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왕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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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조선 영조의 왕녀
화억옹주 | 和憶翁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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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억옹주묘 전경 | |||
출생 | 1717년 6월 1일[1] | ||
조선
한성부
북부
순화방
창의궁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로 19 일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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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718년 5월 7일[2] (향년 1세) | ||
조선
한성부
북부
순화방
창의궁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로 19 일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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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 증화억옹주묘(贈和憶翁主墓)[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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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본관 | 전주 이씨 | |
휘 | 향염(香艶) | ||
부모 |
부왕
영조 모친 온희정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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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자매 |
부왕 기준 2남 12녀 중 장녀 모친 기준 1남 2녀 중 장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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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호 | 화억옹주(和憶翁主) |
[clearfix]
1. 개요
조선 영조의 서장녀. 효장세자의 누나가 된다.2. 생애
1717년(숙종 43) 영조가 연잉군이었을 때, 그의 첫사랑 정빈 이씨가 낳은 첫째 딸이다. 이름은 향염(香艶)이다.[4] 당시 영조는 24세의 나이로 조선시대 기준으로 본다면 자식을 늦게 본 셈이다. 그렇기에 더욱 더 애틋하고 귀한 딸이었을 것이다.1718년(숙종 44) 3월 9일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가 창의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바로 한 달 뒤인 4월 8일에는 겨우 한 돌이 막 지난 향염마저 떠났다. 영조는 참으로 비통한 심정으로 어린 딸의 시신을 수습하게 된다. 바로 다음날 외할아버지의 산소 옆에 서둘러 매장하였다가 8월에 가서야 어머니의 묘 옆에 겨우 자리를 잡아 옮겼다.
3. 여담
지금은 의료 수준이 높아졌지만, 옛날에는 열악한 의료 수준으로 인해 유아사망률이 높았기 때문에 아주 어려서 죽은 자식은 성인처럼 장례를 치르지 않았다.[5]특히 나이가 8세가 되지 못한 경우에는 갖추어야 하는 의례가 없었다. 이는 왕실에서도 마찬가지여서 태종도 두 살짜리 왕자가 죽자 따로 장례를 치르지 않은 바 있다.[6]그러므로 당시 영조가 아버지로서 해줄 수 있었던 일은 꽃과 새 문양의 고운 비단첩에 글을 남겨서 기리는 일 뿐이었다.
내가 뒤늦게 이 딸을 얻으니 매우 기쁘고 사랑하였다. 뜻하지 않게 무술년(1718) 4월 초 8일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나이는 겨우 한 돌이 지났다. 《유녀향염광지(幼女香艶壙誌)》 |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어제 축문(祝文)을 보고 숙신공주(肅愼公主)가 추증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째 옹주는 곧 효장세자의 누나인데, 화억옹주(和憶翁主)로 추증하니 교지를 써서 들여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영조 49년(1773년 청 건륭(乾隆) 38년) 10월 7일
1773년(영조 49) 10월 7일 향염을 화억옹주로 추증하고 무덤의 비문을 직접 써서 세웠다. 그야말로
딸부잣집인 영조는 모두 12명의 옹주를 두었는데, 그중 7명만이 관례를 치르고 혼인할 수 있었다.[7] 나머지 5명은 모두 요절했다. 그런데 요절한 딸 중에서도 향염만을 추증했으니 첫째 딸을 향한
부성애를 느낄 수 있다."어제 축문(祝文)을 보고 숙신공주(肅愼公主)가 추증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째 옹주는 곧 효장세자의 누나인데, 화억옹주(和憶翁主)로 추증하니 교지를 써서 들여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영조 49년(1773년 청 건륭(乾隆) 38년) 10월 7일
《화억옹주추증교지》 |
[1]
음력
숙종 43년
4월 22일
[2]
음력
숙종 44년
4월 8일
[3]
본래 묘소는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진관외리(現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였으나,
1939년
일제강점기 때
서삼릉 왕자왕녀묘역으로
이장됐다.
[4]
향기롭고 고운 꽃이라는 뜻이다.
[5]
기준이 있었으니 상상(殤喪)은 8세부터 19세 사이에 죽은 경우를 말하며, 장상(長殤)은 19세부터 16세까지를, 중상(中殤)은 15세부터 12세까지를, 하상(下殤)은 11세부터 8세까지를 말한다. 이 셋을 통틀어 삼상이라고 한다.
[6]
태종실록 2권, 태종 1년 7월 1일 무자 1번째기사.
#
[7]
요절하지 않고 혼인까지 치른 딸들은 다음과 같다.
화순옹주,
화평옹주,
화협옹주,
화완옹주,
화유옹주,
화령옹주,
화길옹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