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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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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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江惇(305 ~ 353)
동진의 인물로 자는 사전(思悛). 연주 진류군 어현(圉縣) 출신. 서진의 대신 강통의 아들이며, 형으로는 강반이 있다.
2. 생애
천성이 순수하여 효심과 우애가 깊고, 고상한 절개로 올바른 풍속을 바로잡는 것에 힘썼다. 또, 학문을 좋아해 유교와 도교에 능통했다. 그는 곧 다섯 권으로 구성된 《통도숭검론》(通道崇檢論)을 저술하여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함화 2년(327년) 12월, 역양내사 소준이 예주자사 조약과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키자, 강돈은 도성 건강을 빠져나와 동양산(東陽山)으로 피신해 그곳에서 살았다. 반란이 진압된 후, 과거 강통 덕에 천거받은 적이 있는 태위 치감은 강돈을 초빙해 연주치중에 임명하고, 자신의 부서인 태위부 산하로 배속시켰다.
함강 5년(339년) 12월, 낭야왕 사마악이 사도에 임명되었을 무렵, 서정장군 유량이 강돈을 불러 유림참군으로 삼았다. 이후 조정으로부터 박사, 저작랑 직책랑 직책을 제안 받았으나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강돈은 동양태수 완유, 장산현령 왕몽과 함께 당대 명사로 이름을 널리 날렸고, 이들은 서로를 깊이 존중하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영화 9년(353년), 세상을 떠났다. 향년 49세. 강돈과 교류하던 친우들은 비석을 세워 그의 미덕을 칭송하는 글귀를 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