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23 13:35:01

대막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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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선제기(宣帝紀)」 2권 「경제문제기(景帝文帝紀)」 3권 「무제기(武帝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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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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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권 「여광등재기(呂光等戴記)」
여광 · 여찬 · 여륭
123권 「모용수재기(慕容垂戴記)」 124권 「모용보등재기(慕容宝等戴記)」
모용수 모용보 · 모용성 · 모용희 · 모용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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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권 「독발오고등재기(禿髪烏孤等戴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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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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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戴邈
생몰연도 미상

동진의 인물로 자는 망지(望之). 서주 광릉군(廣陵郡) 광릉현(廣陵縣) 출신.

2. 생애

어릴 적부터 학문을 가까이 하여 《사기》와 《한서》에 정통하여 학식은 당시 배를 타고 해적질이나 하고 다니던 형 대연보다 나았다. 20세가 되었을 때, 수재로 천거받아 태자선마, 서양내사를 역임졌다. 이후 난을 피해 장강을 넘어 강동으로 도망친 진동장군 낭야왕 사마예의 부름을 받고 그에게 귀부해 소릉내사로 임명받았다.

건흥 원년(313년) 8월, 승상군자좨주로 옮겨졌다가 정남군사마에 임명되었다.

건무 원년(317년) 11월, 진왕(晉王)에 오른 사마예에게 태학을 세울 것을 상소했다. 사마예가 이를 좇아 태학을 세우니 강동의 사람들은 비로소 중원의 예절을 배울 수 있었다.

영창 원년(322년) 3월, 반란에 성공한 왕돈은 평소 인망이 높았던 대연을 참살하고 그 동생 대막을 면직시켰다. 이후 왕돈이 평정되자 명제 사마소에 의해 다시 복직되어 상서복야를 지냈다. 그의 몰년은 불분명하나 상서복야 재직 중에 사망했고, 위장군으로 추증되었다. 시호는 목(穆). 아들 대밀(戴謐)이 후사를 이었고 관직은 의흥태수, 대사농에까지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