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발부스 라틴어: Lucius Cornelius Balb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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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먼 히스파니아 속주 가데스 |
사망지 | 미상 |
지위 | 푸닉인 → 에퀴테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발부스(아버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발부스(형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발부스(조카) |
참전 |
세르토리우스 전쟁 갈리아 전쟁 카이사르의 내전 |
직업 | 로마 제국 집정관 |
로마 제국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40년 |
전임 |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폴리오 |
동기 | 푸블리우스 카니디우스 크라수스 |
후임 |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켄소리누스 가이우스 칼비시우스 사비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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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과 로마 제국의 군인, 정치인. 본래 히스파니아 속주 출신 페니키아인이었으나 세르토리우스 전쟁 때 폼페이우스 휘하에서 활약하면서 로마 시민권을 획득했다. 이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후원 덕분에 로마 정계에서 활약했다.2. 생애
먼 히스파니아 속주의 가데스 출신 페니키아인으로, 막대한 토지와 재산을 갖춘 집안에서 자랐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와 메텔루스 피우스가 히스파니아에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로마 정부에 맞서 할거한 퀸투스 세르토리우스를 상대로 벌인 세르토리우스 전쟁 때, 폼페이우스 휘하에 들어가 세르토리우스와 맞서 싸워 많은 공을 세웠다. 기원전 72년 전쟁이 끝난 뒤, 폼페이우스는 부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크루스의 적극적인 추천에 따라 그와 그의 아버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발부스, 형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발부스, 조카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발부스에게 로마 시민권을 수여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로마 시민이 되도록 주선해 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크루스의 이름을 따서 새 이름을 지었다. 발부스는 훗날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에게 보낸 편지에서 렌툴루스를 "카이사르 못지 않게 존경하는 사람"이라고 밝혔다.그렇게 로마 시민이 되었고 에퀴테스 계급에 편입되었지만, 히스파니아 속주의 페니키아인 출신인 점 때문에 로마 귀족들로부터 괄시받아 정계에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했다. 그러던 기원전 69~68년, 히스파니아로 여행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그의 재능을 눈여겨보고 그와 친분을 맺었다. 기원전 62~60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먼 히스파니아 속주 총독으로 부임한 뒤 그를 부관으로 삼고 그의 고향인 가데스에 많은 혜택을 부여했다. 기원전 60년, 발부스는 카이사르를 대신해 키케로를 찾아가서 카이사르가 루시타니아인들을 상대로 큰 공을 세웠으니 첫번째 개선식을 치르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원로원 내부의 소 카토 등 강경파는 카이사르가 집정관 출마와 개선식 중 하나만 택하라고 강요했고, 카이사르는 고심 끝에 집정관 출마를 선택했다.
기원전 59년 아시아 총독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가 갈취 혐의로 고발되었을 때 변호를 맡았으며, 기원전 58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을 단행했을 때 부관으로서 동행했으며 키케로의 친척들을 지원해주기도 했다. 그는 카이사르 및 폼페이우스와의 친분 덕분에 막대한 재산을 얻을 수 있었다. 이에 질투심을 품은 가데스의 일부 주민이 기원전 56년 갈취 혐의로 그를 고발했지만, 폼페이우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키케로의 변호 덕분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 기원전 56년 이후에는 로마로 돌아와서 카이사르의 입장을 대변하고 지지자들을 끌어모으는 임무를 수행했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했을 때, 그는 로마에 남아 카이사르의 권익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카이사르가 옵티마테스파를 상대로 원정을 떠나는 동안, 그는 에퀴테스일 뿐 원로원 의원이 된 적이 없었는데도 로마에서 카이사르의 부관 자격으로 재정 문제를 관리했고 카이사르와 수차례 암호화된 서신을 보냈다. 기원전 48~47년, 지난날 카이사르에 맞섰다가 파르살루스 전투 후 이탈리아로 돌아오기로 하고 브룬디시움에 도착한 키케로는 발부스를 통해 로마로 돌아가서 카이사르의 사면을 받고 싶다고 요청했다. 그는 기꺼이 키케로와 카이사르간의 중재를 맡아서 키케로가 사면을 받을 수 있게 해줬다. 키케로는 이후에도 여러 인사의 사면을 얻기 위해 그의 중재를 부탁했고, 발부스는 그때마다 받아줬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이 벌어졌다. 발부스는 카이사르파의 긴급 회의에 참석해 카이사르를 암살한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등 암살자들을 당장 처단하자고 주장했지만, 현직 집정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받아들이지 않고 암살자들과 타협했다. 이에 실망했는지, 그해 4월 옥타비아누스가 이탈리아에 도착하자마자 즉시 찾아가서 옥타비아누스의 편을 들었다. 그는 옥타비아누스와 함께 로마로 간 뒤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어서 카이사르의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러면서 아울루스 히르티우스에게 갈리아 전쟁에 대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 후속편을 작성하라고 촉구했다. 히르티우스는 이에 따라 갈리아 전기 제8권을 저술하고 발부스에게 헌정했다.
기원전 41~40년 옥타비아누스의 관할이 된 히스파니아 총독을 맡았으며, 기원전 40년 3월 페루시아 내전에서 패배한 뒤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새 히스파니아 총독으로 선임된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의 부관을 맡아 그의 언행을 감시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같은 해 12월 푸블리우스 카니디우스 크라수스와 함께 보결 집정관에 선출되어 한 달간 임기를 수행했다. 이후 필리피 전투의 승리로 카이사르 암살자들을 응징한 것을 기념하는 행사를 주관했으며, 카푸아 시를 후원하기도 했다.
그가 언제 사망했는지는 전해지지 않으나, 로마 시민 1인당 100세스테르티우스를 물려준다는 유언을 남겼다는 기록은 전해진다. 그는 생전에 <천문력>을 제작하여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헌정했으며, 로마에 7,7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발부스 극장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