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27 22:27:16

알 카임(아바스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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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 알리 등 이 4명만 정통 칼리파로 인정받지만 하산도 잠깐 동안이지만 칼리파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포함한다. }}}}}}}}}
아바스 왕조 제26대 칼리파
알 카임
القائم بأمر الله
파일:TughrilCoin.jpg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이름 아부 자파르 압둘라 이븐 아흐메드 알 카디르
أبو جعفر عبد الله بن أحمد القادر
출생 1001년
아바스 왕조 바그다드
사망 1075년 4월 2일 (향년 73-74세)
아바스 왕조 바그다드
재위 기간 아바스 칼리파
1031년 11월 29일 ~ 1075년 4월 2일 (44년)
전임자 알 카디르
후임자 알 무크타디
별명 알 카임 비암리 알라(القائم بأمر الله: 신의 명령을 수행하는 자)
부모 아버지 : 알 카디르
어머니 : 바드르 알 디자
종교 이슬람 수니파
1. 개요2. 생애
2.1. 토그릴 1세의 개입2.2. 알 바사시리의 전횡2.3. 셀주크 제국 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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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바스 왕조 26대 칼리파.

2. 생애

1001년 바그다드에서 아바스 왕조 25대 칼리파 알 카디르와 바드르 알 디자의 아들로 출생했다. 아버지 알 카디르는 1001년 9살된 아들 무함마드를 후계자로 공표했다. 그러나 무함마드는 아버지보다 일찍 죽어서 칼리파가 되지 못했다. 1030년, 알 카디르는 그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031년 11월 29일 병으로 사망했고 칼리팔 궁전에 묻혔다가 이듬해에 알루사파로 옮겨졌다. 그는 1031년 12월 12일 바그다드 광장에서 시민들로부터 충성 맹세를 받았다.

당시 바그다드는 부와이 왕조의 치하에 있었으나, 잘랄 알 다울라와 아부 칼리자르 사이의 분쟁으로 인해 혼란이 없는 날이 거의 없었다. 그는 두 사람의 화해를 촉구했고 법학자 알 마와르디를 칼리자르에게 보내 평화 협약을 맺으라고 권고하기도 했지만 별다른 소용이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종교 활동에 전념하는 것뿐이었고, 1041년 아버지의 알 카디리야(Risála al-Qadiryya)를 갱신해 수니파 교리를 개선했다.

2.1. 토그릴 1세의 개입

1044년 잘랄이 사망한 뒤 카와지르가 잘랄의 후게자 알 말리크를 무너뜨리면서 이라크와 바그다드는 안정을 되찾는듯 했으나, 1048년 카와지르가 사망한 뒤 카와지르의 아들들끼리 내전을 벌이면서 혼란은 극에 달했다. 이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던 이가 있었으니, 바로 셀주크 제국의 술탄 토그릴 1세였다. 그는 1056년 메카 순례를 다녀오다가 중무장 병력을 이끌고 이라크로 이동한 뒤 그에게 도시를 안정시킬 목적으로 온 것이며 칼리파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할 테니 바그다드에 입성하는 것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부와이 왕조의 거듭된 내전에 질릴 대로 질려 있던 그는 반색했다. 금요일 기도에서 토그릴을 술탄으로 인정하고 바그다드 입성을 허락했다. 며칠 후, 토그릴은 바그다드에 입성한 뒤 바그다드의 치안을 바로잡고 칼리파와 관료들에게 공손하게 대했다. 이에 칼리파와 궁정 관료들, 그리고 민중은 토그릴을 호평했다.

2.2. 알 바사시리의 전횡

그러나 부와이 왕조에 용병으로 고용되어 바그다드에 자리잡고 있던 튀르크 군벌 알 하리스 아르슬란 알 무자파르 알 바사시리는 토그릴의 위세가 바그다드까지 미치면 자신에 게 좋을 것이 없다고 여겼다. 1057년 초엽 이라크로 진군한 바사시리는 신자르에서 쿠탈미쉬 휘하 셀주크 군을 격파한 후 모술에 입성하여 알 무스탄시르 명의로 금요 예배를 행했다. 이에 토그릴이 반격에 나서 바사시리를 격파, 모술을 수복하고 신자르를 초토화했다. 1058년 12월, 바사시리는 토그릴이 형제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신경쓰는 틈을 타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바그다드 대사원에서 역대 최초로 파티마 왕조의 칼리파 알 무스탄시르 명의로 금요 예배를 거행했다.

한세기에 이른 부와이 치하에서도 겪지 못한 전대미문의 사건에 수니파 주민들이 반발하여 봉기했고, 1월 19일 군중이 하시니 궁을 습격하자 알 카임은 일가와 함께 쿠라이쉬 군영에 피신했다. 이에 알 바사시리는 쿠라아쉬에게 (협상용 카드인) 칼리파의 보호를 맡기고 그를 바그다드와 라흐바 사이에 있는 아나에 유폐하게 하였다. 1월 29일, 알 바사시리는 대사원 밖의 무살라 (예배당)에 파티마 조의 깃발을 올리고 이둘 아드하 (희생제)를 기념했다. 1060년 7월, 이날의 난을 진압한 토그릴은 알 바사시리에게 압바스 칼리파의 석방 및 그의 명의로 쿠트바와 동전 주조를 하는 (사실상의 복속) 대가로 바그다드 지배권을 인정하겠다고 제안했다. 이에 알 바사시리는 알 카임에게 토그릴 대신 자신을 보호자로 인정하게 협박했지만 실패했다. 그러자 쿠라이쉬는 그냥 토그릴의 제안을 수용하자고 설득했으나 알 바사시리는 거부했다.

토그릴은 우선 협상에 재차 응하는척 하며 쿠라이쉬를 회유해 칼리파 알 카임을 빼내었다. 뒤이어 바그다드로 진격하자 알 바사시리는 처자식과 함께 빠져나갔다. (1059년 12월) 이듬해 1월 4일, 토그릴은 알 카임과 함께 바그다드에 입성했다. 이로써 파티마 칼리파 명의의 금요 예배가 40번이나 진행된 끝에 압바스 칼리파 명의의 쿠트바가 회복되었다. 1060년 1월 4일, 토그릴은 알 카임과 함께 바그다드에 입성했다. 그 후 1월 15일, 쿠파 인근의 사이 알 푸라트 전투에서 알 바사시리를 처단하고 이라크 전역을 손아귀에 넣었다. 그 후 토그릴은 그의 딸과 결혼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그는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셀주크 술탄을 거슬렀다가 화를 입을까 두려워서 결국 받아들였다. 토그릴은 바그다드에 거주하면서 이전과는 달리 칼리파에게 고압적으로 대했다. 또한 종교 문제에도 간섭을 많이 했기 때문에, 셀주크 제국과 아바스 칼리파 궁정 과의 사이는 경직되었다.

2.3. 셀주크 제국 하에서

1063년 토그릴 1세가 사망한 뒤 새 술탄에 즉위한 알프 아르슬란은 바그다드에 가는 대신 니잠 알 물리크를 고관으로 임명해 바그다드를 통제하게 했다. 알프 아르슬란이 1072년 암살당한 뒤 새 술탄에 오른 말리크샤 1세 역시 니잠 알 물리크를 신임했다. 그러나 그는 니잠과 종교 문제로 갈등을 벌였다. 니잠은 자유의지론과 무타잘리 학파를 혼용한 아슈아리파를 선호했는데, 무타잘리 학파를 배격하는 한발리파를 추앙하던 그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로 인한 갈등이 종종 벌어졌지만, 말리크샤 1세는 동로마 제국, 조지아 왕국, 파티마 왕조 등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느라 바빠서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니잠은 1067년 바그다드에 니자미야 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1075년 4월 2일, 알 카임은 숨을 거두었다. 사후 손자 알 무크타디가 아바스 왕조의 새 칼리파로 등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