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0 17:03:12

북한 축구 국가대표팀/FIFA 월드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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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대 기록2. 본선 진출 이전3. 1966 잉글랜드 월드컵
3.1. 16강 조별리그 소련전 - 0:3 패3.2. 16강 조별리그 칠레전 - 1:1 무3.3. 16강 조별리그 이탈리아전 - 1:0 승3.4. 8강전 포르투갈전 - 3:5 패
4. 1970 멕시코 월드컵~ 2006 독일 월드컵5. 2010 남아프리카 공화국 월드컵
5.1. 32강 조별리그 브라질전 - 1 : 2 패5.2. 32강 조별리그 포르투갈전 - 0 : 7 패5.3. 32강 조별리그 코트디부아르전 - 0 : 3 패
6. 2014 브라질 월드컵~ 2026 북중미 월드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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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대 기록

  • 역대 월드컵 전적 순위: 58위
연도 결과 순위 승점 경기 득점 실점
파일:우루과이 국기.svg
1930년 우루과이
불참( 일본령 조선)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1934년 이탈리아
파일:프랑스 국기.svg
1938년 프랑스
파일:브라질 국기.svg
1950년 브라질
불참(6·25 전쟁)
파일:스위스 국기.svg
1954년 스위스
불참
파일:스웨덴 국기.svg
1958년 스웨덴
불참
파일:칠레 국기.svg
1962년 칠레
불참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1966년 잉글랜드
8강 8위 4 4 1 1 2 5 9
파일:멕시코 국기.svg
1970년 멕시코
기권
파일:독일 국기.svg
1974년 서독
본선 진출 실패[16개국]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
1978년 아르헨티나
기권
파일:스페인 국기.svg
1982년 스페인
본선 진출 실패[24개국]
파일:멕시코 국기.svg
1986년 멕시코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1990년 이탈리아
파일:미국 국기.svg
1994년 미국
파일:프랑스 국기.svg
1998년 프랑스
불참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파일:일본 국기.svg
2002년 한일
불참
파일:독일 국기.svg
2006년 독일
본선 진출 실패[32개국]
파일:남아프리카 공화국 국기.svg
2010년 남아공
조별리그 32위 0 3 0 0 3 1 12
파일:브라질 국기.svg
2014년 브라질
본선 진출 실패[32개국]
파일:러시아 국기.svg
2018년 러시아
파일:카타르 국기.svg
2022년 카타르
예선 도중 기권[5][6]
파일:캐나다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멕시코 국기.svg
2026년 북미
합계 8강 1회 2/23[7] 4 7 1 1 5 6 21

2. 본선 진출 이전

북한 대한민국과 더불어 1910년 8월 29일 일본 제국 식민지로 병합되었다가 1945년 8월 15일에 광복을 맞았다. 그리하여 제1회 대회인 1930 우루과이 월드컵부터 3회 대회인 1938 프랑스 월드컵까지는 나라 사정 상 지역예선부터 참여할 수 없었다. 그리고 1950 브라질 월드컵 때는 지역예선 출전 대신 동족상잔의 비극인 한국 전쟁을 일으키면서 자연스럽게 월드컵엔 불참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된 이후 북한 역시 국토 전역이 폐허가 되어 전후 복구가 급했으므로 천리마 운동에 열중하느라 1954 스위스 월드컵~ 1962 칠레 월드컵까지 내리 불참을 선언했다. 그 사이 대한민국은 일본을 이기며, 1954 스위스 월드컵 16개국 본선에 진출했고 매우 선전했으나 어려운 나라 사정과 자금난으로 인해 스위스까지 가는 데만 시간을 너무 많이 허비했고 설상가상으로 첫 상대가 당시 세계 최강이었던 매직 마자르 헝가리여서 결국 실력 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0 : 9로 패배하고 뒤이어 터키에도 0 : 7로 대패하며 월드컵 16위 최하위로 마무리했다.

3. 1966 잉글랜드 월드컵

북한이 처음으로 월드컵 지역예선 출전 신청을 한 것은 8회 대회인 1966 잉글랜드 월드컵이었다. 40대 초반의 젊은 감독 명례현이 이끄는 북한은 당시 아시아의 신흥 강호로 떠오르고 있었다. 30경기를 치러 29승 1패라는 엄청난 성적을 자랑할 정도여서 월드컵 출전에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그런데 이 당시 FIFA는 세계 축구계를 양분하고 있던 유럽과 남미 이외의 제3 대륙을 엄청나게 차별했는데, 아시아 + 아프리카 + 오세아니아 이 3개 대륙을 묶어 달랑 1장의 16개국 본선 진출권을 부여한 것이다. 이런 노골적인 대륙 차별에 분노한 아프리카 국가들은 집단 보이콧을 강행했고, 그리하여 예선에 출전할 나라는 대한민국, 북한, 호주 단 셋뿐이었다. 그러나 박정희가 집권하고 있던 대한민국은 북한과의 대결을 부담스러워하며 갑자기 예선 직전에 불참을 선언했다.[8] 그래서 결국 지역예선은 북한과 호주의 맞대결로 압축되었다. 그런데 6.25 전쟁 당시 호주는 엄연히 UN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나라여서 북한과 호주는 서로 적성국이었는데, 그래서 본래는 홈 & 어웨이 방식으로 치러야 하지만 적성국이었기에 서로의 나라로 가는 것을 거부했고 결국 피파는 중립 지역에서 경기를 치르는 것으로 결정했다.

경기가 열릴 곳으로 당첨된 곳은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이었고 프놈펜에서 2경기를 모두 치르도록 했다. 당시 호주에는 축구 종주국인 영국 출신 선수들이 많았는데, 그래서인지 호주는 그 사실만 믿고 북한을 업신여기며 제대로 된 분석을 하지 않았다. 반면 북한은 남몰래 호주의 훈련 장면을 촬영하여 올 정도로 분석에 만전을 기했다. 그래서일까? 프놈펜에서 열린 예선전 2경기에서 북한은 1차전 6:1 승, 2차전 3:1 승을 거두며 2전 전승, 합산 점수 9:2라는 엄청난 승리를 거두며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이로서 북한은 네덜란드령 동인도, 대한민국에 이어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3번째 팀이자 독립국으로선 한국에 이어 2번째로 월드컵에 오른 아시아 팀이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월드컵 무대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북한은 조 추첨에서 심히 껄끄러운 상대들과 한 조에 속했다. 당시 브라질과 함께 월드컵 최다 우승을 기록한 이탈리아, 동유럽의 제왕 소련, 지난 대회에서 3위를 차지했던 칠레와 함께 4조에 편성된 것이다. 그나마 칠레 정도가 해볼 만했고 나머지 팀들은 모두 어려운 상대들이었다. 당시 영국에서는 축구 승부 도박이 합법이었는데, 이 당시 도박사에서 평가한 우승 확률은 브라질이 50%로 1위, 잉글랜드가 25%로 2위, 이탈리아가 20%로 3위였으며 북한은 단 1%에 불과했다. 북한의 순위는 16개 진출국 중 16위. 즉 꼴등이었다. 그 정도로 북한은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한편 북한 선수단이 잉글랜드로 떠나기 전날 북한 주민들에게 '위대한 수령님'으로 불리는 김일성은 북한 대표팀 선수들을 친히 불러 "우리가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이 3개 대륙을 대표해서 출전하는 만큼 참가하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지만 그래도 가서 1~2팀이라도 이기고 돌아오라."라는 과업을 부여했고, 그렇게 김일성의 과업을 안고 북한 선수들은 결전의 땅 잉글랜드로 떠났다.

3.1. 16강 조별리그 소련전 - 0:3 패

파일:1966 FIFA World Cup Official logo.png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 4조 제1경기
1966년 7월 12일 19:30(UTC+0)
에어섬 파크 ( 영국, 미들즈브러)
주심: 후안 가르데아자발 가라이 (스페인)
파일:북한 국기.svg 0 : 3 파일:소련 국기.svg
북한 소련
- 득점자 12′, 88' 에두아르트 말로페예프
72′ 아나톨리 바니셰프스키
관중: 23,000명

북한의 조별리그 1차전 상대는 같은 공산권 국가의 큰형님 소련이었다. 당시 소련은 전설적인 골키퍼 레프 야신이 있던 팀으로 동유럽의 제왕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이 당시는 냉전 체제였기에 북한은 월드컵을 앞두고 같은 공산권 국가인 동유럽을 돌면서 그쪽 프로 축구 팀들과 주로 평가전을 가지며 전력을 다졌다. 그래서 소련은 북한 선수들이 165cm에 불과한 평균 신장을 극복하고자 기동력을 앞세운 속도전을 중심으로 경기를 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경기에서 소련 선수들은 북한의 속도전을 억제하기 위해 우월한 피지컬과 완력을 앞세운 더티 플레이로 일관했다. 이런 소련의 더티 플레이에 경기를 보러 온 미들즈브러의 관중들은 일제히 야유를 퍼부었다. 당시 미들즈브러 프리미어 리그에서 약팀에 속했기에 미들즈브러 주민들은 은근히 같은 약팀인 북한 대표팀에 묘한 동질성을 느꼈다고 한다.

이렇게 시종일관 거친 플레이로 일관한 소련은 전반 12분 만에 에두아르트 말로페예프가 선제골을 넣으며 기선 제압을 하는 데에 성공했다. 북한 선수들도 지지 않고 맞서 싸웠지만, 큰 떡대로 밀어버리는 소련 선수들에게 짜리몽땅한 북한 선수들은 일방적으로 날아가며 제대로 맞서지 못했다. 그저 골키퍼 리찬명의 슈퍼 세이브와 정신력으로만 간신히 버틸 뿐이었다. 그런데다 설상가상으로 북한의 중앙 공격수 강용운이 부상으로 아웃되면서 더욱 경기가 불리하게 돌아갔다.[9] 10명이 뛰게 된 북한은 소련에게 더욱 밀리기 시작했고, 결국 후반 27분에 아나톨리 바니셰프스키에게 추가골을 허용하며 무너졌다. 그리고 후반 43분에 선제골의 주인공 말로페예프에게 또 1골을 실점하며 결국 북한의 월드컵 데뷔전은 0:3 패배로 끝났다.

어차피 대회 전부터 최약체 팀으로 주목받았던 북한이라 이 같은 패배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체력과 속도전을 앞세워 끝까지 맞서 싸우는 모습에 미들즈브러 시민들은 북한 대표팀을 크게 응원했고, 오히려 피지컬과 완력을 앞세워 더티 플레이만 일삼은 소련 대표팀을 크게 비난했다. 단지 시민들뿐만 아니라 미들즈브러 지역 언론까지도 북한을 칭찬하고 소련을 비난했다. 그동안 영국인들에게 미지에 있었던 극동의 작은 나라 북한의 월드컵 데뷔전은 나름 인상 깊은 기억을 남겼다.

3.2. 16강 조별리그 칠레전 - 1:1 무

파일:1966 FIFA World Cup Official logo.png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 4조 제3경기
1966년 7월 15일 19:30(UTC+0)
에어섬 파크 ( 영국, 미들즈브러)
주심: 알리 칸딜 (아랍 연합 공화국)[10]
파일:북한 국기.svg 1 : 1 파일:칠레 국기.svg
북한 칠레
88′ 박승진 득점자 26' 루벤 마르코스 (PK)
관중: 13,792명
북한의 조별리그 2차전 상대는 남미의 칠레였다. 북한과 칠레 양 팀 모두 1차전에서 패배를 기록했기에 승리가 절실한 상황이었다. 북한은 1차전에서 소련에게 0:3으로 대패했고, 칠레 역시 1차전에서 이탈리아에게 0:2로 패배한 상황이었다. 8강에 올라가기 위해선 두 팀 모두 서로를 반드시 이겨야 했다. 만약 이 경기마저 패배한다면 사실상 탈락이 확정되고 만다. 흐린 날씨가 지속되던 미들즈브러에는 경기가 시작되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북한과 칠레의 8강 진출의 운명이 걸린 한 판 승부가 펼쳐졌다.

경기가 시작되자 북한은 특유의 체력과 기동력을 앞세운 활발한 공격 축구로 사정없이 칠레를 괴롭혔고, 칠레는 선 수비 후 역습으로 북한과 맞섰다. 그렇게 양 팀의 팽팽한 경기가 이어지던 전반 26분, 북한 수비수 신영규가 칠레 공격수를 향해 페널티 에어리에에서 슬라이딩 태클로 쓰러뜨렸고 주심은 즉시 페널티킥을 선언했다. 킥커로 루벤 마르코스가 나섰고, 마르코스가 깔끔하게 성공시키며 칠레가 1:0으로 앞서나갔다. 이 경기마저 지면 탈락하게 되는 북한은 계속해서 공격을 퍼부으며 칠레의 골문을 두들기고 또 두들겼지만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그렇게 전반전은 1:0으로 칠레의 리드로 마쳤다.

후반전에도 경기 양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북한이 계속해서 공격하고 칠레가 자기 진영에 잔뜩 웅크리며 수비한 후 역습을 노렸다. 하지만 북한은 이렇게 사정없이 공격을 하고도 좀처럼 칠레의 골문을 열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은 점점 흘러갔고, 스코어는 여전히 칠레가 1:0으로 리드하고 있었다. 그렇게 패색이 짙어지던 중 후반 43분, 북한의 공격 상황에서 전방으로 높이 뜬 볼을 칠레 수비수가 클리어링했다. 그러나 볼은 그리 멀리 가지 않았고 페널티 에어리어 우측 외곽에 있던 박승진의 발 앞에 떨어졌다. 박승진은 즉시 오른발 논스톱 슛을 날렸고, 공은 그대로 골문 안으로 빨려들어가며 드디어 천금 같은 동점골이 터졌다. 이후 종료까지 양 팀은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지만 더 이상 골은 터지지 않았고, 경기는 그렇게 1:1 무승부로 끝이 났다. 이것은 아시아 팀이 월드컵에서 기록한 첫 득점인 동시에 첫 승점이기도 했다.

3.3. 16강 조별리그 이탈리아전 - 1:0 승

파일:1966 FIFA World Cup Official logo.png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 4조 제5경기
1966년 7월 19일 19:30(UTC+0)
에어섬 파크 ( 영국, 미들즈브러)
주심: 피에르 슈빈테 (프랑스)
파일:북한 국기.svg 1 : 0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북한 이탈리아
42′ 박두익 득점자 -
관중: 17,829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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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조별리그 3차전 상대는 아주리 군단 이탈리아였다. 이탈리아는 1934 이탈리아 월드컵, 1938 프랑스 월드컵을 연속으로 우승했으나 1950년 수페르가의 비극이라는 비행기 사고로 인해 대표팀의 주축 선수들을 잃으면서 그 여파로 암흑기를 보냈다. 그러나 4부 리그 팀 만토바 FC를 1부 리그까지 승격시킨 젊은 명장 에드몬도 파브리 감독의 지휘 아래 다시 옛날의 전력을 회복하며 이번 대회에서는 브라질, 잉글랜드에 이어 3번째로 우승 확률이 높은 강력한 우승후보로 부상하게 되었다. 주장 자코모 불가렐리를 필두로 잔니 리베라, 산드로 마촐라, 자친토 파케티 등 내로라하는 세리에 A의 슈퍼스타들로 도배된 팀이 바로 이탈리아였다. 하지만 정작 이탈리아가 본선에서 보여준 모습은 조금 실망스러웠다. 1차전에선 칠레를 가볍게 2:0으로 제압했으나 2차전 소련과의 경기에선 무기력한 경기 끝에 0:1로 패배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3차전 상대는 대회 최약체인 북한이었기에 많은 이들은 이탈리아가 북한을 상대로 압승을 거둘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인지 이 경기를 찾은 관중은 17000여 명에 불과했다. 굳이 찾아가서 안 봐도 이탈리아가 이길 게 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북한은 8강에 진출하기 위해선 반드시 이 경기에서 이탈리아를 잡아야 했고, 비기거나 지면 무조건 탈락이었다.

그렇게 북한과 이탈리아의 8강 진출의 운명이 걸린 한 판 승부가 시작되었다. 경기는 예상대로 이탈리아의 일방적인 페이스로 흘러갔다. 짜리몽땅한 북한 선수들보다 머리 하나 더 큰 떡대를 자랑하는 이탈리아 선수들은 볼을 공중으로 띄우며 농락했고, 금방이라도 골이 터질 것 같은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어찌된 것인지 문전에서 슛을 하기만 하면 족족 빗나가거나 북한 골키퍼 리찬명의 선방에 막히며 좀처럼 북한의 골문을 열지 못했다. 약체 팀이라 쉽게 무너질 것 같았던 북한이 의외로 쉽게 무너지지 않자 이탈리아 선수들은 점점 평정심을 잃고 조급해졌다.

이탈리아의 초반 결정적인 3차례의 슈팅이 빗나간 후 북한의 반격이 들어왔다. 북한의 빠른 역습에 발이 느린 이탈리아 수비수들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특히 라이트윙 한봉진의 주력은 마치 번개 같아서 카테나치오로 악명 높은 이탈리아 수비진들이 우왕좌왕할 정도였다. 그리고 전반 34분, 북한의 역습 상황에서 이탈리아의 주장 자코모 불가렐리가 박승진을 향해 태클을 걸었는데, 박승진의 몸이 불가렐리의 다리 위로 떨어지며 불가렐리는 큰 부상을 당했다. 당시에는 선수 교체 제도가 없었기에 이제 이탈리아는 10명이 뛰는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전반 42분, 센터 서클에서 북한의 림승휘가 전방으로 볼을 띄운 것을 이탈리아 수비수가 걷어냈다. 다시 넘어온 볼을 북한의 하정원이 공중볼을 따내며 헤더로 다시 이탈리아 진영으로 보냈고, 이 볼이 바운드가 되면서 페널티 박스로 흘렀다. 그리고 이 볼을 박두익이 받아 페널티 에어리어로 쇄도하며 오른발 땅볼로 강슛을 날렸다. 이탈리아의 수문장 엔리코 알베르토시가 몸을 날렸으나 볼은 이미 골문 왼쪽 구석으로 빨려들어갔다. 그렇게 모든 이들의 예상을 깨고 북한이 1:0으로 앞서갔다. 주장이 부상으로 실려나가고 선제골까지 허용하자 이탈리아 선수들은 더욱 평정심을 잃고 무리하게 돌격을 해댔다.

후반전이 되자 이탈리아는 계속해서 북한을 향해 맹공을 퍼부었다. 그러나 조급함을 이기지 못한 그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조직력이 와해되며 제각각 따로 놀았고 그 탓에 제대로 된 찬스를 만들지 못했다. 오히려 북한의 간헐적인 역습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휘청거렸다. 자신감을 얻은 북한 선수들은 전원 수비에 나서며 철저하게 이탈리아의 공격을 막아내고 또 막아냈고, 리찬명은 잇단 슈퍼 세이브로 팀을 위기에서 구하며 이탈리아를 더욱 좌절시켰다. 결국 그렇게 모든 이들의 예상을 깨고 북한이 이탈리아를 1:0으로 격파했다. 이것은 아시아 팀이 월드컵에서 거둔 최초의 승리였고 최초의 클린시트였다. 그러나 북한이 그 이후로 월드컵에 거의 나오지 못했기에 이 경기가 최소한 2030년까지는 그들의 월드컵에서 유일한 승전이자 유일한 무실점 경기로 남게 되었다. 2014년까지는 이 경기가 유일하게 아시아 팀이 유럽에서 개최된 대회에서 유럽 팀을 이긴 경기였지만,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이 독일을 2:0으로 이기며 52년 만에 갱신되었다. 또 다음 날 소련이 칠레를 2:1로 꺾으며 1승 1무 1패를 기록한 북한은 조 2위를 차지해 아시아 최초로 8강 진출에 성공했다.

한편 이탈리아는 북한에게 0:1로 패배하며 대회 9위로 8강 진출에 실패하여, 16강 조별리그에서 탈락하자 큰 충격에 빠졌다. 자신들이 원조 축구 종주국이라 할 정도로 축구에 엄청나게 자부심이 강한 이탈리아인들은 자국 대표팀이 월드컵에서 최초로 핫바리 아시아 팀에게 패배한 팀이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쓴 것에 크게 분노했고, 축구 강국으로서의 자존심이 구겨질 대로 잔뜩 구겨졌다. 이탈리아 대표팀은 성난 자국 팬들의 난동이 무서워 귀국 장소를 제노바로 바꾸고 한밤중에 몰래 입국을 시도했으나, 이탈리아 축구팬들은 이미 공항에 잔뜩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고 선수들이 오자마자 썩은 토마토 날달걀 세례를 퍼부었다. 그리고 파브리는 즉각 경질되었으며 1년 간 어떤 팀 감독도 맡지 말고 근신하라는 '처벌'을 받아야 했다. 지금까지도 이탈리아 노인들이 박두익을 기억하고 있다고 할 정도로 이 경기는 오랫동안 이탈리아인들의 마음 속에 아픈 상처로 남고 말았다. 이탈리아 식당에서 수습으로 일해본 요리사 박찬일은 주방장 노인이 처음에 자신의 이름을 듣었을 때 "박? 자네 혹시 박두익과 무슨 사촌 사이라도 되나?"라는 말을 먼저 했을 정도였다고 밝혔다. 박찬일이 "30년도 넘은 건데 아시네요?"라는 말을 하자 그 주방장은 "그만큼 엄청났으니까."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36년이 지나 2002 한일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이 16강전에서 이탈리아와 맞붙게 되었을 때 붉은 악마들이 'AGAIN 1966'라는 카드 섹션으로 또 다시 이 경기를 언급하자 이탈리아 측에서 노발대발하며 카드 섹션을 중지하라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1994년 MBC로 축구 열풍이라는 제목으로 더빙 방영한 51부작 이탈리아와 일본 합작 애니메이션 <사커 포에버> (1994년작으로 최신작이었다.) 34화 <예상하지 못한 팀>에서는 주인공(1930 월드컵 당시 어렸을 적부터 월드컵을 보고 겪었다. 한국어판 성우는 김현직)과 이탈리아인 친구, 둘이 1966년 월드컵 당시 영국 어느 시골길을 친구랑 가던 길에 어느 범죄자가 형사로 오해하여 두 사람이 할머니로 변장한 이 범죄자의 집 지하에 미로처럼 되어있는 곳에 갇혀 고생하게 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여긴 불법 축구 도박 관련 기지였고, 이 미로 같은 지하길을 계속 가던 둘은 어느 좁은 길로 얼굴이 겨우 나올 정도로 구멍을 발견해 다가가보니 바로 이 경기가 열린 에이섬 파크의 경기장 구석에 난 구멍이었다. 나가진 못하고 여기로 축구 경기 결과를 볼 수 있었는데, 박두익의 골이 터져 북한이 이기는 결과에 주인공의 이탈리아인 친구(성우가 손원일)가 북한에게 이탈리아가 졌다는 것에 절망한다. 나중에 경찰이 오고 뭐하고 소동 끝에 이곳이 일망타진되는데, 이 불법 도박한 곳에서 이탈리아가 북한을 7:1로 이긴 걸 예상한 결과가 적힌 글을 보고 이탈리아인 친구는 원래 이럴 것이라고 봤다며 한탄한다.(다만 영어로 ITALY 7-1 KOREA라고만 적혀 있어서 국내 방영당시 북한이란 한글 자막이 달렸었다.)

3.4. 8강전 포르투갈전 - 3:5 패

파일:1966 FIFA World Cup Official logo.png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 8강 제4경기
1966년 7월 23일 15:00(UTC+0)
구디슨 파크 ( 영국, 리버풀)
주심: 메나헴 아슈케나지 (이스라엘)
파일:북한 국기.svg 3 : 5 파일:포르투갈 국기.svg
북한 포르투갈
1′[11]23초이다.] 박승진
21′ 리동운
22′ 양성국
득점자 27', 42' (PK),56', 59' (PK) 에우제비우
78′ 주제 아우구스토
관중: 40,248명
북한의 8강전 상대는 포르투갈이었다. 포르투갈 역시 북한과 마찬가지로 이번 대회에 첫 출전한 나라였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모든 이들의 예상을 깨고 조별리그에서 축구 황제 펠레가 이끄는 디펜딩 챔피언 브라질을 3:1로 격파하는 파란을 일으키며 8강에 올랐다.[12] 북한 역시 조별리그에서 이탈리아를 1:0으로 꺾고 올라온 팀이었다. 즉 이 경기는 이 대회 돌풍 팀들끼리의 대결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북한이 조별리그에서 이탈리아를 이겼다고 하더라도 브라질을 꺾고 올라온 포르투갈보다는 처진다고 봤다. 그래서 경기 전 예상으로는 북한이 2점 차 정도로만 지면 엄청 잘 한 것이라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한편 북한을 열렬히 응원했던 미들즈브러 시민 수천 명은 이 경기를 보기 위해 직접 버스를 대절해 리버풀까지 원정 응원을 갔다고 한다. 이렇게 북한과 포르투갈의 4강 진출을 놓고 벌인 운명의 한판 승부가 펼쳐졌다.

경기가 시작되자 불과 23초 만에 림승휘의 킬 패스를 받은 박승진이 기습적인 왼발 대포알 중거리 슛을 날렸고, 이게 그대로 골로 들어가며 예상을 깨고 북한이 1:0으로 앞서갔다. 박승진의 선제골이 워낙 기습적으로 들어갔기에 포르투갈 선수들은 스턴건을 맞은 듯 얼이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른 시간에 선제골이 들어가자 북한 선수들의 자신감은 더욱 상승했고 신바람이 난 듯 포르투갈을 일방적으로 밀어 붙이며 신들린 공격을 퍼부었다. 그리고 전반 21분, 포르투갈의 좌측 진영을 쇄도하던 레프트윙 양성국이 중앙으로 크로스를 올렸는데 그만 포르투갈의 주제 페레이라 골키퍼가 치명적인 펀칭 미스를 범해 오른쪽으로 볼이 흘렀고 이 흐른 볼을 페널티 에어리어로 쇄도한 리동운이 왼발로 제기차기 하듯이 받아 차 넣었다. 그렇게 북한이 2:0으로 앞서갔다. 관중들은 일제히 "We want three!(우리는 3번째 골을 원한다!)"라며 북한을 소리 높여 응원했다. 그리고 북한은 그런 관중들의 기대에 부응하듯 1분 후인 전반 22분에 양성국이 중거리 슛으로 또 1골을 터뜨리며 3:0으로 크게 앞서갔다. 관중들은 일제히 "Korea!"를 외치며 크게 열광했다. 점수를 따라잡거나 뒤집기 극히 어렵다는 3골 차까지 점수가 벌어진 것이다.

이제 모든 이들이 북한의 승리를 기정사실로 여겼다. 이대로 경기가 끝날 경우 북한은 아시아 팀 최초로 4강에 올라 영국 축구의 성지라는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개최국이자 축구 종주국인 잉글랜드와 맞붙게 된다. 이렇게 북한의 웸블리행이 점점 현실로 다가오는 듯했다. 하지만 포르투갈에는 흑표범 에우제비우가 버티고 있었다. 전반 중반까지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했던 에우제비우는 북한에게 0:3으로 뒤지며 그로기 상태에 몰리자 비로소 힘을 내기 시작했다. 3골 차로 앞선 북한은 점점 승리에 도취된 듯 라인이 흐트러지기 시작했고, 에우제비우는 흑표범이라는 별명답게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전반 27분, 북한 수비의 허점을 틈 타 에우제비우가 기습적인 만회골을 터뜨리며 포르투갈은 3:1로 우선 1점을 따라붙었다. 에우제비우는 골 셀레브레이션도 마다하고 직접 볼을 센터 서클까지 들고 오며 조금이라도 빨리 경기를 재개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전반 42분에 북한의 주장 신영규가 페널티 에어리어에서 파울을 범했고, 주심은 곧바로 페널티킥을 선언했다. 킥커로 나선 에우제비우가 깔끔하게 성공시키며 포르투갈은 다시 점수를 따라붙었다. 그렇게 전반전은 북한이 3:2로 앞선 채로 끝이 났다.

북한으로선 수비를 강화해 시간을 끌고 잠그기에 돌입해야 했지만, 국제 경기 경험이 부족했던 북한 선수들은 지능적으로 시간을 질질 끄는 방법을 전혀 몰랐고 무리하게 계속 뛰면서 라인이 점점 흐트러졌다. 후반전이 되자 북한 선수들의 주력은 점점 떨어지기 시작했고, 북한 선수들의 페이스가 점점 떨어지자 에우제비우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에우제비우는 후반 11분에 기어이 동점골을 뽑아내며 해트트릭을 달성하는 괴력을 발휘해 승부를 다시 3:3 원점으로 되돌렸다. 따라잡기 어렵다는 3골 차 점수를 기어이 따라잡은 것이다. 35분 만에 3골 차 리드가 따라 잡히자 북한도 더 이상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북한은 다시 포르투갈을 향해 반격을 가했으나 이미 페이스가 떨어진 그들은 전반전만큼의 위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오히려 3분 후 페널티 에어리어를 쇄도해 들어오던 에우제비우를 북한 수비수 림중선이 슬라이딩 태클로 쓰러뜨리며 또 페널티킥을 내줬다. 이전까지 여러 차례 좋은 선방으로 골문을 잘 지킨 북한 골키퍼 리찬명이었지만 그는 키가 170cm에 불과한 단신이어서 상단으로 오는 볼에 취약했다. 노련한 에우제비우는 정확히 골대 상단을 뚫는 슈팅으로 리찬명과의 두 번째 1:1 대결에서도 승리하며 홀로 4골을 터뜨리는 원맨 쇼를 보인 끝에 승부를 기어이 4:3으로 뒤집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후반 33분, 코너킥 찬스에서 주제 아우구스토가 굿바이 헤더 골을 터뜨리며 스코어를 5:3으로 벌렸고 그렇게 경기는 8골을 주고받는 난타전 끝에 포르투갈의 극적인 5:3 역전승으로 끝이나며 8강 8위로 마감했다.

다 잡은 승리를 놓친 북한 선수들은 허탈함을 금치 못했으나, 영국 관중들은 이탈리아를 꺾고 8강에 올랐고 또 펠레가 이끄는 브라질을 꺾고 올라온 포르투갈을 3골 차로 리드하며 선전한 북한에게 뜨거운 격려의 박수를 보내주었다. 그리고 이 대회에서 맹활약을 했던 박두익은 '동양의 진주'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북한이 워낙 괴이한 집단이다보니 정치적 숙청을 당했다는 루머가 여러 루트에서 꾸준히 나왔었는데 2002년에 제작된 다큐멘터리 영화 천리마축구단을 통해 여전히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북한 정권의 고위층으로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다는 게 확인되었다.

4. 1970 멕시코 월드컵~ 2006 독일 월드컵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8강 신화를 썼던 북한이지만 이후 그들은 무려 40년 동안 월드컵 무대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1970 멕시코 월드컵 지역예선은 아시아, 오세아니아를 묶어 1장의 16개국 본선 진출권이 부여되었다. 북한은 지난 대회에 본선에 진출했던 팀이었기에 바로 2차 예선으로 직행해서 이스라엘, 뉴질랜드와 함께 2조에 속했다. 그러나 북한은 적성국인 이스라엘과 대결하기 싫다며 거부 의사를 밝혔고 결국 예선 경기를 치르기도 전에 기권했다. 그리하여 연속 본선 진출이 무산되었다. 냉전이란 시대적 상황이 스포츠에도 진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

뒤이어 1974 서독 월드컵은 역시 지난 대회와 함께 아시아, 오세아니아 두 대륙을 묶어 1장의 16개국 본선 진출권이 보장되었다. 당시 지역 예선 방식은 참가 신청을 한 15개 팀을 A지역과 B지역으로 나눈다. 그리고 각 지역은 2개 조로 나누어 경기를 한 후 A지역의 경우는 각 조 1, 2위가 준결승전을 치르고 그 경기 승자가 결승전에 올라 우승자를 가린다. B지역의 경우는 각 조 1위 팀만이 결승전에 올라 우승자를 가린다. 그리하여 A지역의 우승자와 B지역의 우승자가 최종예선에 올라 둘이서 홈 & 어웨이로 겨룬 후 합산 점수를 따져 본선 진출 여부를 가리도록 되어 있었다. 이 때 북한은 B지역에 편성되어 이란, 시리아, 쿠웨이트와 함께 2조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이 당시 아시아 축구는 이란이 AFC 아시안컵 2회 연속 우승을 거두며 한창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북한은 이란에 힘 한 번 못 써보고 밀리며 1승 3무 2패라는 저조한 성적으로 조 3위에 그쳐 예선 탈락했다.

이후 북한은 1976 몬트리올 올림픽 축구에 출전하여 10년 전 월드컵 때와 같이 8강에 진출하여 8강 8위를 기록하는데 성공하며 아직 그들의 건재함을 과시했다. 이러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다시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 출전에 도전했다. 이 때도 역시 아시아, 오세아니아 두 대륙을 묶어서 1장의 16개국 본선 진출권이 부여되었다. 이 대회 지역 예선은 참가 신청을 한 21개 팀을 5개 조로 나누어 1위만 조 2위까지 나머지 4개 조는 1위 팀이 최종예선에 올라 풀리그로 경기를 치러 1위를 차지하면 본선에 진출할 수 있었다. 이 때 북한은 대한민국, 일본, 이스라엘과 함께 2조에 속했다. 모두 적성국들과 한 조에 편성된 것이다. 이 문제 때문에 북한은 예선을 치르기도 전에 또 기권 선언을 했고 출전이 무산되었다.

뒤이어 1982 스페인 월드컵 지역 예선에선 진출자리가 24강으로 늘면서 아시아, 오세아니아 두 대륙을 묶어 2장의 24강 본선 진출권을 부여했다. 이 때의 지역예선은 참가 신청을 한 24개국을 4개의 조로 나누어 각 조에서 1위를 차지한 4팀이 최종예선에 올라 풀리그 형식으로 경기를 치러 1, 2위가 본선에 진출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1차 예선 4조는 특이하게 A그룹과 B그룹으로 나누어서 진행했다. 4조는 총 6개국이 편성되었는데 이를 3팀씩 A그룹과 B그룹으로 나누어 경기하고 그 그룹의 1, 2위가 준결승전에 진출하여 토너먼트 식으로 경기를 한다. 그리고 그 경기 승자가 결승전을 치러 우승한 팀이 4조 1위가 되는 것이다. 북한은 4조에 편성되었는데 그룹 결정전에서 포르투갈령 마카오와 경기를 해 3 : 0으로 승리하여 홍콩, 싱가포르와 함께 B그룹에 속했다. 북한은 1차전에서 싱가포르를 1 : 0으로 꺾고 2차전에서 홍콩과 2 : 2로 비겨 조 1위로 준결승전에 진출했다. 그리고 준결승전에서 숙적 일본과 만나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1 : 0으로 제압하고 결승전에 올랐다. 그러나 결승전에서 중국에 2 : 4로 패배하며 결국 본선 진출이 좌절되었다.

1986 멕시코 월드컵 지역 예선에선 드디어 아시아가 단독으로 2장의 24강 본선 진출권을 부여받았다. 당시 지역예선의 방식은 참가 신청을 한 아시아 축구연맹 소속 24개국을 총 4그룹으로 나누었는데 각 그룹은 또 A조와 B조로 나누었다. 그리하여 각 조 1위가 2차 예선을 치러 승리한 팀 즉, 각 그룹의 1위를 한 4팀이 최종예선에 올라 두 팀 씩 플레이오프로 맞대결을 하여 승리를 한 2팀이 본선에 오르는 방식이었다. 북한은 일본, 싱가포르와 함께 4그룹 B조에 속했다. 1차전 싱가포르 원정 경기에서 북한은 1 : 1 무승부에 그치며 가시밭길을 걸었다. 그리고 2차전 일본 원정 경기에서 일본에 0 : 1로 패배하며 위기에 몰렸다. 그리고 3차전 일본과의 홈 경기에서 0 : 0 무승부에 그치며 남은 싱가포르와의 홈 경기에 관계 없이 탈락이 확정되었다. 싱가포르와의 홈 경기에서 2 : 0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이미 늦었다.

1990 이탈리아 월드컵 지역 예선도 지난 대회와 마찬가지로 아시아에 2장의 24강 본선 진출권이 부여되었다. 당시 지역예선의 방식은 참가 신청을 한 아시아 축구연맹 소속 26개국을 총 6개 조로 나누어 리그전을 치러 각 조 1위가 최종예선에 올라 싱가포르에 모여 6개 팀이 풀리그 형식으로 경기를 치러 1, 2위가 본선에 진출하도록 되었다. 북한은 일본, 인도네시아, 홍콩과 함께 6조에 속했다. 북한은 1차전 인도네시아 원정 경기에서 0 : 0으로 비긴 뒤 2차전 홍콩 원정 경기에서 2 : 1로 승리했다. 그러나 3차전 일본 원정 경기에서 1 : 2로 패배하며 삐끗했다. 하지만 4차전 일본과의 홈 경기에서 2 : 0으로 승리하며 2경기 덜 치른 상태에서 일본과의 승점 차를 2점으로 좁혔고 5차전에서 이미 탈락이 확정된 홍콩과의 홈 경기에서 4 : 1 대승을 거두며 일본과 승점에서 동률을 이루었으나 골 득실에서 1골이 앞서며 최종예선 진출을 확정지었고 마지막 경기에서 인도네시아마저 2 : 1로 꺾으며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북한과 함께 최종예선에 오른 팀은 대한민국, 아랍에미리트, 카타르, 중국, 사우디아라비아였다. 1차전에서 북한은 아랍에미리트와 0 : 0으로 비기며 불안한 스타트를 했다. 그리고 2차전 라이벌 대한민국을 상대로 0 : 1로 패배하며 점점 순위에서 뒤처지기 시작했다. 3차전에서 카타르를 2 : 0 승리를 거두며 다시 안정을 찾는 듯했으나 4차전에서 중국에 0 : 1로 패배하며 결국 남은 경기에 관계 없이 탈락이 확정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5차전에서도 사우디아라비아에 0 : 2로 패배하며 1승 1무 3패에 그치며 최하위를 기록했다.

1994 미국 월드컵에도 의외로 북한은 참가 신청을 했다. 만약 북한이 이 대회에 출전하게 된다면 월드컵 역사상 가장 정치적인 축구 대결이 성사될 지도 모른다는 예측도 있었다. 이번 대회 지역 예선은 지난 대회와 같은 방식으로 치러졌다. 당시 1차 예선에서 북한은 카타르,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베트남과 함께 3조에 편성되었다. 1차 예선에서 북한은 7승 1무, 19득점 6실점이란 준수한 성적으로 조 1위를 차지해 최종예선 진출에 성공했다. 최종예선은 카타르의 수도 도하에서 열렸다. 북한과 함께 최종예선 진출에 성공한 팀은 대한민국, 일본,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이라크였다. 이 팀들과 풀리그 방식으로 경기를 치러 2위 안에 들어야 본선에 오를 수 있었다. 북한은 1차전에서 이라크와 맞붙어 3 : 2 승리를 거두며 순조로운 출발을 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어찌된 것인지 계속 패배를 기록했다. 2차전에서 당시 오일머니로 아시아의 신흥 강자로 급부상하며 상승세를 타던 사우디아라비아에 1 : 2로 석패한 후 3차전에서 숙적 일본에 0 : 3으로 대패하며 조 최하위로 내려앉았다. 그리고 4차전에서 이란에도 1 : 2로 패배하며 결국 남은 최종전에 관계 없이 조 최하위가 확정되며 탈락이 확정되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1차전에서 이란을 3 : 0으로 크게 꺾은 후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와 내리 무승부를 거둔 후 일본에 불의의 일격을 당해 0 : 1로 패배하며 탈락 위기에 몰려 있었다. 대한민국이 본선에 올라가기 위해선 마지막 경기에서 북한을 반드시 2점 차 이상으로 이기고 동시에 사우디아라비아나 일본 둘 중 하나가 무승부 이하의 성적을 기록해야 했다. 대한민국과의 최종전에서 북한은 전반전을 0 : 0으로 비기며 애간장을 태웠으나 후반전에 들어 뜨거운 동포 사랑인지는 몰라도 급격히 무너지며 고정운, 황선홍, 하석주에게 내리 실점해 0 : 3으로 대패했다. 그리고 같은 시각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란을 4 : 3으로 이겼으나 일본은 경기 종료 직전에 이라크의 움란 자파르에게 헤더 동점골을 실점하며 2 : 2 무승부에 그쳐 결국 한국의 본선 진출이 확정되었다. 이것을 도하의 기적이라 한다. 북한은 본선 진출엔 실패했지만 나름 도하의 기적의 조연 역할을 한 셈이다.

그리고 1994년 7월 8일에 그들에게 '위대한 수령님'으로 불리던 김일성이 향년 82세로 타계했고 그 다음 해부터 이른바 고난의 행군이라는 최악의 경제난이 불어닥쳤다. 먹고 살기 급급한 마당에 월드컵에 나서는 건 사치에 가까웠고 그래서 1998 프랑스 월드컵 2002 한일 월드컵 두 대회 연속으로 불참을 선언했다. 2002 한일 월드컵 당시 대한민국 측에서 남북 분산 개최를 추진하기도 했으나 당시 북한 쪽 경제 사정이 좋지 못했던 데다 국내적으로 반대 여론도 상당했고 결정적으로 북한 쪽 경기장이 월드컵을 치를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해[13] 결국 무산되었다. 2002 한일 월드컵 당시 북한은 의외로 조선중앙TV에서 16강전 대한민국과 이탈리아의 경기를 녹화 방송해서 틀어줄 정도로 조용히 월드컵을 구경하는 듯했으나 갑자기 무슨 의도에서인지 폐막 하루 전인 6월 29일에 제2연평해전을 일으키는 만행을 저질러 전 세계인들의 분노를 샀다.

이후 어느 정도 경제가 회복세에 들어서자 2006 독일 월드컵은 다시 출전 신청을 했다. 이 때 북한 축구도 어느 정도 변화하여 안영학 등의 조총련계 선수도 대표팀에 발탁되었다. 이 대회에서 아시아 팀은 4.5장의 출전권을 부여받았다. 이 대회 지역예선은 2003년 10월 기준 FIFA 랭킹이 낮은 14개 팀이 참가하는 1라운드는 두 팀이 홈 앤드 어웨이 방식으로 경기를 하여 승자가 다음 라운드로 진출하는 방식이다. 2라운드에서는 1라운드에서 올라온 7팀과 나머지 25개 팀까지 32개 팀이 네 팀씩 8개 조로 나뉘어 홈 앤드 어웨이 방식으로 경기를 하여 각 조의 1위가 다음 라운드에 진출하게 된다. 3라운드에서는 2라운드에서 올라온 8개 팀이 두 조로 나누어 각 조의 1, 2위 팀은 월드컵 본선에 직행하게 되고, 각 조 3위 팀간에 플레이오프를 거쳐 승리팀이 북중미카리브 지역 예선 최종라운드의 4위 팀과 대륙간 플레이오프를 펼쳐 0.5장의 티켓의 향방을 가리게 된다. 북한은 2라운드부터 시작하였다.

북한은 2차 예선에서 아랍에미리트, 태국, 예멘과 함께 5조에 속했다. 현역 시절 ' 독사'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던 터프한 수비수 윤정수 감독이 지휘하는 북한은 1차전에서 예멘과 1 : 1로 비기고 2차전에서도 아랍에미리트와 0 : 0으로 비겨 불안한 출발을 했다. 그러나 3차전 태국 원정 경기에서 4 : 1 대승을 거두며 본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 반환점을 돌았을 때 5조의 순위는 아랍에미리트가 2승 1무(승점 7점)로 1위, 북한이 1승 2무(승점 5점)로 2위, 태국이 1승 2패(승점 3점)로 3위, 예멘이 1무 2패(승점 1점)로 4위에 있었다. 그리고 북한이 4차전 태국과의 홈 경기에서 4 : 1 대승을 거둔데 반해 아랍에미리트가 예멘 원정에서 1 : 3으로 대패하며 순위 역전에 성공했다. 뒤이어 북한이 5차전 예멘과의 홈 경기에서도 2 : 1로 승리했지만 아랍에미리트는 태국 원정에서도 0 : 3으로 대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승점 차가 4점으로 벌어졌고 북한은 남은 아랍에미리트와의 최종전에 관계 없이 최종예선 진출을 확정지었다. 마지막 아랍에미리트 원정 경기에선 0 : 1로 패배해 2차 예선을 3승 2무 1패(승점 11점)로 마무리했다.

최종예선에 진출한 북한은 일본, 이란, 바레인과 함께 B조에 속했다. 북한의 1차전 상대는 바로 일본이었다. 일본 축구의 성지 사이타마 스타디움에서 열린 이 경기에서 북한은 전반 5분 만에 오가사와라 미쓰오에게 선제골을 먹으며 불리한 경기를 했지만 끝까지 맞서 싸웠고 끝내 후반 16분에 남성철이 동점골을 터뜨리며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다. 그렇게 귀중한 승점 1점을 챙기는 듯했는데 종료 직전에 골키퍼 심승철의 펀칭 미스로 인해 세컨드 볼을 오구로 마사시가 낼름 줏어먹어 결승골을 터뜨려 결국 1 : 2로 석패했다. 경기가 끝난 후 윤정수 감독은 주전 골키퍼를 심승철에서 김명길로 교체했다. 그러나 이런 보람도 없이 2차전 바레인과의 경기에서도 북한은 일찌감치 2골을 먹으며 불리한 경기를 했고 후반 18분에 박성관이 1골을 만회했으나 결국 1 : 2로 패배했다. 3차전 상대는 천적 이란이었다. 북한 축구의 성지 김일성경기장에서 치른 이란과의 경기에서도 북한은 0 : 2로 패배했고 이 경기 도중 심판의 판정에 불만을 품은 관중들이 물통을 집어던지며 난동을 부린 탓에 FIFA의 징계를 받아 일본과의 홈 경기를 중립 지역에서 치러야 하는 페널티를 받고 말았다. 이렇게 초반 3연전을 전부 패배하면서 점점 탈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뒤이어 4차전 이란 원정 경기에서도 북한은 분전했지만 아자디 스타디움의 악명 높은 홈 텃세를 이기지 못하며 결국 0 : 1로 패배해 4전 전패로 여전히 승점을 1점도 얻지 못했다. 3위인 바레인이 당시 1승 1무 2패(승점 4점)를 기록하고 있었기에 북한은 반드시 남은 2경기를 모두 이겨야 플레이오프 진출이라도 노려볼 수 있었다. 5차전 상대는 일본이었다. 본래 이 경기는 평양에서 열려야 했지만 이란과의 경기에서 발생한 징계로 인해 태국의 방콕에서 무관중 경기로 치러졌다. 그리고 이 경기에서 북한은 일본에 0 : 2로 패배해 5전 전패를 기록하며 남은 바레인과의 경기에 관계 없이 탈락이 확정되었다. 이 사태로 인해 결국 윤정수 감독은 경질되었고 김명성 감독으로 교체되었다. 6차전 바레인 원정 경기에선 결국 최철만, 김철호, 안철혁의 릴레이 골로 3 : 2로 승리하며 유종의 미를 거두었으나 이미 때는 늦었고 북한의 40년 만에 월드컵 본선 진출의 꿈도 물거품이 되었다.

5. 2010 남아프리카 공화국 월드컵

그렇게 이번에도 최종예선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또 다시 미끄러진 후 또 4년의 시간이 흘렀다. 이 시기에 북한 축구는 8강 신화를 쓴 황금기였던 1960년대에 이어 다시 한 번 나름의 중흥기를 맞았다. 안영학 정대세, 량용기 K리그 J리그 등지에서 활약하는 조총련계 선수들의 대표팀 입성이 늘어났고 더불어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 분데스리가 급의 유럽 빅리그는 아니지만 주장 홍영조를 비롯해 러시아, 스위스 등 나름 유럽 군소리그에서 활약하는 '해외파'들이 대거 입성해 그 동안 폐쇄적이었던 북한 축구의 견문을 넓혔다. 그리고 덕장으로 이름난 4.25 체육단 감독 출신 대표팀의 수장 김정훈 감독이 국내파 선수들과 해외파 선수들을 하나로 잘 통합하여 다시 한 번 44년 만의 월드컵 본선 진출을 꿈꿨다.

이번 대회에서도 아시아는 4.5장의 출전권을 보장받았다. 이 대회에 참가 신청을 한 43개 신청국들 중 3차 예선에 직행하는 5개 팀을 제외한 38개 팀을 19개 그룹으로 나누어 홈 앤 어웨이 방식으로 치르게 되어 있는데, 1차 예선의 승자 19개 팀 가운데 상위 11개 팀은 3차 예선에 직행하게 되고, 2차 예선에 진출한 하위 8개 팀은 다시 4개 그룹으로 나누어 홈 앤 어웨이 방식으로 치러 2차 예선의 승자 4개 팀은 3차 예선에 진출하게 된다.3차 예선은 20개 팀(1차 예선 승자 11개 팀, 2차 예선 승자 4개 팀, 3차 예선 직행 5개 팀)을 5개 그룹으로 나누어 홈 앤 어웨이 방식으로 치르는데, 각 조의 1, 2위를 기록한 10개 팀은 최종 예선에 진출하게 된다. 최종 예선은 3차 예선을 통과한 10개 팀을 2개 조로 나누어 홈 앤 어웨이 방식으로 치르는데, 각 조 1, 2위를 기록한 4개 팀은 본선에 직행하게 된다. 각 조 3위를 기록한 2개 팀은 홈 앤 어웨이 방식으로 플레이오프를 치르게 되며, 플레이오프의 승자는 오세아니아 예선 1위 팀과 홈 앤 어웨이 방식으로 대륙간 플레이오프를 치르는데, 대륙간 플레이오프의 승자는 본선에 진출하게 된다. 북한은 1차 예선부터 시작하였다.

북한의 1차 예선 상대는 몽골이었다. 당시 북한 대표팀은 A팀과 B팀으로 이원화되어 있었는데 1차 예선에서는 조동섭 감독이 지휘하는 B팀이 나갔고 만일 3차 예선 진출에 성공하면 그 때 김정훈 감독이 지휘하는 A팀이 나가기로 했다. 울란바토르에서 치른 1차전 경기에서 북한은 전반 14분에 터진 박철민의 선제골과 전반 24분, 32분, 후반 36분에 터진 정철민의 해트트릭에 힘입어 4 : 1 대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2차전 홈 경기에서도 박철민의 멀티골과 김국진, 정철민, 전광익의 릴레이 골로 5 : 1 대승을 거두어 2전 전승, 합산 점수 9 : 2의 성적으로 가볍게 1차 예선을 통과했다. 북한은 1차 예선 생존자 19개 팀 중 피파랭킹으로 상위 11위 안에 들었기 때문에 2차 예선을 치르지 않고 바로 3차 예선으로 직행했다. 3차 예선부터는 앞서 말한대로 김정훈 감독이 이끄는 A팀이 나섰다.

북한은 3차 예선에서 대한민국, 요르단, 투르크메니스탄과 함께 3조에 속했다. 1차전 요르단 원정 경기에서 북한은 전반 44분에 터진 홍영조의 결승골을 끝까지 잘 지켜 1 : 0 승리를 기록해 귀중한 승점 3점을 챙겼다. 그리고 2차전 상대는 대한민국이었다. 본래 이 경기는 북한의 홈 경기이므로 평양에서 치러야 했다. 그러나 당시 대한민국엔 보수 정권인 이명박 정부가 들어섰고 이 때 남북 관계는 심각할 정도로 경색되어서 북한 측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의 입국을 거부했다. 그래서 FIFA는 이 경기를 중립 지역인 중국 상하이에서 치르도록 했다.[14] 이 경기에서 북한은 특유의 밀집수비를 바탕으로 한 늪 축구로 대한민국을 괴롭히며 귀중한 0 : 0 무승부를 거두며 승점 1점을 추가했다. 그러나 3차전에서 조 최약체 투르크메니스탄을 상대로는 답답한 공격력을 보인 끝에 0 : 0 무승부에 그쳤다. 반환점을 돌았을 때 3조의 순위는 대한민국과 북한이 1승 2무(승점 5점)로 동률을 이루었으나 골 득실에서 +4를 기록한 대한민국이 +1에 그친 북한에 앞서 1위를 차지했고 북한이 2위를 차지했으며 요르단이 1승 1무 1패(승점 4점)로 그 뒤를 이어 3위에 있었고 1무 2패(승점 1점)에 그친 투르크메니스탄이 최하위를 기록했다. 4차전 투르크메니스탄과의 홈 경기에선 후반 27분, 최금철의 결승골을 끝까지 잘 지켜 1 : 0으로 승리해 승점을 8점으로 추가했다. 3위 요르단은 대한민국에 0 : 1로 패배하면서 승점 차가 4점으로 벌어졌다. 이제 5차전 요르단과의 홈 경기에서 이기기만 하면 최종예선 진출을 확정하게 되는 것이다. 양각도축구경기장에서 열린 요르단과의 홈 경기에서 북한은 전반 44분과 후반 27분에 홍영조가 2골을 터뜨리며 2 : 0 승리를 기록해 남은 경기에 관계 없이 최종예선 진출을 확정지었다. 6차전 대한민국 원정 경기에서도 0 : 0 무승부를 기록하며 3승 3무(승점 12점)의 전적으로 무패를 기록했다. 6경기 4득점 무실점이란 기록이 말해주듯 북한은 공격력은 심각할 정도로 빈공이었지만 단 1골도 내주지 않는 강력한 수비의 힘으로 최종예선에 오른 것이다.

하지만 북한의 본선행은 영 쉽지 않아 보였다. 최종예선 조 추첨 결과 북한은 대한민국,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아랍에미리트와 함께 죽음의 조인 B조에 속한 것이다. 대한민국은 전통적으로 껄끄러운 상대였고,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은 북한이 단 1번도 이겨본 적이 없는 천적 중 천적인 팀이었다. 그래서 북한의 본선 진출을 예상하는 이는 당시만 해도 없었다. 남북한 본선 동반 진출이란 것도 이 당시만 하더라도 그냥 그랬으면 좋겠다는 소망 정도였지 그게 이뤄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이는 없다시피 했다. 북한의 1차전 상대는 아랍에미리트였다. 원정 경기라 쉽지 않은 경기가 될 것으로 예측되었으나 예상을 깨고 최금철과 안철혁이 일찌감치 골을 터뜨리며 2 : 1 승리를 거두며 순조로운 출발을 했다. 그리고 2차전 경기는 대한민국과의 홈 경기였는데 이 경기 역시 3차 예선 때와 마찬가지로 평양이 아닌 중국 상하이에서 경기를 했다. 이 경기에서 북한은 대한민국의 맹공을 밀집수비로 막아낸 후 후반 20분, 홍영조의 페널티킥 골로 오히려 1 : 0으로 앞서가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4분 후에 한국의 신예 기성용에게 동점골을 내주며 1 : 1 무승부에 그쳤다. 그리고 3차전 상대는 천적 이란이었다. 이 경기에서 북한의 에이스 인민 루니 정대세가 골을 터뜨렸지만 또 아자디 징크스를 넘지 못하며 1 : 2로 패배했다. 그러나 김일성경기장에서 열린 4차전 사우디아라비아와의 홈 경기에선 추운 평양의 2월 날씨에 사우디 선수들이 고전하는 틈을 타 전반 29분에 터뜨린 '북한의 마라도나'란 별명을 가진 문인국의 결승골을 끝까지 잘 지켜 1 : 0으로 승리해 드디어 사우디 징크스를 깨뜨렸다.[15] 4차전까지 반환점을 돌았을 때 B조의 순위는 대한민국이 2승 2무(승점 8점)로 1위, 북한이 2승 1무 1패(승점 7점)로 2위, 이란이 1승 3무(승점 6점)로 3위, 사우디아라비아가 1승 1무 2패(승점 4점)로 4위, 아랍에미리트가 1무 3패(승점 1점)로 최하위에 있었다.

처음엔 월드컵 본선 진출이 '하늘의 별 따기'라고 생각했던 북한 선수들은 서서히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5차전 아랍에미리트와의 홈 경기에서도 전반전엔 고전했으나 후반전에 박남철과 문인국이 나란히 골을 터뜨리며 2 : 0 승리를 거두어 3승 1무 1패(승점 10점)의 전적으로 1경기를 덜 치른 대한민국을 제치고 조 1위에 등극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6차전 대한민국 원정 경기에서 북한은 끝까지 대한민국의 파상공세를 잘 방어해냈고 정대세가 좋은 득점 찬스를 잡았으나 그의 헤더 슛이 골 라인을 넘기 직전에 이운재 골키퍼의 선방에 막히는 불운을 겪었다. 그리고 후반 41분에 대한민국의 김치우가 찬 프리킥이 주장 홍영조의 손에 맞고 굴절되는 불운을 겪으며 결국 0 : 1로 석패해 다시 2위로 내려갔다. 7차전 상대는 천적 이란이었다. 당시 북한의 승점은 10점이었고 이란의 승점은 6점이어서 두 팀 모두 승점 3점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특히 이란으로서는 반드시 이 경기를 이겨야 1경기 덜 치른 상태에서 북한과의 승점을 1점 차로 좁힐 수 있었다. 양각도축구경기장에서 열린 경기에서 양 팀은 모두 결정적인 기회를 이따금씩 놓치며 결국 헛심 공방 끝에 0 : 0 무승부를 거두었다. 같은 날 대한민국이 아랍에미리트 원정 경기에서 2 : 0 승리를 거두며 4승 2무(승점 14점)의 전적으로 본선 진출을 확정지었다.

그리고 북한이 휴식할 때 대한민국 VS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VS 아랍에미리트의 경기가 열렸다. 전자의 경기는 0 : 0 무승부로 끝나며 남은 경기에 관계 없이 대한민국의 조 1위가 확정되었고 이란은 고전 끝에 알리 카리미의 결승골로 아랍에미리트를 1 : 0으로 꺾었다. 경기를 모두 치렀고 이미 탈락이 확정된 아랍에미리트를 제외한 나머지 4팀은 이제 모두 1경기씩 만을 남겨놓고 있었다. 이 때 B조의 순위는 4승 3무(승점 15점)의 대한민국이 남은 최종전에 관계 없이 조 1위를 확정지었고 남은 조 2위를 놓고 북한,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3팀이 경쟁하게 되었다. 북한과 사우디아라비아는 3승 2무 2패(승점 11점)로 동률이었으나 골 득실에서 +2를 기록한 북한이 0인 사우디아라비아에 앞서 2위를 차지했고 사우디아라비아는 3위였다. 그리고 2승 4무 1패(승점 10점)를 기록한 이란이 4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먼저 대한민국 VS 이란의 경기가 열리고 뒤이어 사우디아라비아 VS 북한의 경기가 열렸다. 북한으로서는 앞 경기에서 이란이 대한민국을 이기지 못하면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경기에서 비기기만 해도 본선 진출에 성공할 수 있다.

먼저 열린 대한민국과 이란의 경기에선 주장 박지성의 극적인 동점골로 1 : 1 무승부를 기록했고 이란의 승점은 11점으로 묶이게 되었다. 이제 유리해진 것은 북한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와의 최종전에서 비기기만 하면 44년 만의 본선 진출이 이루어진다. 북한은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경기에서 전원 수비에 나서는 극단적인 벌떼 수비로 경기에 나섰다. 갈 길이 급했던 사우디아라비아는 초반부터 라인을 높이 끌어올리며 맹공을 퍼부었다. 그러나 북한 골키퍼 리명국은 신들린 선방으로 사우디아라비아의 슛을 막아내고 또 막아내며 애간장을 태웠다. 북한은 경기 도중 미드필더 김영준이 퇴장 당하여 수적 열세에 놓이는 불운을 겪었지만 그런 불운도 본선을 향한 그들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그리하여 경기는 0 : 0 무승부로 끝이 났다. 북한과 사우디아라비아는 3승 3무 2패를 기록해 승점은 12점으로 동률이었으나 골 득실에서 북한이 +2, 사우디아라비아가 0으로 북한이 2골 더 앞서 조 2위를 확정해 44년 만에 본선 진출에 성공했고 3위에 그친 사우디아라비아는 플레이오프로 떨어졌으며 4위 이란은 탈락이 확정되었다.[16]

이로서 꿈에서만 그렸던 남북한 동반 월드컵 본선 진출이 현실이 되었다. 분단 국가가 함께 월드컵 무대에 오른 것은 1974 서독 월드컵 당시 서독과 동독이 함께 본선에 오른 후 36년 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 때는 서독이 개최국이어서 지역예선을 면제받았고 두 나라 모두 예선을 치러 본선에 오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또 북한은 이번에 월드컵 본선에 오른 4팀 중 유일하게 1차 예선부터 치른 팀이었다. 이렇게 44년 만에 월드컵에 다시 등장했건만, 북한에게 FIFA 월드컵이라는 무대는 너무도 냉혹했다. 조 추첨 결과 북한은 톱 시드 팀이 월드컵 최다 우승국인 브라질이었고 비 톱 시드 유럽 팀 중 가장 강한 포르투갈, 아프리카 최강자인 코트디부아르와 함께 죽음의 조 G조에 편성된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도 16강 진출을 장담하기 힘들 만큼 상당히 험난한 조 편성이었다. 물론 북한의 전력으로 볼 때 안 힘든 조가 어디 있겠냐만, 그래도 미국 대신 잉글랜드가 톱 시드인 C조에 들어갔거나 뉴질랜드 대신 이탈리아가 톱 시드인 F조에 들어갔다면 그래도 승점을 따낼 수 있을 만한 가능성은 있었는데 말이다.[17] 그러나 G조에는 아무리 봐도 북한이 승점 1점이라도 딸 수 있을 만한 상대가 없었다. 그래서 북한이 승점 1점이라도 기록하면 엄청 잘 하는 것이라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결전의 땅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떠났다.

5.1. 32강 조별리그 브라질전 - 1 : 2 패

파일: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 로고.svg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 G조 제2경기
2010년 6월 15일 20:30(UTC+2)
엘리스 파크 스타디움 ( 남아프리카 공화국, 요하네스버그)
주심: 커셔이 빅토르 (헝가리)
파일:북한 국기.svg 1 : 2 파일:브라질 국기.svg
북한 브라질
89′ 지윤남 득점자 55′ 마이콘
72′ 일라누
관중: 54,331명
Man of the Match: 마이콘 (브라질)
북한의 조별리그 1차전 상대는 월드컵을 무려 5번이나 들어올린 최다 우승국이자 삼바축구로 이름난 브라질이었다. 경기가 열릴 당시 브라질의 피파랭킹은 1위였고 북한은 105위였다. 피파랭킹 100위 이하의 팀이 월드컵에 진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따라서 북한은 역대 월드컵 출전국 중 가장 피파랭킹이 낮은 팀이었던 것이고, 결국 이 경기는 월드컵 역사상 피파랭킹 격차가 가장 큰 팀 간의 시합이었다. 경기 전 예상은 당연히 브라질의 압승이었다. 심지어 브라질이 10점차 이상으로 이길 것이라는 예측도 있었다. 때문에 이 경기의 관전 포인트는 누가 이기느냐가 아니라 브라질이 몇 골 차이로 이기느냐였다. 그만큼 북한은 월드컵에서 승점자판기 그 이상도 아니었다. 경기가 시작되기 전 양국의 국가 연주가 차례에서 북한 국가가 엘리스 파크 스타디움을 울리자 정대세가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 많은 이들이 가슴 뭉클해했다.[18]

경기가 시작되자 예상대로 브라질이 일방적으로 경기를 주도하며 공격했고, 북한은 극단적으로 수비에 치중한 5-4-1 포메이션으로 나서며 철저히 선 수비 후 역습으로 상대했다. 브라질 선수들은 삼바 리듬을 연상시키듯 현란한 개인기로 북한 선수들을 농락하며 금방이라도 골이 터질 것만 같은 분위기를 만들었으나, 마치 44년 전 이탈리아처럼 루이스 파비아누의 슛도, 호비뉴의 슛도, 카카의 슛도 이상하게 북한의 골문을 살짝살짝 빗나갔다. 그나마 좋은 슈팅도 리명국 골키퍼의 선방에 막히며 좀처럼 북한의 골문을 열지 못했다. 70%:30%란 볼 점유율, 피파랭킹 1위 VS 105위 팀 간 대결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북한은 브라질의 파상공세를 막아내며 끈질기게 버텼다. 북한의 두터운 중앙 수비에 천하의 브라질도 고전하며 쩔쩔맸다. 그간 김정훈 감독의 전술은 아시아 예선에나 적합한 전술이라며 평가 절하되었는데 충분히 월드컵에서도 먹힌다는 걸 몸소 입증한 것이다.

이렇게 북한은 수비하는 와중에도 원톱 정대세를 필두로 역습에 나서며 득점 기회를 만들어갔다. 전반전 내내 0:0 스코어가 이어지며 의외로 경기가 잘 안 풀리자 브라질 선수들은 점점 조급해졌다. 역으로 피파랭킹 105위인 약체 팀인데도 브라질을 맞아 실점하지 않고 버티며 선전하는 북한의 모습에 많은 이들이 크게 놀라워했다. 그렇게 전반전은 북한이 수비적으로 버티는데 성공하여 0:0으로 마무리 지었다. 본래 브라질이 조별리그 1차전에서 고전하는 경향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적은 점수 차로라도 이겼고 여태까지 유럽과 남미를 제외한 나머지 대륙 팀을 상대로는 전승을 기록해 왔다. 그러나 만일 이대로 경기가 끝날 경우 북한에 승점 1점을 헌납하여 제3 대륙 팀을 상대로 최초로 승점을 내주는 굴욕을 당하고 44년 전 이탈리아와 같이 세계의 웃음거리로 전락하고 만다.

전반전 내내 북한의 밀집수비에 고전하며 체면을 구겼던 브라질은 후반전에 심기일전하며 나섰다. 하지만 북한의 골문은 여전히 함락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후반 10분, 활발하게 오버래핑을 한 브라질의 라이트백 마이콘이 북한 골문 우측까지 치고 올라갔다. 골문과의 각도가 없는 상황이었다. 리명국은 골문과 각도가 없는 곳이었기에 마이콘이 크로스를 올릴 것으로 예상하고 약간 방심했다. 하지만 리명국의 판단과는 달리 마이콘의 선택은 크로스가 아니라 슛이었다. 마이콘은 본래 세리에 A에서도 종종 각도가 없는 상황에서도 곧잘 슛을 날려 득점하는 선수였는데, 폐쇄적인 국가 사정 탓에 국제 경기 경험이 부족했던 리명국으로서는 그런 마이콘의 개인기를 알 리가 없었다. 결국 마이콘의 오른발 무각슛에 그대로 속절없이 실점했고, 55분 동안 굳게 닫힌 북한의 골문이 열리며 드디어 브라질이 1:0으로 앞서갔다.

1골을 실점하자 북한도 어쩔 수 없이 라인을 올리고 반격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굳건했던 수비 라인이 헐거워졌고, 이것은 곧 브라질의 공격을 돕는 일이 되어버렸다. 후반 27분, 호비뉴가 대지를 가르는 스루 패스 한 방으로 페널티 에어리어에 대여섯 명이나 틀어박혀 빼곡히 인의 장벽을 형성하던 북한의 수비벽을 단숨에 무력화시켰고, 호비뉴의 이 패스는 정확히 일라누에게 연결되었다. 리명국이 전진했으나 일라누가 한 발 먼저 잽싸게 밀어넣으며 스코어를 2:0으로 벌렸다. 잘 버텨왔던 북한은 국제 경기 경험 부족과 실력 부족으로 한계를 드러내며 결국 2골을 내리 실점하고 말았다. 하지만 북한은 무기력하게 물러서지 않았다. 모두가 끝이라고 생각했던 후반 44분, 주장 홍영조가 전방으로 높이 띄운 볼을 원톱 정대세가 페널티 에어리어 좌측 외곽에서 헤더로 받아 페널티 박스 쪽으로 떨구어 주었다. 이 볼을 공격에 가담한 레프트백 지윤남이 차지했고, 지윤남은 마이콘의 마크를 이겨내고 페널티 에어리어로 쇄도해 왼발 강슛을 날려 만회골을 터뜨렸다. 스코어는 1:2로 좁혀졌다. 이것은 1966 잉글랜드 월드컵 이후 무려 44년 만에 터진 북한의 골이었다. 점수를 1점 차로 좁힌 북한은 동점골을 넣기 위해 남은 시간 동안 부지런히 공격적으로 나섰다. 그리고 종료 직전에 원톱 스트라이커 정대세가 좋은 위치에서 헤더 슛을 날렸으나 아쉽게도 브라질 수문장 줄리우 세자르의 정면으로 가고 말았다. 그렇게 경기는 브라질의 2:1 승리로 끝이 났다.

하지만 북한 입장에서는 졌지만 잘 싸웠다는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크게 선전했다. 모두가 대패를 예상했지만 1점 차로 석패했기에 북한의 선전을 크게 칭찬했고, G조는 절대 약체가 없는 진정한 죽음의 조라는 평을 받게 했다. 브라질의 카를로스 둥가 감독 또한 "북한의 수비는 공간을 내주지 않았고,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라며 북한의 탄탄한 수비를 칭찬했다. 44년 전 이탈리아를 꺾었을 때만큼은 아니지만 브라질을 상대로 1점 차로 석패했고, 또 골도 넣었기에 북한은 일시적으로 세계적인 찬사를 받았다. 오히려 브라질이 온갖 비난을 받아야 했다. 명색이 월드컵을 5번이나 들어올렸고 피파랭킹 1위인 팀이 고작 105위 팀을 상대로 쩔쩔매다가 2:1로 겨우 이겼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화끈한 공격 축구를 선호하는 브라질인들은 수비 중심적인 둥가의 전술을 싫어했는데 최약체인 북한을 상대로 고작 1점 차 진땀승을 거두었으니 열불이 터질 대로 터졌다. 축구광인 룰라 다 시우바 대통령까지 나서서 대놓고 둥가를 비난하고 나설 정도였다. 브라질 입장에선 이 경기가 승리를 당한 꼴이 된 셈이다.

한편 북한 선수들은 이 경기에서의 선전으로 크게 자신감을 얻었다. 이 조 최강인 브라질과 1점 차로 선전했기 때문에 다른 상대들은 수월하리라 봤던 것이다. 김정훈은 경기가 끝난 후 인터뷰에서 "세계적인 강팀 브라질을 이기지는 못했지만 잘 싸웠다."라고 자평하며 "전반에 방어가 좋았고, 속공도 잘됐지만 후반에 브라질의 공세가 더해지면서 방어하기가 힘들었다. 브라질이 측면으로 들어올 때 더 빨리 이동하면 방어할 수 있었는데 실점하고 말았다."라고 아쉬워했다. 또 그는 "득점을 하면서 원하던 것을 어느 정도 실현했다. 감독으로서 다음 단계에 진출하고 이기는 것이 목표지만, 우리 선수들이 브라질과 같은 강팀을 상대로 한 골을 넣은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라고 덧붙였다. 분명 북한은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충분히 잘 싸웠다. 그러나 이 경기의 선전이 되려 독이 될 것이란 걸 그들은 미처 몰랐다.

5.2. 32강 조별리그 포르투갈전 - 0 : 7 패

파일: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 로고.svg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 G조 제4경기
2010년 6월 21일 13:30(UTC+2)
그린 포인트 스타디움 (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타운)
주심: 파블로 포소 (칠레)
파일:북한 국기.svg 0 : 7 파일:포르투갈 국기.svg
북한 포르투갈
- 득점자 29′ 하울 메이렐레스
53′ 시망 사브로자
56′ 우구 알메이다
60′, 89' 티아구 멘데스
81′ 리에드송
87′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관중: 63,644명
Man of the Match: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포르투갈)
북한의 조별리그 2차전 상대는 포르투갈이었다. 두 팀은 1966 잉글랜드 월드컵 8강전 이후 44년 만에 월드컵 무대에서 재회하였다. 당시 북한은 전반 22분까지 박승진, 리동운, 양성국의 릴레이 골로 3 : 0으로 크게 앞서갔으나 흑표범 에우제비오가 이후에 홀로 4골을 터뜨리는 괴력을 발휘하며 포르투갈이 극적으로 5 : 3 역전승을 거둔 바 있다. 이런 역사적인 악연과 또 당시 포르투갈이 지역예선에서 비실거리며 덴마크에 밀려 조 2위로 플레이오프로 떨어진 끝에 간신히 본선에 올랐다는 사실이 북한에도 전해진 것인지, 북한에서는 대회 전부터 포르투갈을 강력한 '1승 제물\'이라고 지목했다. 거기다 앞서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1점 차로 선전하면서 자신감을 얻은 것도 한 몫했다. 문제는 그 자신감이 너무 지나치다 못해 기고만장해졌다는 것이지만. 브라질전에는 중계 방송을 하지 않았지만 그때의 1:2 패배로 자신감을 얻었는지, 북한의 조선중앙TV에선 이 경기를 생중계하기로 했다. 물론 1승 제물까지는 아니지만 해외의 축구 전문가들도 북한이 그나마 승점을 얻을 수 있을 만한 상대로 포르투갈을 지목하긴 했다. 당시 포르투갈은 3팀 중에서 그나마 전력이 좀 처지는 편이었고 지역예선에서도 덴마크에 밀리며 똥줄을 태운 끝에 겨우 올라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북한이 포르투갈을 상대로 승점을 1점이라도 획득할 가능성이 있다고 평하기는 했다. 그렇게 북한의 44년 전 선배들의 한풀이냐? 아니면 포르투갈이 이번에도 쓴맛을 보여주느냐를 놓고 한 판 승부가 펼쳐졌다.

경기가 열리는 남아공의 케이프타운엔 장대비가 사납게 퍼부어댔다. 경기는 예상대로 포르투갈이 경기를 주도해서 공격하고 북한은 브라질을 상대로 했던 것처럼 선 수비 후 역습으로 나섰다. 브라질을 상대로 전반전을 무실점으로 버텼던 북한의 수비에 포르투갈도 크게 고전하며 쩔쩔맸다. 전반 7분, 포르투갈의 코너킥 상황에서 히카르두 카르발류가 좋은 위치에서 헤더 슛을 했지만 골대를 맞고 나왔다. 위기를 넘긴 북한은 빠른 역습을 통해 포르투갈을 향해 반격을 했다. 북한 역시 전반 11분, 차정혁의 중거리 슛이 골대 오른쪽으로 빗나가기도 했고 전반 16분, 주장 홍영조의 슛이 포르투갈 골키퍼 에두아르두의 선방에 막혔다. 그 리바운드 볼을 박남철이 빈 골문을 향해 헤더 슛을 했지만 크로스바를 넘어갔다. 정말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선전한 것에 자신감을 얻었는지 북한 선수들은 전반 초반에는 포르투갈과 대등하게 맞서 싸웠다. 그러나 전반 29분, 포르투갈의 역습 상황에서 티아구 멘데스가 전방의 하울 메이렐레스를 향해 북한의 파이브백 수비 라인을 일시에 허수아비로 만드는 기막힌 스루 패스를 넣었고, 북한 골키퍼 리명국이 각도를 줄여 선방하기 위해 전진했으나 메이렐레스가 한 발 먼저 잽싸게 밀어넣으며 선제골을 터뜨렸다. 메이렐레스의 움직임을 북한 센터백 리준일이 완벽하게 놓쳐버린 게 치명타였다.

이후 양 팀은 치열하게 공방전을 벌였지만 더 이상의 득점은 없었고, 전반전은 1:0으로 포르투갈이 앞선 채로 끝이 났다. 물론 어느 정도 예상한 결과였지만 그래도 전반전까지는 북한이 그런 대로 잘 버티고 있었기에 잘 하면 포르투갈과 비길 수도 있고, 지더라도 브라질전과 마찬가지로 졌지만 잘 싸웠다 수준으로 적은 점수 차로 패배하며 선전할 것이라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후반전에 이 스코어가 예상과 크게 벗어날 것이라는 걸 이때는 미처 몰랐다. 훗날 북한의 원톱 정대세 SBS 예능 프로그램 힐링캠프에 출연해 당시 이 경기 하프 타임 때 자신 때문에 팀 분위기가 최악으로 치달았다고 밝혔다. 참조[19] 그래서일까? 후반전에 북한은 전반전 때와 같은 팀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최악의 플레이를 보였다. 이 경기마저도 지면 탈락인 북한은 동점골을 넣기 위해 후반전에는 라인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공격은 제대로 풀리지 않았고 라인을 올리면서 수비가 헐거워져 걷잡을 수 없이 꼬이고 말았다. "축구는 짧은 담요와 같아서 머리를 덮으면 발이 드러나고 발을 덮으면 머리가 드러난다."라는 우루과이의 명장 오스카르 타바레스 감독의 명언이 그대로 적중하고 만 것이다.

후반 8분, 포르투갈의 라이트백 미겔이 하프 라인에서 얼리 크로스를 올렸고 이 볼을 북한 문전에서 우구 알메이다가 헤더로 받아 페널티 박스 정면으로 떨궈주었다. 그리고 이 볼을 메이렐레스가 받아 우측에 노마크 상태로 있던 시망 사브로자에게 패스했다. 북한 수비수 박철진, 리준일, 리광천 이 3명은 모두 메이렐레스에게 몰려들며 시망 사브로자를 자유롭게 풀어놓았다. 노마크 상태에서 킬 패스를 받은 사브로자는 지체없이 리명국을 피해 슛을 날려 스코어를 2:0으로 벌렸다. 사브로자의 이 골이 바로 이 경기의 분수령이었다. 이 골을 실점한 이후 북한은 흙담 무너지듯이 와르르 무너졌다. 뒤이어 후반 11분, 티아구 멘데스의 패스로 포르투갈의 역습이 시작되었는데, 이때 센터백 리준일의 다리 하나가 제대로 못 빠져나오며 오프사이드 트랩이 깨져버렸다. 티아구의 패스는 파비우 코엔트랑에게 갔고, 북한 수비수들의 시선은 공에만 빼앗기며 우구 알메이다를 또 노마크 상태로 풀어주었다. 알메이다는 프리 헤더로 여유롭게 골을 터뜨려 스코어는 3:0으로 벌어졌다. 코엔트랑의 패스가 갈 때 라인이라도 잘 맞췄으면 오프사이드 트랩을 걸 수도 있었을 텐데 박철진의 위치 때문에 트랩이 걸리지도 않았다.

이후의 경기 페이스는 완벽하게 포르투갈이 지배했다. 후반 15분, 우구 알메이다가 하프 라인 근처에서 북한의 볼을 탈취해 곧바로 역습 상황을 만들었다. 알메이다는 곧바로 전방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향해 스루 패스를 넣었고, 호날두는 절묘하게 오프사이드 트랩을 깨며 그 패스를 받았다. 그리고 호날두는 페널티 박스로 쇄도해 들어오는 멘데스에게 패스를 했고, 멘데스가 오른발로 정확히 골문 우측 구석을 노린 슛을 날려 추가골을 터뜨려 스코어를 4:0으로 벌렸다. 골 욕심에 무리하게 라인을 올리면서 공수 간격이 벌어져 계속 수비가 헐거워진 게 원인이었다. 한동안 소강 상태가 지속되다 후반 34분, 좌측에서 날아온 포르투갈의 크로스를 북한 수비수 리광천이 치명적인 클리어링 미스를 범했고 이를 놓치지 않은 리에드송이 페널티 에어리어에서 낼름 줏어먹어 지체없이 왼발 슛을 날려 또 추가골을 뽑아내며 스코어를 5:0으로 벌렸다. 그리고 후반 42분, 북한 센터백 리준일의 패스가 바로 앞에 서 있던 리에드손의 마크에 막히며 잘렸고 순식간에 포르투갈의 역습으로 이어지며 리에드손과 호날두가 나란히 전방으로 쇄도했다. 리명국이 각도를 줄여 선방하기 위해 앞으로 전진했으나, 호날두는 공과 함께 점프하며 리명국을 뛰어넘고 바운드된 볼을 마치 물개가 재주를 부리듯 공을 등으로 받아낸 후 빈 골문을 향해 오른발 슛을 날려 가볍게 추가골을 뽑아냈다. 스코어는 그렇게 6:0으로 벌어졌다. 그리고 후반 44분, 멘데스가 좌측에서 날아온 크로스를 정확한 헤더 슛으로 골로 연결해 스코어를 7:0으로까지 벌렸다. 경기는 그렇게 포르투갈의 7:0 대승으로 끝이 났다.

북한으로서는 44년 전만 못한 결과를 받아들고야 말았다. 그때는 포르투갈을 상대로 3골이나 넣고 분전했지만 이번에는 그냥 일방적으로 난타당하며 7골이나 먹었기 때문이다. 이로서 북한은 2패를 기록해 32강 조별리그 탈락이 확정되었다. 이전까지 북한이 월드컵에서 가장 큰 점수로 패배한 것은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조별리그 1차전에서 소련에게 3점 차 패배를 당한 것이었지만, 이 경기에서 포르투갈에게 7점 차 패배를 당하며 이 경기가 그들의 월드컵 단일 경기 최다 점수 차 패배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북한이 월드컵에서 가장 많은 실점을 한 것도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8강전에서 기록한 5실점이었으나 이 경기로 인해 7점으로 갱신되었다. 공교롭게도 그때도 상대가 포르투갈이었다. 포르투갈을 제외하면 아무리 많이 실점했어도 3점을 초과하는 일이 없었는데 유독 포르투갈에만 1966년엔 5점, 2010년엔 7점이나 내준 것이다. 그리하여 북한은 44년 전 선배들의 한풀이는 커녕 오히려 선배들보다 더 처참한 모습으로 포르투갈에 갈가리 찢기고 말았다. 전반전에는 1골만 내주며 아득바득 버텼지만 포르투갈 입장에서도 북한과 비기거나 지면 거의 탈락이나 다름없었기에 사생결단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고, 결국 북한도 한계치에 도달하며 더 버티지 못하고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버린 것이다. 44년 전의 기적을 재현하고자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왔지만 결국 이번엔 빈손으로 돌아가야 했다.

사실 냉정하게 말해서 이번 대회의 포르투갈은 정말 개허접팀이 맞긴 했다. 이 대회에서 포르투갈은 총 1승 2무 1패, 7득점 1실점을 기록했다. 그러나 그 7득점은 모두 북한을 상대로 기록한 것이고, 나머지 조 상대인 코트디부아르, 브라질 그리고 16강 상대였던 스페인을 상대로는 단 1골도 못 넣었다. 즉 승점자판기 북한 덕분에 16강에 갔던 것이다. 만약 그 조에 북한이 아니라 같은 시드의 대한민국이나 멕시코, 미국이 들어갔으면 100% 조별리그에서 탈락했을 팀이 바로 포르투갈이었다. 하지만 북한의 전력이 그 개허접 포르투갈보다도 약했던 게 문제였다. 애초에 그 개허접이라는 평가도 어느 정도 실력이 되는 팀들 기준으로 개허접이었다는 것이지 북한 같이 피파랭킹 100등 밖의 세계구급 약체 팀에게는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었다.

여담으로 북한은 원래 스포츠 경기 생중계를 절대 하지 않고 무조건 북한이 이긴 경기만 녹화중계를 한다. 즉 북한 주민들은 이전까지 북한이 패배한 경기는 볼 일이 없었던 것. 역사상 최초의 생중계를 시도했다가 이런 참극이 일어났으니 추후 북한이 다시 월드컵에 진출하더라도 절대로 생중계는 시도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포르투갈전에서 북한 해설자들은 포르투갈이 5번째 골을 넣은 이후로는 경기가 끝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5.3. 32강 조별리그 코트디부아르전 - 0 : 3 패

파일: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 로고.svg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 G조 제5-2경기
2010년 6월 25일 16:00(UTC+2)
음봄벨라 스타디움 ( 남아프리카 공화국, 넬스프루이트)
주심: 알베르토 운디아노 마옌코 (스페인)
파일:북한 국기.svg 0 : 3 파일:코트디부아르 국기.svg
북한 코트디부아르
- 득점자 14′ 야야 투레
20′ 코피 로마리크
82′ 살로몬 칼루
관중: 34,763명
Man of the Match: 디디에 드로그바 (코트디부아르)
북한의 조별리그 마지막 상대는 아프리카의 최강자 코트디부아르였다. 북한이 아프리카 팀과 월드컵에서 맞붙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한편, 2차전까지 G조의 순위는 조 1위 브라질이 2승(승점 6점)으로 이미 16강 진출을 확정지었고 뒤를 이어 1승 1무(승점 4점)를 기록한 포르투갈이 2위, 1무 1패(승점 1점)인 코트디부아르가 3위였고 4위 북한은 2패(승점 0점)로 이미 탈락이 확정되었다. 하지만 이 경기에서 급한 것은 북한이 아니라 코트디부아르였다. 코트디부아르로서는 반드시 3차전에서 북한을 꺾고 동시에 브라질이 포르투갈을 이겨주어야 16강 진출이 가능한데 문제는 북한이 포르투갈에 0 : 7로 대패를 했고 자신들도 브라질에 1 : 3으로 패배했기에 넣어야 할 골이 엄청나게 늘어났다는 것이었다. 브라질이 포르투갈을 이긴다는 전제 하에 북한을 10 : 0 이상으로 이겨야만 16강 진출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북한이 피파랭킹 105위의 약체 팀이라지만 그래도 지역 예선을 뚫고 올라온 팀인데 10골 차 이상으로 이긴다는 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이던가?[20]

갈 길이 급했던 코트디부아르 선수들은 초반부터 북한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전반 14분, 코트디부아르의 라이트 윙 카데르 케이타가 북한의 미드필더 문인국의 마크를 이겨내고 중앙 미드필더 로마리크에게 패스를 건넸고 로마리크는 다시 왼쪽에서 오버래핑을 한 레프트백 아르튀르 보카에게 스루 패스를 넣었다. 아르튀르 보카의 앞에 북한의 라이트백 차정혁이 막아섰지만 보카는 땅볼로 중앙의 야야 투레에게 스루 패스를 넣었다. 투레에게 북한 수비수 박철진, 리준일과 미드필더 안영학까지 가세했지만, 투레는 그들의 제지에 아랑곳하지 않고[21] 오른발 슈팅을 날렸고 이 볼이 정확히 골문 우측 구석으로 빨려 들어가며 코트디부아르가 1:0으로 앞서갔다. 그리고 전반 20분, 코트디부아르의 레프트백 아르튀르 보카가 전방의 디디에 드록바를 향해 얼리 크로스를 올렸고 드록바는 그 괴물 같은 피지컬로 북한 센터백 리준일을 찍어누르며 볼을 가로채 슛을 날렸으나 골대를 맞고 아래로 떨어졌는데 골 라인을 넘어간 다음 나왔는지 처음부터 안 넘어갔는지 애매한 상황이었다. 드록바는 골이라며 항의했지만 경기는 그대로 인플레이 되었고, 이 리바운드 볼을 리준일이 제대로 클리어링하지 못했는데 그 볼을 로마리크가 빈 골문을 향해 헤더 슛을 날려 추가골을 뽑아 스코어를 2 : 0으로 벌렸다. 아직 8골이나 더 필요한 코트디부아르 선수들은 골 셀레브레이션도 마다하고 직접 볼을 센터 서클로 운반해 어떻게든 빨리 경기를 속개하려고 했다.

그러나 마음이 너무 급했던 탓일까? 코트디부아르 선수들은 전반 초반에 2골을 넣으며 물꼬를 텄음에도 불구하고 이후로는 계속 부정확한 슈팅을 남발하며 잇달아 골 찬스를 놓쳤다. 이제 더 이상 잃을 게 없던 북한 선수들은 온몸을 던지며 수비에 전념해 갈 길 바쁜 코트디부아르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졌다. 전반전은 2:0으로 코트디부아르가 앞선 채로 끝이 났다. 한편 같은 시각 브라질과 포르투갈의 경기는 0 : 0으로 전반전을 마쳤다. 코트디부아르로서는 어떻게든 전반전에 많은 골을 넣고 동시에 브라질이 포르투갈을 이겨주어야 했는데 겨우 2골밖에 넣지 못해 남은 45분 동안 무려 8골을 뽑아내야 하는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렇게 포르투갈과 코트디부아르의 운명이 걸린 마지막 후반전 45분이 열렸다. 코트디부아르로서는 반드시 이 45분 동안 8골을 넣고 동시에 브라질이 포르투갈을 어떻게든 잡아주어야 했다.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를 하며 경기를 보았다.

하지만 잃을 게 없던 북한 선수들은 계속해서 두터운 수비벽을 쌓으며 코트디부아르의 공격을 막아내고 또 막아냈다. 오히려 후반전에 원톱 정대세가 결정적인 득점 찬스를 얻기도 했지만, 정대세는 볼을 너무 오래 끌어 슈팅 타이밍을 놓쳤고 그 슈팅이 코트디부아르 센터백 콜로 투레의 태클에 막히며 땅을 쳐야 했다. 이후로 코트디부아르 선수들은 계속해서 북한 골문을 두들기고 또 두들겼지만 이상하게 좀처럼 북한의 골문은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초조하게 점점 흘러갔고, 같은 시각 더반에서 경기 중인 브라질과 포르투갈은 같은 언어 쓰는 나라끼리 같이 16강에 가기로 합의를 봤는지 계속해서 0:0 스코어를 이어가고 있었다. 코트디부아르의 스벤 예란 에릭손 감독은 후반 교체 카드 3장을 모두 공격수를 투입하는 데에 쓰며 계속해서 골을 노렸지만 북한의 골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그러던 중 후반 37분, 오버래핑한 레프트백 아르튀르 보카가 교체 투입된 공격수 살로몬 칼루를 향해 크로스를 올렸고, 칼루는 북한 센터백 리준일의 마크를 이겨내며 논스톱 오른발 슛으로 밀어넣어 스코어를 3:0으로 벌렸다. 하지만 이 골에도 코트디부아르는 웃을 수 없었다. 남은 시간 동안 7골을 넣어야 하고 브라질이 포르투갈과 비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렇게 경기는 코트디부아르의 3:0 승리로 끝이 났고 북한과 코트디부아르의 동반 탈락이 확정되었다.

조별리그 3경기를 마친 결과 북한은 3전 전패, 1득점 12실점이란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고 결국 32강 조별리그 32위라는 성적표를 받아들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북한을 마냥 비웃을 수만은 없다. 본래 북한의 피파랭킹은 고작 105위로 본선 진출국 중 가장 낮은 순위였고, 애초에 피파랭킹 100위 밖의 팀이 월드컵 32강 본선에 올라온 사례 자체가 없었다는 걸 감안하면 북한은 월드컵 32강 본선에 올라온 것만으로도 박수받아 마땅한 팀이다. 안 그래도 전력이 진출국 중 가장 약한 팀이었는데 불운하게도 조 편성마저도 도와주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이때 북한이 속한 조는 아시아 팀들 중 가장 전력이 강한 한국, 일본이라고 해도 16강 진출을 쉬이 장담할 수 없을 만큼 버거운 조였다. 실제로 일본은 이전 2006 독일 월드컵에서 브라질과 맞붙어 1:4로 대패하였고 이후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 코트디부아르와 맞붙어 1:2 역전패를 당했다. 이런 점을 볼 때 만약 일본이 북한 대신 G조에 속했다면 아마 북한만큼 대패하진 않았더라도 16강에는 못 갔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 일본보다 전력이 약한 북한이 이 조에서 배겨날 리는 처음부터 없었다.

44년 전에는 그래도 8강 진출에 성공했다지만, 이때 북한의 전력은 오히려 44년 전보다 더 떨어져 있었고 폐쇄적인 국가 사정 때문에 국제 경기 경험과 세계 축구의 흐름에 대한 정보가 심각하게 부족했다. 이런 상황에서 체력과 정신력, 주력만을 강조하는 북한의 구식 축구는 얼마 동안은 버틸 수 있어도 한계점에 도달하면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번 대회는 그저 참가에 의의를 두고 오랜만에 월드컵 무대를 경험해 봤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둘 수 없게 되었다. 구태여 성과라고 한다면 브라질을 상대로 1점 차 석패를 하며 선전했다는 것 정도밖에 없을 듯하다.

대회가 끝난 후 한동안 남한에서는 44년 전과 마찬가지로 김정훈이 혹독한 사상 비판을 받고 건설 현장에서 강제 노동을 당하고 있다는 루머가 돌았다. 그러나 그건 파비오 카펠로 감독을 비난하는 영국의 황색지 더 선의 기사가 와전된 것과 NK지식인 연대라는 탈북자 중심의 극우 단체가 정체 불명의 소식통을 인용해 퍼뜨린 루머가 혼합되어 발생한 결과였다. 애초부터 김정훈은 노동 교화형을 당한 적이 없으며 오히려 32개국 본선 진출에 성공한 것만으로도 영웅 대접을 받고 훈장까지 수여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본래 그는 4.25 체육단 감독으로서 대표팀 감독을 겸임하고 있었는데, 대회가 끝난 후 대표팀 감독으로서의 계약 기간이 끝나 다시 본래의 4.25 체육단 감독 자리로 복귀했을 뿐이라고 한다.

6. 2014 브라질 월드컵~ 2026 북중미 월드컵

44년 만에 본선 진출에 성공해 자신감이 생긴 북한은 다음 대회인 2014 브라질 월드컵에도 참가 신청을 했다. 이 대회 지역 예선은 지난 대회와 동일한 방식으로 치러졌다. 다만 대륙간 플레이오프에 진출할 경우 남미 지역예선 5위와 치른다는 게 다르다. 북한은 대한민국, 호주, 일본과 함께 본선에 진출했던 팀이었기에 3차 예선으로 직행했다. 3차 예선에서 북한은 일본,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22]과 함께 C조에 속했다. 김정훈 감독이 떠난 후 한동안 공석이었던 북한 대표팀 감독 자리는 다시 윤정수 감독에게 돌아갔다. 북한의 1차전 상대는 일본이었다. 사이타마 스타디움에서 벌어진 경기에서 북한은 오랜 시간 동안 일본의 공격을 잘 방어해냈으나 막판 1분을 버티지 못하고 요시다 마야에게 결승골을 허용해 0 : 1로 석패했다. 2차전 양각도축구경기장에서 벌어진 타지키스탄과의 홈 경기에선 전반 14분, 박남철의 결승골로 1 : 0 승리를 거두었지만 승점자판기 타지키스탄을 홈에서 겨우 1골 차로밖에 못 이긴 것은 두고두고 독이 되었다. 그리고 3차전 우즈베키스탄과의 홈 경기에서 북한은 전반 25분, 알렉산데르 게인리흐에게 결승골을 허용하며 또 0 : 1로 패배하고 말았다. 반환점을 돌았을 때 C조의 순위는 일본과 우즈베키스탄이 2승 1무(승점 7점)로 동률을 이뤘으나 골 득실에서 +9를 기록한 일본이 +2에 그친 우즈베키스탄에 앞서 1위를 차지했고 우즈베키스탄이 2위를 차지했으며 뒤이어 1승 2패(승점 3점)인 북한이 3위, 3패를 기록한 타지키스탄이 최하위에 있었다.

조 2위 안에 들어야 최종예선에 진출하는데 현재 북한은 조 2위 팀과 승점 차가 4점이었으므로 4차전 우즈베키스탄 원정 경기에서 반드시 이겨야만 승점 차이를 줄여 순위 역전을 노릴 수 있었다. 그러나 북한은 이번에도 후반 4분에 티무르 카파제에게 결승골을 실점하며 0 : 1로 패배했다. 같은 날 일본이 타지키스탄 원정 경기에서 4 : 0 대승을 거두어 결국 북한과 타지키스탄은 2경기 남은 상황에서 동반 예선 탈락이 확정되고 말았다. 5차전 일본과의 홈 경기에선 일본 선수들을 향해 까다로운 입국 심사로 피로하게 만들고 인조잔디 구장인 김일성경기장의 이점을 활용해 후반 4분에 터진 박남철의 결승골을 끝까지 잘 지켜 1 : 0 승리를 거두어 나름의 체면치레는 했다.[23] 그리고 6차전 타지키스탄 원정 경기에선 후반 8분, 장성혁의 페널티 킥 골로 앞서 나갔으나 8분 만에 아흐탐 함라쿨로프에게 동점골을 먹으며 타지키스탄의 예선 첫 골과 첫 승점을 헌납하는 굴욕을 당했다. 북한의 3차 예선 성적은 2승 1무 3패(승점 7점), 3득점 4실점으로 마무리되었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 북한 대표팀 감독은 조동섭 감독이 부임했으나 그 역시 2015 AFC 아시안컵 호주에서 3전 전패 대회 13위라는 저조한 성적을 거두어 그 책임으로 경질되었고 김창복 감독이 신임 대표팀 감독으로 취임했다. 이번 대회 예선은 최초로 AFC 아시안컵 지역예선과 통합해서 진행되었다. 예선 방식은 아시아 축구 연맹 가입국 46개국 중 중 FIFA 랭킹이 낮은 12개국이 1차 예선을 치러 생존자 6개국이 2차 예선에 오르고 2차 예선은 그 6개국과 2차 예선부터 치르는 나머지 34개국이 합류해 총 40개국이 5개 팀씩 8개 조로 나누어 각 조 1위 8팀은 최종예선에 진출하고 조 2위 팀들 중 상위 4팀도 최종예선에 진출한다. 그리고 최종예선에 진출한 12개 팀은 6개 팀씩 2개 조로 나누어 각 조 1, 2위는 본선에 진출하고 3위 팀은 3위 팀끼리 플레이오프를 치러 그 승자가 대륙간 플레이오프에서 북중미 4위와 대결해 승리하면 본선에 진출할 수 있다. 북한은 2차 예선부터 치르게 되었다.

북한은 2차 예선에서 우즈베키스탄, 바레인, 필리핀, 예멘과 함께 H조에 속했다. 북한의 1차전 상대는 예멘이었다. 본래 이 경기는 예멘 홈에서 열려야 하나 예멘이 현재 내전 중인 관계로 안전을 위해 인접국인 카타르에서 진행하기로 했다. 카타르의 수도 도하에서 치른 경기에서 북한은 후반 26분에 터진 서현욱의 결승골로 1 : 0 신승을 거두었다. 그런데 뒤에 예멘 측에서 부적격 선수 무디르 알라다에이(Mudir Al-Radaei)를 출전시킨 것이 적발되어[24] FIFA는 북한의 3 : 0 몰수승을 선언했다. 상대 측의 실수로 북한은 골 득실을 2점 더 추가하는 행운까지 얻었다. 그리고 2차전은 이 조의 톱 시드인 우즈베키스탄과의 홈 경기였다. 어려운 경기가 예상되었으나 김일성경기장에서 열린 경기에서 북한은 전반 4분만에 박광룡의 선제골로 앞서갔다. 뒤이어 전반 16분에 장국철, 전반 34분에 로학수, 전반 36분에 리혁철이 릴레이 골을 터뜨려 전반전에만 무려 4 : 0으로 크게 앞서갔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우즈베키스탄은 뒤늦게 반격을 감행해 후반전에 2골을 따라붙었으나 승부를 뒤집지 못하였고 그렇게 북한이 4 : 2 완승을 거두었다.[25] 그리고 3차전 바레인 원정 경기에서도 전반 42분에 터진 정일관의 결승골을 끝까지 잘 지켜 1 : 0으로 승리해 3연승의 파죽지세를 달렸다. 그러나 4차전 필리핀과의 홈 경기에서 파상공세를 퍼붓고도 0 : 0으로 비겨 상승세가 주춤하기 시작했다. 반환점을 돌았을 때 H조의 순위는 북한이 3승 1무(승점 10점)로 조 1위였고 우즈베키스탄이 3승 1패(승점 9점)로 조 2위, 필리핀이 2승 1무 1패(승점 7점)로 조 3위, 뒤이어 바레인이 1승 3패(승점 3점)로 조 4위, 예멘이 4전 전패(승점 0점)로 조 최하위였다. 북한이 1위이긴 했으나 겨우 1점 차로 앞서고 있어 상당히 불안한 조 1위였다.

이후 북한은 5차전 예멘과의 홈 경기에서 전반 12분에 터진 정일관의 페널티 킥 골을 끝까지 잘 지켜 1 : 0으로 승리했다. 그리하여 1경기를 덜 치른 우즈베키스탄과의 승점 차를 4점으로 벌렸다. 그리고 6차전 우즈베키스탄 원정 경기에서 반드시 이겨야 조 1위 자리를 굳힐 수 있었다. 그러나 북한은 전반 2분에 리혁철의 선제골로 앞서가고도 이후에 내리 3골을 먹혀 1 : 3 역전패를 당해 1경기를 덜 치른 우즈베키스탄과의 승점 차가 1점으로 줄었다. 7차전 바레인과의 홈 경기에서 북한은 박광룡의 페널티킥 선제골과 정일관의 쐐기골을 묶어 2 : 0으로 승리했으나 우즈베키스탄 역시 예멘을 3 : 1로 이겨 계속 1점 차로 따라 붙었다. 그리고 북한이 휴식할 때 우즈베키스탄이 필리핀을 2 : 0으로 이겨 결국 순위가 역전되었다. 이제 경기를 다 치른 예멘을 제외한 나머지 4팀은 모두 1경기만을 남겨놓게 되었다. 우즈베키스탄은 이미 탈락이 확정된 바레인과 경기하고 북한 역시 이미 탈락이 확정된 필리핀과 경기를 했다. 북한으로선 반드시 마닐라 원정 경기서 승리해야 최종예선에 오를 수 있었다. 북한은 필리핀을 맞아 공세를 폈으나 골 결정력 부족으로 잇단 찬스를 날렸다. 오히려 전반 44분에 필리핀에 선제골을 내주며 불리한 상황에 놓였다. 그러나 1분 후에 다시 서경진이 동점골을 넣어 전반전을 1 : 1로 마쳤다. 그리고 후반전이 시작하자 불과 3분 만에 리혁철이 역전골을 터뜨려 2 : 1로 앞서갔다. 그렇게 북한이 최종예선을 향해 순조롭게 노를 저어가는 듯했다. 후반 38분까지는. 경기가 막바지에 다다르자 북한 선수들은 승리에 도취한 것인지 갑자기 라인이 흐트러지며 우왕좌왕했다. 그리하여 후반 39분에 동점골을 실점했고 뒤이어 후반 44분에 또 필리핀의 역습에 숭숭 뚫리며 재역전골을 내주었다. 결국 북한은 필리핀에 충격적인 2 : 3 역전패를 당하고 말았고 조 2위 팀 간 순위에서 5위에 그쳐 간발의 차로 최종예선 진출에 실패했다. 이후 북한 축구협회는 최종예선 진출에 실패한 책임으로 김창복 감독을 해임했다.

또 다시 시간은 흘렀고 2022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 지역예선을 치를 시간이 되었다. 김창복 감독의 해임 이후 북한 대표팀 감독 자리는 노르웨이 출신의 욘 안데르센 감독을 거쳐 박용일 감독을 지나 40세도 채 되지 않은 김영준이 감독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김영준 감독 체제 하의 북한 대표팀은 정말 실망스러웠다. 2019 AFC 아시안컵 아랍에미리트에서 북한은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레바논과 함께 E조에 속했다. 그러나 북한은 1차전에서 사우디아라비아에 0 : 4로 대패를 당했고 2차전에서 카타르에 0 : 6으로 대패하여 2전 전패, 무득점 10실점이란 처참한 성적으로 일찌감치 탈락이 확정되었다. '북한의 호날두'란 별명으로 불리는 한광성과 에이스 박광룡 등은 완벽하게 침묵했을 정도로 아무 활약을 못했다. 3차전 레바논과의 경기에선 박광룡이 선제골을 넣으며 체면치레를 하는 듯했으나 이후로 4골을 내리 먹히며 1 : 4로 대패해 결국 북한은 3전 전패, 1득점 14실점이란 최악의 성적으로 탈락하고 말았다.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기록한 성적보다 훨씬 더 나쁜 성적이었다.

결국 북한 축구협회는 김영준 감독을 해임했고 또 다시 윤정수 감독을 선임했다. 2022 FIFA 월드컵 카타르/지역예선(아시아)/2차예선에서 북한은 대한민국, 레바논, 투르크메니스탄, 스리랑카와 함께 H조에 속했다. 2010 남아공 월드컵 지역예선에 이어 12년 만에 다시 남북 간의 맞대결이 성사된 셈이다. 북한의 1차전 상대는 아시안컵에서 만났던 레바논이었다. 평양의 김일성경기장에서 열린 이 경기에서 북한은 정일관의 멀티골로 2 : 0 완승을 거두며 아시안컵에서의 대패를 설욕하는데 성공했다. 2차전 스리랑카 원정 경기에서도 북한은 후반 22분에 터진 장국철의 결승골로 1 : 0 승리를 거두며 2연승을 달렸다.

3차전 경기는 바로 같은 민족이자 숙명의 상대로 꼽히는 대한민국과의 경기였다. 지난 이명박 정부 시절이었던 남아공 월드컵 지역예선 때와 달리 이번은 남북 관계가 조금 풀렸던 문재인 정부 시절이어서 북한은 제 3국 개최가 아닌 평양의 김일성경기장에서 치르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러나 3차례의 남북정상회담과 1차례의 북미정상회담이 열려 해빙기를 맞았던 2018년과 달리 이 때는 제2차 북미정상회담에서 협상이 결렬되는 파국을 맞으며 다시 남북 관계가 경색되었다. 그래서인지 북한은 무관중 경기를 선언한 것은 물론 선수단 이외 방송국 중계팀 등의 입국은 일절 불허했다. 이 경기에서 북한은 홈 텃세와 마치 주체격술을 연상시키는 듯한 거친 파울로 한국 선수들의 기를 죽이는 등 비매너 플레이를 일삼았고 이 덕에 0 : 0 무승부를 거두었다. 이런 경기 분위기였던데다 김일성경기장이 워낙 홈 텃세로 악명 높았기에 한국에서는 승점 1점이라도 획득한 것에 안도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4차전에서 북한은 투르크메니스탄 원정에서 1 : 3으로 패배하며 2승 1무 1패(승점 7점)로 반환점을 돌았다. 그리고 5차전 레바논 원정에서 북한은 0 : 0 무승부를 거두었다.

그리고 2020년. 이 해에 전 세계에 악명 높은 전염병인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가 창궐하기 시작했다. 이 전염병으로 인해 2020년 한 해는 모든 대륙의 지역예선이 올 스톱되는 사태를 맞게 되었다. 그리하여 잔여 경기가 1년 동안 중단되었다. 이렇게 중단되었던 경기는 2021년 6월에야 재개되었는데 AFC는 H조의 남은 경기는 그나마 방역 통제에 성공한 축에 속하는 대한민국에서 모두 치르는 것으로 합의되었다. 북한은 공식적으로 국내에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 환자가 단 1명도 없다고 선전해 왔는데 대한민국에서 남은 경기를 치르는 것으로 결정되자 다짜고짜 기권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기권 명분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한 선수단 보호였다.

결국 FIFA는 북한이 치렀던 경기를 모두 무효 처리하는 조치를 취했고 북한 축구협회에 벌금을 부과했다.

이 북한발 유탄으로 인해 피를 본 팀은 다름 아닌 투르크메니스탄이었다. 5차전까지 투르크메니스탄은 3승 2패(승점 9점)로 1위, 대한민국이 2승 2무(승점 8점)로 2위, 북한과 레바논이 2승 2무 1패(승점 8점)로 각각 3, 4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의 경기 결과가 무효가 되면서 북한에 무승부를 기록했던 대한민국과 1무 1패를 기록했던 레바논은 승점이 1점만 차감되었으나 1승을 거두었던 투르크메니스탄은 3점이나 삭감당하는 불이익을 당하고 만 것이다. 그리하여 투르크메니스탄은 대한민국과 레바논에 밀려 3위까지 추락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투르크메니스탄은 대한민국 원정에서 0 : 5 대패를 당하며 결국 탈락을 당하고 말았다.

[16개국] 본선 월드컵에 진출 실패했다. [24개국] 본선 월드컵에 진출 실패했다. [32개국] 본선 월드컵에 진출 실패했다. [32개국] 본선 월드컵에 진출 실패했다. [5] 2차예선 진행 도중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을 이유로 기권 [6] 이것 때문에 애꿎은 투르크메니스탄이 북한을 3-1로 이긴 경기가 취소되어 그로 인해 지역예선에서 탈락했다. 반면 투르크메니스탄이 나가 떨어진 자리로는 레바논이 북한한테 0-2로 진 경기가 취소된 덕분에 들어와서 레바논이 최종 예선에 합류했다. [7] 월드컵 본선 진출 비율 [8] 덕분에 대한축구협회는 피파에 5,000달러의 벌금을 납부해야 했다. 피파가 엄금하는 정치가 축구에 개입했다는 죄목 때문이었다. [9] 이 당시까지는 선수 교체 제도가 없었다. 출전한 선수들은 무조건 90분 풀타임을 뛰어야 했고 부상으로 못 뛰게 되면 그 인원이 빠진 채로 계속 경기를 해야 했다. [10] 1958년에 이집트 시리아의 연합으로 결성된 나라인데 불과 3년 후에 시리아가 탈퇴하며 유명무실해졌고 결국 1971년에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이 다시 국호를 이집트 아랍 공화국으로 고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므로 이 주심은 그냥 이집트 사람이라고 보면 된다. [11] 공식 기록은 [12] 물론 브라질의 광탈을 기원한 주최 측의 농간도 한몫했다. 당시 경기를 앞두고 포르투갈 정부는 8강 진출 시 선수들에게 두당 1만 달러의 보너스를 지급하기로 했다. 포르투갈 선수들은 이 보너스에 눈이 멀어있었고, '한 조각의 양심도 없는 남자'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포르투갈 수비수 모라이스는 펠레의 다리를 아작내다시피 했다. 그럼에도 주심은 그런 모라이스의 파울을 관대하게 넘어갔다. [13] FIFA는 월드컵이 열릴 경기장을 반드시 '천연 잔디' 경기장으로 못박고 있다. 그러나 북한 쪽 경기장은 대부분 인조잔디 경기장이라 이 조건에 부합하지 못한다. [14] 반면, 대한민국의 홈 경기는 정상적으로 서울에서 치렀고 인공기도 게양되었으며 북한의 애국가도 정상적으로 연주되었다. [15] 이 경기 패배로 인해 사우디의 나세르 알 조하르 감독은 즉시 경질되었다. [16] 이후 사우디아라비아는 조 3위 팀 간 플레이오프에서 바레인에 원정 다득점 우위의 원칙에 밀려 탈락했고 그 바레인 역시 대륙간 플레이오프에서 뉴질랜드에 합산 점수 0 : 1로 패배해 탈락하며 중동 팀은 예선에서 올킬을 당했다. [17] 실제로 본선에서 잉글랜드와 이탈리아가 심하게 비실거렸기 때문에 북한이 어느 정도 비벼볼 여지는 있었다. [18] 여담으로 이 경기가 월드컵 무대에서 처음으로 북한 국가가 연주된 경기였다. 44년 전 잉글랜드 월드컵 당시엔 영국과 북한은 서로 적성국이었고, 영국 정부는 우방국인 대한민국과의 외교 마찰을 우려해 북한 선수들에게 비자는 발급해주되 국가로는 인정하지 않는 편법을 썼다. 인공기는 어쩔 수 없이 게양했지만 북한 국가 연주는 하지 않기로 한국의 양해를 구했다. 다만 북한 국가만 쏙 골라서 연주하지 않으면 형평성에 어긋나기에 개막전과 결승전만 국가 연주를 하고 나머지 경기는 모두 국가 연주를 생략했다. 결국 북한이 8강에서 탈락했기에 영국 땅에서 북한 국가가 연주된 일은 없었다. [19] 간략하게 설명하면 정대세 본인은 지면 탈락인 상황에서도 김정훈이 수비적인 전술을 고수하는 것에 불만이 있었던 상황이었고, 이에 화를 참지 못하고 하프 타임 때 마시던 페트병 음료를 밑으로 던졌는데 그게 하필이면 선배 박남철이 맞았다고 한다. 그런데 정대세는 박남철에게 사과를 하지 않았고, 이에 조총련계인 정대세에게 평소부터 불만이 있었던 토종 북한 선수들은 빡쳐서 정대세를 갈궜다고 한다. 특히 주장 홍영조는 "너를 위해 우리가 몇 년을 참아왔다."라며 정대세를 강하게 질타했다고 한다. [20] 지금까지 월드컵 역사상 단일 경기 최다 점수 차 승리는 '9점 차\' 승리였다. 두 자리 수 승리가 가장 확실해 보였던 1954 스위스 월드컵 대한민국 VS 헝가리의 경기에서도 모두가 최소 20 : 0의 스코어를 예상했지만 홍덕영 골키퍼의 맹활약 덕분에 겨우(?) 9 : 0으로 끝났다. 그만큼 아무리 약팀이라고 해도 지역예선을 깨고 올라온 팀을 두 자리 수 점수 차로 이긴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란 것이다. [21] 오히려 이 때 박철진의 태클은 야야 투레에게 가기는커녕 같은 편 수비수인 리준일에게 갔다. [22] 본래 이 자리는 시리아의 자리였는데 2차 예선에서 시리아가 부적격 선수를 출전시킨 것이 적발되어 2경기 모두 타지키스탄의 몰수승으로 처리되어 대신 오른 것이다. [23] 역으로 이 때 알베르토 자케로니 일본 감독은 북한에 지고 왔다고 엄청나게 욕을 먹었다고 한다. [24] 무디르 알라다에이는 1차 예선에서 2경기 연속으로 경고를 받아 경고 누적으로 1경기 출장 정지 처분을 받았는데 예멘 측에서 그 징계를 어기고 출전시켰다. [25] 이 경기가 끝난 후 우즈베키스탄은 한국 축구팬들에게도 익숙한 미르잘랄 카시모프 감독을 즉각 경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