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 루쿨루스 라틴어: Marcus Terentius Varrō Lucull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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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기원전 116년 ~ 기원전 56년 이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증조부)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조부)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아버지)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양부) 카이킬리아 메텔라(어머니)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형)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73년 |
전임 |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
동기 |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
후임 |
루키우스 겔리우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클로디아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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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기원전 1세기 로마의 명장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의 동생으로, 그 역시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갖췄다.2. 생애
고대 로마의 저명한 노빌레스 가문인 리키니우스 씨족에 속한 루쿨루스 지파의 일원이다. 루쿨루스 집안은 기원전 2세기부터 로마 정계에서 활약했다. 증조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는 기원전 185년 법무관을 역임했으며, 조부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는 기원전 151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아버지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는 기원전 104년 법무관을 맡아 시칠리아에서 발발한 제2차 노예 전쟁을 진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어머니는 당대 로마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노빌레스 가문인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가문의 일원인 카이킬리아 메텔라로, 외조부는 기원전 142년 집정관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칼부스이고 외증조부는 기원전 206년 집정관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였다. 또한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누미디쿠스는 그의 삼촌이었고, 메텔루스 피우스는 그의 사촌이었다.그는 어렸을 때 기원전 3세기부터 원로원에서 활동한 노빌레스 가문인 테렌티우스 씨족에 입양되어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 루쿨루스라는 이름을 받았다. 양아버지는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였으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가 입양된 경위는 알려진 바 없으며, 루쿨루스 가문이 테렌티우스 가문보다 더 저명하고 영향력이 있기 때문에 자신을 마르쿠스 루쿨루스로 언급했다. 형제로 기원전 74년 집정관이자 로마의 명장인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가 있었다. 두 형제는 평생 동안 사이가 매우 좋았고 서로 협력하며 경력을 쌓아갔다.
기원전 101년, 친아버지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가 법무관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에 의해 추방되었다. 1년 후 상인이 된 그와 형 루키우스는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를 "아버지를 거짓 혐의로 추방시켜 미성년자였던 우리를 학대했다"라는 혐의로 고발했다. 플루타르코스는 로마인들이 두 형제가 용감하게 행동했다며 칭찬했다고 기술했다. 하지만 세르빌리우스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기원전 99년, 그와 루키우스는 호민관 푸블리우스 푸리우스에게 지난날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에 의해 로마에서 추방당한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누미디쿠스가 복귀하는 것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했지만, 푸리우스가 끝까지 거부하면서 무산되었다.
동맹시 전쟁이 발발하기 적전에 시칠리아를 여행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루카니아의 헤라클레아에 방문해서 시인 아울루스 리키니우스 아르치아스와 교분을 나눴다. 기원전 90년 발발한 동맹시 전쟁 시기의 행적은 알려진 바 없다. 기원전 87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동방으로 출진했을 때, 형 루키우스는 술라의 레가투스(Legatus)로서 함께 했다. 이때 그도 형을 따라갔을 가능성이 높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는 술라 아래에서 재무관을 맡았다고 한다.
플루타르코스는 그가 술라의 내전 시기에 갈리아 키살피나에서 마리우스파에 대적한 '술라의 장군'이었다고 밝혔다. 일부 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전임 재무관의 권한으로 레가투스로 선임되었을 거라고 추정한다. 그는 피덴차 전투에서 16개 코호트를 이끌고 50개 코호트를 갖춘 적군과 격돌해 승리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마리우스군은 이 전투에서 18,000명이 전사했다고 한다. 술라의 내전이 끝난 뒤, 그는 퇴역병들이 정착할 식민도시를 조직한 위원회의 일원이 되었다. 이 사실은 캄파니아의 프리네스테 시에서 발견된 비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기원전 79년 수석 조영관을 맡았다. 동료 조영관은 동생과 함께 조영관을 맡기 위해 조영관 지원을 미뤘던 형 루키우스였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두 형제가 조직한 대회가 지극히 장엄했다고 밝혔다. 기원전 76년에는 법무관에 선임된 뒤 헬라스 속주에서 속주민들을 착취한 혐의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고발당한 가이우스 안토니우스 히브리다의 재판을 이끌었다. 재판 결과는 무죄였다.
형 루키우스가 집정관을 맡은 이듬해인 기원전 73년,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두 집정관은 국가에서 빵을 구매하고 빈민들에게 할인된 가격으로 판매하는 <테렌티우스와 카시우스의 법(Lex Terentia et Cassia)>을 반포했다.
기원전 72년 프로콘술(전직 집정관)로서 마케도니아 속주 총독으로 부임한 그는 총독 권한인 임페리움을 통해 폰토스 왕국의 미트리다테스 6세와 연계해 마케도니아 속주를 침략한 트라키아와 모이시아 인들을 상대로 원정을 단행했다. 먼저 트라키아 부족 중 하나인 베세스 족을 공격해 대규모 전투에서 승리하고 그들의 수도인 필리포폴리스를 공략했다. 뒤이어 모이시아로 진군해 다뉴브 강 이남의 부족들을 제압했다.
기원전 71년 흑해 연안으로 진격해 현지 그리스 도시인 아폴로니아, 오데사, 칼라티스, 이스트로폴리스, 토미스, 메셈브리아, 디오니소폴리스 등 여러 도시를 로마에 복속시켰다. 그러던 중 이탈리아에서 제3차 노예 전쟁이 발발해 로마의 안보가 위험에 처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스파르타쿠스를 상대할 지휘관으로 지명된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원로원에 마케도니아 총독 마르쿠스를 소환해서 노예 반란군을 협공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이 요청의 정확한 날짜와 사실 여부는 학자들의 논쟁거리로 남아있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마르쿠스는 스파르타쿠스가 항구를 확보하기 위해 노리던 브룬디시움에 상륙했고, 스파르타쿠스는 계획을 변경해 북상해야 했다고 한다. 이후 크라수스가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최종적으로 진압했고, 세르토리우스 전쟁을 마무리한 뒤 히스파니아에서 이탈리아로 귀환한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가 잔여 반란군을 소탕했다. 그 후 마르쿠스는 마케도니아 속주에서의 활약상을 인정받아 개선식을 거행하고 거대한 아폴로 동상을 원로원 회의장 앞에 세웠다.
기원전 67년 10인 위원회의 일원으로서 형 루키우스가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 확보한 새로운 영토의 질서를 확립하고 행정쳬계를 세우기 위해 동방으로 향했다. 그러나 루키우스가 병사들의 반란에 직면해 더 이상 군사 활동을 못한 데다 미트리다테스 6세가 군대를 재건한 뒤 반격을 가하여 로마군에게 잃었던 폰토스 왕국을 되찾는 바람에, 그의 임무는 연기되었다. 이후 전임 호민관 가이우스 코르넬리우스를 호민관 임기 때 집정관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를 공격하도록 민중을 선동한 혐의로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카피톨리누스, 메텔루스 피우스, 마니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함께 고발했지만 키케로의 변호로 인해 패소했다.
기원전 66년, 호민관 가이우스 멤미우스가 마르쿠스를 고발했다. 그가 지난 내전에서 원로원의 승인 없이 술라의 재무관으로 활동한 것은 불법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기원전 62년에는 로마 시민권을 불법 취득한 혐의로 기소된 아울루스 리키니우스 아르치우스를 변호해 무죄 판결을 따냈으며, 카틸리나 음모에 맞서는 키케로를 지원했다.
기원전 58년 폼페이우스와 집정관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 아울루스 가비니우스를 잇따라 찾아가 호민관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에게 공격받고 있는 키케로를 도와달라고 요청했으나 끝내 키케로가 망명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1년 후 키케로가 복귀했을 때 키케로의 집을 헌 자리에 세워졌던 자유의 여신상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키케로의 집을 복원하는 것을 강력하게 지지했다. 한편, 그는 모종의 시기에 사제단의 일원이 되었고, 갈리아 전쟁을 치르느라 자리를 비운 폰티펙스 막시무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대신해 사제단의 대표를 맡아 종교 행사를 이끌었다.
기원전 50년대에 형이 중병에 걸려 가족을 돌보기 어려워지자 조카들을 대신 양육했다. 기원전 56년 루키우스가 사망했을 때, 사람들은 그를 술라의 장례가 치러졌던 마르스 평원에 묻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마르쿠스는 형을 투스쿨룸 인근의 가족 사유지에 안장했다. 고대 사료에 따르면, 그는 형의 죽음을 몹시 애통해했으며, 형이 죽은 지 몇년 안 되어 사망했다고 한다. 플루타르코스는 그가 명성에서 형보다 그리 뒤지지 않았다고 평했고, 키케로는 그를 "국가의 명사이자 장식품"이라고 칭했으며, 저서 <브루투스>에서 그를 "공화국의 가치있는 수호자"라고 호평했다.
그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여인과 결혼했다. 기원전 60년, 그는 아내가 가이우스 멤미우스와 불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이혼했다. 키케로는 친구 티투스 폼포니우스 아티쿠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이다의 그 양치기는 메넬라오스만 화나게 했는데, 우리의 파리스는 메넬라오스와 아가멤논 모두 아끼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