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6 00:27:39

잭 더 리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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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영국 BBC 방송이 영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최악의 영국인 10명'을 선정. 다만 현직 정치인은 제외되었다.
1위 2위 3위 4위 5위
잭 더 리퍼 토머스 베켓 에아드릭 스트레오나 존왕 리처드 리치
6위 7위 8위 9위 10위
타이터스 오츠 윌리엄 오거스터스 휴 디스펜서 더 영거 토머스 애런들 오스왈드 모슬리
출처
같이 보기: BBC 선정 위대한 영국인 }}}}}}}}}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잭 더 리퍼
살인마 잭 | Jack the Ripper
[1]
파일:잭 더 리퍼 그림.jpg
그림의 왼쪽 인물.
1888년 10월 13일 영국 런던 신문 Illustrated London News에서 그린 삽화이다.
출생 19세기[2]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추정)
거주지 영국
범죄 유형 연쇄살인
범행 기간 1888년 8월 31일~ 11월 9일
범행 장소 영국 런던 이스트엔드 지역의 윤락가 화이트채플
범행 도구 메스[3]
피해자 수 최소 5명

1. 개요2. 배경3. 이름4. 사용한 흉기5. 행적
5.1. 첫 번째 사건: 1888년 8월 31일5.2. 2번째 사건: 1888년 9월 8일5.3. 3번째, 4번째 사건: 1888년 9월 30일
5.3.1. 지옥으로부터
5.4. 마지막 사건: 1888년 11월 9일
6. 범행의 공통점7. 잭 더 리퍼의 범행으로 인정되지 않는 사건8. 용의자
8.1. 에런 코즈민스키8.2. 몬터규 존 드루이트8.3. 조세프 바넷8.4. 찰스 크로스8.5. 앨버트 왕자8.6. 월터 시콧8.7. 토머스 닐 크림8.8. 질 더 리퍼8.9. 프랜시스 텀블티
9. 영향10. 대중매체
10.1. 셜록 홈즈 vs 잭 더 리퍼
11. 기타

[clearfix]

1. 개요

1888년 8월 31일부터 11월 9일에 걸쳐 영국 잉글랜드의 런던 이스트엔드 지역의 윤락가 화이트채플에서 매춘부 최소 5명을 갈기갈기 찢어 살해한 연쇄살인범으로, 일명 면도날 잭. 그가 저지른 화이트채플가의 연쇄살인은 오랫동안 연구의 대상이 된 유명한 미제사건이다.[4]

현재는 마지막 사건이 발생한 지 [age(1888-11-09)]년이나 지났기에 범인 본인은 이미 오래 전에 사망했을 테니 완벽한 영구 미제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그를 잡지 못한 이유는 과학 수사가 별로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였던 데다 총 책임자였던 찰스 워런이 워낙 수사를 부실하게 했던 탓이었다. 즉, 이러한 악조건들로 인해 완벽범죄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대표적인 예시들중 하나이기도 하다.

2. 배경

19세기 대영제국 산업혁명과 의료 기술 발달, 농업 기술 발달의 결과로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였다. 1801년에 영국 인구는 1,050만 명이었지만 1901년에는 4,153만 명으로 아일랜드를 제외하더라도 프랑스보다 인구 수가 많아졌었을 정도였다. 당시 영국이 세계 각지에 식민지를 차지하면서 많은 영국인들이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인도, 남아프리카공화국, 홍콩의 식민지로 이주한 데다가 적지 않은 영국인들이 미국, 브라질, 아르헨티나, 멕시코 등의 아메리카 국가로 이주했음에도 영국 본토의 인구만으로도 엄청난 인구 성장세가 나타난 것이다. 이처럼 늘어난 인구는 산업혁명기에는 쉽게 대체 가능한 잉여 노동력이 늘어났다는 뜻이기도 했다.

노동환경은 열악하고 대체인력 수급은 쉬웠으니 당연히 고용주들은 임금을 제대로 주지 않았다. 여성들은 같은 계층 남성들보다 더 혹독한 현실에 부딪혀야 했다. 예를 들어 1890년 기준으로 영국 말단 하녀가 12시간 매일 일하고 받은 '연봉'은 13파운드 정도였는데, 현재 기준으로 환산하면 대략 260만 원 정도, 그러니까 '월급'이 20만 원 정도인 꼴이다. 결국 여성들이 기존에 버는 돈으로는 도저히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는 여성들이 매춘을 부업 또는 전업으로 삼는 큰 요인이 되었다.

게다가 당시 영국에서는 여성 차별적인 법률에 의해 남편 귀책 사유로도 이혼이 어려웠고, 이혼이 간신히 이루어진다고 해도 제대로 생계를 지원받을 수가 없었다. 잭 더 리퍼의 희생자들을 통해 그 일면을 어느 정도 볼 수 있다. 예컨데 첫 번째 희생자인 메리 앤 니콜스는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5명이나 되는 아이를 낳았지만 남편이 옆집 여자와 바람이 난 후 자주 부부싸움을 벌이곤 했다. 당시 영국에서는 여성이 간통할 경우 이혼 사유가 되지만 남편은 간통하더라도 직접적으로 가정내 폭행 등의 강력범죄를 저지르지 않으면 이혼사유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니콜스는 결국 별거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고, 이후 구빈원에 들어가서 바느질 등으로 간신히 생계를 유지할 수 밖에 없었다. 니콜스 이후의 다른 희생자들도 결혼 경력이 있었지만 결혼생활에서 큰 고생을 하고 결국 별거에 들어갔다가 빈곤층으로 떨어진 케이스가 대부분이었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이드는 스웨덴에서 지주의 집 하녀로 일하다가 식모 일을 하러 런던으로 이주하였으나 매춘에 발을 들였고 애니 채프먼은 때때로 하녀 일을 하거나 뜨개질을 하여 돈을 벌었으나 수입이 부족하여 매춘으로 생활비를 벌충했다.

게다가 여성의 성비는 1851년 통계에 의하면 50만에서 100만 명 정도로, 남성보다 더 많았다. 당시 남성이 여성보다 수가 적었던 이유는 현대에도 그렇지만 과거에도 여성의 평균수명이 남성보다 길었고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생겨난 공장들에서 일어난 사고의 사망자들이 남성이었으며 당시 영국의 식민지가 전세계에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어서 식민지 지역으로의 이주가 활발히 진행된 데다 미국 라틴 아메리카 일대로 이주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는데 남성 이민자들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주둔군으로 파견된 남자들이 현지 주민들과 빈번히 통혼하여 현지에 정착하고 7년 전쟁, 미국 독립 전쟁, 나폴레옹 전쟁, 미영전쟁, 아편전쟁 등 대규모 전쟁들이 빈번하게 일어나 징발된 남자들이 전투나 풍토병으로 죽자 미혼 여성의 숫자는 더욱 늘어났다.

25세에서 40세 사이 여성 중 15% 이상이 결혼을 할 수 없었는데 이는 남성의 경제권이 강하던 시대에 여성의 경제적 지위 하락으로 이어지는 문제였다. 이렇게 노동과 결혼에서 수많은 젊은 여성들이 소외됨으로써 영국 매춘부 수는 폭증하였다.[5] 당시 계간지였던 《웨스트민스터 리뷰》 지(The Westminister Review)에서 추산한 영국 전체의 매춘부 숫자는 5만 명에서 36만 8천 명이었다. 이 통계수치가 맞다면 매춘은 영국 여성의 직종들 중 4번째로 흔했다. 잭 더 리퍼 사건이 첫 발생한 1888년 영국 경찰이 파악한 런던의 매춘부 수는 5,678명이었고 영국과 웨일스 전체에서는 2만 4,311명이라고 나왔다. 1888년 10월 잭 더 리퍼 사건이 벌어지던 중 사건의 배경이 된 화이트채플에서 공식적으로 경찰이 집계한 매춘부의 숫자는 1,200명이었다. 하지만 통계수치마다 숫자가 모두 다르고 경찰이 집계한 숫자는 부족한 당시 치안력으로 파악한 최소치임을 감안하면 실제 매춘부의 숫자는 경찰의 파악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그리고 경찰이 확실히 집계한 숫자로 한정하여 생각해도 런던 전체에서 화이트채플의 매춘부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컸다.

잭 더 리퍼 사건의 희생자들 대부분은 결혼하였어도 남편과 사별하거나 헤어져서 안정적인 생계 유지가 어려워진 여인들이었다. 유일하게 마지막 희생자 메리 제인 켈리만 결혼 기록이 없다. 실제로 마지막 희생자 메리 제인만 명확하게 매춘부로써의 활동이 기록되어 있을 뿐 나머지 넷은 매춘 활동과 관련된 범죄기록이 거의 없고 일부 증인들에 기초해 매춘 활동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이나마도 매춘을 했다는 것과 관련된 증언과 그렇지 않았다는 증언들이 뒤죽박죽 섞여 있는데 이는 당시 빈곤층 여성들이 평소에는 바느질 등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다가 그나마도 여의치 않을 때에만 (마치 오늘날의 조건만남 형식처럼) 잠깐잠깐 매춘을 하는 게 일상이었고 제대로 된 집이 없어서 일상적으로 노숙을 할 수 밖에 없었던 빈곤층 여성들은 죄다 매춘부로 낙인찍던 당대의 시선과도 관련이 있었다.

당시 이런 여성들은 당장의 비바람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구빈원에 들어갔지만, 이 시기 영국의 구빈원은 사회적으로 실패자 낙인을 강하게 찍히는 곳이었기 때문에, 이곳에 들어간 기록이 생긴 이들은 그후로는 더욱 제대로 된 직업을 찾는 것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 사건 희생자들도 처음에는 구빈원에 들어가지 않고 어떻게든 다른 가족들의 집에 신세를 지거나 얼마 없는 돈으로 여인숙을 전전하려고 하곤 했지만 결국 어쩔 수 없이 구빈원에 들어갈 수 밖에 없게 되었고, 구빈원을 떠나게 된 후에는 노숙을 하거나 매춘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간신히 여인숙에 하룻밤 정도나 머물게 된 것이다. 즉 실패한 결혼생활이 이들을 생활전선으로 내몰았고, 복지정책이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았던 당시 영국 사회에서 희생자들이 살아남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지가 매춘이었다.

사건의 배경이었던 화이트채플은 그 중에서도 매춘으로 악명 높은 곳이었고 이미 유대인[6], 아일랜드인, 기타 외국인들이 모여들어서 사회 혼란의 진원지가 되고 있었던 곳이다. 잭 더 리퍼에게 희생당한 5명의 피해자들 중 2명이 잉글랜드 본토 출신이 아닌 외지인이었다는 것에서도 이 점을 엿볼 수 있다.(엘리자베스 스트라이드가 스웨덴 출신, 메리 제인 켈리가 아일랜드 출신이었다.) 사회적 약자 중의 약자였던 매춘부들은 잭 더 리퍼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도 범죄의 표적이 되어 살해당하거나 갱단으로부터 보호비 명목으로 돈을 갈취당하는 경우가 허다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치안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전술했듯 잭 더 리퍼 사건이 발생하기 전인 1888년 초중순에도 많은 매춘부들이 길 한복판에서 살해당했지만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내지 못했다. 다만 살해 수법을 보았을 때 잭 더 리퍼 사건의 피해자는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게다가 당시 매춘부들의 절망적인 생활 패턴이 맞물려 매춘부들은 잭 더 리퍼 같은 살인자들에게 손 쉬운 표적이 되었다. 매춘부들은 당시 빠른 성행위에 4펜스 남짓한 푼돈을 받았고, 그 돈으로 그날 먹을 비스킷을 사면 숙박비를 구할 수 없어 노숙하거나 영국의 하층민들이 이용한 2펜스 정도의 푼돈을 내고 벽가에 설치된 긴 벤치에 서로 붙어앉아서 자는 Two Penny hangover라는 간이 숙박시설 등을 써야 했다. 이건 말이 숙박시설이지, 그냥 노숙이거나 혹은 지붕만 있는 실내에 의자 하나와 자다가 앞으로 넘어지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벽에 걸려 있는 기대는 긴 밧줄에 기대어서 자는 준 노숙으로, 아침이 되면 주인이 밧줄을 풀어서 깨워 주었다.

심지어 Penny sit-up이라고 반값이지만 대신 기댈 밧줄도 없고 등받이도 없는 의자에서 자야 하는 곳도 있었다. 숙박비를 벌지 못한 많은 매춘부들이 이런 식으로 잠을 자야 했다.[7] 1800년대 후반부터 1900년 무렵 런던의 가장 저렴한 숙박업소에서 침대 하나(방 하나가 아니고)를 하룻밤 빌리는 데 지불해야 하는 가격은 4펜스에서 6펜스 남짓이었다. 매춘부들이 한 번의 야외 매춘으로 번 돈은 개인마다 차이는 있었지만 2펜스에서 4펜스 정도였다. 이러한 시세의 영향으로 당시 퍼진 속어가 twopennies upright였는데, 2펜스를 주고 담벼락에 기대 선 채로 매춘부와 하는 성관계를 나타내는 말이었다. 야외에서 적당히 으슥한 곳에 가서 유방 성기 정도만 노출하고 잽싸게 끝내는 착의섹스로, 저렴한 만큼 질도 낮은 서비스다. 당시 영국 화폐는 1파운드가 240펜스였다. 1889년 기준으로 1파운드는 현재의 15만 원이 조금 넘는다.[8] 그렇게 따지면 4펜스는 지금의 2,600원 정도 가격이며 당시 매춘부들이 물처럼 마시던 1잔은 3펜스 정도였다.

살해당한 5명 중 4명이 모두 새벽에 손님을 구하다가 목숨을 잃었고, 마지막 희생자는 살해당할까 두려워 집 안에 머물렀지만 결국 자기 집 안에서 살해당했다. 야간에 조용한 장소에서 손님을 만나야 하는 매춘부들의 직업 특성상 잭 더 리퍼에게 있어서는 손쉬운 살해 조건이 널린 셈이었다.

3. 이름

잭 더 리퍼 자체는 직역하면 '찢는 자 잭',[9] '절단마 잭' 정도가 되고 조금 더 자연스러운 의미를 부여하면 '면도날 잭' 혹은 '칼잡이 잭', 조금 더 의역하면 '살인마 잭' 정도다. 그리고 (Jack)은 특정인의 이름이 아니라, '아무개'라는 뜻[10]임을 감안하면 살인마 모(某) 씨 정도가 된다.

4. 사용한 흉기

외과 수술용 칼이자 양날의 칼인 리스턴 칼(Liston knife)을 흉기로 썼다. 리스턴 칼은 스코틀랜드 출신 외과 전문의 로버트 리스턴(Robert Liston, 1797~1847)이 만들어 써서 유명해진 절단 칼인데, 리스턴은 생전 엄청난 속도와 정확성으로 유명한 의사[11]였으며 영국 최초로 전신마취 수술을 시연했고[12] 무균성 수술(aseptic surgery)에 이 칼을 썼는데, 이 칼은 당대의 다른 수술칼과 비교해 좀 더 크고 넓으며, 날카로운 날을 가지고 있었다. Down Bros가 제작했으며 손잡이는 니켈로 이루어져 있고 칼의 날은 강철로 만들어져 있다.

그러나 1888년 잭 더 리퍼의 범행 당시 이 칼이 발견되면서 악명이 생겼다.

5. 행적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파일:external/whitechapeljack.com/1888_whitechapel_london_murder_map.jpg
잭 더 리퍼의 살해현장으로 보는 당시의 화이트채플 지도
당시 그의 악명을 빌려 잭 더 리퍼를 사칭한 모방범죄가 극심하게 발생하여 피해자 수가 정확히 집계되지 않았다. 기록에 따라 피해자 수가 5명이라고 서술된 것도, 수백 명이라고 서술된 것도 있다. 진짜 잭 더 리퍼 본인이 저지른 살인으로 널리 인정받는 것은 5건으로, 이 5건은 Canonical Five(공식적인 5건)라고 불린다.

5.1. 첫 번째 사건: 1888년 8월 31일

1888년 8월 31일 새벽 3시 40분 메리 앤 니콜스(Mary Ann Nichols, 43세)라는 매춘부가 벅스 로(Buck's Row)[13]의 입구 근방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그 전날인 8월 30일 23시경 니콜스가 화이트채플 거리를 걷는 모습이 목격되었고, 31일 0시 30분에는 스피탈필즈의 주점에서 나오는 것이 목격되었다.

1시 20분에서 40분경에는 숙박업소의 침대를 빌릴 4펜스가 없다는 이유로 숙박업소의 부엌에서 쫓겨났다. 숙박업소 관리자가 자신을 쫓아내자 니콜스는 "침대 하나를 비워달라"라고 부탁하며 이렇게 말했다. "신경 쓰지 말아요. 금방 숙박비를 벌어올테니. 여기 이 예쁜 모자 보이죠?" 관리자의 증언에 의하면 그 모자는 지금껏 니콜스가 사용하지 않았던 새 검은색 보닛 모자였다.

니콜스가 생전 마지막으로 목격된 것은 2시 30분 오스본 가에서 친구이자 룸메이트였던 에밀리 홀랜드와 만난 것이었는데 이때가 니콜스가 사망하기 약 1시간 전이라고 추정된다. 홀랜드와 이야기하면서 니콜스는 자신이 "숙박비의 3배를 벌었으나, 3번 모두 술을 마시는 데 다 써 버렸다.", "한 남자와 거래를 시도하고 플라워 앤 딘 스트리트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하였다. 홀랜드는 "니콜스가 굉장히 취한 채로 벽에 기대어 서 있었으며, 그녀와 7~8 분간 대화하고 헤어졌다."라고 증언하였다.

3시 15분경 니콜스의 시신이 발견되었던 벅스 로를 2명의 경관이 순찰하고 있었으나 이들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였다"라고 증언하였다.

3시 40분에서 50분 사이 벅스 로에서 찰리 크로스와 로버트 파울이라는 수레꾼은 길가에 여자가 쓰러져 있는 걸 발견했다. 두 수레꾼은 일에 늦지 않기 위해 마침 지나가던 조나스 미즌 경관을 만나 이를 미즌 경관에게 이야기했다. 미즌 경관이 도착하기 직전 맞은편에서 순찰 돌던 경관들인 존 네일, 테인이 먼저 니콜스의 벅스 로 거리에서 누워 있는 시신을 발견했다.

니콜스의 시신은 브라운 앤 이글 양털 창고라는 상가에 있는 마구간 입구에서 발견되었다. 당시 마구간 옆 건물의 1층에 거주하던 엠마 그린 부인은 딸과 함께 오후 11시쯤 잠자리에 들었는데, 그린 부인의 침실 창문은 니콜스의 시신 거의 근처에 위치해 있었으나 모녀는 당시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그린 부인의 집 맞은편에 살던 풀키스 부부도 11시와 11시 15분에 각각 침실로 향했는데, 잠을 청하지 못한 채 침실을 왔다갔다한 풀키스 부인도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벅스 로는 오스본 스트리트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위치해 있었고, 거리 끝에 있는 1개의 가스 램프가 유일한 조명이었다.

검시 결과 니콜스의 목과 배에는 깊은 자상이 있었고 목에는 숨통이 졸린 자국이 있었다. 니콜스의 몸 주변에서 피가 많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니콜스의 사인은 자상이 아닌 질식사인 듯하다. 니콜스의 시신을 검시한 의사는 "니콜스의 몸에 있는 자상은 모두 아주 날카로운 칼 1자루만으로 생겼고, 범인은 왼손잡이이며, 범인은 다른 곳에서 살해한 후 시신을 벅스 로우로 옮겨 훼손한 것 같다"라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참고로 메리 앤 니콜스가 살해당하기 전 앞서 서술했듯이 에마 엘리자베스 스미스와 마사 타브람이라는 두 매춘부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잭 더 리퍼 특유의 칼로 베는 시신 훼손 수법을 토대로 분석했을 때 니콜스가 당한 살해가 잭 더 리퍼가 최초로 저지른 범행이란 추측이 많다.[14] 그러나 당시 런던 경시청은 이 사건이 연쇄살인사건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과거 화이트채플에서 14년 동안 근무했던 프레드릭 애벌라인(Fredrick Abberline) 경위를 파견했다.

당시 런던 경시총감[15]을 맡고 있던 사람은 찰스 워런 경(Sir Charles Warren, GCMG, KCB,)이라는 사람이었는데, 문제는 워런이 무능력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그는 전문적인 경찰관이나 형사가 아니었다. 게다가 1887년에 트라팔가르 광장에서 벌어진 실직자들의 폭동을 과격하게 진압해서 2명이 사망했고 수백 명이 부상당했기 때문에 이미 내외적으로 신뢰를 잃은 상태였다.

5.2. 2번째 사건: 1888년 9월 8일

1888년 9월 8일 새벽 6시경 애니 채프먼(Annie Chapman, 47세)이라는 매춘부가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9월 8일 오전 1시 35분 채프먼은 숙박업소에서 침대를 빌릴 돈이 없다는 이유로 쫓겨나자 "곧 숙박비를 벌어서 돌아오겠다."라는 말을 남기고 길거리로 나갔다.

채프먼이 시신으로 발견되기 30분 전인 5시 30분, 어쩌면 애니 채프먼 사건의 가장 중요한 목격자라고 할 수 있는 엘리자베스 롱 부인의 증언에 의하면, 애니 채프먼은 한버리 29가에서 사냥 모자를 쓴 키가 5피트 7인치(170cm) 정도에 복장이 추레한 남성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고 한다. 롱이 엿들은 그들의 대화 내용에 따르면 남성은 "하겠는가?"라고 물어봤고 채프먼은 "예"라고 답했다.

오전 5시 45분경 존 리처드슨은 자신의 어머니, 아멜리아 리처드슨의 사업을 돕기 위해 한버리 29가 지하실에 들렀는데 이때까지는 뒷마당에 채프먼의 시신이 없었다.

그리고 5시 50분에서 6시 사이 한버리 29가에 거주하던 젊은 목수 앨버트 카도시의 증언에 의하면, 자신이 집 밖으로 나왔을 때 울타리 너머에서 한 남성의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 여성의 "안 돼!" 하는 비명 소리, 무언가 쓰러지는 소리를 들었다.[16]

6시 한버리 29가 3층에 거주하던 수레꾼 존 데이비스가 한버리 29가[17] 뒷마당에서 채프먼의 시신을 발견했다.[18]

검시의 조지 백스터(George Bagster Phillips)가 채프먼을 검시한 결과 죽은 지 대략 2시간이 지났고 시체로 발견된 그 장소에서 살해당했다고 추정했다. 채프먼은 등을 바닥에 대고 누워 있었고 목이 깊이 그어졌으며 혀가 이빨 사이에 끼워져 있었고 얼굴이 부풀은 점으로 보아 아마 목에 두른 스카프로 교살한 듯하였다. 이는 스카프로 목을 졸라 의식을 잃게 한 후 칼로 목을 베면서 빠르고 조용하게 살인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과정에서 채프먼은 비명을 지르지 못해 주위의 사람들이 살인 현장을 발견하지 못했다. 손가락에는 찰과상이 있었는데, 당시 채프먼의 반지가 강제로 빼내어져 사라져 있었다는 것을 가리켰다. 친구들은 애니 채프먼이 값싼 황동반지를 끼고 있었는데 이것은 금반지로 착각할수 있었을 것이라고 확인했다.[19]

첫 번째 살인이 비교적 평범한 살해였던 것에 비해, 이 살인은 배를 열어 내장을 어깨에 걸쳐 놓은[20] 시신 훼손이 워낙 잔혹하여 단숨에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한 더 큰 원인이 된 것은 그가 신문사에 보낸 편지였다. 편지는 9월 27일 소인이 찍힌 채 Central News Agency of London 신문사에 발송되었는데 후대에 수신인 표시 부분을 따서 'Dear Boss Letter'로 불리게 된다.
나는 경찰들이 나를 잡았으며 아직 날 처리해 버리지 못한 거라는 말을 계속 듣고 있다. 그들이 똑똑한 척하며 올바른 방향으로 가는 것에 대해 얘기할 땐 웃음이 나더군. 그 가죽 앞치마[21]에 대한 농담은 정말 웃겼어. 난 창녀들이 혐오스럽고 내가 쇠고랑을 찰 때까지 그들을 찢는 것을 멈추지 않겠다. 저번 일은 대단했지. 난 그 여자가 찍찍댈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그들이 날 잡을 수 있을까. 난 내 일이 좋고 다시 시작하고 싶다. 너도 곧 나와 내 즐거운 작은 놀이에 대해 듣게 될 거다. 최근 사업의 성과로 얻은 생강맥주 병에 담아놓은 빨간 물질로 편지를 쓰려고 했는데 풀처럼 굳어버려서 못 쓰게 되었다. 붉은 잉크면 충분하길 바란다. 하하. 다음 번에 할 일은 여자의 귀를 잘라버리고 재미로 경찰에 보내는 거지. 그렇지 않나. 내가 좀 더 일할 때까지 편지를 보관하다 공개하도록. 내 칼이 아주 좋고 날카롭기에 기회만 있으면 바로 써보고 싶어. 행운을 빌며, 안녕히, 잭 더 리퍼로부터(Jack The Ripper) 이 별명을 거리낌 없이 사용하시길. PS 내가 두 손을 붉은 잉크로 다 적시기 전에 이걸 부쳐서 다행이지 않나. 빌어먹을, 운도 없지. 이젠 그들이 나더러 의사라더군 하하.

잭 더 리퍼, 즉 살인자 잭이라는 별명이 처음으로 소개된 이 편지는 런던을 발칵 뒤집어 놓았고 화이트채플의 살인자는 순식간에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이렇게 신문사에 범행 사실을 알려주었기 때문에 그의 범죄는 최초의 극장형 범죄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이 편지가 진짜로 범인이 보낸 것인지, 누군가의 단순한 장난이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22]

이 편지가 이틀 후인 9월 29일 경찰에 보고되었을 때 경찰은 이것을 누군가의 장난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다음날인 30일 여자의 귀를 자르겠다고 편지에 언급되었던 대로 캐서린 에도우즈가 귀가 잘린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실제로 귀가 보내지지는 않았지만 경찰은 이 편지가 진범에 의해 보내졌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편지를 일반에 공개했다. 필적을 아는 누군가의 제보를 바란 것이었지만 소득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잭 더 리퍼'라는 별명에 영감을 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잭 더 리퍼를 사칭하는 가짜 편지들을 써서 보내는 계기를 낳고 말았다.[23]

살인사건들이 끝난 후 경찰 내부에서는 이 편지가 지역 신문사 기자의 장난이었을 거라고 결론을 내렸으며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1931년에 와서야 한 기자가 "Dear Boss 편지는 내가 썼다"라고 고백하는 일도 있었다. 사실 Dear Boss 편지는 후술되는 From Hell 편지와는 달리 글씨체가 훨씬 깔끔하고 철자법 사용이 비교적 정확한 편이다.

5.3. 3번째, 4번째 사건: 1888년 9월 30일

1888년 9월 30일 더블 이벤트(Double event)라고 불리는[24] 사건이 발생했다. 이날 새벽 1시와 1시 45분에 두 여성의 시신이 발견되었는데 당시의 사건 기록을 살펴보면 경찰들이 주변을 순찰 중이었으며 주변을 지나던 행인의 수도 적지 않았는데도 범인은 경찰뿐만 아니라 행인 등 어느 누구에게도 붙잡히지 않았고 불과 1시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사람을 2명이나 죽이고 사라져 버렸다. 살해된 두 여성은 엘리자베스 스트라이드(Elisabeth Stride, 45세)와 캐서린 에도스(Catherine Eddowes, 46세)라는 매춘부들이었다.

스트라이드가 시신으로 발견되기 전 여러 곳에서 남성과 같이 있는 모습이 각각 목격되었다.

오후 11시 노동자 J. 베스트와 존 가드너는 베르너 스트리트에서 스트라이드가 검은 콧수염과 속눈썹이 있고 코트를 입고 있던 키가 작은 남자와 함께 커머셜 로드와 버너 스트리트 방향으로 이동하는 것을 목격했다.

11시 45분 스트라이드가 노동자 윌리엄 마샬에 의해 버너 스트리트에서 보이드 스트리트의 서쪽에 있는 64 버너 스트리트 입구에서 짧은 검은색 코트와 선원 모자를 쓴 남자와 키스를 하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목격되었다.

0시 35분 순경이었던 윌리엄 스미스는 버너 스트리트에서 스트라이드가 어두운 코트와 사냥모자를 착용한 28세 정도의 젊은 남성과 같이 있는 것을 목격했다.

0시 45분에는 이스라엘 슈바르츠(Israel Schwartz)라는 유대계 헝가리인이 "한 남성이 여성을 공격하는 것을 목격했는데, 그 남성은 30대 정도에 어두운 머리색, 갈색 수염이 있었고, 어깨 너비가 한 5피트 5인치(약 165 cm) 정도의 어두운 색깔의 재킷을 입었으며, 챙 달린 검은 모자를 썼다"라고 증언했다. 슈바르츠의 증언은 굉장히 중요하게 여겨지는데 스트라이드가 살해되었을 현장에서 남성이 여성을 공격하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슈바르츠에 의하면 자신이 길을 건너던 중 한 남성이 여성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길로 끌고 가려고 했고 이후 돌아서서 여성을 길거리에 집어던졌다고 한다. 여성은 작게 비명을 3번 질렀고 남성은 여성을 골목길 안으로 끌고 가면서 길 건너편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다른 남성을 향해 "립스키(Lipski)!"라고 소리를 질렀다.

이 립스키라는 소리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다. 립스키는 유대인의 성씨로도 쓰였고, 유대인을 비하하기 위한 목적의 호칭으로도 사용되었으며, 게다가 잭 더 리퍼 사건으로부터 1년 전에는 립스키라는 성씨의 유대인이 여성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한 적도 있다. 따라서 이는 여성을 공격하던 남성이 주변에 서 있는 슈바르츠를 포함한 유대인들에게 "여긴 더 볼 것이 없으니 꺼져라"라는 경고 내지는 모욕의 의미로 사용했을 수도 있다. 립스키라는 말을 들은 담배를 피우던 남성이 자신을 쫓아왔다는 슈바르츠의 증언을 감안한다면 여성을 공격한 남성과 담배를 피우던 남성은 공범 관계이고 유대인인 슈바르츠 자신을 쫓아내기 위해 고안한 그들만의 신호일 수도 있다. 잭 더 리퍼에 대한 책을 저술한 폴 베그의 주장에 의하면 "립스키"라는 외침은 잭 더 리퍼 본인이 담배를 피우던 남자에게 자신은 여성을 구하는 사람이고 슈바르츠야말로 여성을 공격한 유대인이라는 인상을 심어주는 데 사용했던 것일 수도 있다. 그게 사실이라면 당시의 반유대주의를 교묘하게 이용해서 목격자를 쫓아내 버린 범인의 지능적 책략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슈바르츠가 영어를 잘 못 하던 외국인인 것을 감안했을 때 슈바르츠가 들은 말이 과연 유대인을 모욕하는 욕설인 '립스키'일지는 확신할 수 없다"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슈바르츠는 "담배를 피우던 남성이 갑자기 내 쪽으로 걸어와서, 나는 도망쳤다"라고 경찰에 증언하였고 본인이 본 공격당한 여성이 살해당한 스트라이드가 맞다고도 확인하였지만 여성을 공격하던 남성과 자신과 같이 길 건너편에 있던 남성이 서로 아는 사이였는지는 모르겠다고 증언하였다. 경찰은 이 증언을 꽤 신빙성 있게 보았다. 실제로 슈바르츠의 증언이 사실이고 공격당한 여성이 스트라이드가 맞다면 슈바르츠는 잭 더 리퍼를 직접 목격한 거의 유일한 사람일 것이다.[25] 그러나 관심을 끌기 위한 목적으로 거짓 증언을 하거나 진범을 사칭한 편지들이 횡행하던 당시의 상황을 보았을 때 정말 슈바르츠의 증언이 사실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문제가 있다.

결국 1시 스트라이드는 보석 판매원 루이스 디엠슈츠에 의해 끝내 덧필드 야드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시신을 발견한 디엠슈츠의 증언에 의하면 자신의 이 무언가 낌새를 차렸는지 사건 현장으로 가지 않으려고 고집을 부렸고 처음엔 술에 취한 채 자고 있다고 믿었으나 근처의 클럽에서 아이작 코제브로드스키, 모리스 이글이라는 남성들과 함께 덧필드 야드로 돌아가 스트라이드의 시신을 찾아내 만졌을 때는 시신이 아직 식지 않은 상태였다. 말 그대로 스트라이드는 살해당한 직후에 발견된 셈이다. 피웅덩이 속에 누워 있던 시신의 목에는 칼에 찔린 상처가 발견되었으나 다른 신체 부위에는 비교적 상처가 없었다. 범인이 행인이 다가오는 것을 알고 몸을 피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한편 또 다른 피해자였던 캐서린 에도스는 그 전날인 9월 29일 저녁 8시에 술에 취한 채 길거리에서 자고 있다가 경찰에 의해 끌려가 유치장에 감금되었고 1시경에 풀려났다.

에도스는 술에 취한 채 알드게이트 하이 스트리트로 향해 듀크 스트리트 입구를 지나쳐 마이터 광장을 통해 플라워 앤 딘 스트리트로 돌아가려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에도스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것은 시신으로 발견되기 불과 10분 전인 01시 35분 무렵이었다. 남성 3명이 듀크 스트리트를 지나가다가 에도스를 보았는데 그들의 증언에 의하면 선원 복장을 입고 붉은 스카프를 맨 키가 5피트 7인치(170.2cm) 정도 되는 수염을 기른 남성과 대화 중이었다.

그리고 45분 순찰 중이던 에드워드 왓킨스 경관이 에도스의 시신을 발견하였다.

시신을 검시해 보니 신장이 없어졌고 귀가 잘렸으며 얼굴 주변에 상처가 있었고 하복부는 절개되어 있었다. 사건 장소 주변에서 피 묻은 에도스의 옷 조각이 발견되었고 근처에 있던 벽에는 누군가에 의해 " 유대인들이 아무 이유 없이 욕 먹는 게 아니다.(The Jewes are the men that will not be blamed for nothing)."[26]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하자 거리에는 인적이 끊겼고, 경찰들은 여장까지 해가면서 그를 찾기 위해 애썼지만, 반유대주의 폭동이 일어날 것을 염려한 찰스 워런 경은 필적 감정을 해도 모자를 중요한 단서인 'The Jewes are the men that will not be blamed for nothing'이라는 낙서를 지우라고 명령했다.

그 외에도 워런 경의 악행(?)은 계속되었는다. 사례를 들자면 무턱대고 거리에 개를 풀어서 범인을 잡으라고 시킨 것이다. 사냥할 때 개들이 사냥감을 쫓는 것을 떠올리고 내린 지시였겠지만, 개들이 범인의 냄새를 알아야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워런 경도 이 방법의 맹점은 알고 있었으나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개들을 동원한 것이다. 더블 이벤트 사건이 발생한 지 이틀 후 더 타임즈 지에 퍼시 린들레이(Percy Lindley)라는 블러드하운드 사육자가 올린 투고문이 올라왔는데 그 투고문에는 '개들을 동원해서라도 범인의 흔적을 찾아야 한다.'라는 주장이 실려 있었다. '만약 사건 현장에 범인의 냄새가 생생히 남아 있는 곳에 개가 투입되면 경찰이 놓쳐버린 범인을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더블 이벤트 사건 이후 다급해진 경시청은 일단 그 주장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워런 경도 아주 백치는 아니었던지라 린들레이에게 개가 사건현장에 도착하면 범인의 냄새만을 구별할 수 있는지, 만약 냄새를 찾더라도 수많은 시민이 오가는 런던 시내에서 어떻게 범인의 냄새만을 찾을 수 있는지 질의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발등에 불이 떨어진 입장이었던 워런 경과 경찰국은 블러드하운드를 범인 추적에 사용하기로 하였다.

그 결과 에드윈 브로우(Edwin Brough)라는 사육자가 데려온 바나비와 버고라는 이름의 블러드하운드 2마리가 투입되었다. 이 개들을 대상으로 하이드 파크 같은 공개적인 장소에서 추적 훈련이 실시되었는데, 한 번은 워런 경도 사냥감 역할을 맡으면서 개들을 훈련시키기도 했다. 블러드하운드 2마리가 주어진 환경에서 사람을 추적하는 능력은 꽤 괜찮았기에 워런 경도 만족을 표했다.

그러나 이것을 도그 쇼에 참가했거나 다른 주인에게 일시적으로 맡겨졌다가 훈련 중 길을 잃은 개들로 훈련을 시키는 것으로 오해한 언론들이 워런 경의 멍청함에 비난을 퍼부어댔고, 워런 경의 우유부단함과 겹쳐 개들은 활용될 기회를 잃은 채 그 뒤로 투입되는 일이 없었다. 이러한 해프닝은, 범인을 잡지 못한 경찰이 개들까지 동원할 정도로 절박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덤으로 10월 1일에 화이트채플 감시위원회(Whitechapel Vigilance Committee)의 위원장인 조지 러스크(George Lusk)에게 편지 1통이 도착했는데...

5.3.1. 지옥으로부터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FromHellLetter.jpg
원본 수정본[27] 번역본[28]
From hell

Mr Lusk

Sor
I send you half the
Kidne I took from one women
prasarved it for you tother pirce
I fried and ate it was very nise I
may send you the bloody knif that
took it out if you only wate a whil
longer.

signed
Catch me when
you Can
Mishter Lusk
From Hell

(to) Mr Lusk

Sir,
I send you half the Kidney I took from one woman. Preserved it for you.
The other piece, I fried and ate. It was very nice.
I may send you the bloody knife that took it out if you only wait a while longer.

Signed
Catch me when you can, Mister Lusk
지옥으로부터

러스크 씨

슨생
내가 한 여자에게헌티서 꺼낸 신쟝의
반을 당신 앞으로 보내오
당신을 위해 냄겨놨지 나머지 반은
나가 꾸버먹었는데 아주 마싯섯서
조금만 더 기달려 주며는 이걸 꺼낼 때 쓴
피믙은 카ㄹ도 당신 앞으로 보내드리리다.

서명
잡을 수 있게
되면 잡아보시오
러스크 선상
편지가 사람들의 공포심을 더욱 키웠는데 이 ' 지옥으로부터(From Hell, 프롬 헬)' 온 편지에는 실제로 콩팥 반쪽이 동봉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신장이 진짜로 에도우즈의 것인지에 대해서는 당대의 의사들 사이에서도 논쟁거리였다. 동봉된 신장이 여러모로 인간 여성의 것, 과음한 흔적, 적어도 3주 전에 죽은 사람의 것임을 밝히는 정황은 많았으나 남아있는 에도우즈의 완벽히 건강한 오른쪽 신장과는 너무 큰 차이를 보였기 때문이었다. 많은 경찰들과 의사들은 편지에 동봉된 신장에 대해 "신장을 쉽게 구할 수 있는 의대생의 장난일 수도 있다"라고 생각했다. 결국 지금까지도 이 편지와 신장이 에도우즈 살해 사건의 진범이 보낸 것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오늘날까지 동봉된 신장이 남아있다면 DNA를 체취해 대조해 볼 수 있겠지만 당시는 과학 수사기법이 없었고, 기록물 보관이란 개념도 희박하던 시기인데다 시간이 흘러 영국 본토 항공전이 터지는 바람에 런던 경찰국이 독일 폭격기의 공습을 맞으며 증거물 대부분이 소실되어 버렸고 현재는 사본으로만 남아있다.

5.4. 마지막 사건: 1888년 11월 9일

1888년 11월 9일, 메리 제인 켈리(Mary Jane Kelly, 25세)라는 매춘부가 자신의 거주지인 도르셋 가 밀러스 코트에서 살해당했다.[29] 우연인지, 범인이 노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날은 빅토리아 여왕의 장남인 에드워드 왕세자의 생일이었다.
참고로 도르셋 가는 런던 내 최악의 우범지대 중 하나였다. 잭 더 리퍼 때문에 켈리도 불안감에 한동안 계속 집에 있었으나, 돈이 궁했던 데다가 집세 29실링이 6주 동안 밀려 있어서 다시 매춘을 하다가 집에서 살해당했다. 켈리가 살았던 밀러스 코트 13번지는 요즘으로 말하면 원룸텔 내지는 고시원 같은 곳이었다. 3명이 들어가면 꽉 차는 정도의 넓이의 방에 가구는 탁자에 의자, 난로와 침대가 전부였다. 당시 하층민의 생활 수준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켈리의 이웃이었던 매춘부 메리 앤 콕스의 증언에 의하면 "켈리가 살해되기 전 날인 11월 8일 밤 23시 45분경 켈리가 35~36세 정도의 키가 5피트 5인치의 남성과 같이 집으로 들어왔고, 1시경까지 계속 노래를 불러댔다"라고 한다.

오전 12시 30분 켈리 근처에 살던 장수 캐서린 피켓 부인은 켈리의 노래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남편은 캐서린 피켓 부인이 이에 불평하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려는 것을 "불쌍한 여자인데 그냥 내버려 두구려"라고 말하면서 막았다.

하지만 밀러스 코트 1층에 살던 줄리아 벤터니는 "오후 8시쯤 침대에 누웠으나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오전 1시 켈리의 윗방에 살던[30] 엘리자베스 프레이터는 밀러스 코트 입구에서 30분 가량 서있다가 집으로 돌아갔는데, 이때 프레이터는 "노랫소리를 듣지 못했고 아무도 밀러스 코트를 드나들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켈리의 노래가 1시 30분에 그쳤고, 이때 켈리는 외출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전 2시경 플라워 앤 딘 스트리트에서 커머셜 거리 하숙집 거주자인 조지 허친슨은 6펜스만 빌려달라 요구하는 켈리를 마주쳤다. 마침 허친슨은 롬포드에서 막 돌아왔기에 돈이 없었고, 결국 켈리는 스웰 스트리트 방향으로 되돌아가 걸어갔다.

콕스는 "3시경에 켈리의 방에서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고, 빛도 새어나오지 않았다"라고 증언했다.

4시경 프레이터는 자신이 기르던 고양이가 자신의 목을 밟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났고, 직후 "살인이야!"라는 비명을 들었지만 그런 외침은 이스트엔드 지역에서는 흔했기 때문에 무시했다. 같은 시간, 밀러스 코트에서 친구들과 함께 지내던 사라 루이스도 그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프레이터는 5시 45분경에 누군가 밀러스 코트를 빠져나가는 소리를 들었지만 당시에는 별 의심을 하지 않았었다.

오전 10시 45분 토마스 보우어(Thomas Bowyer)는 고용주 존 매카시(John McCarthy)의 지시에 따라 켈리에게서 6주 동안 밀린 집세 29실링을 받기 위해 켈리의 방을 찾아가 문을 두드렸는데, 아무 대답이 없어서 깨진 창문 틈으로 방 안을 들여다 보았더니 처참하게 난도질당한 채 침대에 누운 켈리의 시신이 있었다. 켈리의 얼굴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살점이 잘려나갔다. 얼굴 훼손이 심하여 켈리의 동거인이자 애인이었던 조세프 바넷(Joseph Barnett)[31]이 눈과 귀, 머리 색으로 간신히 신원 확인을 해줄 수 있었을 정도였다. 오른쪽 대퇴부와 두 유방이 모두 잘려나갔으며 뱃속의 자궁, 신장, 간, 내장, 비장[32] 등이 적출되어 주변에 널렸을 뿐만 아니라 심장은 사라져서 찾을 수조차 없었다. 당시 켈리가 임신해 있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으나, 공식 부검 결과와 의사 토머스 본드(Thomas Bond)의 현장 검시 문건에 의하면 임신에 대한 언급은 없다.

앞서 잭 더 리퍼에게 살해당한 다른 4명의 시신도 심하게 훼손되었지만 켈리는 특히 그 훼손 정도가 심각했는데, 이는 범인이 실외가 아닌 실내에서 홀로 작업할 시간이 충분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오전 8시 30분 캐롤라인 맥스웰이라는 여자는 이때 켈리를 보았다고 주장했는데, 켈리와 자신의 의상을 심도 있게 설명했고 켈리를 잘 알지 못한다는 점은 인정했으나 날짜는 틀리지 않았다고 단호하게 진술했다.

범행 시간은 토머스 본드(Thomas Bond)[33]의 추정 결과 새벽 2시에서 8시 사이였고, 2번째 피해자인 채프먼을 검시한 적 있는 조지 백스터는 '적어도 이 훼손이 2시간은 걸렸을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한편 오전 11시쯤 사건 현장에 도착한 경찰들은 2시간이 걸려서야 문을 부수고 켈리의 방으로 들어갔는데, 이는 워런 경이 개들을 사건 현장에 투입하려면 아무도 이전에 사건 현장을 건드리지 말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일선 경찰들과 경찰국 간의 의사소통의 부재가 빚어낸 해프닝으로, 켈리가 살해되기 직전에 워런 경은 사임했으며 개들은 투입되지 않기로 되어 있었다. 결국 경찰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무능했다.

이후 모든 영국 국민들이 공포를 넘어 분노했고 빅토리아 여왕은 "반드시 그를 잡으라."라는 어명까지 내렸다.

그러나 그는 끝내 붙잡히지 않고 모습을 감춘 채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6. 범행의 공통점

희생자는 모두 매춘부였고 범행장소는 공공장소 혹은 그에 가까운 장소 등 야경꾼이나 행인이 지나갈 수 있는 장소가 많았다. 범인의 대담성과 계획성을 보여주는 부분이며 때문에 범인의 대략적인 인상을 말한 증인도 있다. 이로 보아 매춘을 매우 혐오하는 기독교 윤리에 충실했던 자로 추정된다.

살해 수법의 특징은 칼로 살해한 후 외과 수술용 칼 같은 예리한 날붙이로 시신을 해부했다는 점이다. 이래서 널리 알려진 이름이 Jack the Ripper였다. 직접적인 사인은 대개 목에 가해진 자상 또는 교살이었고, 주로 훼손된 부분은 복부와 내장, 얼굴이었다. 이런 범죄치고는 특이하게도 무릎을 꼭 붙인 채 사망한 희생자도 있었다. 여성의 생식기를 절개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범인이 일반적인 성행위에는 흥미가 없었음을 보여주는 사실이다.

해부학 지식이 상당했던 듯하다. 한밤중에 조명도 없는 곳에서 캐서린 에도우즈의 신장을 적출했다는 점, 게다가 신장은 막으로 가려져 보이지 않는데도 적출해냈다는 점에서 부검의들 일부는 '범인이 상당한 외과적 기술이 있는 것이 아닐까.' 추측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범인이 해부학적 지식이 있는 의사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는데 한편으론 "전문 의사의 솜씨로 보기에는 조금 조잡하다"라며 "(그 당시에) 취미 생활로 사냥과 사냥감 해체를 자주하던 상류층 남성"이라는 반론도 있었다. 반대로 조금 조잡하긴 해도 사냥감 해체만 반복하는 상류층 남성의 솜씨라기엔 너무 뛰어나다는 반론도 있다. 당시 한밤중이었고 제대로 된 조명시설이 없던 시절임을 감안하고 짧은 시간 안에 시체훼손을 해야하기에 다소 난잡하게 일을 진행시켜야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던 것도 존재한다. 조금 조잡하긴 해도 여전히 일반인보다는 아득히 높다는 의견이다. 결국 두 의견들은 계속 돌고 돌게 된다.

캐서린 에도우즈가 살해되기 직전에 에도우즈를 목격한 증인(조지 허드슨)[34]의 말에 따르면 "상당히 깔끔하고 번듯해 보이는 차림[35]의 남자와 대화하고 있었다."라고 한다. 이 자와 만나고 얼마 지나 캐서린의 시체가 발견되었으므로 이 자가 바로 잭 더 리퍼일 가능성이 높으며, 상류층 출신일 가능성도 높다.

정신에 상당한 문제가 있는 자였다는 것도 분명해 보이는데 그의 범행은 일반적인 살인자와 달리 증거를 많이 노출한 데다 너무나 참혹하고 잔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잭 더 리퍼가 '매춘부', 더 나아가 '여성'이라는 존재에 비정상적인 증오를 품은 인간이 아닌가 하는 분석도 나왔다.

여기에 모든 범행이 주말에만 벌어졌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메리 앤 니콜스와 메리 제인 켈리는 금요일 새벽, 애니 채프먼은 토요일, 스트라이드와 에도우즈는 일요일에 살해당하였다. 이로 추정했을 때 범인은 안정된 일을 하는 사람이거나,[36] 주말만을 노려 범행을 저질렀다고 볼 수 있었다.

7. 잭 더 리퍼의 범행으로 인정되지 않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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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용의자

어떤 사람이 그인지 모르기 때문에 다양한 인물이 용의자로 올라갔다. 용의자로 오른 인물은 의사부터 공작 나으리까지 다채롭고 그 외에도 작가 루이스 캐럴, 화가 월터 시콧 등 다양한 인물들이 용의자 후보로 올라와 있다. 더 알고 싶으면 영어 위키백과의 잭 더 리퍼 용의자 항목을 참조하자. 그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잭 더 리퍼 용의자로 지목되어 곤욕을 치렀으며 " 영국인이 이런 짓을 할 리가 없다"라며 유대인과 외국인이 의심받기도 했다.

역사 기록을 바탕으로 제작된 몽타주가 공개되었지만 기록이 오래되었고 목격자도 거의 없어서 크게 신빙성은 없다. 몽타주가 또 바뀌었다. 용의선상에 오른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8.1. 에런 코즈민스키

당시 잭 더 리퍼를 추적하던 로버트 앤더슨(Robert Anderson)은 어떤 폴란드 유대인을 유력 용의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앤더슨이 유대인이란 이유로 그를 체포하지 않았기 때문에 코즈민스키(Kosminski)는 도널드 스원슨(Donald Swanson) 경감 사후에 남겨진 메모를 통해 용의자로 떠오르게 되었다. 링크

스원슨과 앤더슨은 용의자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밝히지 않았으나 많은 사람들은 스원슨과 앤더슨이 언급한 이 용의자를 폴란드 출신 미용사 에런 코즈민스키(Aaron Kosminski)로 추정하고 있다.[37]

앤더슨은 유일하게 범인의 얼굴을 본 목격자[38]가 "에런이 범인이 맞다"라고 지목했다고 주장했으며 결정적으로 애런이 정신병원에 수감된 후부터 잭 더 리퍼가 사라졌다.

이는 이견이 있을 수 있는 게, 에런이 수감된 것은 1891년이며 잭 더 리퍼의 범행으로 확실시되는 범행은 1888년 8-11월의 범행이기 때문이다. 당시 화이트채플의 여성 연쇄 살인은 1891년을 마지막으로 끊긴 것은 맞으나 마지막 케이스인 1891년의 프란시스 콜 살인 이전 벌어진 살인은 1889년 9월 10일 발견된 이름 모를 여성의 훼손된 몸통이 끝이었으며 시간적 간극을 보면 잭 더 리퍼와의 연관성이 높진 않다. 코즈민스키가 수감된 1891년과 연쇄살인이 종료된 시점은 들어맞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이 모든 것은 앤더슨 개인이 주장한 사실일 뿐이며 결국 코즈민스키가 진범이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없다.

사건으로부터 126년이 지난 2014년에 DNA 감식을 통해 범인이 에런 코즈민스키라는 결과가 나왔다. 캐서린 에도우즈가 둘렀던 숄이 경매에 올라왔는데 이 숄에 남은 DNA를 분석해 코즈민스키의 후손과 대조해 본 결과 일치했다는 것이다. 관련기사(영문) 그러나 법의학계에서 진범을 가리는 데 결정적인 증거가 되는 핵 DNA가 아닌 상대적으로 특이도가 낮은 미토콘드리아 DNA를 추출해 대조해 본 것이기 때문에 DNA 서열이 서로 유사한 사람이 여러 명 있을 수 있는 만큼 아직까진 신빙성을 장담할 수 없다.[39]

그리고 과학자들이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버렸으므로 해당 DNA에 일부 문제가 발생했다"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증거로서 불충분하다"라는 반론을 낸 만큼 영원히 진범은 밝혀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관련기사(영문)

그렇지만 그 DNA를 증거로 제시한 에드워드에 말에 따르면 에런 코스민스키가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될 당시 살해 현장에서 20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던 것과 그가 신체를 노출하거나 성도착증세를 갖고 있었던 점, 에런이 정신병원에 수용된 시기가 잭 더 리퍼의 범행이 끝난 시기와 어느 정도 일치한다는 정황증거도 있다.[40]

일단 에런 코즈민스키의 후손의 DNA를 분석한 것으로 보아 다른 용의자들의 후손들도 아직 살아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진범이 나올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다는 점은 보여준 점에서는 의미도 있다.

1988년 잭 더 리퍼 사건 100주년 기념으로 방영한 <살인광 잭의 숨겨진 정체>라는 방송에서 FBI 유명 프로파일러 존 더글러스[41]는 다음과 같이 추론했다.
경찰에게 보낸 편지는 범인이 보낸 것이 아니다. 이런 유형의 인물은 경찰에 노골적으로 도전할 인물이 되지 못 한다. 시체를 끔찍하게 훼손했다는 것은, 정신 장애와 섹스 부적응 등의 문제가 결합하여 여자들에게 엄청나게 적개심을 느끼고 있는 인물임을 보여준다. 또한 여자를 전격적으로 해치웠다는 것은 범인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부적응의 문제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점을 보면 말더듬이 등 언어 구사가 부자연스러운 자일 가능성이 크다. 범죄 현장을 살펴보면 창녀의 환경 속에 잘 어울려 창녀의 의심이나 공포를 자아내지 않는 자이다. 외로운 늑대 유형이지 힘센 학살자 유형은 아니다. 밤마다 거리를 배회하며 살해 현장으로 되돌아올 그런 유형이다.
런던 경찰은 이 범인을 이미 조사했을 것이다. 단지 그가 범인인 줄 몰랐던 것이다. 살해 후의 시체 훼손 때문에 의학 지식이 있는 자라는 의견이 있지만, 그 훼손 행위는 지극히 원시적이고 야만적이다.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연쇄살인범이 피살자를 제멋대로 해부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에드 게인, 에드 켐퍼, 제프리 다머, 리처드 마켓 등은 의학 지식이 하나도 없었지만 끔찍하게 시체를 제멋대로 훼손했다.
우리에게 제시된 여러 후보 중 에런 코스민스키가 가장 프로파일에 부합한다. 그러나 코즈민스키는 우리에게 제시된 용의자들 중의 한 사람일 뿐이며, 그를 잭 더 리퍼라고 확신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하지만 잭 더 리퍼가 코즈민스키와 '유사한' 인물이라는 점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범죄심리학과 유명 교수인 데이비드 캔터도 유력 용의자 코즈민스키의 거주지가 살인사건이 발생한 장소를 원으로 그릴 경우 중앙에 위치하다는 사실을 말하며 코즈민스키를 지목했다.

일단 정황증거와 프로파일러의 설명까지 전부 분석해 보면 지금으로서는 코즈민스키가 꽤 유력한 후보인 것은 맞다.

8.2. 몬터규 존 드루이트

잭 더 리퍼의 수사를 담당한 멜빌 맥노튼 경은 3명의 용의자[42]를 지목했는데 그 중 가장 유력한 용의자가 바로 몬터규 존 드루이트다.

그는 사건이 시작된 곳 근처에 살던 변호사였으며 의사가 아니지만 의학취미였고 친척이 운영하던 병원도 있었으며 후에 자살했다. 그가 자살한 후 경찰은 수사를 종료[43]했으나 정확히 그가 범인이라고 단정하기에는 미심쩍은 점도 많다. 관련 내용은 영어 위키백과 Montague Druitt 문서 참고.

8.3. 조세프 바넷

5번째 희생자 메리 제인 켈리의 애인이었던 남성. 한때 메리 제인 켈리와 동거도 하는 사이였으나 둘은 생활고 때문에 별거를 하기 시작했고, 켈리가 매춘을 시작하자 바넷은 매춘을 하는 그녀를 매우 싫어했다고 하며 켈리가 사망하기 전날 바넷과 켈리가 함께 말싸움을 했다는 증언도 있다.

가장 크게 의심 받는 것은 살인 사건 당시 메리 제인 켈리의 방문이 잠겨 있었고, 그녀의 집 문은 안에서 열어야 하는 구조였다.[44] 살인범은 이를 아는 사람이었을 테고, 켈리의 방 상태를 보면 침입자가 아니라 켈리가 집으로 초대한 사람에게 살해당했을 확률이 높아 의심을 받고 있다.

다만 켈리를 살해하였지만 이전 사건들의 살인범은 아니고 그저 잭 더 리퍼를 모방하여 범죄를 저질렀다는 가설도 있다.

8.4. 찰스 크로스

첫 번째 희생자 메리 앤 니콜스의 시체를 처음 발견한 것으로 알려진 남자.

니콜스의 시체를 제일 먼저 발견하고 옆에 지나가던 로버트 파울과 시체를 발견한 크로스를 만나 같이 경찰에 신고했다는데 사실은 크로스가 직접 니콜스를 살인했지만 파울의 발소리를 듣고 마치 자신이 시체를 발견한 것처럼 위장했다는 가설이다. 당시에는 그저 경찰과 언론에게는 목격자로 여겨졌지만 현대에 들어와서는 용의자로 평가받는다.

게다가 모든 희생자들이 크로스의 출근길과 비슷한 경로에 살해당했다는 새로운 가설이 등장했다. 그리고 공식 수사에는 이름이 찰스 크로스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그것은 그의 본명이 아닐 확률이 높다. "크로스" 성은 의붓아버지의 이름을 따 온 것이고 본명은 찰스 레츠미어라는 것이다.

8.5. 앨버트 왕자

빅토리아 여왕의 손자이자 에드워드 7세의 장남인 앨버트 왕자와 관련되어 있다는 설도 있다. 왕자가 매독으로 미쳐서 매춘부를 살해한 것이라는 루머와[45] 앨버트 왕자가 매춘부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가졌는데 여자가 가톨릭이고 앨버트도 가톨릭으로 개종하려고 했기 때문에 빅토리아 여왕이 이 사실을 은폐하고 왕실을 지키기 위해 프리메이슨을 동원해서 매춘부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4명을 죽이게 했다는 루머도 있다. 나이트라는 작가가 화가 월터 시콧과 살해된 매춘부의 딸 사이에 나온 남자에게 증언을 들었다는 게 증거인데… 몇 년 뒤 자기가 다 꾸며낸 일이라고 실토했다.

만화 < 프롬 헬>, 1979년 영화 <살인 지령(Murder By Decree)>[46] 등의 모태가 바로 왕자의 음모설이다. 여기다 프리메이슨까지 결합해서 나름 무적의 가설이 나왔다.

문제는 영국 왕실은 절대로 중혼을 인정하지 않았고 왕가의 허가 없는 결혼을 인정하지 않아서 앨버트 왕자가 무슨 일을 해도 별 문제는 없었다는 것이다.[47] 굳이 살인까지 벌여서 입을 막을 필요는 없었다.

8.6. 월터 시콧

앨버트 왕자를 지목한 월터 시콧도 범죄 소설 작가 패트리샤 콘웰에 의해서 살인자 잭이라는 의심을 받았다. 그에게 유년기의 트라우마가 있어서 성적 충동으로 인한 살인동기가 있으리라는 점, 그가 남긴 작품 중에 섬뜩한 그림이 다수 있으며, 필적이 살인자 잭의 편지와 흡사한 데다 편지지 역시도 살인자 잭의 것과 같은 회사의 갈은 묶음이라는 것이 근거인데 이를 반박하는 증거도 많기 때문에 논란이 많다. NGC <세기의 미스터리 - 전설의 연쇄 살인마>(원제: IT IS REAL? JACK THE RIPPER)에서 이 설을 중점적으로 다뤘다.

8.7. 토머스 닐 크림

동시대의 살인 의사 토머스 닐 크림은 처형되기 전에 자신이 잭 더 리퍼라고 주장했다. 다만 그가 교수대에 매달리는 순간 주장해서 미처 말을 다 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크림은 피해자들을 비소로 독살했기 때문에 신빙성이 떨어지는 주장이다.

8.8. 질 더 리퍼

어쩌면 여자일지 모른다는 주장도 있다. 소위 '(Jill. '잭'과 비슷하게 쓰이는 여자 이름) 더 리퍼' 음모론.

만약 살인마가 여자였으면 매춘부 여성들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었을 것이으며 조산사는 당시 흔한 직업이었는데 조산사였으면 해부학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테고 피가 묻은 옷을 입고 다녀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 1890년 12월 처형되었던 정신이 온전치 못했던 산파 메리 피어시(Mery Pearcy)가 범인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메리 피어시는 애인의 아내와 그 자녀의 목을 잘라 살해한 살인 범죄자였는데 그녀가 사건 당시 이스트엔드에 거주했다는 일부 기록등을 토대로 몇몇의 사람들은 피어시가 질 더 리퍼이며 매춘부 5명을 잔혹하게 살해한 범인이라고 주장한다.

엠마 스미스 살인사건 당시 핑거즈 프레디라는 남성과 엮여 떠돌던 소문[48]도 질 더 리퍼가 범인이라는 주장의 근거가 되었다.

8.9. 프랜시스 텀블티

아일랜드 태생의 미국인 사기범이다.

무허가 의료행위를 하는 의사, 소위 돌팔이로서의 사기 전적을 가진 인물로서 미국에서는 군 장교로 위장하는 등 다른 사기 전적으로도 악명이 높았으며 미국과 캐나다에 걸쳐 "인디언 허브"의사로 일하면서 돈을 벌었지만 마찬가지로 모두 사기극에 지나지 않았다.

9. 영향

살인마 본인의 본의는 아니었겠지만, 의외의 영향으로 화이트채플 빈민가의 비참한 삶의 모습이 온 세상에 알려지며 빈민구제의 계기가 되었다. 이를 두고 조지 버나드 쇼는 " 그는 어떤 사회개혁가보다도 화이트채플 빈민가의 비참한 삶을 널리 알렸다."라고 평했다. 그를 사칭하거나 그의 범죄 수법을 따라하는 모방범죄가 극심하게 발생하다보니 화이트채플에서는 위에 언급된 살인 외에도 다수의 살인사건이 일어났는데, 그의 정체를 밝혀내려는 연구가들의 노력 덕분에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과학 추리가 크게 발전했다. 아무나 잭 더 리퍼가 되는 것은 아닌지 대부분은 잡혀서 교수대 위로 올라갔으며 정말 정상참작이 되고 또 되어야 종신형을 선고받을 수 있었다.

시민들이 보낸 어처구니없는 조언이 들어 있거나 범인을 사칭한 편지들이 경찰과 언론사에 쏟아졌고, 선정적인 언론은 연쇄살인자에게 별명을 붙이기 시작해 리퍼와 비슷한 범죄를 저지르는 연쇄살인자들에게는 'XXX의 리퍼'라는 별명이 붙었다. 대표적으로 리스본 리퍼, 요크셔 리퍼 등을 들 수 있다. 또 이 살인범이 언론에 편지를 보낸 후 조디악 킬러같은 연쇄살인범들이 이를 따라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니면 사형 판결을 받은 살인자들 중에서도 그와 살인 수법이 비슷한 자들 중심으로, 자신이 잭 더 리퍼임을 주장하면서 사형 집행을 연기시키려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들 모두 잭 더 리퍼가 아님이 드러나 곧바로 처형되었는데 사형이 집행될 때도 "내가 잭 더 리퍼다"라고 외치고 죽은 자도 있었다고.

결국 사건이 미제로 종결되며 범인을 특정하려는 노력에 빅토리아 시대 후기 사회사와 인물사 연구를 곁들인 리퍼학(ripperology)까지 생겨났다. 미제사건이라는 점이 오히려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이다. 이후 여러 차례 만화, 뮤지컬, 영화, 게임 등에서 이야기 소재로 쓰이면서 사건 자체가 하나의 산업이 되었다.[49][50] 지능범이 경찰과 언론을 농락하고 끊임없이 사람을 죽이면서도 결코 잡히지 않는다는, 미제사건을 다루는 고전적인 플롯은 이 사건을 모방한 것이며 리퍼라는 말 자체가 살인자를 의미하는 고유명사가 되었을 정도이고 동시대와 다음 세기의 살인자들에게까지 영감을 제공했다.

오죽하면 잭 더 리퍼 사건 이후 칼로 해체하거나 찌르는 형태를 주로 보이는 연쇄살인자들은 "리퍼형 연쇄살인자"로 분류되었다. 오늘날 발생하는 리퍼형 연쇄살인은 사건이 발생한 지역과 국가의 사회 구조, 산업 구조, 복지 정책 등을 가늠하는 지표로서 연구된다.[51]

10.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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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더 리퍼. 죽음의 유령. 우리는 그가 정말로 누구였는지 모르고, 아마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앞으로 수백 년 간, 그가 누구인지 추측하고 궁금해할 것이다."
- 잭 더 리퍼를 다룬 다큐멘터리인 'Jack the Ripper Phantom of Death'의 마무리 멘트. 대중매체에서 잭 더 리퍼를 자주 다루는 이유를 한 문장으로 집약했다.

잭 더 리퍼는 엄청나게 유명한 연쇄살인마이므로 대중매체에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잭 더 리퍼의 정체를 알아도 세상에 공개하는 엔딩은 별로 없다. 실제 역사에서 잭 더 리퍼의 정체를 누구도 알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느 놈인지 알아야 잡아서 심판을 내릴 텐데 누구인지 모르니 그럴 수 없다.

10.1. 셜록 홈즈 vs 잭 더 리퍼

"셜록 홈즈가 실존하는 위대한 명탐정이라면, 어째서 그는 그 시대의 가장 유명한 범죄자인 잭 더 리퍼를 잡지 못했는가?"

셜록 홈즈 시리즈 셜록 홈즈의 위대함을 지나치게 찬양하는 악성 셜로키언들을 비웃는 사람들이 자주 던지는 질문. 잭 더 리퍼가 나타났던 19세기 말엽은 셜록 홈즈 시리즈 시리즈의 실제 작가인 아서 코난 도일이 살던 때이며, 작중 셜록 홈즈의 활동 시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서 코난 도일은 그를 소설에 등장시키지 않았다.

영국 경찰이 잭 더 리퍼가 하도 안 잡히다 보니 실제로 코난 도일에게도 의뢰를 했지만, 그래도 잡지 못했다는 말이 있다. 사실이라면 자신도 잡지 못 한 인물을 언급하고 싶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또 만약 홈즈 소설에 잭 더 리퍼가 등장하고, 홈즈가 특정인을 잭 더 리퍼로 추리했다가 다른 놈이 잭 더 리퍼라고 밝혀지면 홈즈는 놈에게 속아넘어간 허당 탐정이 되고 만다. 이런 걸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므로 코난 도일의 처사는 매우 현명했다.

그뿐만 아니라 윤리적으로 봐도 이게 옳은 것이, 실시간으로 피해자가 생기는 사건을 책 인기 끌자고 넣었다가 유족들에게 어떤 상처를 줄 지 생각해보면 설령 범인이 잡혀 정체가 드러났다고 할지라도 넣지 않는 것이 옳은 결정이다.[52] 셜록 홈즈 시리즈의 추리 콘셉트에는 연쇄살인자라는 소재가 맞지 않기 때문에[53] 작품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넣지 않은 것이 현명한 결정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아서 코난 도일 본인은, 인터뷰에서 잭 더 리퍼의 정체에 대해 추리했다. 아서 코난 도일은 잭 더 리퍼가 보낸 편지에 fix it up 등 영국에서는 쓰이지 않는 표현이 많아 그런 말들이 자주 쓰이는 미국 출신이거나, 미국에서 살던 사람일 것이라 추리했고 미국과 영국의 신문사에 잭 더 리퍼의 편지를 공개해서, 그 필체를 아는 사람들의 제보를 통해 추적해야 된다고 얘기했다. 또한 정체를 숨기기 위해 여장을 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에든버러 병원의 외과 전문의이자 에든버러 의학대학의 병리학 교수로, 셜록 홈즈의 모델이 된 조지프 벨도 경찰에 잭 더 리퍼의 분석을 제공한 적이 있다.

이후에 셜록 홈즈와 잭 더 리퍼의 대결을 그린 작품은 매우 많지만 실제로 잭 더 리퍼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홈즈가 작중에서 그의 정체를 알아내더라도 여러 가지 사정으로 범인을 명기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소설 내 셜록 홈즈 최고의 적인 모리어티 교수와 잭 더 리퍼가 한편으로 나오는 경우도 종종 있다.
  • The Last Sherlock Holmes Story: Michael Dibdin이 쓴 소설[54] 셜록 홈즈 자신이 오랜 스트레스 끝에 광증이 발생해 직접 잭 더 리퍼가 되었고 진실을 알게 된 왓슨이 친구인 아서 코난 도일에게 자신의 기록을 전달하여 책이 나오게 된 것으로 묘사한 내용도 있다! 심지어 마지막에 모든 진실을 받아들인 홈즈가 라이헨바흐 폭포에서 떨어져 자살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난다! 작가는 프랑스 추리소설 대상과 골드 대거상을 수상한 만큼 청소년용 도서에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필력은 꽤 우수하지만 내용 전개가 전개다 보니... 서양 셜로키언들의 별점 테러를 맞는 작품.
  • 명탐정 코난 - 베이커가의 망령: 아서 코난 도일이 제시한 여장남자설을 채용했다. 추가로 제임스 모리어티가 관련되어 처음에는 빈민가를 떠돌던 잭을 모리어티 교수가 거두어 킬러로 길렀다. 처음에는 어느 정도 제어되곤 있었으나 얼마가지 않아 모리어티도 제어 할 수 없는 미치광이 살인마가 되고 말았으며, 여성들이 연쇄적으로 살해된 사건들 모두 잭이 멋대로 벌인 사건이다.
  • 미스터 잭: 잭이 수사관들 중 하나로 변장하고 있다는 설정이 있기 때문에 실제로 " 셜록 홈즈가 잭으로 밝혀지는 경우"도 발생한다. 속편인 '미스터 잭 인 뉴욕'이 나온 걸 보니, 결국 셜록 홈즈조차도 잭 더 리퍼를 못 잡은 것으로 보인다.
  • 베이커 가의 셜록 홈즈: 베어링굴드가 지은 셜록 홈즈 가상 전기로 잭 더 리퍼의 정체가 네 개의 서명에 등장한 경찰인 존스 경감이었고 홈즈와 왓슨이 존스를 붙잡았지만 경찰의 명예를 위해 극비에 부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여기서 홈즈는 왓슨의 안전을 위해 절대 자신의 뒤를 따라오지 않게 약속한 뒤, 매춘부로 위장하고 직접 미끼노릇을 했다가 위험한 상황을 맞이하는데, 때맞춰 등장한 왓슨이 구해 준다. 고맙지만 약속을 어긴 것 아니냐고 하는 홈즈에게 '자네 뒤를 따라가진 않았네. 난 존스의 뒤를 밟았지.' 라고 대답해준다.
  • 살인 지령(Murder by decree): 크리스토퍼 플러머가 홈즈 역을, 제임스 메이슨이 왓슨 역을 맡은 1979년 영화로 범행의 배후가 왕세손 앨버트 왕자임을 알게 된 셜록 홈즈 영국 총리와 정치적 타협을 하여 왕자의 정신병원 평생 감금, 총리가 사임하는 조건으로 이 일을 비밀에 부치기로 한 것으로 나온다. 영화소개 1986년 KBS 명화극장을 통해 한국에 방영된 적이 있다. 셜록 홈즈 영화 중에서도 평가가 좋은 편.
  • 셜록: 재밌게도 그의 이름이 시즌 3 1화에서 언급되기도 했다.

11. 기타

  • 안일한 수사로 잭 더 리퍼의 검거 실패에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 찰스 워런 경은 나중에 보어 전쟁에 장군으로서 참전해 스피온 콥 전투에서도 살인자 잭 사건 때와 같은 안일한 작전으로 영국군의 엄청난 참패를 초래했다. 이때 젊은 종군기자 한 사람이 "상황이 안 좋은데 뭐라도 하셔야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는데 그의 말에 발끈한 워런은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오. 이 사람을 당장 끌어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쫓겨난 이 종군기자는 워런 경의 실책을 낱낱이 고발했고 이로써 워런 경은 왕립군사학교가 배출한 최악의 인재라는 악명을 얻게 된다.[55]

    결국 비난 속에 1905년 한직으로 전출되었다가 1908년 사임하며 은퇴했는데 이후에도 영국 귀족계에서도 비웃음을 당했고 워런 본인도 이런 비난에 시달리던 걸 신경쓰며 자서전이랍시고 책을 쓰며 자기 변명이나 하다가 보이스카우트 운동에 나서기도 했지만 기록을 보면 1921년 친척에게 "거리를 지나가면 사람들은 나를 손가락질하며 비웃는다"라고 할 정도로 영국에서 욕을 두고두고 먹었는데 그 때문인지 1927년 86세로 죽을 때까지 오래오래 살았다. 오래 살다 보니 그 기자가 자기처럼 삽질하는 것도 보았지만, 그 기자 특이한 물건을 만들어서 영국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하게 만들었고 40년대 영국의 불굴의 상징이 되었기에 워런처럼 욕만 먹는 신세로 전락하지 않았다. 영어 위키백과 문서
  • 그가 연쇄살인범으로 전 세계적인 유명세를 타게 된 배경에는 영국 문맹 탈출과도 연관이 있다. 영국은 1880년 초등 교육법을 제정해 모든 아동들의 학교 출석을 의무화했다. 덕분에 사건이 일어난 1888년 당시 영국 노동 계급 사람들도 글을 읽을 수 있었고 마침 세금 개혁으로 신문이나 출판도 매우 저렴해져서 대중들은 잭 더 리퍼가 실린 신문이나 잡지를 보며 열광했다. 열기가 절정일 때는 잭 더 리퍼 관련 글이 실리면 기본 100만 부 이상씩 팔려나갔다. 이 때문에 언론들은 돈벌이에 혈안이 되어 온갖 선정적인 내용과 거짓 정보를 뿌려댔다. 잭 더 리퍼에 대한 카더라 썰이나 음모론도 대부분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 이 자의 이름을 딴 해킹툴인 john the ripper가 있다.


[1] Reaper가 아니다. '찢는 자'라는 뜻의 Ripper지만 발음도 그렇고, 연쇄살인마이기 때문에 Reaper라고 해도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2] 사건이 일어난게 19세기 말인 1888년이고 18세기 출생이라면 최소 88세 이상이기에 19세기 출생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3] 잭 더 리퍼의 무기로 밝혀졌다. 링크 [4] 5명 모두 매춘을 하면서 살았다는 것이 가장 널리 알려진 가설이지만 이들 중 매춘부는 1명이었다는 기록도 있고 이와 반대로 마지막 희생자 메리 제인 켈리만 매춘부가 아니었다는 기록도 있다. 사실 이 시기에 전업 매춘부는 공식적으로 1,200명이었으며 생계가 어려워 가끔씩 돈을 벌기 위해 매춘을 하는 이들이 상당했기 때문에 정확하게 매춘부였다는 기록이 최근에 확인된 메리 제인 켈리를 제외하면 다른 희생자들은 모두 매춘부는 아니지만 매춘을 했던 인물들로 추정된다. [5] 다만 잭 더 리퍼 사건의 희생자들은 마지막 희생자인 메리 제인 켈리를 제외하면 모두 결혼 경험이 있었던 여성들이었으며 넷 모두 남편의 간통이나 죽음 등으로 결혼 생활에서 실패를 경험했고 그로 인해 빈곤층으로 떨어졌다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6] 1880년대 러시아 전역에서 유대인에 대한 박해사건이 터지면서 많은 유대인 영국으로 넘어왔다. [7] 이러한 생활 패턴은 매춘부들의 건강에 큰 악영향을 미쳤다. 2번째 희생자인 애니 채프먼은 부검 결과 에 질병이 퍼져 있어서 살해당하지 않았더라도 고작 몇 달 정도밖에 살지 못했을 상태였다. [8] 20실링이 1파운드라는 것에서 착안하여 '1실링=만 원'으로 계산하는 방식이 꽤 알려져 있다. [9] ripper는 2가지 뜻으로 번역된다. 하나는 '찢다'를 뜻하는 rip을 따라 그대로 '찢는 자'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19세기 영국 사교계에서 사용되던 '좋은 녀석, 유쾌한 친구'를 뜻하는 호칭인 Ripper라는 뜻이다. 잭 더 리퍼는 사지를 찢어 죽였기 때문에 전자일 가능성이 매우 높으나 어떤 면에서는 해당 시대에 살던 사람들이 별명을 붙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중의적 효과를 노렸을 가능성이 있다. [10] 존 스미스, 존 도 같은 예시가 있다. [11] 어느 정도였냐면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하는 데 평균적으로 1분이 걸렸으며, 185cm나 되는 큰 체구와 강한 힘을 가져, 수술 시에는 지혈대를 쓰지 않고 자신의 왼팔 힘으로 눌러서 지혈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그러다 보니 가끔 실수해서 다리를 절단하다가 고환까지 절단한 적도 있었다고. [12] 마침 이 수술을 진행할 당시 관중 중에는 훗날 의학계에 혁명을 일으키는 조지프 리스터도 있었다. [13] 현재는 Durward Street로 명명되어 있으며 현재의 화이트채플역 북쪽 출입구에 바로 접한 골목길이다. 우편번호는 E1 5Bx. [14] 엠마 스미스는 복수의 남성들에게 범행을 당했기 때문에 잭 더 리퍼의 소행이라고 보는 사람들은 많지 않으나 마사 타브람은 칼로 베는 수법이나 방법이 잭 더 리퍼의 범행 수법과 비슷해 아이다 윌슨 살인미수 사건과 더불어 잭 더 리퍼의 범행일 가능성이 큰 사건이다. [15] Commissioner of Police of the Metropolis [16] 이 "안 돼!"라는 비명은 No라는 단어의 의미상 단순히 "아니요."라는 대답이었을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카도시가 No라는 여성의 비명 소리와 무언가 쓰러지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이다. [17] 29 Hanbury Street, E1 6QR. 사건 당시와 현재의 도로명이 동일한 몇 안 되는 곳이다. [18] 사건 당일인 9월 8일의 일출 시간은 오전 5시 23분으로, 범인은 해가 뜨면서 사람들의 이동이 늘어나는 아침에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19] 만약 정말 잭더 리퍼가 반지를 가져갔다면 동기가 "돈"이었던 1888년 3월 28일 발생한 재단사 아이다 윌슨 살인미수사건과 연관지을 수 있다. [20] 부검 결과 자궁은 사라져 있었다. 백스터는 칼질 단 한 번으로 자궁을 적출한 점을 근거로 틀림없이 범인에게 해부학적 지식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21] 일각에서 제기되던 가죽 앞치마를 입은 유대인 살인범에 대한 풍문이다. 일부 경찰도 이 설을 믿고 있었다. [22] 로이 해이즐우드 저 <프로파일러 노트>에서 저자는 TV 쇼에서 의뢰받은 이 과거 사건에 대한 프로파일링을 통해 "이 편지는 잭 더 리퍼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 장난으로 보냈을 가능성이 높다."라고 결론지었다. [23] 우리가 추리물이나 실제 사건에서 보는 살인범이 언론과 경찰에 편지나 암호문을 보내는 일들의 원형은 바로 이 편지에서 시작된 것이다. [24] 이날 하루에 겨우 수십 분 간격으로 2건의 살인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25] 애니 채프먼이 살해되기 30분 전 채프먼과 이야기하던 남자가 정말 범인일 경우 그 남자를 목격한 엘리자베스 롱 부인과 함께 잭 더 리퍼를 목격한 유이한 인물일 것이다. [26] 즉 '유대인들이 비난받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27] 실수인지 고의인지는 몰라도 원본 편지에는 잘못된 철자와 문법이 상당히 많다. 문장 부호를 거의 쓰지 않은 것도 두드러지는 특징이다. 문법 오류는 제쳐두고 철자를 수정하고 문장 부호를 추가한 후 줄바꿈을 적절히 넣은 버전이다. [28] 원본의 엉망진창인 구조를 최대한 살렸다. [29] 이 거리는 듀발 스트리트(Duval Street)로 개칭되었다가 재개발되어 현재는 Old Spitalfields Market이라는 시장의 일부가 되었다. [30] 밀러스 코트 13번지 2층. 켈리는 1층에서 살았다. [31] 이 사람을 사건의 범인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32] 순우리말로는 '지라'라고 한다. 횡격막의 아래, 왼쪽 콩팥의 위, 위의 왼쪽에 있는 길이 10~12cm, 너비 6~8cm, 무게 80~150g의 콩팥처럼 생긴 장기다. 일종의 림프절이며 신체 내 림프절 중 가장 크다. 신체 내 약 10% 이상의 혈액을 보유한다. 생김새도 거의 주머니에 가깝다. [33] 영국의 외과 의사. 세계 최초의 프로파일러 중 한 명으로 불린다. 영어 위키백과 문서 [34] 조지 허드슨이 진범 혹은 공범일지도 모른다는 가설도 있는데 영국 드라마 화이트채플(시즌 1)에서는 이 가설이 작중 수사 방향에 영향을 미친다. [35] 얼굴은 콧수염밖에 기억하지 못했다. [36] 1880년대 후반 영국은 주말에도 일하는 것이 거의 일상화된 수준이었다. 단순 노동자나 어린이, 하층민일수록 이 현상은 심해졌으며 조금 대우받거나 좋은 직업일수록 근무시간이 잘 지켜지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이다. [37] 앤더슨과 멜빌 맥노튼(Melville Macnaghten)이 언급한 용의자와 에런 코즈민스키에 대한 정보가 일치하지 않음을 근거로 실제로 앤더슨이 추정한 용의자는 에런 코즈민스키가 아닌 다른 이였다는 설도 있다. [38] 같은 유대인으로써 코즈민스키가 처벌받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증언을 거부했다. [39] 미토콘드리아 DNA는 모계 유전으로, 돌연변이가 일어나지 않는 한 같은 모계에서 갈라져 나온 모든 자손들의 DNA가 동일하다고 나온다. 예를 들어, 나의 미토콘드리아 DNA와 외할머니, 어머니, 외삼촌과 외숙모의 미토콘드리아 DNA는 동일하다고 나오는 것이다. 적어도 미토콘드리아 DNA가 일치하는 사람으로 범위가 좁혀진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으나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 DNA정보가 부정확 할 뿐 아니라 만일 정확하더라도 모계 유전임을 생각하면 오히려 범위가 더 넓어진다. 별 의미 없다는 말이다. [40] 다만 상기했듯이 마지막 케이스인 1891년의 프란시스 콜 살인 이전 벌어진 살인은 1889년 9월 10일 발견된 이름 모를 여성의 훼손된 몸통이 끝이었을 정도로 잭 더 리퍼와의 연관성이 높진 않다. 코즈민스키가 수감된 1891년과 연쇄살인이 종료된 시점은 들어맞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함정이다. [41] FBI의 1세대 프로파일러 중 하나로 프로파일링 기법 확립에 기여한 인물. 양들의 침묵 집필에 조언하기도 했고 프로파일링에 대한 그의 저서 마인드헌터 넷플릭스에서 동명의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42] 위에 언급돼 있는 코즈민스키도 이 3명 중 한 명으로 포함되었다. [43] 그것 때문에 영구미제로 남았지만. [44] 실제로 범죄 이후 경찰은 문을 따고 들어가야 했다. [45] 굉장히 유명한 루머였기 때문에 잭 더 리퍼를 다룬 웬만한 책에는 나와 있다. [46] 주인공은 셜록 홈즈. 추리 끝에 흑막이 왕자임을 밝혀내지만 정치적 문제로 비밀로 하고 대신 총리대신 사임, 왕자의 평생 병원 감금으로 타협한다. 영화 소개 1986년 KBS 명화극장을 통해 한국에 방영된 적이 있다. [47] 다만 앨버트 왕자 가톨릭으로 개종했다면 왕위 계승권이 박탈된다. [48] 간단히 요약하자면 핑거즈 프레디는 도로나 광장에서 마술을 하였으며 그가 공연하는 사이 엠마 스미스 등을 비롯한 공범들이 관중들의 물건을 소매치기하였다. 스미스와 프레디는 브릭 레인 어딘가에 사는 질 더 리퍼를 알고 있었으며 질 더 리퍼가 불법 낙태 시술자라는 것을 폭로하겠다며 협박해 나가다가 스미스는 살해당하고 프레디는 자취를 감추었다는 내용이다. [49] 당장 런던에 잭 더 리퍼 소굴(Jack the Ripper Haunts)이라는 관광 상품이 있다. 잭 더 리퍼가 연쇄살인을 벌인 범행 현장을 일일이 걸어서 찾아가는 것인데 '올해의 관광 가이드 상'을 받은 적도 있다. [50] 그래픽 노블 프롬 헬의 저자 앨런 무어는 잭 더 리퍼 사건이 현대사회에서 창작물의 소스이자 거대한 돈벌이로 쓰이는 것에 대해 피해자들에게 미안함을 표시하기도 하였다. 프롬 헬은 잭 더 리퍼 사건에서 살해당한 여성 5명의 이름과 힘든 삶을 산 그들에게 바치는 추모와 헌정으로 시작된다. 여기에서는 앨버트 왕자가 잭 더 리퍼 사건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전제 하에 시작한다. 앨버트 왕자가 신분을 숨기고 서민의 삶을 체험하던 중 사탕 가게 여점원과 결혼해 아기까지 낳게 되는데 이 왕실 추문을 알게 된 4명의 매춘부들이 왕실을 협박하자 빅토리아 여왕의 밀명을 받은 왕실 의사 윌리엄 위시 걸 경이 매춘부들을 살해한다는 내용이다. 윌리엄 위시 걸은 실제 존재했던 인물로 잭 더 리퍼 사건의 용의자 선상에 올라있다. 이 스토리는 스티븐 나이트의 확인되지 않은 주장에 의거한 것으로, 앨런 무어 역시 이 추리를 사실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다.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스토리를 빌려 온 것으로 봐야 한다. 윌리엄 위시 걸은 프리메이슨 사상에 심취해 매춘부를 살해하는 것이 신이 자신에게 준 신성한 사명이라고 생각하며 여성 자체를 증오하는 인물이다. [51] 국내에선 이와 비슷한 사례가 바로 악명 높은 연쇄살인마 유영철이다. 사족으로 유영철 역시 잭 더 리퍼처럼 범행 당시 윤락녀들을 살해했었다. [52] 19세기에는 현대에 비해 이런 윤리의식은 약하긴 했다. 에드거 앨런 포 마리 로제의 비밀을 쓴 것도 '메리 로저스 살인사건'의 유력 용의자가 자신에 대한 의심을 교란시키는 소설을 써달라는 의뢰를 받고 쓴 것이었다. [53] 셜록 홈즈 시리즈 속 살인자는 전부 그럴만한 사연이 있고 살인을 위한 살인범은 없다. [54] 청소년용 문고인 옥스포드 책벌레 Level 3 도서. [55] '아집과 실패의 전쟁사' - 스피온 콥 전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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