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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642년 1월 2일 | ||
오스만 제국
코스탄티니예
톱카프 궁전 (現 튀르키예 마르마라주 이스탄불도 이스탄불 광역시 파티흐구) |
|||
사망 | 1693년 1월 6일 (향년 51세) | ||
오스만 제국
에디르네 (現 튀르키예 마르마라주 에디르네도 에디르네) |
|||
묘소 | 이스탄불 발리데 하티제 투르한 술탄 영묘 | ||
재위기간 | 오스만 파디샤[2] | ||
1648년 8월 8일 ~ 1687년 11월 8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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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70125><colcolor=#fff> 아버지 | 이브라힘 | |
어머니 | 투르한 하티제 술탄[3] (출신: 우크라이나 / 러시아) | ||
배우자 | 귈누슈 술탄 (출신: 베네치아 공화국령 크레타 - 그리스인) | ||
형제자매 | 쉴레이만 2세, 아흐메트 2세, 셰자데 무라트, 셰자데 셀림, 셰자데 오스만, 셰자데 바예지트, 셰자데 지한기르, 셰자데 오르한, 윔뮈귈쉼 술탄, 파트마 술탄, 게브헤르한 술탄, 카야 술탄, 베이한 술탄, 아티케 술탄, 아이셰 술탄, 비잔 술탄 | ||
자녀 | 무스타파 2세, 아흐메트 3세, 셰자데 셀림, 셰자데 마흐무트, 셰자데 이브라힘, 셰자데 바예지트, 셰자데 쉴레이만, 하티제 술탄, 윔미 술탄, 윔뮈귈쉼 술탄, 게브헤르 술탄, 사피예 술탄, 파트마 술탄 | ||
종교 | 이슬람 (수니파) | ||
이명 |
수렵제 (Avc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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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만 제국의 19대 술탄이자 13대 파디샤.2. 생애
2.1. 즉위 전
메흐메트 4세 재위 초반 시절 모습.
1642년 1월 2일에 이브라힘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예니체리한테 폐위되고 나서 살해되자 6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2.2. 치세
1597년 착공되어 1665년에 완공된 예니 모스크 (발리데 술탄 모스크)
2.2.1. 수렴청정
메흐메트 4세의 치세는 할머니 쾨셈 술탄의 수렴청정으로 시작됐다. 선황 이브라힘을 직접 폐위시켰던 쾨셈 술탄은 태황태후에 해당되는 뷔윅 발리데 술탄(Büyük valide sultan)의 자격으로 국정에 개입했다.[4] 이는 당시 태후인 발리데 술탄으로서의 권위를 얻지 못하고 퀴췩 발리데(küçük valide)로 불렸던 메흐메트 4세의 모후 투르한 술탄의 불만을 야기시켰다.투르한 술탄은 환관들을 포섭해 궁 내에서 영향력을 키워나갔고 그 중 쉴레이만 아아(Lala Süleyman Ağa)라는 환관은 대표적인 친 투르한 술탄 환관이었다. 쾨셈 술탄과 투르한 술탄간의 고부갈등은 시간이 지날수록 악화됐다. 일설에 의하면 쾨셈 술탄은 손자를 살해하기 위해 메흐메트 4세에게 독이 든 로쿰을 먹이려다가 궁인 멜레키 하툰에게 제지당해 무위에 그쳤다고 한다.
1651년, 쾨셈 술탄은 이브라힘의 후궁 살리하 딜라슙 술탄이 순종적이고 권력에 욕심이 없다고 판단, 살리하 딜라슙 술탄의 아들인 쉴레이만 황자[5]를 황위에 올리고 메흐메트 4세를 폐위시키고자 일종의 친위 쿠데타를 계획 한다. 그러나 이 계획은 사전에 투르한 술탄에게 발각됐고 손자를 폐위시키려던 쾨셈 술탄은 쉴레이만 아아가 이끄는 무장세력에게 살해당한다.
투르한 술탄은 쾨셈 술탄의 수렴청정을 이어받아 의욕적으로 내정에 참여했다. 그러나 반란 모의 등 내외정의 어려움이 이어졌고 결국 투르한 술탄은 아들을 잘 보필할 신료로 쾨프륄뤼 메흐메트 파샤를 낙점해 그녀의 권력과 권한들을 넘겨주고 자신은 자선사업에 매진하게 된다. 이로서 휘렘 술탄의 황후 책봉으로 시작된 여인들의 왕조(Kadınlar Saltanatı)는 막을 내리고 쾨프륄뤼 시대가 개막했다.
2.2.2. 쾨프륄뤼 시대
대재상이 되기 전 쾨프륄뤼 메흐메트 파샤는 3가지 조건[6]을 제시했고 투르한 술탄은 이를 받아들여 쾨프륄뤼 메흐메트 파샤가 대재상이 되니 이때부터 쾨프륄뤼 출신 가문들이 대재상을 맡아 제국을 이끄는 쾨프륄뤼 시대가 시작됐다. 쾨프륄뤼 출신 가문들은 유능했기에 혼란스러운 대제국의 기강을 다잡는데 집중했고 여러 정복사업들을 성공적으로 이끌었기에 오스만 제국의 중흥기라고도 불린다.투르한 술탄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쾨프륄뤼 메흐메트 파사는 수도에서 황제의 영향력을 줄이기위해 메흐메트 4세를 에디르네로 보내 유럽여행과 사냥에만 몰두하도록 시켰다. 이 때문에 메흐메트 4세 때는 황제는 있으나 모든 권한을 위임받은 대재상이 국정운영을 이끄는 입헌군주제에 가까운 형태를 보여줬다.[7] 유능하다고 평가받은 그는 80이 넘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내부적으로 부정부패를 줄이고 여러 반란을 잠재웠으며 외부적으로는 베네치아 함선을 격퇴하고 트란실바니아의 이탈을 막는 성과를 냈다. 그러나 나이가 많은 그는 대재상이 된지 5년만에 죽었고, 죽기 전 황제를 만날 때 조언[8]을 해준 뒤 아들인 파질 아흐메트를 대재상으로 추천했다. 이후 메흐메트 4세는 파질 아흐메트를 대재상으로 임명한 뒤 3대 재상인 카라 무스타파 파샤까지 쾨프륄뤼 가문들에게 권한을 몰아주고 신뢰했다
2번째 재상이 된 파질 아흐메트 파샤는 26세라는 젊은 나이답게 호전적인 성향을 갖춘 자였고, 제국의 영토를 늘렸다. 당장 하단 문단에 나온 여러 정복사업들의 대부분이 그가 대재상이던 시기 벌인 일들이며 포돌리아를 얻은 1672년엔 제국 역사상 유럽에서 최대영토를 자랑했던 때였다. 물론 내치에도 유능해서 세금을 줄이고 교육을 장려했다. 그는 1676년 과음으로 죽었고 뒤를 이은 카라 무스타파 파샤가 1683년 그가 2차 빈 공방전의 패전을 이유로 처형당하면서 쾨프륄뤼 가문들이 대재상을 독점하는 시대가 끝나게된다.[9] 이후 메흐메트의 행보는 하단의 대튀르크전쟁 항목 참고
2.2.3. 크레타 정복
자세한 내용은 크레타 공방전 문서 참고하십시오.5차 베네치아-튀르크 전쟁 (1645 ~ 1669년)
2.2.4. 대합스부르크 전선
4차 오스만-합스부르크 전쟁 (1663 ~ 1664년)전황은 오스트리아에게 유리하게 흘러갔고 오스만 제국의 속국인 에르데이 공국에 역공을 가하기도 했으나 프랑스와의 전쟁에 대비하여 오스만에게 훨씬 유리한 조건으로 휴전했다. 에르셰쿠이바르를 얻고 기고만장해진 오스만은 군제 개혁의 기회를 놓쳤다.
2.2.5. 포돌리아[10] 점령
3차 오스만-폴란드 전쟁2.2.6. 3차 러시아-튀르크 전쟁
드네프르강을 국경으로 정함.2.2.7. 대튀르크 전쟁
상헝가리[11]에서 퇴쾨이 임레가 주도한 반 합스부르크 봉기에 호응하여 1683년 제2차 빈 공방전을 감행했으나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얀 3세 소비에스키에게 가로막혀 대패했다. 결국 메흐메트 4세는 이 실패로 말미암아 폐위당했고 이복동생 쉴레이만이 쉴레이만 2세로 즉위했다.2.3. 퇴위와 사망
1687년에 퇴위되었으며, 톱카프 궁전에서 갇혔고 1693년에 향년 51세로 사망했다.3. 여담
- 제위에 오르기 전 부황 이브라힘이 다른 후궁 소생 황자를 귀여워하는 걸 본 모후 투르한 술탄이 "폐하의 아들은 메흐메트고 폐하의 아내는 저입니다."라는 말을 했다가 격노한 이브라힘이 어린 메흐메트를 연못에 던져버리는 바람에 죽거나 크게 다칠 뻔했다고 한다.
- 오스만 술탄들 중에서, 최연소인 6살에 즉위했고, 그의 치세는 쉴레이만 대제 다음으로 긴 39년 동안 제국의 황제자리에 있었다.
4. 대중매체
- 오르한 파묵의 소설 하얀 성은 메흐메트 4세 시기를 배경으로 하며 메흐메트 4세가 등장인물로 나온다.
[1]
Mehmed-i râbî
[2]
수니파의 칼리파 겸직.
[3]
최근 연구 결과 실제로는 하티제 투르한 술탄으로 불렸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4]
뷔윅 발리데 술탄의 원조는
메흐메트 3세의 모후 사피예 술탄이었지만 손자
아흐메트 1세 제위기에는 사실상 뒷방 늙은이가 되어 권력에서 멀어진 상태였다. 쾨셈 술탄은 이와 달리 손자가 제위에 오르자 권력이 더 커진것.
[5]
훗날의
쉴레이만 2세.
[6]
1.황제는 재상이 승인한 것만 처리할 것 2. 모든 임명과 해고의 권한 부여하고 다른 사람에게 권한 부여 금지 3. 황제는 본인에 대한 어떤 내용도 듣지 말거나 수락하지 말것
[7]
다만 메흐메트 파샤에게 부정적인 정적들이 메흐메트 4세에게 불평한걸 들은 메흐메트 파샤가 약속 위반이라며 사퇴하는 일이 있었다. 이에 잘못을 깨달은 메흐메트 4세가 복귀를 요청해서 복귀한 일이 있었다.
[8]
술탄에게 여성의 조언을 절대 받아들이지 말고, 너무 부유한 장관을 임명하지 말고, 항상 국고를 가득 채우고, 군대를 항상 움직이게 하라고 조언했다.
[9]
쾨프륄뤼 시대가 끝난건 1703년 5번째 재상인 후세인 파샤가 무스타파 2세의 국정개입으로 대재상에서 물러날때이다.
[10]
현
우크라이나
카미야네치포딜스키 일대.
[11]
현재
슬로바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