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4 19:53:48

앨버트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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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고 M : 해병대, H : 명예진급(비왕실)
※ 진급시기 기준 세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통일된 1707년 이후 기준으로 서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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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국서
앨버트 공
Albert, Prince Consort
파일:Prince_Albert,_bust_length,_by_John_Jabez_Edwin_Mayal,_1860_(retouched).jpg
이름 프란츠 아우구스트 카를 알베르트 에마누엘
(Franz August Karl Albert Emanuel)
출생 1819년 8월 26일
독일 연방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국 로제나우 성[1]
사망 1861년 12월 14일 (향년 42세)
영국 잉글랜드 버크셔 윈저 윈저 성
배우자 빅토리아 여왕 (1840년 결혼)
자녀 빅토리아, 에드워드 7세, 앨리스, 앨프리드, 헬레나, 루이즈, 아서, 레오폴드, 베아트리스
아버지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에른스트 1세
어머니 작센고타알텐부르크의 루이제 공녀
형제 에른스트 2세
종교 개신교
서명 파일:앨버트 공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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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255131-1558086052.jpg
공식 초상화

1. 개요2. 작위3. 생애
3.1. 유년기3.2. 결혼3.3. 여왕의 부군으로서3.4. 가정 생활과 자녀3.5. 정치 관여3.6. 말년과 사망
4. 가족 관계
4.1. 조상4.2. 자녀
5. 매체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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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부군( 국서)이다. 본명은 프란츠 알베르트 아우구스트 카를 에마누엘(Franz Albert August Karl Emanuel)로, 미들 네임인 '알베르트'의 영어식 '앨버트'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아내인 빅토리아 여왕의 동갑내기 외 사촌이기도 하다.

2. 작위

<colcolor=#fff> 파일:Coat of Arms of Albert of Saxe-Coburg and Gotha.svg
문장
  •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알베르트 공자 저하 His Highness Prince Albert of Saxe-Coburg-Saalfeld (1819년 8월 26일 ~ 1826년 11월 12일)
  •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알베르트 공자 저하 His Highness Prince Albert of Saxe-Coburg and Gotha (1826년 11월 12일 ~ 1840년 2월 6일)
  •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알베르트 공자 전하 His Royal Highness Prince Albert of Saxe-Coburg and Gotha (1840년 2월 6일 ~ 1857년 6월 25일)[2]
  • 부군 전하 His Royal Highness The Prince Consort (1857년 6월 25일 ~ 1861년 12월 14일)

3. 생애

3.1. 유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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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lbert with Ernest.jpg
파일:808823-1534243864.jpg
어린 시절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국 에른스트 1세와 작센고타알텐부르크의 루이제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은 매우 불행했다. 앨버트의 부모 에른스트 1세와 루이제는 영지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문 내의 결정에 따라 정략 결혼했던 탓에, 차남인 앨버트가 태어났을 때는 이미 각자 애인을 두고 사실상 별거에 들어간 상태였다.

그러다가 루이제의 정부 중 한 명이 유대인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정말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안 그래도 손절 각을 재고 있었던 에른스트는 이 사실이 밝혀지자마자 공식적으로도 루이제와 이혼하고 그녀를 쫓아낸다. 결국 어머니 루이제는 파리에서 쓸쓸하게 죽고 에른스트 1세는 두 아들이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것은 물론, 장례식에 참여하는 것도 금지해, 두 아들은 부모의 이혼 이후 영영 어머니를 보지 못했다.

당시 어린 두 아들에게 이 사건은 큰 트라우마로 남았으며 장남 에른스트 2세는 여자와 결혼에 대한 불신에 사로잡혀 방탕한 생활을 하다 성병에 걸려(...) 후사를 얻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앨버트는 반대로 나는 아버지처럼은 되지 않을 거다.라고 다짐했다.

3.2. 결혼

1836년 형 에른스트 공세자(훗날의 에른스트 2세)와 함께 고모 켄트 공작 부인을 만나러 간다는 핑계로, 영국을 방문해 고종사촌이자 당시 켄트의 공녀였던 빅토리아와 사실상 첫 맞선을 보았다. 처음 빅토리아가 마음에 들어했던 사람은 유쾌하고 명랑한 성격의 에른스트였지만 미남미녀를 너무 대놓고 좋아하는 것으로[3] 유명했던 빅토리아는 얼마 못 가, 자신의 일기장에 "푸른 눈에 아름다운 코, 하얀 치아" 등 온갖 미사여구를 늘어놓았을 정도로 대단한 미남이었던 앨버트 공에게 반해버렸다.[4] 게다가 함께 지내면서 앨버트 공이 겸손하고 뛰어난 인품까지 갖춘 인물임을 알게 되자, 여왕은 즉위 3년 뒤 직접 청혼했다.[5]

낭만적이고 감성적이었던 빅토리아는, 앨버트가 청혼을 받아주자 너무나 기쁜 나머지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천사 같은 앨버트에게 사랑받는 느낌은 인간의 언어로는 결코 표현할 수 없다."고 일기에 적었을 정도였지만, 막상 앨버트는 "빅토리아는 나에게 너무 잘해주고 친절해요. 그녀가 나에게 보여주는 사랑을 생각하면 난감할 때가 있어요."라고 형에게 편지를 썼다고. 심지어 여왕의 시녀조차 결혼 첫날밤을 보낸 직후의 부부에 대해, 여왕은 앨버트에게 깊이 빠져 있지만 앨버트는 행복하지 않은 것 같았다고 증언해 잠시나마 입장이 곤란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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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The Marriage of Queen Victoria, 10 February 1840.jpg
결혼식
부부생활은 주로 앨버트 쪽이 인내하는 편이었다고 한다. 처가살이하는 데릴사위라는 입장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앨버트의 성격이 진중하고 이성적이었던 반면에, 빅토리아는 고집불통에 매우 불 같은 막가파적인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부부 싸움은 주로 사소한 사건에도 자주 성을 내곤 했던 빅토리아의 신경질로 시작되었다. 이때 앨버트가 전형적인 독일인답게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논리로 빅토리아의 잘못을 열거하며 가르치려 들거나 아니면 아예 입을 꾹 닫고서 그러려니 하는 무심한 태도를 보이면 여왕은 점점 열이 뻗치다가, 결국엔 참다못해 이리저리 도망다니는 앨버트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짜증을 쏟아부었다가 나중에는 도저히 참지 못한 앨버트가 그만하라고 꽥 고함을 지르거나 뛰쳐나가 버리는 패턴의 반복이었다.

게다가 주치의들조차 여왕이 할아버지 조지 3세 앤 여왕처럼 하노버 왕조의 광기를 물려받아 피에 굶주린 간악하고 잔악한 정신이상자가 되는 게 아닌가 걱정했을 정도로, 빅토리아 여왕이 한 번 화가 났을 때 부리는 성질은 일반인들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나마 앨버트쯤 되는 보살급 멘탈이니 그 포악한 성격 감당하고 산다는 게 당대에도 이미 중론이었다.

그러나 이런 더럽고 변덕스러운 성미와는 별개로 일단 흥분이 가라앉으면 상대의 말이 맞고 자기가 너무 지나치게 화를 냈다는 걸 인정하며, 먼저 다가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고 화해를 청하는 쪽도 주로 빅토리아였다고 한다. 하루는 대판 싸운 앨버트가 단단히 삐져 자기 방에 틀어박혀 문을 잠가버리자 빅토리아가 문을 열 것을 명령하며 첫 번째로 "영국의 여왕이에요.", 두 번째로 "빅토리아입니다."라고 했을 때는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빅토리아가 다시 노크하며 "당신의 아내예요."라고 말하자 앨버트가 기쁘게 문을 열었다는 일화는 유명한 에피소드다.

빅토리아는 근세 여성 군주의 한계상, 군주임에도 여느 여염집 아낙처럼 부군에게 순종하고 권력을 공유해야 하는 게 싫다는 이유로 엘리자베스 1세처럼 독신으로 살고 싶다고 처녀 시절 누차 언급했을 정도로 의지가 강하고 독립적인 여성이었지만[6] 앨버트와의 결혼 기간이 길어지면서 남편을 깊이 신뢰하게 되었고, 종국에는 완전히 앨버트 공에게 의존하는 얌전하고 온순한 성격으로 변해버렸다. 비록 여왕 본인이 내색은 안 했지만 스스로도 자신의 결함있는 성격을 알고 이를 묵묵히 받아주며 보완해 주는 앨버트에게 큰 감사함을 느끼게 된 것이다. 심지어 딸 빅토리아에게 보내는 편지에 "앨버트가 하지 말라고 하면 리본 하나라도 절대 함부로 매지 않았다."고 자랑스럽게 썼을 정도다. 다만 빅토리아는 앨버트에게 심적으로 의존하는 것과는 별개로 여전히 매우 독립적이고 강인한 여성이었고 자신의 의지대로 통치했다.[7]

3.3. 여왕의 부군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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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Prince Albert_1843.jpg
200년 만의 '여왕의 부군'[8]으로서 여러 선례를 스스로 만들어야 했으므로 고생이 심했다. 앨버트 이전에 앤 여왕의 부군으로 덴마크의 왕자였던 컴벌랜드 공작 조지가 있기는 했지만 그는 앨버트와 달리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앤에게 살아있는 후계자를 만들어주는데도 실패하면서 공기급의 존재감을 과시했던 데다[9] 아내가 여왕이 된 지 6년 만에 사망한 탓에 별다른 선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결혼 초기에는 경계의 대상이 되어 꽤 고독했다고 한다. 숙부 레오폴드 1세가 빅토리아 이전에 영국의 왕위 계승자였던 샬럿 공주와 결혼해 벼락출세를 노린다는 험담을 들은 것처럼, 그도 여왕의 재산을 탐하고 여왕을 조종해 영국을 지배하면서 모국 독일의 이익에 충실하려 한다는 근거 없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여왕과의 약혼 발표가 나자마자 영국 대중들 사이에서는 "새신랑은 의심의 여지 없이 뚱뚱한 영국 여왕의 두툼한 돈지갑을 노리고 왔노라"며 앨버트를 조롱하는 발라드가 크게 유행하기도 했다.

법적 지위를 부여받는데도 앨버트는 푸대접을 받았는데 결혼 후 17년 뒤인 1857년에야 간신히 '여왕의 배우자(The Prince Consort)' 칭호를 받았으며, 그 전에는 원래의 호칭인 'Prince Albert of Saxe-Coburg and Gotha, Duke of Saxony[10]'에 직계 왕족과 결혼하면 무조건 붙는 HRH(His Royal Highness)이 추가로 붙은 것 외에 어떤 영국의 작위나 공적 지위도 없었다.[11]

빅토리아 여왕은 원래 앨버트 공에게 'King Consort' 호칭을 주고 싶었지만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실패한 이후, 의회와의 줄다리기 끝에 어렵게 남편에게 'The Prince Consort' 호칭을 부여하는 데 성공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해군 제독 지위도 주고 싶어했지만, 이 지위는 끝내 받지 못했다.[12][13]

거기다 앨버트는 성격이나 성향도 영국인들과 별로 맞지 않았다. 농담을 즐기고 재치 있는 사람을 좋아하는 영국인들에게 앨버트는 지나치게 진지하고 유머 감각도 없고 우울하기까지 한 사람이었다. 앨버트는 사교생활을 즐기지 않아 영국 귀족들과 사귀는 것이 매우 느렸던 데다[14] 밤늦게까지 호화로운 파티를 열고 춤추며 노는 영국 상류층들의 관습[15]은 아예 이해를 못 하다 못해 경멸해서 성실하게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을 강조했다.

복도 청소를 하는 하녀 옆을 지나갈 때조차 귀부인에게 하는 것처럼[16] 모자를 벗고 "방해해서 미안합니다. 나는 신경쓰지 마세요."라며 정중하게 행동했고, 당시 상류층 남성이라면 흔히 두었던 총희 하나 제대로 만들지 않았던 데다 임신해서 몹시 살찌고 예민해져 있는 아내 빅토리아를 보고[17] "미래의 어머니가 될 임산부는 너무나도 아름답다.",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내 아내"라고 부르며 옆에서 아주 충실하게 수발을 들어주었다. 19세기 영국인의 기준에 지나치게 도덕적이고 모범적이었던 앨버트의 행실과 마인드는 존경스러운 수준을 넘어서, 왠지 가식적이고 위선적이다 못해 좀 재수없게까지 느껴지는 오버액션 정도로 받아들여졌다. 사실 밤새도록 술 퍼마시다 동트면 잠드는 집단 속에 성실남이 왔으니 당연한 반응이긴 했다.

결혼 초부터 약간 어둡고 우울하며 금욕적이던 그의 성격은 죽을 때까지 거의 고쳐지지 않았다. 그는 덕망 있는 성품과 고결한 행실로 가족들과 가까운 지인들에게는 존경을 받았지만 친구는 별로 없어서 영국 귀족층들 사이에서는 배척을 받았다. 안 그래도 외국인 왕족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일반 대중들을 대상으로 한 신문지상에서는 차가운 샌님, 사이비 현학자라며 심심할 때마다 까이곤 했다. 앨버트 공의 도덕률에 깊이 공감했던 데다 열렬한 남편의 지지자였던 빅토리아는 앨버트가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영국 신민들에게 평가절하당하는 것에 몹시 분개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3.4. 가정 생활과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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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The Royal Family in 1846.jpg
1846년 가족 초상화
이렇듯 안팎으로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 보니, 결혼 초의 앨버트는 자연스럽게 가정 내에서의 문제에만 집중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앞에서 언급했듯이 영국 왕실의 뒤숭숭한 후계 구도 때문에 어머니와 주변 어른들에게 시달리며 불행한 어린 시절을 살았던 빅토리아와 마찬가지로 앨버트 역시 아픈 가정사를 겪었던지라, 자신의 아이들만큼은 절대 자신과 같은 아픔을 겪지 않게 하겠다고 다짐했고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내를 돕는 내조를 잘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아내 빅토리아와 장모 겸 본인의 고모 켄트 공작 부인의 사이를 중재해 준 일인데 어릴 적 빅토리아는 집사인 존 콘로이의 부추김으로 자신을 폐쇄적인 환경에서 자라게 한 어머니를 몹시 싫어했고, 대신 가정교사인 루이즈 레젠 여남작에게 의존했다. 이 때문에 켄트 공작 부인은 딸의 정적들을 지원했을 정도로 여왕을 괴롭혔고, 레젠 남작은 자신만을 의지했던 빅토리아의 사랑이 앨버트에게 넘어갈 것을 염려해서 젊은 부부 사이를 이간질하는 등, 빅토리아의 가정 환경 역시 앨버트의 가정만큼이나 평범치 않았다. 그러나 사위이지만 동시에 친정 조카라는 이점을 살려 켄트 공작 부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앨버트는 공작 부인과 여왕을 어느 정도까지는 화해시키는데 성공했고, 레젠 여남작을 독일로 쫓아내면서 문제를 해결했다. 이 시점 이후 앨버트는 가정 내의 문제 해결사 혹은 중재자의 역할을 맡게 된다.

한편 여왕과의 금슬이 매우 좋아서 9남매[18]를 낳았다. 이 중에서 앨버트가 가장 사랑한 자녀는 첫째이자 장녀인, 나중에 독일의 황후가 되는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통칭 비키)로 여왕이 내심 질투할 정도로 이 딸을 귀여워했다고 한다. 비키는 6살에 프랑스어를 완벽하게 소화하고, 14살에는 정치, 외교, 사회 다방면에서 막힘 없이 대화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을 갖추었을 정도로 여왕의 자녀들 중에는 가장 탁월한 수재였는데, 이런 딸의 엄친딸 성향과 재능이 교양수준 높고 지적 욕구가 대단했던 앨버트의 구미에 딱 맞았던 것이다.

맏이의 성취에 감격한 앨버트와 빅토리아는 자식들의 능력을 과대평가한 나머지 둘째이자 왕세자인 버티에게는 측근 스톡마르 남작마저 기겁할 정도로 빡센 교육 커리큘럼에 더해 왕세자 전용 군사 교육까지 시켰다. 그러나 누나만큼 지적이지 못했던 버티는 이를 따라가지 못했고 점점 비뚤어지기 시작했다. 여왕은 게으르고 공부를 멀리하며, 맨날 애인이 바뀔 정도로 사생활도 문란하고, 부모 말도 징그럽게 안 듣는 왕세자를 매우 못마땅히 여겨 들들 볶았는데, 그런 빅토리아와 버티 사이를 더 나빠지지 않도록 중재했던 것도 앨버트였다. 그러나 앨버트 역시 외가인 하노버 왕조의 왕자들을 닮아 자신과는 성격이 완전히 다른 아들을 이해하지는 못했고, 버티 또한 냉정하고 도덕적인 아버지의 설교에 그다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후일 에드워드 7세가 되는 버티는 실제로 평범한 재능의 평범한 왕이었다는 평을 듣기는 해도, 빅토리아가 평한 것처럼 최악의 성품과 지능을 가진 둔재는 아니었으며, 오히려 외교 정책에 있어서는 부모보다 낫다는 평가도 있다.

3.5. 정치 관여

앨버트는 꽤 똑똑했고 의지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여왕에게 조언하는 방식으로 간접적으로 정치에 관여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여왕임에도 여성은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되고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보수적인 여성관을 가지고 있던 빅토리아는 그의 조언을 잘 따르는 편이었다. 공식 직함은 없었지만, 단순히 여왕에게 조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죽기 전까지 공식 문서는 앨버트가 먼저 읽어서 답변을 써놓으면, 빅토리아는 앨버트가 작성한 답변을 열심히 베껴 써서 문서를 처리했다고 한다. 학식과 지성을 갖춘 데다 자유주의 성향이었는데 신하들은 독일 남자가 여왕을 조종한다며 좋지 않게 보았다.

조언자라는 한계가 있었지만 앨버트는 여왕에게 있어 상당히 유능한 조언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빅토리아는 자주 서신을 보내 앨버트에게 조언을 구했고, 앨버트도 그녀를 성실하게 보좌했다고 한다. 특히 동인도 회사의 횡포로 인해 세포이들의 반란이 일어나자 병석에 있음에도 일일이 그녀에게 편지로 조언을 보냈다.

업적으로는 수정궁으로 유명한 1851년 영국 만국박람회를 주도했으며, 이 박람회가 성공적으로 치러지자 빅토리아는 남편의 성공에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3.6. 말년과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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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Prince Albert_1861.jpg
말년의 사진
1859년 8월, 앨버트는 위경련을 앓아 병상에 누웠다. 1860년 가을에는 코부르크에 가던 중 타고 있던 마차의 말이 달아나서 타박상을 입기도 했다. 이 때 앨버트는 형 에른스트 2세와 큰딸 빅토리아 공주에게 죽을 때가 된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고 한다.

1861년 3월, 빅토리아 여왕의 어머니 켄트 공작 부인이 사망했다. 여왕은 생전 어머니와 갈등했지만 모친상에 매우 깊은 슬픔에 빠졌다. 앨버트는 위가 좋지 않았지만 슬픔에 빠진 여왕을 보좌했다. 그 해 8월에는 여왕과 함께 장남 앨버트 에드워드 왕세자가 군 복무를 하고 있는 아일랜드를 방문했으나 정작 왕세자는 그곳에서 아일랜드 여배우 넬리 클리프던을 만나고 있었다.

1861년 11월에는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의 오촌 조카들인 페드루 5세와 페르난두 왕자가 장티푸스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앨버트는 왕세자가 여전히 넬리 클리프던을 만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고, 이에 충격을 받아 아픈 몸을 이끌고 직접 왕세자를 찾았다.

하지만 이후 앨버트의 몸 상태는 급격히 악화되어 결국 12월 9일 장티푸스 판정을 받았고, 12월 14일 윈저 성에서 빅토리아 여왕과 다섯 자녀가 곁을 지키는 가운데 사망했다.[19] 당시 주치의는 장티푸스로 진단했으나 지속적인 위경련과 통증 등으로 보았을 때 크론병이나 신부전증, 또는 위암이 사망 원인이었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많다.

유해는 윈저 성 세인트 조지 예배당에 안장되었다가 1년 후 프로그모어 영묘로 이장됐다. 앨버트 사후 빅토리아는 죽을 때까지 상복을 입고 남은 평생 그의 죽음을 애도했고, 남편이 망나니 아들을 훈계하러 무리해서 움직인 탓에 사망했다고 믿었기에 죽는 날까지 에드워드 7세를 용서하지 않았다.

4. 가족 관계

4.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알베르트 공자
(Prince Albert of Saxe-Coburg and Gotha)
<colbgcolor=#fff3e4,#331c00>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에른스트 1세
(Ernest I, Duke of Saxe-Coburg and Gotha)
<colbgcolor=#ffffe4,#323300>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작 프란츠
(Francis, Duke of Saxe-Coburg-Saalfeld)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작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Ernest Frederick, Duke of Saxe-Coburg-Saalfeld)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조피 안토이네테 공녀
(Princess Sophie Antoinette of Brunswick-Wolfenbüttel)
로이스에베르스도르프의 아우구스테 여백작
(Countess Augusta Reuss of Ebersdorf)
로이스에베르스도르프 백작 하인리히 24세
(Heinrich XXIV, Count Reuss of Ebersdorf)
에어바흐쇤베르크의 카롤리네 에르네스티네 여백작
(Countess Karoline Ernestine of Erbach-Schönberg)
작센고타알텐부르크의 루이제 공녀
(Princess Louise of Saxe-Gotha-Altenburg)
작센고타알텐부르크 공작 아우구스트
(Augustus, Duke of Saxe-Gotha-Altenburg)
작센고타알텐부르크 공작 에른스트 2세
(Ernest II, Duke of Saxe-Gotha-Altenburg)
작센마이닝겐의 샤를로테 공녀
(Princess Charlotte of Saxe-Meiningen)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루이제 샤를로테 여공작
(Duchess Louise Charlotte of Mecklenburg-Schwerin)
메클렌부르크슈베른 대공 프리드리히 프란츠 1세
(Frederick Francis I, Grand Duke of Mecklenburg-Schwerin)
작센고타알텐부르크의 루이제 공녀
(Princess Louise of Saxe-Gotha-Altenburg)

4.2.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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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녀 독일 제국의 황후 빅토리아
(Victoria, German Empress)
1840년 11월 21일 1901년 8월 5일 프리드리히 3세
슬하 4남 4녀[20]
1남 에드워드 7세
(Edward VII)
1841년 11월 9일 1910년 5월 9일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공주[21]
슬하 3남 3녀[22]
2녀 헤센 대공비 알리체
(Alice, Grand Duchess of Hesse and by Rhine)
1843년 4월 25일 1878년 12월 14일 헤센 대공 루트비히 4세
슬하 2남 5녀[23]
2남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알프레트
(Alfred, Duke of Saxe-Coburg and Gotha)
1844년 8월 6일 1900년 7월 30일 러시아의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24]
슬하 1남 4녀[25]
3녀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크리스티안 공자비 헬레나
(Helena, Princess Christian of Schleswig-Holstein)
1846년 5월 25일 1923년 6월 9일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크리스티안 공자
슬하 3남 2녀[26]
4녀 아가일 공작부인 루이즈 공주
(Princess Louise, Duchess of Argyll)
1848년 3월 18일 1939년 12월 3일 제9대 아가일 공작 존 캠벨
3남 코넛과 스트래선 공작 아서 왕자
(Prince Arthur, Duke of Connaught and Strathearn)
1850년 5월 1일 1942년 1월 16일 프로이센의 루이제 마르가레테 공주
슬하 1남 2녀[27]
4남 올버니 공작 레오폴드 왕자
(Prince Leopold, Duke of Albany)
1853년 4월 7일 1884년 3월 28일 발데크피르몬트의 헬레네 공녀
슬하 1남 1녀[28]
5녀 바텐베르크의 하인리히 공자비 베아트리스
(Beatrice, Princess Henry of Battenberg)
1857년 4월 14일 1944년 10월 26일 바텐베르크의 하인리히 공자
슬하 3남 1녀[29]

5. 매체

  • 메이지 디 어센션: 오더 오브 리즌의 2인자이자, 아내인 빅토리아 여왕과 함께 오더 오브 리즌을 현대의 테크노크라시로 재구성한 위대한 테크노크라트로 묘사된다. 그가 주최한 1851 런던 엑스포는 오더 오브 리즌이 테크노크라시로 재탄생하는 무대가 되었다. 앨버트 공의 죽음 이후 빅토리아 여왕은 테크노크라시의 운영과 후원에 더욱 깊이 관여하게 되었는데, 이는 아마도 테크노크라시를 남편의 유산으로 생각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 빅토리아: 톰 휴스가 역을 맡았다.
  • 수정궁을 둘러싼 모험: 크툴루 TRPG 시나리오이며 NPC로 나오는데 그도 그럴게 수정궁 만국박람회 자체가 그의 주도로 시작된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 이상적인 기둥서방 생활: 야마이 젠지로가 이 사람을 모티브로 했다는 주장이 있다. 실제로 둘을 비교하면 겹치는 부분이 많다. 정부()을 들이지 않고 일편단심 여왕만 바라본다거나 나름대로 뛰어난 재능을 지녔지만 직접 정치에 나서지 않고 아내에게 조언하는 역할만 하는 등. 정부(情婦)와 관련해서는 비록 그 이전시대보다는 여성의 권리가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빅토리아 여왕이 다스리던 시절에도 귀족 부인들이 애인을 만들면, 욕을 먹지만 남성 귀족들이 똑같이 정부를 만드는 건 도덕적으로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던 사회였다. 오스트리아의 여군주 마리아 테레지아, 러시아의 여제 예카테리나 2세도 남편의 정부 때문에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다. 정부를 전혀 만들지 않았던 루이 16세가 오히려 무능력한 남자 취급을 받고 덤으로 그의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투기가 심하다고 비난받았다. 다만 프랑스의 경우는 좀 다른데 예나 지금이나 권력자 본인을 욕하기는 부담스러우니 주변인을 욕하는데(십상시, 간신, 섭정, 외척 등등. 하다못해 현대에서도 대통령이나 재벌을 욕하고 싶을 땐 비서실장이나 부회장 등을 저격하며 우회한다) 프랑스에선 그게 왕의 정부였다. 왕이 욕받이 정부를 안 두니 욕하고 싶을 때마다 왕비를 욕한 것. 당시 프랑스 경제가 폭망하던 시절로 왕실에 대한 여론이 갈수록 험악해지는 가운데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의 오랜 적국이었던 오스트리아의 공주이기까지 했으니...

6. 기타

  • 영국 런던의 유명 박물관 중 하나인 빅토리아-앨버트 박물관은 부부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
  • 영국의 유명 공연장 로열 앨버트 홀(Royal Albert Hall)도 그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 원래는 중앙예술과학홀로 불렸으나 빅토리아 여왕이 1867년 6년 전 사망한 남편 앨버트 공을 기리기 위해 이름이 바뀌었다.
  • 에른스트 2세 바덴의 알렉산드리네 공녀와 결혼하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49년간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을 통치했지만, 앞에서 말한 불행한 가정환경을 본 후유증으로 여자와 결혼에 대한 불신에 사로잡혀 방탕하게 생활하다 성병에 걸려 후사를 얻지 못하고 1893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 이후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의 공위는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의 차남인 에든버러 공작 알프레드 왕자가 이어받았다. 하지만 알프레드의 외아들이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하면서[30] 알프레드의 사후에는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의 막내 아들인 레오폴드 왕자의 유복자 카를 에두아르트가 공작이 되었고, 1918년 독일 11월 혁명 및 군주제 폐지 이후 가문의 수장 자리는 카를 에두아르트와 그의 후손이 이어가고 있다.
  • 앞의 유년생활에서 언급했듯이 불행한 가정 환경에서 자라났지만 이를 극복하고 훌륭한 아버지이자 남편이 되었던 케이스였기에, 아동 학대 피해자 또는 잘못된 가정환경에서 자란 사람이 대물림을 끊고 훌륭한 부모가 되는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된다. 빅토리아 여왕 또한 부군 못지 않게 불행한 유년시절을 보냈기에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주고 행복을 준 앨버트 공의 죽음에 대해 누구보다 큰 상실감을 느꼈으며, 앨버트 공의 사후 남은 평생동안 상복을 입고 지내고 윈저 성에 앨버트 공이 사망한 방을 그대로 보존하며 여생을 그를 기리며 살았다.
  • 페니스 피어싱 종류 중에 앨버트의 이름을 따온 것이 있다. 이는 앨버트 공이 그곳에 피어스를 했다는 루머를 따른 것인데 물론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일설에 따르면 그곳의 치료를 위해 했다고 하지만, 성관계 시 즐거움을 위해 하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링크 다만 점잖고 엄숙주의적이었던 앨버트 공이 이런 것을 정말 했을지에는 의문이 든다.
  •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인만큼 여왕을 다룬 매체에선 거의 예외가 없을 정도로 당연히 등장하는데, 실제 역사에서도 미남이었다는 것을 반영해서 앨버트 공을 연기하는 배우들도 전부 다 미남 배우들이다.
  • 파일:앨버트 공 1842년.jpg

    영국 왕실 구성원 중 최초로 사진을 남긴 인물이다. 무려 1842년에 첫 사진을 남겼는데, 이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사진을 남긴 국가원수인 루이필리프 1세와 비슷한 기록에 아내 빅토리아 여왕보다도 2년 빨랐다.


[1] 독일 바이에른 주 뢰덴탈 [2] 아내 빅토리아 여왕과 결혼하게 되면서 His Royal Highness 를 받았다. [3] 빈말이 아니라 빅토리아 여왕의 얼빠 기질은 당대에도 유명했는데, 손주들의 외모 품평도 서슴치 않았으며 특히 예쁘고 잘생긴 손주들을 노골적으로 편애했다. [4] 너무 잘생겨서 아버지인 에른스트 1세의 아들이 아니라 어머니인 루이제가 앞서 말한 유대인 정부와의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라는 헛소문이 돌았을 정도였다. 앨버트의 집안에는 나름 미남미녀들이 꽤 있고, 부친 에른스트 1세도 나름 준수한 미남이다. [5] 빅토리아 여왕은 이때의 청혼에 대해 일기에 자세히 적어놓았다. "앨버트는 내가 기다리고 있는 접견실로 들어왔다. 그에게 접견실로 부른 이유를 알 거라고 하면서 내가 원하는 것에 그도 동의한다면 무척 기쁠 것이라고 말했다. …(중략)… 우리는 서로 포옹했다. 그는 무척 다정하고 친절했다. …(중략)… 나는 내가 그에게는 너무 부족한 사람이고 나와 결혼하면 많은 희생이 따를 거라고 말했다. 앨버트는 결코 희생이 아니며 나와 함께 일생을 보내는 것에 동의하는 것 이상으로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6] 빅토리아가 앨버트와의 결혼을 결심한 데에는 앨버트의 매력에 굴복한 탓도 있었지만, 당시 영국 총리 멜번과 지나치게 친밀한 모습을 보이면서 그와 결혼할지도 모른다는 괴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어디까지나 아버지 없이 자란 여왕이 아버지처럼 자상한 총리와 손발이 잘 맞아 의지했던 것이었지만, 그 바람에 의회에서 '멜번 부인'이라는 조롱을 당할 정도로 여왕으로서의 체통에 큰 타격을 입고 있었던 점도 컸다. 적당한 왕족과 결혼해서 성실한 결혼 생활을 보여주는 것 외에는 스캔들을 잠재울 만한 뾰족한 수가 없었던 것이다. [7] 사실 영국 귀족 사회에서 은근한 따돌림을 받은 앨버트가 정치에 뭐라 할 처지도 아니라서... [8] 메리 1세의 남편 펠리페 2세는 에스파냐의 왕이었기 때문에 여왕의 부군보다는 외국 군주에 더 가까웠고, 엘리자베스 1세는 아예 결혼을 안 했으며, 메리 2세의 남편 윌리엄 3세는 아내보다 서열에서 밀리긴 할지언정 영국 왕위 계승권자였기 때문에 공동 즉위를 할 수 있었다. [9] 명색이 여왕의 정식 남편이라는 신분이었음에도 사망했을 때 장례식조차 개인장으로 치러버렸다. 이런 푸대접과는 별개로 아내 앤과의 금슬은 좋았고, 남편의 사후 앤은 시름시름 앓다가 사망했다. [10] 작센 공작 직위는 모든 베틴 가문에게 주어지는데 원래 영지 분할상속을 포기하고 장자 상속으로 전환했음에도 예전 특권을 명목으로 유지하는 것이다. 따라서 앨버트 공은 작센 공작이면서 작센 가문의 프린스이기도 하다. [11] 왕이 아니면서 여왕의 부군이 된 또 다른 사례인 앤 여왕의 부군 조지와 엘리자베스 2세의 부군 필립 공은 각각 컴벌랜드 공작, 에든버러 공작이라는 영국 작위를 받았다. 다만 'The Prince Consort'라는 호칭은 액면 그대로 해석하면 '여왕의 배우자'라는 단순한 호칭에 불과하지만, 역대 영국 여왕의 남편들 중 이 호칭을 부여받은 인물이 오직 앨버트밖에 없을 정도로 귀한 호칭이다. 엘리자베스 2세의 부군 필립 공조차 'The Prince Philip'일 뿐, 'The Prince Consort' 칭호는 죽을 때까지 받지 못 했다. [12] 대신에 영국 육군 원수 계급은 받았다. [13] 후계자가 아닌 남성 왕족들은 군인으로 빠지는 게 일반적이었던 시대임에도 앨버트는 군대 경력이 없었다. 당시 세계 최강의 해군이라는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영국 해군과 신하들 입장에서는, 아무리 여왕의 남편이라 해도 외국 출신 군 미필에게 명예직일망정 제독 지위를 안겨준다는 것은 몹시 타협하기 힘든 일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엘리자베스 2세의 남편 필립 마운트배튼 공은 그리스 왕족이긴 했어도 영국 해군사관학교 출신에 영국 해군 장교로 제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이며, 현역일 때 중령까지 진급했고 여왕의 즉위가 늦어졌다면 본인이 해군 생활을 좋아했던 만큼 무탈히 경력을 쌓았을 것이기에 원수직을 받는 것에 큰 반발이 없었다. 미필 외국인에게 원수 자리를 준 육군이야... 세계 최강이 아니라서 여왕에게 대들지 못한 모양이기에는 영국 육군의 정식 명칭은 브리티시 아미이다. 왕을 처형한 권력자가 만든 아이언사이드를 뿌리로 하다보니, 오히려 왕당파다운 행동을 한 것이 영국 육군이란 것이 흥미로운 부분이다. 다만 상술한 컴벌랜드 공작 조지는 육해군 총사령관 자리를 받은 것과는 대조적이다.(...) [14] 결혼 후 1년이 지나고서도 본가의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에 친구라고는 코부르크에서부터 함께 온 시종과 애완견 에오스 밖에 없다고 적었다. [15] 빅토리아 시대 사교계의 여왕으로 꼽혔던 베드포드 공작부인( 버트런드 러셀의 큰할머니)은 새벽 4시까지 즐거운 나이트 라이프를 실컷 즐기고 다음날 낮 11시에 일어나는 생활 방식을 고수했다. 영국 요리악명에도 불구하고 영국식 아침식사와 함께 쿠키, 케이크가 곁들여지는 애프터눈 티는 양도 많고 맛도 좋은 것으로 유명한데, 애프터눈 티를 즐기는 문화가 그렇게 발전한 것은 애프터눈 티가 간식이라기보다 이렇게 늦게 일어나는 귀부인들의 아점용이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16] 명색이 왕실 하녀인 만큼 하층민 출신들은 아니었지만 사용인들을 하대하지 않고 예의를 갖추는 것과 앨버트처럼 사용인들 하나하나에게 귀족 여성을 대하듯 칼같이 예법을 지키면서 행동하는 건 다른 문제가 된다. [17] 원래부터 키가 작고 뚱뚱했던 빅토리아는 임신을 하면 "술통 같이 부풀어오르고 있다"고 표현될 정도로 더더욱 살이 쪘고, 성격 또한 원래의 급함에 더해 몹시 까칠해지곤 했다. 특히 앨버트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크게 화를 냈다. 자리를 옮기고 싶을 때마다 앨버트로 하여금 자신을 번쩍 들고 옮겨달라고 요구했던 것은 유명한 일화. 안 그래도 빅토리아 여왕이 정신줄을 놓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던 주치의들은 여왕의 성격이 임신할 때마다 위험 수준으로 괴팍해지자, 어느 정도 자녀들이 태어나면서 후계 구도가 든든해진 뒤에는 더이상 아이를 갖지 말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들을 몹시 좋아했던 앨버트와 아이들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사랑하는 앨버트의 말이라면 일단 따랐던 빅토리아는 그 권고를 무시했다. [18] ( 빅토리아 여왕/가족 관계 참고) [19] 에드워드 7세, 앨리스 공주, 루이즈 공주, 헬레나 공주, 그리고 아서 왕자가 임종을 지켰다. 빅토리아 공주는 결혼하여 프로이센 왕국에 있었고, 레오폴드 왕자 프랑스에 머무르고 있었다. 알프레드 왕자는 바다에 나가 있었으며 막내 베아트리스 공주는 당시 4살로 너무 어렸기에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20] 빌헬름 2세, 작센마이닝겐 공작부인 샤를로테, 하인리히 왕자, 샤움부르크리페의 아돌프 공자비 빅토리아, 그리스의 소피아 왕비, 헤센의 방백비 마르가레테 [21] 크리스티안 9세의 장녀이다. [22] 클래런스와 애번데일 공작 앨버트 빅터 왕자, 조지 5세, 파이프 공작부인 루이즈 공주, 노르웨이의 모드 왕비 [23] 밀포드 헤이븐 후작부인 빅토리아 마운트배튼, 러시아의 옐리자베타 표도로브나 대공비, 프로이센의 하인리히 왕자비 이레네, 헤센 대공 에른스트 루트비히, 러시아의 황후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24] 알렉산드르 2세의 차녀이다. [25] 루마니아의 왕비 마리아, 러시아의 빅토리야 표도로브나 대공비, 갈리에라 공작부인 베아트리스 공주 [26] 알베르트 [27] 스웨덴의 왕세자비 마르가레타 [28] 애슬론 백작부인 앨리스 공주,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카를 에두아르트. [29] 스페인의 왕비 빅토리아 에우헤니아 [30] 알프레드에게는 외아들 말고도 딸들이 있었지만, 독일의 극단적인 살리카법으로 공작위를 물려받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