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20:08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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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시리즈 우승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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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 중계 채널 파일:J SPORTS 1 로고.svg 파일:J SPORTS 2 로고.svg 파일:J SPORTS 3 로고.svg 파일:J SPORTS 4 로고.svg (1~4 유동적 편성)
주요 인물 구단주 미키타니 히로시· 감독 미키 하지메 · 선수회장 타나카 카즈키 · 주장 노리모토 타카히로(투수) · 아사무라 히데토(야수)
구단 상세 정보 역사 · 선수단 및 등번호 · 역대 선수 · 응원가 · 유니폼 · 오릭스-라쿠텐 분배 드래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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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창단 과정3. 시즌별 성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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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역사 및 시즌별 기록을 정리한 문서.

2. 창단 과정

2004년 일본프로야구 재편 문제로 시끄러웠던 해였다. 파산 직전인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오릭스 블루웨이브와 합병시켜 오릭스 버팔로즈로 재탄생시키려는 움직임이 나오자, 5개 구단으로 퍼시픽리그를 운용하기에는 무리라는 의견이 나왔다. 이 때문에 킨테츠 외에도 당시 모기업의 경영난으로 휘청이던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와 당시 가장 비인기팀으로 손꼽히던 치바 롯데 마린즈를 합병하자는 제안까지 나왔고, 그렇게 될 경우 한 리그에 팀이 4개 뿐이라 팀 간 경기가 급격하게 늘어나 재미가 반감되어 결론적으로는 두 리그간의 합병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있었다. 특히 요미우리 자이언츠 회장인 와타나베 츠네오(渡辺恒雄)를 중심으로 한 센트럴리그 측은 단일리그로 개편하는 것이 좋겠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이 당시 퍼시픽리그의 상황을 살펴보면 그야말로 아수라장.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는 모기업 다이에의 경영난으로 구단 운영까지 휘청거리고 있었고[1], 세이부 라이온즈는 모기업 세이부 철도의 분식회계 사건으로 츠츠미 요시아키(堤義明) 회장이 법적 구속이 되는 등 위기를 맞고 있었다. 치바 롯데 마린즈는 하도 인기가 없어서 타구단 추가 합병설이 나올 시 합병대상 1순위로 꼽히고 있었다.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야 더 말할 필요도 없이 재정파탄이 나버리며 해체를 앞둔 상황이었고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도 야심차게 홋카이도 연고이전한 첫해라 그런지 관중몰이가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았으며[2] 그나마 킨테츠를 떠안을 정도의 여력이 된 오릭스 블루웨이브는 3년 연속 최하위를 자랑하는 독보적인 최약체로 악명높았을 만큼, 어느 한 구단도 조용할 날이 없이 계속 시끌시끌한 상태였다.

물론 난데없이 양대리그가 파탄나고 직장이 2개나 줄어들게 되는 꼴이 되어 버리니 일본프로야구선수회와 팬들이 이에 격렬히 반대하며 합병 반대를 부르짖었고, 후루타 아츠야 선수회장의 주도[3] 하에 일본프로야구 사상 초유의 파업, 일명 공백의 2일 사태가 벌어지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일본의 대표적 IT 업체이던 라이브도어가 여태껏 야구팀이 없었던 미야기현 센다이시에 신생 구단을 창단하겠다면서 상황이 반전된다. 센다이 팬들은 그림의 떡으로만 생각했던[4] 일본프로야구에 우리를 연고로 하는 구장이 생기자 환호하며 일단 야구단만 생기면 됐지라는 마인드로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했고, 여기에 직장이 줄어드는 상황을 좌시할 수 없었던 선수회까지 가세, 급기야 사회현상으로까지 확장되어 결국은 기존 11개 구단이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결국 신생팀 창단이 결정나고 모기업 후보로는 기존에 신생팀 창단을 천명했던 호리에 타카후미 라이브도어 일본의 대표적 인터넷 쇼핑몰이었던 미키타니 히로시 라쿠텐이 참여해 구단 창설 신청서를 제출, 2개 기업을 최종 심사하여 라쿠텐이 선정되고 이듬해인 2005년부터 퍼시픽 리그의 참가를 승인하면서 공식적으로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가 발족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다행이다 싶은 것이, 라이브도어가 선정되었다면 훗날 터진 분식회계 및 허위공시 스캔들로 제2의 킨테츠와 같은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보통 신규 참가 구단이 그렇듯 라쿠텐 역시 초반에는 완전히 암담한 시기를 거치게 된다. 그도 그럴게 처음에 라쿠텐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를 직접 흡수한게 아니라, 이미 오릭스와 킨테츠가 합병된 뒤에 생긴 신생 구단이기 때문에 킨테츠의 선수들을 그대로 라쿠텐에 존속시킬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선수 문제로 라쿠텐 쪽에서는 일방적으로 불리한 해체 드래프트를 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 때문에 오릭스가 주요 선수는 싹 쓸어가고 남은 이미 한물간 노장선수나 아예 1군 경험도 없는 햇병아리들만으로 팀이 짜여지게 된다(...) 이 과정에 대해서는 오릭스-라쿠텐 분배 드래프트 문서 참고.

물론 이 과정에서 선수의 의지를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오릭스 소속을 원하지 않는 선수는 오릭스 우선 지명에서 뺐지만 그렇다고 라쿠텐 쪽으로 주요선수들이 전부 다 흘러들어가지는 않았다. 이 과정에서 킨테츠의 간판으로 오릭스의 지명을 받았던 나카무라 노리히로 오오무라 나오유키는 오릭스의 지명을 회피한 채 FA 권리를 행사해서 각각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로 떠나버렸다. 그걸 빼면 애초에 이전 시즌 꼴찌-5위 팀들이었던 오릭스-킨테츠의, 게다가 2군급 멤버들로는 뭐가 될 게 아니었다.

참고로 이 때 선수 분배 드래프트 방식이 예술인데, 먼저 합병주체구단인 오릭스 버팔로즈에서 옛 오릭스 블루웨이브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선수단 전체에서 25명을 보호선수로 1차적으로 지정한다. 이 보호선수지정에서 빠진 선수를 신생팀 라쿠텐에서 20명 지명하는데, 이 첫 20명에는 FA 자격을 획득한 선수, 외국인 선수, 입단 2년차 이내 선수들을 지정할 수 없다. 그렇게 라쿠텐의 20명 지명이 끝나면 분배드래프트라는 절차로 선수를 추가로 지명하는데, 오릭스가 20명 지명, 끝나면 라쿠텐이 20명 지명을 하고, 2차지명이 다 끝나고 남은 선수는 오릭스 소속이 되는 방식이었다. 한마디로 라쿠텐은 2004 시즌 5위-최하위를 기록한 팀들의 2군급 선수들밖에 보유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두 구단을 합쳤다고 해도 선수단을 재구성할 때부터 오릭스가 25명 지정하고 시작하는데 남는 선수들이 있을 리가(...)

드래프트의 참상을 보여주는 결과가 있는데, 드래프트로 라쿠텐으로 귀양 온 인원이 어느 정도의 레벨이었냐면 라쿠텐 창단 2시즌 만인 2006년 시즌 종료시점에서 이미 반수가 넘는 20명 이상이 은퇴 혹은 전력 외 통보를 받았으며, 5시즌 지난 뒤 처음으로 가을야구에 진출한 2009년 시즌 종료시점에는 딱 9명 밖에 안 남았었다. 한마디로 이때 드래프트는 진짜 구색 맞추기 수준이었고 라쿠텐이라는 구단은 창단 후 5년 넘는 세월 동안 거의 처음부터 팀을 만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참고로 이 합병팀-신생팀 드래프트로 입단한 선수 40명 중 2017년 시즌 종료 기준으로 현역인 선수는 없다. 이 드래프트로 입단한 최후의 선수는 마키다 아키히사로, 2001년에 킨테츠에 입단하여 2005년 분배드래프트에서 라쿠텐으로 지명된 후, 라쿠텐에서만 12년을 더 뛰고 2016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

분배드래프트가 아닌 창단 시에 있던 멤버로 확장해도 미국으로 갔다가 2019년에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한 이와쿠마 히사시가 유일하게 2005년 창단 당시의 암흑기를 경험한 인물이다. 킨테츠 경험자 최후의 3명 중 나머지 두 명인 콘도 카즈키 사카구치 토모타카는 해체 시에 오릭스가 지명했기에 라쿠텐에 소속된 적이 없다.

그래도 이렇게 시작된 라쿠텐 구단이지만, 라쿠텐은 2013년 일본시리즈를 제패한 반면, 쓸 만한 선수들을 쓸어간 오릭스는 16년 동안 A클래스에 2번 밖에 못 들어가는 암흑기를 보냈다. 2021년에 퍼시픽리그 우승을 달성하면서[5] 과거의 암흑기를 씻어내고, 동일해 일본시리즈에선 2001년 킨테츠를 꺾었던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에게 패했지만[6] 다음해인 2022년에 야쿠르트와의 일본시리즈 리매치에서 이겨 우승에 성공하면서 26년 만의 일본시리즈 우승, 라쿠텐의 우승보다 9년이나 늦게 되었다.

3. 시즌별 성적

3.1. 2005 시즌

그렇게 이와쿠마나 이소베 정도를 제외하면 오릭스-킨테츠의 2선급 멤버들을 중심으로, 나머지 10개 구단의 잉여 전력들을 무상 트레이드나 방출선수 입단[7] 등의 형태로 데려오면서 원년 선수단이 꾸려졌다. 여기에 구단주가 사비를 털어서라도 현역 메이저리거를 영입하겠다고 호언장담하던 프런트[8]의 쌩까기(…)가 겹쳐 외국인 선수들도 대부분 일본프로야구에서 한 번 퇴출된 전력이 있던 선수들이었을 정도로 팀 전력은 매우 부실한 상태.[9] 그래도 치바 롯데 마린즈와 맞붙은 창단 첫 경기를 순전히 이와쿠마의 완투로 3-1로 승리하는 쾌거를 기록했으나...

바로 다음날 0-26으로 최다점차 완봉패 일본 기록을 갈아치우며[10] 고난의 첫해를 시작했다. 그나마 승리를 기대할 만한 날이 이와쿠마의 등판일이었고 이와쿠마가 등판하는 날도 승리할 확률이 50%를 밑돌았다(...) 이 해 이와쿠마 히사시의 성적은 182.1이닝 113실점 101자책 9승 15패 ERA 4.99... 다만 이와쿠마는 이 시즌에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던 데다, 2중키킹 금지로 인한 투구폼 수정이라는 변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이와쿠마마저 없었다면 진짜로 100패가 가능할 지경이었던 것이 이 시즌 라쿠텐의 상황이라서 할 수 없이 정상이 아닌 몸상태로 무리하게 시즌을 완주해야 했고, 이 결과는 다음 2시즌 간의 개점휴업으로 돌아왔다.

일찌감치 4월부터 타 팀들과 큰 폭의 경기차로 라쿠텐은 파리그 최하위 자리에 그대로 고정되었다.[11] 3~4월 합계 6승 23패, 승률 .207에 선두 롯데와 15.5경기차, 5위 세이부와도 5.5경기차 최하위로 뒤쳐지기 시작했다. 이 때까지는 그래도 신생팀이 겪는 어쩔 수 없는 진통이다 싶었지만 5월에도 7승 18패를 기록하면서 서서히 망해가기 시작했고, 코칭스탭들을 일부 순환배치하긴 했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교류전에서도 11승 25패로 압도적 최하위에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상대로는 1승도 못 따고 0승 6패로 2연속 피스윕을 당했다. 그나마 교류전 중 주니치 드래곤즈에 3연전 전승 포함 4승 2패[12] 및 야쿠르트 상대로 3승 3패를 거둬 체면치레는 했지만 이 둘을 제외하곤 센트럴리그 팀에게도 신나게 깨졌다. 7월에는 그래도 10승 9패 1무로 창단 후 처음으로 월간 성적 5할을 돌파했으나 8월에 3승 21패 승률 0.125 멘도사 라인보다 못한 승률을 찍으며 완전히 멸망해버렸고, 결국 퍼시픽리그 전 팀에게 상대전적 열세를 확정하면서 9월이 되기도 전에 일찌감치 최하위가 확정됐다.

이렇게 2005년 시즌이 끝나고 보니 팀 성적은 무려 38승 1무 97패, 승률 .281, 저 성적에서 보이듯 3할에도 못 미치는 승률 자체가 대단하긴 한 거지만 다른 사례와 비교하자면 대략 백인천 시절의 롯데 자이언츠와 끝도없이 막장모드를 달리던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 비슷한 기록.[13] 한국의 이글스 구단인 빙그레 이글스의 첫 시즌 수준의 승률이다. 승률 .281은 그 시즌 퍼시픽리그 수위타자 와다 카즈히로의 .322[14]는 커녕, 팀내 타율 1위였던 요시오카 유지의 .282보다도 낮았다. 당시 5위였던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와의 게임차가 무려 25게임, 정규시즌 1위였던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의 게임차는 51.5게임차로 아예 대놓고 승점자판기 노릇을 해줬다(…)[15] 세간에서는 100패 안 한 것만 해도 다행이라는 평가.

문제는 나름 일본 대표 쇼핑몰이자 꽤 돈이 많은 라쿠텐이라는 물주를 등에 업었음에도 외국인 보강도 싸게 하는데다 FA 획득에는 손 뗀 짠돌이 프런트. 덕분에 구단 운영은 퍼시픽리그 전 구단이 적자를 보는 와중에 혼자서 흑자를 봤다고 한다.(…) 그러고는 창단 감독인 타오 야스시는 3년 계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적부진의 책임을 물어 시즌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해임 통지를 때려버렸다.[16] 마이애미 말린스 구단주 못지않은 프런트의 이 막장행각 때문에 첫 해에 라쿠텐 팬이기를 그만둔 토호쿠 지방 사람들이 많았다고는 하지만 타오로는 안 된다는 라쿠텐 프런트의 판단은 결과적으로 노무라 카츠야가 부임하고 나서 포스트시즌에도 진출하고 낚시왕 다나카 마사히로라는 또 한 명의 에이스 후보를 데려오는 행운이 겹치는 덕분에 오히려 라쿠텐이 센다이에 성공적으로 뿌리내리는 결과를 낳으며 맞았다고 평가받게 되었다.

3.2. 2006 ~ 2009 시즌

이후 2006년 시즌에 1990년대 야쿠르트 최전성기를 구축한 바 있는 노무라 카츠야 감독을 영입해서 제대로 된 팀 빌딩을 시작하며 그래도 프로팀답게 상위권 도약의 발판을 만들려 노력하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시즌 종료 후 성적은 마찬가지로 6위였지만 47승을 거둬 전년보다 승수를 9개 더 챙겼고 5위 오릭스 버팔로즈와의 차도 4.5게임차로 근소해졌다. 얘넨 비교적 좋은 선수들 챙겨가고도 왜 이러냐 여담으로 이 해 미야기 구장 홈 개막 시리즈 2차전인 3월 29일 경기는 강설 중단 2번마운드에서 벽돌이 발굴되는 등 다양한 이유로 중단을 겪었고, 추운 날씨와 잦은 중단에 따른 집중력 저하로 라쿠텐 선수들이 6실책 2폭투를 기록한 대첩급 경기로 남았다. 경기 영상 1, 경기 영상 2 [17]

이후 2007년에 비약적인 성장으로 4위, 2008년에는 아쉽게 5위를 기록했지만 08년도 퍼시픽리그가 전체적으로 혼전 양상이였고 순위만 5위지 1위와의 승차가 불과 11.5게임차 밖에 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가히 장족의 발전이라 할 만한 모습을 보였다. 또 21승 4패 ERA 1.87라는 부활투를 선보인 에이스 이와쿠마 히사시, 신인 타나카 마사히로가 크게 성장했고 경로당이었던 타선에도 텟페이나 와타나베 나오토 등의 젊은 피가 수혈되는 등 4년만에 동네북+ 승률자판기 이미지를 탈피하기 시작했다.

2009년 시즌에는 그동안의 팀 빌딩의 성과가 전체적으로 잘 터져나와 개막 첫 달을 처음으로 리그 1위로 마감하면서 2009년 시즌 돌풍을 예고. 시즌 중반에는 2위와 4위 사이를 왔다갔다하며 분전한 결과, 리그 2위로 클라이맥스 시리즈 출전을 확정 지음에 따라서 창단 첫 A클래스 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클라이맥스 시리즈 1차전에서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이와쿠마 히사시, 타나카 마사히로의 연속 완투승으로 가뿐히 발라버리고, 정규시즌 1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와 클라이맥스 시리즈 스테이지2에서 격돌. 핸디캡 1패 포함 1승 4패로 시즌을 마감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또 문제가 발생했다. 포스트시즌 진출 시, 노무라 카츠야 감독과 재계약을 하겠다던 얘기가 구단 내외부에서 나왔는데 프런트쪽에서 계약 연장을 안하기로 결정해. 팬들의 반발을 샀다. 노무라 감독은 이 소리를 듣고 "재계약을 안하는건 상관 없는데 왜 포스트시즌 시작할때 발표해서 사기를 떨어뜨리냐, 이 막장 프런트야!" 라는 요지의 발언으로 구단과 사실상 등을 돌렸다. 그 외에도 "난 라쿠텐 이글스는 좋지만 라쿠텐 구단은 싫다." 라든가(…), 구단에서 회유책으로 명예감독 + 영구 결번을 제시하자 "라쿠텐따위에 무슨 명예를 느끼라고?", "내가 난카이에서 영구결번을 받으면 받았지[18], 라쿠텐에서 영구결번을 왜 받냐?" 식의 화려한 독설로 구단의 회유책을 보기좋게 걷어 차버렸다. 그리고 라쿠텐은 이전부터 조짐이 있었지만 이 사건으로 막장 프런트 인증을 해버렸다.

3.3. 2010 ~ 2012 시즌

2010년에는 일단 땜빵으로 전 히로시마 감독이었던 마티 브라운이 팀을 맡고, 보기좋게 6위로 추락했다. 2011년 시즌부터는 호시노 센이치가 감독직을 맡게 되었다.

2011년을 맞아 호시노 센이치 감독을 영입한 직후부터, 과거와는 달리 대규모 현질을 하고 있다. 우선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복귀하는 이와무라 아키노리, 마츠이 카즈오를 영입하고 그외에도 메이저에서 복귀하는 선수들을 다 찔러보는 중. 또 김병현, 이승엽도 영입대상으로 고려했고 두산 베어스에 뛰었던 켈빈 히메네스를 영입하는 등 대대적으로 보강했다. 결국 김병현을 영입했고 마무리 투수로 기용할 듯. 결국 마쓰이 빼고 다 망했지만

그러나…

2011년 3월 11일에 발생한 도호쿠 대지진이 라쿠텐의 발목을 잡고 말았다. 당연히 지진으로 도호쿠지방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거기다 라쿠텐의 연고지가 하필이면 피해가 제일 심한 미야기 현인 데다가 홈구장마저 파손된 상황이다. 다행히 2개월 정도 보수공사를 하면 홈구장은 문제가 없다지만 정규시즌 개막을 10여일 앞두고 이런 사태가 벌어져서 선수들의 멘탈은 최악으로 떨어진데다 홈구장을 보수할 때까지 경기를 어떻게 할지도 문제. 원정경기로만 치른다면 성적하락은 불보듯 뻔하다. 게다가 홈구장을 복구한다 해도 수만 명이 사망, 실종된 도호쿠의 사정상 서포터즈와 팬들의 힘도 많이 하락할 수밖에 없다. 라쿠텐으로선 의욕적으로 시작하려던 시즌에 악재를 제대로 만난셈. 그러나 오히려 이것이 전화위복이 될수도 있다는 이야기도 있긴 하다.

결국 퍼시픽 리그는 4월 12일로 개막이 연기되었고 라쿠텐은 한신의 양해를 얻어 고베 홋토못토 필드 고베를 임시 홈구장으로 삼기로 했다. 이 구장은 오릭스 오사카 교세라돔으로 옮기기 전, 그러니까 오릭스 긴테츠의 합병 이전에 사용했던 구장으로 1995년 고베 대지진 때 오릭스가 우승 전력이 아니라는 평을 뒤집고 리그 우승을 일군 구장이기도 하다.

아무튼 이 일 등으로 인해 결국 2011년 성적은 5위로 마감했다. 6위는 전년도에 일본시리즈에서 우승했던 치바 롯데 마린즈.

2012년도에도 5위를 기록하고 있었는데, 그 아래에는 조선의 4번 타자 혼자서 야구하는 팀이 바닥을 깔고 앉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올스타전을 기점으로 해서 팀이 손발이 맞아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전반기에 1위를 달리던 치바 롯데 마린즈 DTD하는 것과 궤를 같이하면서 승수를 쌓아올려서 한 때는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까지 사정권에 들어올 정도였으나 결국 막판에 소프트뱅크의 UTU에 밀려서 4위로 마감했다. 하지만 3위였던 소프트뱅크와는 불과 1게임차로 2009년 이후로 3년만에 팀 역사상 두번째 시즌 5할 승률에 성공했다.

3.4. 2013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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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단 첫 리그 우승과 일본시리즈 우승을 달성한 기념비적인 시즌.

3.5. 2014 시즌

라쿠텐 감독을 맡을때부터 허리 통증을 가지고 있었던 호시노 센이치 감독이 결국 5월 말을 기점으로 치료를 위해 무기한 휴가를 낸 상태. 팀 역시 다나카 마사히로가 해외로 진출하고, 케빈 유킬리스가 완벽한 먹튀가 되면서 전반기가 끝난 시점에서 퍼시픽리그 최하위를 기록 중. 설상가상으로 9월 29일 오릭스전부터 10월 7일까지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하고 전년도 일본시리즈 1위팀이 퍼시픽리그 꼴찌로 떨어지고 마는 최악의 수모를 당하고 말았다.[19] 예전에 한국프로야구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그나마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덕분에(?) 종합 꼴찌는 면했다.

결국 이번 시즌은 리빌딩이 될 것이라 천명되며 일찌감치 시즌은 포기한 상황.

호시노 센이치 감독은 시즌 후 지도자 은퇴를 선언하며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한편 10월 7일 마지막 경기에서 호시노 센이치 감독의 은퇴식이 있었다.

3.6. 2015 시즌

2014 시즌만큼이나 2015 시즌도 암울해 보이는 상황. 전반기를 마무리한 7월 20일 현재 36승 3무 43패로 파리그 5위에 랭크되어 있다. 교류전에서 한신 타이거스에 3연전 싹쓸이를 허용하긴 했지만 다른 세리그 팀들을 어찌어찌 잘 잡아내며 버텨서 치바 롯데 마린즈와 완벽히 똑같은 10승 8패의 성적으로 교류전을 마감한 게 위안거리. 그러나 그 뒤로 패를 무지하게 쌓더니 9월 15일 닛폰햄전에서 패해 기어이 꼴찌로 추락했다.

오쿠보 히로모토 감독이 2년 연속 B클래스의 책임을 지고 8월 28일에 사퇴 의사를 밝혔고, 10월 1일 나시다 마사타카 전 긴테츠[20], 닛폰햄 감독을 신임 감독으로 임명했다. 시즌 도중 타시로 토미오 타격코치[21] 가 자진 사퇴하는 등 곡절이 많았고, 이 과정에서 미키타니 구단주의 현장 개입과 코치진들과의 불화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프리미어 12에서도 에이스 노리모토 다카히로 4강전 9회에 등판해 한국 타자들에게 탈탈 털리면서 패배의 주범이 되어 팬들에게 비난을 받고 있다. 물론 노리모토의 탓이라기보다는 오타니 쇼헤이가 내려간 뒤 상대적으로 공이 느린데다 원래 장기 이닝 관리능력이 우선시되는 전문 선발 투수[22]로 교체를 한 고쿠보 히로키 감독의 실수.

3.7. 2016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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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2017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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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2018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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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 2019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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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 2020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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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 2021 시즌

우여곡절 끝에 리그 3위를 확정했고 클라이맥스 시리즈에 진출했다.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치바 롯데 마린즈의 리그 우승 도전에 번번이 고춧가루를 뿌리면서 나름 파리그 3위권에서 버텼고, 결국 가을야구 진출을 확정했으나 3위라서 일본시리즈 진출까지는 모든 경기를 원정으로 치르게 되었다. 퍼스트 스테이지에서는 롯데를 만나 대결을 펼쳤는데 1무 1패로 포스트시즌을 마감했다.[23]

3.13. 2022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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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4. 2023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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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 2024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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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팀내 고참이었던 코쿠보 히로키를 위시한 선수단과 프런트 간의 갈등이 심했고, 2003년 시즌 이후 부상 치료비를 요구하던 코쿠보를 무상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보내버릴 정도로 막장일변도를 달리고 있었다. 다행히 호크스는 2004년 시즌 종료 후 소프트뱅크가 인수하여 그 요미우리 자이언츠보다 빵빵한 자금력을 자랑하는 팀이 되었다. [2] 신죠 츠요시의 똘끼넘치는 퍼포먼스는 이처럼 긴 세월 동안 요미우리, 야쿠르트 등에 밀려 존재감 없이 도쿄에서 간신히 버텨왔던 닛폰햄 구단이 새 연고지 홋카이도에 정착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고, 전력적으로도 2004년 플레이오프 진출과 2006년 일본시리즈 우승을 통해 홋카이도에 성공적으로 정착하는데 성공했다. [3] 여기에 오치아이 히로미츠, 와카마츠 츠토무 등의 OB들도 후루타와 선수회의 편을 들어주며 합병 반대에 동참했다. [4] 센다이에 프로야구팀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었다. 롯데 오리온즈 집시 롯데 시절에 주로 센다이에서 홈경기를 치렀고, 1974년엔 일본시리즈 우승까지도 했다. 그러나 당시 롯데는 일본시리즈 홈경기를 미야기 구장의 관객수용량이 일본시리즈 개최조건인 3만명에 미달한다는 이유로 고라쿠엔 구장에서 치르거나, 우승 퍼레이드를 옛 연고지인 도쿄도에서만 치르는 등 센다이를 찬밥취급하면서 사실상 임시 연고지로 취급했고, 결국 센다이에 완전히 정착하지 않은 채 여기저기를 떠돌아 다니며 시즌을 치르다가 결국 1978년 카나가와현 카와사키시에 정착했다. [5] 공교롭게도 우승을 결정지어준 것이 바로 라쿠텐. 당시 오릭스가 정규시즌을 마친 상황에서 2위 치바 롯데 마린즈의 잔여경기의 결과에 따라 우승이 갈리는 상황이 되었는데, 라쿠텐이 롯데를 이기면서 롯데의 매직넘버가 완전히 소멸하여 오릭스의 우승이 결정되었다. [6] 블루웨이브 시절인 1995년에도 일본시리즈에서 야쿠르트에게 패했다. [7] 이렇게 건너온 선수 중 대표적인 선수가 오릭스 수뇌진과의 불화로 방출되며 퇴물 취급을 받고 그대로 은퇴 위기에 놓였다가 주니치 선배였던 초대 감독 타오 야스시가 불러들인 야마사키 타케시가 있었는데 이 해에 25홈런을 치면서 완벽하게 부활에 성공했고, 이후 NC 다이노스 초창기의 이호준과 같이 팀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8] 초대 단장으로 미국인 마티 키너트(Marty Kuehnert)란 사람이 임명되었는데 일본프로야구 사상 첫 외국인 단장이었다. 이미 일본에서 30년 가까이 여러 팀에서 프런트를 역임하면서 스포츠 마케팅, 에이전트 등 각종 부문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었으나 2005 시즌 초반 극도의 부진의 책임을 지고 개막 후 얼마 안가 단장직에서 해임되었다. 이후엔 일본 농구 B리그의 센다이 89ers의 시니어 GM을 역임했다. [9] 창단 용병으로 한국프로야구에서 뛰었던 케빈 호지스 게리 레스가 있었을 정도. 둘 다 6점대 방어율을 찍었다. [10] 경기 기록지. 상대 선발 와타나베 슌스케는 9이닝 동안 안타와 볼넷을 각 하나씩만 허용했고 그나마도 그렇게 나간 주자들은 다 병살로 잡아들여서 27타자 완봉승에 성공했다. (추후 개별 경기 문서로 분리할 예정) [11] 그나마 창단 첫 홈 개막전은 16-5로 이기기는 했다. [12] 주니치는 원년에 유일하게 루징을 기록해줬을(...) 뿐만 아니라 무상 트레이드로만 4명의 선수(코야마 신이치로, 키토 마코토, 세키카와 코이치, 사카이 타다하루)를 보내줬을 정도로 신생구단이던 라쿠텐에 이런저런 공헌을 많이 해주었고, 오프시즌에도 자리가 없던 외야 유망주 츠치야 텟페이를 현금 트레이드로 라쿠텐에 보내주었다. 이외에도 다른 팀에 있다가 라쿠텐에 온 야마사키 타케시, 나카무라 타케시나 잠시나마 주니치 소속 경력이 있었던 마스다 다이스케, 코이케 히데오에 창단 감독인 타오 야스시까지 주니치 OB였던 만큼 초창기 라쿠텐에는 좀 의아하다 싶을 정도로 주니치 출신 인물들의 비중이 많았다. [13] 2002년 롯데 자이언츠가 35승 1무 97패로 승률 0.265를 기록했다. 02롯데는 도대체 얼마나 막장이던 건가... [14] 이 해 센트럴리그 수위타자는 2년차 중고신인이었던 아오키 노리치카의 .344였다. [15] 이게 33-4의 복선이 되기도 했는데, 이 해 퍼시픽리그 2위였던 치바 롯데 마린즈의 승률 자체가 당해 세리그 우승팀 한신 타이거스의 그것보다 더 높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승률 인플레이션에 의한 것이기는 했지만... [16] 이 과정조차도 꽤 막장이었는데, 해임 당시 타오에게 "남은 계약금은 공로금 형식으로 주겠으나 라쿠텐 기업이나 구단의 명예를 훼손하는 발언을 할 시 원래 줘야 할 금액을 삭감한다"고 사실상 입을 막아버리는 방식의 통보를 날렸다(...) 당연하겠지만 이 통보에 격분한 타오는 1년치 계약금만 받기로 하며 구단과 손절을 택했다. [17] 특히 따뜻한 도미니카 공화국 출신의 라쿠텐 3루수 호세 페르난데스(1974)는 복면까지 걸치고 나오는 방한대책에도 불구하고 2실책에 기록되지 않은 실책성 플레이 1개를 기록했다. 그 와중에 밀어쳐서 홈런을 친 일본 시절의 카림 가르시아도 보인다 [18] 노무라는 본래 4번타자에 선수 겸 감독까지 역임했던 난카이 호크스 프랜차이즈 스타였지만 선수 겸 감독 시절 말기에 당시 불륜 관계였던 아내의 선수단 내 간섭이 문제시되는 바람에 쫓겨나듯이 난카이를 떠나게 되면서 이후 호크스와는 죽기 1년 전 OB전에 참가할 때까지 인연 자체가 끊어져 버렸었다. 심지어는 호크스가 후쿠오카로 떠난 이후 만들어진 난카이 호크스 기념관에도 노무라에 대한 자료는 일체 실려있질 않다가 사후에야 유품 일부가 전시되었을 정도. [19] 비슷한 예로 2010년 일본시리즈 우승팀인 치바 롯데 마린즈가 다음 해에 꼴찌로 추락한 전적이 있다. 그러고 보니 롯데도 1970년대에 잠깐 미야기 현에 있었던 적이 있다. 그 당시엔 롯데 오리온즈였지만은. [20] 참고로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의 마지막 감독이기도 하다. 2004년 긴테츠의 시즌 마지막 경기이자 최후의 경기 때 이 사람이 남긴 말인 "모두들 가슴을 펴고 플레이해라. 너희들이 달고 있는 등 번호는, 모두 긴테쓰 버팔로즈의 영구결번이다(みんな胸を張ってプレーしろ。お前たちが付けている背番号は、すべて近鉄バファローズの永久欠番だ)." 는 지금도 야구계에서 명언으로 평가되는 말이기도 하다. [21] 요코하마 다이요 훼일즈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 2011년 SK 와이번스 타격 코치를 지내다가 김성근 감독의 경질과 함께 사퇴했는데, 공교롭게도 라쿠텐에서도 비슷한 일을 겪게 되었다. [22] 노리모토는 신인인 2013년부터 줄곧 선발 투수로만 활동했다. [23] 파이널 시리즈에서는 치바 롯데 마린즈와 리그 1위 오릭스 버팔로즈간 경기에서 오릭스가 이겨 일본시리즈에 진출했는데 거기서 만난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에게 패배해 우승을 놓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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