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코 밀리시치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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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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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코 밀리치치 Darko Miliči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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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85년 6월 20일 ([age(1985-06-20)]세) |
유고슬라비아 SFR 세르비아 SR 노비사드 | |
국적 |
[[세르비아| ]][[틀:국기| ]][[틀:국기| ]] |
신장 | 213cm (7' 0") |
체중 | 125kg (275 lbs) |
윙스팬 | 226cm (7' 5") |
포지션 | 센터 / 파워 포워드 |
드래프트 |
2003 NBA 드래프트 1라운드 2순위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지명 |
소속 구단 |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2003~2006) 올랜도 매직 (2006~2007) 멤피스 그리즐리스 (2007~2009) 뉴욕 닉스 (2009~2010)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2010~2012) 보스턴 셀틱스 (2012) |
등번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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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르비아 출신으로 역대 NBA 드래프트 가운데서도 최고 중 하나로 손꼽히는 2003년 드래프트에서 무려 전체 2순위로 NBA에 입성하며 엄청난 기대를 받은 선수였다. 그러나 본인의 멘탈 문제와 더불어 불운, 부상, 부진 등이 겹쳐 저니맨 신세가 된 뒤 쓸쓸하게 NBA 커리어를 마감한 비운의 선수.[1]2. NBA 드래프트 전
현 시점에서 상당수의 농구팬들은 '도대체 이 듣보잡 유럽 백인 꺽다리가 어떻게 2003 드래프트에서 무려 카멜로 앤서니, 크리스 보시, 드웨인 웨이드 등의 기라성같은 선수들을 모조리 제치고 전체 2순위로 선발된걸까?'란 의문을 품는 경우가 많으며,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은 그야말로 피스톤즈가 역대급 드래프트의 2번픽을 들고 멍청한 짓을 했다는 결과론적인 이야기만 오가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실상은 '드래프트 당시 이 선수가 2번 픽에 지명된 것은 '사람은 먹어야 산다' 수준으로 당연시되었다'는 것이다.다르코 밀리시치는 15세부터 유럽 프로리그에서 활약했고 이미 이 때부터 NBA 스카우터들의 주목을 받았다. 심지어 이미 유럽 국적의 선수로서는 디르크 노비츠키로 한 번 재미를 본 댈러스 매버릭스의 돈 넬슨과 도니 넬슨은 리그 규정을 위반하면서까지 다르코와 워크아웃을 치르다가 리그에 발각되어 징계를 당하기도 했다. 2002년 그리스에서 열린 FIBA 유럽컵 파이널 4에서 다르코가 엄청난 퍼포먼스를 보여준 후부터 본격적으로 2003 드래프트 2순위감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당시 디트로이트 단장 조 듀마스가 독단적으로 2번픽을 뻘짓으로 날려먹었다고도 알려졌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다르코가 피스톤즈와 워크아웃을 치렀을 때 우연히 벤 월러스, 천시 빌럽스, 리처드 해밀턴 등 피스톤즈의 주축 선수들이 함께 지켜봤는데, 워크아웃을 본 이들이 되려 다르코에게 홀딱 반해 "17살짜리가 못하는 게 없다."며 그를 뽑아야 한다고 난리였다. 2003 드래프트를 앞두고 선임된 신임 감독 래리 브라운은 2번 픽으로 카멜로 앤서니를 뽑자고 주장하긴 했지만,[2] 이미 듀마스는 다르코를 뽑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 있었다. 마침 피스톤즈의 포지션 또한 다르코의 포지션이 비어있었다. 카멜로 앤서니의 자리는 전 시즌 플레이오프에서 급성장한 테이션 프린스가 있었기에 당장 급하지 않았지만, 벤 월러스를 보좌할 빅맨 포지션은 아직은 설익은 메멧 오쿠어와 노장 엘덴 캠벨 정도만이 있었기에 이 자리를 다르코가 성장해서 채워준다면 딱 맞는 퍼즐 조각이었다.[3]
당시의 실상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흔히 얘기하는 결과론은 '2번픽으로 당연히 카멜로 앤서니를 뽑았어야 하는게 정상 아니냐'는 말인데, 실상은 정작 멜로를 뽑은 덴버 너기츠조차도 멜로 대신 다르코를 뽑고 싶어했다는 것이다. 당시 3순위 지명권을 갖고 있던 덴버 너기츠는 어떻게든 멜로 대신 다르코를 픽하고자 드래프트 직전까지 디트로이트와 픽을 바꾸려 시도했다. 결과적으로는 실패한 게 신의 한수가 되었던 셈. 드래프트 직전 대부분의 Mock Draft는 1순위 르브론 제임스, 2순위 다르코 밀리시치, 3순위 카멜로 앤서니를 거의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였고, 실제로 드래프트를 행사하는 각 팀의 단장들 또한 과반수 이상이 자기 팀이 2순위 지명권을 갖고 있다면 다르코를 픽할 것이라고 언급했다고 한다. 심지어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듀프리는 몇몇 단장은 자기팀이 1순위 지명권을 갖고 있었다면 르브론도 건너뛰고 다르코를 뽑을 거
사실 르브론이 대선수로 성장한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얘기지만, 당시 르브론에 대한 무지막지한 기대 뒤에 아주 소수지만 회의적인 시각도 있었다. 르브론은 엄청난 재능의 소유자였지만 프로레벨에선 주 포지션이 뭔지도 애매한 미완의 대기였고, 고작 2년 전에 콰미 브라운/에디 커리/타이슨 챈들러라는 실패작들을 겪었다. 물론 챈들러는 훗날 수비형 센터로 대성하지만... 물론 르브론의 재능이나 기대치는 이런 선수들과도 차원이 다르게 컸고, 1년 전에 아마레 스타더마이어란 성공작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기본기가 부족한 고졸은 망해도 크게 망한다는 걸 NBA에서 서서히 깨닫던 시절. 이런 상황에 르브론만큼 재능이 있어보이고 나이는 더 어린데다 유럽에서 프로물을 먹은 다르코이기에 사람들이 기대한 것이다.[4] 또한 다르코 이전 NBA에 입성한 디르크 노비츠키, 파우 가솔, 토니 파커, 페자 스토야코비치, 지드루나스 일가우스카스 등의 유럽 출신 선수들과 스티브 내시, 마누 지노빌리 같은 외국인 선수들 대다수가 NBA에서도 자산의 기량을 제대로 보여주면서 가치를 올리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NBA에서는 외국인 선수에 대한 환상도 커졌다.
당시 다르코에 대한 엄청난 기대치는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차치하고라도, NBA 사무국에서 다르코 하나 때문에 규정까지 바꿨다. 그 전까지 NBA 드래프트는 만 18세 이상만 참가할 수 있었지만, 다르코를 조금이라도 빨리 리그에 데뷔시키기 위해 만 17세 이상부터 참가가 가능하게끔 규정을 뜯어고쳤다. 다르코 하나를 위해 고친 규정이라 일명 '다르코 룰'이라고 불린 규정이다.
어느 누구도 다르코의 성공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만 17세에 이미 7피트의 신장과 더불어 탄탄한 하체, 유연성, 슛터치, 스틸 후 가드를 따돌리고 속공 마무리까지 가능한 스피드를 갖추고 있었고 프론트코트의 어떤 포지션도 소화 가능한 다재다능함까지 있었다. 여기에 유럽 프로리그에서 보여준 실적도 있었다. 당장 즉전감으로는 3번픽 카멜로 앤서니가 나을지 몰라도 향후 미래의 기대치는 다르코 쪽이 훨씬 높고, 어쩌면 르브론 이상으로 클 가능성도 있다는 것에 대부분이 의견을 같이 했다. 다르코 본인도 이를 의식한 듯 "르브론 제임스는 고등학생들을 상대해왔지만, 나는 15살때부터 성인 프로리그에서 뛰어왔다."는 말로 자신감을 내비쳤다.[5]
그의 향후 기대치는 같은 유럽 출신으로 2002년 신인왕인 파우 가솔이나 막 댈러스의 주축으로 자리잡은 디르크 노비츠키, 그리고 노비츠키의 파트너이자 절친인 스티브 내시 이상은 당연시되었고, 팀 던컨 급이냐 케빈 가넷 급이냐를 논하는 수준이었다.[6] 이전에 유럽 리그에서 활약해서 먼저 NBA로 입성했던 막 스퍼스의 주축 선수들이 되었던 토니 파커와 마누 지노빌리의 커리어와 활약은 가뿐히 뛰어 넘을 것이라는 평가도 많았다.[7][8] 심지어 ESPN의 칼럼니스트 채드 포드같은 경우는 다르코의 맥스 컴패리즌으로 고대괴수 윌트 체임벌린급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더 무서운건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채드 포드를 미쳤다고 생각한 게 아니라,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하고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그만큼 다르코에 대한 기대치만큼은 현 시점에선 그야말로 상상조차 되지 않을만큼 엄청났고, 그랬기에 드래프트 2순위 지명을 받은 것은 당시로서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지 절대로 피스톤즈의 뻘짓이 아니었다.[9]
3. NBA 커리어
3.1.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당연히 2순위로 피스톤즈에 지명되었지만 실은 다르코의 커리어가 시작부터 꼬인 셈이었다. 드래프트 동기들인 르브론 제임스, 카멜로 앤서니, 크리스 보시, 드웨인 웨이드는 모두 약체팀에 지명되어 신인 첫해부터 주전 보장과 함께 충분한 플레잉 타임을 부여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르코가 드래프트된 피스톤즈는 이미 전 시즌 컨퍼런스 파이널에 진출한, 우승을 노리는 강팀이었다.[10][11] 게다가 감독은 신인을 중용하지 않기로 유명한 래리 브라운. 다르코 입장에서는 악재에 또 악재가 겹친 셈이었다.[12][13]
신인 첫 해 벤 월러스, 메멧 오쿠어, 엘덴 캠벨에 이은 제 4의 빅맨으로서 벤치워머로 커리어를 시작했고, 가비지 타임에만 등장했다. 주로 크게 이기고 있는 경기의 종료 직전 나왔기 때문에 피스톤즈 팬들에겐 '승리의 토템' 취급을 받기도 했다. 아직 17살밖에 되지 않은 프로젝트형 선수로 여겨졌기에 다르코가 플레잉 타임을 거의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유럽 리그 시절만 해도 다르코는 플로어 전체를 쓰는 플레이스타일에 능했지만, 래리 브라운 감독은 다르코를 빅맨 포지션의 한정된 역할로 최적화시키고자 했고, 연습 때마다 다르코를 혹독하게 몰아붙이며 지도했다. 게다가 다르코를 픽한 듀마스 단장 역시 현장에 크게 터치를 하지 않는 스타일이라 다르코가 스스로 현 상황을 이겨내서 플레잉타임을 얻어내길 바라는, 사실상 다르코를 방치하는 실책을 범했다. 결국 루키 시즌은 34경기에서 고작 평균 4.7분을 출전해 경기당 1.4득점 1.3리바운드라는 형편없는 기록을 남겼다.
어쨌거나 팀은 2004 NBA 파이널에서 전당포 라인업을 자랑했던 LA 레이커스를 4승 1패로 꺾으며 우승을 차지했고 다르코는 드래프트 동기들 중 가장 먼저 우승 반지를 끼게 되었다. 파이널 마지막 경기에서 크게 이기고 있을 때 경기를 마무리하기 위한 가비지 멤버로 출장했지만, 하필 이 때 손 골절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우승 세리머니에도 제대로 참여하지 못했다.
상황은 2년차인 2004-05시즌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시즌 내내 벤치워머로 가비지 타임에만 출전했다. 다르코 본인은 "선배들의 플레이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공부가 된다."며 애써 의연한 모습을 보이려 했지만 실상 이미 그는 마음의 병이 들어 있었다. 드래프트 동기들은 이미 모두 팀의 간판으로 자리잡았지만 자신은 여전히 경기에 못 나가고 벤치만 지켜야 한다는 사실은 자존심 강한 다르코를 점점 소심하게 만들었다. 어쩌다 경기에 나가도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은 가비지 상황의 고작 몇 분. 이 짧은 시간동안 최대한 많은 것을 보여줘야 한다는 조급한 마음에 제대로 된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고, 이 덕택에 더더욱 출전시간을 얻지 못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팀 선배들도 이 즈음 다르코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고 '그에게도 플레잉 타임을 줘야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무엇보다 당시의 다르코는 아직 멘탈이 완전히 성숙하지 못한 10대였다. 가족들과 떨어져 미국에서 혼자 지내며 얻게 된 향수병 또한 다르코의 멘붕에 한몫했다.
결국 시즌이 끝나기 직전 애틀랜타 호크스전에서 커리어 최초로 선발 출장했다. 이나마도 정규시즌 순위가 확정되었기에 얻은 기회였다. 이 경기에서 다르코는 30분동안 11개의 야투 중 7개를 적중시키며 16득점 5리바운드 3블록슛을 기록, 물 만난 고기처럼 활약하며 팀의 30점차 대승에 기여했다. 벤 월러스와 천시 빌럽스를 비롯한 선배들도 의도적으로 다르코에게 기회를 몰아줬고, 다르코가 멋진 플레이를 할 때마다 벤치에서 과장된 리액션을 해주는 등 다르코의 기를 살려주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바로 플레이오프에 돌입한 피스톤즈는 역시나 다르코를 쓸 여력이 전혀 없었다. 피스톤즈는 2년 연속 파이널에 진출했고 2005 NBA 파이널에서 7차전까지 가는 명승부 끝에 샌안토니오 스퍼스에게 패하며[14] 아쉽게 준우승에 그쳤지만 거기에 다르코의 역할은 전혀 없었다.
3년차인 2005-06시즌을 앞두고 래리 브라운 감독이 뉴욕 닉스와 5년 5,000만 달러의 초 거대 계약을 맞고 피스톤즈를 떠났다. 후임으로 플립 손더스 감독이 부임했고 그는 다르코에게 더 많은 플레잉 타임을 부여할 것이라고 선언하고 실제로 시범경기까지는 그렇게 했다. 하지만 정작 시즌에 들어가자 플레잉 타임은 큰 변화가 없었다. 유일하게 달라진 점이라면 2년차까지는 무조건 경기 막판 가비지 상황에서만 등장했지만 새 시즌은 2쿼터 등 경기 중반에 투입되기도 했다는 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뉴욕 닉스전 2쿼터에서 플립 손더스가 작전타임을 부르고 다르코를 위한 작전을 하나 만들어줬는데 다르코가 이를 실수로 날려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날 이후 손더스는 다르코를 아예 로테이션에서 배제시켰다. 플레이오프 탑시드 획득을 위해 최대한 많은 경기에서 승을 거둬야했던 피스톤즈 입장에서는 이런 실수를 용납할 여력이 없었다. 게다가 당시 피스톤즈 입장에선 사치세를 피하고자 샐러리 절감의 필요를 느끼는 상황이었고, 자연히 팀에서 자리를 잡지 못한 다르코가 매물 중 하나로 떠올랐다. 여전히 루키스케일 연봉이긴 했지만 2픽 출신이라 연봉이 결코 적다고 하긴 힘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피스톤즈 팬들은 다르코를 보내야된다 그래선 안된다로 격렬한 찬반 논란이 었었지만 결국 다르코는 사치세를 피하기 위한 샐러리 절감의 일환으로 카를로스 아로요랑 세트로 묶여 올랜도 매직으로 트레이드되었다.
3.2. 올랜도 매직
당시 올랜도 매직은 전 시즌 드래프트 1픽으로 뽑은 드와이트 하워드를 축으로 막 리빌딩을 하려는 찰나였고, 자연히 다르코는 그토록 원하던 많은 플레잉 타임을 얻게 된다. 트레이드 이후 합류한 30경기동안 평균 20.9분을 출전해 경기당 7.6득점 4.1리바운드 2.1블록슛을 기록해 경기에 뛸 수만 있다면 좋은 활약을 보여줄 수 있음을 입증해 보였다. 이듬해인 2006-07시즌까지 비록 벤치멤버이긴 했지만 경기당 20분 이상을 출전하며 드와이트 하워드를 보좌하는 빅맨으로 좋은 활약을 보였다.
3.3. 멤피스 그리즐리스
루키 계약이 종료되고 2007-08시즌 멤피스 그리즐리스와 계약해 드디어 주전으로 올라섰다. 올랜도 시절 벤치멤버로 쏠쏠한 모습을 보여줬기에 주전으로 뛴다면 한 단계 더 스텝업된 모습을 보여주리라는 기대를 받았으나, 거기까지가 한계였던 것인지 주전으로 맞이한 첫 시즌은 생각보다 성장세가 더딘 모습을 보였다. 설상가상으로 멤피스에서의 두 번째 시즌인 2008-09 시즌은 마크 가솔이 합류해 바로 주전으로 도약하면서 다르코는 또다시 벤치멤버로 내려가고 만다.
3.4. 뉴욕 닉스
결국 시즌이 끝난 뒤 2009-10 시즌을 앞두고 뉴욕 닉스로 트레이드되었지만 여기서도 자리를 잡지 못하고 거의 로테이션에서 배제되다시피 했다. 이 시점에서 멘탈이 완전히 나가버려 "NBA 리그는 죄다 거짓말쟁이들 뿐이다."는 망언과 함께[16] 남은 시즌을 마치면 고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했다. 더 이상 다르코가 필요없었던 뉴욕은 그를 트레이드 데드라인에 미네소타 팀버울브스로 트레이드시켰다.
3.5.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다행히 미네소타의 데이비드 칸 단장과 커트 램비스 감독은 다르코를 따뜻하게 대하며 적극적으로 후원해주었고, 다르코 또한 이들의 격려에 다시 한 번 의욕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나름 괜찮은 폼으로 잔여시즌을 마쳤다. 미네소타는 다르코에게 3년의 연장 계약으로 화답했고, 다르코 또한 연장 계약 첫 시즌부터 다시 주전으로 발탁되어 준수한 활약을 펼쳤다. 특히 2010년 11월 24일 샌안토니오 스퍼스 전에서 매치업 상대인 팀 던컨을 한 자리수 득점으로 꽁꽁 묶고 자신은 22득점 8리바운드 5블록슛을 기록한 경기가 백미였다. 시즌 초반 한때 리그 블록슛 단독 1위에 랭크되는 등 드디어 다르코가 늦게나마 꽃을 피운다는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나올 정도였으며, 이 때가 그나마 다르코가 가장 즐겁게 농구를 했던 시기였다.
그런데... 여기서부터는 부상이 발목을 잡게 된다. 일회성이 아니라 좀 뛸만하면 계속해서 부상을 당했고, 다르코의 부상을 틈타 니콜라 페코비치가 일명 '페코트럭'이라는 별칭을 얻으며 급성장해 주전으로 도약했다. 결국 다르코는 또 다시 팀내에서 자리를 잃게 된다.
3.6. 보스턴 셀틱스
미네소타와의 계약이 만료된 후 보스턴 셀틱스와 1년 계약을 맺었다. 노장이 된 케빈 가넷을 보좌할 빅맨 역할이 맡겨졌지만 여기서는 어머니의 병환이라는 가정사가 발목을 잡는다. 마음이 지칠대로 지친 다르코는 결국 보스턴에 먼저 방출을 요구했고 이를 보스턴이 받아들여 방출된 뒤 고국으로 돌아갔다. 이후 인터뷰에서 "다시 NBA 리그로 돌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말로 쓸쓸하게 NBA 커리어를 마감했다.
커리어 통산 성적은 총 10시즌 동안 468경기에 출전했고, 경기당 18.5분을 뛰며 평균 6.0득점 4.2리바운드 1.3블록슛을 기록했다.
4. 실패의 원인
리그의 규정까지 뜯어고쳐가며 다르코를 NBA에 입성시켰건만 결과는 처참한 실패였기에 나름 충격파가 컸다. 다르코의 실패 이후 한동안 유럽 출신 선수들 뿐만 아니라 남미 출신 선수들도 NBA에 진출하는 빈도가 줄었을 정도. 다르코 외에도 미국과 비미국 출신 가릴 것 없이 리그에 일찍 입성한 어린 선수들이 잇달아 실패를 겪자 훗날 NBA는 만 19세 이상, 즉 최소한 대학교 1학년까지는 마치고 드래프트 신청이 가능하게끔 다시 규정을 뜯어고쳤다.결론부터 다르코의 실패는 1차적으로 본인의 기량이 기대만큼 올라오지 않았던 탓이 가장 컸다. 하지만 상기에 언급한 불운들을 따져보면 그것을 100% 다르코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또한 굳이 하나 더 꼽자면 스카우터들이나 당시 피스톤즈의 기존 선수들이 신인 선수의 멘탈까지는 세세히 파악하지 못한 탓도 있었을 것이다.
일단 다르코의 가정환경이 일반적인 NBA 선수들과는 좀 달랐다. 물론 어렸을 적 가정사가 불운한 선수들은 한둘이 아니지만, 다르코의 가족은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놓여있었다. 다르코가 어렸을 당시 세르비아는 내전을 겪고 있었으며 다르코의 아버지는 강제로 징집되었고, 다르코와 그의 가족은 언제 폭격을 맞아 죽을지 모르는 환경 가운데서 다르코가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해야했다. 아직 유럽 프로 무대와 성인 국가대표 무대에서도 검증을 하기 전에도 NBA 조기 진출을 한 이유 또한 가족을 부양하고자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
그런 환경에서 고작 만 17세의 나이에 홀로 미국에 왔기 때문에 늘 마음 한구석에 가족의 안위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였다. 그것도 모자라 래리 브라운같은 엄격한 감독 밑에서 그제까지 플레이해 왔던 스타일들을 죄다 봉인당한 채로 몇년째 벤치에만 앉아있는 것은, 선수로서의 성장 여부를 떠나 아직 인격이 완전히 성숙하지 못한 10대가 홀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짐이었다. 어쩌다 가뭄에 콩나듯 가비지 타임에 출전하면 고작 몇 분의 시간동안 최대한 많은 것을 보여주려다보니 플레이가 경직되어 이지샷을 놓치거나 실책을 저지르기 일쑤였고, 이는 더더욱 경기 출전을 못하게 되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게다가 래리 브라운의 다소 고압적인 지도방식 또한 다르코에게는 맞지 않았을 뿐더러 브라운은 연습 때마다 다르코에게 호되게 질책을 했다. 다르코는 뭐만 했다하면 혼나기만 하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다가 점점 내성적이고 소극적으로 변해갔고 이는 본인의 성장에도 지극히 악영향을 미쳤다. 한 전문가는 이 때의 다르코를 일컬어 "유럽에서 자기보다 열 살 많은 선수들까지 찍어누르던 당찬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그저 겁에 질린 10대 소년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고 회고했을 정도. 상기의 플립 손더스의 작전타임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유독 다르코를 거쳐간 감독들은 다르코의 실수를 용납하지 않으려 했고, 다르코에겐 자신의 재능을 펼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시행착오마저 허용되지 않았다.
물론 그러한 압박을 견뎌내지 못한 다르코에게 1차적인 책임이 있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하지만 다르코의 실패에 대해 혹평하는 전문가들조차도 만약 다르코가 처음부터 약팀에 드래프트되어 자신을 믿어주는 감독 밑에서 충분한 플레잉 타임을 부여받고 뛰었다면, 최소한 이렇게 어이없이 초라한 커리어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데는 대부분이 의견을 같이 한다. 밀리시치 이전과 이후의 비미국인 선수들과 비교하면 더욱 명확해지는데 먼저 디르크 노비츠키 또한 루키 시즌 형편없는 모습을 보였음에도 돈 넬슨 감독은 자신이 해고당할 수 있는 위기에서조차 끝까지 노비츠키를 신뢰하며 밀어주었고 결국 레전드로 키워냈고 이후 MVP와 파이널 MVP, 우승을 경험한다. 스티브 내시도 피닉스 선즈에 입단했지만 이미 제이슨 키드가 선발인지라 안정적인 주전 확보가 가능했던 댈러스 매버릭스에서 자신의 역량을 키워 상급 포인트 가드가 되고 30대가 되어 다시 피닉스 선즈로 복귀해서 두 시즌 연속 MVP를 수상하며 구단의 레전드가 되었다. 페자 스토야코비치 또한 루키 시즌은 미미했지만 꾸준한 기회를 받으며 새크라멘토 킹스에서 최고의 슈터로 거듭났다. 이후 2011년 댈러스 매버릭스로 이적하여 우승까지 하였다. 샌안토니오 스퍼스의 BIG 3로 평가받았던 토니 파커와 마누 지노빌리도 2000년대 초반 입단했을 몇 시즌에는 실수가 많아 감독인 그렉 포포비치에게 온갖 욕을 들어가며 비판받았지만 그래도 포포비치는 애초에 유럽식 로테이션 농구를 강조하는 인물이었고, 여기에 프랑스 국적의 파커와 이탈리아 리그에서 활약했던 지노빌리가 자신들에게 맞는 시스템과 함께 기량이 상승하면서 스퍼스에서 4번의 우승을 경험하며 최전성기의 주역들로 거듭나게 된다. 거기에 파커는 2007년 파이널 MVP, 지노빌리는 2007-08 시즌 올해의 식스맨상을 수상한다. 파우 가솔도 2001년 드래프트 3순위를 차지하긴 했지만 약팀인 멤피스 그리즐리스에서 활약하며 2002년 신인왕 수상과 동시에 멤피스의 각종 기록들을 갈아치우며 올스타에 선정될 정도로 전력을 크게 끌어올릴 정도로 성장하고, 이후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로 이적하면서 코비 브라이언트와 원투펀치를 이루어내며 두 번의 백투백 우승을 이끈다. 동생 마크 가솔도 스페인에서 활약을 했지만 형 파우의 레이커스 이적을 통해 멤피스로 트레이드 되듯이 이적되고 애초에 그저 스페인 리그에서 활약한 어린 유망주에 불과하다는 평가가 많았으나 시즌이 지나면서 계속 수준급 센터로 성장하고 2012-13 시즌에는 유럽인 최초의 올해의 수비수상을 수상하고, 2014-15 시즌에는 올 NBA 팀 1st에 들기까지 하였다. 또한 2018-19 시즌에는 토론토 랩터스로 시즌 중에 이적하여 우승의 주역 중 하나가 되었다. 거기에 이 선수들은 NBA에서도 자신의 가치를 제대로 증명하면서 자신들이 활약한 소속팀에서 영구결번되기까지 하였다.[17] 이들의 사례와 다르코의 사례를 본다면 다르코가 처했던 환경이 상대적으로 꽤나 가혹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5. NBA 은퇴 이후
NBA를 떠난 이후 유럽 리그에서 다시 뛸 것이라는 전망이 있었지만 아무 소식이 없다가 뜬금없이 2014년에 킥복싱 선수로 데뷔했다. 하지만 데뷔전에서 2라운드에 정강이 부상을 당하며 TKO 패배를 당했고 그 이후 다시 링에 오르지 않았다.
2015년 유럽 ABA 리그팀 'KK Metalac'과 계약이 임박했다는 소식도 나왔으나 최종적으로 무산되었고, 이후 근황이 알려지지 않았는데 한동안 고향에서 과일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드래프트 동기들 상당수, 특히 그의 앞뒤 순위로 뽑힌 선수들이 30대 중후반까지 뛰면서 명예의 전당을 가네 마네 하는 것을 감안하면 다르코의 NBA 이력은 너무나 짧고 씁쓸했다고 할 수 있겠다.
6. 다시 농구선수로 복귀
2019년 세르비아의 하부리그 팀이자 자신의 고향팀이기도 한 'KK I Came To Play'와 계약을 맺고 다시 농구선수로 컴백했다. 2012년 보스턴 셀틱스에서 마지막 경기를 뛴 이후 7년만의 현역 복귀. 많은 나이와 공백기를 감안할 때 즉시전력감보다는 젊은 선수들의 멘토역을 기대하고 영입된 것으로 보이며, 다르코 또한 "어린 선수들의 성장을 도울 수 있어 기쁘다"는 복귀 소감을 남겼다.그런데 7년만의 복귀전에서 2득점만 넣고 어깨 부상을 입어 장기 결장을 하게되었다.
7. 여담
이러니 저러니 해도 NBA에서 10년을 버틴 턱택인지, 본인 스스로 NBA 생활은 끔찍했다고 하면서도 한편으론 미련이 남아 있는 듯하다. 특히 2016년 훕스하입과의 인터뷰에서 " 르브론은 데뷔 첫해부터 출전시간을 얻고 원하는 대로 슛을 던졌지만 난 그러지 못했다. 디트로이트에선 늘 내게 골밑에서만 플레이하길 원했고, 올랜도 시절에도 외곽슛을 쏘자 감독님이 하워드에게 패스하라고 혼을 냈다."는 말로 아쉬운 마음을 드러냈다.역대 7퓨터 선수중 손에 꼽힐 정도로 잘 생긴 외모에도 불구하고 워낙 커리어가 미미해서인지, 간혹 NBA 커뮤니티에서 '잘 생긴 선수가 누구냐'를 주제로 이야기가 나와도 다르코의 이름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역시 농구선수는 먼저 농구를 잘 하고 볼 일인 듯. 그 쪽 분야로 희화화되어 회자되는
지금은 흑역사가 되었지만 루키 시절 SLAM 매거진 표지모델로 등장한 적도 있다.[19]
커리어 초창기의 한글 표기는 '다르코 밀리치', '다르코 밀리시치' '다르코 밀리치치', '다르코 밀리칙', '다르코 밀리첵' 등등이 난무하며 통일이 전혀 되지 않았다. 제대로된 표기법은 '다르코 밀리치치'이나, 본 문서의 표제어는 범용성, 보편성의 원칙에 따라 '다르코 밀리시치'로 기재되었다.
[1]
기대치에 비해 너무 크게 실패했기 때문에 역대 최악의 2번픽을 꼽을 때 가장 먼저 회자될 정도다. 엄밀히 따지면 2009년에 2순위로 뽑히고 커리어 내내 NBA에선 15분 이상 뛴 적이 없는
하심 타빗이 그나마 후반기에 괜찮은 롤플레이어 정도는 됐던 밀리시치보다 훨씬 못했다. 다만 밀리시치는 NBA 입성 전부터 부풀어 오른 말도 안되는 기대감과 커리어 초반에 받은 너무나 작은 롤이 극명한 대비를 이뤘고, 소속팀은 심지어 그가 아무것도 안했는데 우승을 해서 더 초라해보이는 것도 있다. 밀리시치는 2020년 기준으로 파이널에서 뛴 역대 최연소 선수이며, 최연소 챔피언이다. 게다가 만 19세 생일 이전에 우승했기 때문에 NBA가 나이 제한을 현행 19세에서 낮추지 않는다면 영원히 깨지지 않을 기록이다. 비유하자면 야오밍을 기대하고 뽑았는데 하승진이 나온 꼴. 실제로 (실제 실력이나 잠재력을 제외하고) 루키 시즌 밀리시치의 기록과 하승진의 기록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2]
만약 이 때 멜로를 뽑았다면 벤 월러스-라시드 월러스-카멜로 앤서니-리차드 해밀턴-천시 빌럽스라는 후덜덜한 라인업을 꾸렸을 것이라며 당시 피스톤즈의 결정을 비난하는 말들이 많은데, 실제로 래리 브라운이 주장한 것은 "2번픽으로 멜로를 뽑고 해밀턴은 트레이드시키자."는 것이었다. (라시드 월러스가 나중에 합류한 건 둘째치고라도) 해밀턴의 대가로 누굴 받아왔든간에 일단 저 라인업은 멜로를 뽑았다고 쳐도 불가능한 라인업이므로 언급할 가치가 없는 이야기다.
[3]
그래서 게임 NBA 라이브 2004에선 다르코가 피스톤즈의 주전 파워포워드로 나온다. 당시의 기대치를 반영하듯 대략 4~5년 정도 시즌을 돌리면 그야말로 괴물로 성장한다.
[4]
여담으로 03 드래프트는 지금이야 전설로 회자되고 당시에도 르브론/밀리시치/멜로 3강은 엄청나게 큰 기대를 받았지만, 드래프트 전체 풀에 대한 기대치는 이 정도까진 아니었다. 드웨인 웨이드는 트위너가 되지 않을까하는 우려가, 크리스 보시는 갸냘픈 몸이, 크리스 케이먼은 평범한 백인센터, 커크 하인릭은 평범한 백인가드에다가 포인트가드 전환을 성공적으로 할지도 미지수였다. 심지어 전성기가 짧았지만 올스타까지 뽑힌 조쉬 하워드는 1라운드 하위권이었으며, 카일 코버는 슛 말곤 아무것도 없는 2라운더. 즉, 밀리시치가 버스트이긴 했지만 그 아래 순위에서 기대치를 훌쩍 뛰어넘은 선수들이 많았던 드래프트였다.
[5]
근데 다르코가 이런 자신감을 가질만도 한게 유럽의 프로 농구리그는 결코 수준이 낮지 않다. 당장 스페인의
리가 ACB와 이탈리아의
레가 바스켓 세리에 A는 축구와 마찬가지로 최상위권 리그라 평가 받고, 그 외에도
그리스 농구 리그와 튀르키예의
바스켓볼 쉬페르 리기도 최상위권 리그라 평가받는다. 거기에 최상위 유럽대항전인
유로리그와 차상위 유럽대항전인 유로컵의 수준도 높은 편이다. 이들 대회의 수준은 결코
NCAA에 뒤지지 않고, 특히 유로리그는
NBA와
올림픽 농구 다음으로 수준이 높다고 평가받는다. 즉 유럽에서 프로리그를 이미 경험한 다르코 입장에서는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니었다.
[6]
참고로 밀리시치 본인은 케빈 가넷의 스타일을 선호해 그처럼 되고 싶다고 했다.
[7]
다만 파커와 지노빌리가 밀리시치와 다른 점은 NBA 입성 전 성인 무대에서도 이미 실력 검증을 하거나 NBA 입성 후에도 바로 자신의 기량을 바로 증명했다는 점이다. 파커는 2001년 프랑스 리그인 LNB Pro A에서 라이징 스타 어워즈를 수상했고, NBA에 입성한 첫 시즌인 2002년에는 뛰어난 활약으로 All 루키 퍼스트 팀에 선정되기까지 하였다. 지노빌리는 NBA 입성 전에도 이탈리아 리그와 유럽대항전에서 맹활약을 펼치면서 당시 소속팀 킨더 볼로냐에게
유로리그 우승 1회,
레가 바스켓 세리에 A 우승 1회, 이탈리안컵 우승 2회를 안겨주었고, 지노빌리 개인도 이탈리아에서 유로리그 MVP 1회, 득점왕 2회, 레가 바스켓 세리에 A MVP 2회, 이탈리안컵 MVP 1회를 수상하였다. 그리고
아르헨티나 농구 국가대표팀에서도 2002년 세계 농구 선수권 대회에서 아르헨티나 국대를 준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NBA 데뷔 시즌에도 지노빌리는 All 루키 세컨드 팀에 선정되기까지 하였다. 즉 이들은 프로 무대에서 나름 검증하고 NBA로 입성한 것이다.
[8]
당장 밀리시치의 첫 드래프트 순위가 상술한 선수들 중에서 1997년 1위를 차지한 던컨을 제외하면 가장 높았다. 가솔은 2001년 1라운드 3위, 노비츠키는 1998년 1라운드 8위, 내시는 1996년 1라운드 15위, 가넷은 1995년 1라운드 5위였다. 심지어 파커는 2001년 1라운드 28위, 지노빌리는 1999년 2라운드 57위의 명백한 하위픽에 불과하였다.
[9]
첨언하자면 당시 밀리시치와 카멜로 앤서니가 온갖 고대 괴수들을 소환해가며 2픽이니 3픽이니 하며 투닥거리를 할 때에도 부동의 1픽이었던 르브론 제임스의 고교 시절 위엄은 어마어마 했다고도 이야기 할 수 있다. 반대로 생각하면 현 시점에서 리그 역사상 올타임 No.2가 유력한 르브론이 2003 드래프트에 나오지 않았을 경우 다르코가 당해년도 1픽이 유력했을테니 이 또한 다르코의 위엄이었다고 할 수 있다.
[10]
이런 강팀이 어떻게 드래프트 2순위 지명권을 얻었나 하고 궁금해할 수 있는데, 이 당시 피스톤즈의 2순위 지명권은 원래 피스톤즈의 것이 아니고
멤피스 그리즐리스로부터 받아온 픽이 운좋게도 2순위에 당첨된 것이었다.
[11]
가끔 이런 일이 생기는데, 82년 우승팀인 레이커스는 운 좋게 트레이드해온 픽이 1번에 당첨되어 스몰포워드
제임스 워디를 뽑고, 전미 최고의 유망주를 벤치출장시키며 성장시키는 호사를 누렸다. 워디는 오래지 않아 주전으로 올라서 명예의 전당에 오르는 레전드로 이름을 남긴다.
[12]
루키나 신인급 선수가 뛸려면
데이비드 로빈슨,
앨런 아이버슨 같은 역대급 선수기질을 보여야한다.
[13]
다만 브라운이 신인을 쓰지 않는다는 건 오해가 있는데 스퍼스 시절 역대급은 아니었던 숀 엘리엇 같은 선수도 중용한 적이 있다. 브라운이 신인에 대해 좀 보수적인 시각이 있긴 하지만 승리가 중요한 만큼 실력이 있으면 당연히 쓴다. 애초에 멜로를 욕심내기도 했고.
[14]
명승부였지만 두 팀 모두 수비를 강점으로 내세우는 팀들이라 흥행은 저조했다.
[15]
다르코 +
헐크 호건의 합성어로, 호건이 경기 전 항상 셔츠를 찢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붙여진 별명
[16]
사실 따지고보면 다르코 입장에서는 아주 허황된 말은 아니긴 했다. NBA 진출 전 그토록 꿀바른 말만 해주던 사람들이 자신이 기대치만큼 성장하지 못하자 태세전환한 것이나, 플립 손더스가 자신에게 충분한 플레잉 타임을 주겠다고 했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고 되려 로테이션에서 배제했다거나...
[17]
노비츠키는 댈러스, 내시는 선즈, 스토야코비치는 킹스, 파커와 지노빌리는 스퍼스, 파우 가솔은 레이커스, 마크 가솔은 멤피스에서 영구결번되었다.
[18]
르브론이 언급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압도적인 실력 버프를 받은 탓이지, 얼굴'만' 놓고 보면 객관적으로 그 주제에는 낄 수가 없는 선수이다. 만약
르브론이 현재의 슈퍼스타가 아니라 G리그급 선수였더라도 그런 말이 나올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면 답은 의외로 간단히 나온다.
[19]
저 때 정작 주전
스몰 포워드인 프린스와 로테이션 센터들인 메멧 오쿠어와 엘든 켐벨은 나오지 않았는데, 당시 이제 갓 2년차가 된 프린스는 루키시즌에 의외로 티맥을 잘 막은 길쭉한 애송이에 불과했으며 오쿠어 역시 이제 벤치에서 루키시즌을 끝마친 유망주, 켐벨은 덩치와 경험, 수비 존재감 때문에 데려온 노장이었다. 당연히 이들에게 큰 기대를 하는 사람들은 없었기에 슈퍼루키 취급받던 밀리시치가 나오게 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