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16 11:08:17

과테말라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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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vs 소련군 }}}}}}}}}}}}
과테말라 내전
Guerra civil de Guatemala
Guatemalan Civil War
1960년 11월 13일 ~ 1996년 12월 29일
장소
과테말라 전역
원인
불평등한 토지소유
1954년 과테말라 쿠데타에 따른 토지개혁 무산
교전 국가 및 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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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테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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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
파일:과테말라 민족혁명연합 당기.svg 과테말라 민족혁명연합(URNG)
파일:과테말라 노동자당 당기.svg 과테말라 노동당(PGT)
파일:MR-13 깃발.svg MR-13
파일:FAR 깃발.svg FAR
파일:Ejército_Guerrillero_de_los_Pobres_(emblem).jpg EGP
파일:Organización_del_Pueblo_en_Armas_(emblem).jpg ORPA
지원 국가 및 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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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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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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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1996)

[[아르헨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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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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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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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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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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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기(1980-1992).svg FML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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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카라과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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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1979~1990)
지휘관
파일:과테말라 국기.svg 미겔 이디고라스
파일:과테말라 국기.svg 엔리케 페랄타
파일:과테말라 국기.svg 훌리오 멘데스
파일:과테말라 국기.svg 카를로스 아라나
파일:과테말라 국기.svg 셸 라우헤루드
파일:과테말라 국기.svg 로메오 루카스
파일:과테말라 국기.svg 에프라인 리오스 몬트
파일:과테말라 국기.svg 오스카르 메히아
파일:과테말라 국기.svg 비니시오 세레소
파일:과테말라 국기.svg 호르헤 세라노 엘리아스
파일:과테말라 국기.svg 라미로 데레온
파일:과테말라 국기.svg 알바로 아르수
파일:과테말라 민족혁명연합 당기.svg 롤란도 모란
파일:과테말라 민족혁명연합 당기.svg 루이스 투르시오스
파일:과테말라 민족혁명연합 당기.svg 마르코 욘
파일:과테말라 민족혁명연합 당기.svg 베르나르도 알바라도
파일:과테말라 민족혁명연합 당기.svg 로드리고 아스투리아스
파일:과테말라 민족혁명연합 당기.svg 리카르도 로살레스
병력
파일:과테말라 국기.svg 과테말라군
51,600명(1985)
45,000명(1994)
파일:과테말라 국기.svg 준군사조직
30만 명(1982)
50만 명(1985)
32,000명(1986)
파일:과테말라 민족혁명연합 당기.svg 전투원[1]
6,000명(1982)
3,000명(1994)
피해규모
파일:과테말라 국기.svg 과테말라군 2,500명 전사(1978~1983)
파일:미국 국기.svg 미군 28명 전사
파일:과테말라 민족혁명연합 당기.svg 미상
민간인 피해 미상
결과
1996년 평화협정
URNG 합법화
군의 정치참여 금지
과테말라 민사경찰 창설

1. 개요2. 배경3. 1960년~1966년, 내전의 시작, 군부의 발호4. 1966년~1973년, 암살과 "실종"의 시대
4.1. 1970년대 사회운동의 활성화 및 반군의 진화
5. 1978년~1983년: 초토화작전6. 1983년~1996년: 민주주의와 평화로의 이행7. 여담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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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과테말라 내전 1960년부터 1996년까지 과테말라 친미정부와 다양한 좌익 반군 사이에서 벌어진 내전이다.

1960년 11월 13일 소장파 좌익장교들이 이디고라스 푸엔테스 정권에 맞서 봉기를 일으켰으나 패배했다. 봉기군은 과테말라 동부 산악지대로 피신, 그곳에 은거하다 1962년 반군 단체 MR-13(Movimiento Revolucionario 13 Noviembre)를 결성했다. 1970년 과테말라 정부는 카를로스 마누엘 아라나 오소리오 대령이 이끄는 제도민주당(PID) 정권으로 교체되었다. 제도혁명당 정부는 이후 12년간 부정선거로 정권을 유지했다. 1982년 3월 23일 제도민주당 정권은 다시 에프라인 리오스 몬트 장군의 쿠데타로 엎어졌다. 70년대 내내 정권에 불만을 품은 원주민과 농민의 수가 증가했고 적잖은 수가 정부에 맞서 반군을 조직했다.

1981년부터 과테말라군은 5년간 절대권력을 장악했다. 군은 거의 모든 사회 및 정치적 기관에 침투하여 적대 세력을 격멸하는데 성공했다. 군정보국은 정부 반대파를 살해하거나 '실종'시키는 작업을 조율했다. 과테말라 정부는 반군이 주둔한 농촌에서 농민들을 대대적으로 살육하거나 마을 전체를 완전히 파괴했다. 이런 학살은 주로 마야인을 상대로 벌어졌다. 정부 반대자로 의심되는자, 귀환 난민, 비판적인 지식인과 좌익 정치인, 노조 운동가, 종교인, 언론인도 이런 학살의 희생양이 되었다. 당시 학살의 희생자는 최소 2만 5천명이며 정확한 수치는 아직도 모른다.[2] 실제로는 전투원과 비전투원을 합산해 10만명 이하가 사망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2009년부터 과테말라 사법부는 과테말라 내전에서 학살을 저지른 정치인과 군인들을 기소하고 있다.

2. 배경

파일:Justo_Rufino_Barrios.jpg 파일:Presidente_Jorge_Ubico_Castañeda.png
후스토 루피노 바리오스 호르헤 우비코
1871년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자유주의자들은 의욕적으로 커피 생산을 늘렸다. 당시 대통령 후스토 루피노 바리오스는 1877년 일용노동자 규정(Reglamento de Jornaleros)을 제정하여 원주민 노동자들이 크리오요와 독일인 이민자로 구성된 지주들을 위해 저임금으로 일하도록 강요했다. 바리오스는 또한 원주민의 공유지를 '합법적으로' 몰수하여 근대적 소유권에 근거한 대토지 소유의 기반을 확립했는데, 이 과정에서 자신의 측근들에게 배분하여 대지주로 키워줬다. 이것은 스페인 식민지 시절은 물론이고 라파엘 카레라의 보수주의 정권에서도 벌이지 않은 짓거리였다.

아르벤스는 전임 아레발로의 진보적 개혁노선을 이어받아 강화시켰다. 그는 대대적인 인프라 건설에 착수했고 1952년 6월 17일 토지개혁 법안(900호 법령)을 통과시켰다. 아르벤스는 673에이커(272헥타르) 이상의 모든 비경작지 그리고 224에이커(91헥타르)와 672에이커 사이의 부동산 중 비경작지가 1/3 이상인 것들을 유상몰수하는 식으로 온건한 농지개혁을 추진했다. 토지개혁은 빠른속도로 진행되어 1954년 6월까지 인구의 1/6에 달하는 50만 명이 140만 에이커(57만 헥타르)에 달하는 토지를 분배받았다. 그러나 보다 온건한 아레발로마저 고깝게 본 대지주와 UFC는 보다 급진적인 개혁에 당연히 경기를 일으켰다. 아르벤스의 목적은 봉건적인 과테말라를 현대적인 자본주의 국가로 재편하는 것이었지만[3] 과두지배자들은 자기들의 권력 기반 그 자체인 대토지를 해체하려는 그의 개혁을 도저히 받아들일수 없었다. 게다가 일부 농민의 자의적인 토지 점거나 지주와 농민간의 폭력 사태마저 발생했다.

UFC도 토지개혁법에 따르면 55만 에이커(22만 헥타르)에 달하는 소유지의 85%에 달하는 비경작지를 내놓아야 할 판이었다.[4] 문제는 아르벤스가 제안한 액수가 너무 낮았다는 것이다. 1953년 2월 28일 아르벤스 정부는 1차로 UFC 소유 비경작지 23만 4천 에이커(9만 4,700헥타르)를 수용했다. 미 국무부는 3월 25일 토지 수용에 항의하는 서한을 과테말라 측에 보냈고 6월 26일에 답변을 받았다. 아르벤스는 작년 5월 10일 UFC가 제출한 토지 가격평가 결과에 근거하여 62만 7,572달러(2023년 현재 726만 달러)를 장기채로 지불했다고 주장했다.[5] 반면에 UFC는 해당 토지의 실 가치가 1,935만 5천 달러(2023년 현재 2억 2,390만 달러)라고 주장했다. 같은해 과테말라의 GNP는 5억 5,830만 달러, 정부예산은 6,287만 5,000달러(재정적자 149만 달러), 외환보유고는 4,320만 달러였다. 즉 당시 과테말라 GNP의 3.5%, 정부예산의 30.7%, 외환보유고의 44.8%에 해당하는 액수를 요구한 것이다. 과테말라 정부 입장에선 지불하기 힘든 거액을 요구한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과테말라 최대의 대지주인 UFC 입장에서 보면 지불능력도 안되면서 헐값에 몰수한다고 느낄 수 있었다.

3. 1960년~1966년, 내전의 시작, 군부의 발호

한편 군부는 1963년을 기점으로 과두지배자를 위한 기구에서 새로운 지배세력 그 자체로 변모했다. 그 계기는 부정선거에 반대하는 민중시위였다. 이디고라스를 지지하는 정당연합은 1961년 12월 총선에서 부정선거로 승리했다. 새 국회의원의 임기가 시작되는 1962년 3월 1일 과테말리시티의 학생단체가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를 일으켰다. 시위는 곧 치키물라, 후티아파, 레탈울레우, 산마르코스, 우에우에테낭고, 케찰테낭고 등 과테말라 전역으로 확대되었고 민중도 동조 파업과 작업중단 등의 방식으로 지지했다. 19일 이디고라스는 계엄령을 선포했고 민중시위를 공산주의자가 선동한 것이라고 몰아가며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또한 몇주 내로 내각인사를 전부 군인으로 교체했다. 시위는 22명의 사망자를 포함해 사상자 300~500여명과 피체자 1,000여명을 내고 진압되었다. 비록 정권은 지켰지만 이때 진압으로 이디고라스는 인기를 잃게 되고, 좌익은 1963년 대선에 전 대통령 아레발로를 중심으로 단일화하여 권토중래를 노렸다. 군부는 아레발로의 대선 당선 가능성에 경기를 일으켰고 결국 3월 30일 엔리케 페랄타 아수르디아 대령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페랄타는 나라 전체에 공산주의자가 침투했다고 주장하면서 1963년 대선을 취소했다. 또한 헌법을 정지하고, 의회를 해산하며 새로운 국가원수로서 정부의 모든 기능을 인수받았다. 정부군은 1964년부터 본격적으로 반군 진압작전에 나섰다. 이해 2월과 3월 정부군 공군이 이사발의 MR-13 기지를 공습하였다. 이듬해 9월과 10월에는 '팔콘 작전(Operation Falcon)'을 벌여 사카파 일대의 반군을 진압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정부군과 경찰은 미국으로부터 각각 대게릴라전 교관과 고문을 지원받았다. 11월에는 도시게릴라를 상대로 '림피에사 작전(Operation Limpieza)'을 벌여 PGT의 핵심요인을 억류, 고문하고 살해했다.

4. 1966년~1973년, 암살과 "실종"의 시대

4.1. 1970년대 사회운동의 활성화 및 반군의 진화

1970년대는 사회운동이 활발해질 뿐만 아니라 반군의 구성과 전략이 대폭 변화한 시대이기도 하다. 이 시대 반군은 크게 4개 조직으로 나뉜다. 세력이 확연히 위축된 FAR, 1971년 중서부 고원지대에서 결성된 무장민중혁명조직(ORPA), FAR의 일부세력이 결성한 빈민게릴라군(EGP), 1978년 PGT에서 분리한 PGT 전국지도핵심파(PGT-NDN)가 그들이다. 이 시대 반군의 특징은 포코 이론을 포기했다는 점이다. 즉 거점 전략을 포기하고 베트콩을 모델로 삼았으며, 마오주의 군사전략과 유사한 '장기전' 방식을 도입했다. 또한 반군에 마야 원주민이 대거 가담하거나 아예 원주민이 반군조직을 주도하였다. ORPA의 경우 조직원의 90% 이상이 마야 원주민이었고 지역 지도부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1954년 아르벤스 정부 붕괴로 인해 마야 원주민 운동이 급진화되고 정치화된 결과이자, 동시에 원주민 문제를 등한시하여 그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기존 반군세력의 자기반성의 결과였다. 이런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 채 마야 원주민을 주체가 아닌 객체로만 바라본 PGT는 1960년대에 누린 지도적 역할을 곧 상실했다. 끝으로 주요 활동 지역이 동부 산악지대에서 마야 원주민이 밀집한 서부 고원지대로 옮겨갔다. 물론 마야 원주민의 반군 참여가 완전히 자발적인 것은 아니었다. 반군은 원주민의 거주지에서 자기들에 반대한다고 판단되는 주민들을 학살했고, 일부 원주민은 반군의 공포통치에 못 이겨 반강제적으로 반군을 지원하거나 도왔다. 당시 반군이 벌인 학살에 대해 후일 지도부가 사과했을 정도였다.

반군이 변화한 결과 1970년대 말 이르러 반군은 1960년대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성장했다. 기껏해야 300~500명에 불과했던 전투원의 숫자가 4천~1만2천명으로 증가했고 게다가 대규모의 지지 집단까지 거느렸다. 1981년 마야 원주민 25만에서 50만 명이 반군을 적극적으로 도운 것으로 추산되며, 군정보국 G-2는 EGP의 원주민 지지자만 36만 명에 달한다고 추산했다. 주의할 점은 마야 원주민이 반군의 주요 지지층이었다고 해서 그들 대부분이 반군의 지지자거나 협조자인 것은 아니란 점이다. 원주민이 서부와 중부 고원지대에 밀집한 특성상 반군과 접촉이 잦긴 했지만 그래도 평범하게 농사짓고 하루벌어 하루사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1980년 반군은 도시와 농촌에서 전보다 더욱 활발하게 게릴라전을 수행했다. 농촌에서는 농장을 점거하고 유명한 지주들을 암살했으며, 도시에서는 주요 기관에 테러를 벌이거나 정부측 요인을 암살했다. 급기야 1981년 초에는 니카라과 혁명의 성공에 고무되어 대대적인 공세를 벌이고 심지어 과테말라시티를 종종 습격할 정도로 성장했다. 1982년 2월 8일에는 ORPA, FAR, EGP, PGT-NDN이 모여 과테말라민족혁명연합(URNG)을 결성했다. 하지만 URNG가 결성될땐 반군이 정부군의 토벌에 다시 지리멸렬하게 되어서 별다른 군사적 활약은 없었다.

5. 1978년~1983년: 초토화작전

1978년 수립된 루카스 가르시아 정권은 반군 진압 과정에서 마야 원주민 공동체를 대상으로 무자비한 학살을 벌였다. 이에 1980년 1월 31일 마야 원주민 농민단체가 과테말라시티의 스페인 대사관을 점거하여 이 사실을 국제사회에 호소하려고 했다. 그러나 정권의 무자비한 진압작전으로 대사관에 화재가 발생해 스페인 외교관 8명을 포함해 36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벌어졌다.[6] 비록 이 사건으로 정권의 이미지가 실추되긴 했으나 그렇다고 탄압이 느슨해지진 않았다. 정부군에 살해된 사람의 숫자는 1979년 일평균 20~30명에서 1980년 30~40명으로 증가했다. 1980년 한해에만 5천명이 정부군과 친정부 민병대에 피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1981년 그 숫자는 9천명으로 더 늘어났다.

빅토리아 82 작전이 거시적 측면의 소요진압 작전이었다면, 소피아 작전은 좀 더 세부적인 측면에서 마야계 이실인 공동체(Ixil)에 대한 섬멸을 목표로 한 작전이었다. 이실인 공동체는 서부 고원지대의 교통이 불편한 고립된 지역에 있었으며 따라서 1970년대부터 EGP의 주요 활동무대가 되었다. 그리고 과테말라 정부가 보기에 국가 체제로부터 독립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이실인 공동체는 EGP의 근거지로 보였다. 1982년 7월 16일부터 8월 19일까지 진행된 소피아 작전은 이실인 공동체를 고립하고 원주민들을 직접 공격하는 식으로 진행되었고 작전이 끝난 뒤에도 1983년 1월까지 원주민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이 진행되었다. 이곳의 원주민에 대한 잔혹행위가 끝난 것은 1987년이 되어서였다. REMHI 보고서에 따르면 이실인 공동체에서 8,857명이 사살되었고, 그 중 5,252명은 정규군에게, 2,270명은 친정부 민병대에 살해되었다. 주민들을 닥치는대로 사살한 것은 물론이고 여성들을 조직적으로 강간하고 성노예로 전락시키거나, 또는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를 끄집어내거나 남편에게 아내와 자식들이 강간당하는 것을 강제로 보게 하였다. 정부군은 이실인을 학살할 뿐만 아니라 마을을 완전히 파괴하여 생존자들이 자원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다. 당시 이실인 마을의 70~90%가 잿더미가 되었다.

리오스 몬트 정권의 강력한 의지로 반군과 그 동조세력은 거의 괴멸되었다. 실제로 URNG는 민간인 지지자들로부터 거의 분리되어 외딴 시골로 내쫒기는 등 완전히 수세에 몰렸고 지도부는 아예 멕시코시티로 도망쳤다. 결국 군사력이 소진된 URNG는 1986년부터 정부와 협상에 나섰다. 정부군은 또한 사회의 전 분야에 침투하여 적대세력들을 절멸하고 사회 전 영역을 통제했다. 그 과정에서 마야 원주민들이 치러야 했던 대가는 극심했다. CEH의 1999년 보고서에 따르면 1978년부터 1983년까지 절대다수의 학살이 서부 고원지대에서 자행되었다.

6. 1983년~1996년: 민주주의와 평화로의 이행

1986년 1월 14일 취임한 세레소는 정부의 최우선 과제로 정지척 폭력행위의 중단 및 법치의 회복을 선언하였다. 세레소 정부는 인신보호영장과 암파로(amparo) 영장[7]에 관한 법을 제정하고 국회에 인권위원회를 설립했으며, 1987년 인권옴부즈맨 사무소를 설치했다. 과테말라 대법원도 반부패 개혁 및 사법제도 효율성 제고에 착수했다. 세레소가 선출된 후 과테말라군은 정치 개입에서 물러나 군 본연의 임무로 돌아갔다. 세레소 정부의 전반기는 정치적 폭력이 확연히 줄어들고 경기가 안정되었다. 수세에 몰린 URNG도 1986년부터 무장투쟁보단 정부와의 협상에 집중했다. 세레소 정부의 후반기는 경제적 실패와 각종 사회갈등으로 얼룩졌지만 그래도 쿠데타 시도들을 이겨냈고, 1990년 5월에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URNG에게 이후 치러질 선거를 방해하지 않을 것을 보장받는 내용의 협정을 체결했다. 1990년 대선에서는 호르헤 세라노 엘리아스가 당선되어 최초의 민선 민간인 정부 간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데레온은 1월 6일 URNG와 협상을 재개했다. 그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UN과 미주기구(OAS)의 후원을 받았으며 반면에 군부가 협상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줄어들었다. 양측은 3월에 인권, 6월에 난민 정착과 역사 진상규명, 이듬해 3월에 원주민 권리에 관한 협정을 체결했다. 양측은 또한 사회경제 및 농업정책에 관한 협정에 상당한 진전을 이끌어냈다. 1994년 4월 3일 대법원장 에두아르도 에파미논다스 곤살레스 두본이 살해되고 이듬해 10월 5일 사만에서 군의 민간인 학살이 벌어졌지만 그래도 데레온 정부는 자유선거를 치르는 데 성공했다. 1994년 8월 16일 잔여임기를 채울 새 국회가 선출되었고, 1996년 1월 7일 대선 결선에서 국민선진당(PAN) 후보 알바로 아르수가 당선되었다. 아르수 정부도 전 정부들과 마찬가지로 URNG와 계속 대화했다. 3월 20일 휴전이 선언되었고 이후 여러 개의 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 12월 12일 양측은 마드리드에서 URNG를 합법정당으로 전환하는데 합의했고, 18일 국회는 URNG 전투원을 부분적으로 사면하는 법안을 통과했다.

과테말라 정부 공식기관인 ‘역사진실규명위원회(Comisión para el Esclarecimiento Histórico)’는 1999년에 발표한 보고서에서 과테말라 정부와 반군 양측 모두 학살을 비롯한 잔혹행위를 저질렀지만 학살의 책임은 거의 대부분 정부군과 친정부 민병대, 처형부대에 있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피살자와 실종자를 최소 20만 명으로 추정했지만, 20만 명이란 숫자는 단순히 통계적 외삽법으로 추정한 결과로 신뢰성에 의문이 갈 수밖에 없다. 실제로는 내전 전 기간을 통틀어 전투원과 비전투원을 합쳐 37,000명에서[8] 최대 10만명으로 추산된다. 20만이라는 숫자는 정확한 검증 없이 각종 논문이나 전문 서적에서마저 횡행하는 실정이다.[9]

정확한 피해자 추정치를 넘어서, CEH 보고서의 핵심은 과테말라 정부군이 다수의 마야 원주민 마을에서 저지른 626건의 대량학살사건을 상세히 설명하고 이를 “제노사이드”로 규정했다는 것에 있다. 원주민을 상대로 한 학살과 초토화작전의 절반 이상이 1981년부터 1983년까지 발생했다. 학살이 절정에 달한 1981년부터 1983년까지 수천여개의 마을이 파괴되었고 50만 명이 난민이 되었으며 그 중 15만 명이 멕시코로 피신했다. 조사결과를 토대로 CEH 위원장 크리스티안 토무샤트(Christian Tomuschat)[10]는 정부군의 만행이 분명히 민간인에 대한 대량학살이며 계획적인 전략이었다고 지적했다. 동 보고서에 따르면 CIA를 비롯한 미국 정부기관들이 정부군의 학살행위를 직간접적으로 지원했다.

7. 여담

토지를 지키겠다고 본의 아니게 내전의 단초를 제공한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는 정작 미국 본국의 반독점법에 걸려서 이후 중남미의 철도망과 과테말라의 토지 일부를 토해내야 했다.

벤 마이켈슨이 이를 소재로 나무소녀를 썼는데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전개되며 마야족에 대한 여러 억압 및 학살에 대한 내용들 나온다.

내전의 단초가 된 아르벤스 축출 쿠데타를 지켜보다가 혁명을 결심한 에르네스토 게바라라는 아르헨티나 의학도 청년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체 게바라이다.

8. 관련 문서



[1] 동조 민간인 제외. 게릴라 특성상 전투원 또는 비전투원으로 분류되기 어려운 민간인이 있음. 과테말라 군정보부 G-2는 원주민 최소 36만 명이 반군을 지원하고 있다고 추산함. [2] 1994년 조직된 역사진실규명위원회(Comisión para el Esclarecimiento Histórico, 이하 CEH)의 추산에 따르면 20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살해되거나 강제 ' 실종'되었다. 당시 학살의 93%가 정부군(민병대 포함)에 의해, 3%가 게릴라에 의해 자행되었다. 하지만 CEH의 보고서는 인구조사 자료를 잘못 인용하였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3] 그러다 보니 과테말라의 공산주의자들은 아르벤스의 목적을 눈치채고 덜 급진적이라며 반발하여 연정에서 탈퇴했다. UFC의 선전과 달리 아르벤스는 공산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4] 이 막대한 토지를 놀린 이유는 파나마병 때문이었다. 대책없이 경작지를 늘렸다가 파나나병으로 절단이 나 버리면 손을 쓸 수가 없어지기 때문에 대책이 나오기 전 까지 땅을 놀렸어야 했다. [5] 이건 UFC가 제 발등을 찍은 격인데 왜냐하면 그동안 탈세 목적으로 소유지의 가격을 낮춰서 당국에 신고했기 때문이다. [6] 이 참사로 리고베르타 멘추의 아버지가 사망했으며 스페인은 과테말라와 단교했다. 양국은 1984년 9월 22일에 외교관계를 정상화했다. [7] 독일의 헌법소원(Verfassungsbeschwerde)과 유사한 스페인어권 국가들의 제도로 기본권을 보호하기 위한 법적 구제방법을 뜻한다. [8] Sabino, Carlos (2008). Guatemala, la historia silenciada (1944-1989). Tomo II: El dominó que no cayó. México: Fondo de cultura Económica. [9] 과테말라 현지에서 오랫동안 연구해온 인류학자인 데이비드 스톨(David Stoll)은 전쟁이 최고조에 이른 1981~1982년에 과테말라 전역에서 전투원과 비전투원을 불문하고 35,000명이 사망했고 # 내전을 통틀어는 6만~7만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게다가 1982년 리오스 몬트가 집권한 이후로는 민간인 학살이 오히려 줄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물론 그도 리오스 몬트 정권에서 과테말라군이 반정부인사를 상대로 조직적인 학살을 벌인 것은 절대로 부정하지 않으며 오히려 과테말라 군사정권을 비판하는 입장에 서 있다. [10]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 법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