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라틴어: Marcus Tullius Cicer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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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기원전 65년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아버지) 테렌티아(어머니) 툴리아(누이)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30년 |
전임 |
옥타비아누스 가이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
동기 | 옥타비아누스 |
후임 |
옥타비아누스 루키우스 사이니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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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로마 공화국 말기의 저명한 정치가이자 철학자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아들이다.2. 생애
아르피눔에 거주하는 지방 귀족이었다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로마 정계에서 활약하면서 노빌레스로 거듭난 툴리우스 가문의 일원이다. 키케로는 친구 티투스 폼포니우스 아티쿠스에게 아들의 출생 소식을 전하면서 "테렌티아가 건강해서 다행이다."라고 밝혔다. 편지의 날짜는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피굴루스가 집정관인 해, 즉 기원전 64년으로 설정되었지만, 학자들은 서신에 언급된 다른 일화들과 맞지 않다며 두 집정관이 집정관으로 선출되었지만 아직 취임하지는 않았던 기원전 65년 하반기에 태어났을 것이라 추정한다. 누이로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프루기,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와 잇따라 결혼한 툴리아가 있었다.기원전 58년 아버지가 호민관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의 정치 공세로 인해 망명한 뒤, 그와 가족들은 클로디우스 일당의 핍박에 시달렸다. 클로디우스는 키케로의 재산을 모조리 압류했으며, 집을 허물고 '자유의 여신'을 기리는 신전을 세우도록 했다. 키케로는 훗날 클로디우스가 자신의 아내와 자녀를 정신적으로 학대했으며, 자신의 아들과 딸은 폭도들이 자신들을 죽일까 두려워 숨어 살아야 했다고 주장했다. 테렌티아는 두 자녀를 데리고 자매인 파비아의 집으로 이주해야 했다.
기원전 57년 아버지가 복귀한 후 집이 재건되면서 안정을 되찾았다. 그 후 그는 키케로의 동생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아들이자 자신의 사촌인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와 함께 집에서 수사학자 파이오니오스의 가르침을 받았다. 키케로는 아들과 조카를 좀더 확실히 교육시키기 위해 투스키 인근의 별장으로 데려가서 수사학에 관한 교과서를 손수 집필한 뒤 아이들에게 나눠줬다. 또한 해방노예 마르쿠스 폼포니우스 디오니시우스를 두 아이 곁에 항상 있으면서 웅변술 등 다양한 분야를 배우게 했다. 두 아이 모두 공부를 잘했지만, 키케로의 친아들 마르쿠스는 종종 공부에 흥미를 잃고 딴 짓을 자주 했던 듯하다. 키케로는 기원전 50년 2월 24일 친구 아티쿠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이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소년들은 서로 사랑하고 운동을 함께 한다네. 하지만 이소크라테스가 에포로스와 테오폼포스에 대해 말했듯이 하나는 굴레가 필요하고 다른 하나는 박차가 필요하네."
기원전 51년 아버지가 킬리키아 총독으로 임명되었을 때, 아들 키케로와 형제 및 조카가 그를 따라갔다. 키케로는 아이들이 숙영지에서 여름을 보내게 하고 싶지않았기에 갈라티아 국왕 데이오타르에게 보냈다. 아버지 키케로가 킬리키아 총독으로서 임기를 마친 후 로마로 돌아갈 때 따라갔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하자, 키케로는 폼페이우스 편에 섰다. 그는 이 시기 아들의 운명을 매우 걱정했다. 기원전 49년 1월 21일에 아티쿠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소년에 대한 연민으로 자주 괴로워한다네."라고 밝혔으며, 다음날 서신에서 "내 아들과 조카를 그리스로 멀리 보내고 싶다네."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 조치는 실제로 이뤄지지 않았다.
기원전 49년 3월 30일 또는 31일에 성년식을 치른 뒤 포르미아와 쿰 인근의 가족 소유지에서 한동안 조용히 지냈다. 그러다 6월 9일에 아버지를 따라 디라키움으로 가서 폼페이우스의 군대와 합류해 기병대에 배속되었다. 아버지 키케로에 따르면, 그는 승마, 창던지기, 그리고 전쟁과 관련된 모든 고난에 대하는 인내에 대해서 폼페이우스와 군대로부터 큰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는 그를 "내전을 위해 태어난 남자 중 가장 어린 남자"라고 칭했다.
기원전 48년 8월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가 완패한 뒤, 그는 아버지와 함께 브룬디시움으로 갔다. 아버지 키케로는 로마로 돌아가서 정치 활동을 재개하고 싶었지만, 카이사르를 대신해 로마를 통치하던 기병장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의 허락이 내려지기 전에는 로마에 돌아올 수 없다"라며 거절하는 바람에 브룬디시움에 그대로 머물러야 했다. 키케로는 아들을 카이사르에게 보내 사면을 요청할 생각도 해봤지만, 카이사르가 알렉산드리아 전쟁을 치르느라 정신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포기했다.
기원전 47년 가을 브룬디시움에 도착한 카이사르는 키케로를 즉시 사면했고, 키케로 부자는 곧장 로마로 돌아갔다. 기원전 46년 아르피눔의 조영관에 선임되면서 정치 활동을 시작했지만, 기원전 45년 2월 아버지 키케로와 어머니 테렌티아가 이혼하고 누이가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다. 그 후 사촌 퀸투스와 함께 카이사르의 히스파니아 원정에 참여하여 카이사르의 눈에 띄기를 희망했다. 키케로가 그러지 말라고 설득하자 그는 집에 남았지만 퀸투스는 이를 뿌리치고 카이사르의 원정에 동행했다.
그 후 아버지로부터 독립한 그는 아테네로 유학가서 철학을 공부했다. 그런데 아테네에서 소요학파 철학자 크라티포스의 "현생에서 쾌락을 추구하는" 철학에 깊이 감화된 나머지 학업을 게을리하고 하루종일 술에 빠져 지냈다. 당시 아버지 키케로는 아들을 위해 막대한 유학 비용을 지원하고 있었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되자 현금 지불을 일시적으로 중단하고 역시 아들 키케로를 돕고 있던 아티쿠스에게도 지원을 멈춰달라고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다. 아들 키케로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아버지에게 사과했다고 전해진다.
기원전 44년 3월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이 벌어졌다. 키케로는 아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로마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전하면서, "나도 네가 있는 아테네로 가고 싶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끝내 카이사르 암살을 주도한 '해방자'들을 위해 로마에 남았다. 그는 이 시기에 저서 <의무에 관하여>를 집필하고 아들에게 이 책을 헌정하기도 했다. 아들 키케로는 기원전 44년 말 마케도니아에서 군대를 모으고 있던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에 합류한 뒤 기병 장교가 되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는 브루투스가 맡긴 모든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고 한다. 특히 브루투스가 가이우스 안토니우스를 일리리아의 빌리스 전투에서 제압했을 때 결정적인 활약을 했다고 전해진다.
기원전 43년 5월, 아버지 키케로는 아들을 아우구르(Augur)의 일원으로 선출시키기로 마음먹고 브루투스에게 아들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아들 키케로는 브루투스의 허락을 받고 로마로 향했지만, 아우구르 선거는 내년으로 미뤄졌다. 그 사이에 카이사르파가 해방자파와의 전쟁을 위해 연합하면서 제2차 삼두정치가 결성되었고, 기원전 43년 11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로마에 입성한 뒤 대숙청을 자행했다. 이때 키케로 부자 역시 숙청 명단에 들어갔다. 그는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즉시 발칸 반도로 떠나 브루투스에게 합류했고, 아버지 키케로와 삼촌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 사촌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곧 살해당했다.
기원전 42년 11월, 키케로는 필리피 전투에서 분전했으나 브루투스의 패배를 막지 못했다. 그는 전장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온 뒤 아시아 연안에서 함대를 이끌고 순항하고 있던 '파르마의 가이우스 카시우스'와 합류했다. 이후 카시우스와 함께 시칠리아로 가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에게 귀순했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그는 섹스투스의 군 지휘관으로 활동하면서 병사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기원전 39년 미세눔 협약이 체결되면서 모든 망명자가 사면되자 로마로 돌아갔다.
기원전 30년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아우구르의 일원으로 인정되었고, 그 해 9월 13일 부터 11월 1일까지 옥타비아누스의 보결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당시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내전이 종결되고 안토니우스가 죽었다는 소식이 원로원에 전해졌다. 그는 안토니우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아버지의 잘린 머리와 오른손이 있었던 포룸에서 발표했다. 그 후 그의 주도로 안토니우스의 모든 조각상을 파괴하고 안토니우스 씨족이 '마르쿠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령이 통과되었다. 플루타르코스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이로써 신은 키케로의 가정을 파괴한 안토니우스에 대한 보복을 완료했다."
다만 이 법안은 아우구스투스 대에 사실상 사문화되었고, 티베리우스 황제는 대놓고 이를 폐기해버린다. 그 이유는 아우구스투스 입장에서 볼 때, 내전 치유의 상징성과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아우구스투스의 누나 소 옥타비아가 안토니우스에게 일방적으로 이혼통보를 받았다고 해도, 안토니우스는 어쨌든 옥타비아의 남편이었다. 그러니 아우구스투스와 그 일가 전체 입장에서 볼 경우, 이는 안토니우스에게 이혼통보를 받음에도 클레오파트라 7세와 안토니우스의 쌍둥이 남매까지 도맡아 키운 옥타비아 입장에선, 보복 중 보복으로 인식됐다.[1] 이는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드루실라 부부와 티베리우스 모두 입장도 비슷했다. 안토니우스 가문이 아우구스투스를 칭한 옥타비아누스가 개창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황실의 남녀황족이 되고, 안토니우스의 피를 이은 이들이 아우구스투스 가문으로 불린 직계를 구성했기 때문이다.[2] 훗날 안토니우스의 증손자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프리무스가 네 황제의 해 시기에 도나우 군단의 지휘권을 맡아 베스파시아누스를 도움으로써 비텔리우스를 제거하고 플라비우스 왕조가 창건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기도 했다.
그래도 이 키케로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뛰어난 유머 감각으로 옥타비아누스, 아그리파 등과 금세 친해졌다. 학문적인 재능은 물론 아버지만 못했지만 아버지는 학식과 유머 감각이 지나치게 훌륭한 나머지 오버하다가 상대방에게 불필요한 원한을 사는 일이 잦았지만 그에겐 그런 일이 없었다. 아무래도 아버지보다 말을 잘 골라하긴 했던 모양으로, 특히 아그리파와 대단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다만 술에 취해서 거나해지면 잔을 던지거나 욕을 하는 좋지 못한 버릇은 아버지에겐 없던 것이고 아그리파한테도 그런 실수를 몇 번 한 건 큰 단점이었으나, 아그리파는 평소 그와 꽤 친했기에 너그럽게 웃으면서 넘어가주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기원전 27년에서 25년까지 시리아 총독을 역임했고, 기원전 23년에 아시아 총독으로 부임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으며, 그가 결혼했는지, 자식을 두었는지 여부는 불분명하다.
[1]
따라서 옥타비아, 소 안토니아 모녀에게 자유를 받은 해방노예들은 거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자유와 함께 받았다. 이는 프리기아 등지에 흩어 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협력 클리엔테스들도 비슷해, 이들 역시 아우구스투스 일가의 묵인 아래 대놓고 마르쿠스를 물려 썼다.
[2]
아우구스투스의 외종손, 안토니우스의 외손자인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 1세는 어머니
율리아 안토니아의 삶과 가계를 홍보할 때, 자신의 외할아버지가 안토니우스 임을 간접적으로 강조하고 홍보했다. 이는 안토니우스 일가의 피를 이은 아우구스투스 가문 남녀황족들도 비슷했거나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