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셉티미우스 세베루스/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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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
1.1. 즉위 전까지의 삶
1.1.1. 출신 가문과 부모 이야기1.1.2. 유년기, 청년기1.1.3. 장년기: 출세와 율리아 돔나와의 재혼
1.2. 황제
1.2.1. 황제 참칭과 로마 진군1.2.2. 첫번째 경쟁자 니게르와 1차 파르티아 전쟁1.2.3. 단독 황제 등극과 네르바-안토니누스 계보 참칭1.2.4. 루그두눔 전투와 클로디우스 알비누스 제거1.2.5. 정적 숙청1.2.6. 원로원의 위상 하락과 커지는 군대의 힘1.2.7. 제2차 파르티아 전쟁1.2.8. 후계 문제1.2.9. 말년의 칼레도니아 원정과 사망

1. 생애

파일:제밀라 알제리 14.jpg
알제리 제밀라 유적 박물관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두상

1.1. 즉위 전까지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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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고향 렙티스 마그나 유적지.[1]

'아프리카' 출신인 까닭에 이 황제가 흑인 내지 흑백혼혈이라는 주장이 있다. 로마 제국의 북아프리카 해안 일대에 흑인이나 흑백혼혈인이 살고 있었고, 이들 중 기사계급인 이들도 있었던 것이 그 증거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당시 로마 제국에서 '아시아'라는 말은 오늘날의 튀르키예를 일컫는 말이었고, '아프리카'라는 말은 오늘날의 알제리와 튀니지를 일컫는 말로, 아프리카 대륙의 내륙 자체를 뜻하거나 아프리카 대륙의 내륙에 많은 흑인종 자체를 지칭하는 표현은 아니었다. 또 로마인이 말하고 기록했던 북아프리카인들은 계통상 대부분이 백인이었다. 실제 흑인이나 흑백혼혈인들은 북아프리카에서도 모리타니와 이집트 남부 수단 등지에 집중되어 산다. 또 로마에서 북아프리카 해안 일대를 뜻하는 용어였던 푸닉 지방과 그 옆의 마우레타니아 지방은 애초부터 베르베르인을 비롯한 이들이 많이 살았고, 카르타고를 세운 페니키아 사람 등은 흑인이나 흑백혼혈이 아니었다.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부계 조상 중 페니키아계 카르타고인이 있었다고 한들, 본인과 그 일가는 당대의 증언 그대로 전형적인 이탈리아계 이주민의 직계 후손이었다. 세베루스를 인종적으로 볼 때도, 당시 아프리카 속주의 현지 주민들은 유대인과 조상이 같은 페니키아계 셈족의 피가 일부 흐르는 이탈리아와 페니키아 혼혈인들이거나, 부모 모두 이탈리아계 혈통이 아주 짙은 사람들이었고, 그 조상들 모두 당연히 백인이었다. 영화배우 샤이아 라보프 제이크 질렌할이 흑인일리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실제 남아 있는 Severan Tondo의 묘사를 보면, 이목구비 모두 전형적인 이탈리아 백인의 모습임이 확인된다. 다만,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늘 야외 생활을 오래한 까닭에, 아랍계인 황후 율리아 돔나나 아들 카라칼라보다는 눈에 띄게 어두운 피부색을 가지고 있었다.

1.1.1. 출신 가문과 부모 이야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북아프리카 속주의 항구도시인 렙티스 마그나(Leptis Magna, 오늘날 리비아에 위치)에서, 146년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와 풀비아 피아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모 모두 이탈리아계 로마인으로 기사계급이었으며, 외가인 풀비우스 가문은 기원전 2세기 초 무렵에 이탈리아에서 푸닉 지방의 트리폴리타니아로 건너온 뒤 순수 이탈리아 혈통을 보존한 집안이었다. 한편 친가인 셉티미우스 가문은 세베루스의 아버지 조상들 중 한 명이 이탈리아인과 푸닉인(페니키아계 카르타고인)의 혼혈이었지만, 전형적인 이탈리아 혈통의 최상류 기사계급 가문이었다. 세베루스의 집안은 조부 대부터 렙티스 일대에서 부와 명예를 가진 최상류층으로 유명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일반적인 속주 태생의 기사계급과는 거리가 먼, 상당히 부유한 기사계급 출신으로, 직계 고조부의 시절부터 이미 푸닉 지방에 기반한 최상류 기사계급 가문으로 중앙 정계에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고향은 상술한 그대로 서기 2세기의 하드리아누스 시대부터 로마 원로원 내에서 부와 권력을 차지한 북아프리카 속주들 중 동쪽 일대인 트리폴리타니아 속주에 있는 이탈리아 이주민의 식민도시 렙티스였다. 세베루스의 고향인 트리폴리타니아 속주는 아프리카 속주 다음으로 푸닉에서 부유했고, 고향 렙티스는 푸닉 지방에서 이탈리아와 그리스, 아나톨리아, 시리아 지방으로 생산물을 수출하는 대표적인 항구 도시였다.

흔히 세베루스 황제의 성씨는 '세베루스'로 알려져 있다. 왜냐하면 그와 그의 일가가 로마 제국을 통치하던 중 세베루스를 제호에 넣어 사용했기 때문이다. 허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서 씨족 이름이라고 말하는 '노멘'은 셉티미우스였으며, 그의 성씨로 흔히 알려진 세베루스는 그의 노멘 뒤에 붙은 '코그노멘'(가문명)으로 가문 이름들 중 하나였다. 즉, 그의 부계는 셉티미우스 씨족의 지파 중 하나였던 세베루스 가문이었다.

로마사에 관심 있는 이들이 생소하게 들리는 것처럼 세베루스 황제의 씨족명인 '셉티미우스'는 이탈리아 반도와 로마 시 내의 로마인들에게는 매우 생소한 희성이었다. 그 어원은 로마인들이 많이 애용하지 않은 개인 이름('프라이노멘')이었던 '셉티무스'에서 파생되었다. 이 가문이 로마 역사에서 처음 등장한 것은 공화정 말기 형사재판에서 판사를 맡은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스카이볼라가 처음이며, 그 다음으로 등장한 인물은 폼페이우스를 이집트에서 배신하고 죽인 백인대장 셉티미우스였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등장하는 유명한 인물은 아우구스투스 사후 게르마니아에서 벌어진 반(反) 티베리우스 항명사건 당시, 폭도로 변한 부하들 앞에서 목숨을 걸고,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에 대한 모욕을 막으려다가 암살당한 수석 백인대장 셉티미우스였다. 이 밖에도 네로의 악랄한 근위대장이었던 가이우스 님피디우스 사비누스 네로가 자살한 후 갈바가 아직 로마에 입성하지 않았을 때 "나는 사실 가이우스(통칭: 칼리굴라) 황제의 사생아다"라며 반란을 유도할 당시 그 주장이 거짓말인 것을 밝혀내 내란의 위기를 막아낸 근위대의 백인대장 셉티미우스도 이 가문 내에서 유명했다.

그러나 여러 셉티미우스 가문 사람 중 원로원 의원을 지낸 이는 기원전 74년 치안판사를 지낸 셉티미우스 스카이볼라 정도라고 하며, 그 다음으로 유명한 이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친척어른인 전직집정관 셉티미우스 아페르 형제와, 포에니 전쟁 이전까지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먼 친척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라고 한다. 다만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세베루스 가문이나 노멘(성씨)이 페트로니우스 내지 디디우스인 까닭에, 율리아누스의 모계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일가끼리 친척이라는 말도 있고[2][3] 아예 남남이나 지연도 있는데다 서로 존중해온 사이라는 설도 있다. 어쨌든 세베루스 황제의 본가인 셉티미우스 가문은 공화정 말이 돼서야 역사에 처음 등장한 평민 가문으로, 백인대장, 대대장을 배출해왔고 그 숫자도 많지 않았던 평민들이었다. 따라서 본국 이탈리아 내에서는 예전의 플라비우스 왕조처럼 수도 로마와 본국 이탈리아 내 로마인들에게 무척 생소한 성씨인데다 유명한 인물도 많이 없었다. 하지만 로마 제국 전체로 놓고 보면, 이야기는 살짝 달라지게 된다. 왜냐하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를 배출한 셉티미우스 씨족 내 세베루스 가문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때부터 부유한 기사계급 최상류층으로 이름을 날렸기 때문이다.

포에니 전쟁 후 풍요로운 푸닉 지방으로 건너간 셉티미우스 가문은 옛 카르타고에 정착해, 렙티스 마그나에 자리잡고 가세를 넓혔다. 그들이 바로 "엄격한 사람"을 뜻하는 세베루스와 "야생 멧돼지"라는 뜻을 가진 아페르, "트라키아의 게티족"을 애칭으로 부른 게타를 번갈아 코그노멘으로 사용한 세베루스 가문이다. 이 집안은 일찍부터 세베루스 가문으로 더 많이 불렸는데, 본국에 남은 종가집이 여전히 무명의 쌩평민 가문인 것과 달리 부유하기로 이름난 푸닉 지방에서도 한 손에 꼽히는 최상류 기사계급으로 잘 나갔다. 즉, 이주 가문이 본국 내 셉티미우스 가문 사람들보다 더 잘나가게 된 셈인데, 이는 당시 로마 사회를 생각해보면 매우 이례적인 케이스였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셉티미우스를 성씨로 쓰는 로마인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마지막 후계자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암살 이후 로마사에서 보이지 않는다.[4]

세베루스의 가계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아버지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는 세베루스의 고향 렙티스 마그나 일대에서 매우 부유하고 유력한 기사계급으로, 아들 세베루스가 제위에 오르기 전부터 상당한 교양인이었던 것이 최근 렙티스 마그나와 로마의 옛 아프리카 속주 일대 비문들에서 확인되고 있다. 이는 세베루스의 조부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도 마찬가지였는데, 세베루스의 조부의 경우 트라야누스 시대동안 푸닉 지방의 로마 정부 행정관과 치안판사로 근무했고, 그의 경력은 무려 플라비우스 왕조 아래에서 이미 승승장구한 것이 확인된다고 한다. 따라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집안은 일찍부터 부유하기로 이름난 푸닉 일대에서도, 손꼽히는 부유한 기사계급이었는데, 조부 루키우스의 형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셉티미우스 아페르 일가의 경우에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그의 형 게타가 원로원에 입성하기 전부터 집정관을 연임하고 로마 귀족 반열에 오른 상당히 이름난 푸닉 지방 출신의 원로원 귀족집안을 이뤘다. 더군다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조상 중 이탈리아에 남은 조상들까지 계속 올라가면 세베루스의 제위경쟁자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와도 연결됐다.[5] 즉, 이탈리아 혈통의 로마인이었는데, 세베루스의 직계 조상 중에는 카르타고 사람도 있었다.

모계의 경우에는 본국 이탈리아 혈통이 북아프리카 일대에서 오랫동안 이어진 집안으로, 고대 로마의 유명한 씨족 가문인 풀비우스 가문이었다. 이런 까닭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외가쪽 친척들이 더 유명한 사람들이 많았으며, 그의 외사촌으로는 동향 친구이자 최측근이며 사돈관계를 맺게 된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우스가 있었다.

이런 부모의 가계와 혈통 배경처럼, 세베루스의 첫 아내 파카 마르키아나(Pacca Marciana) 역시 렙티스 출신의 이탈리아 혈통 로마인이다. 그녀는 세베루스처럼 기원전 2세기 무렵 조상이 이탈리아로 건너가 최상류 기사계급이었던 집안 출신인데, 남편 세베루스가 즉위하기 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그녀 친정 중 세베루스 아래에서 권력을 쥔 사람이 없어 더 이상의 이야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1.1.2. 유년기, 청년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부모 모두 부유한 푸닉 지방에서도 최상류 기사계급이고, 본인이 태어나기 전부터 할아버지의 사촌, 아버지의 당숙과 육촌 형제, 아버지의 사촌, 본인의 삼촌과 사촌 형제 모두 이탈리아로 재이주 후 원로원에 입성한 배경을 두고 있었다. 직계 조상과 친척들이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시대부터 두 황제의 지지자였고, 푸닉에서도 직계 조상들이 치안판사, 변호사, 사업가로 이름을 날린 까닭에, 중앙정계와 푸닉 지방의 거의 대부분 이탈리아 최상류 가문들과 두루 친인척 관계였다. 따라서 세베루스는 바로 위의 형 셉티미우스 게타와 함께 일찍부터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사촌들이 집정관직을 맡는 것을 보고, 그들과 사촌들이 이탈리아로 건너간 다음 원로원 의원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하는 길을 따라 갔다.

당시 세베루스의 집안은 트리폴리타니아 속주를 기반 삼아 렙티스에 거주하면서, 푸닉의 아프리카 속주와 본국 이탈리아에 있는 친인척들과 두루 교류했다. 하지만 할아버지, 아버지 모두 푸닉 지방에서 활약했고, 외가 역시 푸닉 지방에서만 활동해, 일찍이 이탈리아로 이주해 정착한 숙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아페르 등처럼 안토니누스 피우스 시절 두 명의 집정관을 배출 후 로마 귀족에 편입된 상태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숙부와 오촌 당숙, 육촌 형제들이 먼저 이탈리아로 이주 후 푸닉에서부터 쌓은 막대한 재력과 명성을 기반으로 원로원에 입성한 것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형제가 이탈리아로 건너가기 전부터 원로원 의원이 될 추천서만 황제에게 가면 의석은 따놓은 당상이 될 만큼 큰 힘이 됐다. 그래서 세베루스는 형 셉티미우스 게타와 함께, 고향에서 일찌감치 이탈리아 이주를 염두에 두고 법률가, 웅변가에게 필요한 학문 공부를 하고, 친인척의 도움 아래에서 푸닉 지방 안에서 웅변 활동을 실습했다. 그러다가 조상들이 살던 이탈리아로 건너간 친척들의 도움 아래, 세베루스 형제는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절부터 이탈리아로 재이주해 거주 중인 푸닉 출신 로마 귀족 가문들과 교류했다. 이때 세베루스 형제가 로마 사회의 최상류층까지 오르도록 후원하고, 푸닉 지방 귀족 가문들과 친분을 쌓도록 해준 이는 삼촌과 사촌형들이었다. 이들은 세베루스 형제가 성년식을 치르자마자 원로원 입성을 돕고자 황제와 황제 친구들에게 지속적으로 추천서를 넣어줬고, 세베루스의 유학 준비 등도 도왔다. 또 원로원 입성 이후에도 정치적, 사회적 위기 순간마다 그를 보호해줬다.

푸닉 지방에서 살았던 시절,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영리하고, 비상한 머리로 주목을 받았다. 대개의 아프리카 속주 태생의 카르타고 혼혈 로마인들과 아프리카 속주에 오래 전 정착한 이탈리아 혈통의 로마인들이 그렇듯, 그 역시 라틴어와 헬라어와 페니키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하지만 그가 구사하는 라틴어와 헬라어에는 당시 북아프리카 특유의 페니키아어식 억양이 배어있었다. 페니키아어에는 /s/ 발음이 없고 다 /ʃ/로 읽기 때문에 /ʃ/가 없고 /s/만 있는 라틴어와 헬라어로는 발음이 튀는 현상이 있었다는 얘기인데, 이 부분은 세베루스의 웅변술이 뛰어나고 매우 영리해도, 고상한 발음이나 로마와 이탈리아에서 사용된 전형적인 라틴어 발음을 선호한 귀족들에게 세베루스가 놀림감이 된 이유가 됐다. 그래서 세베루스는 일찍부터 출세를 위해 푸닉 사투리로 불린 라틴어 발음을 고치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다. 하지만 다른 지역과 달리 푸닉 지방 출신 로마인은 푸닉 억양을 고치기 어려워 했고, 세베루스 역시 비슷해, 그는 로마에 간 뒤로도 죽을 때까지 이 사투리를 고치지 못했다. 그 결과, 세베루스는 평생동안 명문가 출신 원로원 중진들에게 이 부분이 조롱거리 내지 비판 소재가 됐고, 이는 세베루스에게 트라우마가 됐다.

그래도 그가 태어나고 자란 푸닉 지방은 당대 최고의 교육자 프론토를 비롯한 수재들이 즐비한 만큼, 세베루스의 가정교사들 역시 수준이 높았다. 그래서 그는 당대 기준으로도 상류층의 고등 교육을 충실히 받아서 수준높은 라틴어와 헬라어를 구사할 수 있었으며, 풍부한 교양과 명석함을 갖춘 인물로 성장했다.

젊은 시절 세베루스는 17살 무렵 웅변 실력을 갈고 닦아 첫 공개웅변을 하기도 했으며, 성년식 이후 로마로 이주한 뒤에는 그 재능을 살려 로마에 변호사 사무실을 열고, 풍부한 법학 지식과 수사학, 법률학을 바탕으로 법률가로도 활동했다. 그러다가 그는 변호사 활동만으로 출세를 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원로원 의원이 된 뒤 인맥을 쌓고 교류할 인사들이 많은 제국 동부의 아카이아 지방으로 눈을 돌렸다. 세베루스는 그래서 로마 내 최고 학부였던 아테네에서 문학, 철학을 공부했다. 이런 까닭에 세베루스는 스스로 무인으로서 황제가 되었다고 언플은 했어도, 다방면의 인물들과 친분이 깊었으며, 푸닉 출신 친구들과 아카이아, 나카이아, 아시아 출신 친구들이 즐비했다

제정 시대를 기준으로 그와 비슷했던 경우의 로마 엘리트 계층으로는 티베리우스,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트라야누스, 그리고 하드리아누스가 있다. 하지만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활동한 이 당시에는 문무에 모두 능통한 정통 엘리트 로마인들의 수가 줄고 있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조치 아래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입법하고, 아우구스투스가 명문화하여 관례화 시킨 조치인 '군 복무를 하지 않으면 명예로운 경력의 고위 선출직 입후보를 금지한다'는 조항이 사실상 폐지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조치 이후, 로마 귀족 자제 중 권세가 출신들은 명예로운 경력 중 법무관, 집정관에 오른 뒤 군복무를 하는 방식 등으로 원로원 의원 활동을 했다. 그렇지만 세베루스는 공화정, 원수정 시대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문무겸비의 엘리트였다. 그가 법률, 철학, 문학 지식 외에도, 어릴 적부터 정통 로마 교육을 받아온 덕분이었는데, 이런 배경은 세베루스가 황제까지 오르고 다섯 황제의 해라는 격변기 속에서 최후의 승리자가 될 때 큰 힘이 됐다. 하지만 세베루스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당시의 티베리우스,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처럼 군대에 입대해 진짜 군복무를 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래서 그 역시 문무를 겸비한 엘리트인들, 원로원 의원이 된 다음 군복무를 했던 로마인으로 분류된다. 어쨌든 세베루스는 스스로를 군인황제, 전형적인 군인으로 자처함과 달리, 그가 살던 당시에는 줄고 있던 타입의 로마 엘리트였다. 그래서 오늘날 알려진 이미지와 달리 젊은 시절부터 그리스 문학과 로마 법률에 대해 지식이 해박했으며, 시인이나 철학자, 법률가들과도 잘 어울리기 좋아한 교양인이었다.

세베루스는 17살때 공개웅변을 하며 자신의 재능을 고향에서 알린 뒤 18번째 생일이 지나자 곧바로 로마로 건너 왔다. 162년 처음으로 공적 경험을 시작했고 이 무렵 이미 이탈리아로 건너온 뒤 재정착했던 일가 친척 가이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후원을 받은 뒤 그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셉티미우스를 추천하면서 마르쿠스 황제에게 원로원 의원에 임명되었다. 이후에도 그는 본국에 있던 세베루스 집안 사람들의 도움 아래 마르쿠스 황제 곁에서 원로원 의원이자 주 검사를 맡아 법정에 출두해 기소 업무를 맡았으며 본국 일대의 도로 관리 업무를 관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160년대 동안 세베루스의 공직 경험은 이후 경력과 달리 평범했고 아직은 그렇게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는 변호사 일도 병행했는데, 25살 이후 공직 최소연령이 지난 뒤 본격적으로 명예로운 경력을 경험하기 전 하필 로마와 제국 전체를 휩쓴 안토니누스 역병이 퍼졌다. 따라서 세베루스는 어쩔 수 없이 모든 일을 중단하고 안전한 렙티스 마그나로 잠시 피신해야만 했다.

그런데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이 무렵, 세베루스는 간음 혐의로 기소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세베루스는 전염병이 잠잠해진 뒤 별 문제 없이 공식적으로 회계감사관을 경험하고 정식 원로원 의원이 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간음 혐의로 기소됐다면 법적 처벌을 받지 않아도 이 문제로 매우 고생했을텐데, 세베루스는 별 문제 없이 명예로운 경력 코스를 밞고 원로원 의원에 공식 임명됐다.

1.1.3. 장년기: 출세와 율리아 돔나와의 재혼

세베루스가 원로원에 입성할 당시, 로마 제국은 전염병으로 인해 로마 인재풀이 타격을 입어, 이 부분에서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이 혼란은 친척들이 원로원에 먼저 입성했고, 형 셉티미우스 게타 역시 원로원 의원이 되었어도 신참자 처지인 세베루스에게 기회가 됐다. 세베루스는 삼촌, 사촌형, 형의 도움으로 인력난이 시달리고 있는 직책들을 추천 아래 두루 거쳤다. 그래서 그는 계속해서 군사와 행정의 여러 직위들을 거쳤는데, 이때 그에게 큰 도움을 주고 밀어준 집안어른 중 세베루스를 가장 많이 도와준 이는 사촌형 가이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였다. 그는 세베루스가 부친상으로 잠시 고향으로 돌아간 무렵에 아프리카 속주 총독에 임명됐는데, 이때 총독 자격으로 세베루스를 속주 내 군 지휘를 담당하는 고위직에 임명했다. 또 총독으로 있으면서, 사촌동생 세베루스가 푸닉 최상류층과 로마에 살고 있는 푸닉 기반 로마 귀족들 눈에 들도록 추천하고, 세베루스를 적극 중용하면서 많은 경험을 쌓게 해줬다. 따라서 세베루스는 사촌형의 도움으로 군대, 행정 경력을 또래 경쟁자보다 짧은 시간에도 크게 쌓았다.

세베루스는 아프리카 속주에서의 경력을 마친 뒤, 이를 배경 삼아 히스파니아 지방으로 건너갔다. 그는 히스파니아 지방의 여러 속주에서 군경력을 쌓았고, 이를 발판 삼아, 호민관, 재무관, 법무관을 연달아 지냈다. 그리고 전직 법무관 자격 아래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총독을 맡았다. 그러다가 191년 제국 서방 방어와 도나우 방어선에서 중요한 속주인 상 판노니아의 총독을 맡았다. 총독 임명에는 실력보다는 같은 아프리카 출신인 근위대장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라이투스의 영향력이 더 컸다는 말도 있지만, 그는 제국에서 실력과 경험 모두 평가가 훌륭한 장군이었다. 하지만 그는 당시 황제였던 콤모두스의 신임을 얻지 못했다.

30대 초반의 나이에 삼촌과 사촌형의 소개 아래 동향 출신의 파카 마르키아나(Pacca Marciana)와 결혼했고, 사이에 두 딸을 얻었는데 두 딸 모두 요절했고 아내마저 186년경 병으로 잃었다. 따라서 세베루스는 후계를 얻기 위해 재혼을 결심했는데, 이때 예비신부 후보들이 들어오면 운세를 보고 판단했다. 그러다가 사촌형의 중매 아래 소개해 만난 여인이 바로 세베루스 왕조 시대동안 가공할 만한 황후 율리아 돔나였다.

율리아 돔나와 결혼 후, 세베루스는 승승장구했고, 이때 에메사 인근의 신전들에서 본인이 황제가 될 것이라는 신탁을 들었다. 그리고 이 신탁을 받은 뒤, 그는 판노니아 속주 총독이 됐다. 그때부터 그는 자신이 들은 신탁이 단순한 것이 아니라고 굳게 믿었는데, 이 시기 세베루스는 자신이 황제가 된다는 징조의 꿈을 꿨다. 본래부터 마법, 주술, 신탁, 점성술을 깊게 믿었던 까닭에 세베루스는 페르티낙스 황제 시절부터 제위를 향한 야망을 드러냈다.

이런 상황에서, 세베루스는 판노니아의 수도인 카르눈툼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다가 193년 1월 1일, 새해를 하루 앞둔 192년 12월 31일 콤모두스가 교살됐다는 소식을 듣고, 그 다음 황제에 본인이 지휘 중인 군대 병사들에게 전설의 용장으로 추앙받은 페르티낙스가 새 황제로 등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세베루스는 페르티낙스에게 충성 서약을 하고,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해 기다렸다.이런 상황에서 페르티낙스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이후, 프라이토리아니를 이끈 라이투스가 황제 자리를 경매로 팔아 치워, 본인의 먼친척 어른으로 마르코만니 전쟁의 또 다른 용장이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 페르티낙스 등과 함께 콤모두스를 도울 고문으로 임명한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가 그 자리를 사는 형태로 황제가 됨을 전달받았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세베루스 입장에서 군사적 역량과 명성으로는 범접할 수 없는 장군이었다. 하지만 그는 최악의 방법으로 제위를 얻었고, 민심은 최악이었기 때문에, 제위를 노리고 도전하더라도 상황이 나쁘지 않았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가 제위에 오른 뒤, 세베루스는 도나우 방어선에서 군단장, 총독으로 근무 중인 형 셉티미우스 게타, 동서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비투스 알렉시아누스를 비롯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시절 달마티아와 일리리아 일대에서 군단장, 총독으로 재임한 카시우스 아프로니우스의 사위로 디오 카시우스 여동생의 남편인 마리우스 막시무스 등과 손을 잡았다. 때마침 로마에서 민중들이 율리아누스에게 공개적으로 페스켄니우스 니게르에게 제위를 넘기고 퇴위하거나, 적합한 황제가 오르면 알아서 물러나라고 항의 집회가 열고 경기장에서 구호를 외치며 율리아누스에게 야유를 퍼부었다. 이렇게 되자 세베루스는 황제가 될 모든 준비를 마무리했다. 그는 적당한 때를 노려 누군가 먼저 황제를 자처하면 올라설 준비를 했다.

1.2. 황제

1.2.1. 황제 참칭과 로마 진군

세베루스가 황제를 선언한 시기는 폭군 콤모두스가 암살되면서 2세기를 지배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가 끝나고, 암살범 라이투스(레토)와 프라이토리아니(근위대)의 추대로 새로운 황제 페르티낙스가 즉위한 뒤 새황제 페르티낙스마저 근위대장 레토와 근위대에게 암살당한 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가 돈으로 황제의 자리를 사는 등 극심한 혼란기였다.

이때 그는 도나우 강 중류의 상 판노니아 총독이자 판노니아(도나우) 방면군 사령관으로 지냈는데, 콤모두스 사후 합법적 절차로 즉위한 페르티낙스가 암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막강한 경쟁자이자 존경받고 있던 또 다른 고명대신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가 모양새 우습게 황제가 되어 망신창이가 되자, 움직였다.

명민한 정치인, 장군이며 뛰어난 법률가이기도 한 세베루스는 뛰어난 정치감각과 법지식 아래 매우 계획적으로 야망을 드러냈다.

그는 충분한 준비를 갖추고, 일단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에게 충성도 하지 않고, 반대도 하지 않는 방법으로 시간을 끌었다. 그러면서 그는 로마 제국의 서방과 동방의 중간 지역인 판노니아의 특징을 최대한 활용했다. 그 결과, 그는 어떤 로마 총독들보다 빨리 시리아 코엘레 속주 총독 페스켄니우스 니게르가 먼저 황제를 선포함을 알게 된다. 세베루스는 시리아에서 이탈리아로 가는 파발에게서 니게르의 황제 선포 알림을 알게 되는데, 파발에게 이를 듣고 수긍하는 영악함을 보여줬다. 그는 파발이 로마로 가는 것을 방해하지 않았고, 이후 파발이 니게르에게 돌아갈 때에도 제지를 하지 않았다. 니게르가 로마에 이 소식을 전하게 하면서, 니게르와 율리아누스 모두에게 자신이 이 싸움에 끼어들 생각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던 것이다. 이는 세베루스가 동시대의 디오 카시우스, 헤로디아누스에게 용의주도하고, 난세 속에서 승리하는 것이 당연하게 인식된 모습의 전형으로 평가받게 했다.

세베루스는 니게르가 황제를 선포해 알리고, 다시 파발이 니게르에게 돌아간 뒤, 다른 경쟁자가 없다는 안심 속에서 니게르가 여유롭게 황제로 행동하면서 금방이라도 율리아누스가 무너질 것이라고 천천히 병력을 준비하는 틈바구니 속에서 움직였다. 이때 브리타니아에서는 클로디우스 알비누스가 황제를 이어 선포했다. 그러자 때가 됐다는 판단 아래, 세베루스는 휘하 도나우 전선의 모든 군단을 소집해, 병사들 앞에서 직접 연설을 하고, 그들에게 자신을 황제로 추대해달라고 요청했다. 병사들은 세베루스의 요구를 수용했고, 세베루스는 애국심 아래 도나우 군단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됨을 외쳤다. 그럼에도 그는 파발을 보내지 않았다. 대신 그는 그 자리에서 형과 동서, 마리우스 막시무스, 세네키오 알비누스 등과 의기투합하는 맹세를 했고, 맹세 직후 16개 군단 전체를 이끌고 193년 4월 당일 로마로 진군했다. 세베루스는 맨 앞에서 이탈리아 국경을 넘었고, 가장 빠르고 주민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로마로 진격했다. 이런 방법은 공화정 후기의 여러 번의 로마 진군 중 술라가 한 것과 판박이였다. 따라서 율리아누스, 원로원, 니게르, 알비누스 모두 어떤 예상도 못하다가, 세베루스가 로마군 최정예로 실전 경험이 가장 풍부한 판노니아 16개 군단 전체를 끌고 옴에 대응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결국 원로원은 세베루스를 강하게 비난했다가, 세베루스의 군대가 예상을 뛰어넘을 만큼 빨리 로마 외곽에 도착해, 로마 전체를 포위하자 체념했다. 그들은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를 죽였고, 세베루스가 황제가 되는 것을 승인했다.

이 과정에서 세베루스는 시리아 속주 총독 페르켄니우스 니게르와 브리타니아 총독 클로디우스 알비누스가 각각 황제를 칭하고 야망을 드러낸 이후에야 황제즉위를 선언해 첫 타자로 찍히는 일을 피했으며, 오늘날의 오스트리아 수도 근처의 카르눈툼에서 휘하의 라인 강, 도나우 강 일대 16개 군단의 추대로 즉위하는 방식으로 서방 최정예 병력이 자신만을 지지한다는 것을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와 원로원, 다른 두 경쟁자들에게 보여줬다. 또 클로디우스 알비누스에게 로마 진군을 결행하면서 혼란을 주고자, 사람을 보내 공동황제가 될 생각 때문에 그렇게 했다는 등의 현란한 수사를 섞어 그를 속였다. 알비누스는 신의를 중요하게 여겼던 전형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세베루스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고, 이로서 세베루스는 후방 걱정 없이 진군을 가속화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휘하에 있었던 제 10 게미나 군단과 제 14 마르티아 빅트릭스 군단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생전에 3차례나 벌어졌던 마르코만니 전쟁에서 승전을 거둔 최정예 군단이었고, 나머지 라인-도나우 군단도 최전선에서 단련된 정예들이었다. 이런 군단병들이 세베루스의 신속한 결정에 따라 무지막지한 군세로 로마로 진격한다는 보고를 받은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페르티낙스 암살를 주도한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라이투스를 반역죄로 처형한 뒤 툴리우스 크리스피누스와 플라비우스 게니알리스를 새 근위대장들로 임명했다. 이는 뒤늦은 민심 수습이기도 했지만, 진짜 이유는 같은 동향 출신으로 세베루스를 콤모두스 시대동안 밀고 끌어준 라이투스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편에 선 뒤, 그와 공모한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후,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세베루스에게 근위대장 중 한명인 크리스피누스를 파견해 공동황제를 제안했지만, 율리아누스의 제위 등극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페르티낙스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세베루스가 이런 제안을 받아들일 리 없었다. 세베루스는 이런 뜻을 확고히 전달한다는 의미로 파견된 크리스피누스를 그 자리에서 죽여 율리아누스와 원로원에게 공동황제 제안 따위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런 상황에서 대세는 무력을 앞세운 세베루스 쪽으로 기울었고, 로마 민중들은 원형 경기장에서 "시리아 총독 페스켄니우스 니게르는 군대를 일으켜 권좌를 장악하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에게 돈을 받은 프라이토리아니는 황제가 가치를 다했다고 판단해 그를 버렸다. 따라서 193년 6월 1일, 원로원은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를 폐위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키면서 결국 세베루스를 새 황제로 인정해야만 했다. 따라서 돈으로 권좌를 산 율리아누스는 디오 카시우스가 기록했듯이 모두에게 버림받은 채 폐위된 뒤 비참하게 처형됐다.

하지만 세베루스는 로마에 들어온 직후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의 시신을 정중히 유가족들에게 보낸 뒤, 그의 아내와 외동딸이 정식장례식을 거쳐 가족공동무덤에 안치할 수 있게 배려해줬다. 이건 아마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본인 스스로의 정통성을 페르티낙스의 후임이라고 했지만, 그가 문제로 삼은 것은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가 돈으로 제위를 산 행동보다는 이를 먼저 경매형식으로 진행하고 후보를 고른 프라이토리아니였던 것이 컸다. 또 세베루스는 페르티낙스처럼 젊은시절부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신임을 얻었고 여러 게르만족들과 전투를 치르며 공을 세운 장군이자 정치인인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를 미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율리아누스가 콤모두스 생전 황제의 폭주를 페르티낙스와 함께 원로원 내에서 견제하면서 얻은 공로를 옛 동료로서 간접적으로 인정함을 보여주는 조치로 이런 관용을 베풀었다. 즉, 세베루스는 자신의 적이 원로원과 프라이토리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명확히 행동했다.[6]

로마 진군 9일 후, 세베루스와 그의 군대는 개가를 울리며 무장한 상태로 로마 시내에 들어왔고, 돈으로 제위를 팔아 국가의 위신을 떨어트린 근위대에 복수를 했다. 그는 근위병들을 소환해 기념식 관례대로 도시 밖으로 행군하게 한 후, 페르티낙스 암살에 관여한 근위대원들을 관용없이 모조리 처형했다. 남은 근위대는 목숨을 살려주는 대신 해산시키고, 로마 외곽 160km 반경 내에 접근하면 죽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근위대원들의 자리는 그에게 충실한 군사들로 채워졌다. 이는 그동안 본국 이탈리아 출신으로만 충원되던 근위대가 ‘촌놈’ 취급을 받던 판노니아, 일리리아, 트라키아 속주 출신 군단병들로 채워진 첫 사례가 되었다.[7] 이 조치는 이탈리아 내에서 세베루스만이 무력을 쥐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행동이었고, 콤모두스 암살 후 황제 선출이나 제국 원로원에게 무력으로 특권을 누린 본국 이탈리아의 지위와 특권을 빼앗아 버리는 결정이었다.

세베루스는 로마에 들어온 이후,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다지는데 주력했다. 위에서 언급했듯 그는 암살당한 선대 황제 페르티낙스를 복권시키고 그에 걸맞은 예우로 장례를 치르며 그의 이름을 칭호의 일부로 취해 명분을 공고히 하였다.

이어서 그는 각종 기금 창고들을 신속히 장악한 뒤, 콤모두스의 실정과 그가 암살된 뒤 벌어진 혼란으로 고갈된 로마의 곡물창고를 다시 채워나갔다. 또한 자신이 경쟁자들과 실력으로 경쟁 중인 상황에서 언제라도 배신을 때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원로원을 회유하려고 했다. 따라서 그는 로마에 체류하는 동안 자신이 원로원을 존중하며, 본인 역시 원로원 의원이었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군복 대신 토가를 착용했다. 또 원로원 의원들에게 “동료 의원들이 재판을 거치지 않고, 처형되는 일이 단 한 명도 없도록 하겠다”고 맹세하면서, 사례들과 달리 밀고자를 활용해 비열한 방법으로 숙청도 가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1.2.2. 첫번째 경쟁자 니게르와 1차 파르티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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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우스 페스켄니우스 니게르(Gaius Pescennius Niger,135~194)

가이우스 페스켄니우스 니게르는 이탈리아의 오래된 기사계급 출신으로 세베루스와 마찬가지로 직계 내에서는 본인대에서야 원로원에 입성한 신참자 출신이다. 그는 탄탄하지만 평범한 군대 경력을 거쳐 189년에 집정관이 되었고 191년에는 시리아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니게르는 사실 문무 전반에서 오랜 경력을 자랑한 전형적인 2세기 당시의 원로원 신참자 중 한명이었다.[8] 그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절 황제령 이집트에서 오랜 행정 경험을 가지고 있었으며, 콤모두스 치세 초기에는 다키아 일대에서 도나우 일대 군단을 이끈 군경력도 가진 베테랑이었다. 이 사람 역시 페르티낙스가 살해되자, 193년 4월 13일 시리아 군단 병사들에 의해 선포됐는데 세베루스보다 먼저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고 알려진 것과 달리 세베루스가 4일 전 먼저 제국의 황제 칭호를 참칭했다고 한다.

니게르는 군사 문제에서는 지나치게 원칙주의자였지만, 세베루스와 달리 매사와 인간관계에 있어 남달리 정직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는 부하들에게 황제로 선포되자 이를 알리는 서한을 로마로 보냈는데, 세베루스는 중간에서 그의 서한을 가로챘고 니게르가 먼저 반란을 일으키는 방법으로 분위기를 바꿔 명분을 내세우며 로마로 진군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인망이 대단한 사람이었고 매우 정직했기 때문에,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자신에게 수많은 로마 시민들이 "니게르를 로마로 복귀시켜 당장 황제 칭호를 줘라"고 항의를 받았다. 따라서 디디우스는 백인대장 한명을 자객으로 보내 니게르 암살을 명령했고, 실제로 암살범은 안티오키아로 향했다고 한다.

니게르는 시리아 속주 총독 재임 중 193년 4월 13일 황제로 선포된 이후, 동방 일대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일가 칭호로 '정의'를 뜻하는 유스투스를 사용했다. 이후, 서방에서는 클로디우스 알비누스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시간을 두고 부하들이 자신을 추대하는 모양새로 황제를 자처했는데 세베루스는 로마 최정예를 이끌고 군사행동을 개시해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가 살해된 이후 로마로 입성했다. 이후, 로마에서 황제의 지위를 굳힌 세베루스는 동방 군단들이 황제로 선포한 시리아의 총독 가이우스 페스켄니우스 니게르(Gaius Pescennius Niger)를 처리하기로 했다. 따라서 세베루스는 동향 렙티스 마그나 출신의 고향친구이며 외가 친척인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우스에게 니게르의 아이들을 인질로 붙잡아 두라고 명을 내렸다. 하지만 니게르는 이런 세베루스의 행동에 아랑곳하지 않고, 비잔티움을 점령한 아시아 총독 아이밀리아누스를 비롯한 동방 일대의 총독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이윽고 군대를 규합한 니게르는 동방 일대의 군세와 오랫동안 쌓아온 인망을 바탕으로 본국 이탈리아를 장악한 세베루스를 단번에 무너뜨릴 수 있는 곡물 공급 지역인 이집트를 공격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세베루스는 밀 공급 방어를 위해 이집트 일대의 방어를 강화했으며 자신이 직접 움직일 수 있는 로마 최강의 16개 군단을 가지고 니게르를 압박했다. 왜냐하면 세베루스와 달리 니게르는 이 당시 시리아에 주둔한 3개 군단, 아라비아에 주둔 중인 2개 군단, 말라티아-아라비아 테트라에 있던 1개 군단 등 동방 6개 군단만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니게르는 시리아의 북부 측면을 막아주는 타우루스 산맥의 고개들과 시리아의 수도 안티오키아를 요새화했다. 그는 또한 서쪽으로 군대를 보내 보스포루스의 좁은 교차로를 통제하는 비잔티움을 포위하도록 했다. 그러나 세베루스의 군대는 트라키아에서 소아시아까지 진격해 들어갔고, 193년 말 무렵, 니게르의 군대를 상대로 두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첫 번째는 마르마라 해안의 키지쿠스(Cyzicus)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의 승리였고, 두 번째는 동쪽으로 조금 떨어져 있는 니케아[9]에서 벌어진 전투에서의 승리였다. 니게르는 대비했지만 세베루스의 군대는 타우루스 산맥의 고개를 돌파하여 시리아로 진군했다. 마지막 결정적인 전투는 500년 전 알렉산드로스 대제가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3세를 격퇴한 평원 위 이수스(Issus) 근처에서 194년 3월 또는 4월에 벌어진 전투였다. 니게르의 군사들은 북부 군단들과는 상대가 되지 않아 패하고 말았다. 달아나는 동안 니게르의 세력은 약화되었고, 니게르는 말을 타고 남쪽으로 달아났지만 안티오키아 근처에서 붙잡혀 참수되었다. 그의 지지자들이 무자비하게 처벌되자, 많은 이들이 세베루스의 무자비한 처벌을 피해 로마의 이웃이며 동방의 오랜 적인 파르티아로 피난하였다.

당시 파르티아 왕 볼로가세스 4세는 세베루스의 경쟁자 니게르를 지원하면서, 메소포타미아에 위치한 로마의 속국 오스로에네에게까지 간섭해 왕과 로마를 이간질시켰다. 따라서 세베루스는 195년 여름 동안 니게르와 도망간 그의 군사들을 지원한 파르티아를 응징하기 위해 원정대를 이끌고 메소포타미아 북부로 향했다. 하지만 파르티아를 박살내기 위해 진군한 세베루스의 군사행동은 갑자기 중단됐다. 왜냐하면 클로디우스 알비누스가 근거지인 브리타니아에서 힘을 키운 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일전을 벌이기 위해 행동에 나섰기 때문이다.

1.2.3. 단독 황제 등극과 네르바-안토니누스 계보 참칭

니게르를 무너뜨렸지만 세베루스에겐 브리타니아의 총독인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라는 경쟁자가 아직 남아있었다. 세베루스는 일찍이 알비누스의 지원 내지 중립을 바라면서 '카이사르(부황제)'라는 칭호를 주면서 타협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그가 이렇게 행동한 이유는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를 지지하던 원로원을 설득시키면서 가장 큰 경쟁자인 니게르를 먼저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다시 말해서 세베루스는 알비누스와 실제 권력을 나눌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세베루스의 로마 진군 후, 이탈리아 출신 근위대가 해산되고 새 황제가 원로원에게 유화적 태도를 취할 당시부터 원로원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맹세와 호소 가득한 약속들을 믿지 않았다. 로마에 들어온 뒤, 세베루스가 민간인 복장으로 있었음에도 자신을 지지하던 1만 5천 명의 도나우 방어선 출신 근위대를 등에 업은 채 원로원을 압박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로원 의원 대다수는 세베루스가 북아프리카 억양이 섞인 사투리를 사용하는 속주 출신 기사계급 로마인이라는 이유로 그를 미워하기보다는, 위선적인 태도에 대해 혐오하고 진실성이 없는 세베루스의 이중성을 미워했다. 이런 태도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원로원 의원들이 자신이 북아프리카 출신이라는 이유로 무시한다고 여겼고, 세습귀족 출신 원로원 의원으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총애를 받아온 클로디우스 알비누스가 원로원에게 훨씬 인기가 많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런 연유로 세베루스는 원로원을 탄압할 때 자신의 행동들을 정당화했다.

이런 까닭에 195년 말, 세베루스는 자신의 취약한 정통성을 끌어 올리기 위해서 자기 스스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양자로 입적되었음을 선포했다. 쉽게 말해서 대가 끊긴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에 황제의 정통성과 권위 향상을 위해 셀프 양자입적한 것이다.

이때 원로원과 사이가 더 틀어지게 된 행동은 세베루스 자신의 정통성 강화를 위해 네르바-안토니누스 가문의 적통 콤모두스를 신격화시키고 기록말살형을 철회시킨 것이다. 여기에 더해 명망있는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후예임을 자처하기 위해서, 훗날 카라칼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 장남 셉티미우스 바시아누스(Septimius Bassianus)의 이름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로 바꿨다. 그리고 어린 카라칼라가 겨우 7살의 나이임에도 '카이사르'의 칭호도 하사했다.

이것은 세베루스 가문의 세습을 공식화한 선언이었고, 클로디우스 알비누스에게는 더이상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선택한 후계자가 아니고 향후 제위를 계승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또한 콤모두스를 단죄한 바 있는 원로원에게 더이상 타협은 없다는 경고였으며 알비누스를 지지한다는 것은 반역이라는 뜻이 담긴 선전포고였다.

하지만 황제 본인도, 원로원도 모두 이 행태가 전례없고 우스꽝스럽고 어거지인 까닭에 이후 상황은 엄중한 분위기 속에서도 이런 말이 황제 친구 중 용감하고 재치있는 인사들 입에서 나왔다고 한다.
"아버지를 이렇게나마 찾게 되심을 경하드립니다, 카이사르!"

1.2.4. 루그두눔 전투와 클로디우스 알비누스 제거

세베루스 부자의 네르바-안토니누스 계보 참칭 선언 이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원로원과 각 군대에게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해달라"고 재차 요구했다. 따라서 싸울 수 밖에 없음을 알게 된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는 196년 브리타니아 속주에 주둔 중인 4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갈리아로 건너갔다.

갈리아에 상륙한 클로디우스 알비누스가 끝장을 보자는 심정으로 브리타니아 속주 내 병력을 수비대까지 거의 대부분 끌고 온 뒤[10] 전력으로 맞선 터라 세베루스를 지지한 비리우스 루푸스는 패배한다. 이렇게 루푸스를 격파한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는 브리타니아 3개 군단을 주축으로 스페인에 주둔해 있던 제7군단 '게미나'의 지원도 받았다. 이후 그는 루그두눔(오늘날의 프랑스 리옹)에 기지를 두고 추가 병력을 모았으며, 중요한 요새와 주둔군을 중심으로 지금의 라인란트 일대를 점령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세베루스 입장에선 다행히도, 레누스(라인 강) 전선 내 군대는 클로디우스 측의 합류 요청을 따르지 않아 세베루스는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세베루스는 새 법령들을 통과시키고 권력을 확고히 다지면서 그 해에 많은 시간을 로마에서 보냈지만, 원로원이 아닌 군을 이용해 알비누스를 ‘로마의 공적’으로 선포하는 새로운 방식의 권위 확보에 치중했다. 이후 세베루스는 197년 1월이 되어서야 옛 동지인 알비누스와 마지막 대전을 치르기 위해 길을 떠났다. 결정적인 전투는 197년 2월 19일 루그두눔(지금의 리옹) 외곽에서 벌어졌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양군은 총 15만명이었다고 하며 오랫동안 결과를 예측하기 힘든 전투가 벌어졌다고 한다.

전투는 시간이 지날수록 세베루스군이 우세해졌는데, 전투 도중 세베루스가 말에서 떨어지는 일이 일어났다. 이는 세베루스의 생사가 경각에 달렸다는 것을 의미했다. 다행히 그는 재빨리 황제의 의복을 찢어서 정체를 숨겼고, 때맞춰 기병대가 도착하면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알비누스의 군대는 결국 패배하였고 알비누스는 루그두눔으로 달아났지만 더 이상 도망갈 길이 없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세베루스는 벌거벗겨진 알비누스의 시신을 땅에 내려놓고 그 위로 말을 달려 시체를 훼손했으며, 알비누스의 시신을 수습해 목을 자르고 머리를 로마로 보냈다. 이때 그는 원로원을 조롱하고, 협박하는 서한을 보내며 원로원 내 배신자들에게 명확히 경고했다.

이렇게 내전에서 최종 승리를 거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알비누스 제거 이후, 상당히 잔혹하고 무례한 행동을 벌여 큰 질타를 받았다. 왜냐하면 그는 알비누스의 가족들에게 사면령을 내리고 용서해줬다가 마음을 바꿔 클로디우스 알비누스 일가를 모조리 살해했기 때문이다. 이때 세베루스는 알비누스의 아내, 아들들의 시신을 알비누스의 몸통과 함께 론 강에 던져버리게 했는데, 더 문제가 된 것은 루그두눔을 무참히 약탈한 행동이었다고 한다.

1.2.5. 정적 숙청

로마로 돌아온 세베루스는 두 경쟁자 니게르와 알비누스와 싸우는 과정에서, 그들의 지지자들이 원로원 안에서 자신과 세베루스 가문을 상대로 벌인 일이 상당히 위험하고 자칫 더 큰 내전을 초래할 수 있음을 알게 됐다. 그래서 그는 이를 뿌리뽑기 위해 가혹한 보복 조치를 실시하였다. 세베루스는 원로원에 그들의 추종 세력이 많이 있다고 생각했고, 향후 세베루스 가의 안정성을 위해서라도 원로원과 이탈리아 출신 의원들을 제대로 손 볼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11]

197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원로원이 동료 의원을 직접 재판할 수 있는 특권을 박탈했다. 이어서 세베루스의 숙청 리스트에 오른 29명의 원로원 의원들에게 ‘반역자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를 지지했다’는 유죄 판결을 내려 사형시켰다. 여기에는 페르티낙스의 장인으로 제위를 돈으로 살 뻔 했던 티투스 플라비우스 술피키아누스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세베루스는 율리아누스와 본인이 연달아 호의를 베풀고 그 지위를 보장해줬음에도 두 황제에게 그 은혜를 역으로 갚은 술피키아누스를 용서하지 않았다.[12] 따라서 세베루스는 197년 정적들을 대거 숙청할 때, 술피키아누스도 클로디우스 알비누스의 지지자 중 한 명으로 기소해, 유죄판결을 내린 뒤 곧바로 처형했다.[13]

이어서 그는 자신에게 호의적인 인사들을 새로운 의원들을 임명해 그 자리를 채웠다. 새로 편입된 의원들은 세베루스에게 호의적인 북아프리카 출신이거나 동방 속주 출신들이 많았다. 따라서 본국 이탈리아와 서방 속주 중 상대적으로 우위를 가지고 있던 갈리아, 히스파니아 등 기존 원로원파들은 소수파로 추락했다.[14] 그러나 이런 비율 구성은 당시 이탈리아와 서방속주들의 사회, 경제적 쇠퇴로 인한 내재적 문제도 큰 탓에 마냥 세베루스가 과거 네로, 도미티아누스, 하드리아누스처럼 그리스와 동방, 아프리카 속주 출신들을 기용해 벌어진 움직임은 아니었다.

이렇게 알비누스 지지자가 많던 원로원을 손 본 세베루스는 행정부에 대해서도 인사조치를 통해 물갈이를 진행했다. 이 조치는 원로원 내 권력 이양 작업의 연장선으로, 2세기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통치시기동안 누적된 내치 문제 해결을 위한 이유가 컸다.

먼저 관료 부분 개혁에서, 그는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이래 오현제 시대 동안 로마 관료 사회의 중추로 자리잡은 기사계급들을 중용했으며[15] 군 출신 뿐만 아니라 세베루스 왕조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법학자들을 주요 관료로 발탁했다.[16] 흔히 세베루스 왕조를 군인의 시대라고 알고 있지만 오히려 로마법을 가장 꽃피운 법학자의 시대였다. 이는 세베루스 사후 알렉산데르 시대에, 섭정인 외할머니 율리아 마이사가 자신의 외손자이자 소년 군주인 알렉산데르를 위하여, 그 측근이자 보좌역으로 법학자 울피아누스를 중용하면서 결실을 맺는다.

다만 이런 내정 개편 중 세베루스는 상식 이상으로 부도덕한 결정을 내려, 내전 치유와 별개로 지탄을 받았다. 205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자신이 국법을 어기고 로마 진군을 할 당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사위이자 루키우스 베루스의 친조카인 전직집정관 출신의 옛 원로원 의원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17]가 그의 불법행동을 강하게 질타한 일을 들추어 낸 뒤 억지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몇 없는 남자황족들에 사형을 언도한 후 살해했다. 그런데 플라우티우스는 과거 처남 콤모두스가 암살된 직후,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보인 일련의 행동에 완전히 질린 상태였고, 단 한 번도 제위에 욕심을 내거나 본인이 앞장서 뭔 일을 꾸미거나 무슨 일이 있던 상황에서 오버한 일이 없던 사람이었다.

또 그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로마 진군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은퇴선언을 한 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경쟁자들인 니게르, 알비누스와 칼을 겨누기 전 가족들과 시골별장에 들어가 수년째 세상과 담을 쌓고 살던 상태였다.[18] 즉, 세베루스에게 억울하게 사형을 언도받고 죽임을 당한 그는 세베루스의 쿠데타 당시 이 일이 국법에 어긋난 행동이라고 하면서 질책하고, 면담요구를 강하게 거부한 원칙만 내세웠을 뿐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니게르, 클로디우스 알비누스 같은 세베루스의 경쟁자들과 협력하거나 최소 그들을 심정적으로 지지조차 안 했던 상태였다. 그래서 플라우티우스는 자신의 사형을 세베루스가 명령했다고 한 것을 듣고 죽기 전 죽음을 준비하면서 “나는 세르비아누스[19]께서 하드리아누스 황제를 위해 하셨던 일과 같은 기도를 한다네.”라고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이렇듯 세베루스가 즉위 당시 신에게 맹세까지 하면서 정적 숙청과 재판없는 처벌이 없을 것이라는 선언들을 무시하고, 자신이 존경한다는 철인황제의 사위까지 죽이는 등 극도로 무자비한 모습을 보여주자, 로마 사람들은 공화정 후기의 내란 시기에 자행되었던 독재관(딕타토르) 술라의 악명 높은 학살을 떠올려 그를 ' 포에니 술라'[20]라고 부르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냉정함과 잔인함을 비난했다. 그렇지만 세베루스는 과거 술라와 달리 정적들의 자녀와 그 가문까지 죄다 도륙내거나 그 앞길을 막는 일은 최대한 삼갔다. 어떻게 보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입장에선 다섯 황제의 해로 벌어진 내전 치유를 위해 최대한 호의를 베푼 건데, 그가 연좌죄까지 동원해 그 일가 전체를 죽인 것은 직접적인 경쟁자 니게르, 클로디우스 알비누스 가족 정도에 불과했으며, 처형 후 그 재산을 압류한 이들은 197년 니게르, 알비누스의 협력자로 살생부에 오른 29명 정도에 불과했다.

실제로 그는 197년 대거 정적들을 작살낸 이후 예전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대처럼 제국의 질서 유지에 힘썼다. 그러나 공포 정치를 펼치고 루그두눔을 적국의 수도를 유린하듯 약탈한 행동, 그리고 자신의 경쟁자들을 모조리 굴복시킨 사건은 그 파장이 컸다. 이런 이유로 기원전 1세기의 술라와는 달리 세베루스는 한때 동료였던 기존 원로원과 옛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지지자들의 신임을 끝내 얻지 못했다.

사실 세베루스의 별명이 포에니 술라인 것과는 별개로 술라의 개혁은 친 원로원적인 점에서 세베루스의 치세와 대비된다. 술라는 기원전 1~2세기의 로마의 혼란이 그라쿠스 형제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대두로 인해 평민파가 득세하면서 원로원이 주도하는 과두정제가 훼손되었다고 생각하였고, 과두정제를 복원하고 원로원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숙청을 도구화하였다. 즉, 세베루스와 술라의 숙청 목적이 달랐던 것이다. 또한 술라는 에퀴타스와 평민계급도 참여 가능하였던 배심원 제도를 원로원만 가능하게 돌려놓았으며, 전직 호민관의 권한을 줄여버렸다. 그리고 원로원의 권위를 키우기 위해 원로원 의원정수를 기존 300명에서 600명으로 늘렸다. 술라의 업적으로 보자면, 원로원이 술라를 싫어한다는 게 오히려 이상해 보일 정도다.[21]

1.2.6. 원로원의 위상 하락과 커지는 군대의 힘

세베루스가 원로원에 대한 보복에 착수한 이후, 더이상 원로원에게 지원을 기대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도미티아누스처럼 원로원의 지지가 아니라 군대의 지원에 기대는 쪽으로 마음을 바꾸었다. 그는 자신이 군인황제임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영향력을 강조했다. 또한 로마 시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계속해서 갖가지 볼거리를 제공하고 전 세계에서 온 수백 마리의 야수들을 도살했다.

황제가 자신의 권력 기반 창출의 수단으로 군대를 선택하면서 원로원은 완전히 황제 자문회의가 입안한 정책들을 홍보하는 기관으로 전락해버렸다. 반대로 세베루스를 도울 황제 자문회의의 인원과 권한은 창설 이래 가장 커지게 되었다. 이 회의에는 원로원 내 중견 의원들과 관료, 당대 최고의 법률가들인 파피니아누스 등이 포함됐다. 니게르, 알비누스를 비롯한 정적들을 숙청한 까닭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재산들을 몰수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는 이 재산들을 레스 프리바타 프린키피스(황제의 개인 자산)이라는 이름으로 묶어 장악했다. 이어서 그는 평소 관심을 두고 있던 군대에게 시선을 돌렸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막대한 레스 프리비타 프린키피스 내 자금들을 기반으로 선군정치를 펼쳤다. 따라서 군인들의 힘은 커졌고, 황제 곁에서 바로 무력을 사용할 수 있는 근위대장의 권한 역시 과거보다 막강해졌다. 세베루스 치세 이후 근위대는 장교를 훈련시키는 새로운 사관학교 개념으로 변했다. 그리고 이들을 이끄는 근위대장은 곡물 행정을 감독하는 권한을 부여받았고, 제국 최고 법원이자 정책 입안 기구인 황제 자문회의의 부의장으로 승격됐다. 따라서 197년 근위대장에 임명된,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아누스(Gaius Fulvius Plautianus)의 힘은 황제와 대등할 정도로 막강해졌다.

원로원 대신 군인들의 힘을 기반으로 권위를 확립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게 군대는 자신의 권력 기반이었다. 따라서 그는 아들들에게 죽는 순간까지도 계속 군대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치세기 동안 군대 개혁을 착실히 진행시켰다. 이에 따라 로마군과 보조군들은 점점 항구적인 지역 방어군, 농민군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는 30개 군단 수를 33개로 증설했으며, 군단 자휘관들을 원로원 출신들에서 기사계급이나 전문 군인들로 바꾸기 시작했다. 또한 병영 기지를 쾌적하게 만드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래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그동안 황제령으로 금지되었지만 사실상 행해지고 있는 몇 가지를 허용해줬다.

먼저 병사들의 가장 큰 소원인 복무 기간내 결혼을 합법화시켜줬으며,[22] 퇴역 후를 위해 돈을 모아 계를 드는 행동을 허락했다. 동시에 초급장교들의 사교클럽 조직 창설을 허용해 군 내 사조직들을 활성화시켜줬다.[23] 이런 복지혜택은 단순히 생활 향상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군단병들의 급여를 375데나리우스에서 500데나리우스로 인상해주고 일반병들이 일반 군단에서 근위대와 근위대장까지 승격시키는 코스를 누구나 갈 수 있도록 인사 시스템을 바꿔줬다.

이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시대의 새로운 권력재편 및 황제 중심의 전제적 통치체계는, 전통적 관점이나 현대적 관점 모두에게 군사전제정, 선군정치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세베루스 왕조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시대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디오, 기번 등의 주장과 달리 단순히 원로원을 배척하고 군대를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한 조치는 결단코 아니었다. 오히려 이 조치들은 군사전제정 형태라고 하더라도 제국 내 행정, 사법 정비와 연계된 군대와 프라이토리아니의 황제 직계 체제 편입 및 관료 육성 목적이 더 컸다. 즉, 2세기 말 콤모두스가 방치하다시피 한 로마 내 프린키파투스 체제의 한계를 뛰어넘고 제국 내 본국과 속주, 동과 서, 도시와 변방 간의 편차 해소를 위한 목적이 컸던 이유로 세베루스가 해결책으로 내세운 조치였다. 이런 이유로 상술한 프라이토리아니 내 승진제도, 병사들의 지위향상과 복지수혜, 황제자문회의를 통한 행정부 강화 조치는 4세기 도미나투스 체제의 모습을 드러낸 조치였다고 해석되고 있고, 이 시기부터 근위대장의 성격은 군사적 색채에서 행정, 사법적 색채가 강화되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1.2.7. 제2차 파르티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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렙티스 마그나에 세워진 그의 개선문
세베루스는 여러 정적과 외적을 격파하고, 군과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여러 정책을 펼쳤으며, 자신과 세베루스 왕조에게 반란을 일으킬 위험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위험 인물로 분류된 인사들을 색출하고 일부 속주들을 여러 개로 나눠 힘을 분산시켰다. 동시에 두 번째 결혼으로 맞이한 시리아 출신의 율리아 돔나 사이에게서 얻은 두 아들 카라칼라, 게타를 일찌감치 부제에 앉혀 후계 구도도 명확히 하는 등 얼마간의 안정을 이룩한다. 그 후에 그는 군사 원정을 떠났다. 이번 적은 로마의 주둔 기지를 위협하고 동방 속국들의 왕들을 위협하는 파르티아인들이었다. 앞서 벌인 원정은 힘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세베루스는 그렇게 진지하게 임하지 않았다. 그러나 두 번째 원정에서는 진지했다.

메소포타미아 북부로 들어간 세베루스는 군사를 함선에 싣고 유프라테스 강과 육로를 거쳐 파르티아의 수도 크테시폰으로 진군했다. 저항은 약했고 도시는 점령되어 로마의 군인들에게 약탈당했다. 남자들은 모조리 살해당했고, 약 10만 명의 여자와 아이들이 포로로 잡혀 노예가 되었으며 파르티아의 황실 국고에 들어 있던 보석과 귀중품들이 모조리 약탈당했다. 그렇게 메소포타미아 북부 지방은 트라야누스 재위 후기 이후 다시금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다(실제로는 195년 첫 원정에서 차지했고 그 지배를 견고하게 만든 것이 2차 원정이었다). 메소포타미아 북부는 이후에 로마-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 되며, 당연하게도 이 지역을 차지한 쪽이 유리하게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고 방어하기도 용이하였다. 세베루스 황제의 파르티아 원정의 가장 큰 수확.[24]

크테시폰 점령은 197년 말에 이루어졌다. 세베루스는 5년간 동방에 머물렀는데 처음 2년간은 새로운 식민지를 편성하고 중요한 무역 도시인 하트라(Hatra)를 점령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로마군은 하트라는 끝내 점령하지 못했다. 이후 세베루스는 팔레스타인 이집트를 돌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미라를 보고, 나일 강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피라미드와 테베의 신전들을 방문했다.

1.2.8. 후계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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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베루스 가족. 차남 게타는 후일 형 카라칼라에 의해 기록말살형에 처해지며 지워졌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202년 여름에 로마로 돌아왔을 때 그의 나이는 56세 정도였다. 로마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에도 꽤 고령이었다. 심각한 통풍으로 고통을 겪던 그는 이미 198년 초에 친아들 카라칼라를 아우구스투스 직위로 올려줌으로써 제위 계승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는 로마로 돌아오자마자 아들의 결혼 상대로 동향친구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아누스(Gaius Fulvius Plautianus)의 딸인 푸블리아 풀비아 플라우틸라(Publia Fulvia Plautilla)를 선택했다. 근위대장인 플라우티아누스는 북아프리카의 렙티스 마그나 출신으로, 동향친구인 황제 세베루스의 지지와 도움으로 막대한 권력과 부를 얻었다. 그는 황실 근위대장 자격으로 모든 전쟁에 황제와 동행했다. 그래서 그와 세베루스가 한때 연인 관계였다는 소문까지 돌 정도였다.

그러나 플라우티아누스는 사람들의 신망을 얻지 못했다. 헤로디아누스는 “플라우티아누스가 자신의 권력을 남용해 모든 일에 온갖 잔인한 행동과 폭력을 써서 역사상 가장 두려운 프라이펙투스(최고 행정관이 임명하는 관리) 중의 하나가 되었다”고 평가했으며 심지어 그가 성인 남자를 거세시켜 딸의 시종이 되게 했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카라칼라는 이러한 결혼을 반기지 않았고 아내와 장인 모두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아내와 식사도 하지 않고 잠도 자지 않으려고 했으며, 자신이 정권을 잡으면 둘 다 죽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카라칼라와 플라우티아누스 부녀의 갈등은 3년 후인 205년 1월 22일에 극도로 악화되었다. 사료마다 다르지만 어느 설명에 의하면 카라칼라가 세 명의 백인대장[25]을 설득하여 플라우티아누스를 음해하는 거짓 정보를 보고하게 했다. 그들은 조상들을 위한 축제가 끝난 후 행동을 개시했다. 그들은 저녁 식사 직전에 세베루스 황제에게 가서 플라우티아누스가 자신들과 다른 일곱 명의 백인대장들에게 세베루스와 카라칼라를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말했다. 헤로디아누스에 의하면 음모는 사실이었고, 플라우티아누스는 그 음모를 통해 카라칼라의 제위 계승을 막고 자신이 제국을 장악하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황제와 황태자를 살해하기 위해 고용한 사람이 곧바로 그들에게 가서 그 사실을 알렸다고 한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나중에 쿠리아에서 원로원 회의를 소집해, 플라우티아누스가 (자신과 황실을) 위협하지 않았지만 영혼적인 면에서 나약함을 가졌다고 한탄했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이) 연인인 그를 너무 많이 사랑한 것에 대해 스스로 비난했다."
디오 카시우스의 플라우티아누스 사건과 연관된 코이라누스 비문 중 일부

두 이야기 중에서 무엇이 진실이든 간에 플라우티아누스는 즉시 살해되었고 시신은 거리에 내팽개쳐져 민중의 야유를 받게 되었다. 이때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쿠리아 의회를 소집한 뒤 원로원 의원들 앞에서 자신이 그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자책했다. 그렇지만 이 자책에도 그는 플라우티아누스가 자신과 황실에게 반역할 생각이 없었고 그저 인간적으로 냐약했기 때문이라고 그 죽음과 넋을 위로했다. 또 그는 여러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플라우티아누스 사건을 확대하지 않도록 노력했다.[26] 하지만 율리아 돔나와 카라칼라는 이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태도에도 플라우티아누스를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이중 그 분노가 대단했던 쪽은 자신의 노예들이 납치돼 고문을 받고 만신창이가 된 것에 단단히 화가 난 돔나 쪽이었다. 이때 율리아 돔나는 직접 의견을 밝히며 플라우티아누스의 재산을 모두 국고로 환수해달라고 건의하고 이를 관철시켜 모조리 황실 국고로 귀속시켰다. 허나 돔나의 행동은 플라우티아누스 처형이 반역에 대한 처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자신이 남편의 유일한 정치적 동반자임을 선언하기 위해 벌인 정치적 행동인 터라 개인적 악감정은 자제된 면이 많았다.

반면, 카라칼라는 이 사건 이후 아예 장인과 아내, 처남 쪽을 끝장낼 생각이었고 향후 자신이 제위에 올랐을 때 매우 좋은 상황임을 인지해 어머니를 적극 지지했다고 한다. 그래서 카라칼라는 장인 플라우티아누스가 기록말살형에 처해지고 모든 이름이 비문에서 지워진 직후, 아내 플라우틸라를 완전히 죽여버리려고 했다. 그럼에도 세베루스 부부는 더 이상 이 사건을 질질 끌고 싶어하지 않아, 죽은 플라우티아누스의 딸(카라칼라의 아내)을 리파리 섬으로 유배보내는 선에서 서둘러 사건을 종결시켰다. 이때 세베루스와 돔나는 플라우티아누스의 손주들과 살아남은 아들 일가를 시칠리아로 강제 이주시키고 정착해 살게 하는 선에서 자비를 베풀었는데, 이들은 카라칼라가 즉위한 이후에도 해를 입지 않아 그들의 후손들은 이후 원로원에 복귀할 수 있었다.[27] 그러나 카라칼라의 증오는 사라지지 않았고, 모든 분노는 살아남은 아내 플라우틸라에게 집중됐다. 따라서 카라칼라는 제위에 오른 뒤 동생 게타를 죽이자마자, 섬으로 추방된 아내를 목졸라 죽이게 하고 그 머리를 가져오도록 명령했다.

1.2.9. 말년의 칼레도니아 원정과 사망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말년은 우울했다. 플라우티아누스의 죽음으로 그가 죽은 뒤 로마에서 골칫거리가 될 걱정 하나는 해결되었을지 모르지만, 장남 카라칼라와 차남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 사이의 반목이 매우 심각했다. 동복형제인 두 사람은 세베루스와 율리아 돔나가 더이상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사이가 심각하게 나빴다. 설상가상 두 후계자를 지지하는 세력들은 사이 나쁜 세베루스의 두 아들의 이러한 적대감을 부추겼다. 추종자들은 각자 두 형제의 비위를 맞춰 아부할 뿐만 아니라, 한쪽을 즐겁게 하고 다른 쪽을 격분시킬 만한 일을 계속 찾아내 그들을 서로 싸우게 만들었다. 이런 고민 속에서 브리타니아에서 문제가 발생하자 세베루스가 두 아들을 데리고 원정을 나선 것은, 황실 입장에선 다행스러웠다.

208년, 세베루스 황제는 칼레도니아(현재의 스코틀랜드) 원정에 나섰다. 칼레도니아인들에게 로마군이 습격을 받았고, 협상 끝에 포로들을 돌려받은 사실이 밝혀지자 브리타니아 속주 군단들을 믿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결과였다. 세베루스는 직접 칼레도니아인들을 응징하고자 나섰다. 그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때의 선례를 따르는 한편, 군대를 견제하기 위해, 황제 겸 총사령관 자격으로 군대를 이끌고 직접 출전했다. 비록 심각한 통풍으로 이미 건강이 나빠져 있었기에 움직이기가 어려워 가마를 타고 다녀야 했고, 어느 곳에서도 필요 이상으로 휴식하는 것을 참지 못했지만 그의 강인했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세베루스는 이참에 브리타니아 섬 전체를 공략함으로써 끊임없는 국경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정했다.

세베루스는 제국의 내정을 차남 게타에게 맡겨 그를 브리타니아 후방에 남겨뒀다. 이후 황제 자신은 장남 카라칼라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하드리아누스 성벽을 지나 스코틀랜드로 들어갔다. 칼레도니아인들의 끈질긴 게릴라 공격에도 불구하고 2년 뒤인 210년에는 상당한 성과를 거둔다. 로마는 북쪽으로 멀리 국경선을 넓히며 칼레도니아인들과 협정을 맺는 조건으로 중부 저지대의 권리를 넘겨받았다. 그러나 세베루스는 이제 나이가 들었고, 춥고 변덕스러운 날씨는 건강을 해쳤다. 그는 직접 일을 지시하는 것에 점점 힘들어 했다.

이 원정 당시, 세베루스는 원수보다 못한 사이가 된 두 아들이 서로 피와 땀을 흘리며 화해하길 원했다. 사실 인간적으로 두 아들 형제가 싸우고 반목하는걸 좋아하는 아버지는 당연히 없겠지만, 그 외 정치적인 관점에서 세베루스 왕조의 존속 및 로마 제국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두 형제가 화해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렇지만 카라칼라와 게타는 이런 아버지의 소망에도 강제로 추운 브리타니아까지 온 것에 대해 불만을 품었다. 둘의 관계는 그 어떤 원수보다 더 나빠진 상태였다. 이런 이유로 세베루스 삼부자 사이에는 묘한 기류가 흘렀다.

카라칼라와 게타는 서로 멀찍이 떨어져 서있었다. 동복 친형제는 막사를 함께 공유하지도 않았다. 둘은 식사 자리조차도 따로 가졌고, 전황 보고도 따로 받았다. 더 큰 문제는 군사적 재능이 뛰어난, 장남 카라칼라가 브리타니아 원정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카라칼라는 이번 원정을 단지 군대의 신임을 얻는 기회로 여겼고, 아버지를 묘하게 견제해 제 힘을 키우는데 집중했다. 당대 로마 정부 관료이기도 했던 역사가 헤로디아누스에 의하면, 카라칼라는 오래 앓기만 하고 빨리 죽지 않는 아버지를 골치 아프고 성가신 존재로 생각했다. 카라칼라는 좀 더 빨리 아버지를 제거하기 위해 의사와 시종들을 설득한 패륜적인 인간이었다. 심지어 자신과 아버지가 병사들보다 앞서 말을 달리는 사이, 실수인 척 하면서 의도적으로 무방비가 된 아버지의 등을 찌르려 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 계획은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세베루스가 위험을 알아차리고 말 안장에서 몸을 돌리면서 무산됐다. 이때 외침 소리에 겁을 먹은 카라칼라는 아버지를 사고인 척 제거하려는 계획을 포기했다고 한다.

칼레도니아인들과의 전쟁을 진두지휘하면서, 세베루스는 로마가 칼레도니아를 제압했다고 여겼다. 허나 칼레도니아인들은 저항했고, 세베루스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다시 원정을 실시했다. 그런데 재원정 수행 중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중병에 걸려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상태가 악화됐다. 결국 로마의 칼레도니아 원정은 중지되었다.

세베루스 황제의 병세는 에부라쿰(현재의 요크 시)으로 자리를 옮길 때부터 심각했다. 이에 프라이토리아니 근위대장 파피니아누스가 위원장에 임명돼 콘실리움(황제자문회의)을 연다. 아이밀리우스 파피니아누스는 율리아 돔나, 율리아 마이사 자매와 동향인 친척으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율리아 돔나가 결혼하기 전부터 세베루스와는 스카이볼라 밑에서 법학을 배운 친구이자 복심이었다.

파피니아누스가 콘실리움 위원장으로 원정에 같이 온 주요인사들을 소집해 회의를 에부라쿰에서 열었다. 한겨울에 열린 긴급 콘솔리움 개최 직후, 파피니아누스는 원로원 대신 후임 황제와 같은 주요 결정을 논의한다고 밝혔고, 관료와 장군들은 세베루스의 두 아들 카라칼라와 게타에게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위중함을 알렸다. 그래서 세베루스 대신 원정을 사실상 지휘 중인 장남 카라칼라와 론디니움(오늘날의 영국 런던)에 머물고 있던 차남 게타가 에부라쿰으로 향했다. 이후, 세베루스와 독대한 파피니아누스는 원로원에게 황제자문회의를 통해 정식으로 카라칼라, 게타가 후임황제가 됐음을 통보한다. 이때 파피니아누스는 카라칼라와 게타 공동 이름으로 원로원에게 서한을 보냈다.

세베루스는 숨을 헐떡이면서 친구 파피니아누스에게 두 아들의 미래와 세베루스 가문의 영속을 맡겼다. 원정 내내 전장에서 장군으로, 행정관으로 괜찮았던데다, 처가 사람이고, 로마 최고 법학자이니 당연한 결과였다. 따라서 파피니아누스는 이 직후 세베루스의 결정으로 카라칼라, 게타 형제의 공동 변호사, 근위대장, 국고 및 재정 책임자가 되어 사실상 섭정에 오른다.

이렇게 바쁘게 세베루스 사후에 벌어질 각종 결정, 명령이 오고 가는 가운데, 삼부자가 진짜 오랜만에 한 자리에 모인다. 본래부터 효자로 유명했던 게타는 런던에서 요크로 밤새 달려온 직후부터 아버지 세베루스 곁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는 며칠 밤을 새며 부친을 걱정했고, 직접 수발을 들었다. 그러나 카라칼라는 동생과 달리 아버지의 상태를 보고받고서도, 그저 부친을 지켜볼 뿐이었다. 이 당시, 세베루스는 병석에서 자신과 두 아들이 오붓이 밥을 먹고 함께 막사에서 생활하고 잠이 들길 소망했다. 그래서 두 형제는 아버지의 소원대로 황제막사에서 원정 후 처음으로 함께 앉아 식사를 했고, 삼부자는 오랜 만에 서로 가족간의 대화를 나눴다. 그러나 세베루스의 건강은 추운 잉글랜드 북쪽의 날씨와 야전 환경 탓에 호전되지 않았고, 세베루스의 두 아들 간의 반목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2월 4일, 세베루스가 군사기지 안에서 세상을 떠났다. 로마 황제 중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이후 황제가 속주 내 군사기지에서 세상을 떠난 두번째 사례였다. 이때 임종 자리에는 두 아들과 친구인 근위대장 파피니아누스, 주요 장군, 황제 자문회의 각료들이 함께 했다.

세베루스가 죽은 직후, 카라칼라는 황제의 명이라며 남은 원정을 중단시킨다. 카라칼라의 명으로 로마군은 칼레도니아에서 철수했고, 하드리아누스 방벽 남쪽으로 후퇴했다. 그 이후로 두 번 다시 로마군이 칼레도니아에 발을 들여놓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211년 2월 4일에 65세의 나이로, 스코틀랜드 정복 계획을 미완으로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에 아들들에게 '서로 사이좋게 지내라. 군인들을 부유하게 해주고 다른 모든 사람은 무시하라.'는 유언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누구도 황제와 자식들끼리 사적으로 이야기한 것을 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실제 유언이 아니라 디오가 상황을 바탕으로 창작한 것으로 판단된다는 평도 있다. 그러나 이는 놀랍게도, 사실인 유언이다. 왜냐하면 세베루스는 서거하면서 유지를 받들 이들을 증인으로 남겨 놓고 이들에게 두 아들과 자기 가문의 영속을 보장받았기 때문이다. 이중 유지를 받든 파피니아누스, 마리우스 막시무스는 모두 디오의 친구였는데, 루키우스 마리우스 막시무스는 이 기록의 출처인 디오와 그 친분이 대단했다. 더군다나 이 마리우스 막시무스는 100년 전 수에토니우스의 기술법을 대단히 좋아했으며, 잘난 척이 심하고 호사가 기질이 매우 강해, 회고 형태로 <로마사>를 저술한 디오에게 좋은 정보도 많이 준 세베루스 왕조 내 최고 실세였다.[28] 이 유언의 전반부는 지켜지지 못했으나 후반부는 상당히 충실하게 이행되었다. 세베루스는 이 말을 한 뒤 '나는 모든 것을 했다. 원로원 의원도 했고 변호사도 했다. 집정관도 했고 대대장도 했다. 장군도 했다. 그리고 황제도 했다. 국가 요직은 모두 거쳤고, 임무를 충실히 했다고 자부한다. 허나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그 모두가 다 헛된 것 같다.'는 말도 덧붙이며 자기 아들과 가문의 생존을 그 주변인사에게 부탁했다. 이 말과 행동은 자신의 왕조가 오래가지 못할 것을 깨달은 데서 온 것으로 풀이된다.

세베루스의 서거를 지켜본 두 아들은 군사 작전을 중단했다. 그들은 아버지의 유골을 가지고 로마로 돌아갔고 하드리아누스 영묘에 안치했다. 곧이어 원로원은 그를 신격화했다.


[1] 오늘날 리비아 트리폴리에서 동쪽으로 약 123km 가량 떨어진 로마 식민도시이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시대에 번창했다. [2] 이렇게 설명된 이유는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의 노멘이 특이하게 때문이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의 본래 성씨는 페트로니우스가 맞는데, 이 사람의 경우 본래 성씨(페트로니우스)가 있음에도, 할머니가 오늘날 밀라노 근교에 살던 디디아족 출신임을 알려주는 노멘을 추가로 붙이지 않고 아예 개성(改姓)해 다르게 사용했다. 이는 밀라노 일대의 대호족 가문인 부계가 오래된 명망가임을 생각해보면 매우 이례적인 케이스인 셈. [3] 율리아누스의 어머니 아이밀리아 클라라는 세베루스 황제와 동향 출신인데, 그녀의 고향은 옛 카르타고 식민시인 하드루메툼이다. 그 일가는 집정관까지 배출한 이탈리아 혈통의 푸닉 가문이라고 하며, 아프리카 속주와 그 옆의 트라폴리타니아 일대의 최상류 이탈리아 혈통 가문과는 거진 친인척 관계를 맺고 있었다. 따라서 모계를 따라 올라가면, 이 지방에서 끗발 날리는데다 카르타고와 하드루메툼 일대에서 치안판사 등에 임명돼 근무한 조상을 여럿 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일가와 친척이지 않은 것이 이상했다. [4] 이렇게 된 속사정에는 세베루스의 부계 가문이 쌩평민인데다, 워낙 소수였던 게 컸다. 허나 이 정도로 빠르게 사라진 진짜 이유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두 아들 카라칼라와 게타 사이의 골육상쟁 당시, 카라칼라가 게타 지지자들을 재판없이 인간사냥하듯 살육한 탓이 컸다. 카라칼라는 동생 게타를 죽이고 제 정신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원로원 앞에서 자신의 정당성을 호소할 때, 내심 세베루스 황제의 당숙 셉티미우스 아페르 형제와 그 일가가 자신을 옹호해주길 바랬다. 하지만 그들은 침묵을 유지하면서, 카라칼라 형제의 대립에 끼어들지 않았다. 이는 당연한 선택이었으나, 카라칼라는 이런 반응에 불만을 품고 게타를 지지했다며 죄를 덮어 씌웠다. 그리하여 본래부터 셉티미우스라는 희귀한 성씨를 사용한 집안인, 푸닉의 세베루스 가문은 카라칼라 손에 일찌감치 전멸하게 된다. [5] 공교롭게도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의 어머니는 이탈리아 혈통의 아프리카 속주 출신이었다. [6]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모두 세베루스 가문 사람이며, 아프리카 속주에 배경을 둔 공통분모가 있었다. 왜냐하면 디디우스의 어머니는 북아프리카 속주 출신으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집안처럼 일찍이 이 일대로 건너온 집안 태생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율리아누스의 외가는 집정관까지 배출한 원로원 계급이었기에 차이는 있었다. [7] 이 사건에 대해 디오 카시우스로 대표되는 원로원은 새로 뽑힌 프라이토리아니 병사들이 라틴어로 말할 뿐 그리스어도 못하고 라틴어조차 제대로 읽고 문법대로 구사하지 못한다며 비난했다. 디오 역시 이런 논조로 이를 비난하면서 본국 출신들을 죄다 실업자로 만들어 길거리는 빈민이 넘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들의 생각과 달리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세베루스의 조치들은 라이투스의 부하들을 일시에 배제해 큰 도움을 줬다. [8] 세베루스는 본인 가족 중에서는 원로원에 첫 입성한 케이스였다고 해도, 사촌 가이우스 등이 원로원에 먼저 입성한 집안 출신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분명히 있었다. [9] 지금의 터키 이즈니크. [10] 클로디우스 알비누스가 브리타니아 내 거의 대부분 병력을 움직인 행동은 내전 승리 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게 이 일대에 관한 고민을 안겨주게 된다. [11] 니게르와 2년 동안의 치열한 내전을 치르는 동안 원로원의 행태를 보면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다. [12] 세베루스는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에게 대항해 황제를 참칭하고 로마로 진군했지만, 의외로 율리아누스의 시신을 정중히 수습해 유가족들에게 전달하고 정식장례 절차를 거치도록 배려했다. [13] 술피키아누스는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를 지지했던 알비누스파의 핵심 인사였기 때문에, 205년 자살을 강요당한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처럼 세베루스가 어거지로 숙청한 케이스는 아니었다. 그래도 세베루스는 예전의 술라처럼 술피키아누스의 아들 티티아누스에게 연좌죄를 적용해 대를 끊거나, 술피키아누스의 아들과 그 가문의 앞길을 막진 않았다. 따라서 티티아누스는 카라칼라 시대동안 황제령 이집트 장관에 올랐다. [14]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대에는 황제가 그리스 애호가였기 때문에 그리스 출신을 원로원 의원으로 많이 채웠다. 즉 황제의 성향에 따라 변하는게 일반적인 원로원 의원들이었다. [15] 다만 이는 세베루스가 느닷없이 처음으로 실행한 것이 아니라, 정책의 방향이 아우구스투스 이후로 쭉 그래왔을 뿐이었다. [16] 애초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그 자신이 총독직을 수행하기 이전에는 법무관으로써 커리어를 쌓고 있었던데다, 황제로 등극하고 나서도 집무시간 대부분을 송사 처리 및 재판 등 법과 관련된 일들을 전부 수행하기도 했다. [17] 어머니는 루키우스 베루스의 누나 케이오니아 파비아인데, 이 여자가 누구냐하면 하드리아누스의 후계자, 양자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의 장녀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약혼했던 네르바-안토니누스 가문의 일원이었다. 또 그의 아내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딸 파딜라였고, 철인황제 생전 마르쿠스 황제가 성품과 재능 등을 이유로 총애한 사위 중 한명이었다. [18] 다행히 세베루스는 플라우티우스만 사형을 언도해 죽였을 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딸 파딜라와 그녀의 자녀들은 죽이지 않고 재산을 몰수하는 등의 행동은 안 했다. [19] 트라야누스의 조카, 하드리아누스의 매부로 네르바~하드리아누스 시대 동안 원로원 의원으로 있던,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황족이다. 하드리아누스가 루키우스 베루스의 친부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를 양자로 맞이할 당시, 불만을 품었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손자(하드리아누스 누나의 손자)와 함께 136년 자결을 강요당하는 방식으로 살해됐다. [20] 고향이 북아프리카라는 점에서 로마 최대의 적 한니발과 학살자 술라를 합친 놈이라고 깐 것. [21] 게다가 세베루스가 원로원과 척을 지게 된 결정적인 사건 중 하나는 세베루스의 로마 입성 후 원로원이 기록말살형을 명한 전임황제 콤모두스에 대해 철회한 사건이다. 원로원 입장으로서는 굴욕.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세베루스와 콤모두스 간의 사이가 좋았던 것도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세베루스는 콤모두스의 현역 황제시절이자 세베루스 자신이 군단장이었을 때 콤모두스에게 망신을 당한 적이 있었고 그 탓에 평소 콤모두스 하면 이를 갈던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세베루스가 왜 콤모두스에 대한 기록말살형을 철회를 명령했냐 하면, 단순히 정치적인 명분을 쌓고 경쟁자인 알비누스의 지지자가 다수 포진해있는 원로원의 권위를 떨어트리기 위해서였다. [22] 아우구스투스(아마도)가 복무 중 결혼을 금지시킨 후 트라야누스 황제, 하드리아누스 황제들이 점점 혼외자식들의 법적권리를 향상시켜주고 있었다. 제국은 이미 수십년 전부터 복무 기간내 결혼 합법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23] 군인 모임은 아우구스투스 때부터 금지시킨걸로 보고 있지만 이미 하드리아누스 시기에 제국 전역에서 생겨난 흔적이 보여진다. 세베루스 황제 때 군인의 봉급이 오르면서 이런 모임이 더 활성화된 것뿐이다. [24] 하지만 이 원정으로 타격을 입은 파르티아는 쇠퇴하다가 결국 멸망했고, 이는 후에 사산조 페르시아가 들어서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여기에 군인황제시대가 도래하는 동시에 황제가 잡혀가고 한때 3개 국가로 제국이 분열까지 됨으로써, 전선이 쓸데없이 늘어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결국 세베루스 개인으로는 수확이나 국가적 측면에서는 엄청난 손해가 된 것이다. [25] 켄투리온 군단의 최소 단위인 백인대(켄투리온)의 지휘관. [26] 따라서 플라우티아누스의 오랜 친구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출신인, 자신의 개국공신 아일리우스 코이라누스에게 총독 자리를 주며 카라칼라에게 보복받지 않도록 도와줬다고 한다. 물론, 코이라누스 역시 워낙 머리회전이 좋고 줄타기를 잘한 인사인 터라, 카라칼라에게 자신이 플라우티아누스가 벌인 악행을 알고 거리를 두고 견제했음을 증명해 곧 카라칼라의 최측근으로 신임을 얻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사후에도 카라칼라의 두터운 호의 속에 승승장구하다가 사망했다. [27] 그 후손 중 한명이 비극의 부제로 유명한, 율리아누스의 이복형 갈루스를 낳은 어머니다. [28] 이런 까닭에 카라칼라는 게타를 죽인 이후에도 마리우스 막시무스를 아버지로 따르며 고명대신으로 존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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