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6 21:02:11

스웨덴의 핵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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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개발 연구를 진행했던 스웨덴의 국방연구소(FOA)

1. 개요2. 배경
2.1. 핵에너지의 평화적 사용
3. 전개4. 1950년대
4.1. 반핵운동의 시작
5. 본격적인 연구의 시작6. 평화 운동과 추가 연구7. 미국과의 협력 확대8. 플루토늄 계획9. 미국의 조사10. 계획되었던 핵무기의 형태
10.1. 핵공격 수단10.2. 핵무기 사용처
11. 스웨덴 국방부의 입장 변화12. 스웨덴 국민 여론의 악화13. 스웨덴의 군축 정책14. 핵개발의 종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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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Svenska kärnvapenprogrammet

과거 스웨덴에서 핵무기 개발을 목표로 1945년부터 1972년까지 진행되었던 핵무장 계획에 대해 서술한 문서.

2. 배경

1939년부터 이미 스웨덴은 스웨덴의 많은 물리학자들로부터 핵분열이 가능하다는 정보를 입수하였고, 이에 관한 연구가 다수 진행되었다. 1942년부터 스웨덴 국방부는 원자 무기(Atomvapen)와 우라늄 무기(Uranvapen)에 대한 보고를 받았지만 대부분 신빙성이 떨어지는 내용들이었다. 1941년 8월 27일 스톡홀름-티드닝겐(Stockholms-Tidningen)에 실린 기사에서는 "끔찍한 폭발 효과를 가진 5킬로톤 폭탄"을 언급하며 이 무기를 " 우라늄 폭탄"이라고 불렀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상공에서 원자 폭탄이 폭발했을 때부터 스웨덴은 핵무장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물론 이 이전부터 연합군이 스웨덴에 매장되어 있는 우라늄의 양에 관심을 보였기 때문에 스웨덴 정부에서는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다.

스웨덴은 국방력 증가를 위한 대대적인 연구는 1941년부터 시작되었으며, 이 당시에는 핵무기보단 재래식 무기 연구에 초점을 맞추었다. 1945년에 국방연구소가 설립되었을 때에는 제트 엔진, 로켓 기술, 그리고 레이더에 더욱 초점을 맞추었다.

1945년 8월, 히로시마 원폭이 전세계에 알려진 지 며칠 후에 스웨덴도 핵무기에 관심을 가지며 국방연구소에 이에 관한 조사를 지시한다. 1945년 말에 스웨덴은 미국 맨해튼 계획에 관해 보고서를 작성하게 된다.

처음부터 스웨덴은 새로운 무기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스웨덴은 핵무기는 재래식 무기와는 전혀 다른 것이며 현존하는 모든 무기보다 더 큰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깨달았다. 핵무기를 비윤리적으로 보는 시각은 1950년대부터 등장했으므로 스웨덴이 핵개발을 시작한 1945년에는 확립되지 않았다.

2.1. 핵에너지의 평화적 사용

무기로서의 원자폭탄과 핵에너지는 원자폭탄이 알려지자마자 대부분의 나라에서 엄청난 관심을 끌었다. 이와 동시에 스웨덴에서는 평화적 사용에 대한 즉각적인 논의도 시작되었다.

스웨덴에서의 군사적 응용에 대한 연구는 1945년 말 이전에 이미 시작되었으며, 스웨덴 정부 같은해 11월에 원자력 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이때부터 스웨덴에서는 군사적 목적과 발전 목적의 핵에너지 연구가 시작되었다. 군사적 연구의 많은 부분은 비밀에 부쳐졌다. 이러한 연구는 민간 및 군사 프로젝트를 병행하기 위한 가용 자원과 전문성이 부족했기 때문에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3. 전개

1945년 10월, 스웨덴의 국방연구소는 핵무기 연구에 대한 추가 보조금을 신청했다. 보조금의 대부분은 우라늄 생산에 초점이 맞춰졌고, 핵무기의 영향에 대한 계산이 진행되었다. 1946년 초, 연구소의 물리학 부서 내에 핵물리학 부서가 설립되었고, 1946년 중반까지 20명의 과학자들과 많은 외부 과학자들이 핵무기나 핵 에너지에 대한 연구에 참여했다. 1947년에는 원자력 위원회의 주도로 실험용 원자로를 건설하고 민간 및 군사적 필요를 위해 스웨덴에서 우라늄을 채굴하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1948년부터는 민간의 원자력 연구와 협력하기 시작하였다.

핵개발 1948년부터 실질적으로 시작하였다. 1948년에는 핵무기에 들어갈 원료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고, 조사의 핵심은 고농축 우라늄보다는 플루토늄을 기반으로 한 핵무기를 개발하라는 것이었다. 조사에는 스웨덴 핵개발 계획의 추정 시간 및 비용 조건도 포함되었다. 해당 보고서에 따르면, 시간은 핵무기 자체보다는 원자로 건설, 원자로 내의 원료 추출, 그리고 플루토늄 생산에 의해 좌우되었다.

스웨덴은 핵무기에 필요한 플루토늄을 얻기 위해 중수로 원자로를 건설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중수로를 짓기 위해 스웨덴은 우라늄, 중수, 흑연이 대량으로 필요했고, 무엇보다도 미국이 타국가의 핵개발을 방지하기 위해 도입한 수출규제의 영향을 받지 않고 획득해야 했다. 이후 스웨덴에서는 운이 좋게도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연료 생산을 위해 이용하기 시작한 알루미늄 셰일의 혼합물에서 상당한 양의 우라늄을 발견하였다.

당시의 스웨덴은 중수로 기술이 전무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이미 중수로 연구가 상당히 진행된 노르웨이에서 대부분의 기술을 수입해왔다. 당시에는 노르웨이도 핵개발을 시작했음에도 채굴 가능한 우라늄이 없었기 때문에 물물교환을 하자는 생각이었다. 중수로 문제가 해결되었음에도 여전히 스웨덴에게는 충분한 양의 플루토늄 생산이 핵개발 기간 전반에 걸쳐 핵심적인 기술적 문제로 남아있었다.

여담으로 당시 핵개발로 인해 스웨덴군과 국방연구소가 스웨덴에서 생산되는 우라늄을 거의 군사적으로 독점하여 민간 개발에 피해를 입혔으며, 이중 대부분이 플루토늄 생산에 사용되었다. 이때부터 군과 민간 사이에 핵 이해 상충의 발생하기 시작했다.

4. 1950년대

1949년 소련 핵개발에 이어 1953년에 수소 폭탄까지 개발에 성공하면서 핵 경쟁이 시작되었다. 이후 6.25 전쟁이 발발하고 미국이 대규모 핵보복 원칙을 채택하게 되면서 주요 전쟁 시 폭격기의 전진 기지와 상공 비행을 위한 지역으로서 북유럽 지역에 대한 강대국들의 전략적 관심이 증가하였다. 이는 스웨덴 국방부가 1954년 가을에 발표한 보고서에 반영되었으며, 군사 기술 개발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스웨덴은 이때부터 로봇 무기, 핵무기, 생화학 무기 등의 형태로 된 새로운 형태의 전쟁 무기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핵무기가 결정적인 중요성을 어디에 두었는지도 주목했다.

스웨덴은 이때 스웨덴이 새로운 무기에 대한 보호와 대책이 필요하며, 스웨덴 자체에 적합하고 가능한 것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인 덴마크 노르웨이와 달리 스웨덴은 어떤 강대국으로부터도 핵우산을 제공받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지적도 제기하였다. 결론적으로 스웨덴은 군사적 기술 개발과 전략적 상황의 평가와 결합하여 스웨덴의 핵무기 보유를 지지했다. 스웨덴 국방부는 스웨덴의 핵무기 획득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제시하지 않았지만, 공식적인 군사적 논의는 분명히 이 방향을 가리켰고 따라서 공공 영역에 있었다. 당시 스웨덴의 공군참모총장이었던 벵트 노르덴스키올드는 1952년에 이미 스웨덴의 핵무기 보유에 찬성하는 공개적인 입장을 취했지만, 이는 개인적인 입장으로 제시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큰 논쟁을 일으키지 않았다.

1954년 스웨덴 왕립 공과대학교 내에서 스웨덴 최초의 원자로인 R1 연구용 원자로가 가동되었고, 크바른토프의 우라늄 추출 공장은 계획한 생산 목표를 달성하였다. 1953년에는 플루토늄 기반 기존 60 kg 가량으로 추정되었던 핵무기의 임계 질량이 과대평가되었다는 것이 밝혀졌고 수치가 5~10 kg으로 수정되었다.

1955년 타게 엘란데르 내각은 민간 원자력에 대한 조사를 추진했고, 1956년에는 스웨덴이 원자력에 투자해야 하며 우라늄과 중수로를 기반으로 한 완전한 형태로 투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55년 11월에 스웨덴의 핵무기 도입 문제가 처음으로 논의되었다. 이 일은 국방부 장관 토르스텐 닐손의 주도로 일어났고, 당시에 외스텐 운덴, 군나르 스트렝, 울라 린드스트룀등이 핵개발에 반대하였다. 타게 엘란데르 사민당의 내분을 막기 위해 노력했고, 앞으로의 민간의 핵연구에 군이 지원하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며, 핵개발에 관련된 사항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1957년 스웨덴 육군은 스웨덴의 전술 핵무기 도입에 관해 긍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같은 해, 스웨덴 국방연구소는 스웨덴의 플루토늄 기반 핵폭탄 제조에 필요한 일정과 비용을 포함한 상세한 연구를 수행했다. 이것은 핵무기를 생산하기 위해 민간의 핵에너지 연구를 완전히 벗어나야 하는 것이었다. 플루토늄의 위험성 때문에 매우 복잡하고 고도로 보호되는 시설이 필요했던 플루토늄과 그 특성에 대한 연구와 많은 관련이 있었다.

1957년 스웨덴의 정치인들은 핵무기 문제를 스웨덴의 정치 논쟁의 일부로 만들었다. 개발 초기에 대부분의 정치인들과 언론은 주로 긍정적 입장이었지만, 사회민주당은 이로 인해 큰 내분을 겪었다. 이에 따라 1958년 스웨덴 정부는 1957년에 연구 자료들과 냉전 심화를 근거로 핵개발에 관련한 법안을 제출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명시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을 피하려고 했다.

4.1. 반핵운동의 시작

1956년 5월, 사민당 내의 여성 조직인 사회민주여성은 핵무기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는데, 당시에는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나 훗날 이는 1957년 언론에서의 격렬한 토론 활동의 출발점이 되었다. 당시 국방연구소 소장이 인터뷰에서 스웨덴이 1963~1964년에 핵무기를 충분히 완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말해 논쟁을 가속화하는 데 기여했다. 스웨덴의 핵개발 지지자들 중에는 다겐스 뉘헤테르의 편집장 헤르베르트 팅스텐과 전 국방장관 페르 에드빈 쾰트가 있었다. 훗날 온건당 당수 페르 알마르크는 스웨덴의 핵무기 옹호자이기도 했다. 핵무기 문제는 언론의 문화면에 광범위하게 다루어졌다. 1957년에는 스웨덴 핵무기 반대 청원도 시작되었는데, 95,000명이 서명하여 1958년 2월에 당시 총리였던 타게 엘란데르에게 넘겨졌다. 1958년 6월에는 스웨덴 원자폭탄 행동 그룹(AMSA)이 결성되었고, 1961년에는 핵무기 반대 운동(KMA)이 결성되었다.

5. 본격적인 연구의 시작

1958년 7월, 스웨덴 국방연구소는 두 가지 다른 연구를 제시했다.
  • "핵무기에 대한 보호와 방어에 관한 연구 (Forskningsprogram avseende skydd och försvar mot atomvapen)"
  • "핵폭탄 설계를 위한 기초 개발에 관한 연구 (Forskningsprogram för framtagande av underlag för konstruktion av atomladdningar)"

각 연구는 S-프로그램(S-programmet)과 L-프로그램(L-programmet)으로 불렸다.

L 프로그램의 초안 본질적으로 전년도에 수집된 정보를 갱신하는 것이었다. 반면 S-프로그램은 핵공격 가능성이 있는 전쟁에서 핵무기 없는 스웨덴의 방어를 위해 핵무기에 대한 지식 기반을 다지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러나 S프로그램은 전혀 다른 내용을 포함하고 있음에도 비용의 75%가 삭감된 것을 제외하면 L-프로그램과 동일/유사한 연구를 진행했다. S-프로그램은 핵무기 도입 목표와 사회민주당 정부의 양면성 모두 부합했다. 이러한 이유로 당시 스웨덴 정부는 스웨덴의 핵무기 개발 계획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거의 모든 연구 활동에 자금을 지원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1958년 가을, 다음해 예산안에 관한 토론에서 핵무기 도입을 찬성하던 많은 사민당 내 정치인들도 당내 분열 문제로 인해 핵개발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많은 정치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스웨덴 정부는 다음년도 예산안에 L-프로그램을 위한 자금을 포함하기로 결정했다.

6. 평화 운동과 추가 연구

1958년 11월 12일, 당시 총리였던 타게 엘란데르는 핵무기 문제에 대한 타협을 모색하기 위해 올로프 팔메를 대표로한 당내 원자력 위원회를 소집해 양측 지지자들과 군전문가들을 불러모았다. 엘란데르 총리는 핵문제로 당을 분열시키는 무릅쓰고 싶지 않았지만 친핵적인 입장을 취하는 경향이 있었다. 계속해서 유권자들을 잃은 사회민주당은 완강히 반핵 공산주의자들과 연합을 구축해야 했다.

팔메는 이날 발표한 보고서에서 스웨덴이 핵무기 도입 문제에서 어떤 방향으로든 스스로를 구속하지 않는 행동의 자유 노선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따라서 핵무기 도입 반대에 대한 양보로 핵무기 도입을 무기한 연기할 것을 제안했다. 동시에, 핵무기 연구를 계속함으로써 행동의 자유를 유지하기로 되어 있었고, 민간 핵 기술 프로그램이 몇 년 동안 군사적인 것과 병행되었기 때문에, 이것이 실질적인 지연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핵 지지자들에게 지적되었다. 따라서 1958년에 스웨덴 정부는 핵 무기화합물의 연구 및 개발을 금지했으나 핵무기에 대한 연구 활동은 계속되었다.

1959년, 엘란데르 총리와 스웨덴군 최고사령관 사이의 대화에서 엘란데르 총리는 강화된 국방 연구 프로그램이 탄두 설계와 관련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확인했다. 다만 그는 1963년으로 예상됐던 핵무기 생산에 대한 결정이 내려져야 하는 상황에서 이것이 핵무기 문제에 영향을 끼칠지는 매우 불확실하다고도 지적했다.

따라서 팔메는 장기적으로 양측을 모두 만족시키는 데 필요한 어려운 타협을 만들기보단 결정을 긴 시간동안 연기함으로써 당내의 분열을 피하려고 노력하였다. 이것은 거의 모든 핵무기 연구가 "방위 연구"와 "행동의 자유"라는 용어로 진행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고, 사회민주당 지도부와 정부는 공개 선언에 핵 반대자들의 노선을 부분적으로 포함시켰다. 핵 반대자들이 근본적으로 협력하면서 핵 반대 운동(AMSA)의 활동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스웨덴 평화 운동은 주요 핵보유국들의 핵무기 감축을 옹호하는 것을 넘어 핵보유국들의 핵무기 보유 자체를 반대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1961년 정부에서 이 문제가 다시 제기되었을 때, 엘란데르 총리는 자신이 공개적으로 발표하지 않았던 3-4년 전의 자신의 견해와 비교하여 자신은 이제 핵 프로그램에 대해 부정적인 방향으로 선회했다고 말했다. 앞으로 몇 년 안에 내려질 것으로 예상되었던 결정은 보류된 채로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연구는 계속되었고 행동의 자유 원칙은 온전했다. 엘란데르의 과학 고문 토르스텐 구스타프손은 연구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를 옹호하는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7. 미국과의 협력 확대

1956년 스웨덴의 원자력 발전 로드맵에 관한 결정에 따라, 민간의 핵 연구는 추진력을 얻어 군사 핵 프로그램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두 프로그램은 여러 가지 이유로 갈라졌다. 비록 민간 핵 연구의 핵심이엇던 아토메네르기사(Atoomenergi)가 핵개발에 참여하였지만, 주요 목표는 민간 에너지 공급에 실질적으로 유용/적합한 원자로를 가능한 빨리 개발하는 것이었고, 그 과정에서 바텐폴과 아세아와 같은 에너지 공급업체보다 앞서 있었던 터라 이들에게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는 데에 관심이 더 있었다. 1950년대 초, 스웨덴에서는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며 더욱 많은 정보에 접근 가능해졌으며, 나아가 원자력 발전에 관한 미국의 원자재 및 구성 요소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 대통령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1953년 12월 연설에서 평화를 위한 프로그램을 언급했다. 1955년 제네바에서 열린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국제 회의에서 이 프로그램은 공식적으로 출범하였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스웨덴은 미국으로부터 자체 생산에 비해 더 빠르고 저렴하게 원자재를 조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다만 미국은 이러한 원자재 접근을 위해서는 이들이 민간 목적으로만 사용된다는 포괄적인 보장이 필요로 했다.[39] 1955년 7월 1일, 핵물질에 관한 최초의 협정이 스웨덴과 미국 사이에 체결하였고, 1956년 1월 18일 원자력 분야의 민간 협력에 관한 두 번째 협정이 체결되었다. 그 결과 스웨덴은 이전에 기밀로 분류된 특정 물질에 접근할 수 있었고, 노르웨이보다 더욱 낮은 가격으로 농축 우라늄과 중수를 수입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해당 협정은 핵물질들이 핵무기의 생산이나 다른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되지 않을 것을 보장하도록 요구했다.

1957년에 아토메네르기사가 R3 원자로에 대해 발표한 안전조치는 핵무기 프로그램에 대한 도전을 암시했다. 아토메네르기사에 의해 설계된 원자로는 군사 프로그램에서 유용하게 사용되어야하는 유형이었지만 에너지 생산에 최적화된 탓에 플루토늄 생산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국방연구소가 선호하는 유형은 아니었다. 1959년부터 스웨덴은 란스타드에 핵발전소를 건설하기로 결정하였지만 국내 중수 공급은 감소했다. 따라서 원자로의 설계와 건설로 제한되었다.

8. 플루토늄 계획

민간 핵 프로그램이 핵무기의 도입보단 전력 공급을 위한 에너지를 추구하는 독자적인 방식으로 진행됨에 따라, 핵무기 생산 및 연구에 사용될 플루토늄을 확보하는 문제가 핵무기 프로그램의 가장 큰 기술적 문제로 대두되었다. 많은 연구 목적을 위해 플루토늄 239 외에 동위원소 플루토늄 240의 7% 이상을 포함하는 플루토늄으로 만들 수 있었고, 이러한 구성의 플루토늄은 군사적 운용에 최적화되지 않은 원자로에서 사용후핵연료를 재처리하여 얻을 수 있었다. 다만 이런 방식으로 플루토늄을 생산하는 것은 미국과 합의한 내용을 위반해야만 가능했다. 따라서 이는 미국과의 합의를 위반하지 않고 핵연료를 획득하는 문제였다.

1958년 7월, 아토메네르기와 FOA는 알루미늄 연료와 중수를 감속재로 사용하는 군사용 원자로가 민간 원자로를 사용하는 경우보다 생산 비용을 낮출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그러한 종류의 원자로는 상당한 투자가 필요할 것이고, 제안된 지하 위치 때문에 원자로를 건설하는 데 4.5년이 걸릴 것이다.

이 문제는 1957년부터 지하 시설에 플루토늄 생산을 위한 군사용 원자로 1~2기를 건설하고 운영하기 위한 연구로 이어졌다. 1958년 7월, 아토메네르기사와 국방연구소는 알루미늄 원료와 중수를 감속재로 사용하는 군사용 원자로가 민간 원자로를 사용하는 경우보다 생산 비용을 낮출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이러한 원자로에는 광범위한 투자가 필요하며, 제안된 암실 위치 때문에 원자로를 건설하는 데 최소 4.5년이 걸릴 것이 걸림돌이었다.

국내 원자재 공급에 차질이 빚어지면서 1959년 1960년 사이에 핵무기를 도입하려던 계획의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수정된 계획은 플루토늄을 공급을 감당할 수 있는 1~2개의 원자로와 우라늄 시설, 중수로, 그리고 재처리 시설을 포함했다. 이는 시간 및 비용 추정치의 급격한 증가로 이어졌다. 이 시설들은 1958년 작성된 S와 L 프로그램의 초안에 포함되지 않았고, S-나 L-프로그램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의 자금은 정부에 의해 승인된 확장 국방 연구 프로그램에 포함되지 않았던 것이었다. 1961년 스웨덴 국방부와 국방연구소의 상황 평가는 핵개발의 제한 요인은 플루토늄 공급뿐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1961년부터 국방부는 이로 인해 핵개발 일정이 연기되었다고 언급했다. 해당 계획에서 재처리 공장은 산내스(Sannäs)에 건설될 계획이었다.

여담으로 당시 스웨덴에 있었던 유일한 플루토늄은 연구 목적으로 영국으로부터 받은 100그램이 전부였다. 훗날 스웨덴이 국내 핵개발을 포기한 뒤 이 플로토늄은은 노르웨이 킬러 소재 원자력연구소(IFA)에 넘겨졌다.

9. 미국의 조사

1954년 스웨덴군이 스웨덴의 방위를 위해 핵무기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을 때, 스웨덴에게는 내부에서 핵무기를 자체 생산하는 것이 유일한 선택지는 아니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강대국들으로부터 소량의 핵무기를 구매하는 것도 옵션 중 하나로 고려되었고, 필요한 시간과 비용을 이유로 미국으로 핵무기를 구매한다는 마지막 선택지에 도달했다. 1954년부터 스웨덴은 미국으로부터 핵무기를 구매하기 위해 준비했다. 스웨덴은 당시 미국이 쉽게 핵무기를 스웨덴에 판매해주지도 않을 뿐더러,미국에는 핵무기의 수출을 금지하는 법안이 있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스웨덴은 북대서양조약기구의 회원국이 아니라는 사실과 관계 없이 미국으로부터 호의적인 대우를 받기를 원했다. 왜냐하면 스웨덴 정부에서는 만일 소련이 스웨덴을 비롯한 유럽을 침공한다면 미국이 스웨덴을 방어선으로써 관심을 보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당시 스웨덴의 국방연구소의 관계자는 미국의 특사와 접촉해 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였다. 1954년 11월 스웨덴 원자력 위원회는 1955년 4월 원자력 위원회의 루이스 스트라우스 제독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리고 나서 스웨덴은 약 25개 정도의 핵탄두를 구매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1957년 스웨덴의 대사였던 에릭 보헤만이 미국 국무부에 이 문제를 제기했고, 스웨덴 국방부는 스웨덴 장교들을 핵무기 사용 훈련에 보내는 것에 대해 문의했다. 보헤만은 또한 미국이 덴마크 노르웨이와 같은 국가들이 이미 핵탄두를 탑재할 수 있는 무기 시스템을 구매하는 것이 허용되었다고 언급했다. 비 NATO 국가로서 미국과 상호방위협정을 맺지 않았으며, 이는 미국법상 새로운 핵 협정을 고려해야 하는 요건이었기 때문에 미국은 이러한 스웨덴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미국은 스웨덴에게 이제껏 유지해온 비동맹 정책을 철회할 의향이 있다면 핵무기 관련 정보를 전달해줄 수 있고, 그렇지 아니하다면 더이상의 논의는 불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1959년 미국 국무부의 분석에 따르면, 미국은 원칙적으로 스웨덴이 요청한 핵무기를 스웨덴에게 제공하는데에 있어 스웨덴이 굳이 나토 회원국이 될 필요가 없지만 그럼에도 핵무기 제공를 위해선 이에 관해 최소한 스웨덴과 미국과 합의를 필요했고, 이는 스웨덴의 동맹의 자유, 즉 비동맹 중립 정책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언급되었다. 1960년 4월 6일,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는 미국이 스웨덴의 핵무기 보유을 지지해서는 안 되며, 스웨덴이 한정된 자원을 값비싼 핵무기 연구보다 재래식 무기에 투자하는 것이 소련에 대한 서방의 방어에 더 큰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여 스웨덴이 자체 개발을 포함한 스웨덴의 핵개발을 전혀 지원하지 않는 것이 미국의 방침이라고 결정했다.

실제로 1960년대에 스웨덴이 핵개발에 대한 입장을 결정하는 동안, 스웨덴 대표들은 미국 국방부와의 접촉을 통해 1960년대 후반, 미국의 일부 기밀에 접근했다. 이 기밀 정보들은 핵무기 전술, 정찰 요구사항, 핵물리학 자료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또한 8 킬로톤 가량의 파괴력을 가진 W7 핵탄두와 최대 40킬로톤의 파괴력을 가진 W31 핵탄두를 사용할 수 있는 MGR-1 어니스트 존 무기 시스템을 검토했다. 미국은 포병용으로 W48 155mm 포탄을 개발하여 0.072킬로톤의 효과를 냈다. 다만 스웨덴에서 이러한 소형 핵무기 도입에 관해 논의한 적은 없다.

10. 계획되었던 핵무기의 형태

당시 스웨덴에서는 Pu-239 플루토늄을 기반으로한 핵폭탄 제조를 계획했었다. 1955년경에 이러한 핵무기의 초안이 보다 구체적인 설계안으로 대체되었을 때, 첫번째 초안들 중 하나는 대략 400-500 kg의 무게와 약 35 cm의 직경을 가진 폭탄이었다. 1961~1962년에 진행된 연구에서 약 20 킬로톤의 폭발력을 가진 전술핵 100개를 도입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10.1. 핵공격 수단

핵무기 배치에 관한 군사 연구에서 스웨덴의 계획은 공격기를 통한 핵공격에 초점을 맞췄다. 전술 핵무기에 대한 계획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알려진 바로는 핵공격만을 위한 구체적인 항공기는 계획되지 않았다. 만일 핵개발이 계획대로 진행되었다면, 사브 32 란센을 사용하였을 것이다. 1970년대에 핵무기를 도입하기 위해서 수정한 계획안에서는 사브 37 비겐를 사용하였을 것으로 나와있다.

스웨덴은 핵탄두 탑재를 위한 수단으로 공격기에 이어 핵 어뢰뿐만 아니라 사거리 약 100km의 지대지 미사일을 사용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논의했다. 다만 스웨덴에서는 주로 항공기에서 투하하는 형태의 공격에만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이러한 대안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1957년부터 1959년까지 사브는 핵탄두를 탑재할 수 있도록 설계된 사거리 500km의 공격용 미사일인 《Robot 330》을 개발했다. 다만 이러한 미사일을 통한 공격 계획은 비용상의 이유로 중단되었다.

1950년대 1960년대에 개발된 스웨덴의 무기들 중에서도 반드카논 1, Robot 08 등이 핵공격용으로 개발되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이러한 주장들은 핵개발 연구가 기밀이었던 때부터 진행되어 왔다. A36 폭격기가 완성되었을 때 스웨덴 핵무기의 물리적인 형태에 대한 초안은 있었지만, A36 프로젝트는 1961-1962년에 핵개발 연구가 진행될 때에 사브 37 비겐 연구를 위해 이미 몇 년 전에 포기된 상태였음으로 A36 폭격기가 핵공격 용도를 위해 제작되지 않았다는 반론도 있다. 다만 해당 폭격기가 핵개발 자체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여겨져 왔고, 이는 핵공격만을 위한 용도로 설계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로봇 08 미사일과 관련하여 밝혀진 기밀 문서들은 해당 미사일이 핵공격 이외의 다른 목적으로 개발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지 않았다. 이러한 핵무장된 대함미사일과 핵어뢰는 주로 해군에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실제 교전 발생시 해상에서는 핵 공격으로 인한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해군 함대를 분산시킬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구경 155mm, 최대 사거리 25km의 스웨덴의 핵탄두 계획에 대한 주장은 훨씬 더 회의적으로 봐야 한다. 물론 이러한 155mm 구경의 핵탄두를 미국이, 152mm 구경의 탄두를 이미 소련이 개발했기 때문에 스웨덴은 이미 기술적으로는 개발이 가능했다. 다만 당시 이 구경의 유일한 미국의 핵탄두였던 W48은 훨씬 더 강력한 파괴력을 위해 더 많은 양의 플루토늄을 필요로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0.072 킬로톤밖에 산출되지 않았다. (미국은 203mm 구경과 280mm 구경의 포병에 대해 더 높은 전력을 사용했다.) 플루토늄 공급은 항상 스웨덴의 핵개발에 제한적인 요소였다. 당시 스웨덴은 비용 측면도 우려했기 때문에 플루토늄 생산량 감소와 추가적인 핵무기 생산 및 개발 비용을 고려하였다면 스웨덴이 하나의 핵미사일을 위해 다수의 공중 폭격용 핵폭탄을 포기했을 가능성은 낮다.

10.2. 핵무기 사용처

처음 핵개발을 시작할 당시에 스웨덴은 전략폭격기가 없었던 터라 핵공격 발생시 적국의 인구 밀집지역을 포함해 산업 기반시설 및 정치적 핵심 시설에 대한 타격 가능한 전략핵전력을 도입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따라서 스웨덴 정부는 그 대신에 스웨덴 정부는 핵전쟁이 발발할 경우, 스웨덴의 인접한 국가들의 군사적 요충지에 사용할 전술 핵무기를 개발하려고 했다. 이와 같은 목표로 설정된 대표적인 예는 발트해에 위치한 소련의 항구일 수 있고, 공군 기지일 수 있다.

항구에 관해선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항구가 민간인 거주지와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스웨덴의 핵무기가 사용된다면 민간인 피해도 막심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스웨덴 국방부는 비록 채택된 장치가 전략 핵무기가 아니라 전술 핵무기라고 하더라도 항구 등에 대한 핵무기 사용은 스웨덴에게 정치적으로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스웨덴의 전술 핵무기 보유로 예상되는 전략적 작전 효과는 주로 전쟁 억제 효과로, 핵무기 보유 자체가 스웨덴에 대한 공격을 억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스웨덴 정부는 스웨덴에 대한 공격에 대한 억제책으로 전술 핵무기를 보유하고자 했다.

스웨덴은 자국 핵 시설에 대한 기습공격으로 인한 핵 타격 능력 상실을 방지하기 위해 핵탄두를 대부분 지하 깊은 곳에 보관했고, 나머지는 공군 기지에 배치하는 시스템을 기획하였다. 당시에 스웨덴은 이러한 핵탄두 보관 체계를 아하스베루스 시스템(Ahasverussystemet)으로 명명하였고, 이는 핵공격을 받았을시 보복할 수 있는 능력을 일컫는 세컨드 스트라이크 능력과 비교될 수 있다.

11. 스웨덴 국방부의 입장 변화

1961년, 핵개발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던 스웨덴 국방부의 고위 간부들이 직책에서 물러난 이후로 스웨덴 국방부 내에서는 핵개발에 대한 의구심이 표명하기 시작했다. 이는 플루토늄 농축 문제를 포함해 플루토늄 공급의 차질로 일정이 지연되고 비용 추정치가 늘어난 점에 비추어 이해할 수 있다. 같은해, 스웨덴 공군참모총장이 처음으로 다른 국방부 참모들과 후임 참모총장에게 핵개발에 관한 회의적인 의견을 피력했다. 이후 결성된 핵폭발그룹(Kärnladdningsgruppen)에서 1961년 6월부터 1962년 2월까지 핵무기 보유의 결과와 군사적 가치에 대한 광범위한 분석을 수행했다. 핵개발에 회의적인 공구참모총장과 공군의 지속적인 압박을 통해, 1962년에 작성된 보고서는 1957년의 보고서보다 핵무기에 대해 더 양면적인 태도를 표명하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핵개발에 긍정적인 입장이었다.

스웨덴의 핵무기 도입 문제에 대해 공군참모총장을 비롯한 공군이이 의견을 바꾼 것이 역설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스웨덴 공군은 SAAB 37 비겐 인수에 직면해 있었고, 이와 같은 전면적인 핵개발이 비겐과 한정된 자원과 재원을 두고 경쟁할 것을 우려했다. 이 당시 스웨덴 공군은 원했던 점 중 하나는 핵무기 대신에 재래식 전투 병력의 증강이었다.[1] 이러한 이유로 당시 스웨덴의 공군참모총장이었던 스티그 노렌(Stig Norén)이 핵폭발그룹을 통해 조사하고자 했던 점 중 하나는 스웨덴이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기로 결정할 경우 어떤 재래식 전력을 도입할 수 있는지였다. 이은 1960년에 미국이 스웨덴에게 따를 것을 제안한 노선이기도 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제안이 스웨덴의 장교들의 입장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스웨덴 국방부가 핵무기 도입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닐스 스베드룬드(Nils Swedlund)의 스웨덴군 총사령관 자리가 핵문제에 있어 회의적인 입장이던 공군참모총장으로 교체하였다는 것은 스웨덴 국방부가 핵무기 대신 전투기를 우선시하기로 선택한 것과 맥락을 같이 했다. 일각에서는 스베드룬드의 후임자가 어느 쪽이든 강한 의견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교체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1965년에 작성된 보고서에서 스웨덴 정부는 스웨덴의 핵무장을 가정하는 것에서 한 발 더 물러섰다. 비록 여전히 일반적인 관점에서 핵무장를 옹호하고 있었지만, 핵개발 문제는 더 이상 국방 계획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들은 진행 중이었던 군축 협상의 결과로 스웨덴의 핵 보유가 금지될 위험이 임박했다고 느꼈다. 보고서는 또한 당시 스웨덴이 북대서양조약기구로 대표되는 제1세계 바르샤바 조약기구로 대표되는 제2세계 그 어느곳과도 군사 동맹을 맺지 않는 변방주의(Marginaldoktrinen)을 채택하고 있었기 때문에 적국이 자국을 공격한다 하더라도 제한적 수준일 것이라고 판단되어 핵무장에 비해 재래식 군대로 스웨덴을 방어한다는 개념을 더욱 긍정적으로 검토하였다.

12. 스웨덴 국민 여론의 악화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1980년 스웨덴 원자력 발전소 국민투표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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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개발에 대한 스웨덴 주요 정당들 사이의 논쟁은 1970년대 내내 격렬했다. 1973년, 당시에 집권당이었던 중앙당은 스웨덴의 원자력 발전 계획에 반대한다고 선언했고, 이에 따라 연정을 주도한 중앙당을 포함해 온건당, 자유당은 핵개발과 원전의 완전한 철폐를 목표로 하는 반핵 운동을 주도하게 되었다.

1979년 미국에서 발생한 스리마일 섬 원자력 발전소 사고는 스웨덴 내의 핵개발을 포함한 원자력의 안전성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떨어뜨렸다. 앞서 언급한 스웨덴의 이와 같은 핵 프로그램에 대한 정치적, 사회적 분열은 1980년 이 주제에 대한 국민투표로 이어졌다. 해당 국민투표는 구속력이 없는 "자문" 성격이었고, 원자력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에게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국민투표 결과, 스웨덴 국민들은 원자력 발전의 비중을 장기적으로 줄여나가자는 2번 선택지(39.1%)와 원자력 발전의 완전한 폐기를 주장한 3번 선택지(38.7%)를 크게 선호했으며 1번 선택지는 18.9%의 득표에 그쳐 도합 75.7%의 투표율을 보였다.

1980년 국민투표 스웨덴 의회 2010년까지 원자력 발전소를 단계적으로 폐쇄하고 더 이상의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해서는 안 된다는 결정을 내리도록 유도했다. 이 결정으로 스웨덴 정부는 국가적인 탈원전을 승인한 첫번째 국가가 되었다.

13. 스웨덴의 군축 정책

유엔 내에서 스웨덴은 이미 1950년대 후반, 당시 외무장관이었던 외스텐 운덴(Östen Undén)을 통해 핵확산금지조약을 지지하는 뜻을 밝혔다. 그 이후 1962년부터 스웨덴은 국제 군축 협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스웨덴 정부는 공격적인 핵무기 연구 활동을 중단하기로 결정하고 핵무기 관련 연구와 활동을 규제하기 위한 국제적인 법적 틀을 만드는 것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북대서양 조약기구 바르샤바 조약기구 사이에 있었던 협상은 1960년에 시작되었지만 결국 1961년에 결렬되었다. 다만 1961년 가을 유엔 총회에서 협상을 재개하고 스웨덴을 포함한 중립국/비동맹국 8개국과 협상을 확대하기로 결정했다. 같은해 12월 4일, 유엔 총회는 스웨덴의 제안에 따라 군축에 합의한 유엔 총회 결의안 1664호를 채택하였다.

1962년 3월, 스웨덴은 오늘날의 군축 회의의 전신인 18개국 군축 위원회의 회원국인 다른 중립국 7개국에 가입했다. 1968년, 스웨덴은 최종적으로 핵확산금지조약에 가입하며 핵개발을 중단하고 더이상의 핵확산을 반대한다고 공개적으로 약속했다. NPT에 가입한 직후 스웨덴은 NPT의 규정에 따라 안전조치 적용없는 핵 물질 및 장비의 비보유국 수출 금지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설립된 수출통제체제인 쟁거위원회(ZC)의 창립 멤버가 되었다. 위원회는 "원천 또는 특수 핵분열 물질"과 "핵분열 물질의 처리, 사용 또는 생산을 위해 특별히 설계되거나 준비된 장비 또는 물질"의 "트리거 목록(Trigger list)"을 작성했다. 이후에도 스웨덴은 NPT 가입국이 아닌 국가들에 대한 품목들의 수출을 통제할 새로운 협정을 적극적으로 주도해왔다.

1962년 8월, 미국, 소련, 그리고 영국은 대기권, 우주, 수중에서의 모든 핵실험을 금지하기로 합의했다. 이러한 합의는 이 3개국에만 그치지 않고 세계의 다른 나라에게도 강요되었고, 스웨덴 정부는 행동의 자유가 제한됨에도 불구하고 해당 조약에 서명하기로 결정했다. 다만 지하에서의 핵실험은 금지되지 않았다.

1963년에 포괄적 핵실험 금지 조약(CTBT)이 발효된 후, 스웨덴 국방연구소는 조약 준수를 위해 지진학 시설을 건설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스웨덴 협상가들은 특히 스웨덴의 행동의 자유 원칙을 고려하여 이와 같은 핵 비확산 문제에 대해 수년간 침묵했다. 1965년까지 이들은 스웨덴 정부로 부터 이 문제를 제기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다만 1966년 초에 상황이 바뀌고, 1966년 3월에 스웨덴 국방부 차관이었던 칼 프리티오프손(Karl Frithiofson)이 스웨덴 왕립 군사과학원 앞에서 스웨덴은 핵개발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고 연설을 하기에 이른다.

이와 같은 입장 변화의 대표적인 요인은 스웨덴 내에서 핵개발을 수용하는 것이 점점 어려지는 것과 미래 전쟁이 본질적으로 핵전쟁이 아닌 재래식 전쟁이 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었던 것, 그리고 스웨덴이 미국의 핵우산에 의해 보호받고 있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스웨덴 정부와 국방부는 여전히 스웨덴이 NPT에 가입하면 안보 상황이 악화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이런 저런 반대에도 스웨덴은 결국 1968년 핵확산금지조약에 가입한다. 스웨덴은 1968년 8월 19일 서독의 뒤를 이은 가입국가였다.

14. 핵개발의 종식

1968년에 스웨덴이 핵확산금지조약에 가입하면서 스웨덴 국방연구소에서의 모든 핵개발 연구가 단계적으로 중단되기 시작했다. 국방연구소의 핵무기 연구 중단는 NPT 가입 이전인 1967년에 이미 시작되어 다른 국방 연구로 전환되고 있었다. 1968년부터는 남은 핵 관련 연구가 안보 문제에 집중되었고, 1972년에는 핵개발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모든 연구가 완전히 폐기되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르스비크(Ursvik)의 플루토늄 실험실이 해체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많은 국가들의 평가에 따르면 스웨덴의 핵역량은 매우 높은 수준으로 구축되었고, 핵개발이 종료된 시점에서는 이미 핵실험을 위한 모든 준비가 마무리된 상태였다고 한다.
[1] 이는 소련과 중국도 겪었던 문제로, 더 나은 핵무기와 미사일의 도입은 공군이든 육군이든 재래식 전력의 필요성과 가용자원을 감소시키며, 이는 차후 군 내부 정치에서 해당 조직을 불리하게 만들 요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