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1 23:49:28

존 젤리코

파일:영국 국기.svg 1차세계대전기 영국군의 장성급 장교
{{{#!wiki style="margin:-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원수
Field Marshal/Admiral of the Fleet
육군
원수
허버트 키치너 | 존 프렌치 | 더글러스 헤이그
해군
원수
존 피셔
대장
General/Admiral
육군
대장
허버트 플러머 | 에드먼드 앨런비 | 줄리언 빙
해군
대장
바텐베르크의 루트비히 공자 | 존 젤리코 | 데이비드 비티
중장
Lieutenant-General/Vice-Admiral
육군
중장
-
해군
중장
-
소장
Major-General/Rear-Admiral
육군
소장
-
해군
소장
-
준장
Brigadier/Commodore
육군
준장
-
해군
준장
-
※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윗 첨자 : 전사

}}}}}}}}} ||
<colbgcolor=#00247d><colcolor=#ffc224>
Admiral of the Fleet
The Right Honourable
[1]
The Earl Jellicoe
GCB OM GCVO SGM DL
파일:17151769956_6697ec1305_o.jpg
이름 John Rushworth Jellicoe
존 러쉬워스 젤리코
출생 1859년 12월 5일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잉글랜드 햄프셔 사우스햄튼
사망 1935년 11월 20일 (향년 75세)
영국 잉글랜드 런던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복무 기간 1872년 ~ 1919년
최종 계급 파일:영국 해군기.svg 해군 원수
(Admiral of the Fleet)
지휘 대서양 함대
(Atlantic Fleet)
대함대
(Grand Fleet)
제1해군경
(First Sea Lord)
재임 기간 제2대 뉴질랜드 총독
(Governor-General of New Zealand)
1920년 7월 27일 ~ 1924년 12월 12일
작위 오크니 카운티의 스캐퍼의 젤리코 자작 (1918)[2]
젤리코 백작과 사우스햄튼 카운티의 사우스햄튼의 브로커스 자작 (1925)[3]

1. 개요2. 상세3. 기타

[clearfix]

1. 개요

Equal Speed Charlie London
등속 전투대형 남동미동
그가 유틀란트 해전에서 5월 31일 18시 15분에 기류신호로 내린 명령

영국 해군의 제독. 최종계급은 해군 원수.
1차 세계대전의 전반기에 대함대를 지휘하여 독일 해군의 진출을 봉쇄하였으며 유틀란트 해전 이후 제1해군경으로 영전하였다. 1919년에 해군에서 퇴역한 이후 1920년에 뉴질랜드의 총독으로 부임하였다.

2. 상세

1859년에 잉글랜드의 사우샘프턴에서 태어났다. 의화단의 난에도 해군 육전대로 참전했는데, 이때 총에 맞아 왼쪽 폐가 관통당하는 중상을 입었고, 이 부상은 젤리코를 평생동안 괴롭히게 된다.

1893년, 중령 계급으로 지중해함대 기함 전함 HMS 빅토리아 함의 부장을 지내던 중 HMS 빅토리아 함이 훈련 중 지중해함대사령관 해군중장 George Tryon 경의 무리한 기동 지시 때문에 같은 함대의 전함 HMS Camperdown 함과 충돌하는 사고를 겪는다. HMS 캠퍼다운 함은 무사했으나 HMS 빅토리아 함은 침몰하고 358명의 해군 장병이 사망했는데, 트라이언 제독은 자신의 실수로 인한 죄책감으로 탈출을 거부해 순직하고 젤리코 중령과 함장 모리스 부크(Maurice Bourke) 대령은 구조됐다. 부크 대령은 1900년 해군본부에서 근무 중 46세로 사망했다.

1908년 3월 8일에 해군 소장으로 진급하였으며 해군의 현대화에 필요한 자금을 모으기위하여 노력하여 드레드노트급 전함 인빈시블급 순양전함을 건조하는데 기여하였다. 1914년8월 4일에 해군 대장으로 진급하였으며 영국 해군의 주력함 대다수가 배치된 대함대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15년에 다르다넬스 해전으로 존 피셔 제독이 해임되고 윈스턴 처칠이 사임하였을때 피셔 제독에게 처칠로부터 해군을 지켜줘서 감사하다고 편지를 썼었다.

1916년에 유틀란트 해전에서 젤리코는 영국 주력함대를 지휘하였다. 독일 해군은 영국 함대의 일부를 끌어내어 각개격파하는 방법으로 영국 함대를 상대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젤리코는 이러한 독일의 의도를 간파하고 이에 낚인척 독일 함대를 유인하여 역으로 타격하기로 결정하고 제1순양전함 전대를 지휘하는 데이비드 비티 제독에게 독일 함대를 유인하는 역할을 맡겼다. 그러나 비티 제독은 이전과 달리 히퍼가 지휘하는 독일 정찰함대에게 고전하면서 순양전함 2척을 손실하였고 셰어가 지휘하는 독일 주력함대를 유인하는데는 성공하였으나 젤리코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지 못했고 그 마저도 늦었다. 이런 불리한 조건에서도 젤리코는 크게 2가지 방향을 고를 수 있었는데 하나는 위험부담은 크지만 성공하면 더 큰 타격을 가할 수 있고 다른 한가지는 전투 돌입 시기는 늦춰지지만 진형을 형성할 충분한 시간이 있고 유리한 조건을 갖출 수 었다.

젤리코는 두번째 방향을 선택했고 독일함대와 접촉하는것과 동시에 진형을 형성한 영국 주력함대는 독일 함대를 T자로 가로지르면서 포격을 가했다. 이 과정에서 비티를 지원하러 갔던 제3순양전함 전대의 기함 인빈시블이 탄약고 유폭으로 격침되었으나 독일의 신예 순양전함 뤼초우를 무력화 시켰고 셰어를 후퇴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후퇴하던 셰어는 다시 함대를 반전시켜(...) 영국 함대를 공격하려고 하였고 젤리코는 다시 한번 T자로 가로지르면서 독일 함대를 거의 일방적으로 난타해서 셰어를 쫒아냈다.[4] 결국 셰어는 주간 돌파를 포기하고 야간에 영국 주력함을 피해서 달아나게 된다. 비록 독일은 의도한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지만 외견상 피해는 영국측이 훨씬 컸다.[5] 이 결과는 트라팔가 해전을 기대했던 영국에게 실망스러운 결과였고 상당한 비판을 받게 된다.

특히 이 해전에서 젤리코는 위험을 감수하는 대신 아군의 피해를 줄이는 방향으로 지휘하였기에 비티와 그 지지자들은 젤리코의 소극적인 지휘가 승리의 기회를 날렸다고 젤리코를 비난하였다.[6] 그러나 이런 비난은 부당한 면이 있으며[7] 이러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1916년 11월에 제1해군경으로 영전한다.

젤리코가 제1해군경으로 재임하고 있을 때, 왕립 해군은 독일이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실행하면서 큰 위기를 겪고 있었다. 젤리코는 잠수함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하여 독일의 설계를 모방하여 향상된 기뢰를 도입하고, 호송선단 체계를 갖추었다. 그러나 젤리코는 총리 로이드 조지와 갈등 관계에 있었다. 젤리코가 제1해군경이 된지 한달도 안 돼서 애스퀴스 내각이 붕괴했고, 젤리코는 로이드 조지의 뜻으로 임명된 사람이 아니었다. 젤리코는 총리와 전략적 판단에 있어서 갈등을 빚어왔고, 특히 젤리코의 언행, 우리가 정책을 제대로 세우지 못하면 우린 기아로 인해 전쟁에서 질 것이다와 같은 발언은 로이드 조지에게 젤리코가 패배주의자라는 오해를 주었다. 결국 로이드 조지는 젤리코를 제거하기로 결심한다.
You kill him, I'll bury him.
당신이 그를 죽이시오. 내가 묻을테니.
로이드 조지가 젤리코의 향후 운명에 관해 노스클리프 경에게 한 말.

젤리코는 크리스마스 이브, 휴일이라 의회가 열리지 않을 때를 노려 해임되었다. 해군은 젤리코에 대한 부당한 대응에 분노하였고, 많은 해군 장교들이 다시 함대로 돌아와 지휘해줄 것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젤리코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I cannot find the words to express my disgust and indignation.
내 혐오감과 분노를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루이 마운트배튼이 젤리코의 해임에 대해.

1918년 3월 7일에 자작 작위(Viscount Jellicoe of Scapa Flow)를 받았으며 1919년 4월 3일에 해군 원수로 승진하였다. 1920년 9월에 뉴질랜드의 총독에 임명되어 1924년 12월 12일까지 근무하였으며 1925년에 영국으로 돌아와서 백작 작위를 받았다. 1928년에는 자신의 맞수였던 라인하르트 셰어를 영국으로 초청했지만 셰어가 그 해에 사망하면서 끝내 두 제독의 만남을 이루지지 못했다. 1935년 11월 20일에 폐렴으로 런던 켄싱턴의 자택에서 사망하였으며 세인트 폴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그를 추모하기 위해서 영국 해군 뿐 아니라 역사적인 라이벌인 프랑스 해군, 심지어 불과 20여년 전까지 적이었고 이후에도 잠재적인 가상적이었던 독일 해군까지 조기를 게양하였다. 그의 인망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3. 기타

  • 트라팔가 광장에 그의 흉상이 있으며 그 옆에는 데이비드 비티 제독의 흉상이 존재한다.

[1] 백작 본인에 대한 경칭 [2] Viscount Jellicoe, of Scapa in the County of Orkney [3] Earl Jellicoe and Viscount Brocas, of Southampton in the County of Southampton [4] 이때 영국 함대는 37발을 명중시킨 반면에 독일 함대는 2발의 명중탄을 기록하는데 그쳤다. 그러나 영국 포탄의 품질 문제로 명중탄에 비해서는 피해가 적었다. [5] 정작 주력함 손실은 전부 비티가 지휘하는 부대였다는게 함정이지만. [6] 처칠은 그의 저서 <The World Crisis>에서 젤리코를 강력하게 비난하고 비티에게 우호적인 입장을 보인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해군장관 시절 젤리코의 신중한 함대 운용을 승인한게 본인이라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다. [7] 독일의 주력함대가 전부 날라간다고 하더라도 독일이 패망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영국 주력함대의 궤멸은 영국을 패망시킬 수 있으며 설사 패망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위상과 영향력은 실추될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