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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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簡
(253 ~ 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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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중국 서진의 인물. 자는 계륜(季倫). 산도의 아들. 사례 하내군 회현 사람.2. 생애
성격은 온화하면서 아버지의 풍모를 이어받았지만 산도는 20년간 전혀 알지 못했으며, 혜소, 유막, 양회 등과 명성을 나란히 했다.처음에 태자사인을 지내다가 여러 차례 옮겨 태자서자가 되었다가 황문랑을 지냈다. 나가서는 청주자사를 지내다가 중앙의 부름을 받아 시중이 되었으며, 얼마 후에는 상서로 옮겼다가 진군장군, 형주자사, 영남만교위가 되었지만 가지 않고 다시 상서에 임명되었다.
광희 초에 이부상서로 옮겼고 영가 초에 옹주자사, 진서장군에 임명되었다가 상서좌복야, 영이부가 되었다.
309년에 정남장군이 되어 형주, 상주, 교주도독, 광사주제군사 가절로 양양을 진수했는데, 천하가 어지러웠지만 산간은 한가롭게 놀면서 술만 즐겼다. 형주의 호족 습욱이 아름다운 연못을 가지고 있어서 산간은 그 연못에 나가 술을 마시면서 취하고 연못을 고양지라 했는데, 이 당시 아이들이 산간이 술에 취한 것을 가지고 노래를 불렀다.
유총의 공격으로 낙양이 위험하자 독호 왕만에게 군사를 이끌게 했으며, 열양으로 갔다가 왕여에게 패하고 왕여가 양양을 위급하게 하자 농성하면서 지켰으며, 산간은 엄억이 위협하자 하구로 옮겼다.
화질이 강주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어떤 사람이 그를 토벌하라고 권하자 화질이 옛 친구라 마음이 아프다면서 다른 사람의 위기를 이용해 공을 세우겠냐면서 거절했으며, 59세에 사망하자 정남대장군으로 추증하고 의동삼사를 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