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에 등장하는 캐릭터에 대한 내용은 시리우스 심볼리(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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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シリウスシンボリ Sirius Symbol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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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82년 3월 26일 | |
죽음 | 2012년 4월 8일 (30세) | |
성별 | 수컷 | |
털색 | 갈색 (鹿毛, 카게) | |
아비 | 모가미(Mogami) | |
어미 | 스위트 엡섬(スイートエプソム) | |
외조부 | 파르홀론 | |
생산자 | 심볼리 목장 | |
마주 | 와다 토모히로[1] | |
조교사 |
니혼야나기 토시오 (미호) →하타케야마 시게노리 (미호)[2] →니혼야나기 토시오 (미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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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 |
26전 4승 (4-3-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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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상금 |
1억 4310만 300엔JP +229,000 프랑스 프랑FR +16,500마르크G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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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우승 | G1 | 일본 더비(1985) |
레이팅 | 프리 핸디 | 63 (1985) |
상세 정보 | | JBIS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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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경주마. 심볼리 루돌프의 한살 아래 세대로, 같은 심볼리 목장에서 태어나 함께 심볼리 목장의 전성기를 장식한 말.2. 혈통
1대 | 2대 | 3대 |
<colbgcolor=#fff3e4,#331c00>모가미 Mogami 1976 |
<colbgcolor=#ffffe4,#323300>
리파르 Lyphard 1969 |
노던 댄서 Northern Dancer |
구프트 Goof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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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럭 No Luck 1968 |
럭키 데버네어 Lucky Debonai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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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티징 No Teasi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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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트 엡섬 スイートエプソム 1976 |
파르홀론 Partholon 1960 |
밀레시안 Milesian |
팔레오 Pale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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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레토코 Shiretoko 1970 |
타카워크 Takawal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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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셰트 Pochet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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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티브 댄서 5×4 9.375% |
3. 생애
시리우스 심볼리 열전 : 유랑하는 천랑성[4]1984년 클래식 전선을 휩쓸었던 직속 선배 심볼리 루돌프에 이어 마주의 큰 기대를 받았던 말이지만, 마주와 조교사의 기수 선택을 둘러싼 갈등에 휘말려 사츠키상과 킷카상에는 출주조차 하지 못했고, 그 후로도 유럽 원정이네 뭐네 하며 일본 내 메이저 경주에는 한 번도 못 나가고 전성기 시절을 통째로 날려버린 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커리어가 끝나 있었던, 운명의 장난에 농락당한 안타까운 말.[5]
3.1. 1984년
시리우스 심볼리의 이야깃거리는, 오히려 액면으로 보이는 경주 성적보다도 이 말을 둘러싼 소동에 더 초점이 모여질 것이다. 심볼리 목장의 대표이자 시리우스 심볼리의 마주였던 와다 토모히로는 시리우스가 3세 시즌(현 2세)에 치른 네 경기 중 비록 두 경기를 이기기는 했지만 두번의 패배에 기수인 카토 카즈히로의 실수가 컸다는 점을 들어 그의 기승 방법에 큰 불만을 내비쳤고, 기수를 심볼리 루돌프의 주전기수였던 오카베 유키오로 교체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조교사인 니혼야나기 토시오는 자신의 제자인 카토 기수를 감싸면서 '불만이면 다른 마방으로 옮겨 주시오.'라며 마주와 대립, 결국 시리우스 심볼리는 하타케야마 시게노리의 마방으로 옮겨가게 된다. 이걸로 끝났다면 별 이야깃리가 못 되었겠지만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이런 마주의 행동이 니혼야나기의 마방뿐 아니라 구무원 조합 전체의 반발로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는 조교사회까지 중재에 나서게 되면서, 결국 시리우스 심볼리는 이적 1주일만에 니혼야나기 마방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당시 와다는 이미 마방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시끄럽고 간섭이 많은 문제 마주로 꽤 이름이 난 상황이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이적 사태가 발생하자 구무원들 사이에서는 급격하게 심볼리 목장에 대한 반감이 확산되었고, 결국 와다도 이런 분위기는 역시 곤란하다고 느꼈는지 고집을 꺾게 된 것.[6][7]3.2. 1985년
1985년 JRA GI 대회 우승마 {{{#!wiki style="margin:0 -11px -5px; color:#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color:#000; word-break: keep-all" |
<tablewidth=100%>
에레부스 |
미호 신잔 |
심볼리 루돌프 |
니혼 필로 위너 | 노아노 하코부네 |
시리우스 심볼리 | 스즈카 코반 |
갤럽 다이나 | 리워드 윙 |
미호 신잔 |
니혼 필로 위너 |
심볼리 루돌프 | 다이신 후부키 | 카츠라기 하이든 |
심볼리 루돌프 이 표는 간략화한 버전입니다. 경기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여기를 참고해주세요. |
}}}}}}}}} |
아무튼 협의 끝에 다음 경주는 마주 와다의 희망대로 오카베 유키오가 기수를 맡고, 그 다음 경기는 다시 카토 카즈히로가 기승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렇게 오카베 기수에게 등을 맡긴 채로, 시리우스는 첫 경기로 출주한 삼관 리그의 전초전 와카바상을 무난하게 승리로 장식했다. 이렇게 되니 2번 타자인 카토 기수는 다소 난감해졌는데, 마주 와다가 지목한 오카베 기수가 당당히 시리우스를 기승한 채로 승리를 얻어낸 판국이니 이제 자기를 감싸준 스승인 니혼야나기 조교사의 명예를 위해서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도 무조건 출주하는 경기에서 우승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와카바상 우승 이후 발견된 각부 불안 탓에 클래식의 첫 관문인 사츠키상은 넘겨야만 했고, 덕분에 카토 기수는 마땅한 스탭 레이스도 없이 바로 클래식 제2의 관문, 행운의 일인자를 가리는 일본 더비에 시리우스와 함께 출주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8]
1985년 일본 더비 영상 |
시리우스가 휴양을 취하고 있을 무렵, 1985년 클래식 전선은 사츠키상을 우승한 기대주 미호 신잔에게 이목이 집중되고 있었다. 사람들은 어쩌면 미호 신잔이 클래식 삼관을 차지해서 1983년 미스터 시비, 1984년 심볼리 루돌프에 이어 3년 연속으로 삼관마 탄생이 이뤄질지도 모르겠다며 기대를 하고 있었지만, 애석하게도 미호 신잔은 사츠키상 우승 후 부상으로 휴양에 들어가게 되었다. 카토 기수의 운인지, 어쩌면 가장 운이 좋은 말이 우승한다는 더비의 징크스가 들이맞은 것인지, 미호 신잔의 부재 속에서 1985년의 일본 더비는 딱히 주목할 말이 없는 와중에 중상마도 아닌 오픈마인 시리우스 심볼리가 1번 인기를 받게 되었다.[9]
퍼붓는 비로 인해 최악의 불량 마장이 된 도쿄 경마장, 혼전의 기류가 감도는 가운데 시작된 더비에서 시리우스는 마장 가운데에서 약간 바깥쪽을 달리며 기회를 엿보다, 한 템포 빠르게 가속하여 단숨에 전방으로 치고 나갔고 4코너를 넘어 마찬가지로 스퍼트를 걸던 2번 인기 스다 호크를 바깥으로 가뿐히 제친 후 거침없이 돌진해 그대로 결승선을 1착으로 통과했다. 2착 스다 호크와 3마신 차이로 따낸 85년 클래식의 행운의 두 번째 관이었다. 그러나 이 더비 우승의 기쁨은, 안타깝게도 멀지 않은 미래에 시리우스 심볼리 마생에 있어서 처음이자 마지막 영광이 되고 말았다.
혹자는 이 더비를 미호 신잔이 참가하지 않은 와중에 따낸, 호랑이 없는 골에 토끼가 왕노릇 하는 격인 우승이라 폄하하기도 하지만, 카토 카즈히로 기수를 포함하여 마방 관계자들은 미호 신잔이 참가했어도 시리우스가 우승했을 것이라는 데에 이견이 없다. 상술했든 이 해의 더비는 최악의 중마장이었기 때문이다. 미호 신잔은 중마장에 약했고 시리우스 심볼리는 중마장이 특기였기 때문.
이로써 심볼리 목장은 2년 연속 더비마 생산이라는 영예를 얻게 되지만, 마주였던 와다는 이날 감기를 이유로 경마장에 나오지 않았다.
3.3. 유럽 원정
시리우스 심볼리의 처절한 몰락은, 시리우스가 심볼리 루돌프와 함께 유럽으로 건너가기로 결정된 데에서부터 시작되었다.아직 해외원정하는 경주마를 위해 동반마를 같이 데려가서 멘탈 케어를 해준다는 개념이 없던 시기라 루돌프의 해외 원정에 시리우스가 동반한다는 발표는 그야말로 뜬금포였다. 거기에 심볼리 루돌프는 해외 원정 직전의 타카라즈카 기념 출주 전날 큰 부상을 당하면서 출발을 못하고, 시리우스만 우선 먼저 유럽으로 건너가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때 심볼리 루돌프는 부상으로 경주마 은퇴를 선언했다가 모 아니면 도라는 심정으로 도박했던 세침치료가 성공하면서 은퇴선언을 번복하고 가을 경주로 복귀하게 되는데, 이는 결국 4세마(현 3세마) 혼자서 경주마를 계속 할 수 있을지조차 장담할 수 없는 선배를 기다리며 유럽 원정을 하게 되었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 원정에 니혼야나기 마방의 관계자는 전혀 동참하지 않았고, 주위의 사람이고 환경이고 모든 게 바뀌게 된 유럽 원정은 예민한 기질의 서러브레드에게는 너무 가혹한 처사였다. 애초에 시리우스 심볼리는 당시의 경마 변경국인 일본에서도 더비를 제외하면 이렇다할 성과가 없는 데다 아직 데뷔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경험도 적은, 소위 풋내기에 불과한 말이었는데 이런 말을 갑자기 유럽으로 보내서 성적을 낼 수 있을리가 없었다. [10]
더비가 끝난지 얼마 되지도 않아 부랴부랴 이역만리 떨어진 유럽으로 건너가, 제대로 휴식도 없이 겨우 곧바로 참가한 킹 조지 6세 & 퀸 엘리자베스 스테이크스에서 시리우스는 12두 중 8착을 찍고, 그로부터 약 한 달 뒤 독일의 바덴 대상에서는 7두 중 4착을 기록했다. 오카베 유키오 기수는 일부러 유럽까지 건너와, 상술한 두 경주에서 시리우스 심볼리의 안장에 앉았지만, 그 이후부터는 현지 기수가 시리우스를 맡게 되었다. 바덴 대상으로부터 겨우 2주만에 G3 경주에 출주하여 6두 중 꼴찌를 하는 이해하기 힘든 일도 있었지만, 그 해 10월에는 프랑스 G1 로열오크상에서 12두 중 3착으로 선전하는 등, 시리우스 심볼리의 유럽 원정 첫 출발은 주위 환경만큼이나 어수선했지만, 아주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그러는 와중, 일본에서는 마주 와다 토모히로의 고집이 이번에는 심볼리 루돌프의 조교사 노히라와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다. 부상에서 벗어나 가을 경주를 달려보니 압도적인 그 실력은 여전했고, 그렇다면 유럽을 제패해서 심볼리 루돌프가 세계 최고의 명마라는 걸 알리겠다는 포부는 두 사람이 공유하는 바였으나, 이를 위해 개선문상을 목표로 푹 휴식을 취하여 컨디션을 조절하고 천천히 유럽으로 건너가길 원했던 노히라 조교사와는 달리 마주 와다는 유럽으로 건너가기 전에 우선 미국의 터프를 제패해서 드넓은 신대륙에 명마 심볼리 루돌프의 이름을 알리고 싶어 했고, 결국은 노히라 마방의 관계자들은 쏙 빼놓고 심볼리 목장 관계자들만 심볼리 루돌프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인 관계자들에게 루돌프를 덜컥 맡겨버리는 일을 저질렀다. 와다는 노히라 조교사를 경주에 초대하지도 않아서, 노히라 조교사는 이 경주를 자비로 일반 관람 투어에 참가해서 보러 가게 된다. 그리고 경기 전, 오카베 유키오 기수는 루돌프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레이스 회피를 진언하지만 와다는 이를 거절하게 되는데, 이미 일본의 매스컴 관계자와 응원단까지 미국으로 건너온 판이라 사실 와다 입장에서도 취소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펼쳐진 운명의 샌 루이스 레이 스테이크스, 심볼리 루돌프는 오카베 기수의 걱정대로 경기 중 계인대염이 발병하여 6착이라는 전례 없는 최악의 성적과 함께 무너져 내렸고, 그대로 레이스를 은퇴하게 되었다.
사정이 이렇게 되어 버린 탓에, 유럽으로 먼저 건너와버린 시리우스 심볼리의 거취가 붕 떠버리게 되었다. 심볼리 루돌프와 같이 유럽에서 달리겠다고 준비해놨는데, 주역인 심볼리 루돌프가 유럽으로 건너 올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래도 이미 엎질러진 물, 시리우스는 반 어거지로 유럽에서의 활동을 계속하게 되었다. 세간의 인식과 달리 나름 입착권에는 자주 올라간 편이었지만[11], 이는 다른 말들의 출주 회피로 출주마의 머릿수가 한산한 경기들이 많아서 덮어두고 좋게 평가하기는 힘들었다.
1986년 개선문상 영상 |
3.4. 원정 복귀 후
1987년 가을, 시리우스 심볼리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오게 된다. 한창 전성기인 4, 5세 시즌을 모조리 유럽의 터프에 바쳤건만 우승 트로피는 하나도 얻지 못하고, 쓸쓸히 고국으로 돌아와 고향 격인 니혼야나기 마방으로 돌아가기는 했지만, 전성기를 떠나보낸 시리우스는 조금 박하게 말한다면 이미 퇴물이나 다름 없었다. 게다가 유럽 원정에서 고생을 심하게 한 탓인지 원래도 좋다고 하기 힘들던 성격은 더 나빠져있었다. 일본 내에서의 담당 기수였던 카토 카즈히로는 "오랜만에 돌아온 시리우스를 맞이하러 목장에 들렀으나 시리우스가 시리우스가 아니게 되었더라"고 말할 정도였다. 혀는 반쯤 뭉개져 있고[13] 그 격하던 성격의 시리우스가 사람 태우기를 무서워 하는데다 달릴 때도 치고 나가야 할 때조차 머뭇거릴 정도여서 대체 유럽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답답했다고. 2019년 카토 카즈히로의 증언그렇게 엉망으로 망가진 몸과 정신을 다시 되살리려, 카토 기수 이하 담당자 전원은 물론 시리우스 자신 역시 안간힘을 썼지만 끝내 회복의 빛은 비치지 않았다.
복귀 첫 경기인 1987년 10월 마이니치 왕관, 유럽에 다녀온 말이라는 이름값이 있었는지 시리우스는 닛포 테이오, 다이나 액트리스에 이은 3번 인기로 출주하지만 8착으로 참패한다. 그리고 3주 뒤의 가을 천황상에서는 5번 인기로 출주, 9착을 기록했다.
마주인 와다도 이렇게 완전히 무너진 말을 가지고 더이상 고집을 피울 수 없었는지, 시리우스는 이후 푹 휴식을 취하면서 컨디션 재조정에 들어갔고 이듬해인 1988년 다시 레이스로 복귀했다. 하지만 1988년의 일본 터프는 오구리 캡과 타마모 크로스라는 두 괴물이 날뛰던 전장이었고, 마지막 달릴 힘만을 간신히 붙들고 있던 3년 전의 더비 우승마가 나설 자리는 이미 어디에도 없었다.
시리우스는 8월의 복귀전인 OP 세이칸 터널 개통 기념에서 3번 인기로 2착, 그 다음 경기인 G3 하코다테 기념은 2번 인기로 4착을 기록한다. 나름 더비 우승마로 떠받들여지던 말이 더비 후 3년간 단 1승도 못하고 있으니 마침내 완전히 속이 뒤틀려버렸던 것인지, 시리우스는 88년도 세번째 경주인 10월의 마이니치 왕관에서 게이트 진입 직전에 다른 두 경주마 다이나 액트리스와 레전드 테이오를 걷어차면서 일대 난동을 부리게 된다. 덕분에 레전드 테이오는 부상으로 출주 제외, 두 말의 구무원들끼리 주먹 다툼을 벌였다고 하는 얘기도 전해질 정도였다.[14] 하지만 난동을 부리고 속이 풀린 것인지 막상 당사자인 시리우스 심볼리는 그 회색의 괴물 오구리 캡에 이어 2착이라는 의외의 호성적을 기록한다. 마이니치 왕관은 가을 천황상을 위한 발판이니 당연히 가을 천황상도 출주, 하지만 이미 흘러간 시간을 어찌할 수는 없는 것인지 7착을 기록했고, 더이상 버티지 못한 다리에서 골절이 발견되어 쓸쓸히 레이스를 은퇴했다.
3.5. 현역 은퇴 후
은퇴 후 종마로 데뷔했지만 특필할만한 성과는 내지 못했다. 결국 종마도 은퇴, 이후 공로마로 전환되어 오키타 목장에서 시정마로 여생을 보내다가 현역 은퇴 후 24년이 흐른 2012년, 굴곡진 마생을 끝냈다. 목장 내의 라이벌이었고 함께 심볼리의 전성기를 장식했으며, 어떻게 보면 그 자신의 마생이 꼬이게 된 데 결정적인 원인이 된 심볼리 루돌프가 죽은 지 1년, 루돌프와 같은 30세의 나이에 맞이한 죽음이었다.여담으로 결국 심볼리 목장은 시리우스의 은퇴 이후 미호의 마방에 말을 맡기기 힘들게 되면서 목장 시스템이 삐걱거리게 되어 오랜 침체기를 맞이하게 된다.[15] 그리고 이와는 별개로 미호의 마방들도 한동안 같이 침체기를 겪게 되는데, 릿토의 언덕 훈련 노하우에 밀려 마주들이 릿토를 더 선호하게 되었기 때문. 심볼리 목장은 2000년대 초반에 심볼리 크리스 에스를 배출하며 부활했지만, 이후 2024년 현재까지도 유력마를 다시 내지 못하고 있다.
4. 여담
- 생전에 심볼리 목장의 폭군으로 군림하던 심볼리 루돌프가 거의 유일하게 자신의 호적수로 인정했던 말로, 한번이라도 루돌프와 병합 경주를 하고나면 기가 죽어 루돌프에게 접근도 못했던 다른 말들과 달리 시리우스는 몇번이나 경주에서 지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루돌프에게 도전할 정도로 승부욕이 매우 강했다고 한다. 그래서 심볼리 루돌프도 평소 자신보다 한수 아래로 여기며 무시했던 다른 말들과 달리 시리우스와는 서로 견제하며 기싸움을 벌였으며, 목장측에서도 두 말에게 호승심을 심어주기 위해 일부러 바로 옆 마방에 배치시켰다고 한다.
- 상기한 루돌프와의 경쟁심이라던가 경기전에 난동을 부리며 다른 말을 걷어찼던 에피소드 등 때문에 사람들에겐 기성이 거친 말이라는 이미지가 강했지만 실제론 상당히 얌전한 성격의 말이었다고 한다. 해외원정 당시 바로 옆에서 비행기가 날아다니는데도 동요하지 않고 태연히 먹이를 먹을 정도로 침착함을 잘 유지했으며, 은퇴한 뒤에도 자신을 구경하러 온 어린이 팬이 쓰다듬기 편하도록 일부러 머리를 숙여주는 등 팬서비스도 좋았다고 한다.
- 미호 신잔과는 기묘한 관계인데, 같은 세대 클래식 삼관을 나눠 먹었으면서도 매번 어느 한쪽에 사정이 생겨서 엇갈리는 식으로 단 한 번도 맞붙은 적이 없다. 사츠키는 시리우스가 이적 소동으로 회피, 더비는 미호 신잔이 골절로 회피, 킷카는 시리우스가 해외 원정. 일본으로 돌아왔을 때 미호 신잔은 이미 은퇴였다. 양마장에 강하고 평생을 부상에 시달린 미호 신잔, 중마장에 강하고 평생을 마주의 고집에 시달린 시리우스 심볼리라는 대비 때문에 둘이 100% 상태로 맞붙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IF가 자주 나오는 관계.
- 원래는 사과를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었는데, 은퇴 후 찾아간 한 팬이 사과를 주자 맛있게 먹었다고 한다. 목장 관계자는 시리우스가 사과를 좋아해서 먹은게 아니라, 아마 오랜만에 자신을 찾아와준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기뻐서 먹어주었던 것일 거라고 추측했다.
- 현역 당시 일본 국내에서 시리우스의 주전기수였던 카토 카즈히로는 아직까지도 시리우스에 대한 강한 애정을 드러내고 있다.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를 시작해 시리우스를 실제로 뽑기도 했으며, # 본인의 인스타그램에서 우마무스메로나마 시리우스와 재회하게 되어 행복하다고 밝혔다.
- 상기한 카토 기수의 우마무스메 시작을 즈음하여 그가 과거 시리우스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했던 답변, 대중들에게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시리우스와 관련된 뒷이야기 등이 재조명되며 원본마 시리우스 심볼리와 그의 한 많은 마생 역시 경마 팬들에게 다시금 주목받기 시작했다. 더해서 시리우스를 추락시킨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는 심볼리 목장의 당시 대표 와다 토모히로에 대한 부정적인 재평가 역시 상당히 늘었으며, 어떻게 보면 그에게 시리우스보다 더한 피해를 입었던 마테리얼 역시 덩달아 화제에 올랐다.
5. 경주 성적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268300><rowbgcolor=#268300><tablebgcolor=#fff,#2d2f34><rowcolor=#ffffff><width=3%> 경주일 || 경마장 ||
(2착마) ||
경기명
||<width=3%> 등급 || 트랙
||<width=3%> 배당 ||<width=3%> 인기 || 착순 || 기수 || 1착마(2착마) ||
<rowcolor=#ffffff> 1984년 (3세, 현 2세) | |||||||||
9.16 | 나카야마 | 3세 신마 | 잔디 1600m | 5.5 | 2 | 1착 | 카토 카즈히로 | (타카노 미노부) | |
9.29 | 나카야마 | 후요(芙蓉) 특별 | OP | 잔디 1600m | 1 | 실격[강착] | 빙고 티무르 | ||
10.27 | 도쿄 | 이초 특별 | OP | 잔디 1600m | 1 | 2착 | 로드 퀼터 | ||
11.18 | 도쿄 | 후추 3세 스테이크스 | OP | 잔디 1800m | 1.2 | 1 | 1착 | (사쿠라 이치몬지) | |
<rowcolor=#ffffff> 1985년 (4세, 현 3세) | |||||||||
3.30 | 나카야마 | 와카바(若葉)상[17] | OP | 잔디 2200m | 1.2 | 1 | 1착 | 오카베 유키오 | (마론 쿠셋) |
5.26 | 도쿄 | 도쿄 우준 (일본 더비) | GI | 잔디 2400m | 5.5 | 1 | 1착 | 카토 카즈히로 | (스다 호크) |
7.27 | 애스콧 | 킹 조지 6세 & 퀸 엘리자베스 스테이크스 | G1 | 잔디 12f[18] | (100/1)[odds] | 10 | 8착 | 오카베 유키오 | 페토스키 |
9.1 | 바덴바덴 | 바덴 대상 | G1 | 잔디 2400m | 4착 | 골드 앤드 아이보리 | |||
9.15 | 롱샹 | 프랭스 도랑주상 | G3 | 잔디 2000m | 6착 | A. 르그리 |
로밀도 카리엘로동착 |
||
10.27 | 롱샹 | 로열오크상 | G1 | 잔디 3100m | 3착 | G. 모스 | 메르세 | ||
<rowcolor=#ffffff> 1986년 (5세, 현 4세) | |||||||||
4.20 | 롱샹 | 에두빌상 | G3 | 잔디 2400m | 5착 | G. 모스 | 베이비 터크 | ||
5.6 | 롱샹 | 시시크상 | 잔디 2000m | 3착 | 틸트 | ||||
6.8 | 산시로 | 밀라노 대상 | G1 | 잔디 2400m | 5착 | 토미 웨이 | |||
8.16 | 도빌 | 공토비롱상 | G3 | 잔디 2000m | 4착 | A. 르그리 | 오버 더 오션 | ||
9.14 | 롱샹 | 푸아상 | G3 | 잔디 2400m | 2착 | 모리스 필리페롱 | 메르세 | ||
10.6 | 롱샹 | 개선문상 | G1 | 잔디 2400m | (112/1)[odds] | 13 | 14착 | 댄싱 브레이브 | |
10.19 | 롱샹 | 콩세유 드파리상 | G2 | 잔디 2400m | 4착 | 알타얀 | |||
<rowcolor=#ffffff> 1987년 (6세, 현 5세) | |||||||||
3.28 | 생클루 | 에드몽 블랑상 | G3 | 잔디 1600m | 4착 | 모리스 필리페롱 | 하이에스트 아너 | ||
4.12 | 롱샹 | 아르쿠르상 | G2 | 잔디 2000m | 8착 | 그랑 파부아 | |||
5.2 | 롱샹 | 가네상 | G1 | 잔디 2100m | 7착 | 트립틱[21] | |||
10.11 | 도쿄 | 마이니치 왕관 | GII | 잔디 1800m | 6.0 | 3 | 8착 | 카토 카즈히로 | 다이나 액트리스 |
11.1 | 도쿄 | 천황상(가을) | GI | 잔디 2000m | 7.5 | 5 | 9착 | 닛포 테이오 | |
<rowcolor=#ffffff> 1988년 (7세, 현 6세) | |||||||||
8.7 | 하코다테 | 세이칸 터널 개통 기념 | OP | 잔디 1800m | 4.9 | 3 | 2착 | 카토 카즈히로 | 볼드 노스맨 |
8.21 | 하코다테 | 하코다테 기념 | GIII | 잔디 2000m | 4.6 | 2 | 4착 | 사커 보이 | |
10.9 | 도쿄 | 마이니치 왕관 | GII | 잔디 1800m | 11.1 | 4 | 2착 | 오구리 캡 | |
10.30 | 도쿄 | 천황상(가을) | GI | 잔디 2000m | 14.2 | 5 | 7착 | 타마모 크로스 |
'''[[도쿄 우준|도쿄 우준 (일본 더비) {{{#!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GI"]]''' {{{#!wiki style="margin:0 -11px -5px; color:#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color:#000; word-break: keep-all" |
<tablewidth=100%> 1932 와카타카 | 1933
카부토야마 | 1934 프레이 모어 | 1935 거버너 | 1936 토쿠마사 | 1937 히사토모암컷 | 1938 스게누마 | 1939
쿠모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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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 이에류 | 1941
세인트 라이트 | 1942 미나미 호마레 | 1943
쿠리후지암컷 | 1944 카이소 | ~~1945 · 1946 없음~~ | 1947 마츠 미도리 | 1948 미하루 오 | 1949 타치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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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쿠모노 하나 | 1951
토키노 미노루 | 1952 쿠리노 하나 | 1953 보스터니안 | 1954 골든 웨이브 | 1955 오토키츠 | 1956
하쿠치카라 | 1957
히카루 메이지 | 1958 다이고 호마레 | 1959 코마츠 히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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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코다마 | 1961 하쿠쇼 | 1962 페어 윈 | 1963
메이즈이 | 1964
신잔 | 1965
키스톤 | 1966 테이토 오 | 1967 아사 덴코 | 1968 타니노 해로모어 | 1969 다이신 볼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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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
타니노 무티에 | 1971
히카루 이마이 | 1972 롱 에이스 | 1973
타케 호프 | 1974 커널 랜서 | 1975
카부라야 오 | 1976
클라임 카이저 | 1977
럭키 룰러 | 1978
사쿠라 쇼리 | 1979
카츠라노 하이세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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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
오펙 호스 | 1981
카츠 탑 에이스 | 1982
뱀부 아틀라스 | 1983
미스터 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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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드제 도입, 중앙 GI 지정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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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심볼리 루돌프 | 1985
시리우스 심볼리 | 1986
다이나 걸리버 | 1987
메리 나이스 | 1988
사쿠라 치요노 오 | 1989
위너즈 서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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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
아이네스 후진 | 1991
토카이 테이오 | 1992
미호노 부르봉 | 1993
위닝 티켓 | 1994
나리타 브라이언 | 1995
타야스 츠요시 | 1996
후사이치 콩코르드 | 1997
서니 브라이언 | 1998
스페셜 위크 | 1999
어드마이어 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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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아그네스 플라이트 | 2001
정글 포켓 | 2002
타니노 김렛 | 2003
네오 유니버스 | 2004
킹 카메하메하 | 2005
딥 임팩트 | 2006
메이쇼 삼손 | 2007
보드카암컷 | 2008
딥 스카이 | 2009
로지 유니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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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GI 지정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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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에이신 플래시 | 2011
오르페브르 | 2012
딥 브릴란테 | 2013
키즈나 | 2014
원 앤 온리 | 2015
두라멘테 | 2016
마카히키 | 2017
레이 데 오로 | 2018
와그네리안 | 2019
로저 바로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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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콘트레일 | 2021
샤흐리야르 | 2022
두 듀스 | 2023
타스티에라 | 2024
다논 데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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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심볼리 목장의 소유주다.
[2]
하타케야마 조교사가 담당한 기간은 아주 잠깐이라, 그 기간 동안 경주에 출주한 적은 없다.
[3]
앞의 갈색 16번마가 시리우스 심볼리. 뒤의 회색 12번마는 1985 더비에서 2착을 기록한 스다 호크.
[4]
출생부터 죽음까지 시리우스 심볼리의 마생을 전체적으로 다루는 글.
[5]
이후에도 마주의 오만으로 인한 독단적인 행보가 극에 달했는데, 그 중에서 시리우스 이상으로 큰 피해를 본 말이 비운의 87년 클래식 세대로 유명한
마테리얼이다.
[6]
왜 이런 갈등이 생기느냐에 대해서는 일본의 경마 시스템에 대해서 좀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요즘에는 마주의 영향력이 강해져서 어지간해서는 마주의 요구가 그대로 진행되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아직 마주는 말을 맡기기만 하고 조교사가 자기 마음대로 말의 육성과 출주를 관리하던 시기였다. 말이 상금을 받게 되면 그 상금의 일부를 조교사와 구무원, 기수도 같이 나눠 받게 되는데, 그렇기 때문에 조교사와 구무원은 비록 마주가 맡겼을 뿐인 남의 말이지만 자기 말처럼 그 말을 보살피는 것. 그런데 자기 말인데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 마주인 와다 입장에서는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이었고, 고참 조교사였던 니혼야나기 토시오도 기수 선발은 조교사의 권한인데 여기에 참견하는 와다가 결코 좋게 보이지 않았다. 문제는 와다 토모히로는 일본 경마사에서 그 이름을 빼놓을 수 없는 굴지의 호스맨이자, 남들이 다 반대하는 와중에 본인의 고집으로 심볼리 루돌프라는 걸작을 만들어낸 오너 브리더로 자신이야 말로 일본에서 가장 말을 잘 안다는 자부심이 넘쳐나는 사람이었고, 니혼야나기 조교사도 1957년 마방 개업 이후 2년만에 8대 경주에서 우승하고 80~82년에는 관동 리딩 트레이너, 전일본 리딩 트레이너에 올랐으며, 2004년에는 조교사 현창자 제도가 탄생할 때 최초로 뽑힌 7인중에 포함될 정도로 거물 조교사였다. 말 그대로 자존심과 자존심의 충돌이었던 것. 거기에 이 사태를 구무원들의 시선에서 보면 악벽이 있어 기승하기 힘든 편이었다는 시리우스 심볼리를 고생해서 좋은 말로 다듬어놨더니 멋대로 홀랑 빼서 다른 마방으로 옮겨버리는 이기적인 처사로 보였던 것이다.
[7]
이 문제는 시리우스 심볼리 다음해의 기대주였던
마테리얼에서 극에 달한다. 마테리얼은 담당 조교사가 원래 자신에게 맡겨질 말이 아닌데 한눈에 반해 사정사정해서 겨우 맡은 말이었던지라 마주 와다에게 강하게 나가질 못해 질질 끌려다니다 제대로 된 성적도 내질 못하고 고생만 하다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되며, "와다의 방식에는 문제가 많다"라는 인식을 완전히 박혀버리게 만든다. 안그래도 불만을 많이 사고 있는 마주가 2년 연속으로 자기 말이란 이유로 깽판을 쳐 버렸으니 조교사나 구무원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아질 턱이 없는 것.
[8]
원래 예정은 오카베 기수가 와카바상과 사츠키상을 달리고, 카토 기수가 NHK배를 스탭 레이스로 뛰고 더비에 출주할 예정이었는데, 휴양으로 중간의 두 경기를 취소시키면서 복귀전으로 곧바로 카토 기수가 더비를 뛰게 되었다.
[9]
당시 자료를 보면 전문가 픽업으로는 2번 인기였던 스다 호크와 비슷비슷한 정도였지만, 이적 소동으로 인해 인지도가 올라간 탓이었는지 마권 인기로는 단승 5.5배의 1번 인기였다. 2번 인기 스다 호크는 8.0배
[10]
이런 이유들이 시리우스 심볼리의 유럽 원정이 와다의 유럽 제패에 대한 야망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니혼야나기 마방이 싫어서 시리우스 심볼리를 유럽에 갖다 버렸다는 평가를 듣게 만들었다.
[11]
유럽 원정 14전중 5착 이내로 상금을 받아낸 경기가 9경기였다
[12]
이 대회의 우승마가 유럽 경마 사상 역대급의 강자였던
댄싱 브레이브였으므로 설령
심볼리 루돌프가 정상적으로 출주했더라도 승리를 기대하긴 힘들었다.
[13]
일부 말들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혀를 씹는 경우가 있다고 하는데, 일본에 돌아올 때까지 낫지 않았을 정도로 자주 혀를 씹었다는 뜻이다.
[14]
다이나 액트리스도 출주 제외는 안당했지만 완전히 달리려는 의지를 상실했었다는 기수의 증언이 있었다. 라이벌들을 경주도 하기 전에 다 골로 보내버리는 난동이었던 셈.
[15]
시리우스 심볼리 이외에도 '심볼리 목장의 비밀병기'라는 별명으로 불릴만큼 기대를 모았던 말 마테리얼도 마주 와다의 과도한 간섭 때문에 엉망이 되기도 했다.
[강착]
1착으로 들어왔으나 사행으로 실격당했다. 10착이란 표기는 레이스에 시리우스 심볼리를 포함해 10두가 출주했기 때문.
[17]
현 와카바 스테이크스(L)
[18]
약 2414m
[odds]
서양권에서 사용하는 배당 표기는 동아시아와 달리 원금을 제외하므로 값이 1만큼 작다.
[odds]
[21]
미국에서 생산된 아일랜드, 프랑스의 경주마. 암말임에도 아이리시 1,000 기니가 아닌 아이리시 2,000 기니를 도전해 우승하고, 이후 영국
챔피언 스테이크스 2연패를 비롯하여 통산 G1 9승을 달성했다. 1986년에
댄싱 브레이브와 3번 맞붙었으며, 댄싱 브레이브가 우승한 1986년 개선문상에도 출전했는데 3착으로 선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