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라틴어: Decimus Iunius Silanus |
|
생몰년도 | 기원전 107년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조부)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아버지) 세르빌리아(아내)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아들) 유니아 프리마(장녀) 유니아 세쿤다(차녀) 유니아 테르티아(삼녀)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62년 |
전임 |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가이우스 안토니우스 히브리다 |
동기 |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무레나 |
후임 |
마르쿠스 푸피우스 피소 프루기 칼푸르니아누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니게르 |
[clearfix]
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노빌레스 가문인 유니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많은 학자들은 그의 조부가 기원전 165년 집정관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의 아들이지만 입양을 통해 유니우스 실라누스 가문의 일원이 된 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만리아누스로 추정한다. 이 인물은 기원전 141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나, 자신이 맡은 속주에 총독으로 부임했다가 속주민 착취 혐의로 고발된 뒤 유죄 판결을 받은 후 친아버지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로부터 심한 비난을 받자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했다. 아버지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는 기원전 109년 집정관을 역임했지만 킴브리 전쟁에서 패배를 면치 못했다.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저서 <브루투스>에서 그를 동료라고 불렀다. 현대 학자들은 집정관 선거에 처음 출마한 시기로 볼 때, 그가 키케로보다 한 살 더 많은 기원전 107년생이었을 거라고 추정한다. 키케로는 <브루투스>에서 그가 마음이 넉넉하고 쉬운 언어를 구사했다고 평했다. 그는 기원전 69년 이전에 조영관을 맡았고, 기원전 66년 이전에 법무관을 맡았다. 또한 사제단 직책 중 하나인 아우구르(Augur)의 일원이 되었다. 그는 조영관으로서 민중을 위해 호화로운 경기를 조직해 인기를 구가했다.
기원전 65년 집정관 선거에 뛰어들었지만 낙선했다. 기원전 63년 재차 집정관 선거에 뛰어들었을 때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무레나와 함께 당선되었다. 2등을 차지한 무레나는 다른 후보인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로부터 유권자에게 뇌물을 준 혐의로 고발되어 법정에 소환되었지만, 아무도 실라누스가 1등을 차지한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기원전 63년 12월 5일 로마에서 체포된 카틸리나 공모자들을 처결하는 문제에 대해 집정관 당선인으로서 즉결 처형에 찬성한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이듬해 법무관으로 당선되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카틸리나 추종자들을 당장 죽이지 말고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에서 종신 금고형에 처한 후, 사태가 마무리된 후에 정식으로 재판을 실시하자고 제안하자, 그는 이에 감명을 받고 자신이 카이사르와 같은 뜻으로 말한 거라고 밝혔다. 그러나 소 카토와 키케로가 즉결 처형을 강하게 주장하면서, 결국 공모자들은 재판을 받지 못한 채 처형되었다.
이후 기원전 62년 집정관에 취임한 그는 동료 집정관 무레나와 함께 모든 입법 행위의 사본을 재무부에 보관하는 법을 채택했다. 집정관 임기가 만료된 후 해외에 총독으로 부임했다고 전해지나, 임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기원전 57년 아우구르 명단에는 그의 이름이 있지만 그 외의 행적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기원전 91년 법무관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와 기원전 112년 집정관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딸 리비아의 여식인 세르빌리아와 결혼했다. 세르빌리아는 그 전에 기원전 83년 호민관을 역임한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결혼해 아들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를 낳았다. 그는 세르빌리아와의 사이에서 아들 하나와 세 딸을 낳았다. 아들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는 이부형제 브루투스와는 달리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를 위해 일했고, 기원전 25년 아우구스투스가 된 옥타비아누스와 함께 집정관을 역임했다. 장녀 유니아 프리마는 기원전 48년 집정관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이사우리쿠스와 결혼했고, 차녀 유니아 세쿤다는 훗날 제2차 삼두정치의 일원이 된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결혼했으며, 삼녀 유니아 테르티아는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와 결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