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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애런들

토머스 아룬델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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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영국 BBC 방송이 영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최악의 영국인 10명'을 선정. 다만 현직 정치인은 제외되었다.
1위 2위 3위 4위 5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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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위 7위 8위 9위 10위
타이터스 오츠 윌리엄 오거스터스 휴 디스펜서 더 영거 토머스 애런들 오스왈드 모슬리
출처
같이 보기: BBC 선정 위대한 영국인 }}}}}}}}}

<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제60대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애런들
Thomas Arundel
파일:Thomas_Arundel.jpg
출생 1353년
잉글랜드 왕국 서섹스 에칭엄
사망 1414년 2월 19일 (향년 60~61세)
재임기간 요크 대주교
1388년 ~ 1396년
제60대 캔터베리 대주교 (1기)
1396년 ~ 1397년 11월 8일
제60대 캔터베리 대주교 (2기)
1399년 ~ 1414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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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부모 아버지 리처드 피츠앨런
어머니 랭커스터의 엘레노르
형제 큰 형 리처드 피츠앨런
작은 형 존 피츠앨런
누이 조앤 피츠앨런
누이 앨리스 피츠앨런
국적 [[잉글랜드 왕국|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 잉글랜드 왕국
종교 로마 가톨릭 }}}}}}}}}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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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 성직자. 1396년에서 1398년, 1399년부터 1414년까지 캔터베리 대주교를 역임했고, 잉글랜드 총리를 5차례 수행하면서 잉글랜드 정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2. 생애

1353년경 잉글랜드 왕국 서식스 에칭엄에서 제10대 아룬덱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과 제3대 랭커스터 백작 헨리의 딸인 엘레노어의 3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리처드, , 조앤[1], 앨리스[2]가 있었다. 당시 귀족 가문에서는 막내 자식을 일찌감치 성직자로 삼는 것이 관례였기에, 그는 출생할 때부터 성직자가 되기로 예정되었다.

1369년경 옥스퍼드 대학교의 오리올 칼리지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1370년 톤턴(Taunton) 교구의 사제가 되었다. 1373년 20세의 나이에 톤턴 주교가 되었고, 그해 8월 13일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에 의해 일리 주교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교구에 별로 들리지 않았다. 어머니가 1372년에 사망하고 아버지가 1374년에 쇠약해졌으며, 형제들은 프랑스와의 전쟁에 투입된 상황에서, 그는 서식스와 서리에 잇는 가족 재산을 관리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1375년 12월 5일, 그는 아버지의 유언 집행자로 임명되었다.

아버지가 1376년 1월 24일에 사망한 뒤 유언을 집행한 후, 토머스는 수년간 주교로서의 활동에 전념했다. 그러던 1386년 9월 1일, 마이클 드 라 폴은 웨스트민스터에서 열린 의회에서 프랑스군이 잉글랜드를 침략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막대한 전쟁세를 내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의회에 참석한 귀족들은 1381년에 전쟁세를 과중하게 부과했다가 와트 타일러의 난이 일어나 심각한 혼란이 벌어졌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총리의 요구를 따르길 거부했다.

의회는 총리와 더럼 주교 겸 재무장관인 존 포드햄이 예산을 잘못된 곳에 낭비하고 막대한 자금을 빼돌리고 있다고 비난했고, 토머스 아룬델의 큰 형이자 제11대 아룬델 백작인 리처드 피츠앨런이 포함된 청원파가 곧 결성되어 왕에게 총리와 재무장관의 해임을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2세가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토머스 아룬델은 글로스터 공작 우드스톡의 토머스와 함께 왕을 찾아가 의회의 요구에 따라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심지어 우드스톡의 토머스는 왕이 자신의 고문을 추방하지 않으면 의회가 그를 해임할 수 있다고 위협했다. 의회가 왕을 해임하는 건 법률상 불가능했지만, 리처드 2세의 증조부인 에드워드 2세가 1327년에 의회의 결의로 인해 폐위된 전례가 있었다.

결국 리처드 2세는 10월 24일에 의회의 요구를 수락해 마이클 드 라 폴과 존 포드햄을 해임했다. 이후 토머스 아룬델이 잉글랜드 총리로 선임되었고, 11월 19일에 14명의 귀족으로 구성된 왕실 재정 조사 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위원회는 왕실 재정을 통제하고 크고 작은 인장을 관리하는 등 왕권을 상당부분 침해했다. 이에 리처드 2세는 왕실 보석의 관리인이자 자신과 가까운 사이인 존 뷰챔프를 초대 카더민스터 남작에 선임하고 왕실 청지기로 임명하는 것으로 대응했고, 대귀족들은 일개 에스콰이어였던 자가 자기들과 같은 귀족이 되었다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1387년, 리처드 2세가 반격을 시도했다. 리처드 2세는 의회를 폐쇄하고 전국의 모든 카운티를 방문해 지원을 구하려 했다. 이때 그는 잉글랜드 북부의 여러 순회 판사들로부터 군주의 특권을 침해하는 것을 불법이며, 이를 저지른 자들을 반역자로 간주할 수 있다는 조언을 받았다. 1387년 11월 이전에 런던으로 돌아온 리처드 2세는 프랑스와의 전쟁을 지속하려 하면서 왕권에 간섭하는 강력한 귀족 집단인 청원파의 지도자 리처드 피츠앨런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리처드 피츠앨런은 이에 맞서 글로스터 공작 우드스톡의 토머스와 함께 왕의 눈과 귀를 가리는 총신들을 타도하겠다며 군대를 일으켰다. 토머스 아룬델은 형과 왕을 중재하려고 노력했지만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387년 11월 14일, 청원파를 구성한 우드스톡의 토머스, 리처드 피츠앨런, 제12대 워릭 백작 토머스 뷰챔프, 더비 백작 볼링브로크의 헨리, 그리고 제5대 모브레이 남작 토머스 모브레이로 구성된 청원파 5인이 마이클 드 라 폴, 아일랜드 공작 로버트 드 베레, 요크 대주교 알렉산더 네빌, 대법원장 로버트 트레실리안, 전임 런던 시장 니콜라스 브렘브레 등 리처드 2세의 총신들을 고발하는 글을 왕의 사절단에게 제출했다. 이에 왕이 보낸 사절들은 왕을 만나게 해주겠다며 영주들을 웨스트민스터로 초대했다.

11월 17일, 청원파는 웨스트민스터 홀 에서 국왕을 만났다. 그들은 군대를 해산하길 거부하고, 왕이 총신들을 체포하고 의회의 심판을 받게 할 것을 요구했다. 왕은 이에 동의하고 1388년 2월 3일에 청문회를 열기로 했다. 그러나 리처드 2세는 총신들의 재판을 준비하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시간을 끌었으며, 의회에 모든 사람에게 불화를 잊을 것을 촉구하는 칙령을 발부했다. 이에 청원파는 왕이 자신들을 속였다고 여기고 군대를 일으켰다. 12월 19일, 청원파는 레드콧 브리지 전투에서 아일랜드 공작 로버트 드 베레를 격파했다. 이후 리처드와 토머스가 이끄는 반군이 런던에 접근하자, 리처드 2세는 런던 탑으로 피신한 뒤 캔터베리 대주교의 중재를 통해 협상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들은 양보를 원하지 않았고, 리처드 2세를 폐위시키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리처드 2세는 왕위를 유지하는 대가로 그들의 요구에 따르기로 했다.

1388년 2월 3일, 의회는 웨스트민스터 궁전 화이트홀에서 열렸다. 중앙에는 리처드 2세가 앉았고, 왼쪽에는 세속 영주들이, 오른쪽이는 교회 주교들이 앉았다. 토머스 아룬델은 양털 자루 위에 앉았으며, 회의를 주재했다. 그는 개최 연설에서 정국이 혼란한 것은 왕의 눈과 귀를 가린 총신들 때문이라며, 이들을 처리해야만 혼란이 멈출 것이라고 밝혔다. 이후 리처드 2세의 총신 8인이 모조리 처형되거나 추방되었는데, 그는 총신들을 심판하는 재판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 후 그는 해외로 도망친 알렉산더 네빌을 대신해 요크 대주교에 선임되었다.

이후 1년간 침묵을 지키며 청원파가 정국을 좌지우지하는 걸 지켜보던 리처드 2세는 1389년 5월 3일 자신이 22세로 이미 성인이 되었으며, 어렸을 때 저지른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며 스스로 국가를 통치할 준비가 되었다고 선언했다. 청원파는 평생동안 왕을 배제하고 통치할 생각은 없었기에, 리처드 2세가 의회를 통해 국가를 통치한다는 전제하에 그가 권력을 어느정도 행사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리하여 국정을 이끌 수 있게 된 리처드 2세는 토머스 아룬델을 잉글랜드 총리에서 해임했지만, 1391년 9월 27일에 다시 총리로 임명했다. 그가 총리를 맡는 동안 잉글랜드 왕실 재무부 일부가 요크로 이전되었는데,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토머스 아룬델의 영향 때문이었을 거라 추정한다. 1396년 늦여름, 토머스 아룬델은 리처드 2세와 발루아의 이자벨의 결혼 협상에 참여했다. 그해 9월 25일, 그는 윌리엄 코트니의 뒤를 이어 캔터베리 대주교가 되었다. 이틀 후, 그는 잉글랜드 총리직을 사임했다.

1397년 9월, 리처드 2세는 지난날 자신을 위협한 청원파의 일원이었던 우드스톡의 토머스, 토머스 뷰챔프, 리처드 피츠앨런을 모조리 체포했다. 그해 9월 17일, 웨스트민스터에서 열린 의회는 세 사람을 반역 혐의로 심판했다. 우드스톡의 토머스는 칼레 감옥에서 피살된 채 발견되었고, 토머스 뷰챔프는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리처드 2세의 개입으로 영구 추방으로 경감되었으며, 리처드 피츠앨런은 사형 선고가 내려진 직후 처형되었다. 한편, 토머스 아룬델 역시 1388년에 청원자들을 도와 왕에게 불명예를 안겼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는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리처드 2세는 손짓으로 그에게 앉으라고 간접적으로 명령했고, 그는 어쩔 수 없이 스스로 변호하는 걸 그만둬야 했다.

결국 토머스 아룬델은 유죄 판결을 받고 캔터베리 대주교직에서 해임되었으며, 그가 가지고 있던 교회 본당은 압수되었다. 이에 그는 교황 보니파시오 9세를 찾아가 자신을 지지해달라고 호소했다. 보니파시오 9세는 처음에는 그를 도우려 했지만, 나중에 입장을 바꿔 요크 학장 로저 윌든을 새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하면서 토머스 아룬델의 해임을 승인했다. 1398년 9월, 리처드 2세는 볼링브로크의 헨리와 토머스 모브레이를 잉글랜드에서 추방했고, 1399년 2월 볼링브로크의 헨리의 아버지인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이 사망하자 랭커스터 공국의 모든 영지를 몰수했다.

토머스 아룬델은 리처드 2세에게 반감을 품고 망명자를 만나는 것을 금지한 왕실 명령을 무시하고 위트레흐트에서 지난날 리처드 2세에게 처형된 형 리처드 피츠앨런의 아들이자 자기 조카인 토머스 피츠앨런과 합류했다. 두 사람은 함께 파리로 가서 볼링브로크의 헨리와 합류했다. 1399년 7월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리처드 2세가 아일랜드로 원정을 떠난 틈을 타 잉글랜드로 건너갔을 때 따라갔고, 헨리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적극적으로 도왔다. 반란이 성공하고 리처드 2세가 플린트 성에 감금된 뒤, 토머스 아룬델은 리처드 2세와 협상해 신변의 안전을 위해 퇴위할 것을 권고했다. 이후 9월 29일 왕의 퇴위와 관련된 준비에 대해 헨리와 논의했다.

리처드 2세는 1399년 9월 말에 런던으로 이송되어 런던 탑에 배치되었고, 9월 29일 많은 증인 앞에서 왕위에서 물러나겠다는 조서에 서명한 후 왕관을 땅에 내려놓았다. 9월 30일, 의회는 웨스트민스터에서 긴급 소집된 뒤 리처드가 서명한 조서를 받아들일 지를 논의했다. 이때 토머스 아룬델은 의원들 앞에서 리처드 2세의 폐위가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하느님이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옹립했지만 나중에 사울이 잘못된 길에 빠지자 다윗을 새 왕으로 세웠다는 걸 상기하라면서, 왕의 퇴위 내용과 그의 모든 범죄를 나열한 문서를 낭독했다. 결국 리처드 2세의 퇴위는 의회에서 인정되었고,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왕좌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제시해 역시 승인을 받고 잉글랜드 국왕 헨리 4세로 선포되었다. 토머스 아룬델은 뒤이은 의회에서 10월 13일에 새 국왕의 대관식을 거행하겠다고 선언했다.

헨리 4세의 즉위 이후인 1399년 10월 1일, 토머스 아룬델은 캔터베리 대주교에 복위했다. 이후 그는 정치에서 발을 빼고 존 위클리프의 추종 세력인 롤라드파를 규탄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1401년 헨리 4세를 설득해 <De heretico compurendo(이단법)>을 반포하게 했다. 이 법령은 서문에서 해당 법령은 "성례전을 가증스럽게 생각하고 설교의 직분을 찬탈한 새로운 종파에 대한 것"이라고 명시했다. 이단법은 주교들에게 범죄자를 체포, 투옥, 심문하고 범죄가 재발하거나 포기를 거부한 사람을 세속 당국에 넘겨줄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정죄된 자들은 사람들 앞에 설치된 "높은 곳"에서 화형에 처해질 것이었다.

이 법이 통과된 직후인 1401년 3월, 대표적인 롤라드파 수도사 윌리엄 소트리가 스미스필드에서 공개 화형에 처해졌다. 토머스 아룬델은 1407년에 옥스퍼드에서 열린 대회를 주재하여 설교, 성경 번역 및 사용, 학교와 대학의 신학 교육을 규제하는 여러 헌법을 통과했고, 옥스퍼드 검열관들은 1410년 위클리프의 저서에서 수집한 267개의 명제를 비난했다. 이러한 조치는 성직자들이 롤라드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데 도움이 되었지만, 평신도들은 자신들을 탄압하는 당국에 강한 반감을 품고 정치적 불만과 연계하여 저항 운동을 이어갔다. 옥스퍼드 대학의 많은 학생들은 위클리프의 작품을 번역하고 성경 번역의 적법성에 대해 논쟁을 벌였으며, 웨일스 보안관 존 올드캐슬은 롤라드파 설교자들을 숨겨줬으며, 여러 기사들과 함께 헨리 4세에게 교회가 낭비하고 있는 돈을 왕이 가져가서 잉글랜드의 무기고, 구호소, 대학에 투입해달라고 호소했다.

1405년 1월, 헨리 4세를 제5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로 교체하려는 음모에 대한 소문이 퍼졌다. 이 음모에 연루된 이들 중에는 토머스 아룬델도 있었다. 이에 그는 왕 앞에 무릎을 꿇으며 자신은 절대로 그 음모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으며, 고발자들에게 공개적으로 고발하라고 요구했다. 그해 6월, 토머스 아룬델의 친구이자 요크 대주교인 리처드 르 스크루프가 초대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의 반란을 지지했다. 그는 성명서에서 헨리 4세가 성직자들에게 과도한 부담을 안겨 하느님을 섬기는 데 전력을 기울이지 못하게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퍼시의 반란은 곧 진압되었고, 리처드 르 스크루프는 체포된 뒤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 소식을 접한 토머스 아룬델은 런던에서 요크로 달려가서 6월 8일에 왕을 접견한 뒤, 대주교의 운명은 왕이 아니라 교황이나 적어도 의회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고 경고했다. 헨리 4세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아룬델이 먼 길을 뛰어오느라 지쳐서 잠자리에 든 사이 스크루프를 처형했다. 아룬델은 나중에 스크루프의 사형을 집행한 인사들 중에는 그의 조카이자 제12대 아룬델 백작인 토머스 피츠앨런이 있다는 걸 알게 되자 몹시 상심했고, 이후로 토머스 피츠앨런과 단 한 번도 대면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교황 인노첸시오 7세는 대주교가 처형되었다는 것에 격노해 대주교 처형에 관련된 모든 사람을 파문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했다간 자신의 가문이 피해를 입을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를 무시하고 왕이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으므로 왕을 돕겠다고 선언했다. 1406년 5월 22일 의회에서, 헨리 4세는 국가 통치를 돕는 임무를 맡은 자문위원회를 창설하겠다고 선언했다. 이틀 후, 토머스 아룬델은 왕의 대리인 자격으로 의회에 출석해 스코틀랜드와의 전쟁, 웨일스에서 반란을 일으킨 오와인 글린두르 토벌 문제, 프랑스군의 침략 위험 등 숱한 위험으로부터 왕국을 지키려면 더 많은 군자금이 절실하게 필요하니 더 많은 세금을 거두는 것을 승인해달라고 요청해 승인을 받아냈다.

1407년 1월 30일, 토머스 아룬델은 잉글랜드 총리로 재임명되었고, 질병에 시달리는 왕을 대신해 국정을 이끌었다. 그러나 1409년 12월 21일 왕의 상태가 악화되어 국정에 전혀 신경 쓰지 못하고 있을 때, 몬머스의 헨리 왕자가 토머스 아룬델을 총리직에서 사임하고 토머스 보퍼트로 대체하고 왕국의 모든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1411년 말, 헨리 4세는 정신을 차린 뒤 아들의 자의적인 행위에 불만을 품고 헨리 왕자와 보퍼트 가문을 왕실 직책에서 추방한 뒤 1412년 1월 5일에 토머스 아룬델을 잉글랜드 총리직에 복귀시켰다. 그러나 왕의 건강은 계속 악화되었고, 결국 1413년 3월 20일에 사망했다. 이 후 왕이 된 헨리 5세는 같은 날 토머스 아룬델을 잉글랜드 총리직에서 해임했다.

1413년 9월 11일, 토머스 아룬델은 헨리 5세의 승인을 받은 뒤 롤라드파를 노골적으로 보호하는 존 올드캐슬에게 리즈 성에 와서 신앙을 검증하라고 통보했다. 올드캐슬은 이를 무시하고 자신의 본거지인 쿨링 성으로 숨었다. 아룬델은 즉시 올드캐슬에게 파문을 선고하고 9월 23일까지 런던에 출두하지 않으면 반역자로 간주하여 토벌하겠다는 헨리 5세의 뜻을 전했다. 9월 23일에 출두한 올드캐슬은 런던 탑에 갇힌 뒤 이단자로 기소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헨리 5세는 지난날 웨일스에서 오와인 글린두르 반란 진압에 동참했던 올드캐슬에게 40일 동안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로 했다.

1413년 10월 19일, 올드캐슬은 윌리엄 파크마이너가 이끄는 런던 롤라드파의 도움으로 런던 탑에서 탈출한 뒤 스미스필드에 있는 파크마이너의 집에 숨어서 상황을 살폈다. 그는 부유한 롤라드파 인사들로부터 자금을 제공받고 이를 통해 장비를 수집하고 용병을 고용했다. 토지를 소유한 미망인인 크리스티나 모어는 롤라드 목사인 윌리엄 블레이크와 그녀의 하인이 반란에 가담하도록 자금을 지원했다. 이후 벨튼, 더비셔, 에식스, 레스터셔, 브리스톨 등지에서 롤라드파 봉기가 잇따라 발발했고, 올드캐슬은 스미스필드에 기사 3명, 종자 15명 등 총 222명의 반군을 집결한 뒤 장차 왕궁을 급습할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나 사전에 헨리 5세의 스파이 역할을 한 여관 주인 존 바튼과 토머스 버튼이 올드캐슬의 은신처와 계획을 폭로하면서 모든 게 들통났다. 헨리 5세는 1414년 1월 9일 또는 10일 밤에 클레켄웰의 세인트 존 수도원에 군대를 집결한 뒤 올드캐슬이 이끄는 반란군을 급습해 격파했다. 1월 10일, 전투 후 생포된 롤라드파 80명의 운명을 결정하기 위한 재판이 열렸다. 토머스 아룬델은 이 재판에 출석해 이단자들을 단호히 근절해야 한다는 내용의 연설을 했고, 그 결과 전원이 화형되거나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후 반란에 가담한 인사들은 대거 체포되어 처형되었지만, 올드캐슬은 왕실이 몰수한 그의 재산 일부를 임대한 오랜 친구 존 해리의 지원으로 수년간 도피 행각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는 결국 1417년 웨일스의 웰시풀에서 체포되었고, 런던으로 호송된 뒤 1417년 12월 14일 화형에 처해졌다.

1414년 2월, 토머스 아룬델은 뇌졸중에 걸려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헨리 5세는 헨리 치셀을 새 캔터베리 대주교에 선임했다. 아룬델은 1414년 2월 19일에 사망했고, 캔터베리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1] 1347 ~ 1419, 제7대 헤러퍼드 백작 험프리 드 보훈의 부인. [2] 1350 ~ 1416, 리처드 2세의 이부 형제인 제2대 켄트 백작 토머스 홀랜드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