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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선

사야가에서 넘어옴
김충선
金忠善
파일:external/blog.globalnews.kr/20101012214455.jpg
녹동서원에 봉안된 상상화(1960년대 작)[1]
성명 <colbgcolor=white,#191919>김충선 (金忠善)
일본명 사야가 (沙也可)[2]
본관 사성 김해 김씨[3]
출생 1571년 1월 28일
사망 1642년 10월 23일 (향년 71세)
경상도 대구도호부 상수남면 우록동
(現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부인 장춘점(張春點)의 딸 인동 장씨
자녀 5남 1녀
장남 - 김경원(金敬元, 1615년생)
차남 - 김우상(金右祥, 1617년생)
3남 - 김경신(金敬信, 1620년생)
4남 - 김계인(金繼仁, 1623년생)
5남 - 김경인(金敬仁, 1627년생)
장녀 - 장달문(張達文)의 처
선지 (善之)
아호 모하당 (慕夏堂)[4]
관직 정2품 상 정헌대부
증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훈련원사[5]
행 용양위 대호군[6][7]

1. 개요2. 생애
2.1. 조선으로 귀순하다2.2. 임진왜란 이후
2.2.1. 정체에 대한 가설
3. 일본에서의 평가4. 그 외
4.1. 자료에 대한 논란
5. 다른 매체에서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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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임진왜란 당시 활약한 항왜 출신의 장수.

2. 생애

2.1. 조선으로 귀순하다

KBS 대하드라마 징비록에서 조선군에게 귀순하는 사야가와 그의 부대들[8]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의 좌선봉장을 맡아 휘하 다수의 철포수들이 포함된 3,000명의 부대를 이끌고 조선에 상륙했다. 김충선이 썼다고 알려진 《모하당[9]문집》에 따르면 그는 어려서부터 유학 공부에 심취해 있었고 조선과 중국의 문화를 흠모했으며[10] 살인과 약탈, 배신을 일삼는 당시 일본의 비속한 풍속에 수치심을 느꼈다고 했다.[11] 그리하여 4월 13일 부산에 상륙한 후 부하들에게 노략질을 금하는 군령을 내리고 이틀 뒤 침략의 뜻이 없음을 알리는 <효유서>(曉諭書)를 백성에게 돌렸다. # # # [12] 이후 경상도 병마 절도사 박진에게 서신을 보낸다.
"사람이 사나이로 태어난 것은 다행한 일이나 불행하게도 문화의 땅에 태어나지 못하고 오랑캐 나라에 태어나서 끝내 오랑캐로 죽게 된다면 어찌 영웅으로 한이 되는 일이 아니랴 하고 때로는 눈물짓기도 하고 때로는 침식을 잊고 번민하기도 했습니다.”

"이 나라의 예의문물과 의관 풍속을 아름답게 여겨 예의의 나라에서 성언의 백성이 되고자 할 따름입니다."

서신을 통해 "우리는 싸움을 원치 않으니 투항하겠다" 라는 의사를 밝히고 뜻을 같이하는 부하 500명과 함께 조선으로 건너가서 투항하였다.

선조는 그의 투항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행재소(行在所)[13]에서 그를 맞아 무예를 시험해보고는 곧바로 벼슬을 내려주고 전장에 활용하도록 했다.

김충선은 당시 조선에 조총을 보급했고 훈련하게 한 것으로도 유명한데[14] 그는 일본에서 서양으로부터 조총을 일찍부터 도입한 기이 지방 출신인데다가 집안 대대로 각종 무구를 만들어 무기 제조에 대한 조예가 깊었고, 그의 가문도 손꼽히는 조총 부대 지휘관들을 배출했다. 말 그대로 일본의 조총 개발 역사와 아주 인연이 깊은 인물인지라 조총에 대한 구조와 제조기술에 밝았다. 그는 조총을 제작하는 데 그치지 않고, 화약의 제조에도 관여했고, 조총을 이용한 고급 전술도 직접 가르쳤다. 또한, 사격뿐만 아니라 검술에도 능했는지, 검술을 비롯한 단병접전도 훈련하게 했다. 20세기 들어 김충선의 집을 수리하다가 담장 속에 감춰진 조총을 발견하기도 했다.[15]

이러한 조총 전문가의 귀순과 적극적인 협조는 조총을 체계적으로 운용하던 일본군에 비해 대인화력이 부족했던 조선 처지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는 이러한 공로로 같은 해 12월, 종2품 가선대부의 벼슬을 받았다. 그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잇따라 공을 세웠으며 도원수 권율, 어사 한준겸(韓浚謙, 1557~1627)이 주청하여 한국식 성명을 하사받았는데 이름을 김충선이라 했다. 이후 곽재우 등의 의병과 함께 활약하며 왜군 격퇴에 일조하였다. 조총 전문가인 김충선의 노력으로 불과 1년 만에 조선은 일본의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는 품질의 조총을 양산하게 되었고, 이후 조총은 궁시를 넘어 조선의 국방을 책임지는 가장 중요한 무기가 되었다.

<모하당술회>(慕夏堂述懷)[16]에서는 "명분 없는 전쟁을 일으킨 왜군에 환멸을 느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에 불만을 품었던 반대파 세력의 주요 인물 중 하나였고, 결국 도요토미의 뜻을 꺾진 못했으나 출병하는 척하며 귀순했다고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사실 당시 일본에서마저 임진왜란을 명분도 실속도 없는 도요토미의 가장 큰 실책으로 여길 정도로 부정적인 평가를 했는데 이건 현대에 와서도 별반 다를 게 없어서 현대 일본 미디어를 보면 '도요토미가 미쳐서 전쟁을 일으켰다'는 식의 부정적인 묘사가 많다. 당장 도요토미의 최측근들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 이시다 미츠나리도 전쟁 반대파였다. 비록 진실은 알 수 없으나 도요토미의 최측근들조차 '이건 명분도 없고 실속도 못 챙기는 멍청한 짓이다.'라는 이유로 반대했던 걸 고려하면 사야가가 실제로 반대파였을 가능성이 있다. 애초에 겨우 전국시대가 끝나고 평화가 오나 했는데 뜬금없이 바다 건너 옆 나라에 쳐들어가서 또 전쟁을 일으키겠다고 하면 염증이 일만도 하다.

상식적으로 영주들로서는 전국시대가 끝났으니 더는 영지를 빼앗길 걱정을 하지 않고 영지에서 자신과 자손들이 어떻게 천년만년 해먹을지 생각하는 게 낫지. 잘 모르는 외지에 나가서 죽을 위험을 겪거나 고생할 필요가 없다. 실제로 조선에 갔다가 엄청난 추위와 기아, 풍토병 때문에 끔찍하게 고생했고 몇몇은 죽기까지 했다. 거기에 임진왜란 당시 파병 나간 병력은 도요토미 직할병이 아니라 전부 영주들이 자기 영지를 쥐어짜서 징발해야 했기 때문에 7년이라는 장기간이나 전쟁이 이어진 이상 영주들은 에도 시대의 번영이고 나발이고 전쟁 도중과 직후에는 큰 손해를 봤을 가능성이 높다.[17]

당시 조선 침략을 반대했던 다이묘는 당시 일본 내에도 꽤 많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임진왜란을 일으킨 원인 중 하나가 일본 통일 이후 휘하의 부하들에게 영지를 나눠줘야 하는데 일본의 땅만으로는 부족해서였다. 물론 도요토미의 야망대로 명나라까지 정복하는 데에 성공했다면 일본 본토 따위는 신경도 쓸 필요가 없었겠지만,[18] 명나라까지 점령하지 못하더라도 조선 반도의 절반만이라도 점령한다면 부하들에게 나눠줄 영지는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일본 내 세력이 부족한 중소규모 다이묘들이나 세력 기반이 될 영지마저 없는 아시가루 및 잡장들은 임진왜란에 적극 동참했으나, 이미 일본에 세력 기반이 확실히 다져진 거대 다이묘들은 상대적으로 전쟁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예컨대 도요토미와 비등할 정도로 세력이 강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병력 동원을 요청하는 도요토미의 명령에도 이에야스의 군대는 조선에 상륙하지 않고 일본에서만 놀았는데, 이 행보는 이후 이에야스가 쇼군에 오른 후 조선과의 관계를 회복할 때도 중요하게 작용하기도 했다. 더불어 다테 마사무네는 도요토미를 상대로 한번 반란을 일으킨 전적이 있어 약점을 잡힌지라 자기 군대를 이끌고 마지못해 조선에 상륙하긴 했으나, 날씨도 추울뿐더러 전쟁이 너무 오래간다는 핑계로 반년 만에 일본으로 철수해 버렸다.

이외 우에스기 카게카츠도 조선을 침략하긴 했지만 적극 전투에 참가하진 않고 점령 후 당시 일본에서 보물로 통하던 조선의 서적, 도자기 같은 재물을 약탈하거나 조선의 도공이나 장인들을 납치하는 데 집중하였으며 이조차도 3개월 후엔 그만두고 본국으로 철수하는 등 철저히 자기 잇속만 챙겨가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구로다 나가마사, 시마즈 요시히로,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쵸소카베 모토치카 등 현대에도 명장 내지는 명 다이묘로 대접받는 인물들이 임진왜란에 적극 참여하긴 했으나 그들은 원래 도요토미의 부하였거나 도요토미와 전쟁하다가 패배해서 도요토미에게 다시 한번 개겼다가는 목이 날아갈 처지의 인물들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던 입장이었다. 즉, 사야가 역시 전쟁에 소극적이었는데 그렇다고 전쟁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뻗댈 수 있을 만큼 힘이 세지는 않아서 강제로 임진왜란에 참여하게 됐다고 볼 수 있으며 어느 정도 명성은 있어서 지휘관 자리를 맡게 되었고 그런 상황에서 조선으로 귀순한 것이다.

따라서 정리하면 사야가의 투항에는 그의 정치적 배경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사야가는 자신과 파벌이 다른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강제징병 되어 사실상의 화살받이로 조선에 투입되어 차도살인으로 버려지는 처지였고, 임진왜란에서 살아남더라도 어차피 숙청을 피할 수 없을 테니 살기 위해서 조선에 투항했다는 것. 그의 모든 속내를 짐작할 수는 없으나 이런 정치적 상황 또한 그의 투항 이유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귀순 이후 사야가는 경상도 지역의 의병들과 함께 힘을 합쳐 일본군과 여러 번 싸움을 벌였고, 곽재우(郭再祐)와 연합해 일본군을 상대하기도 했다. 의병 및 조선군 장수로서 모두 78회의 전투를 치렀으며, 이때 전공을 세워 정3품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손시로(孫時老) 등 항복한 왜장(倭將)과 함께 의령(宜寧)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무관 3품(三品) 당상(堂上)에 올랐으며, 이어 사야가는 울산성 전투에 경상도 우병사 김경서(金景瑞) 휘하로 울산왜성에 농성 중이던 가토의 1군을 섬멸하는 공을 세우고,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를 하사받기도 했다. 이후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 어사 한준겸(韓浚謙)의 주청(奏請)으로 선조로부터 성명(姓名)이 하사되고 하인 정2품 자헌대부(資憲大夫)로 가자되었다.

벼슬로 보건대 논란(아래 참조)에도 인정할 만한 전공 자체는 충분했으며 조선 조정 역시 이를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또 항왜 출신 무장에게 벼슬을 내리고 치하함으로써 대외적으로 항왜 출신이라도 충성을 보이면 이만큼 대우한다고 선전하는 목적도 있을 것이다. 사야가의 정체에는 논란이 있으나 다이묘급은 아니었던 건 확실한데, 당대 일본에서 웬만한 공가와 다이묘도 정2품에 대응하는 관위에 오르는 일은 드물었다는 걸 고려하면 조선에 항복해서 일본에서 살았으면 평생 오를 일 없던 품계에 오르는 데 성공한 것이다. 김충선이 말년까지 조선에 충성할 만하다.

2.2. 임진왜란 이후

남풍이 때때로 불제
고향을 생각하니
조상의 무덤은 평안한가
일곱 형제는 무사한가
구름을 보며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과
봄풀을 보고 솟아오르는 생각이
어느 때인들 없을쏘냐
아마도
세상에 흉한 팔자는
나뿐인가 하노라

선조로부터 모래(沙)에서 나오는 금(金), 즉 사금(沙金)에서 따와 김해 김씨 성을 하사받았다. 가야 수로왕계인 김해 김씨와 구별하기 위해 '사성(賜性 : 하사받은 성) 김해 김씨'라 칭한다. 김충선이 낙향 후 현재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友鹿里)에 사슴을 벗하여 살았기에 우록(友鹿) 김씨라고도 한다. 이 우록이란 지명은 김충선이 직접 지은 지명으로 이곳은 현재까지도 사성 김해 김씨들의 집성촌이 조성되어 있다.[19] 이 지역에는 김충선의 사당인 녹동 서원이 있는데, 뒷 편 산 중턱에는 김충선의 묘가 있고 옆편에는 달성 한일 우호관이 있으며 일본에서 일본인 관광객이 한 해 1,000명 정도 방문한다고 한다.
남풍이 건듯 불어
행여 고향 소식 가져온가
급히 일어나니
그 어인 광풍인가
이내 생전에 골육지친 소식
알 길이 없어
서러워하노라
<남풍유감> 중에서

임진왜란 이후 북방 경비를 위해 북방에서 근무했으며, 이 공로로 정2품 상 정헌대부 벼슬을 받는다. 1624년 이괄의 난 때 이괄 군에 항왜들이 많이 가담했다가 토벌당했는데, 그중 무예가 뛰어난 서아지(徐牙之)라는 항왜는 도저히 조선군이 잡을 수가 없었다. 그때 김충선이 서아지를 만나 잘못을 꾸짖은 후 목을 베었다고 한다. 그 공으로 땅을 받았으나 군대의 둔전으로 사용하라고 다시 반납했다. 이때 참전한 이유는 이괄의 반란군에 항왜가 일부 가담했기에 조정에서는 이러한 항왜들을 배은망덕한 놈들이라 여기며 분노하였고, 같은 항왜인 김충선으로서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고 의심의 눈초리를 씻기 위해 공을 세워 그 의심을 풀어야 했기 때문도 있었을 것이다.

그 후 1636년(음력) 병자호란이 터지자 쌍령 전투에도 참전하여 청나라군 500기를 전멸시키는 등 활약했으나, 결국 조선 조정이 항복하자 통곡하였다고 한다. 이후 우록동에서 은둔하여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다가 1642년 사망하였다. 일본에서부터 조선, 청나라까지 이어지는 수차례의 전쟁 속에서 그야말로 다사다난한 인생을 보내다 간 셈.

사후 1776년 삼도 유림들이 나서 김충선에 시호를 내릴 것과 정려를 세우고 증직을 높여 줄 것을 상소하는데, 이후 사(祠)를 세우자는 논의로 이어졌다. 그 결과 1794년 정조 18년 우록리에 녹동사(鹿洞祠)와 녹동서원이 세워지고, 1812년 유생 김경탁이 김충선에게 시호를 내려줄 것과 관직의 추증을 요청하였으나 반려되었다. 다만 1892년 고종 29년 12월 '정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 훈련원사'로 증직됐다.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2008년 초까지만 해도 '일본에서 이름이 뭔지 알 수 없다'였던 내용이 2009년 들어 '존재 자체가 의심스럽다'며 '현재 사야가의 자손이라 자칭하는 일족이 살고 있다'는. 후손들이 보면 분개할 만한 내용으로 바뀌어 있었으나 이후 과격한 표현이 완화되었다. 일제강점기의 식민 사관은 《 조선왕조실록》 등 조선의 기록을 마구잡이로 깎아내렸고, 일본 학자들은 김충선에 대해 조선에서 지어낸 가공의 인물로 생각하는 경향이 짙었다. 한마디로 학술적으로 수준이 매우 낮을뿐더러 이미 70여 년 전에 유효하지 않은 것으로 판정 난 구닥다리 학설에 근거해서 작성되어 있다는 얘기다. 현실은 집성촌 후손들의 유전자 검사에서 한국인과 다른 조몬인의 유전적 특징이 발견되어 KBS 역사스페셜에서 방영되기도 했다.

실제 일본 사학계에서는 이와 정반대로, 전전의 사관과 분위기에서 탈피하려는 노력이 있었고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임진왜란에 관한 연구가 상당히 진보했다. 특히 나카무라 히데타카 같은 학자는 《조선왕조실록》은 물론 《모화당문집》도 사실에 근거한 부분이 많다고 보면서 사야가를 실존 인물로 학계에 널리 알려서 이미 사야가 실존은 수십 년 전에 정설로 인정받은 지 오래다. 여기에 대중적인 인지도가 매우 높은 문호 시바 료타로가 사야가에 관한 수필을 쓴 것으로 말미암아 우록동에는 일본인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을 정도. 1992년에는 일본 NHK 방송이 ‘출병에 대의 없다-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배반한 사나이 사야가’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방영하기도 했다. 이후 일본에 사야가 연구단체들이 설립되었고, 1998년 한국과 일본 교과서에 김충선 장군의 이야기가 실렸다.

즉, 사야가에 대한 위키 백과의 폄하적 서술은 학술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이미 수십 년 전에 폐기된 것이다.

일본에도 가족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에 귀화한 뒤에도 일본에 남겨둔 가족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가 몇 편 남아 있다. 하지만 그가 전향한 죄로 몰살당한 것인지 직계든 방계든 간에 현재 일본에서 그의 후손을 자처하는 일족은 없다고 한다.[20] 그래서 현재 확인된 그의 후손은 조선에서 새로 가정을 꾸린 뒤 태어난 자식들과 그 자손들뿐이다. 한때 한국의 후손들이 조선 사기장 자손들을 찾는 움직임과 더불어 일본에서 그의 후손을 찾으려 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사실 아래에서 서술하듯이 여타 조선 기록에 등장하는 일본인들과 마찬가지로 김충선은 일본에서는 누구였는지 정체가 불분명한 상태라 일본에서 후손을 찾으려고 해도 큰 의미는 없을 것이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Families_whose_ancestors_came_to_Korea_with_a_Japanese_Kato_Kiyomasa.jpg

우록동에 살던 후손들은 1904년 대한제국이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소문을 듣고 찾아온 일본 제국 경찰 및 일본의 탐험가들과 만났다.

후손들의 증언에 의하면 일제 강점기 당시 혹심한 폭력은 없었지만, 우록동에 왜경이 와 시비를 걸거나 매국노, 비국민의 후손이라며 매도하는 등 후손들을 귀찮게 한 적이 많다고 한다.

시조가 일본인이라 그런지 비교적 족보가 늦게 열려서 그런지[21] 사성 김해 김씨는 조선 후기 족보 위조의 파도 속에서도 사칭 당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2.2.1. 정체에 대한 가설

쇼와 덴노 연간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상적 귀순자.[22] 노부나가 쪽 가신의 일족이 아닌가 하는 설도 있다. 오다 노부나가 사망 이후 히데요시가 정권을 잡으면서 노부나가의 가신들을 대부분 숙청시켜 반감을 많이 사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병사 직전에도 이들의 원한이 두려웠던지 남은 가족들의 안위를 도쿠가와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또 시바 료타로의 어느 수필에서는 '사야가'라는 것은 이름이 아니고 일본어의 감탄사를 음차한 것이라는 설을 제시한 바 있는데, 그렇게 된다면 전혀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
  • 사이카슈의 일원 설
    일본의 호족 연합이자 용병 집단이었던 사이카슈의 일원이었다는 설. '사야가'라는 한자 표기가 '사이카'와 유사하고, 사이카슈는 철포에 능숙한 것으로 유명한 집단이었기 때문에 매우 유력하다고 생각되는 설이다.
    • 스즈키 요시유키(鈴木善之)
      김충선은 자신의 자를 '선지'(善之)로 지었는데, 일본 측의 기록에서 사이카슈(雑賀衆)에 스즈키 요시유키(鈴木善之)(!)라는 이름을 확인할 수 있으며 조선에 항복한 것까지 확인[23]되기에 가장 유력한 설. 스즈키는 호족 연합이었던 사이카슈의 두령을 세습하는 지도자 가문이었기 때문에 스즈키 가문의 일원이었다면 유학 공부에 심취하는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좋은 교육을 받았을 가능성은 높다.
    • 사이카 마고이치
      사이카슈의 두령인 사이카 마고이치,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3대 스즈키 시게히데[24]가 김충선이라는 설이다. 스즈키 시게히데는 1585년 히데요시의 키슈 정벌 이후로 기록에서 사라지기 때문.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나이[25] 그래서 그럴 가능성은 낮다.
      이 설은 김충선 = 사이카 마고이치 설을 바탕으로 한 소설인 《바다의 가야금》로 유명한데, 정작 이 《바다의 가야금》에서도 나이 문제 때문에 스즈키 시게히데가 아닌 그 아들 '스즈키 고겐다이'를 4대 사이카 마고이치이자 김충선인 인물로 설정했다.
    • 오카모토 에치고
      네임드 항왜인 오카모토 에치고(岡本越後)가 김충선이라는 설. 오카모토 에치고는 울산성 전투 당시 조명 연합군에 속해서 군대를 이끌고 울산성에 화의 사자로까지 갔던 항왜이다. 《조선 왕조 실록》에는 항왜 월후(越後)를 사신으로 울산성에 보냈다고 나오며 일본 측 기록에는 8,000명을 이끄는 항왜 오카모토 에치고노카미가 항복을 요구하는 사절로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처음에는 당장 항복하라고 큰소리를 치다가 대화가 진행되자 일본을 버린 것을 후회하고 울면서 지금이라도 일본에 다시 귀순하고 싶다고 했다고 묘사되어 있다. 다만 일본 측 기록은 적당히 걸러 봐야 할 필요가 있는데, 울산성 전투 당시 일본군의 열악한 상황을 볼 때 항복을 받아내러 간 사람이 대화 도중 지레 겁먹어서 다시 귀순하길 원하며 울었다는 것은 신빙성이 좀 떨어지기 때문.[26]
      이 설은 키타지마 만지와 심수관이 제기한 설로 창작물 중에는 안병도의 《일본정벌기》, 김경진과 같이 쓴 소설인 《격류》에서 이 설을 채용했다. 다만 위에 나온 사이카 집단 설도 포함해서 사이카 집단의 일원이었던 오카모토가 조선에 와서 항복했다는 것으로 설명했다. 《 임진왜란(김경진)》에서도 이 설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 하라다 노부타네
    일본에서는 하라다 노부타네(原田信種)라는 설도 있다. 카토 키요마사의 가신들을 조사해 본 결과 하라다 노부타네가 조총과도 관련이 있는 보급 관련 직책으로 임진왜란에 참가해서 조선으로 간 후 생사불명이 되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이를 근거로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라다 노부타네는 울산성 싸움에서 전투 중 실종되었다는 설이 다수설이다.
  • 아소씨 가문 가신 설
    가토 기요마사의 영지인 구마모토는 원래 아소산을 섬기는 대신관인 아소씨 가문이 다스리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땅을 빼앗겼고 가토를 따라 강제로 출전하게 되었는데 그 아소 가문의 가신이 아니었겠느냐는 설이다. 위에 나온 오카모토 에치고가 아소 가문 사람이라는 기록이 있어서 주목받는 설이다. 특히 일본의 기록에 오카모토 에치고노카미 외에 아소미야 에치고노카미(阿蘇宮越後守)라는 항왜도 기록되어 있고, 아소 일족이 '타이코 검지'[27]에 대한 반발 등으로 반란을 일으키고 당주인 아소 코레미츠(阿蘇惟光, 1581~1593)가 가신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에 책임을 지며 처형당했다는 기록을 볼 때 오카모토 에치고노카미가 아소 일족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는 설이다. 실제 조선과 일본의 기록이 맞아떨어지는 것이 많아서 최소한 오카모토 에치고노카미는 아소 일족일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키타지마 만지는 아소 일족의 아소미야 에치고노카미=오카모토 에치고노카미=김충선으로 추정했고, 심수관은 사야가라는 이름 때문에 위에서 언급한 사이카 일족 연계설도 언급하는 정도의 차이가 있다.

3. 일본에서의 평가

1915년 일본인 연구자들의 모임인 '조선 연구회'는 사야가 문집인 《모하당문집》을 다시 간행한다. 책머리에 가와미 히로타미는 "적혀 있는 글은 위서이며, 사야가 같은 매국노가 우리 동포라는 것이 유감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고 단정했다.[28] 1924년 역사학자 세데하라 탄은 "사야가에 관한 확실한 자료는 없다"며 허구의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조선총독부 연구원이었던 나카무라 에이코는 현지 조사를 시행하고 1차 자료인 《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를 통해 1933년 청구 학총에 논문 <모하당 김충선의 자료에 대해서>를 쓰면서 사야가가 실존했던 인물임을 증명하여 그 학설이 정당성을 얻고 있다.

해방 이후 1965년 한일 국교 수립 후 일본 관광객들이 하나둘씩 우록동을 찾으면서 1971년 시바 료타로가 쓴 《가도를 가다. 한국 기행》에 사야가와 우록리가 소개되면서 일본인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1999년에는 무려 1,500명이 찾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의 공영 방송인 NHK에서 <출병에 대의 없다, 히데요시를 등진 사나이>( 1992년 3월 30일 방송.)라는 다큐멘터리를 내보냈는가 하면, 아사히 신문에서 "양식 있는 무사의 의로운 결단" 등의 제목으로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29]

1988년 한국 중학교 3학년 도덕 교과서에도 나왔으며, 일본의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서는 평화주의자, 인도주의자 등으로 묘사되어 실리기도 했다.

4. 그 외

이 사람 외에도 유명한 항왜 장수로는 여여문과 김성인(金誠仁: 사여모. 함박 김씨(咸博 金氏)의 시조)이 있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이런 인물이 있었다고 소개하고 그의 귀순 과정과 조선군에 총포 제작, 병과 육성 과정, 선조에게 성씨를 하사 받는 모습, 그리고 이후 행적 같은 그의 일대기에 대해서 방영한 적이 있다.

선조가 김충선에게 하사한 사성 김해 김씨는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성씨이다. 대표적으로 법무부장관, 내무부 장관, 검찰총장을 역임한 김치열(金致烈) 장관이 김충선의 후손이다.[30] 보이그룹 샤이니 Key도 사성 김해 김씨이다.

4.1. 자료에 대한 논란

사야가의 일생에 관한 상세한 자료는 사야가 본인이 후일 집필했다고 알려진 《모하당문집》이 출처인데, 여기서는 사야가가 대병력을 이끌고 거의 상륙 직후에 귀순했다고 쓰여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여러 문제가 있어서 신빙성이 낮다는 주장이 있다.
  1. 사야가의 서신 내용 문제. 기록을 보면 일본인 무사인 사야가가 거의 조선인 유학자와 같은 모화사상에 근거하여 화려한 문체로 조선의 백성을 절대 해치지 않겠다는 방을 내걸고, 박진에게 조선과 중국의 문물을 흠모하여 항복한다는 절절한 서신을 올려 귀순했다고 하는데, 일본인 무사들의 지식수준은 매우 떨어졌기에 승려들에게 이런 서류 업무를 대행시키는 실정이었을 뿐 더러[31] 그 승려들도 조선, 중국식의 서식이나 문법과는 다소 거리가 먼 일본식 문장을 구사하는 일이 많았다.[32] 일본인 무사가 조선 유학자 같은 사상이 있거나 조선식의 유려한 문장과 서식을 구사할 정도로 문장에 능통했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아주 낮은 이야기다.
  2. 병력에 관한 기술 문제. 3,000명에 가까운 대병력을 이끌고 귀순했다면 당연히 일본 측에도 그에 따른 기록이 없을 리가 없고 전장의 상황에도 큰 영향을 끼쳤을 텐데, 그런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또한, 그런 큰 병력을 이끌 수 있는 권한과 직위를 보유했다면 웬만한 다이묘 급.[33] 전선에서 이탈했다면 기록조차 남지 않을 리가 없다.
  3. 항왜의 발생 시점 문제. 문집에는 사야가가 전쟁 자체를 나쁘게 보아 상륙 직후에 항복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초기의 조선군은 항복하는 왜군을 마구 죽이곤 했기 때문에 이 시기에는 항복자의 신상 안전이 보장되지 않았고, 애초에 전격전에 가까운 쾌속 진군을 거듭하던 개전 초기의 일본군이 항복할 이유가 현실적으로 없다고 봐도 좋은 수준이기 때문. 《실록》에서 사야가 등 항왜에 대한 논의는 명군의 참전으로 전황이 일본군에게 크게 불리해지고 일본군의 사상자가 속출하던 계사년(1593년) 즈음에나 등장한다.
  4. 《모하당문집》의 신빙성 문제. 《모하당문집》은 본래 사야가가 쓴 기록이 분실되었는데 6대 후의 후손이 그것을 재발견하여 다시 간행했다.라는. 몹시 수상한 단서가 붙어 있다. 실제로는 행장류 기록에 가깝다는 이야기인데, 행장은 후손들이 조상에 대한 숭모를 담아서 크게 미화하는 일이 잦은 기록이어서 이렇게 되면 신빙성에 한계가 생긴다.[34]

이런 문제들 때문에 《모하당문집》은 그 뼈대가 사실에 근거한 것으로 보이기는 하나[35] 세부 사항은 철저한 사료 비판이 필요하다. 따라서 사야가의 실제 투항 시점은 상륙 직후인 임진년이 아니라 상륙하고 나서 시간이 좀 흐르고 일본군이 불리해진 이후인 1593년으로 잡고, 실제 투항 동기는 단순히 생존을 위한 것이거나 모종의 사정 탓에 도요토미 정권이나 가토의 지배 아래에서 생활할 수 없는 처지였을 것으로 추측하는 견해가 많다.[36] 한국 여행기를 연재하던 도중 사야가에 관심을 두고 집중해서 파고든 문호 시바 료타로 같은 사람도 이런 설을 긍정하면서 '센고쿠 시대의 상식에 비추어 보면 항복한 무사가 어제까지의 아군을 배신하는 것은 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야가도 분명 그랬을 것이다.'라고 했을 정도다. 또 귀화한 인원수도 《모하당문집》에서 주장하는 수천 명 규모가 아니라 혈혈단신이었거나 부하를 이끌고 항복했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소수 부하만을 이끌고 항복한 것으로 본다. 물론 조선에 귀순한 이후에 죽을 때까지 조선에 충성했으므로 이런 연구들이 사야가의 전공과 존재감을 깎아내리는 건 아니다.

5. 다른 매체에서의 등장

일본인이었음에도 조선에 귀화해서 큰 공을 세웠다는 극적인 인생 때문에 영화나 사극의 주역으로 등장할 법도 하지만, 아직 김충선을 주인공으로 한 사극이나 영화는 없다.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한 사극에도 단역으로 아주 잠깐 나오는 정도에 불과했다.

2015년에 KBS 1TV에서 방영한 드라마 징비록에서는 가토 기요마사의 부장으로 등장했다. 배우는 이명호. 가족들과 생이별해 전쟁에 참전하는 것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는 모습을 보이는 등 조선에 귀순하는 과정이 처음으로 그려졌다. 모화당문집과 실록 등을 최대한 비교하면서 그의 사상이나 항복 동기를 현실적으로 묘사하려 한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부분이지만[37] 제일 중요한 수천 명 규모 항복설을 여과 없이 수용하는 바람에 다소 우스꽝스러운 모양새가 됐다는 점은 아쉽다. 갑옷을 벗고 허겁지겁 도주하던 중 항복하려는 사야가를 보고 왜군의 추격으로 착각해 달아나는 이일을 쫓아가면서 "조또마떼!"를 외치는 장면 때문에 시청자들을 빵 터지게 했다.[38] 그 뒤로는 경상우도 관찰사 김수에게 투항하는데, 항복을 받아들인 자가 박진이 아니라 김수라는 고증오류가 나왔다.

전쟁소설 데프콘 시리즈 제2부 《한일 전쟁》 편에서는 한국군이 북한 해군 특수부대를 동원해 노획한 해상자위대 이지스함 초카이를 이 이름으로 개명해 편입시켰다.

한일합작 만화 푸른길에서 항왜를 하는 일본장수의 이름으로 잠깐 거론된다.

일본 만화가 쿠라시나 료가 《사야가 - 일한 센고쿠 시대 에마키》라는 만화를 그린 바 있다.

안병도의 소설 《일본정벌기》에서는 조선이 반격하여 앞으로 일본 재침략의 불씨를 없애려는 내용으로, 항왜 출신이다 보니 여러모로 활약을 크게 한다. 아직 자신의 세력이 부족해 천하를 얻지 못해 고심 중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몰래 접견하는 장면도 나오는데, 지금이라도 죽일 수 있다며 위협하는 이에야스에게 '제가 사이카 출신인 걸 잊으셨습니까?'라며 소매에 감춘 총을 겨누는 패기를 보여주기도 한다. 《데프콘 한일 전쟁》 편에서도 이 소설의 이야기가 나온다. 데프콘 시리즈에 참여한 작가 중 한 명이 안병도였기에 넣은 간접 홍보.

안병도의 또 다른 소설인 <북변괴사>에선 이운룡이 지은 <남도 제승방략>이란 책에 언급된 고문(古文) ‘북변괴사’를 인용했다며, 광해군 1년(1608년) 함경도 혜산진 첨사로 근무하던 김충선이 항왜 출신 부하들을 이끌고 용(?)을 물리쳤다고 한다.

파일:칼부림_김충선.jpg

웹툰《 칼부림》 2부 마지막 장면에서 도포를 입은 뒷모습이 나왔고 3부 1화부터 당세구족 갑옷을 차려입으며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역사대로 서아지 일행을 참살했지만, 주인공인 함이와 그를 도와주는 취사병 덕만 아재만큼은 살려주고 참수한 수급도 서아지와 고효내만 조정에 보낸다. 고효내의 대사를 빌면 "중화의 문물을 사모해서 어쩌고"라는 이유를 내세워 조선에 투항했다는데, 함이와의 대면에서는 "딱히 조선이 좋아서 귀순한 건 아니었고, 어찌 생각하면 충동적이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고 본인이 말했다.[39]

김경진, 윤민혁이 공동 집필한 소설 《 격류》와 이 내용을 바탕으로 다시 쓴 《 임진왜란(김경진)》에서는 회상 장면에서 등장했다. 이 작품에선 김충선을 사이카슈의 우두머리로 설정했다. 침공 초창기 우연히 서로의 부하들이 다투는 것을 무마하는 과정에서 구루지마 미치후사와 만나게 되었다. 함께 술을 마셨는데 한때 구루지마 해적 무리와 사이카슈가 함께 했던 것을 언급하며 미치후사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그리고 조선에는 문화의 힘이 있다는 생각을 밝히고 조선에 항복했다.

캡콤에서 제작한 액션 게임 전국 바사라 시리즈에 등장하는 3대 사이카 마고이치 본명이 사야가로 이 인물에게서 따왔다. 김충선이 사이카슈 출신이라는 설을 빌렸다고 한다.

웹소설 《 명군이 되어보세!》에서는 임진왜란 전 노부가나와 척을 진 사나다 노부시게를 필두로 한 사무라이 1,000여 명이 귀순할 때 같이 귀순, 북방에서 호란 중에 큰 공을 세운데다 마침 유배 와 있던 윤두수의 서녀와 눈이 맞아 윤두수의 사위가 되었다! 윤두수는 해서 4부가 모두 박살 나고 조선이 대승을 거둔 뒤에 유배가 풀려 이조판서가 됐으니 인생의 승리자 확정이었다.

2017년에 tvN에서 방영한 드라마 명불허전에도 등장했다. 김충선 역은 일본인 배우 타케다 히로미츠[40]가 맡았다.

일본 만화 노부나가를 죽인 남자-일륜의 데마르카시온에서 외전으로 사야카의 일대기를 다루었다. 사이카슈 일원으로 평소에는 투구와 까마귀 가면으로[41] 얼굴을 가리고 있으나, 투구와 가면을 벗은 후엔 얼굴이 상처투성이인 청년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사이카슈는 1585년 히데요시의 키슈 정벌[42] 탓에 와해하여 여러 다이묘의 막하로 들어갔는데 사야카는 가토 기요마사의 막하로 들어갔다. 원수의 부하로 들어간 몰골이기에 히데요시나 가토에 대한 충의는 애초에 없었고, 끝없는 난세와 전쟁에 싫증을 느끼던 와중에 자신들이 조선에 주둔하면서 벌인 학살이 새로운 난세를 만들었음을 개탄하고 있었다.[43]
모르겠군. 가르쳐 주게. 이 전쟁에 대의란 있는가?
(총구를 돌려 지휘관 야마모토를 쏴 죽이는 사야카. 학살에 회의를 느낀 사이카슈 동료도 동참하여 가토군 병사들을 일제히 쏴 죽인다. 이윽고 사야카는 투구를 벗어 도공 일가를 안심시킨다.)
이제 괜찮소.
사야카가 속한 부대의 지휘관 야마모토는 경주의 어느 마을에 쳐들어가 고급 도자기를 약탈하고 도공들을 납치하고 있었는데, 한 도공[44]이 만삭인 아내와 아이들만은 살려줄 것을 빌자 야마모토는 사이카슈 잔당들에게 이들을 학살할 것을 명령한다.[45] '이 전쟁에 무슨 대의가 있느냐'고 생각해버린 사야카는 고민하다가 총구를 돌려서 야마모토를 쏴죽이고, 사야카와 마찬가지로 명분 없는 전쟁과 학살에 지쳐 있던 사이카슈 동료도 이에 가담한다.[46]

이후 사야카 본인을 포함해 항왜들의 처분도 어느 정도 자세히 나오는데 임진왜란 초기엔 일본군의 만행 때문에 반일 감정이 매우 심했던 시기에 가까웠던지라 문답 무용으로 숙청시켰으나, 사야카가 귀순할 당시엔 명나라군이 조선군을 설득하게 되면서 받아들일 여지가 있는 일부는 숙청하지 않고 총포술 교관이나 정탐꾼[47] 등으로 포섭할 수 있도록 바뀌었다. 다행히도 그가 귀순한 시점에선 조선이 생각을 바꾼 이후라서 백성을 구한 공로도 인정받아 그대로 받아들여졌다.[48] 임진왜란 종전 후에는 북방으로 자원하였고, 북방을 지킨 공로를 인정받아 조선식 이름 '김충선'과 벼슬을 받았다.


[1] 종친회의 설명으로는 남자후손 27명의 얼굴 사진을 토대로 초상화를 제작했다고 한다. [2] 일본어 발음은 사야카 [3] 《모하당집》에 따르면 ' 바다를 건너온 모래를 걸러 을 얻었다'는 의미이며, 가야계 김해 김씨와 구분하기 위해 성을 하사받았다는 뜻으로 '사성'을 붙여 사성 김해 김씨로 불리게 되었다. 따라서 현재 경상남도 김해시와는 전혀 연관이 없다. [4] 생전에 쓴 것이 아니라, 6대 후손 김한조가 《모하당문집》을 저술하면서 붙인 것이다. [5] 1892년 추증. [6] 생전 최종 관직. [7] 품계(정2품)에 비해 관직의 품계(종3품)가 낮기 때문에 앞에 행이 붙는다. [8] 여기서 고증 오류가 있는데, 극중 사야가의 항복을 받은 사람은 당시 경상도관찰사 김수인데, 실제 항복을 받은 사람은 후술한 내용처럼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이다. [9] 중국 하나라를 흠모한다는 뜻으로 평소 하, 상(은),주나라 시대를 흠모했다고 한다. [10] 실제로, 일본의 다이묘 중에서 조선이나 중국 문화에 관심을 뒀던 인물들이 꽤 있긴 했다. 다만, 뒤에 쓰여있듯이 모하당문집은 후손들이 다시 재간행한 거라 그 시대에 맞는 미화의 여지도 있다. [11] 오늘날에야 센고쿠 시대가 난세인 데다가 삼국지처럼 규모가 있던 내전이었기에 일본 드라마나 영화에서 써먹기 좋아 인기가 있지만, 당대 살던 백성으로서는 춘추전국시대 못지않은 난세라 그만한 지옥도 없었을 것이다. 왜란을 일으킨 일본의 수장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그 지옥 같은 백성 신분에서 지도자에 오른 사례다. [12] 해당 링크의 문화유산채널 칼럼 내용은 구글의 저장된 페이지 #에 나오며 "사야가, 즉 김충선의 호를 딴 『모하당문집』에 의하면 그는 어려서부터 유학공부에 심취해 있었고 조선과 중국의 문화를 흠모했으며 일본의 비속한 풍속에 수치심을 느꼈다고 했다. 그런 그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발발 후 선봉장으로 조선에 나오게 된 것이다. 사야가는 지금까지 도움받아온 스승의 나라를 치러 전란을 벌였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여 발발 직후에 경상도병마절도사 박진(朴晉)에게 투항 의사를 밝혔다. 사야가는 임진왜란 당시 22세의 나이로 왜군 3천을 통솔하던 고위급 장수였다. 그런 그가 4월 13일 부산에 상륙한 후 부하들에게 약탈을 금하는 군령을 내리고 이틀 뒤 침략의 뜻이 없음을 알리는 효유서(曉諭書)를 백성에게 돌렸다."로 쓰여 있다. [13] 왕이 궁궐을 떠나 도성 내외를 행행할 때 잠시 휴식하거나 식사를 하기 위해 임시로 머물던 곳을 말한다. 같은 말은 행궁이다. [14] 《모하당문집》에 실린 이순신과의 서신에서 김충선이 "이미 조총을 개발하여 훈련하고 있다."라고 나와 있다. 화약제조에 매우 관심이 높았던 조선 조정에서도 염초를 생산하는 법에 대해 "일찍이 왜법을 배웠으나"라는 기록으로 화약제조법 전수에 대해 알 수 있다. [15] 다만 이 물건이 정말 김충선이 쓰던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16] 1640년의 그의 가사 작품. [17] 2차대전 이후 오래되지 않아 일본이 화려한 경제성장을 하긴 했지만 2차대전 도중과 직후에는 전쟁의 피해 때문에 일본 전역이 잿더미에 빈털터리였다는 걸 생각하면 된다. 노부나가를 죽인 남자 제2부 <일륜의 데마르카시온>에서는 임진왜란에 참전한 일본 장병이 겪은 끔찍한 고통이 잘 묘사되어 있는데, 물론 피해는 조선이 훨씬 크게 입었지만, 이 묘사 자체는 고증이 맞는다. 히데요시의 잘못된 정복욕 때문에 본래라면 누구도 겪을 필요 없던 죽음과 고통을 겪은 것. [18] 도요토미가 자기의 늙은 모친에게 '이번 가을은 자금성에서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이야기했다는데 이는 명나라를 점령하고 자금성에 거점을 두고 통치하겠다는 야망을 보여준다. [19] 집성촌의 후손들을 대상으로 유전자 조사를 해서 역사스페셜에서 방영한 적이 있었는데 실제로 일본인의 유전자가 나타났다. [20] 있다고 해도 왕씨 몰살 당시 개성 왕씨의 때와 마찬가지로 신분세탁을 통해 사야가와 같은 가문 출신임을 숨기고 더 나아가 세대를 거듭하면서 사야가의 가문 출신이라는 자각마저 사라졌을 가능성이 높다. [21] 1592년 이전 그가 조선 땅을 밟기 전에는 절대 없었을 족보인데다가 왕이 성씨를 내려준 사성 성씨였기 때문에 집성촌을 이룬 뒤에도 족보 매입 등등의 위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을 1700년대는 고조할아버지 혹은 증조할아버지가 김충선이라는 한마디로 바로 진위를 파악할 수 있을 정도라 대가 굉장히 길게 이어져 오고 가난했던 다른 성씨와는 달리 상당한 공을 세워 정2품까지 승진한 공신이자 충신으로 이름을 드높였던 김충선의 사성 김해 김씨 가문에 위조로 끼어드는 것은 위험 부담이 매우 크다. [22] 오오카 쇼헤이의 《포로기》에 보면 전적 전향 사회주의자인 동료가 필리핀 레이테에서 미군이 상륙하자마자 탈영해서 미군에게 투항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를 일컬어 지칭하는 말. [23] 《출병 기록집》에 출병했다는 기록은 있는데, 전사했다던가 돌아왔다던가 하는 기록은 없이 그냥 이름이 지워져 있다. 보통 조선에 항복한 인물들은 이렇게 처리. [24] 사이카 마고이치는 사이카슈의 두령 가문인 스즈키 가문이 물려받는 이름이라 여러 명이다. 1대부터 5대까지 이어졌다고 보아 총 5명이 있다는 것이 정설이며, 그 중 시게히데가 전국 시대에서 사이카슈를 이끌고 많은 활약을 해 가장 유명하다. [25] 사이카 마고이치=스즈키 시게히데 설이 완전히 불가능한 건 아니다. 스즈키 시게히데의 생몰 연대 자체가 일단 추정치이고, 만약 스즈키 시게히데 설에 의하면 93살에 사망했다는 게 되는데 센고쿠 시대 일본 측에는 호죠 겐안(北条幻庵, 1493 ~ 1589)이나 미요시 마사카츠처럼 반올림해서 1세기를 산 인물들이 좀 있어서 이론상 불가능까진 아니다. 물론 가능성은 낮다. [26] 김충선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도 계속 조선의 충신으로 남았으며 일본으로 다시 귀순하고 싶어했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사람마다 차이는 있을 수 있고 김충선도 고향을 그리워하는 시를 남겼던 만큼 고향 사람과 이야기하면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커졌던 것일 수 있다. [27] 태합검지(太閤検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전역에서 한 전답의 측량 및 수확량 조사 사업으로 기간은 최소 1582년, 끝난 기간은 1598년 [28] 실존 인물이라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전승은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다. [29] NHK 자민당과의 연계가 비교적 적은 편이고 따라서 우경화 추세에도 중립성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다. 아베 신조 2기 내각 때 NHK를 우경화시키려던 시도가 있었고 햐쿠타 나오키 같은 인사들이 망언하는 등 시끌시끌했던 적도 있었지만, 여전히 민방에 비하면 중립적인 축에 속한다. NHK 대하드라마 야에의 벚꽃에서 주인공인 니지마 야에가 우익으로 돌변한 자신의 제자를 비방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는 등, 오히려 반우익적 성향도 있다. [30] 김충선은 죽기전 자식들에게 8대 동안은 출세하지 말고 300년을 기다렸다가 그 후에 세상밖으로 나가라 라고 당부했다고 했는데 김치열이 딱 그 300년에 맞아떨어지게 행동함에 따라, 어쩌다보니 정말 유언을 지킨 게 되었다. [31] 조선 시대 일본과의 사이에 오가는 외교 문서들은 승려 대부분이 맡아서 썼으며 임진왜란 이후로도 19세기 초까지 이렇게 했다. [32] 임진왜란 이후인 17세기에 파견된 통신사들의 기록에서도 이런 것들을 볼 수 있는데, 막부 쇼군이 조선 왕에게 보내는 외교 문서는 특별히 신경을 썼는지 통신사 측에서 기본적인 양식을 문제 삼은 적은 없지만 에도까지 가는 동안 거치는 지방의 다이묘에게서 문서를 받아 볼 때는 조선에서 쓰는 문장과 달라 당황하는 일이 간혹 있었다. 일개 사신인 자신에게 왕에게나 쓸 법한 높임법을 썼다거나 통신사 일행 중에 아랫사람을 윗사람보다 오히려 더 높였다거나 등등. 이래서 일본에 대해 종합적으로 정리할 때 "얘네가 쓰는 표현은 우리랑 달라서 유의할 필요가 있는데 예를 들면..." 같은 기록도 있다. [33] 3,000명의 병력이면 영지로는 대략 10만 석 이상의 규모다! 이쯤이면 일본 본국에서도 김충선이 갖고 있던 영지를 다른 다이묘나 가신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 서로 차지하려고 한참 싸웠을 것인데 그러한 기록은 딱히 없다. [34] 당시의 좋은 예가 《김억추 행장》이다. 자원 수급에 급급하던 조선 수군이 명량 해협에 철쇄를 둘러쳤다는 황당한 설을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이 민간에 퍼져 버렸다. 원균의 행장도 당시 상황을 모르는 사람들이 후손의 청을 받고 써 줘서 미화투성이가 되어 버렸다. [35] 시바 료타로는 후대에 한학을 익힌 후손들의 윤문은 있었을 수도 있지만, 내용의 뼈대는 집안 대대로 전해들은 내용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36] 사야가는 전술에 능통했으며 기술에 대한 지식도 매우 탁월했다. 이것 때문에 사야가가 교양과 지식이 풍부한 고위급 무사라는 점에는 거의 이견의 여지가 없다. [37] 후대의 조선인이 쓴 티가 역력한 문장을 구사하거나 모화사상이 있는 것으로는 나오지 않았다. [38] 정확하게는 ちょっとまって、待って、待って!(잠깐만, 기다려! 기다려!) [39] 작중 대사로 미루어보아 센고쿠 시대 때문에 이어진 수십 년간의 전란에 지쳐가던 와중 전쟁과 무관하게 평화로웠던 조선의 모습에 자신이 찾던 평화를 비춰본 것으로 보인다. 이런 사정 때문인지 작중 언급상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원한을 품은 듯한 언급이 있다. [40] 임진왜란 1592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 역을 맡았다. [41] 이 까마귀는 사이카슈의 두령을 맡았던 스즈키 가문의 상징인 야타가라스이다. 임진왜란 이전 사야카가 스즈키 가문 밑에서 일했던 용병일 가능성을 묘사한 것이 이 까마귀 가면이다. [42] 지금의 와카야마, 미에 일대. 만화에서도 히데요시가 1585년 10만 대군을 보내 와카야마 남벌을 한 지도를 함께 그렸다. [43] 본편 28화 '문록의 역(임진왜란을 일본에서 이르는 말)'에서도 김충선이 출연하는데 조선에 발을 디디고 학살과 약탈을 자행하며 '치세에는 어떤 모습이든 난세가 되면 인간은 서로의 것을 빼앗고 서로 죽이게 되며 그것이 인간의 본질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난세가 좋다.'라고 말하는 가토 기요마사 옆에서 까마귀 가면을 쓰고 있는 총포병이 바로 김충선이다. 대사 없이 침묵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이때에도 가토의 난세론에 불만이 가득했던 듯하다. [44] 이 사람도 끌려오는 와중에 가토군 병사에게 폭행을 당한 탓인지, 오른쪽 눈이 심하게 짓뭉개져 실명한 상태이다. [45] 야마모토가 학살을 명령하며 내뱉은 말을 보면 '태합 전하(히데요시)를 배신하여 멸망한 사이카슈의 잔당 놈들을 키요마사님(가토)이 은혜를 베풀어 거두어 주셨으니 충의를 보여라'라면서, 사이카슈가 아닌 부하들에게는 '네놈들은 멈춰 있어라'라고 명령한다. 사이카슈 잔당들은 '새 주군을 향한 충의'라는 명분으로 정예군들에게 시키기엔 더러운 학살 같은 전쟁범죄에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46] 사야카가 야마모토를 쏴죽이자마자 이들도 일사불란하게 조총을 들고 분란에 동참하고 그 와중에 사야카는 포로들을 안심시키는데, 그만큼 사이카슈에 대한 차별이 얼마나 심했는지. 사이카슈가 자신을 따르리라 믿고 있었는지 보여준다. [47] 이 정탐꾼 중 하나가 준사이다. [48] 이 컷을 잘 보면, 사야카를 비롯한 사이카슈 대원들이 경주 사람들의 환대를 받으며 행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