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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무선강습소 설치(1934)
1934년 화도 조광운 선생이 서울시 중구 봉래동 1가 83번지에서 경영하던 남대문상회로부터 출발했다.1899년 제물포 화도(花島)에서 태어난 조광운 선생은 어려서부터 인천의 상업활동에 뛰어들어 경험을 쌓는 한편, 야간 학교에서 근대적 문물과 지식을 공부하였다. 1920년에 일본에 건너가 증권회사 등에서 근무하는 가운데 그곳에서 전기제품과 라디오가 급속히 보급되어 근대적 문물의 중심을 이루는 것을 눈여겨보았다.
1923년 귀국한 조광운 선생은 석유램프를 취급하는 가게를 열어 자본을 모으자 곧 광운전기상회를 설립하여 본격적으로 전기 전자제품과 라디오 수신기를 취급하였다.
특히 1920년대 일제의 식민지 교육정책에 따라 한국인 전자기술자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고 기술자는 차치하고라도 아직 입으로 불어서 전등을 끄려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던 시절이어서 전기제품을 잘못 다루어 파손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조광운 선생은 체계적인 기술인력 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고, 1934년부터 광운전기상회 내에서 전기 및 전파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과 기술실습이 실시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조선무선강습소의 모태이다.
조선무선강습소는 무선 기술사 마츠하라(松原)를 강사로 초빙하여 전기통신에 관한 이론과 실제를 가르쳤고, 1935년에 1회 졸업생 17명을 배출하였다. 1년 과정으로 진행된 교육은 1937년에 11명의 과정 수료생을 배출하였으며 또한 이들 11명 전원을 일본의 유명제작사에 보내어 보다 고도의 기술을 배우도록 조치했고, 우수한 졸업생은 광운전기상회의 각 지방 지점과 출장소의 기술 사원으로 파견하는 체계적인 실무 중심의 교육을 제공했다.
조선무선강습소는 실력을 갖춘 강사와 상당한 규모의 실습시설을 갖추고 적극적으로 학생들을 후원해주는 설립자 조광운 선생의 지원이 있었기에 당대의 기술교육기관으로서는 훌륭한 수준이었다. 특히 조광운 선생의 막역지우였던 사업가 마쓰시타 고노스케[1]는 조선무선강습소에 자사의 첨단 설비와 기자재를 기증하는 등 큰 지원을 제공하여, 조선무선강습소가 관립 학교보다도 우수한 교육기자재와 설비를 갖추어 교육생들에게 일본 현지의 무선강습소에 준하는 교육환경을 제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강습소가 배출한 인력이 일정하지 않았던 점에서 볼 수 있듯, 당시 일제의 관립 학교수준의 교육기관으로써 완전한 시스템을 갖추기에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교육과정을 상대적으로 엄격하게 운영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당시로서는 이름조차 생소하던 전파기술교육을 한국인이 실시한다는 것이 국가차원의 배려와 지원 없이는 극히 어려웠던 식민지 현실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 중심의 관립 계열[2] 및 구미 열강을 배후에 둔 기독교 계열[3] 둘 중 하나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당대 교육기관의 태생적 한계를 깨고, 첨단산업 중심의 교육기관으로써 출발해 오늘날 종합대학인 광운대학에 이르기까지, 근대 대학발전사의 제 3의 길을 개척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4]
2. 식민지 하 민족기술 교육과 조선무선강습소(1934~1940)
2.1. 일제의 과학기술 교육정책
일제 강점기 내내 교육정책의 핵심은 이른바 '간이(簡易)'를 주지로 하는 것이었다. 즉 한국인들에게는 고등교육이나 전문 기술교육을 억제하고 극히 실용적인 하급 실무능력만을 갖춘 인력을 양성하는 것을 주된 교육목표로 설정하였고, 그 조차도 제대로 실시되지 않았다. 심지어 1920년대까지고 초등교육기관조차 3명 1교 정책을 실시하여, 3개 면에 1개의 보통학교를 설치하는 것이 원칙일 정도로 그 수가 적었다. 이후 한국인들의 폭발적인 교육열로 1개의 면에 1개의 보통학교가 설립 된 것은 1940년대에 이르러서였다.일제는 특히 비용이 많이 드는 과학기술교육은 거의 도외시하였으며, 1920년대까지도 한반도 전체에 걸쳐 과학기술관련 고등교육기관은 경성공업전문학교[5]가 유일하였다. 하지만 1915년에 설립된 경성공업전문학교 조차도 일본인을 1/3 이하로 제한한다는 성문화된 규정과 달리 실제로는 1910년 후반에 이미 일본인 학생이 절반을 차지하였으며, 경성공업전문학교는 1922년 경성고등공업학교로 개칭하였고, 해가 거듭될수록 일본인 학생이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1920년대 이후에는 일본인이 2/3 이상을 점유할 정도였다.
일본인에 대한 교육과는 달리 조선인에 대한 기술교육은 초급 또는 하급 공업교육에 국한되어 있었다. 당시 기술교육을 실시하였던 공업계 학교에는 고등교육기관인 공업전문학교와 을종(乙種)공업학교, 준을종(準乙種)공업학교, 공업보습학교 등이 있었다.
을종공업학교는 보통학교나 소학교를 졸업하고 진학하는 중등수준의 학교였으며, 준을종공업학교는 을종 수준의 교육기관이지만 정식인가를 받지 못해 각종학교로 분류된 학교를 의미하였다. 이에 비해 공업보습학교는 특정한 학력이 거의 요구되지 않았던 학교로 그야말로 기능 전수가 주 목적이었으며 학력이 인정되지 않았다.
1920년 일제하 우리나라 전역에는 을종공업학교 2개, 준을종공업학교 3개, 공업보습학교 17개로 총 32개교가 설립되어 있었다. 그러나 1920년 을종공업학교 졸업생이 조선인과 일본인 각각 101여명에 불과하였고, 공업보습학교 졸업생이 130여명에 지나지 않았다. 1926년까지도 이런 교육기관을 통해 배출된 기술인력은 불과 50여 명 수준에 불과하였다. 특히 전기과가 단 한 군데도 없는 형편이었으니 전기전자분야 기술인력의 부족은 말할 수 없이 심각한 상황이었다.
일제 당국이 과학기술교육을 도외시하자 민간에서라도 기술인력 수요를 충당하기 위한 최소한의 교육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1925년 이후 사립공업학교들이 세워지기 시작하였고, 1926년에는 경성전기학교와 소화전기학교가 설립되었으며, 1928년에는 협성실업학교에 공업과가 설치되었다. 경성전기학교와 소화전기학교는 일본인이 세운 학교였지만 기술인력이 워낙 부족했던 터라 한국인들이 다수 진학하였다. 협성실업학교는 한국인이 설립한 학교로 1928년 3월부터 공과를 운영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 조선인 공업교육의 내용을 살펴보면 가구과, 철공과, 목공과 등으로 근대적인 대공장 공업기술자가 아니라 가내공업적인 소공업 기술인 양성에 주력하고 있어 장차 공업입국의 인재를 양성하는 데는 크게 부족하였다. 한편 일본인이 세운 경성전기학교는 전기기술을, 소화공과학교는 주로 토목기술 분야의 기술을 교습하였으나 일본인 전기회사나 총독부에 필요한 기술인력 공급만을 목적으로 하였다. 따라서 과학기술 수준 향상과 같은 장기적인 민족 발전의 전망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2.2. 1930년대 과학운동과 민족기술교육의 현실
2.2.1. 과학대중화 운동
1930년대 들어서면서 열악한 과학기술교육 상황을 타개하고자 한국인 스스로 맹렬한 과학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미 1920년대 한국인들은 물산장려운동으로 민족자본의 자립을 추진하였던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제국주의의 지배 하에서 자기 힘으로 자본을 축적하고 근대적인 생산설비를 갖추어 간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특히 민족 내부에 근대적 과학기술교육을 받은 기술인력이 축적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더욱 그러했다.그러나 근대적 과학기술교육의 확대를 총독부에만 의존한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민족의 자립적 과학능력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므로 민간 차원에서 과학대중화 논의가 급속도로 진행되었으며, 과학의 대중화운동은 1920년대에도 발명학회(1924년 창립) 등을 통해 전개되었으나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은 1930년대에 들어와서였다.
발명학회의 창립자 중 한 사람이었던 김용관은 1932년부터 우리 사회의 지도자들을 설득하여 발명학회에 참가시키면서 과학지식의 중요성을 널리 알리는 이른바 과학기술 대중화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하였다.
과학기술대중화 운동은 변호사 이인, 시인 주요한, 작가 이은상, 기독교계 지도자 윤치호 등이 발명학회에 참가하고 동아일보 등 언론사의 지원을 받으면서 급속도로 발전하였고, 발명학회에 의해 우리나라 최초의 과학갑지인 과학조선을 창간하기에 이른다. 이 잡지의 목적은 과학계몽운동, 즉 과학에 대한 문맹의 상태를 퇴치하고 모든 사람에게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널리 알린다는 것이었다. 특히 과학발전으로 민족의 힘을 키우고 이를 장차 민족이 자립하는 기반으로 삼겠다는 '과학입국'의 사상은 당시 선구적인 지식인과 교육가들 사이에서 은연 중 널리 확산되어 있었다.
1934년 2월 28일 발명학회가 중심이 된 사회저명인사 31명은 과학대중화를 위해서는 '과학데이'와 같은 적극적인 행사가 필요하다는데 의견을 모으고, 찰스 다윈(1809~1882)의 서거일인 4월 19일을 '과학데이'로 정하고 이날 기념식과 계몽활동을 벌이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1934년 4월 19일부터 개최된 '과학데이'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 등 당시 신문사들의 적극적인 후원 속에서 진행되었으며, '과학데이' 행사가 열린 이후 결성된 과학기술보급회에는 조선중앙일보 사장 여운형과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가 모두 참여하였고, 동아일보의 실질적 소유주였던 김성수와 이화여전의 김활란도 참가하는 등 당시의 사상계와 교육계의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모두 망라될 정도였다.
당시 '과학데이'의 슬로건은 '한 개의 시험관은 전 세계를 뒤집는다. 과학의 승리자는 모든 것의 승리자다. 과학의 대중화운동을 촉진하자'였다. 어찌 보면 지나친 과학만능론인 듯한 느낌까지 주지만 당시에 민족지도자들과 지식인들 사이에 확산되고 있던 과학입국론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슬로건이다.
과학대중화 운동은 주로 대중강연과 언론출판 등 대중적인 계몽활동을 통해 전개되었다. 예를 들어 1934년 '과학데이'인 4월 19일에는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기념식과 함께 3개의 대중과학 강연이 열렸으며, 20일에는 과학관, 영등포방직공장, 중앙시험소, 중앙전화국 등에 대한 견학이 개최되었고, 21일에는 과학활동사진을 상영하였다. 또 이후 결성된 과학지식보급회는 지방순회강연회를 개최하고 과학조선을 인수 발행하는 등 역시 대중 계몽과 홍보에 치중하는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과학대중화 운동이 민족운동과 결합하는 양상을 보이자 일제는 1937년부터 '과학데이' 행사가 옥외에서 개최되는 것을 막고, 1938년 5회 '과학데이'를 추진하던 지도부를 체포하고 과학지식보급회도 해체시켰다. 또한 발명학회도 곧바로 일본발명학회 조선지부로 만들어 친일단체로 변모시켰고 이에 따라 1930년대 후반부터 이전과 같은 민족적인 과학대중화운동은 실질적으로 소멸하게 되었다.
그러나 1930년대 과학대중화 운동이 보급한 민족기술과 과학입국의 사상은 당시의 지식인과 뜻있는 인사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실업과 교육에 관심을 가진 많은 지도자들은 체계적인 과학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고, 설립자 조광운 선생도 이와 같은 식민지시대 한국인들의 과학입국 사상에 큰 영향을 받은 인물로 볼 수 있다. 특히 일찍부터 새로운 기술문명과 지식의 위력을 실감하고 있던 조광운 선생은 과학대중화와 과학기술교육의 체계화에 대한 의지가 남달랐으며 그 신념이 결국 조선무선강습소 설치로 이어졌다.
2.2.2. 1930년대 민족 기술 교육의 상황
1930년대 언론매체를 통한 과학대중화 운동은 많은 성과를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한계를 안고 있었다. 과학기술지식이 단기간의 캠페인이나 순회강연을 통해 갖추어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캠페인을 통해 과학기술교육의 중요성을 널리 알릴 수는 있었지만 과학적 사고방식과 실질적인 기술을 습득하게 하는 것은 체계적인 교육기관을 설립함으로써만 가능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교육사업에 투신하여 금전적, 정신적으로 충분한 기여를 하겠다는 의지와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했다.그러므로 1930년대 학교 설립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 이전에도 총독부의 지배 하의 한반도에서 한국인이 학교를 세우고 운영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더구나 1936년 사립학교 설립기준이 크게 강화되면서 더울 힘들어졌다. 이 기준에 의하면 사립학교를 설립하려면 먼저 재단법인을 구성하고 100만엔 이상의 기금을 투자해야 인가여부 심사 대상이 될 수 있었다.
1백만엔 미만의 재단은 기부자가 당국에 기부하여 공립학교를 설립하게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당시 5학급 고등보통학교라도 40만엔 정도의 기금이면 충분히 운영이 가능했던 점에 비추어 보면 이는 실제로 조선인의 교육계 진출을 통제하고 제국주의 권력이 교육을 직접 지배하려는 의도였다.
여기에다 기술교육에 관련된 학교의 설립인가는 더욱 까다로워서 1930년대 후반 농업학교나 상업학교 등의 실업계 학교들은 그나마 조금씩 설립되었지만 공업학뇨는 전혀 세워지지 않았다. 1935년 협성실업학교는 재단법인으로의 전환에 성공하였지만 1936년 겸이포, 군산, 여수, 진주, 함흥, 대전 등 여러 지역에서의 사립공업학교 설립 시도는 모두 실패하였다.
그리고 이런 지역에서는 일제 당국의 손에 의해 공립공업학교가 만들어졌다. 1938년 경성공립공업학교, 1939년 평양공립공업학고, 1940년 이리공업학교, 흥남공업학교, 부산공업학교가 모두 공립공업학교로 설립되었다. 한국인이 세운 기술교육기관은 여전히 1938년 설립된 대동공업전문학교가 유일하다시피 하였고, 1941년 평양의 거부 손창윤이 210만엔을 투자하여 평안공업학교를 설립하였던 것이 이채로울만큼 예외적인 상황이었다.
그 결과 당시의 공업교육의 공급은 수요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였다. 1930년대 농업학교나 상업학교는 15만엔 정도면 설립할 수 있었지만, 공업학교는 70만엔 이상이 필요하였다. 그러므로 조선총독부는 본토에서 공업학교 졸업생들을 유입하는 쪽을 더 선호하였으며, 이와 같은 상황은 1940년대에 이르러 일제가 2차 대전을 수행하면서 군수공장 및 사업장에 무보수로 인력을 전시동원하기 위해 갑자기 공업학교 수를 급격히 늘릴 때까지 지속된다.
2.2.3. 조선무선강습소 창립
광운학원의 80년 역사의 기원이 된 조선무선강습소도 이렇게 과학대중화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과학입국의 꿈이 확산되던 1930년대 탄생하였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벗어나기 위한 과학입국의 열망이 민족 교육계와 지식인들 사이에서 급격히 확산되고 있었으나 이런 이상을 현실화하기 위한 체계적인 과학교육운동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황에서 조광운 선생이 그 촉매제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한 것이다.그러나 당시 일본 제국주의의 교육정책은 민족교육을 허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특히 과학기술교육은 일제가 직접 장악하고 통제하려 하였다. 사립학교, 특히 공업계 학교 설립을 매우 엄격히 제한하고 있었으므로 본격적인 공업계 학교 설립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고 개인의 힘으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시대적 추세는 조광운 선생의 학교설립 열정을 더욱 촉진하게 되었는데 그 배경에는 과학기술, 특히 전파전자기술에 대한 수요가 점차 폭발적으로 늘어가고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에는 과학기술에 의한 새로운 문화가 다양하게 등장하는 시기였다. 그 중에서도 전기와 전파는 시대의 총아였다.
도시의 밤을 밝혀주는 전등은 일본인 전기회사의 설립 이래 일본인 지역을 중심으로 확산되었지만,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국인 지역에도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1927년 경성방송국이 방송을 처음 시작하였지만 한동안 일부 일본인들에게만 국한되었던 라디오가 1930년대에 한국인들 사이에서 조금씩 보급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시대적 발전 추세에 발맞추어 조광운 선생은 광운전기상회를 설립하였고, 과학입국과 과학의 대중화라는 민족사적 요구에 부응하여 1934년 조선무선강습소를 개설하기에 이르렀다.
3. 조선무선공학원으로의 개편(1940~1945)
조광운 선생은 1940년 더욱 체계적인 교육을 위해 조선무선강습소를 조선무선공학원으로 개편하였다. 이것은 광운학원의 과학교육이 본 궤도에 오르게 되는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조선무선강습소 시절부터 체계적인 기술교육을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유능한 강사진의 확보였다.조광운 선생은 유능한 강사진을 확보하여 체계적인 과학교육의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하여 졸업생들을 일본 각지의 유명제작사에 파견하여 기술을 습득시키고 이들을 귀국시켜 후배들을 가르치게 한다는 인력수급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다수의 졸업생들이 기간이 끝나도 귀국을 하지 않았고, 귀국한 사람들만으로는 강사 수요를 감당하기 힘들었다.
이에 조광운 선생은 보다 체계적인 교육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한 일환으로 시설투자를 확장하고 우수한 강사진을 확보하여 전자기술 교육기관으로서 입지를 다져나가기 위해 1940년 조선무선공학원을 건립하였다.
조선무선공학원도 정식으로 인가를 받은 학교는 아니어서 조선총독부의 학교 통계에는 잡히지 않는 공업계 학원이었다. 당시는 공업계 학교가 크게 부족하였기 때문에 1930년대 말부터 조선인이 설립한 기술교육 전문학원이 많이 등장하는 추세였다. 경성공과학원, 동아공과학원, 동양공과학원, 남경성공학원 등이 당시 만들어진 기술학원들이었는데, 이들 학원들은 초등교육을 마친 학생들을 대상으로 1~2년간의 단기과정으로 기능공을 양성하였다. 조선무선공학원도 이와 유사한 수준의 교육을 행하였던 듯하다.
한편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조선무선공학원도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동원으로 소란스럽던 1944년 1월 22일 인근 주택에서 발생한 화제가 공학원 건물에 옮겨 붙으면서 목조 2층 건물 교사가 전소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 직전에 보험을 들어두었던 것이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어 이때 받은 보상금 20만으로 3층의 콘크리트 건물을 다시 세울 수 있었다.
4. 과학입국의 초석(1945~1961)
4.1. 조선무선중학교
해방이 되자 과학기술교육에 대한 일제의 억압정책이 사라지게 되었고, 이에 따라 조선무선공학원을 정규 교육기관으로 발전시킬 길이 열리게 되었다. 1946년 9월 1일 미군정 당국은 새로운 학제를 발표하였다. 학년 초를 9월 1일로 하고 각급 학교의 수업 연한을 국민학교 6년, 초급중학교 3년, 고급중학교 3년, 대학 4년으로 하는 6-3-3-4의 학제였다. 이에 조선무선공학원은 먼저 현재의 중학교 과정은 초급중학교로 정식 설립인가를 신청했고 1946년 9월 2일 조선무선초급중학교가 미군정청의 허가를 얻어 서대문구 만리동에 설립되었다.학교 설립인가를 얻고 난 직후 바로 재단법인을 구성하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다. 1946년 11월 30일자 대동신문(大東新聞)은 "朝鮮無線中學校,財團法人期成會組織,曹光云氏百萬圓喜捨"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당시 상황을 전해주고 있다.[6]
이 기사를 보면 조광운 선생의 과학입국에 대한 열의와 과학대중화 교육에 대한 노력을 이미 당시 정부관계자들까지도 잘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초급중학교 설립 인가가 난 다음 설립자 조광운 선생은 백만원의 사재를 출연하여 재단 구성의 기초를 잡았고, 후원회와 동창회가 자금을 더 모금하여 재단법인을 구성하기로 하였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으나 아쉽게도 후원회와 동창회에서 실제로 얼마만큼의 자금을 더 확보하여 재단을 구성하였는지를 알 수 있는 자료는 부족하다.
본 학원이 재단 법인의 이사회를 구성해서 문교부의 인가를 받은 것은 1947년 1월 2일이었다. 문교부로부터 첫 번째로 승인받은 이사회는 이사장에 조광운 선생, 이사에 송갑용, 김성집, 이영기, 예완원 씨 등 4명이 선임되었으며 감사는 박흥복, 조인봉 씨 등으로 구성하였다. 같은 날 문교부는 조선무선초급중학교의 초대 교장으로 조광운 선생의 취임을 승인했다. 조선무선중학교의 운영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어 1947년 4월 첫 입학생을 선발하여 1950년 제1회 졸업생 98명을 배출하였다.
그런데 1946년 9월에 제정된 학제는 지나치게 미국형이라 당시 우리나라 실정에는 실행하기 어려운 부분이 존재했다. 특히 이 학제하에서는 각 학교의 재정난과 교원난이 심각하게 야기되었다. 결국 이러한 문제를 완화하기 위한 일환으로 초급과 고급 중학교로 분리되어 있던 것을 6년제 중학교로 통합하는 6-6-4의 기간학제로 개편하게 되었고, 조선무선중학교도 개정된 학제에 따라 1948년 6년제로 개편되었다.
1948년 1월 27일 조선무선중학교는 바뀐 학제에 따라 전기 통신공학과 12개 학급을 개설할 수 있도록 인가되었으며, 교장과 이사회의 구성은 초급중학교와 변동이 없이 그대로 유임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1949년 12월 교육법이 공포되었고, 그에 따라 대한민국 최초의 학제가 제정, 공포되었다. 그러나 이 학제는 실제로 적용되지는 않았다. 1950년 3월 개정된 교육법에 따라 비로소 대한민국에서 실제 적용된 최초의 학제가 만들어졌다. 이때 미군정 이래 새학년의 시작으로 삼던 9월 1일을 4월 1일로 바꾸었고, 학교별 수업연한을 국민학교 6년, 중학교 4년, 고등학교 3년, 대학(교) 4년 내지 6년, 대학원 3년 이상을 골격으로 하는 기간학제가 수립되었다. 1951년 3월 교육법이 다시 개정되어 중학교의 수업연한을 4년에서 3년으로 고쳐 현행 6-3-3-4의 기간학제가 확립되었다.
1949년 4월 조선무선중학교가 당시 경기도 양주군 월계리(현 서울 노원구 월계동, 지금의 광운중학교 부지)의 조선무선전신학교의 부지와 교사 등 시설을 인수함으로써 이때 현재 광운학원의 터전을 마련하게 되었다. 조선무선전신학교는 1939년 일제가 통신기술자 양성을 위해 설립한 조선무선통신학교에서 출발한 학교이다.
당시 중학교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입학생을 선발하여 1년 내지 2년 동안 교육기간을 거쳐 무선통신 기술자를 양성하던 학교였다. 그런데 2차대전에서 전황이 점점 불리해지자 일제는 조선무선통신학교를 조선총독부 무선전신강습소로 개편하여 군사적인 무선전파 실무교육을 담당하도록 하였으며, 이에 따라 이 학교 졸업생들은 대부분 일본군에 입대하거나 군석으로 군사기술을 담당하였고 학생들도 80~90%가 일본인이었다. 해방 이후 무선전신강습소는 조선무선전신학교로 이름을 바꾸어 잠시 운영을 계속하였으나 1946년 상반기 폐교되었던 터였다.
1948년 6년제로 개편한 이후 더 넓은 교사와 실습시설이 필요하였던 본교는 무선전신학교의 부지와 시설을 그대로 인수하고 교사 및 기숙사를 수리하여 1950년 3월30일부터 조선무선중학교 연촌분교를 개설하였다. 법인에서 제출한 자료에 의하면 1965년 5월 7일 서울 교육위원회의 승인을 받아 출연 형태로 이 부지를 최종 취득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하여 중학교 3학년부터 6학년까지 학생들은 이 연촌분교에서 수업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연촌분교가 제대로 자리를 잡기도 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피난을 떠나지 못했던 설립자는 한때 인민군에 끌려서 조사를 받는 등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으나 전쟁의 와중에도 1952년 5월 10일에 다시 학교의 문을 열었다.
4.2. 동국무선고등학교와 남대문중학교
5. 참과 빛의 전당 광운대학
[1]
마츠시타전기산업주식회사(現
파나소닉)의 설립자
[2]
경성제국대 등 관립학교 및 훗날 서울대로 흡수 통합 된 각종 전문교육시설
[3]
연희, 이화, 숭실 등 종교 계열의 학교
[4]
이러한 첨단기술 중심의 유구한 교육철학은 오늘날까지 계승되어 광운대학이 명실상부한 전자공학, 반도체 등의 관련학문에서 두각을 드러낼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5]
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6]
學界喜消息 - 시내 서대문구 만리동 조선무선중학교는 창설 이래 십여 성상의 난관을 극복하고 오늘날까지 유지하여 온 것은 동교 설립자 조광운씨의 끊임없는 노력인 바 해방 후 문교부의 과학진을 위한 커다란 열의로 동교를 중학교로 승격시키었다. 이에 감격환 조광운씨는 사재 백만 원을 내어놓기로 되어 이 소식을 들은 동교 후원회와 동창회에서는 오백만원을 투척, 학교재단 완성을 결의하고 재단법인기성회를 조직하여 조선 유일의 무선과학 증진을 양성할 무선중학을 세워 조선건국에 이바지하기로 되어 사회 각 방면의 성원을 기다리고 있다 한다.(대동신문, 1946년 11월 30일, 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