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치코 상황후의 친정인 쇼다 가문은 당시
아시아 최대의 제분 회사이자 일본 재계 20위 안에 꼽히는 닛신제분(日清製粉)을 사업체로 운영하던 굴지의
재벌이었다.
미치코의 할아버지인 닛신제분의 창업주인 쇼다 데이이치로(正田貞一郞)는
귀족원 칙선의원을 지냈고 닛신제분 계열뿐만 아니라 현재의
도부 철도 경영에도 참여하여 사장을 역임했다. 아버지는 닛신제분의 사장이던 쇼다 히데사부로(正田英三郞), 어머니는 쇼다 후미코(正田富美子)[1]. 형제로는 오빠 이와오(巌), 여동생 에미코(恵美子), 남동생 오사무(修)가 있었다.
재벌가이자 황후를 배출한 집안인 만큼, 형제자매들이 맺은
혼맥도 대단하다. 이와오는 제27대
일본 총리
하마구치 오사치의 손녀와, 에미코는
일본체육협회 회장이자 쇼와전공주식회사의 전무이사를 역임한 안자이 타카유키(安西孝之)[2]와, 오사무는 일본 5대 정밀화학기업 중 하나인 쿠라레(Kuraray)의 차녀이자 옛
후작의 손녀와 결혼했다.
1955년, 오빠 이와오, 여동생 에미코, 남동생 오사무와 함께.
쇼다 가문이 경영하는 닛신제분은 아버지 히데사부로를 거쳐 현재 남동생 오사무가 맡고 있으며,
안도 모모후쿠가 설립한
라면회사
닛신식품(日淸食品)과는 이름만 같은 별개 기업이다.
일제강점기에
경기도 시흥군 영등포읍도 공장을 뒀으나
8.15 광복 후 1953년 조선제분(현
사조동아원)에 불하됐다가 1958년 신설회사
대선제분으로 팔렸다.
1940년, 만 6세의 미치코. 이 사진은 미치코의 어린 시절 사진 중 가장 대표적인 사진으로, 2번째 사진은 모교인 후타바(雙葉) 여학원의 교장실에 걸려 있다.
어린 시절의 미치코는
미국의 유명한 아역배우
셜리 템플처럼
곱슬머리였기 때문에 “템플 쨩(テンプルちゃん)”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1930년대 중반에 태어나 1950년대 말
일본 황실로 시집가기 전까지 미치코는 부유한 환경에서 부족함 없이 그야말로 최고만을 경험하며 자랐다. 1940년대의 일본은
도쿄에조차 빈민들이 들끓는 비참한 상황이었으나, 미치코는 그들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 속에서 산 사람으로, 부모님과 가정의 보호 아래에서 안온한 생활을 누렸다.[3]
젊은 시절
독일
유학을 다녀온 아버지 히데사부로는 그 옛날에
벽난로와
피아노 등을 갖춘 서양식
대저택을 짓고 살았다. 쇼다 일족은
골프,
스키,
테니스 등의 다양한 스포츠를 즐겼고, 가족들의 모습을 담은 홈 비디오를 찍었으며,
미국과
유럽으로
해외여행도 다녔다. 다시 말하지만 1930~1940년대에.
1940년, 후타바 여학원 유치부 시절의 미치코.
쇼다 가문이
가톨릭 집안이었기 때문에 미치코는 가톨릭계
미션스쿨이자 생 모르 수녀회[4]에서 운영하는 후타바 여학원 유치원에 입학했다.
치요다구에 위치한 후타바 여학원은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있는
중고일관교로, 미치코의 큰며느리
마사코 황후도 초등학교 3학년부터 고등학교 1학년까지 덴엔쵸후 후타바 여학원을 다니다가
미국으로 가서 현지 고등학교에 편입했고, 마사코의 친정어머니 오와다 유미코(小和田優美子)도 후타바 여학원을 졸업했다.
담임교사 노하라 이쿠코에게 지도를 받고 있는 미치코.
1941년, 후타바 여학원 유치부 졸업식에서.
유치원을 졸업한 미치코는 후타바 여학원 초등학교에 진학했다. 초등부 시절 급우들에게는 ‘밋쨩(ミッちゃん)’, ‘쇼다 밋쨩(正田のミッちゃん)’이라는 애칭으로 불렸으며 달리기 등의
스포츠를 좋아했다고 한다. 당시 담임교사였던 노하라 이쿠코는 미치코에 대해 "성실하고 활발했지만 지기 싫어하고 신경질적인 성격이었다."라고 회고했다.
1941년, 후타바 여학원 초등부 1학년 시절의 미치코.
미치코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해에
태평양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이 고조되던 1944년에 쇼다 일가 모두
피난을 가
카나가와현 쇼난
시라유리 여학원,
군마현 다테바야시 미나미초등학교,
나가노현 카루이자와 제1초등학교로
전학을 다니면서 초등학교 5학년 여름에 카루이자와에서 패전을 맞이했다고 한다. 이후 다시 후타바 여학원 수험을 치를 때
분쿄구 야마토향에 잠시 거주했다.
1947년 3월, 후타바 여학원 초등부 졸업식에서. 뒷줄 맨 가운데가 미치코.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후타바 여학원은
시나가와구의 집에서 너무 멀다"는 할머니 쇼다 키누(正田きぬ)의 뜻으로
성심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세이신 여학원 중등과에 입학했다. 참고로 세이신 여학원 부지엔 옛
구니노미야(久邇宮) 저택이 보존되어 있는데, 즉 시어머니
고준 황후(나가코)의 친정집 옆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것이다. 이 이야기만 듣고 '놀랄 만한 옛 인연이 있었으니 고부의 연을 맺은 후 사이가 좋았겠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1950년,
세이신 여학원 고등부 1학년 시절의 미치코(가운데). 운동회에서 급우들과 함께.
1951년,
수학여행을 간 고등부 2학년 시절의 미치코(맨 오른쪽). 카와구치 호수에서 점심을 먹는 모습.
중고등학교 시절의 미치코는 상위권 성적을 유지했으며,
피아노와
회화,
요리,
다도 등에도 능통했다고 한다.
미치코는
양장과
기모노 둘 다 완벽하게 어울리는 얼굴과 큰 키(161cm)를 가진 미인으로 유명했다.[5]
피아노와
하프 등 다양한 악기를 수준급으로 다뤘으며,
칸다의
헌책방 거리를 드나들며 책을 보는 것이 취미였다고 한다. 세이신여대의
학생회장까지 역임하며 주변인들의 동경을 받았다.
이처럼 결혼상대의 폭이 무궁무진하게 넓고 각광받던 미치코는 내로라하는 부유층 자제들과 맞선을 봤는데, 그 중에는
미시마 유키오도 있었다고 한다.[6] 알다시피 결혼까지 이어지지는 못했고, 몇 년 뒤 유키오는 일본화가 스기야마 야스시(衫山寧)의 장녀인 요코(瑤子)와 결혼한다.
졸업 후 미치코는
대학원에도 진학하고 싶었으나, 부모의 뜻에 따라
신부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1950년대에는 여성이 사회에 진출하여 직업을 가지는 일이 흔치 않았으며, 부유한 남성을 만나 결혼해
주부로서 가정에 머무르며
현모양처가 되는 것을 이상적으로 생각하던 시대였기 때문이다.[7] 대학 졸업 당시 미치코는 만 22세로, 당시로서는 혼기가 꽉 찬 나이였다.
두 사람은 혼성복식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처음에는 아키히토 황태자 팀이 유리하게 돌아갔으나, 미치코는 같은 팀의 선수에게 힘내자며 의욕을 북돋아주며 점차 점수를 내갔고, 경기는 아키히토 황태자 팀의 패배로 끝났다. 아키히토 황태자의 친구이자 황태자와 같은 팀을 이루었던 오다 카즈오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그때
폐하께서 수건으로 땀을 닦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렇게 정확하고 끈덕지게 되받아치니, 못 당하겠어. 대단해.”라고요. 그 표정엔 아쉬움은 조금도 없고, 따가운 여름 햇살 아래 오히려 시원시원하게만 느껴졌습니다.
오다 카즈오
미치코가 간택된 후 일본의 대중매체에서는 황태자와 평민 여성이 그저 '우연히'
테니스 코트에서 만나
사랑에 빠져 연애 끝에 결혼하게 되었다는 식의 아름답고 낭만적인
로맨스 이야기가 퍼졌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결혼 과정에는 좀 더 복잡한 사정과 치밀한 계획이 뒷이야기로 숨어 있었다.
쇼다 미치코가 등장하기 이전에
아키히토 황태자의 신붓감 후보로 거론되던
기타시라카와 하츠코. 1939년 출생한 직후부터 장래의 황태자비 후보로 유력하게 거론되어 왔다.
이미 1955년 초부터 황태자비 간택을 추진하던
궁내청은 1955년 10월 9일 "정치가, 기업가는 절대불가"라는 방침을 정하고 다야스 도쿠가와 구
백작가의 차녀 스미코(1935-)와
구황족 기타시라카와 궁가의
하츠코(1939-)를 후보로 점찍어놓았는데, 2달도 지나지 않은 12월에 스미코가 다른 남자와 약혼해 버린다. 1956년에는 스미코 대신 오쿠보 구
자작가의 장녀 에이코(1937-??)가 후보로 올랐으나, 오쿠보 자작가는 온갖 가정사를 핑계로 내세우고 에이코 본인도 "평민이 더 좋다"며 1957년 4월 17일 간택을 고사했다. 그리하여 당초부터 세간에 물망이 올라왔으며,
화족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던
기타시라카와 하츠코의 차례가 소거법으로 돌아왔고, 구황족이었던 기타리사카와 궁가도 대찬성하여 혼사가 급격하게 진행되었으나, 하츠코의 친척 중에
색맹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 무산되었다. 1958년
3월 3일에는 아키히토와 구면이 있었던[8] 하야시 구
백작가의 딸 후미코(1940-)가 황태자비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하야시 백작가는
궁내청에서 보낸
가족력 문의서에 일체의 답변을 거부하였고, 후미코는 그로부터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은 1958년
3월 26일
가쿠슈인 여자고등과 졸업과 동시에
미츠이 재벌가 아들과 후다닥 결혼하였다.
이렇듯 전전
황실전범을 따라 황족이나
화족 가문의 딸들 중에서 황태자비를 택하려던
궁내청은 화족들의 철저한 외면과 황족들의 유전병 문제로 무려 4번이나 실패를 맛보았고, 5번째 시도에서는 반드시 성공하여야만 하였다. 그리고 이 때 황실전범을 깨고 지금까지 화족과 황족에 국한되었던 간택범위를 넓히는 논리로서 '황실의 근대화'가 등장하게 된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한 후
일본은 많은 변화와 혼란을 겪었고, 이는
일본 황실도 마찬가지였다.
다이쇼 덴노의 직계들을 제외한 수많은 방계 황족들과
화족들이
신헌법에 따른 신분제 폐지로 인해 평민으로 전락했고,
신으로 숭배되며
아라히토가미라고 불리던
천황 일가는
인간선언을 했으며, 황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잃고 새로 채택된
일본국 헌법 상의 '상징'으로 전락했다. 따라서 황실이 폐지되지 않고 계속 유지되기 위해서는, 그동안 살아오던 방식들을 버리고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어야만 했다. 실제로 패전 이후로,
쇼와 덴노는 일본의 민심을 잡기 위해 꾸준히 지방순회를 했다.[9]
이 논리에 따라 새로운 시대의
황태자비에 적합한 인물은 부유한 평민 가문 출신이며, 서구적이고 현대적이며, 아름답고 총명하여야 했다. 그리하여 여기에 해당되는 규수를 찾고자
가쿠슈인대와
세이신여대, 그 외 여러 명문
여대와
여고에서 황태자비 추천을 받았는데, 그렇게 나온 이름들 중에서 4월 12일
쇼다 미치코가 처음 거론된다. 그리고 6월, 아키히토 황태자는 대신들에게 “나는
쇼다 미치코를
황태자비로 맞이하고 싶다.”라고 의중을 밝혔고, 같은 달 21일에 미치코를 황태자비
후보로 삼는 것에 대해
궁내청 전원이
찬성한다. 황태자가 의사를 밝힌 시점에서 이미 모든 내부협의는 끝난 상태였고, 또 모든 협의가 끝난 뒤에야 황태자가 의사를 밝힐 수 있는 것이었다. 이제부터 궁중 내의 협의는 형식적인 것이었고, 근대화되고 대중화된 새 황실의 모습을 국민들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궁내청의 각본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전언에 쇼다 가문은 비상이 걸렸다. 히데사부로와 후미코 부부는 ‘뜻밖의 일로 놀라, 이 일은 고사하겠다(事の意外に驚き, これを固辞)’라는 뜻을 밝힌 후, 큰딸 미치코를 테니스 코트장에 보내지 않다가 때마침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세이신 여학원
총동창회[10]에 일본대표로 뽑혀 참가한다는 명목으로 그녀를 출국시킨다. 사실상
도피 여행으로, 거절의 의미였던 것이다. 출국 직전
궁내청 관계자가 쇼다 가를 방문해 부부를 설득했으나, 두 사람은 ‘이미 결정된 일이다’라며 차갑게 대응했다.
화족들이 혼약을 거절하거나 도피결혼해버려서 간택범위를 평민으로 넓혀 간신히 황태자빗감으로 미치코를 찾아냈는데, 그마저도 도망을 친 것이다. 보고를 받은
궁내청 장관은 일순간 할 말을 잊었다고 적었다.
미치코가 귀국한 후,
아키히토 황태자는 전화를 통해 미치코와 연락을 주고받는다. 아키히토 황태자는 미치코와 통화한 날이면 통화에 대한 내용을
일기처럼 노트에 기록했다고 하며, 미치코가 피곤하거나 몸이 좋지 않은 이유로 전화를 받지 못한 날에는 상심했다고 한다.[13] 11월에 들어서면서 아키히토 황태자는 전화로 "나와 혼인해줄 수 있겠느냐"라고 묻고, 미치코는 이를 승낙한다.
1958년 11월 27일,
황실회의에서 쇼다 미치코를
황태자비로 내정하는 것이 만장일치로 가결되었고, 이 사실은
일본 전역에 대서특필된다.
이때 자택에 있던 미치코는 내정 통보를 접하자마자 2층의 자기 방으로 올라가 미리 준비해 둔 옷으로 갈아입은 후,
기자회견을 위해 부모님과 함께
황궁의
궁내청을 방문한다. 위 사진은 기자회견에 참석하기 위해 아버지 히데사부로, 어머니 후미코와 함께 자택을 나서는 모습이다. 현관에서 미치코를 바라보는 인물들은 그녀의 형제들.
회견장에서
아키히토 황태자의 매력에 대해 질문받자, 미치코는 "매우 성실하고, 멋져서, 마음으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바칠 만한 분이라는 점에서 매력을 느꼈습니다"라고 대답했고, 이 발언은
유행어가 되었다. 또 첫인상에 대해서는 "
청결한 분"이라고 했다.
미치코는 몇 달 동안 황태자비 수업을 받았다. 일명 오비교육(お妃教育)이라고 불리는 이 수업은,
일본 황실에 시집오는 여성들이 받는 교육이다.[15] 그리고 "결혼 비용을 여행하는 데 전부 써버렸어요.
가방 하나만 들고 가더라도 저를 받아주실 수 있다면…"이라는 미치코의 말에
아키히토 황태자가 "OK"라고 했다는 전설[16]과는 달리, 쇼다 가문은 황실로 시집가는 큰딸을 위해 6톤 트럭 3대 분량의 어마어마한 혼수를 준비했다.[17] 당시 금액으로 약 3,000만 엔이며 2024년
소비자물가지수 기준으로 환산하면 약 1억 8,640만 엔(약 18억 원)[18]. 만약 쇼다 가문이
재벌가가 아니었다면 기둥 뿌리를 뽑아도 모자랐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바리바리 싸들고 시집가서도, 그녀는 맵고 호된 시집살이를 면하지 못했다.
교육을 받으러 가던 중 시민과 인사하는 모습.
친정어머니 후미코 여사와 함께.
1959년 1월 14일, 노사이 의식(納采の儀)[19]을 치른 후, 부모님과 함께 황실에 인사를 드리러
황궁을 방문한 미치코. 미치코의 키는 161cm로 당시
일본 여성치고는 굉장히 큰 키였으나, 부모인 히데사부로와 후미코의 키가 더 컸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의 대스타, 영화배우라도 그 정도로 사람이 많이 모이지는 않아요."
다큐멘터리 천황의 나라, 일본
"
테니스 코트 위의 로맨스"라고 불리는 미치코와 황태자의 러브스토리는 당시 대다수 국민들을 흥분시켰다. 미래의 황후로 선택된 미치코가 평민 출신이라는 점도 한 몫했다. 이를 계기로 황태자 부부의
결혼식과 퍼레이드를 보기 위해 텔레비전을 구입하는 사람들이 어마어마해 텔레비전 판매량이 2배나 급증하는 등,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의 경제, 패션, 미디어 등등 일본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 큰 영향을 주었다.
청초하고 지적인 미치코의 미모가 절대적인 인기를 모아, 여성들이 미치코를 동경하고 따라하는 유행이 생겼다. 이로 인해 미치코가
아키히토 황태자와 처음 만난 테니스 코트에서 입고 있던 V넥 스웨터,
헤어밴드, 11월 15일
기자회견 당시 입고 있던 흰
드레스, 스톨,
긴 흰색 장갑 등 소위 밋치 스타일(ミッチーㆍスタイル)이라는 패션이 대유행했다.
미치코의 트레이드 마크라 할 수 있는 헤어밴드는 일명 밋치 밴드(ミッチーㆍバンド)라고 명명되었으며, 그녀의 모습이 그려진
종이인형과 기자회견 당시 모습을 본뜬
인형이 불티나게 팔렸다. 기자회견 패션은 미치코의 트레이드 패션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유명했다. 당시 국민들이 미치코라 하면 바로 떠올리는 패션이었을 정도. 이 패션은 특히 상류층 여성들 사이에서 인기가 대단했다고 한다.
결혼 후
시부야에 있던
동궁 임시거처까지
마차가 달리는 퍼레이드가 열리던 길가에는 무려 53만명의 인파가 몰려들었으며,
NHK,
아사히 TV 등의 거물급 방송사 취재진이 꼭두새벽부터 진을 치고 앉아 기다렸다. 사람들은 광장에 모여 조화 등으로 장식한 황태자 부부의 사진을 내걸고 만세를 부르는 등, '세기의 성혼'이라 칭해지며 일본 역사상 이런
결혼식은 없을 정도로 나라 전체가
축제 분위기였다. 그 당시의 분위기를 체감하고 싶다면 아래 영상 참조.
황태자 부부의 결혼식 영상.
결혼식이 모두 끝난 직후 동궁에서의 황태자 부부 모습과, 결혼 첫날밤 불이 꺼진 동궁어소 아래에서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 수많은 인파가 모인 국립경기장에서
봉화를 피우고, 마치 서양의 궁정 무도회를 연상시키는 축하 퍼레이드를 벌이는 등, 결혼식의 열기는 밤늦도록 가라앉을 줄 몰랐다. 또한 당시 컬러 텔레비전도 함께 보급되던 시기라, 컬러버전에 소리도 녹음되었다.
밋치 붐(ミッチーㆍブーム)이라고 불리며 세간의 화제가 되고 수많은 일본 국민들이 그녀에게 열광한 것과는 달리, 평민 출신 황태자비에 대한 대한
황족과
화족들의 반발은 대단했다. 수년간
아키히토 황태자의 신붓감 후보를 관리하던
고준 황후(나가코)와 여러 황족, 화족 부인들은 개혁 세력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인해 황태자비가 되면서 자신들의 자존심을 무너뜨린 미치코를 결코 좋게 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절대 인정하지않겠다며 버텼다.
결국 미치코는 무사히 황실로 시집왔지만, 그 후로도 그들은
미치코 황태자비에게
집요한 학대를 가하였다. 하츠코는 결국 미치코에게 밀려 황태자비가 되지 못했지만,
고준 황후는 하츠코의 고모할머니 호시나 다케코(保科武子)[22]를 자신의
시녀장(侍女長)으로 두었다. 다케코의 후임은 하츠코의 어머니 사치코였다. 고준 황후가 누구를 자신의 며느리로 두고 싶었는지,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이다. 또한 미치코 황태자비의 시녀장은 마키노 스미코(牧野純子)였는데, 스미코는 미치코 황태자비를 반대하는 운동에 앞장섰던 노부코가 손수 추천한 인물이었다. 그러니 스미코가 어떤 인물이었을지, 그리고 미치코를 어떻게 대하고 어떤 시선으로 바라 보았을지는 뻔하다.
그나마 첫째
시누이
히가시쿠니 시게코는 남동생 부부에게 보내는 응원의 메시지를
신문에 게재하기도 하고, 올케인
미치코 황태자비를 친정 가족들과 함께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파티를 열어주는 등 관대한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시게코는 미치코가 황실로 시집온 지 2년 뒤인 1961년, 불과 만 35세의 젊은 나이에 어린 3남 2녀를 두고서 병으로 죽고 말았다. 이때 시게코가 젊은 나이에 병으로 죽은 것을 두고도, "여자가 잘못 들어와서 그렇다!!"라며 미치코 황태자비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1]
결혼 전의 이름은 소에지마 후미(副島富美).
[2]
안자이 가문은 일본의 3대 재벌 중 하나인
스미토모 일족, 그리고
사토 에이사쿠 가문,
미키 다케오 가문, 하토야마 가문과도 혼맥으로 연결되어 있다.
[3]
이 시대를 다룬 미디어와 작품들에서도 힘든 생활을 하는 국민들의 모습이 태반으로 나온다. 영화
반딧불이의 묘의 말미에는
상류층으로 보이는 소녀 무리가 전쟁 중에 아예 멀리
피난갔다가 돌아와 ‘역시 집이 최고야’라며 즐거워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군인의 자식들로 유복하게 살긴 했으나 아버지는 전사하고 폭격으로 어머니까지 잃자 몸을 의탁하던 친척집을 나와 비참하게 굶어죽은
주인공
남매와 더 대비됐다. 미치코의 삶은 딱 이 소녀들 같았다고 보면 된다.
[4]
아기
예수의 애덕교육수녀회. 아직
한국에는 진출하지 않은
수도회다.
[5]
161cm라는 키는 2020년대 일본인 여성의 평균 신장보다도 큰 키임을 감안한다면, 당시에는 매우 큰 키라는 걸 알수 있다.
[6]
당시 미치코는 대학교 2학년에 21살이었다.
[7]
사실 그 시대에는
대학은커녕 여자가 고등학교까지 졸업한 것도 엄청난 고학력이었다.
[8]
테니스를 같이 쳤고
아키히토가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매스컴과
궁내청에서 아키히토와 미치코를 '테니스 연애'란답시고 엮은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9]
이는
일본 만화
맨발의 겐에서도 다뤄지는 장면이다. 주인공
나카오카 겐은 "천황이 왔다!!"며 감탄하는 친구들과는 달리, "나라 꼴이 이 모양이 됐는데, 천황이 오는 게 무슨 소용이야?!"라며 울분을 터뜨린다. 이와 같이 그 당시 천황의 지방순회를 아니꼽게 보는 일본인들도 상당했을 것이다.
[10]
성심수녀회는
일본뿐 아니라 전세계에서 성심학교를 운영하고 있는데, 세계 모든 성심학교 관계자들이 모여 동창회를 개최한 것이다.
[11]
영국의
다이애나 왕세자비도 이와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첫아이
웨일스 공 윌리엄을
임신했을 당시 온 세상이 본인만 감시하고 있다고 느껴져 극도의 불안상태에 시달렸기 때문에, 유도분만으로 예정일보다 1주일이나 빨리
출산했을 정도.
[12]
자살은 여러 원인이 존재하지만 미래의 황후인 황태자비가 되어서 개인이 말살된다는 극단적인
스트레스 내지는
공황장애 역시 원인 중 하나가 된다.
[13]
누군가가 황태자인 자신의 연락을 이렇게 회피하는 경험 자체가,
아키히토에겐 처음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14]
영상을 보면 목소리가 정말 곱고 예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5]
역대 신붓감들 중에서 이 교육을 제일 어려워한 사람은
마사코 황후였다. 오랜 서양에서 성장한 그녀는
신토 등 일본의 전통을 잘 이해하지 못해
영어로 된 책으로 수업을 받기도 했다. 교육과정 및 과목은 이전보다 훨씬 단축된 것이었는데, 1993년 당시로서는 만 29세로
노처녀였던 오와다 마사코를 한시라도 빨리 결혼시켜 후손을 보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16]
아키히토 본인은 프로포즈 과정에서 이런 대화가 나온 적이 없다며 부인했고, 이 대화를 보도하는 매체를 대상으로 정정을 요구하던 시기도 있었다.
[17]
여기엔 미치코 상황후가 신혼이던
1960년대에 입던 양장과 드레스, 구두, 장신구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18]
지금 기준으로도 상당한 수준이지만, 1959년 당시 일본의 샐러리맨 평균 연봉이 약 27만 엔(2024년 가치로는 167만 8,000엔)정도에 불과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참고자료) 당시 샐러리맨의 111년치 연봉 수준이던 셈이다.
[19]
이른바 납채.
일본 황실에선 이 의식을 치르기 전까지 결혼할 상대의 신분을 혼약자가 아닌 ‘혼약 예정자’로 규정한다. 노사이 의식을 치름으로써 비로소 정식 약혼자가 되는 것.
[20]
당시 일기에 "이제
일본도 다 끝났구나!!"라고 썼을 정도였다.
[21]
즉
이방자 비에게는
이모가 된다. 노부코는 황실의 사돈이라는 배경으로 궁정 내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고,
가쿠슈인 동창회장을 지내며 옛 황족들과
화족들의 우두머리로 군림했으며, 반대운동의 선봉에 섰다. 진짜 이유는 평민이 황후가 된다는 위기감도 물론 있었겠지만,
쇼다 미치코의 외가인 소에지마 가문이
무진전쟁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22]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北白川宮能久) 친왕의 3녀. 오빠인 다케다노미야 츠네히사(竹田宮恒久) 왕은
메이지 덴노와 측실
소노 사치코의 6녀인 츠네노미야 마사코(常宮昌子) 내친왕과 결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