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루타 아츠야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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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루타 아츠야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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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PB 일본 시리즈 우승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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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 | 1995 | 1997 | 2001 |
1988 서울 올림픽 {{{#8c8c8c 은메달}}} |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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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리그 MVP | ||||
잭 하웰 ( 야쿠르트 스왈로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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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루타 아츠야 ( 야쿠르트 스왈로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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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와타 마스미 ( 요미우리 자이언츠) |
1997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리그 MVP | ||||
마쓰이 히데키 ( 요미우리 자이언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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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루타 아츠야 ( 야쿠르트 스왈로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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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키 가즈히로 (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
1991~1993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포수 부문 베스트 나인 | ||||
무라타 신이치 ( 요미우리 자이언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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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루타 아츠야 ( 야쿠르트 스왈로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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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야마 슈지 ( 히로시마 도요 카프) |
1995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포수 부문 베스트 나인 | ||||
니시야마 슈지 ( 히로시마 도요 카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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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루타 아츠야 ( 야쿠르트 스왈로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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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야마 슈지 ( 히로시마 도요 카프) |
1997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포수 부문 베스트 나인 | ||||
니시야마 슈지 ( 히로시마 도요 카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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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루타 아츠야 ( 야쿠르트 스왈로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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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시게 모토노부 (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
1999~2001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포수 부문 베스트 나인 | ||||
다니시게 모토노부 (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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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루타 아츠야 ( 야쿠르트 스왈로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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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노스케 ( 요미우리 자이언츠) |
2004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포수 부문 베스트 나인 | ||||
야노 아키히로 ( 한신 타이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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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루타 아츠야 ( 야쿠르트 스왈로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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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노 아키히로 ( 한신 타이거스) |
1990~1993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포수 부문 골든글러브 | ||||
나카오 타카요시 ( 요미우리 자이언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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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루타 아츠야 ( 야쿠르트 스왈로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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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야마 슈지 ( 히로시마 도요 카프) |
1995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포수 부문 골든글러브 | ||||
니시야마 슈지 ( 히로시마 도요 카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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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루타 아츠야 ( 야쿠르트 스왈로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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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야마 슈지 ( 히로시마 도요 카프) |
1997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포수 부문 골든글러브 | ||||
니시야마 슈지 ( 히로시마 도요 카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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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루타 아츠야 ( 야쿠르트 스왈로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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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시게 모토노부 (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
1999~2001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포수 부문 골든글러브 | ||||
다니시게 모토노부 (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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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루타 아츠야 ( 야쿠르트 스왈로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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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노스케 ( 요미우리 자이언츠) |
2004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포수 부문 골든글러브 | ||||
야노 아키히로 ( 한신 타이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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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루타 아츠야 ( 야쿠르트 스왈로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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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노 아키히로 ( 한신 타이거스) |
1991년 센트럴 리그 수위타자 |
트로이 닐 ( 오릭스 블루웨이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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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루타 아츠야 ( 야쿠르트 스왈로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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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키 타카노리 (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
마쓰이 히데키 ( 요미우리 자이언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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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루타 아츠야 ( 야쿠르트 스왈로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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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오카 토모히로 ( 요미우리 자이언츠) |
보유 기록(NPB) | |
1경기 최다 홈런 | 4개 |
시즌 최고 도루저지율 | .644 |
후루타 아츠야의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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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등번호 27번}}} | |||||||||||||||||||||||||||||||||||||||||||||||||||||||||||||||||
론 데이비스 (19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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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루타 아츠야 (1990~20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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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무라 유헤이 (20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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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루타 아츠야 古田敦也 | Atsuya Furut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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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65년 8월 6일 ([age(1965-08-06)]세) |
효고현 카와니시시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효고현립 카와니시메이호 고교 (효고) - 리츠메이칸대학 |
신체 | 182cm, 80kg |
포지션 | 포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1989년 드래프트 2라운드 ( 야쿠르트) |
소속팀 |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1990~2007) |
지도자 |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감독 (2006~200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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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프로야구 前 야구선수, 감독. 현역 시절 포지션은 포수.
프로 생활 18년 동안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에서만 뛰면서 리그 최고의 공수겸장 포수이자, 스왈로즈를 대표하는 원클럽맨 그리고 프랜차이즈 스타로 이름을 날렸으며, 오늘날까지 야쿠르트를 넘어 일본야구 팬들에게서 무한한 애정과 존경을 담은 '미스터 스왈로즈'란 애칭으로 불리고 있다. 선수 겸 감독을 거쳐 2007년 은퇴한 이후엔 해설가 및 평론가, 유튜버 등으로 다양한 활동을 하는 중.
포수로써의 유명세 덕분에 일본 야구 만화에서 흔히 오마주되는 선수이기도 하다. '안경 쓴 포수는 조심해야 된다고.' 라는 대사로 알려진 H2의 안경 낀 포수 노다 아츠시가 대표적인 예시.
2. 데뷔하기까지
대학 시절 나름대로 주목받던 포수였던 그는 리츠메이칸대학을 졸업할 당시 2순위 이상 지명이면 프로, 3순위 이하로 지명 받으면 사회인야구팀[2] 토요타 자동차로 보낸다고 대학팀 감독이 공언했다. 닛폰햄 파이터즈로부터 2순위 지명한다는 약속을 받고 기자회견 준비까지 했지만, 정작 드래프트 현장에 있던 당시 닛폰햄 감독이었던 다카다 시게루[3]가 안경 낀 포수는 안 된다고 주장,[4] 결국 닛폰햄은 1순위로 다케다 가즈히로란 투수를[5], 2순위로 오가와 고이치라는 내야수를 지명했다.[6] 대신 닛폰햄 구단은 후루타에게 '3순위에선 반드시 뽑겠으며, 대우는 2순위 수준으로 해 주겠다' 라는 약속을 했으나 동료 선수들의 패키지 취업[7]에 대학팀과 사회인야구 팀 간의 관계 등을 감안하여 결국 사회인야구팀으로의 진출을 결정하게 된다.[8]이후 사회인야구 팀 토요타 자동차 야구단에서 뛰던 후루타는 1988년 서울 올림픽 때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으로 선발, 투수 노모 히데오와 함께 배터리를 이루며 은메달을 획득하면서 그 가치를 재평가 받는 계기를 마련했다. 덕분에 1989년 드래프트에선 2순위로 야쿠르트의 지명을 받을 수 있었는데, 앞선 드래프트에서 약속까지 받고도 물을 먹었던 경험 때문인지 지명 받은 이후는 이게 정말 생시냐고 주변 사람들에게 거듭 물었다고 한다. 다만, 이처럼 나름 극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같은 해 드래프트에 노모 히데오가 등장하여 무려 8개 구단이 1순위에서 경쟁을 벌였던 탓에 상대적으로 주목은 받지 못했다고 전해진다.[9][10]
우여곡절 끝에 야쿠르트에 입단한 후루타였지만, 이후의 길이 그리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안경 낀 선수는 포수에 적합하지 않으며 성적도 시원찮다는 인식이 강했던 데다, 무엇보다 당시 야쿠르트의 감독이자 레전드 포수였던 노무라 카츠야부터가 후루타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례로 노무라 감독은 후루타를 보고 "어깨는 1류지만, 타격은 2류, 리드는 3류"라 평하며, "안경 낀 포수는 곤란하다. 차라리 그냥 2군에 있는 다른 애들을 키우는 게 낫겠다."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기존 주전 포수의 입지까지 탄탄했다면 후루타는 2군이나 전전하다가 백업 포수로 선수 생명을 마쳤을지도 모르나, 불행 중 다행인지 당시 주전 포수였던 하타 신지의 어깨가 형편없을 정도로 약했던 탓에 노무라 감독은
3류라는 포수 리드 역시 루키 시절부터 뒷줄 벤치에 앉은 노무라 감독의 바로 앞 줄에 앉아 경기 중에도 끊임 없이 학대에 가까운 개인 교습를 받았으며 말 그대로 심리전을 방불케하는 볼 배합이 가능한 포수로 급성장하게 된다.[14] 매 경기가 끝난 후에도 후루타 전용 비디오 룸(...)을 만들어 두어 책상 가득히 다음 상대의 경기 비디오를 쌓아둔 덕분에 거의 새벽까지 반복 재생한 후에야 잠에 들 수 있었다고
3. 전성기 시절
각고의 노력 끝에 주전 포수 자리를 차지한 후루타는 팀의 주축 선수로 빠르게 성장하였고, 데뷔 이듬해인 1991년부터는 약점으로 지적됐던 타격까지 완벽하게 각성하여 그 해 포수 최초로 센트럴리그 타격왕을 차지한 데 이어[16][17] 1992년엔 3할-30홈런[18]과 함께 일본 최초로 올스타전에서의 사이클링 히트를 달성했다. 2003년에는 1경기 4홈런을 치고, 2004년에는 한국 기준 마흔의 나이로 23홈런을 치는 등 은퇴할 때까지 2097안타, 1009타점, 217홈런, 통산 타율 .294을[19] 기록하는 대타자가 된다. 이 정도면 올스타전 17시즌 연속 출장이란 대기록이 단순한 덤으로 여겨질 지경. 단순한 스탯쌓는 타자도 결코 아니었던 것이
그 결과 1992년에 리그 우승을 일궈냈고, 이어서 1993, 1995, 1997, 2001년 리그 우승과 더불어 일본시리즈 우승까지 달성하며 팀의 최고 간판 선수이자, 90년대 야쿠르트 황금시대를 이끄는 주역이 된다. 1993년과 1997년에 각각 센트럴리그 MVP에 올랐으며(1993, 1997), 특히 1997년엔 센트럴리그 MVP는 물론[21], 포수 최초로 일본시리즈 MVP를 수상한 데 이어 노무라 카츠야 감독까지 제치고 일본프로야구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쇼리키 마쓰타로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2001년에도 2번째로 일본시리즈 MVP를 수상했다.[22]
그런데 진짜 문제는 포수로서의 수비 스킬과 리드 쪽이 너무 뛰어난 나머지 그런 타격 실력을 까맣게 잊게 할 정도였다는 것인데, 오죽하면 일본프로야구 팬 대부분이 후루타를 수비만 뛰어난 포수 정도로 인식했다고 한다(...) 사실 그도 그럴 것이, 포수 리드는 그 깐깐하기로 소문난 ID 야구의 노무라 카츠야 감독이 아예 전부 믿고 맡길 만큼 뛰어났고, 수비율이 높은 것은 말할 필요도 없으며, 포수 스킬의 주요 척도 중 하나로 다뤄지는 도루 저지율에선 시즌 도루 저지율 1위를 9번이나 차지했을 정도로 막강한 면모를 보였다. 아예 데뷔 시즌부터 도루 저지율 5할(.527 - 26허용 29저지)을 넘긴 데 이어 2002년까지 매년마다 도루저지율 4할대를 유지해 왔다. 특히 1993년도와 2000년에 기록한 도루 저지율은 자그만치 6할로, 1993년에는 일본프로야구 단일시즌 최고 기록인 .644란 경악스런 저지율을 기록했다.[23][24] 통산 도루저지율 .462 또한 일본프로야구 역대 1위 기록이다.
그의 송구 능력을 분석한 방송 프로그램에 의하면, 후루타가 볼을 잡고 2루를 향해 볼을 던지는 데까지 불과 0.6초대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엄청난 속도를 보여 주었으며, 특히 공이 원바운드로 들어온 경우조차도 도루를 저지하는 경우가 유난히 많았는데 이에 대해 후루타는 "볼이 원바운드될때 주자가 뛰면 '앗싸~ 행운!'이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공격과 수비 양면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보니, 대다수의 일본프로야구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후루타 아츠야를 1990년대 일본프로야구 최고의 포수로 뽑고 있으며, 지금까지도 그를 일본 포수를 대표하는 상징이자 일본 야구 역대 최고의 포수 중 한 명으로 여긴다.
4. 일본프로야구 파업
2004년,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와 오릭스 블루웨이브의 합병 소식이 언론을 통해 밝혀졌을 때 일본프로야구계는 말 그대로 발칵 뒤집혔다. 단순히 구단 하나가 줄어든다는 것뿐만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재정 상황이 나빴던 퍼시픽 리그에서 두 팀이 합쳐진다는 건, 퍼시픽 리그가 아예 사라지고 센트럴 리그와 합병되어 단일리그가 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모기업 다이에의 경영난으로 허덕이던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역시 해체설이 돌기도 했다.선수들에게도 자신들의 직장이 2개가 준다는 것은 이와 연관된 수많은 선수, 지도자, 직원들의 고용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때 일본프로야구 선수 노조 위원장을 맡고 있던 후루타는 각 팀의 주축선수들을 설득해 긴테쓰와 오릭스의 합병을 반대하는 파업을 결의, 일본프로야구 사상 첫 선수단 파업이 일어났다.
그로 인해 구단들은 수십억 엔의 피해를 입고, 주변 상가 역시 매상에 크나큰 타격을 입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론을 자신의 편으로 만든 것은 오히려 후루타 쪽이었다. 그는 뛰어난 달변가였고, 때때로 눈물을 보일 줄도 알았다. 후지 테레비의 스포츠 뉴스 프로그램인 "스포르토" 에 출연, 파업에 대한 심경을 인터뷰하던 중 팬들의 응원 문구를 보다가 생방송 도중임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푹 숙이며 눈물을 흘렸다. 이 장면이 전국에 생방송으로 보내졌고, 이후 팬들은 경기장에 '지지마라 선수회', '후루타 선수회장 파이팅'등 다양한 현수막과 구호로 선수회에 지지를 보냈다. 그리고 당시 주니치 드래곤즈 감독이던 오치아이 히로미츠도 선수회의 편에 같이 섰다.
협상 중에는 구단주 측의 인사[25]가 악수를 청하자 "지금은 마음 편하게 악수를 할 입장이 아니다"라며 악수를 회피하는 장면이 중계되어 대중들의 이목을 사로잡기도 했으며, 지속적으로 여러 매체들을 통해 자신들의 정당성과 양대리그 유지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구단주들에게 새로운 구단을 공모해 줄 것을 끈질기게 요구하자, 구단주들도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후루타에게 항복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긴테쓰와 오릭스의 흡수합병은 막지 못했지만, 새로운 구단인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가 탄생하며 긴테쓰와 오릭스의 1.5군 선수들을 구제하는데 성공했고, 최종적으로는 양대리그와 그와 연관된 수많은 이들의 고용을 유지하는 데도 성공했다.
특히 이 파업의 성공은 일본 사회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요미우리 신문과 기업집단[26]에 맞서 상대적 약자라 할 수 있는 프로야구 선수들이 이룬 승리였기에 더욱 의미가 있었다. 이로 인해 후루타는 야쿠르트의 프랜차이즈 스타, 야구계 최고의 포수라는 타이틀마저 뛰어넘은 일본 야구팬 전체의 존경을 받게 되었으며, 이때의 이야기는 NHK에서 다큐 드라마로 제작되어 방영되기도 했다.
5. 선수 겸 감독 시절
2006년, 와카마츠 츠토무 감독이 사임하면서 차기 감독으로 전격 발탁되는데, 이때 구단과 선수로서 1년, 감독으로서 2년 계약을 맺게 된다.[27][28] 즉, 선수로 뛰는 동시에 감독의 역할까지 동시 맡게 된 것으로 이는 일본프로야구에서는 노무라 카츠야 이후 29년만의 일이었다고 한다.감독 첫 해에 팀은 리그 3위를 기록하면서 A클래스를 유지했지만 5할 승률은 달성하지 못 한 데다가 선수로써는 최악의 타격성적을 남겼으며, 2007년에는 팀이 21년만에 리그 최하위로 추락하면서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감독으로서, 선수로서 완전히 은퇴하게 된다.[29][30][31]
참고로 그의 은퇴 이후 그의 등번호였던 27번은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명예번호[32]로 지정된다.[33] 이 명예번호는 현재 2021년 팀의 센트럴리그 우승과 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끈 주전 포수 나카무라 유헤이가 물려받아 사용하고 있다.[34]
이후 한 방송에서 명장 노무라 감독의 최고의 이해자이자 수제자임에도 감독으로의 성적이 그다지 별로였던 것에 대해 질문을 받자 노무라 감독은 ID야구라는 이미지에 비해서 상당히 다혈질에 직선적으로 쓴소리를 바로 내뱉는 스타일이었지만 본인은 특히 젊은 선수들에게는 뭐라고 하려다가도 마음이 약해져 전혀 쓴소리를 할 수 없었던 등 선수단 분위기를 카리스마 있게 잡지 못한 것을 고백하고 이것이 선수 겸 감독의 한계가 아니겠느냐는 위로를 듣기도 하였다.
6. 은퇴 이후
현재 TV 아사히의 전속 해설위원[35]으로 활동 중이며[36], 또한 후지 TV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갈릴레오 시즌 2 4화(2013년 5월 6일 방영분)에 어떤 베테랑 투수의 볼을 받아주는 연습 파트너로 게스트 출연하는 등 틈틈이 예능이나 드라마에도 게스트로 나오고 있다.해설자 및 야구평론가로서도 프로야구, 고교야구, 국가대항전 경기를 모두 맡고 있을 만큼 평가가 좋은데, 고교야구에서도 2015년부터 아사히 방송[37]의 고시엔 대회 프로그램인 <열투고시엔>의 메인캐스터를 맡고 있다. 프로야구 경기에서는 냉정한 모습을 많이 보여주지만 국가대항전에서는 해설자가 아닌 웬 마산아재가 왔나 싶을 정도로 열띤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해설중에 좋은 플레이가 있을 때 'OK'라는 말을 많이 쓰고 포지션이 포수였던 만큼 수비 못 하는 포수들은 바로 디스하는 편.
선수 노조 위원장과 감독으로 보여준 지도력,[38] 국민 포수 이미지 때문에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시즌이 되면 정치권의 러브콜을 받고 있으나, 본인은 고사로 일관하고 있다.
2021년 1월부터 유튜브를 시작했다. 채널명은 후루타의 방정식. 채널 2024년 10월 시점에서 구독자 85.5만명을 기록중인 꽤 규모가 큰 채널로 술집을 빌리거나 스튜디오 내에서 토크를 진행하는 것이 주 컨텐츠.
7. 기타
- 어릴 적 동경하던 포수는 킨테츠 버팔로즈의 주전 포수였던 나시다 마사타카였다고 한다. 실제로 현역 시절 등번호였던 27번이 나시다의 등번호인 8번과 노무라 카츠야 감독의 19번을 합쳐 만든 것이라고 은퇴 후에 밝히기도 했다. 이름난 포수들의 등번호를 합친 번호라 매우 맘에 들었다고.[39] # 공교롭게도 이 둘은 2001년 일본시리즈에서 상대로 만났다.
- 지금은 입지가 많이 약화된 포수 리드론을 신봉하는 이들은 그의 리드에 극찬을 보내지만, 정작 후루타는 포수 리드가 아니라 투수와의 소통, 포구능력 및 2루까지 송구할 수 있는 강한 어깨를 포수가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겼다.
-
1995년에 동갑내기이자
후지TV 아나운서인 나카이 미호와 결혼해 일본에서 야구선수-지상파 아나운서 커플의 시초가 되었다.[40] 지금까지도 스포츠계의 대표적 잉꼬부부로 살아가고 있다.
연봉 16억의 별명많은 형님이 생각난다.참고로 금슬 좋은 두사람이 이혼 위기를 맞은 적이 있는데, 2002년 나카이 미호가 자궁종양 적출 수술로 인해 임신이 불가능한 몸이 되었고, 남편이 아이를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던 아내가 이혼을 신청한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후루타의 답변은 "널 사랑하니까 안 돼."애처가의 위엄다만 결혼 초기에는 나카이 미호가 결혼 직전까지 커리어 우먼의 길만 걸어서 가사 및 요리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였다고 한다. 심지어는 인스턴트 라면이라도 끓여달라고 했더니 어떻게 끓이는 줄 모른다는 대답만 돌아왔다고(...) 그래서 "넌 라면도 못 끓이냐"라고 타박을 준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후 나카이 미호 본인이 요리학원까지 다니는 정성을 보이면서 그 후로는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 당대 최고의 포수답게 볼을 잡는 프레이밍에 있어서도 독보적인 능력을 보여주었는데, 일본방송 파인플레이 실행위원회에 출연했을때 그의 프레이밍은 볼을 잡은 후에 스트라이크 존 쪽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볼이 미트에 들어가기 이전에 이미 스트라이크 존 방향으로 미트를 움직이며 볼을 잡는 것이 비법이라고 밝혔다. 즉, 스트라이크존 바깥쪽으로 달아나는 볼을 기다렸다가 잡는 것이 아니라, 날아오는 공과 90도 각도로 교차하며 "낚아채듯" 미트를 움직이며 잡는다는 뜻.
- 감독 겸 선수로 뛰던 2006~2007년엔 자신이 대타로 나갈 때 직접 심판에게 다가가서 대타, 나(代打、おれ)라고 외치기도 했다. 훗날 야구 애니메이션 다이아몬드 에이스 1기 6화에서 오마주되기도 하였다.
-
상당히 온화한 성격인 데다 비교적 체구도 작은 편이라 상대팀 투수들이 만만하게 보고 위협구를 자주 던졌다고 한다.
즉, 싸움이 나도 후루타 정도라면 충분히 이길 수 있겠다고 생각한 거다.상대팀 타자들도 몸에 맞는 공이 나오면 바로 후루타한테 달려들 정도에, 심지어 한 타석에서 4번 연속으로 공이 머리로 날아든 적이 있었을 정도. 다만 후루타 본인도 상대팀 선수들의 견제에 참다참다 폭발해서 벤치 클리어링을 벌이고 퇴장당한 전적이 있었을 정도로 무조건 당하지만은 않았다. 영상
- 선수 겸 감독 시절에는 상대방이 11점차로 앞서고 있는데 도루로 야구계 불문율을 어기자 바로 빈볼을 지시하는가 하면, 심판한테 상식이 없다고 폭언을 내뱉어 퇴장당하기도 했다. 온화하다지만 성격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영상
- 노무라 카츠야 감독은 후루타에게 비판적인 말을 하기도 했는데, 감독시절 선수들에게 자기 돈으로 밥도 안사고, 여성들에게 손이 빨리 가는 등 후배들에게 인망이 낮았다고 했다. 후루타 같이 머리 좋은 사람이 그걸 모를 리는 없을테고, 결국 일부러 신경 안쓴 것 아닌가 하고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현역 포수로는 성공해도 감독으로는 성공하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비평을 남기기도 했다.
- 1988 서울 올림픽에서 훗날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한 박동희와 직접 상대하기도 했다. 당시 준결승전이 한일전으로 치러졌는데, 후루타가 경기 막판에 구원 등판한 박동희를 상대로 결승 타점이 된 희생플라이를 기록했던 것. 3년 후인 1991년 한일 슈퍼게임에서 박동희와 재회했는데, "너처럼 빠른 공을 가진 투수가 아직까지 상 하나도 못탔다고?"라며 의아해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 느낀 바가 있었는지, 박동희는 이듬해인 1992년 한국시리즈에서 롯데의 우승에 기여하며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했다.
- 선수노조 위원장을 맡고 있던 2002년에 한국에서 임수혁 선수를 돕기 위한 자선 경매 행사가 열리자 유니폼과 사인볼을 기증하기도 했다.
- 아라시의 마츠모토 준이 후루타의 열혈팬임을 밝힌 바 있다. 후루타를 보기 위해 여러번 진구구장에도 간 건 물론 팬 감사회까지도 갔을 정도에 vs아라시에 나왔을때는 아주 좋아 죽었을 정도.
- 은퇴 시즌에는 각 구장에서 후루타 은퇴 세리머니가 펼쳐졌고, 후루타가 타석에 등장하면 야쿠르트 팬뿐만 아니라 상대팀 팬들도 자발적으로 후루타의 응원가를 불렀다. 이쯤되면 후루타가 일본 야구팬들에게 어느정도의 존재인지 실감할 수 있을 듯.
- 2017년 시즌 개막 전에 야쿠르트 OB 모임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FA 보강에 대하여 요미우리의 부진을 예측했는데, 이후 교류전을 전후하여 요미우리가 13연패로 침몰하고 시즌 막판에 분전했으나 끝내 4위에 그치며 구단 역사상 첫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 실패란 굴욕을 찍으며 그 예측이 현실이 되었다.
- 2015년의 첫 WBSC 프리미어 12를 앞두고 박병호를 다룬 다큐멘터리에서의 분석이 화제가 되었었다. 박병호의 기록 및 전광판을 넘어가는 홈런의 영상을 보면서 분석을 했는데, 여기서 NPB 역대 최고 포수로서 자신의 식견을 유감없이 보여준 것. 분석 내용은 '등번호가 보일 정도로 스윙을 장전하기에 테이크 백이 느릴 것이고, 150km 이상의 빠른 공을 가진 투수를 붙이면 공략할 수 있다'고 평하면서 오타니 쇼헤이를 추천했다. 이후 실제 대회에서 오타니가 한국 대표팀 타선을 철저히 봉쇄하고, 박병호가 메이저리그에서 훨씬 빠르고 무브먼트까지 월등한 패스트볼 앞에서 부진을 면치 못한 채 한국으로 복귀하면서 그의 분석이 정확했음이 입증되었다.
- NBA를 대표했던 전설적인 센터이자 샌안토니오 스퍼스의 대표 스타였던 데이비드 로빈슨과 생년월일이 같은 날이다. 공교롭게도 후루타와 로빈슨 두 사람은 프로로 데뷔한 시기까지 비슷하며 은퇴할 때까지 오로지 한 팀에서만 뛴 원클럽맨이기도 하다.
8. 연도별 성적
역대 기록 | ||||||||||||||||||
연도 | 소속팀 | 경기 | 타석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득점 | 타점 | 도루 | 볼넷 | 삼진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
1990 |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 106 | 334 | 70 | 12 | 1 | 3 | 32 | 26 | 1 | 43 | 44 | .250 | .353 | .332 | .686 | ||
1991 | 128 | 485 | 140 | 23 | 5 | 11 | 58 | 50 | 4 | 62 | 57 | .340 | .428 | .500 | .928 | |||
1992 | 131 | 568 | 150 | 27 | 3 | 30 | 87 | 86 | 3 | 78 | 87 | .316 | .422 | .576 | .997 | |||
1993 | 132 | 595 | 161 | 29 | 0 | 17 | 90 | 75 | 11 | 59 | 83 | .308 | .381 | .462 | .842 | |||
1994 | 76 | 287 | 62 | 9 | 0 | 3 | 24 | 19 | 3 | 20 | 40 | .238 | .297 | .308 | .605 | |||
1995 | 130 | 551 | 143 | 18 | 1 | 21 | 88 | 76 | 6 | 46 | 51 | .294 | .357 | .464 | .821 | |||
1996 | 119 | 492 | 112 | 24 | 2 | 11 | 57 | 72 | 5 | 46 | 68 | .256 | .332 | .396 | .728 | |||
1997 | 137 | 598 | 164 | 32 | 2 | 9 | 74 | 86 | 9 | 64 | 64 | .322 | .413 | .446 | .859 | |||
1998 | 132 | 552 | 135 | 19 | 1 | 9 | 58 | 63 | 5 | 46 | 62 | .275 | .344 | .373 | .713 | |||
1999 | 128 | 548 | 146 | 26 | 2 | 13 | 79 | 71 | 10 | 51 | 41 | .302 | .368 | .445 | .813 | |||
2000 | 134 | 562 | 138 | 31 | 0 | 14 | 65 | 64 | 5 | 45 | 54 | .278 | .349 | .425 | .774 | |||
2001 | 121 | 503 | 143 | 23 | 0 | 15 | 59 | 66 | 1 | 43 | 41 | .324 | .390 | .478 | .868 | |||
2002 | 120 | 458 | 126 | 24 | 1 | 9 | 49 | 60 | 3 | 28 | 15 | .300 | .352 | .426 | .778 | |||
2003 | 139 | 576 | 146 | 27 | 1 | 23 | 69 | 75 | 2 | 49 | 77 | .287 | .360 | .479 | .839 | |||
2004 | 133 | 532 | 148 | 23 | 0 | 24 | 72 | 79 | 1 | 36 | 66 | .306 | .365 | .503 | .868 | |||
2005 | 96 | 357 | 85 | 15 | 0 | 5 | 29 | 33 | 1 | 19 | 54 | .258 | .306 | .350 | .656 | |||
2006 | 36 | 98 | 22 | 5 | 0 | 0 | 11 | 8 | 0 | 7 | 13 | .244 | .299 | .300 | .599 | |||
2007 | 10 | 19 | 6 | 1 | 0 | 0 | 2 | 0 | 0 | 1 | 0 | .333 | .368 | .389 | .757 | |||
NPB 통산 (18시즌) |
2008 | 8115 | 2097 | 368 | 19 | 217 | 1003 | 1009 | 70 | 748 | 951 | .294 | .367 | .442 | .808 |
9. 관련 문서
[1]
선수 겸 감독.
[2]
일본의 사회인야구는 과거 한국에도 존재했던
실업야구에 해당한다.
[3]
이후 닛폰햄의 GM을 맡아 팀의 홋카이도 이전과 리그 우승, 일본시리즈 우승 등을 함께했으며 공교롭게도 후루타가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를 떠난 뒤 후임 감독으로 부임했고 2008, 2009 시즌 다 망치고, 2010시즌 도중 성적부진의 책임을 지고 사임한다. 이후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의 GM으로 리빌딩을 주도했으며 현재까지도 GM으로 재직중.
[4]
당시 닛폰햄 구단 상무였던
오사와 케이지가 훗날 술회하길, 후루타에게
야맹증이라는 굉장히 큰 단점이 있다는 괴소문이 돌아 지명을 취소하게 되었다고 한다.
[5]
다케다는 지명 이후 2002년까지 닛폰햄,
주니치,
다이에,
요미우리의 4구단을 떠도는 저니맨으로 뛰면서 통산 89승 99패 31세이브 1,008탈삼진 평균자책점 3.92의 성적과 1991년 최다 세이브+구원왕, 1998년 다승왕을 거두는 등 나름대로 괜찮은 성적을 거뒀다. 1999년 주니치가 센트럴리그 우승을 달성할 때 주니치의 주축 선발로 활약하며
선동열-
이상훈-
이종범의 팀메이트로 뛰기도 했다.
[6]
오가와 고이치는 프로에서 10년간 평범한 유틸리티 플레이어로 뛰다가 은퇴했다.
[7]
당시 한국야구계에서도 유망한 선수를 데려오기 위해 고교 동창들을 대학 팀이 패키지로 입학시키거나 프로 팀에 함께 입단시키는 등의 일이 많았다.
[8]
결국 닛폰햄은 3순위로 후지시마 세이고란 선수를 지명했다. 하지만 후지시마는
2군에선 수위타자를 차지할 정도로 맹활약했지만 1군에선 그저 그런 성적만 기록하고 2004년을 끝으로 은퇴.
[9]
이 1989년 드레프트의 8개 구단 동시 지명은 아직까지도 진기록으로 남아 있다. 참고로 1989년 드래프트에는
노모 히데오 외에도 유명한 선수들이 꽤 많았다. '외계인'
신조 츠요시가
한신 타이거즈에 드래프트 지명 5순위로 데뷔하였고, '대마신'
사사키 가즈히로는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에서 드래프트 지명 1순위로 데뷔하였다.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4순위 지명
마에다 토모노리는 2013년까지 무려 24년 동안 현역생활을 하였다. 그 외에도 세이부의 시오자키 테츠야, 히로시마의
사사오카 신지 등 각 팀의 에이스나 주축 선수로 성장할 선수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10]
당시 최악의 암흑기를 겪던 후루타의 고향 팀
한신 타이거즈도 원래는 후루타를 지명하려고 했지만, 위의 니혼햄의 경우와 같이 안경 낀 포수라는 점 등등의 이유로 지명하지 않는다. 그리고 한신은 1997년 주니치에서
야노 아키히로를 받아오기 전까지 제대로 된 주전 포수를 마련하지 못했다. 그 후 노무라-호시노 체제를 거치며 야노가 10여년 간 안방마님으로 자리잡고, 한신은 나름 2000년대의 강팀으로 도약한다. 그러나 야노의 노쇠화 이후 새로운 주전 포수를 키워내는데는 애를 먹으면서
조지마 겐지(前 시애틀), 후지이 아키히토(前 라쿠텐), 히다카 타케시(前 오릭스) 등의 외부 영입으로 포수를 충당했으며 그 사이
카노 케이스케 같은 유망주들을 못 키워내며 타 팀들의 비웃음을 사기도. 그래도 기어이 2010년대 말에야
우메노 류타로를 제대로 키워내긴 했다.
[11]
이후 하타 신지는 외야수로 포지션을 전향, 타격을 살려 일본시리즈 우승에 공헌한다.
[12]
1990년 데뷔할 때의 성적은 홈런 3개, 타율 0.250, OPS .686였다. 포수란 걸 감안했을 때는 그냥저냥 쓸만한 수준.
[13]
이런 뛰어난 수비 실력을 인정 받아, 후루타는 데뷔한 해에
골든글러브를 수상하게 된다. 일본의 골든 글러브도 메이저리그처럼 수비 능력만을 평가 기준으로 주는 상이다.
[14]
노무라 감독도 이후 인터뷰에서 '너는 포구와 송구는 되니까 볼 배합을 배워야 한다. 시합이 시작되면 내 바로 앞에 앉아서 경기 내내 내가 중얼거리는 걸 듣고 배워라' 라고
갑질에 가까운
과외를 시킨 것이었음을 밝힌 바 있다.
[15]
7차전 1회 초에 야쿠르트가 히로사와 카츠미의 3점 홈런으로 먼저 선제점을 땄기 때문에 1회 말 키요하라의 2점 홈런은 선제가 아닌 추격타였다. 참고로 7차전은 이후 야쿠르트가 8회 말 또다시 히로사와 카츠미의 유격수 땅볼로 주자를 홈으로 들여보내는데 성공, 1점을 더 따내면서 4 - 2로 승리하여 15년만에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16]
일본프로야구에서 포수 출신 타격왕은 당시 야쿠르트 감독이었던
노무라 카츠야(1965년) 이후 처음이었다. 다만 이 과정에서 노무라 감독이 후루타와 타격왕 경쟁을 벌이던
오치아이 히로미츠 등 다른 팀 선수들에게
고의사구를 지시하며 승부를 회피했던 것 것은 오점으로 남아있다. 이에 대해 노무라 감독은 "자신 이외엔 없었던 타격왕 포수가 나오는 것을 보고 싶었다"면서 자신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음을 인정했고, 그에 관한 비난도 자신이 책임질 것이라고 말했다.
[17]
당시 후루타와 타격왕 경쟁을 벌인
오치아이 히로미츠는 이 해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초의 양대리그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할 수 있었지만 타율은 후루타에, 타점은 후루타와 함께 야쿠르트 소속인 히로사와 카츠미에게 근소한 차로 밀려 홈런왕만 차지하고 삼관왕 달성에는 실패한다.
[18]
131경기에 출장하여 타출장 .311/.422/.576과 OPS .997 30홈런 86타점을 기록하고 총 루타수에서 리그 1위를 차지하며 타자로써의 커리어하이 시즌을 기록했다. 다만 MVP 투표에선 최다 1위 표를 기록했음에도 타율-홈런 2관왕을 수상한 팀동료 잭 하웰에게 총 점수 차이에서 밀려 수상에 실패했다.
[19]
시즌 타율 3할을 넘긴 해가 8회나 된다. 슬래시라인은 타/출/장 .294 .367 .442 OPS .808.
[20]
11타수 8안타 타율 .727
[21]
이해 시즌 전 경기에 출장해(137경기, 정확히는 규정시합인 135시합에 무승부로 인한 재시합 2경기 추가) 타율 .322/출루율 .413/장타율 .446 OPS .859 9홈런 86타점을 기록했다. 성적상으로는 뛰어난 성적이긴 해도 MVP감이라 하긴 힘드나,
포수로써의 성적으론 뛰어난 것은 분명했고 야쿠르트의 우승 버프가 더해진 데다 후루타의 존재감이 워낙 남달랐던 탓에 당시에는 별로 논란이 되지는 않았다. 오늘날까지도 일본프로야구 정규시즌 MVP는 리그 우승팀의 주축 선수에게 주는 것이 일반적이고 당시에는 그런 관례가 더 심했기 때문. 비우승팀 소속 MVP 선수가 나오는 사례는
오 사다하루,
블라디미르 발렌틴,
스즈키 이치로처럼 3관왕 수상 혹은 홈런, 안타 리그 신기록을 수립하거나
노모 히데오처럼 신인 선수 신분으로 리그를 제패했다 평가할 만한 성적을 내지 않는 이상 사실상 가능성이 없다고 봐야 한다.
[22]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의 구단 역사상 마지막 일본시리즈로 유명하다. 당시 기나긴 무관 경력을 자랑했던 킨테츠는 마지막 도전에서조차 우승에 실패하며 끝내 일본시리즈 우승 0회 기록을 남긴 채 2004년
오릭스 블루웨이브와 흡수합병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3]
기본적으로 포수의 도루 저지율은 3할만 넘겨도 뛰어난 건데, 연속적으로 4할 이상을 기록한 걸 넘어 5할, 심지어 6할을 넘겼다는 건 말 그대로 감히 범접할 만한 사람이 없는 수준이라 할 수 있다.
[24]
워낙 강한 어깨를 자랑했던 포수였다보니 당시 야쿠르트의 경기 장면에서는 보내기 번트가 조금만 짧아도
포수-
2루수 혹은
유격수-
1루수 쪽으로 이어지는 병살 플레이도 종종 볼 수 있었을 정도다.
[25]
치바 롯데 마린즈 구단대표 세토야마 류조. 당시 구단들 측의 협상 대표를 맡았다.
[26]
야구계 최종보스로 여겨지는 요미우리의 와타나베 츠네오 회장도 모자라 일본 재계의 대표라 할 수 있는
경단련 회장마저 단일리그로의 재편을 지지하는 발언을 했을 정도였다. 결국 선수협에게 떡실신당한 요미우리 회장은 대신 고이즈미를 화풀이타켓으로 찍고선 고이즈미의 말년 지지율을 깎아먹었다.
[27]
과거
MBC 청룡을 맡은
백인천이 이러한 계약을 했었는데, 이 쪽은 선수-감독을 겸임하면서 4할을 치는 바람에 선수 생활 연장과 관련해 구단과 갈등을 맺은 적이 있었다. 구단에서는 선수 계약이 끝났으니 감독에만 전념하라는 뜻을 내비쳤고 백인천은 내가 타자로써 베스트 텐에 선정된 팀의 최고타자인데 선수 생활을 더 연장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친 것. 결국 구단은 백인천의 의지를 존중해줬으나 83년 백인천은 타자로써 심히 부진하며 그 해 타자로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28]
당연한 말이지만, 각각의 연봉도 따로 받았다. 특히 감독을 맡은 이후 개인 성적이 급락한 바람에 2년차 때는 선수 쪽 연봉이 무지막지하게 깎여 나갔다.
[29]
사실 감독과 선수를 겸하는 건 엄청 힘든 일이고 그걸 성공해 낸 건 전 세계를 찾아봐도 시즌 3위를 기록하며 4할을 넘긴 82 백인천(...)밖에 없을 지경이다.
[30]
여담으로 10월 7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홈경기로 열린 은퇴 경기에서 8회말 마지막으로 타석에 섰을때 히로시마 도요카프는 후루타의 드래프트 동기이고 이미 전날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와의 홈경기에서 은퇴경기를 치렀던
사사오카 신지를 투수로 등판시켜 둘의 마지막 대결이 성사되었다. 그리고 후루타는 유격수 앞 땅볼로 물러난뒤 꽃다발을 사사오카에게 직접 전달하며 서로 격려하는 훈훈한 모습을 연출했고 이 경기에서 실황 캐스터는 "그의 활약이 없었다면, 지금의 프로야구는 없었을지도 모릅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영상, 이후 9회초 수비에서는 야쿠르트 최전성기에 함께 배터리를 이루었던
다카쓰 신고와 마지막으로 배터리를 맞추어 삼자범퇴로 마무리했다.
영상
[31]
사실 타석에는 이틀 뒤인 10월 9일에 요코하마 스타디움 원정 경기로 펼쳐진 야쿠르트의 최종전에서 한 번 더 섰다. 이게 진짜 마지막 타석이였고, 결과는 깔끔한 좌전 안타. 사실 이틀 전의 은퇴 경기를 진짜 마지막 타석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한 경기 남았으니 마지막까지 후루타를 보고 싶어하는 팬들의 분위기에 못이겨 나오게 된 듯. 결국 사사오카나 후루타나 은퇴경기 이후 한번 더 나온 셈.
[32]
명예번호는 지정된 이후에는 다른 선수가 쓸 수 없는 영구결번과는 달리 충분한 자격을 가진 포수라면 이 번호를 물려받는 것이 가능하다. 당연한 말이지만 아무한테나 줄 수 있는 번호는 아니다. 참고로 야쿠르트의 명예번호는 27번 외에도
와카마츠 츠토무-이케야마 타카히로-이와무라 아키노리-
아오키 노리치카-
야마다 테츠토로 이어지는 1번이 있다.
[33]
후루타 이전의 야쿠르트의 27번은 팀의 정포수 번호이기는 했다.
카네다 마사이치의 노사인 강속구를 10년간 받아냈던 네고로 히로미츠부터 카토 토시오, 오오야 아키히코로 이어지게 된다. 오오야 역시 야쿠르트에서만 16년을 뛴 레전드. '철포 어깨의 살인자' 라고 불리울 정도의 강견으로 일세를 풍미한 명포수로 1996년, 1997년은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의 감독을 맡아 1998년의 일본시리즈 우승의 토대가 되는 팀을 만들었다. 그 사이에 잠깐 1년간 론 데이비스라는 한신전 전용 용병이 있었지만 무시하자
[34]
유헤이는 2023년 WBC에서도 27번을 달고 출전해 4할대의 고타율을 기록하며 팀의 우승에 공헌했다.
[35]
후지TV는 편수계약으로 출연 중이다.
[36]
2015년
프리미어 12, 2017
WBC 해설을 맡았으며, 대회를 앞두고
박병호의 타격폼을 면밀히 분석하기도 했는데,
일본프로야구에서도 타격할 때 저렇게 상체를 비트는 사람이 없다고 평하기도 했다. 그리고 2017년 WBC 네덜란드전 해설에서는 역대급 역레발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37]
다만 입단 당시 드래프트 현장에서 가장 먼저 카메라를 치우고 퇴근한 방송사가 아사히방송이라 그 일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38]
포수로서 그의 지적인 이미지는 현역 선수시절부터 인정받아 왔지만,
선수회 파업 당시
요미우리 신문를 주축으로
일본프로야구를 주도하는 기업층과 정면으로 맞서 승리로 이끈 모습을 통해 더욱 확고해졌다. 후루타가 은퇴할 당시 한 방송사는 이 사건을 '혁명'으로 묘사했을 정도.
[39]
27번을 달았던 과거의 명포수로는
모리 마사아키와 모리의 세이부 감독시절 수제자
이토 츠토무도 있었다. 나중에
타니시게 모토노부도 이 번호를 달고 주니치 전성기를 보내 27번은 현재 NPB 포수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번호가 되었다. 이 영향으로 한국에서도 포수들이 27번을 선호하고 현재도
박동원,
유강남이라는 대형 포수가 27번을 달고 맹활약중이다
[40]
나카이 미호는 아나운서 시절, 후지TV의 인기 프로그램인 '프로야구 뉴스' 진행자를 다년간 맡은 경력이 있어 야구계와 인연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