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라틴어: Marcus Junius Silanu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
사망지 | 미상 |
지위 | 노빌레스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국 → 로마 제국 |
가족 |
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아버지) 세르빌리아(어머니) 유니아 프리마(누이) 유니아 세쿤다(누이) 유니아 테르티아(누이)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이부 형제) 만리아 토르콰타(아내)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아들) 가이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아들)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토르콰투스(손자)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손자) 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손자) |
참전 | 무티나 내전 |
직업 | 로마 제국 집정관 |
로마 제국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5년 |
전임 |
아우구스투스 티투스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 |
동기 | 아우구스투스 |
후임 |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노르바누스 플라쿠스 |
[clearfix]
1. 개요
로마 공화국과 로마 제국의 군인, 정치인. 무티나 내전 시기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편에 섰고, 시칠리아에서 할거하던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에게 망명했다가 미세눔 협약 후 안토니우스에게 돌아갔다. 악티움 해전 이전에 옥타비아누스에게 귀순한 뒤 기원전 25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암살자로 유명한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이부 형제다.2. 생애
기원전 62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 반역 음모 사건 때 "우선 피고인들을 임시 구금한 뒤 정식 재판을 거쳐 종신형에 처하자"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주장을 지지했던 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의 아들이다. 어머니 세르빌리아는 저명한 귀족 집안 출신의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의 딸로, 첫 남편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결혼해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를 낳았고, 남편과 사별한 뒤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재혼해 그와 세 딸 유니아 프리마, 유니아 세쿤다, 유니아 테르티아를 낳았다. 유니아 프리마는 기원전 48년 집정관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이사우리쿠스와 결혼했고, 유니아 세쿤다는 훗날 제2차 삼두정치의 일원이 된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결혼했으며, 유니아 테르티아는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와 결혼했다.기원전 53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부관으로서 갈리아 전쟁에서 활약한 부관 '실라누스'가 그라는 설이 제기되었으나, 프리드리히 뮌처(Friedrich Münzer)는 동명이인이라고 반박했다. 그가 기록에 확실히 등장한 때는 기원전 44~43년 무티나 내전이 벌어진 시기다. 당시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총독을 맡고 있던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의 부관이었던 그는 레피두스의 명령을 받들어 군대를 이끌고 무티나로 접근했다. 레피두스는 가능한 한 중립을 유지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실라누스에게 누구를 도우라는 지시를 별도로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실라누스는 상관의 허락 없이 안토니우스 편에 서기로 하고, 기원전 43년 4월 그와 연합하여 옥타비아누스와 아울루스 히르티우스, 가이우스 비비우스 판사 카이트로니아누스를 대적했다.
안토니우스가 무티나 내전에서 패한 뒤 레피두스에게 달아날 때 함께 갔으나, 레피두스는 그가 자신의 허락없이 멋대로 행동했다는 이유로 직위해제 처분을 내렸다. 그 후 모종의 이유로 시칠리아에 할거하던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에게 망명했다가, 기원전 39년 미세눔 협약이 체결되면서 섹스투스의 보호를 받던 망명자들이 로마로 귀환하여 정계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길이 열리자 즉시 로마로 돌아갔다. 이후 안토니우스의 부관이 되었고, 기원전 34년 유피테르 신전의 사제가 되었으며, 기원전 33년경 그리스에서 재무관으로 활동했다. 당시 그가 주조한 안토니우스의 주화가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동전 뒷면에는 "M. Silanus aug(ur) q(uaestor) pro co(n)s(ule)"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이 벌어지기 전에 옥타비아누스에게 귀순했고, 기원전 30년 파트리키 신분을 수여받았다. 기원전 25년 아우구스투스가 9번째로 집정관에 취임했을 때 공동 집정관으로 선임되었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3. 후손
그는 만리아 토르콰타와 결혼하여 아들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가이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를 낳았다. 마르쿠스는 별다른 공직을 맡지 못하고 일찍 죽었지만, 죽기 전에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토르콰투스를 낳았다.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토르콰투스는 19년에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아우구스투스의 외증손녀[1] 아이밀리아 레피다와 결혼했다. 그는 아이밀리아 레피다와의 사이에서 5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그의 세 아들과 두 딸은 모두 폭군 네로의 손에 살해당하거나 누명을 쓴 뒤 유배되었다. 그의 차남은 가이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이다. 그 역시 형제 마르쿠스처럼 뚜렷한 경력을 남기지 못했다. 가이우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외조카로 아우구스투스의 외삼촌인 아티아의 남자형제 마르쿠스 아티우스 발부스의 딸 아티아와 결혼했다.아티아는 리비아 드루실라의 아버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의 친척 클라우디아가 마르쿠스 아티우스 발부스와의 사이에서 얻은 딸인데, 가이우스와 아티아는 사이에 두 아들을 낳았다. 첫째는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인데, 그는 서기 15년 집정관을 지냈고, 티베리우스 황제의 최측근이자 친구였다. 그는 두 딸을 뒀는데, 차녀 유니아 클라우딜라는 칼리굴라와 결혼했다. 하지만 유니아 클라우딜라는 카프리 섬의 빌라 요비스에서 첫 아이를 출산하다가 로마보다 불편한 환경 속에서 산고 끝에 아이를 낳고 얼마 안 되어 죽었고, 아이 역시 곧 죽었다. 그렇지만 마르쿠스는 사위 칼리굴라와 사이가 좋았고, 칼리굴라는 즉위한 뒤에도 그를 아버지로 여겨 따랐다. 하지만 37년 11월 또는 12월 그가 칼리굴라를 암살하려고 한 모반을 꾸며, 배신감을 느낀 칼리굴라에게 기소된 뒤 처형됐다.
마르쿠스의 동생으로 가이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의 둘째 아들은 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이다. 그는 아버지, 숙부, 형과 함께 국가 행사를 관람 중, 아우구스투스의 손자 클라우디우스 1세를 신기한 동물 보듯이 보며 희죽거렸다. 친혈육을 무척 아낀 아우구스투스는 이 장면을 봤고, 진노해 티베리우스와 측근들에게 "내가 마르쿠스 실라누스와 그 아들들을 두고 보겠다."고 한 뒤, 1년 뒤인 서기 8년 소 율리아 숙청 때 데키무스를 간통한 혐의로 기소해 자진 추방 형태로 쫓아냈다. 그러다가 14년 아우구스투스가 죽고 티베리우스가 즉위하고 형 마르쿠스의 간청으로 귀환했는데, 이때의 일과 아버지의 결정이라는 이유로 티베리우스는 사실상 정치 은퇴를 조건으로 로마에서 조용히 살라고 권고했다.
[1]
아우구스투스의 외손녀
소 율리아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