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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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末元初
1. 개요
몽골-남송 전쟁으로 인해 중원의 왕조가 송나라에서 원나라로 교체된 시기를 말하며, 송원교체기(宋元交替期)라고 부르기도 한다. 1234년 남송이 화북을 공격한 단평의 입락 사건부터 1276년 남송의 멸망 또는 1279년 애산 해전까지를 일컫는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원나라는 100년 가까이[1] 중국을 통치하게 되었다.2. 경과
2.1. 배경
960년에 진교병변으로 건국된 송나라( 북송)는 979년 오대십국시대를 종식시키고 대륙을 통일했으나 취약한 군사력으로 거란족의 요나라와 당항족(탕구트족)의 서하 등 북방민족에게 압박을 받았으며, 1115년 여진족 완안부가 금나라를 건국하자 금과 손을 잡고(해상의 맹) 요나라를 멸망시켰다. 하지만 1126년 북송은 곧바로 금 태종의 공격을 받아 화북을 잃고(정강의 변) 남쪽으로 도피하여 남송을 세웠고 금나라와 대립했다(제2차 남북조시대).1206년 태조 칭기즈 칸이 몽골 초원의 튀르크•몽골 제부족들을 통합하여 몽골 제국(예케 몽골 울루스)을 세우고, 1211년 금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하여 그해 8월 야호령 대전과 10월 회하보 대전에서 금군의 주력을 대파하고, 1227년 서하를 멸망시키며 탕구트족을 절멸시켰다. 1232년 2월 삼봉산 대전에서 몽골군의 툴루이는 금군의 마지막 숨통을 끊었으며, 1234년 2월 채주 공방전에서 승리해 금 애종을 자살하게 하고 금나라를 완전히 멸망시키면서 다음 타깃으로 남송을 노렸다.
2.2. 몽골-남송 전쟁의 시작
1234년 금나라가 멸망하자 남송은 북송 시절의 고토를 회복하기 위해 화북을 공격했고( 단평의 입락), 이것이 몽골 제국의 분노를 사 몽골이 남송을 공격하여 몽골-남송 전쟁이 발발했다.2.3. 제2대 태종 오고타이 칸의 침공
1235년 몽골의 오고타이 칸이 남송을 침공하여 서부의 성도와 중부의 양양을 함락시켰으나 명장 맹공의 활약으로 격퇴되었고, 결국 1241년 오고타이 칸이 붕어하자 몽골군은 후퇴했다.2.4. 제4대 헌종 몽케 칸의 침공
1258년 몽케 칸이 다시 남송을 공격했으나 사천 조어성에서 맹공의 부장 왕견의 맹렬한 저항으로 막혔고, 1259년 몽케 칸이 붕어하면서 몽골군이 물러났다. 이후 쿠빌라이와 아리크부카 형제 사이에 대칸위를 둘러싼 툴루이 내전이 벌어졌고 쿠빌라이가 승리했다.2.5. 제5대 세조 쿠빌라이 칸의 침공
1267년 쿠빌라이 칸이 세 번째로 남송을 침공했는데, 이번엔 예전의 실패를 거울삼아 남송의 요새 지역을 우회하고 거점지역인 양양과 번성을 먼저 공략하기로 결정했다.2.5.1. 양양 공방전
1267년 양양에 도착한 몽골군은 양양성을 직접 공격하지 않고 성의 주변을 막아 양양성의 보급을 차단했으나, 남송군도 여문덕, 여문환 형제의 지휘하에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격렬하게 저항했기 때문에 무려 6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1273년이 되어서야 몽골군은 양양성을 간신히 함락시켰다. 이후 어쩔 수 없이 등 떠밀린 남송의 재상 가사도는 주력이었던 130,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정가주(丁家洲) 대전에서 몽골군에 맞서 최후의 발악을 벌였으나 가사도의 부관 하귀의 실책과 손호신의 도주 때문에 참패했다. 이로서 남송의 멸망이 사실상 확정되었다.2.5.2. 임안 함락
군세를 이끌던 권신 가사도가 실각하여 유배를 가던 도중 장주에서 독살을 당하고 몇개월이 지난 1276년, 원나라의 명장 바린 바얀이 남송의 수도 임안을 함락시켜 공제의 항복을 받아내고[2] 대도로 압송했다. 이후 1276년 회서를 지키던 하귀는 원에 투항했지만 이정지와 그 부장 강재가 양주 지역에서 장렬한 투쟁을 벌이다가 내부의 배신으로 인해 실패하고 처형당한다. 그 후 남송의 남은 유 신 들과 황족들, 백성들이 망명정부를 만들고 애산 해전때까지 중국 남부 각지를 떠돌아 다니며 처절한 항전을 수행하게 되었다.2.5.3. 애산 해전
임안이 함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송의 신하들과[3] 백성들은 1279년 애산에서 최후의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했고, 애산 해전의 패배로 남송은 완전히 멸망하고 원나라가 중원을 재패하게 되었다.3. 영향
3.1. 중국
중국 역사상, 이전과 다르게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중국 전역의 한족들이 이민족의 통치를 받게 되었으며[4] 전례없는 가혹한 통치와 민족적인 차별을 받게 되었다.[5] 한족들은 4대 계급[6] 중 최하 계급인 남인에 속하게 되어 몽골인을 부양해야 했으며 반란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무기는 물론 쇠붙이 하나도 지니지 못했고 초야권으로 성적 자유권마저 박탈당했다.다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원나라의 초야권은 허구 및 왜곡되었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결국 원나라는 홍건적의 난과 같은 한족들의 반란 탓에 채 100년도 지나지 않아 커다란 위기를 맞게 되고, 끝내 그 한족 세력 중 하나였던 주원장에 의해 수도였던 대도가 함락되면서 몽골 고원으로 달아나고 만다.
한편 송원교체기는 이후에 건국된 중원 왕조에게 큰 교훈을 주었다. 원나라 이후 성립된 명나라는 북송과 남송의 교훈을 참고해 난징과 강남(중국)에 많은 물자를 비축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으나, 청나라의 침입으로 성립된 남명 왕조는 내부 분열 등의 문제로 허무하게 무너져버렸고, 명나라 이후 건국된 청나라는 원나라가 가혹한 한족 통치로 일찍 무너졌던 사례를 교훈삼아 유화책을 적절히 병행하여 중원을 200년 넘도록 통치할 수 있었다.
3.2. 한반도
고려 역시 1231년부터 시작된 몽골의 6차례에 걸친 침공으로 많은 피해를 보았으며 무오정변(1258. 3)으로 최씨 세습 무신정권을 무너뜨린 제23대 고종이 1259년 결국 몽골의 쿠빌라이에게 항복했다. 남송과는 달리 고려는 멸망하지 않고 국체를 보존했지만(세조구제, 불개토풍) 부마(쿠르겐)국이 되어 대칸의 많은 간섭을 받게 되었다. 고려는 제25대 충렬왕때 원 세조의 두 차례에 걸친 일본 원정을 위해 수많은 전함을 건조해야 했으며, 많은 고려 여성들이 공녀로 끌려갔고, 원나라의 권세를 등에 업은 부원배와 권문세족들의 횡포가 극심해져 백성들이 많은 피해를 보았다. 이러한 원 간섭기에 대한 반발로 제31대 공민왕때 친명파인 신진사대부가 등장했고, 이후 이들은 신흥 무장 세력이었던 이성계와 손을 잡고 위화도 회군(1388. 5)과 토지 개혁을 거쳐 조선을 건국하게 되었다(1392. 8).4. 사건 목록
5. 관련문서
[1]
정확히는
원 세조가 원나라를 건국한 해인 1271년부터
원 혜종이 대도를 버리고 북쪽으로 도주한 해인 1368년까지인 97년 정도이다.
[2]
정확히는 남송의 태황태후인
수화성복태후 사씨가 공제의 이름으로 대리 항복하였다. 당시 공제는 5세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3]
남송의 마지막 재상
진의중과 이정지,
장세걸 등 여러 군인들,
문천상,
육수부, 전 왕조인 후주의 시씨 일족들이 끝까지 항전했다.
[4]
이후에도 한족들은 만주족의
청나라에게 완전 지배를 받긴 했으나 한족의 수가 너무 많은 관계로 청나라가 후반으로 갈수록 한족의 문화를 점점 받아들이기에 몽골의 지배와는 비교가 안된다.
[5]
또다른 통일왕조인
수나라와
당나라도 이민족인
선비족 출신이 건국한 나라였지만 스스로를 한족 왕조라 부를만큼 한족화된 상태였기 때문에 한족들이 차별을 받을 이유는 없었다.
[6]
몽골인,
색목인, 한인, 남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