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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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范宣생몰연도 불명
동진의 인물. 자는 선자(宣子). 연주 진류군 출신.
2. 생애
내향적 성격을 타고 나, 어릴 적부터 은둔하려는 경향이 있었지만 공부하기를 좋아하여 항상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그렇게 밤낮을 가리지 않고 무수히 많은 서적을 읽은 탓에, 고작 10세에 불과한 나이에 《시경》, 《서경》, 《주례》, 《의례》, 《예기》 등과 같은 유학 경전을 통달하였다. 이후 집안이 가난해지자, 범선은 밭을 경작하면서 살림살이를 도왔다. 그리고 얼마 뒤에 양친이 모두 사망하자, 범선은 흙을 짊어지고 손수 부모의 묘지를 만들고는, 그 옆에 농막집을 짓고 묘지를 관리하였다. 이때 태위 치감이 범선을 주부로 삼고자 했고, 조정에서도 그를 태학박사, 산기랑으로 징소했으나, 범선이 이를 모두 사양하였다.범선은 예장(豫章)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예장태수 은선(殷羨)이 범선의 집이 허름한 것을 보고 호의로 고쳐주려 했지만 범선은 이를 굳게 사양하였다. 또, 한번은 환온에 의해 중앙에서 쫓겨나 예장에 살고 있던 유수지(庾爰之)도 범선이 안그래도 가난한데 마침 역병까지 걸린 것을 알고 그에게 수많은 선물을 주었으나, 이번에도 받지 않았다. 이렇듯 범선은 비록 집이 누추하고 처지가 어려웠음에도 항상 글을 읽고 외우는 것을 업으로 삼으니, 초국(譙國) 출신의 명사인 대규 등과 같은 인물들도 범선을 존경했고, 그를 만나기 위해 멀리서부터 찾아오는 자들도 있을 정도로 명망이 높았다.
태원 14년(389년) 11월, 범녕이 예장태수로 부임하였다. 범녕 역시 유학에 일가견이 있는 학자였기에 예장군에 향교를 세우고 수백 명을 모아서 가르쳤다. 이로써 강주(江州)의 백성들이 두 범씨의 기풍에 따라 교화되었다.
범선은 54세가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생전에 《예》(禮), 《역론난》(易論難)을 집필하여 세상에 알렸다. 아들로는 범집(范輯)이 있으며, 군의 태수, 국자박사, 대장군 종사중랑을 역임하다가 스스로 사직하고, 귀향하여 학문과 강론에 힘썼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