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비 레이놀즈의 주요 수훈 및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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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66051a><colcolor=#ffffff> 데비 레이놀즈 Debbie Reynold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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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Mary Frances Reynolds 메리 프랜시스 레널즈 |
출생 | 1932년 4월 1일 |
미국 텍사스주 엘패소 | |
사망 | 2016년 12월 28일 (향년 84세) |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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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배우, 가수 |
데뷔 | 1948년 |
신체 | 157cm |
배우자 |
에디 피셔(1955년~1959년) 해리 칼(1960년~1973년) 리처드 햄릿(1984년~1996년) |
자녀 |
딸
캐리 피셔(1956년생) 아들 타드 이매뉴얼 피셔(1958년생) |
종교 | 기독교[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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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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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위상
한국에서는 진 켈리 주연의 < 사랑은 비를 타고>(1952)의 여주인공으로만 알려져있지만, 미국에선 만인의 연인 위상이었다. 인형처럼 작고 마른 체형을 평생 유지해 사랑스럽다는 표현이 자주 붙었다. 도리스 데이, 준 앨리슨과 함께 이웃집 소녀 계열로 분류되는데, 레널즈는 이 계통에 흔히 따라붙던 말괄량이 같은 측면을 많이 줄인 게 특징이었다. 성적 매력을 과시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 딸 캐리 피셔와 사이가 안 좋다는 게 알려졌을 때 부정 여론이 형성되긴 했지만, 그 외엔 영상 경력이 부진하던 시기에도 미국 대중들에게 별 기복 없이 호감을 얻었다. 특히 1950-60년대에 출연한 뮤지컬 영화들로 유명하다. 아카데미상, 에미상, 골든 글로브에 후보 지명됐었지만 수상에는 실패했다.3. 생애 및 활동
어려서부터 마을의 교향악단과 협업하거나 학교 연극에 출연하곤 했다.16살 때 캘리포니아주 버뱅크시에서 매년 주최하는 버뱅크 온 퍼레이드[2]라는 축제의 일환인 버뱅크 미인 대회[3]에서 1등을 하면서 스크린 테스트를 받는 기회를 얻었다. MGM과 워너 브라더스가 계약을 따내려고 경쟁했는데 레널즈는 후자를 택했다. 레널즈가 출전했던 이유는 사실 부상 중의 하나인 스웨터가 갖고 싶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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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에 변변찮은 배역만 안겨주던 워너를 떠나 MGM과 계약했다. 1957년까지는 거의 독점으로 일했지만 그 뒤엔 다른 제작사 작품에도 많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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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부터 나이트클럽 행사를 뛰기 시작하며 춤 노래를 겸비한 캬바레 공연자로서의 성격을 더 부각시켰다. 이후 평생 나이트클럽, 카지노, 리조트를 돌아다니며 성실하게 공연했다.
젊어서는 발랄하고 순진한 배역을 많이 맡았는데, 90년대에 영상에 복귀한 뒤엔 소시적 모습을 패러디하며 예전과 정반대 성격의 배역들을 주로 연기했다. '과거의 스타'라는 이미지를 자조적인 유머가 섞인 인물들로 승화해서, 자칫 부정적일 수 있는 요소를 역으로 잘 활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물론 이는 딸 캐리 피셔와의 긴 불화 과정에서 기존의 호감상이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입어 더는 쓸 수 없게 됐기 때문이기도 하다.
1994년에 라스베이거스에 '데비 레널즈 호텔'과 ' 카지노'를 열었다가 1998년 경매로 팔았다. 경영하는 동안엔 여기에 딸린 공연장에서 직접 나이트클럽식 공연을 했었다. 또한 레널즈는 몇 년 동안 영화 속 의상들 수만 점을 수집해놨었는데, 이중 일부를 이 복합공간에 연 할리우드 영화 박물관[4]에 전시했었다.
레널즈의 소장품 중엔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 클레오파트라>(1963)에서 썼던 황금가발 머리장식과 리처드 버튼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의상이 있었다. 이런 소장품들을 전부 전시하는 박물관을 짓는 게 꿈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진척이 없어 2011년 거의 다 경매로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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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릴린 먼로의 < 7년만의 외출> 드레스 소유자이기도 했다. 역시 같은 경매에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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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릴 스트립은 2015년 아카데미 거버너즈 어워즈[5]에서 레널즈에게 진 허숄트 박애상을 수여하며 레널즈가 이처럼 할리우드의 역사를 보존하려고 노력한 공로를 상찬했다.
3.1. 죽음
딸 캐리 피셔가 사망한 지 하루 만에 사망하여 대중에게 안타까움을 주었다.사후 워너 브라더스에서 추모의 의미로 자사 출연작들 컴필레이션 영상을 올려주었다.
4. 주요 작품
4.1. 영화
<rowcolor=#ffffff> 개봉 연도 | 제목 | 배역 | 비고 | ||
1948 |
준 브라이드 (June Bride) |
부스 걸프렌드 앳 웨딩 | |||
1950 |
투 윅스 위드 러브 (Two Weeks With Love) |
[6][7] | |||
로지 오그래디의 딸 (The Daughter Of Rosie O'Grad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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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세마디 (Three Little Words) |
헬렌 케인 |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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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 |
1951 |
미스터 임페리엄 (Mr. Imperiu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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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 |
스커트 어호이 (Skirts Aho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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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비를 타고 (Singin' in the Rain) |
'케시 셀든 | ||||
1953 |
그녀에게 기회를 (Give a Girl a Break) |
수지 둘리틀 | |||
내가 사랑한 멜빈 (I Love Melvin) |
주디 슈나이더 / 주디 리로이 | ||||
어페어 오브 도비 길리스 (The Affairs of Dobie Gilli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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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 |
수잔은 여기 자고 있다 (Susan Slept He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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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나 (Athena) |
미네르바 멀베인 | ||||
1955 |
히트 더 덱 (Hit the Dec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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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더 트랩 (The Tender Trap) |
줄리 길리스 | ||||
1956 |
케이터드 어페어 (The Catered Affai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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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트 미 인 라스 베가스 (Meet Me In Las Vega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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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들 오브 조이 (Bundle of Jo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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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 |
태미와 독신자 (Tammy and the Bachelor) |
[11] | |||
1958 |
디스 해피 필링 (This Happy Feeling) |
자넷 블레이크 | |||
1959 |
짝짓기 게임 (The Mating Gam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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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키스로 시작했다 (It Started with A Kis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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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제보 (The Gazeb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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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
페페 (Pep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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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조건 (The Rat Race) |
페기 브라운 | ||||
1962 |
마이 식스 러브스 (My Sic Loves) |
자니스 코트니 | |||
서부 개척사 (How the West Was Won) |
릴리스 프레스콧 | [] |
|
] | |
1964 |
언싱커블 몰리 브라운 (The Unsinkable Molly Brown) |
[13][] |
|
] | |
굿바이 찰리 (Goodbye Charlie) |
환생한 찰리 소렐 | ||||
1966 |
노래하는 수녀 (The Singing Nun) |
앤 수녀 | |||
1967 |
디보스 아메리칸 스타일 (Divorce, American Style) |
바바라 하몬 | |||
1968 | 유럽에서 생긴 일 | ||||
1969 |
데비 레이놀즈 앤드 더 사운드 오브 칠드런 (Debbie Reynolds and the Sound of Children) |
본인 | |||
1973 |
샬롯의 거미줄 (Charlotte's Web) |
샬롯 목소리 | |||
1976 |
댓츠 엔터테인먼트, 파트 2 (That's Entertainment!, Part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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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 |
엔터테인먼트 (That's Entertainmen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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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
여형사 세이디 (Sadie And S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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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 |
베트링 포 베이비 (Battling For Bab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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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디가드 (The Bodyguard) |
데비 레이놀즈 | ||||
1994 |
하늘과 땅 (Heaven & Earth) |
유지니아 | |||
엔터테인먼트 3 (That's Entertainment! 3) |
본인 / 내레이터 | ||||
1996 |
스위트 마마 (Mother) |
베아트리스 헨더슨 | |||
웨딩 벨 블루스 (Wedding Bell Blu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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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
잭 앤 리바 (Zack and Reba) |
블레톤 | |||
라스베가스의 공포와 혐오 (Fear And Loathing In Las Vega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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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코 순록 루돌프 (Rudolph The Red-Nosed Reindeer: The Movi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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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로윈타운 (Halloweentown) |
애기 크롬웰 | ||||
더 크리스마스 위시 (The Christmas Wish) |
루스 | ||||
인 앤 아웃 (In & Out) |
베르니스 브라켓 | ||||
1999 |
사랑의 선물 (A Gift of Love: The Daniel Huffman Stor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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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
러그래츠 2: 파리 대모험 (Rugrats in Paris) |
목소리 | |||
2001 |
할로윈타운 2: 칼라바의 복수 (Halloweentown 2: Kalabar's Revenge) |
애기 크롬웰 | |||
디즈 올드 브로즈 (These Old Broads) |
피퍼 그레이슨 | [15][] |
|
] | |
2004 |
할로윈타운 하이 (Halloweentown High) |
애기 크롬웰 | |||
코니와 칼라 (Connie and Carl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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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
마녀 배달부 키키 (Kiki's Delivery Service) |
미스 도라 목소리 | |||
미스터 웜스 - 돈 리클스 프로젝트 (Mr. Warmth: The Don Rickles Project) |
본인 | ||||
2008 |
워너 브라더스 (The Brothers Warner) |
본인 | |||
춤추는 할리우드 - 뮤지컬의 역사 (Hollywood Singing and Dancing: A Musical Histor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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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
보이즈 - 셔먼 브라더스 스토리 (The Boys: The Sherman Brother's Stor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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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
디즈 어메이징 섀도우 (These Amazing Shadows) |
본인 | |||
2012 |
원 포 더 머니 (One for the Money) |
할머니 마주르 | |||
캐롤 채닝: 라저 댄 라이프 (Carol Channing: Larger Than Life) |
본인 | ||||
2013 |
쇼를 사랑한 남자 (Behind the Candelabra) |
프란시스 | [] |
|
] |
2015 |
탭 헌터 컨피덴셜 (Tab Hunter Confidential) |
본인 | |||
2016 |
브라이트 라이츠: 스타링 캐리 피셔 앤드 데비 레이놀즈 (Bright Lights: Starring Carrie Fisher and Debbie Reynolds) |
본인 |
4.2. 공연
-
1973년 최초의
브로드웨이 나들이인 "아이린(Irene)"으로
토니상 후보에 올랐다.
맨해튼 웨스트사이드에서 작은 악기 가게를 운영하던
아일랜드 이민자 출신의 아이린(Irene O'Dare)이 우연히 모델이 되면서
롱아일랜드의 상류사회 사교계로 진출하고
재벌과 행복한 로맨스를 이루는 얘기다. 레널즈의 역은 1974년
제인 파월이 이어받았다.
사진 속에 코러스로 출연했던 딸
캐리 피셔의 모습이 보인다. 당시 16살이었다.
4.3. TV
- 1953-57년 첫 번째 남편인 가수 에디 피셔의 단독쇼인 NBC "The Eddie Fisher Show(디 에디 피셔 쇼)"에 고정출연에 준하는 빈도로 출연했다.
- 1960년 자신의 이름을 내건 첫 버라이어티 쇼 "A Date With Debbie"를 진행했다. 1967년에도 비슷한 양식의 "And Debbie Makes Six"를 만들었다.
- 1969-70년 제2의 " 왈가닥 루시"를 꿈꿨던 시트콤 "Debbie Reynolds Show(데비 레널즈 쇼)"는 1시즌 만에 끝이 났다. 이유 중의 하나는 레널즈가 담배 중간 광고를 넣는 걸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때 주인공 이름은 데비 탐슨(Debbie Thompson)이었다.
-
2003-7년 인기 애니메이션 "
킴 파서블"에서 나나 파서블(Nana Possible) 목소리를 연기했다. 이름에 나와있듯이 주인공 킴 파서블의 할머니 역이었다.
4.4. 기타
-
1980년대
제인 폰다가 만들어낸 운동비디오 열풍에 합류한 적이 있다. 1984년엔 "Do It Debbie's Way"를, 1988년엔 "Couples(Do It Debbie's Way)"을 냈다. 친분 때문에 할 수 없이 우정출연해 억지웃음을 짓는 관록 있는 배우
셸리 윈터스의 표정이 압권이다. 입고 있는 셔츠에 "이게 다 데비 레널즈 때문이다"라고 써있다.
5. 사생활
5.1. 가족관계
아버지는 남태평양 철로 공사에서 일하던 목수였다.스타워즈 시리즈의 주인공 레아 오르가나 역을 맡은 캐리 피셔가 딸이다. 피셔와는 심각한 냉전 기간이 있었다. 워낙 떠들썩했던 일이었기 때문에 두 모녀의 관계만을 다룬 종이책까지 나와있다.
1987년 피셔가 출판한 소설 "할리우드 스토리(Postcards from the Edge)"에 자전적 요소가 있다는 관측이 돌면서 호사가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1990년 이 반자전적 소설을 바탕으로 캐리 피셔가 직접 대본을 쓰고 마이크 니컬스가 연출한 영화가 만들어졌을 땐 언론의 부정적 보도가 절정에 달했다. 원작 소설 속의 엄마는 주인공과 갈등이 컸던 것으로 암시되긴 하지만, 마약재활원에 들어간 딸을 병문안 하는 장면에서만 잠시 나오고 딸의 속옷 빨래를 해주고 떠나곤 한다. 그러나 영화에선 엄마 역할의 비중이 주인공 급으로 커졌고, 늘 관심을 필요로 하는 주정뱅이로 묘사됐다.
소설이 화제가 된 이후 이를 바탕으로 한 영화가 한참 유통되던 몇 년 동안, 레널즈가 피셔를 오랫동안 -심지어 성인이 되어서까지- 학대를 한 것 같다는 폭로성 보도가 이어졌다. 피셔는 당시 이런 추측을 부인하지 않고 대중의 심증을 더해주는 행보를 보였다. 젊은 시절엔 국민여동생으로 여겨졌던 레널즈였지만 1977년 < 스타워즈>가 나온 후론 청년 및 중년층에겐 그저 ' 레아 공주 엄마'가 돼있었기 때문에 레널즈를 향한 여론이 험악해졌었다. 장년층에겐 레널즈가 워낙 "흠 잡을 데 없이 깨끗한" 이미지였기 때문에 더 충격으로 다가왔다.
나중에 레널즈가 영상 작업에 복귀해서 맡은 배역들은 사실상 이 영화에서 묘사된 엄마의 모습을 조금씩 다르게 변주한 것에 불과하다. 레널즈와 캐리 피셔 두 사람이 사망할 즈음엔 학대 의혹은 완전히 사그라들어 처음부터 없던 얘기처럼 되어버렸지만, 노년의 레널즈 이미지는 이 영화 속 엄마의 모습으로 영원히 고정되고 말았다.
하필 대중 호감도가 매우 높은 메릴 스트립이 캐리 피셔에 해당 되는 역을 맡고, 80년대 중반부터 좀 이상한 사람이란 취급을[18] 받던 셜리 맥클레인이 레널즈에 해당되는 역을 맡은 것도 문제였다.[19] 이조차도 피셔의 의도라는 얘기까지 나왔었다. 이 영화로 스트립과 맥클레인은 함께 BAFTA와 골든 글로브 후보에 올랐고, 스트립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 자리까지 거머줬다.
그래도 영화는 결말을 훈훈하게 끝냈고, 몇 년이 지난 뒤 캐리 피셔는 실제로 두 사람 사이에 있던 일들을 그대로 적은 게 아니라고 언급하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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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2000년대부터는 과거를 뒤로 한 채 사이를 조금씩 회복시키고 있었다. 사망 직전엔 서로의 집을 걸어서 오갈 수 있는 거리에서 살기도 했다. 레널즈의 유언도 '딸과 함께 하고 싶다'였다. 두 모녀의 애증 관계는 2016년 HBO에서 <Bright Lights: Starring Debbie Reynolds & Carrie Fisher>라는 다큐멘터리로 만든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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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비비를 제대로 다 따지지 않은 상태에서 두 사람이 모두 사망했기 때문에 모녀의 냉각기에 언론에서 떠들어대던 것 중에서 무엇이 진실이었는지는 이제 아무도 모르게 되었다. 다만 레널즈가 딸 캐리 피셔가 미성년자일 땐 거의 방치했고 성인이 된 후엔 갑자기 지나친 간섭을 해댔으며 [20], 이 과정에서 캐리 피셔가 크게 상처를 입었던 것만큼은 사실로 보인다.
아들 타드 이매뉴얼 피셔[21]는 광고감독이자 영화제작자다.
5.2. 결혼과 이혼
첫 남편 에디 피셔와 커플로서 인기가 많았다. 피셔의 소녀팬들 인기의 주된 기반도 바로 사랑꾼 이미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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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레널즈는 말년에 프랭크 시나트러가 피셔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심각한 바람둥이이니 결혼하면 안 된다며 대놓고 말렸다고 밝혔다.
피셔는 사귈 때는 물론 결혼 기간 동안에도 당시 한참 이미지가 좋았던 레널즈 덕을 보기 위해 일부러 보여주기식으로 레널즈를 언론 앞에 데리고 다녔다는 증언들이 있다. 레널즈는 에디 피셔의 단독 TV 쇼에 자주 출연했었는데 이 역시 레널즈보단 피셔에게 득이 됐다고 한다.
레널즈 몰래 여러 여성들과 바람피던 피셔는 1958년 10대 시절부터 레널즈의 절친이었던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살겠다며 가정을 저버렸다. 결국 레널즈는 1959년 피셔와 이혼했고, 졸지에 홀로 어린 두 아이를 떠맡은 한부모 가정의 가장이 되었다. 한편으론 이 사건으로 대중들 사이에 레널즈에 대한 동정 여론이 모여 1958-60년 작품 흥행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1961년 테일러가 폐렴으로 죽음의 고비를 넘나드는 과정에서 다시 대중의 지지를 받게 되면서 이런 기조가 줄어들게 된다.
레널즈에 따르면 피셔가 언제나 친구 테일러의 남편이 되고 싶어했다는 걸 사실 내심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어차피 모든 남자들이 테일러의 남편이 되고 싶어했기 때문에" 그러려니 했다고. 그런 심리가 있을 뿐이지 진짜로 실천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피셔는 테일러의 남편이자 절친이었던 마이크 타드가 죽자마자 타드의 성격은 물론 사소한 취미들까지 모방해가는 정성을 들이며 "인격을 아예 타드로 갈아끼워" 넋이 나가있던 테일러를 포섭했고, 결국 레널즈의 귀에까지 불륜 소문이 들려와[22] 피셔에게 따져물으려고 하는 순간 피셔가 먼저 이혼을 요구해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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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시나트러를 기죽일 정도의 위세를 떨치던 에디 피셔는 "대중 앞에 선보이기엔 너무 부도덕한" 인물이란 이유로[23] 바로 TV에서 쫓겨났고 팬층이 완전히 떨어져나가 다시는 재기하지 못했다. 피셔 본인이 레널즈를 앞세워 잉꼬부부 이미지를 지나치게 홍보했던 것이 독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자신이 레널즈의 억울한 피해자라고 거듭 큰소리로 주장하는 바람에 대중의 마음을 되돌리지 못했다.[24][25]
피셔는 양육비를 단 한 번도 보내지 않았고, 캐리 피셔 등 자녀들에게도 전화 한 통 하지 않았다고 한다. 레널즈는 원래부터 불륜의 1차 책임이 피셔에게 있다고 생각하긴 했으나 후에 보여준 이런 적반하장의 태도 때문에도 더 그를 용서하지 못했다.
테일러도 피셔와 마찬가지로 레널즈를 매우 괴롭게 한 장본인이지만 자신의 행동에 대해선 결코 변명한 적이 없다. 그래서인지 레널즈는 테일러에게 큰 배신감을 느꼈음에도 1961년 테일러의 생사가 위독해졌을 땐 테일러의 다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안부를 물으며 응원하는 전보를 보내기도 했다. 1964년 우연히 테일러와 배 안에서 마주친 뒤엔 테일러를 용서하고 다시 친구로 지냈다. 테일러는 리처드 버튼과, 레널즈는 제화업계 재벌과 각각 재혼한 상태였을 때였다. 캐리 피셔에 따르면, 둘은 화해한 뒤엔 당시 사건을 농담 소재로 쓰며 웃으며 얘기하곤 했다고.
결국 에디 피셔는 1970년 파산에 이르렀다. 대중의 정서를 끝까지 이해하지 못한 피셔는 자서전에서도 자신이 테일러와 바람피기 이전에 이미 레널즈 때문에 결혼생활이 망가져 있었다며, 레널즈가 언론에 거짓말하는 솜씨는 그야말로 최우수 연기자상감이라고 맹비난했다. 결국 피셔는 사망한 현재까지도 거의 기록말살형에 처해져있다. 테일러-버튼의 얘기가 끝없이 재생산되는 것과 달리 그에 준하는 대형 스캔들이었던 테일러-피셔-레널즈의 삼각관계는 따로 영상화 되는 법이 없다. 생전에도 피셔의 입장은 들어볼 것도 없다는 게 방송계 인식이라 당시 일을 다룰 때 간단한 전화 인터뷰조차 생략 당하곤 했다. 피셔가 본인의 경력을 걸 정도로 테일러를 좋아했고, 테일러-버튼 스캔들에선 다시 가해자에서 피해자의 위치가 됐기 때문에 피셔에 대한 이런 처우를 아쉬워하는 일부 음악업계인들의 반응도 존재한다.
두 번째 남편인 제화업계 재벌은 레널즈와 결혼할 당시엔 건실한 사람이었지만, 차차 레널즈의 돈을 함부로 도박에 탕진하게 됐고 사업을 방치한 끝에 바람도 피웠다. 부동산 개발업자였던 마지막 남편도 비슷했다. 세 번의 결혼생활이 다 비슷하게 끝나서 해탈한 레널즈는 본인이 "남자 보는 눈이 정말 없다"고 말하고 다녔다.
6. 여담
- 2015년 미국영화배우조합 평생공로상을 받았다.
- < 사랑은 비를 타고>(1952) 촬영 도중 진 켈리가 사전합의 없이 키스신에서 갑자기 프렌치 키스를 해서 울며 촬영을 중단한 일이 있었다. 자신이 "더럽혀졌다고" 느낀 레널즈는 침을 뱉고 코카콜라로 입을 헹군 뒤 간단한 입술 맞대기가 아니면 촬영하지 않겠다고 했다. 나중에 둘은 친구가 됐지만 레널즈는 자서전에서 이때의 일만큼은 "추행(assault)"으로 느껴졌다고 적었다.
- 제임스 딘의 연인으로 유명한 피어 앤젤리와 절친이었다. 앤젤리가 레널즈의 집에서 산 적도 있다.
-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관계를 회복한 뒤엔 토크쇼에서 둘의 관계를 묻는 게 일종의 네타가 되었다. 진행자가 정말 용서한 거 맞냐고 끈질기게 물어보면 레널즈가 나중에 방송 끝나고 따로 얘기하자고 윙크를 하는 식.
- 원래 머리카락 색은 갈색이다.
[1]
Stephanie Nolasco, “
Debbie Reynolds’ faith in God ‘got her through all the difficult times,’ son Todd Fisher says,”
폭스 뉴스, 2021년 11월 6일.
[2]
Burbank on Parade.
[3]
Miss Burbank Beauty Contest.
[4]
Hollywood Movie Museum.
[5]
Governors Awards.
[6]
칼튼 카펜터[27]와 부른 "Aba Daba Honeymoon"이
빌보드 싱글 차트 3위에 오르면서 주목 받았다.
[7]
[8]
골든 글로브 신인상 후보[28]에 올랐다.
[]
[10]
}}
[11]
이 작품의 넘버 "Tammy"로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에 올라 5주 동안 자리를 지켰다.
[]
[13]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
[15]
딸
캐리 피셔가 대본을 썼다. 친구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함께 출연했다. 테일러와 레널즈의 옛 삼각관계 스캔들이 반영돼있는 대사들이 나온다.
캐리 피셔는 "엄마와 테일러가 서로에게 한 번쯤은 분명하게 했어야 하는 얘기를 영화 대사를 통해 하게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
[]
[18]
자세한 내용은
셜리 맥클레인의
뉴에이지 활동 항목 참조.
[19]
맥클레인과는 나중에 뒤에서 둘이 잘 풀었는지 피셔가 역시 대본 작가였던 <디즈 올드 브로즈>(2001)에 공동주연으로 같이 나왔다.
[20]
캐리의 마약 중독 때문에 소량 마약 복용을 권유한
캐리 그랜트랑 데비가 싸웠다는 얘기가 있다.
[21]
Todd Emmanuel Fisher.
[22]
파티에 갔는데 자신이 등장한 순간 다들 갑자기 수군거렸고 몇몇 단어가 귀에 꽂혔다고 한다.
[23]
당시 할리우드에도 지금처럼 바람핀 게 대외적으로 알려지고도 그대로 활동한 인물들은 많았다. 그러나 피셔는 방식과 상황이 너무 악질적이어서 덮고 지나갈 수가 없었다.
[24]
같은 시기에 활동한
프랭크 시나트러도 여자 문제로 비슷한 위기를 몇 번 겪었다. 특히
에바 가드너와 결혼했을 땐 피셔 수준까지는 아니어도 심각하게 비난 받았다. 그러나 시나트러는 레널즈에게 시인했듯, 피셔와 달리 자신의 성향과 객관적 상황을 인정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피셔와 달리 대중의 비판에 반발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늘 용서 받아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피셔 역시 고집을 꺾고 대중의 기분을 헤아렸다면 얼마든지 반등할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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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이 된 사안은 전혀 다르지만 미국민들에게 있어 피셔는
유승준과 유사한 경로를 거쳤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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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 Hunter. 1931 -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