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라틴어: Appius Claudius Pulch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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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76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마케도니아 속주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고조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증조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조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아버지) 안티스티아(어머니)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형) 카이킬리아 메텔라(아내)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장남)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차남)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삼남) 클라우디아 테르티아(장녀) 클라우디아 콰르타(차녀) 클라우디아 퀸타(삼녀)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79년 |
전임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메텔루스 피우스 |
동기 |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바티아 이사우리쿠스 |
후임 |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카피톨리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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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고대 로마의 대표적인 명문가 중 하나인 클라우디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그중에서도 '풀케르(Pulcher: 잘생긴)'라는 코그노멘을 쓰는 그의 가문은 아피아 가도의 건설자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장님')의 차남 푸블리우스부터 시작되었으며, 클라우디우스 씨족의 본가 역할을 했다.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기원전 249년 집정관을 맡아 드레파나 해전을 치렀다가 치명적인 실책을 저지르는 바람에 함선 120척 중 93척이 격침되는 참사를 야기하고 말았고, 전투 전에 전투의 향방을 알아보기 위해 닭들이 모이를 쪼아먹는 의식을 진행하던 중 닭들이 쪼아먹질 않자 "먹기 싫으면 물이나 마셔라!"라고 외치며 바다에 던져버리는 짓을 하는 바람에, 무능과 불경죄로 재판을 받다가 판결 직전 자살했다. 여기에 여동생 클라우디아는 경기장에 참석했다가 평민들이 워낙 많이 있어서 좀처럼 빠져나가지 못하자 "오빠가 살아있었다면 이 쓸모없는 평민들을 다시 한 번 물속에 쳐넣었을 것을!"이라고 외쳤다가 고발당하여 거액의 벌금을 물어야 했다.하지만 푸블리우스의 아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맹활약해 아버지의 불명예를 씻어냈다. 그는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의 군대에 가담하여 기원전 213년부터 벌어진 시라쿠사 공방전에 참여했다. 뒤이어 기원전 212년 집정관을 맡아 로마와 동맹을 끊고 한니발 바르카와 연합한 카푸아를 응징하기 위한 원정을 이끌었다. 그는 동료 집정관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와 함께 2년간 카푸아 공방전을 치른 끝에 마침내 카푸아를 정복했으나, 그 과정에서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사망했다. 그에게는 세 아들 아피우스, 푸블리우스, 가이우스가 있었는데, 모두 집정관을 역임했다. 아피우스는 기원전 185년 집정관을 역임했고, 푸블리우스는 기원전 184년, 가이우스는 기원전 177년에 맡았다. 또한 딸 클라우디아가 있었는데, 기원전 217년 카푸아의 행정관이었던 파쿠비우스 칼라비우스와 결혼했다.
기원전 177년 집정관을 역임한 가이우스의 장남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기원전 143년 집정관을 역임하여 알프스 부족인 살라시 족을 공격해 승리했다. 이후 딸 클라우디아를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와 결혼시켰으며, 그라쿠스의 농지 개혁에 찬성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기원전 133년에 살해되었고, 그는 기원전 130년에 뒤따라 사망했다. 그는 노빌레스 출신의 안티스티아와 결혼해 두 아들 아피우스와 가이우스를 낳았다. 차남 아피우스가 이 문서의 주인공이며, 장남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기원전 95년 법무관을 맡아 속주민들을 상대로 착취한 총독들을 심판하는 임무를 맡았고, 시칠리아의 갈레사 시의 선거법을 개정하는 임무를 별도로 수행하다가 기원전 92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그는 기원전 100년경에 화폐 주조관을 맡았고, 나중에 조영관 선거에 출마했지만 형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낙선했다. 하지만 몇 년 사이에 조영관에 당선되었고, 동맹시 전쟁 기간인 기원전 89년에 법무관을 맡았다. 기원전 87년경 캄파니아에서 군대를 지휘해 놀라 시를 포위 공격해 공략에 성공했다. 그러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동방으로 출정해 폰토스 왕국의 미트리다테스 6세와 일전을 벌이는 틈을 타 로마를 장악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와 마리우스에 맞섰으나 실패하자 보복을 피해 국외로 도주했다. 그 후 원로원으로부터 로마로 귀환하라는 통보를 받았으나 따르지 않았고, 마리우스파 정권은 이를 괘씸하게 여겨 그의 로마 시민권을 박탈하기로 했다.
기원전 86년 감찰관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와 마르쿠스 페르페르나에 의해 원로원 의원 목록에서 배제된 그는 동방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가 기원전 82년 술라의 내전에서 승리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덕분에 로마로 귀환해 다시 원로원 의원이 되었고, 기원전 79년 아내의 사촌인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바티아 이사우리쿠스와 함께 집정관을 역임했으나 실권은 독재관 술라에게 있었기에 별다른 업적을 세우지 못했다.
집정관 임기가 만료된 후 마케도니아 총독으로 부임했지만 타렌툼에서 질병에 걸려 오랫동안 투병 생활을 해야 했다. 기원전 77년 초 로마로 돌아와서 집정관을 대리하여 행정관 선거를 개최하는 임무를 맡은 인터렉스(interrex)에 선임되었다. 이후 마케도니아로 이동해 스코디스 족의 침략에 맞서 싸웠으나 이에 관해서는 기록이 미비해 전황이 어찌 돌아갔는지 알기 어렵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는 그가 여러 전투에서 적을 물리쳤다고 밝혔지만, 파울루스 오로시우스는 그가 많은 실패를 겪으며 자신을 파멸시켰다고 기술했다. 전쟁이 한창이던 기원전 76년에 병으로 사망했다.
그는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발레아리쿠스 또는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디아데마투스의 딸인 카이킬리아 메텔라와 결혼해 3남 3녀를 낳았다. 장남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기원전 54년 집정관을 맡았고, 차남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법무관을 맡았으나 일찍 죽었다. 삼남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는 평민의 양자로 들어간 뒤 호민관을 맡았고, 훗날 로마의 악명높은 정치깡패가 되었다. 장녀 클라우디아 테르티아는 기원전 68년 집정관을 역임한 퀸투스 마르키우스 렉스와 결혼했다. 차녀 클라우디아 콰르타는 기원전 60년 집정관을 역임한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켈레르와 결혼했으며, 삼녀 클라우디아 퀸타는 로마의 명장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와 결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