는 뇌암으로 투병했음에도 희망을 잃지 않았고, 세상을 떠나기 전 소원이었던 WWE 선수들과 만남을 가졌던 코너 '더 크러셔' 미할렉을 선정했다.
6. 경기 스타일
WWF의 대표적인 무적 기믹 레슬러인 헐크 호건과 같은 경기 스타일을 보여주었으나, 워리어는 파워하우스 원 패턴 레슬링의 정도가 심해서 헐크 호건보다 더 짧은 시간(3분~5분)에 대충 힘으로 밀어붙여서 속전속결로 경기를 끝내버렸기 때문에 평이 나빴다. 한두번 치고 받다가 상대 피니시를 씹고서 무적 콤보를 날리는 것이 주요 패턴.헐크 호건은 일본에서 활동할 때는 뛰어난 테크니션까지는 아니어도 검증받은 운영 능력이나 기술을 가지고도 미국식 쇼맨 레슬링을 한 것이지만, 워리어는 애당초 레슬링 스킬이나 센스가 현저히 부족했기 때문에 상대가 어지간히 운영 능력이 좋지 않으면 OME급 경기만 쏟아냈다[30]. 이런 수준 미달인 레슬러를 당대 최고의 수퍼스타로 키워냈다는 것 자체가 WWF가 표방한 스포츠 엔터네인먼트의 대단한 점이자, 반대로 어두운 일면이기도 하다.
헐크 호건이 회고한 바에 따르면, 워리어는 달려나와 로프를 흔드는 퍼포먼스를 하는 시점에서 체력이 거의 바닥이 났다고 한다. 실제로 워리어는 지구력이 상당히 떨어지는 선수였는데 등장 퍼포먼스가 워낙 격렬하다보니 지구력 소모가 엄청났던 것.
상기 영상을 보면 릭 루드에게 백 브레이커를 시전한 뒤 다시 들어올려서 추가적인 기술을 구사하려 한것 같으나, 체력이 바닥이 나서 상대를 제대로 들어올리지 못하고 앞으로 달려가다가 중심을 잃고 넘어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필살기는 일명 '워리어 프레스'라고 불리는 변형된 형태의 고릴라 프레스인데, 기술을 시전할 때 상대를 호쾌하게 던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앞으로 달려가면서 상대를 자신의 후방쪽으로 떨어지게 만들었고, 이때 워리어의 등이나 어깨에 상대가 툭하고 걸리듯 부딪혀서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심히 폼이 나지 않았다. 마무리 기술인 워리어 스플래시 공격도 대부분 엎어져 있는 상대의 등을 덮치듯이 구사하면서 임팩트가 약해보이긴 마찬가지였다. 1992년 이후 부터는 사이즈가 줄어들어 힘이 약해져서 그런지 마무리 콤보로 고릴라 프레스는 더이상 거의 시전하지 않고[31] 점핑 숄더 태클 → 워리어 스플래시 콤보로 변경시켰다[32]. 다만 임팩트와 별개로 캐릭터 자체가 워낙 무적 컨셉이라 그런지 이 콤보를 씹어본 상대는 거의 없다[33].
하지만 실력과 별개로 카리스마는 충분했다. 그 근육질과 단순한 무브들로 환호를 이끌어내는 것을 보면 충분히 쇼맨십과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체력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기술을 어거지로 넣는게 오히려 더 인기를 누린 비결이었다. 실제 워리어는 전형적인 파워하우스 스타일로 상대 선수를 들어 올리고, 메치는 스타일로 힘자랑을 했는데, 체력이 떨어져 헉헉거리면서도 억지로 들어올려 메다꽂아버리는게 오히려 상대선수가 다칠수 있는 보차가 나는 거지만, 그래서 더 임팩트 있게 보여졌다. 앙드레 더 자이언트와의 대결에서도, 능숙하게 바디슬램을 날린 헐크 호건과 대비되게 비틀거리면서도 그냥 힘으로 들어올려 메치는 스타일이지만 환호성은 같았다. 이게 미국 관중이 느끼는 워리어의 이미지였다.
또한 헐크 호건을 대체하지는 못했지만 다른 억지 푸쉬들과 달리 워리어는 이전부터 큰 환호들을 받고 있었다. 실제로 워리어의 온갖 요구에도 대부분을 수용한걸 보면 충분히 워리어가 인기 카드 중 하나라는걸 인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7. 기타
- 인디언 부족의 마지막 전사라는 설정의 기믹으로 활동했지만 진짜 인디언은 아니다. 또다른 기믹으로 초자연의 힘을 받는다는 설정이 있었는데 이게 놀랍게도 그냥 설정이 아니라 실제 본인이 그렇게 믿고 있었다. 주변 레슬러들에게 자신은 초자연이 선택한 초인이라고 계속 떠들어대 다들 싫어했다고. 항상 화제가 자신의 우월성과 다른 레슬러나 일반인의 열등함이라 그와 말을 섞는 일은 대단히 피곤한 일이었다고 한다.
- 특징으로는 달리면서 들어오는 입장 씬과 분위기를 달굴 때 로프를 잡고 위아래로 흔드는 동작으로, 나중에 등장한 레슬러인 데이브 바티스타가 오마주하기도 했다.
- 생전 개인 홈페이지 및 블로그, 유튜브 채널을 운영했으며, 현재는 아내인 데이나 워리어가 운영을 하고 있는 듯 하다. 홈페이지에서는 의류, 직접 그린 그림, 헬스 프로그램 등 다양한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이외에
트위터도 하고 있는데, 영어로 헐크 호건을 까는 내용을 올리면 즉시 워리어의 리트윗이 들어온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2014년 워리어가 사망한 이후에도 다른 사람이 운영 중인듯 하다.
- WWE가 2005년에 워리어에 관한 DVD를 내놓았는데 DVD의 내용은 워리어를 대놓고 비방하는 내용이다. 제목부터가 "얼티밋 워리어의 자멸(The Self-Destruction of the Ultimate Warrior)"[34] 이 DVD가 무서운 것이 원래는 브렛 하트에 대해서도 이렇게 만들 계획이었다. 일종의 프로토 타입인 셈인데, 브렛 하트는 워리어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의 거물이었기 때문에 제작이 조심스러웠고 그 과정에서 관계가 개선되면서 DVD가 멀쩡하게 나왔다. 초기 제작의도만 보자면 브렛 하트와 워리어의 DVD 제작 컨셉이 바뀐 셈이다. 그 차이는 역시 얼마나 거물인가와 제작시기 WWE와의 관계정도. 결국 만들어진 물건을 본 워리어는 이에 분노하여 WWE에 소송을 걸기도 했다. 이 소송은 3년여를 끈 끝에 워리어가 소송을 취하하면서 끝났고, 양자간의 관계도 어느 정도는 회복이 되었다. 그 대가로 WWE는 2010년 워리어의 명예의 전당 헌액을 추진하기도 하였지만 결국 무산. WWE 올스타즈 게임에 워리어가 들어간 것도 WWE와의 관계가 그럭저럭 괜찮아졌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워리어가 돈이 궁했거나….
- 동료들에게도 불쾌하게 굴었는지 이 DVD에서 이런 저런 인물들이 워리어에 대해 내리는 평가들도 비방의 강도가 높다. 빈스의 “해고하고 싶어 기다리기가 힘들었다.”라든가, 서전 슬로터의 “인터뷰 하는 것을 보니 다스 베이더(…)와 얘기하는 것 같다.”라는 말을 보면 대략 어떤 성격인지 짐작이 가리라 생각이 된다. 다만 이 물건이 워리어 디스용이란 것은 고려해야 한다. 물론 워리어의 형편없는 경기력은 두말할 것도 없지만 그 외의 디스는 대부분 당시는 그냥 먹히던 대상이었다. 예를 들어서 워리어의 고향이 ‘part unknown’이라고 까고 있는데, 언더테이커의 고향은 지금도 ‘death valley’이며 이 데스밸리가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실제 계곡을 말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덧붙여 더들리 보이즈는 WWE 시절 출신지가 존재하지 않는 지명인 '더들리빌'로 나오곤 했다.
- 그래도 같이 활동한 적이 없었던 후배 프로레슬러들과는 사이가 괜찮은 듯도 싶다. 대표적으로 RVD. 위 동영상 중간 쯤에 나타나 RVD에게 말을 거는 스포츠 머리 아저씨가 바로 얼티밋 워리어.
- 한편 브렛 하트는 인터뷰 및 자서전에서 메이크 어 위시 재단에서 약속까지 해서 온 불치병 환자 소년을 귀찮다는 이유로 만나지 않은 워리어를 비판했다. 이때 브렛이 헐크 호건이나 랜디 새비지, 앙드레 더 자이언트 같은 선수들은 다 팬들을 위해 시간을 내려 노력한다고 얘기했는데, 브렛이 호건을 매우 싫어하는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워리어의 인성을 문제삼았는지 알 수 있다.
나는 오마하에서 열렸던 쇼에서 워리어가 어떤 챔피언인지 알게 되었다. 나는 탈의실 밖에서 들것 위에 실려 있는 메이크 어 위시(난치병 어린이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기관) 소속의 아이를 보았다. 머리카락이 없고 워리어의 마스크를 쓰고 있던 슬픈 눈의 아이였다. 안색이 창백하고 산소호흡기를 끼고 있던 아이는 자신의 영웅을 위해서 워리어의 보라색 티셔츠를 입은 채 팔에는 초록빛 오렌지빛 끈을 묶어놓고 있었다. 그와 그의 가족들은 워리어와의 약속된 만남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다른 동료들이 그러했듯 몸을 구부려서 소년에게 인사했다. 그때 워리어는 개인 탈의실에서 홀로 있었다. 세 번째 시합이 시작될 무렵에 WWF 직원이 다가와서 죽어가는 소년을 만날 준비가 되었는지 그에게 정중하게 물었다. 워리어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빌어먹을, 난 바쁘다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뭐 때문에 바쁜데. 다른 떡대들이랑 잡담하느라고?” 밤이 깊어졌고 그와 가족들은 탈의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며 소년은 (죽기 전에) 워리어를 만나고픈 욕구에 시달렸다. 그리고 내 시합이 끝나고 탈의실로 돌아왔을 때 그들이 없는 것을 보고 마음을 놓았다. 나는 워리어가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짐 네이드 하트와 함께 샤워를 마친 뒤 옷을 입고 가방을 챙긴 뒤 퇴근할 준비를 했다.그리고 무대 뒤쪽에 있는 어느 진입로의 모퉁이를 돌 때 지친 소년과 그의 가족들을 우연히 발견했다. 그들은 워리어의 등장에 방해가 되지 말아야 했기에 (다른 직원들에 의해) 그곳으로 옮겨져 있었던 것이다. 나는 생각했다. 그 형편없는 X같은 인간을... 그는 자신의 팬을 만나려는 일말의 동정심도 보이지 않았고, 밤늦도록 그 가족을 기다리게 했다.
호건과
새비지,
안드레를 포함한 많은 선수들은 병들고 죽어가는 아이를 만나고자 시간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에 대한 혐오감이 천 배로 커졌다. 나에게 워리어는 약해빠진 겁쟁이이자, 가짜 영웅이었다.
브렛 하트
브렛 하트
- 경력 대부분을 WWE에서 지낸 해설자 짐 로스는 자신의 팟캐스트에서 WWF 당시의 워리어에 대해 '다른 선수들과 어울리지 않았고 행복한 모습을 보인 적 없는 우울한 사람'이라 평했다. #
- 미국이나 일본 등 골수 프로레슬링팬에게 까이던 절대무적 속전속결 스타일의 원 패턴 레슬링이 당시 WWF 붐이 불던 한국의 어린이들에게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인식을 형성시켰고, 따라서, 워리어의 전성기 시절에 WWF를 본 올드 팬들에게 인기 레슬러를 꼽으라면 워리어가 상위권을 차지한다. 서로 공방을 펼치며 재미있는 경기를 펼치는 '워커'가 대우받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당시 상당수의 어린이들은 프로레슬링이 진짜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의 외적 화려함 뿐만아니라 강함에 매료되었다. [35][36]
- 특이하게 WWF 데뷔 후 부터 악역을 한 적이 단 한번도 없는데, 이는 꽤 드문 경우에 속한다. 한때 WWF/WCW에서 선역의 아이콘들이였던 헐크 호건, 밥 백런드나 스팅도 턴힐을 한 적이 있는데 워리어 같은 경우는 초기 블레이드 러너 당시 악역을 할때 정도를 제외하면 턴힐이 단 한번도 없었다.
- 베어 너클 시리즈에 보스로 등장하는 아바데데는 이 워리어를 그대로 본떠서 만들어졌다.
- 2K에서 제작한 레슬링 게임 WWE2K14에서 프리 오더 특전으로 얼티밋 워리어를 사용 가능하고 워리어 본인이 직접 홍보 영상을 찍기도 하였다. #
- 바키 시리즈 1부에서 마이크 퀸으로 등장한다.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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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WWE 명예의 전당 헌액자 |
PWI 선정 올해의 대립 | |||||
릭 플레어 vs
렉스 루거 (1990) |
→ |
언더테이커 vs 얼티밋 워리어 (1991) |
→ |
더 문독스 vs
제리 롤러 &
제프 제럿 (1992) |
|
PWI 선정 올해의 복귀 | |||||
창설 | → |
얼티밋 워리어 (1992) |
→ |
렉스 루거 (1993) |
PWI 선정 올해의 경기 [★] | ||
1990년 4월 1일 |
WWF 레슬매니아 VI |
WWF 월드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
WWF 인터컨티넨탈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헐크 호건(C)[38] vs _얼티밋 워리어_(C)[39] |
레슬링 옵저버 선정 가장 과대평가된 선수 | ||||
더스티 로즈 (1988) |
→ |
얼티밋 워리어 (1989 ~ 1991) |
→ |
에릭 와츠 (1992) |
레슬링 옵저버 선정 올해 최악의 대립 | ||||
미드나이트 라이더 vs 툴리 블랜처드 (1988) |
→ |
앙드레 더 자이언트 vs 얼티밋 워리어 (1989) |
→ |
릭 플레어 vs 정크야드 독 (1990) |
헐크 호건 vs
서전 슬로터 (1991) |
→ |
얼티밋 워리어 vs
파파 샹고 (1992) |
→ |
언더테이커 vs
자이언트 곤잘레스 (1993) |
D.O.A. vs 로스 보리쿠아스 (1997) |
→ |
헐크 호건 vs 워리어 (1998) |
→ |
빅 보스 맨 vs
빅 쇼 (1999) |
레슬링 옵저버 선정 올해 최악의 경기 [★] | |||
1998년 10월 25일 |
WCW 할로윈 해벅 |
싱글 매치 _ 할리우드 호건_ vs 워리어 |
-***** |
역대 레슬매니아 메인이벤트[★] | ||||
1990년 4월 1일 레슬매니아 6 |
WWF 챔피언십 & WWF 인터컨티넨탈 챔피언십 헐크 호건 vs 얼티밋 워리어 |
[1]
실제 링네임을 본명으로 개명했다. 개명 전 이름은 제임스 브라이언 헬윅(James Brian Hellwig)다.
[2]
고릴라 프레스와 워리어 스플래시를 연속으로 사용하거나 혹은 플라잉 숄더 블록과 워리어 스플래시를 연속으로 사용했다.
[3]
다음날에 심장마비로 사망하면서 마지막으로 팬들에게 남긴
유언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4]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인 그 분이 아니다.
[5]
물론, 워리어는 헐크 호건처럼 앙드레를 상대로 멋진 바디슬램을 선보이거나 완벽한 핀폴승을 거둘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앙드레를 상대로 카운트아웃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WWF의 푸쉬가 강력했었다는 방증으로 볼 수 있다.
[6]
사실 워리어도 안드레를 바디슬램한 적은 있다. 다만 PPV가 아닌 작은 쇼라서 묻힌 것.
[7]
이후 WWF 인터컨티넨탈 벨트는 반납했고 새로운 챔피언을 뽑기 위한 8강 토너먼트가 벌어졌다.
[8]
경기 자체는 나쁘지 않았으나 뜬금포 경기였던 터라 이전까지 스토리텔링은 좋았던 헐크 호건 vs 어스퀘이크 경기보다는 화제성이 떨어졌던 것.
[9]
이때는 마초맨이 아니라 악역 마초킹 기믹으로 활동했다.
[10]
이날 워리어는 평소처럼 전력질주로 뛰어오는게 아니라 걸어서 등장했다. 그래서 당시 중계를 맡던 고릴라 몬순이나
바비 히난 모두 “왜 안뛰어오지?”라고 의아해했다.
[11]
역대 레슬매니아 중 최저 관중수를 기록했다.
[12]
트리플 H 본인은
# 인터뷰에서 당시에 패배에 악감정은 없고 오히려 자신의 레슬매니아 데뷔전을 거물과 치를 수 있어서 자랑스러웠다는 발언을 했다. 립서비스이든 진심이든 일단 악감정은 지금으로서는 남아있지 않은 걸로 보인다.
[13]
그러나 짧고 굵게 워리어 다운 경기를 했다는 평가가 많았다. 게임의 질을 따지기 전에 급하게 불러온 선수라 스토리가 전혀 없었고, 경기를 길게 끌고 나가기엔 기술이 많지 않던 워리어이기 때문에 자칫 루즈할수 있었던 상황을 빠르게 경기를 끝냄으로써 결과론적으론 나쁘지 않았다.
[14]
사실 당시 트리플 H도 지금같은 위상이 아니라 WWE의 흔한 악역 중 하나 정도의 위치라 나름 업계 베테랑인 워리어에 비빌 정도는 아니었다.
[15]
이 때 공교롭게도 또 시드 비셔스가 워리어의 대타로 나왔고, 이를 계기로 WWF에 복귀하게 됐다.
[16]
그래서
WCW 등 타 단체에서 활동할 때에는 '워리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17]
그 후 1998년에 워리어가 들어온 후에는 아예 워리어의 특수효과용 대역으로만 이용되다가 방출,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1999년에 권총자살해 생을 마쳤다.
[18]
앞에 언급한 소송 판결대로 얼티밋 워리어가 아닌 그냥 워리어를 링네임으로 사용했다.
[19]
당시 인디언의 영혼이 빙의했다는 기믹으로 초자연적인 기믹을 섞어서 사용했다.
[20]
이 경기는 데이브 멜처에게 마이너스 5성(....)을 받았다.
[21]
할로윈 해벅은 전체적으로 경기력들이 안좋아 역대 최악의 PPV를 기록할뻔 했으나, 메인이벤트였던 골드버그 vs DDP의 경기력이 좋아서 그나마 마무리는 잘되었다.
[22]
빈스 맥마흔과는 사이가 공식적으로 화해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새로 실권을 장악한
트리플 H가 지속적인 구애를 하면서 회사의 홍보대사와 레전드 계약을 체결하고 화해를 했다고 한다.
[23]
물론 스테로이드는 심장에 무리를 주니 장기적으로 악화시킨 요인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워리어의 아버지가 57세에 심장마비로, 또 조상 중 한 명이 52세에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 그리고 심장질환은 유전력이 매우 큰 것을 생각하면, 워리어는 스테로이드가 직접적인 문제라기보단 (좀 냉정하게 말하면) 하늘이 정해준 수명이 다했던 거라고 볼 수 있다.
[24]
시작하자마자 스테로이드와 약물로 사망한 것처럼 사인을 단정하는 발언을 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추락사한
오웬 하트도 그 명단에 포함시켜 팬들의 지탄을 받았다
아무래도 미친 것 같아요 이에 전, 현직 레슬러들이 모두 하나가 되어 낸시 그레이스를 성토했고, 같이 출연했던
다이아몬드 댈러스 페이지는 본인이 잘못한것도 없는데 오웬 하트의 유족들에게 사과를 하는 곤욕을 치렀다.
[25]
사실 굳이 워리어의 사망 원인에 대한 언급이 아니더라도, 해당 발언 자체가 문제가 컸다. 낸시 그레이스는 오웬 하트도 약물로 사망했다는 식의 발언을 했는데, 잘 알려져 있듯 오웬 하트의 사망 원인은 사고사이다. PPV 도중에 일어난 데다가 프로레슬링 계에서는 워낙 유명한 사건이라 어지간해서는 모르기도 힘들텐데 이여자는 제대로 사전조사도 안하고 적당히 말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이는 언론인으로서 비판받아 마땅한 부분이며, 물론 말할 필요도 없이 유족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26]
스테로이드 파동 당시 법정에 소환된 워리어는 프로레슬러가 되기 이전부터 사용해왔으며 당시에는 위법이라는 인식이 없었다고 하며 WWE 소속 선수 중 85~90% 정도의 선수들이 사용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는 진술을 한 적이 있다.
[27]
하지만 워리어는 심장 질환 가족력이 있어 스테로이드가 사망의 원인으로 확정할 수 없다.
[28]
비세라, 빅 대디 V로 활동했던 그 레슬러. 본명은 넬슨 프레지어 주니어
[29]
그러나 과거 암환자 팬을 대하던 태도를 감안하면 상의 이름이 온당한 것이냐는 지적이 있다. 미리 약속된 만남을 위해 라커룸 밖에 찾아와 창백한 얼굴에 워리어 가면을 쓰고 워리어 팔띠를 두른 채 힘겹게 기다리던 소아 암환자 팬을 귀찮다는 이유로 하루종일 기다리게 하다 끝내 안 만나고 되돌려 보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기타 항목의 브렛 하트의 회고 참조. 비판 측에서는 WWE에서 이미지 개선을 위해 억지로 만든 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30]
다만
레슬매니아 6에서
헐크 호건과
레슬매니아 7에서
마초킹을 상대했을때와 같이 사전에 제대로 길게 준비하고 임한 경우에는 꽤 괜찮은 경기력을 보이기도 했다.
[31]
다만 1996년 컴백시에는 오랜만에 돌아와서 그런지
트리플 H 상대로 유일하게 예전의 프레스 → 스플래시 콤보로 마무리 하였다.
[32]
나중에는 스플래시마저 시전하는게 버거웠는지 그냥 숄더 태클만으로 끝내기도 했다.
[33]
워리어의 전성기 시절에 이 무적콤보를 씹은 상대는
헐크 호건과 마초맨
랜디 새비지 단 두 명 뿐이다.
[34]
이 시기 WWE는 추억팔이 상품 판매가 한창이었는데, 애초에 좋지 못하게 헤어진 워리어와의 협상도 엉망이 되면서 제대로 뒤끝을 보여준 결과물이기도 했다. 물론 처음 기획안은 멀쩡한 내용이었다고.
[35]
국내에서 WWF 인기가 최고조를 달리던 때(1989~1991)가 마침 워리어가 푸쉬받던 시기였던지라 국내에서는 미국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일례로 네이버에서 프로레슬링 최고 VS 최고라는 테마로 투표를 진행하였는데, 초반 투표에서 헐크 호건 VS 워리어를 테마로 올렸다. 사실, 커리어 및 기여도에서 헐크 호건의 비교 대상은 경쟁 단체(
NWA,
WCW)에서 전성기를 보낸 네이처 보이
릭 플레어가 되어야 하지만, 당시에는 국내에서는 WWF의 인기가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릭 플레어의 인지도는 워리어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 선량한 이웃집 아저씨 포스의
헐크 호건과는 달리, 워리어는 입장할때 박력넘치게 달려나오고 링줄을 격렬하게 흔들고 무지막지한 클로스라인이라든지, 고릴라 프레스라든지 굉장히 파워풀한 이미지도 한몫했다.
[36]
이 때 반으로 나뉘어 각각 워리어와 호건을 응원하던 국딩들이 자라서 15년 뒤 효도르와 크로캅이라는 양대 라이벌의 팬이 된다는 썰도 있다.
[★]
밑줄이 승리자. 다자간 매치의 경우 이름 옆 (O)가 핀폴자, (X)가 피핀폴자.
[38]
WWF 월드 헤비웨이트 챔피언
[39]
WWF 인터컨티넨탈 헤비웨이트 챔피언
[★]
밑줄이 승리자. 다자간 매치의 경우 이름 옆 (O)가 핀폴자, (X)가 피핀폴자.
[★]
오른쪽이 도전자, 밑줄이 승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