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왕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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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조선 영조의 왕녀
화유옹주 | 和柔翁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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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유옹주묘 전경 | |||
출생 | 1740년 11월 18일[1] | ||
조선
한성부 궁중 내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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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777년 6월 25일[2] (향년 38세) | ||
조선
한성부
창성위궁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로 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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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 화유옹주묘(和柔翁主墓)[3][4] | ||
재위기간 | 조선 화유옹주 | ||
1746년 2월 19일 ~ 1777년 6월 25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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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본관 | 전주 이씨 | |
부모 |
부왕
영조 모친 귀인 조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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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자매 |
부왕 기준 2남 12녀 중 10녀 모친 기준 2녀 중 차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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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창성위
황인점 (昌城尉 黃仁點, 1740 ~ 18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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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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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호 | 화유옹주(和柔翁主) | ||
궁호 | 창성위궁(昌城尉宮) |
[clearfix]
1. 개요
조선 영조의 서10녀. 귀인 조씨에게는 차녀가 된다.[5][6]2. 생애
1751년(영조 27) 영조는 호조 참판 황재(黃梓)의 아들 황인점을 화유옹주의 부마로 결정하고, 창성위로 삼았다. 그러나 이듬해 화협옹주가 세상을 떠나면서 혼인이 연기되었고, 실제 혼인은 1753년(영조 29)에 치러진다.《 한중록》에 따르면, 방이 좁은 탓에 화유옹주가 혜경궁 홍씨와 어깨를 나란히 하자 당시 대왕대비였던 인원왕후가 "빈궁이 얼마나 중한데 제가 감히 그리하느냐"고 혼을 낸 적이 있었다. 인원왕후가 궁중의 예법에 엄격한 사람이기도 했으나 그만큼 세자빈의 권위에 옹주는 물론이고 공주 역시 맞설 수 없었음을 나타낸다.
1753년 영조 29년 8월 6일 부왕인 영조의 전교에 따라 조부 숙종의 후궁이자 서조모가 되는 영빈 김씨의 봉사손으로 출계하였다. 이는 옹주로서 봉사손 출계를 한 이례적인 경우이다.[7]
화유옹주는 1777년(정조 1)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정조는 크게 슬퍼하면서 "선조의 옹주 가운데 궁중을 출입한 사람은 단지 이 옹주 하나 뿐이었는데" 라고 말하고 3년간 그대로 녹봉을 주게 하였다.[8] 영조는 딸부잣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슬하에 많은 딸들이 있었지만 그들 대부분이 요절한 탓에[9], 정조 대까지 살아있었던 옹주는 화유옹주, 화완옹주, 화령옹주 뿐이었다.
하지만 정조가 즉위하면서 화완옹주는 폐서인 되었고, 화령옹주는 숙의 문씨의 딸이란 이유로 폐서인이 될 뻔한 걸 정조가 허락하지 않아서 간신히 옹주 작위만 유지하던 상태였다. 그러므로 궁궐에 출입해도 문제가 없던 이는 화유옹주 한 사람 뿐이었다.
후일 정조는 화유옹주와 그녀의 어머니인 귀인 조씨의 무덤에 치제하는 등, 고모에 대한 성의를 잊지 않았다.
나의 고모시여 / 曰我姑母
부드럽고 아름다움을 본받았으니 / 柔嘉維則
부모님의 당부 말씀을 밤낮으로 지켜 / 蚤夜鞶衿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네 / 不遺寸尺
병신년[10] 이후로는 / 維丙以後
우러르는 나의 심정이 더했는데 / 增予依仰
심원의 종고에 / 沁園鐘鼓
도위가 무고하네 / 都尉無恙
묘소의 입구가 눈에 보이는데 / 墓門延眺
그 나무가 꽤나 굵어졌으니 / 厥木拱把
무엇으로 심회를 쏟을까 / 何以瀉懷
이에 나의 행차를 멈추네 / 爲停予馬
《홍재전서》 和柔翁主墓致祭文
부드럽고 아름다움을 본받았으니 / 柔嘉維則
부모님의 당부 말씀을 밤낮으로 지켜 / 蚤夜鞶衿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네 / 不遺寸尺
병신년[10] 이후로는 / 維丙以後
우러르는 나의 심정이 더했는데 / 增予依仰
심원의 종고에 / 沁園鐘鼓
도위가 무고하네 / 都尉無恙
묘소의 입구가 눈에 보이는데 / 墓門延眺
그 나무가 꽤나 굵어졌으니 / 厥木拱把
무엇으로 심회를 쏟을까 / 何以瀉懷
이에 나의 행차를 멈추네 / 爲停予馬
《홍재전서》 和柔翁主墓致祭文
그녀의 남편 황인점은 1779년부터 1793년까지 모두 6회에 걸쳐 정사(正使)로서 연경에 다녀왔다. 그런데 1784년(정조 8)에 같이 간 이승훈이 천주실의를 비롯한 천주교 서적을 반입했던 일이 드러나 관직이 삭탈되었다. 죽은 뒤에는 화유옹주와 합장하였다.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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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유옹주 묘 출토 명기》 |
- 화유옹주는 도자기를 비롯하여 옥제 비녀, 금동제 비녀, 은제 주전자, 녹색 벼루 등 30점이 넘는 부장품과 함께 묻혔다. 1991년 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나왔으며, 후손들은 이를 국가에 기증하였다. 현재 진품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복제품은 부천향토역사관에서 볼 수 있다. 이 중 도자기는 청화 안료로 장식한 합과 화려한 색으로 등나무 무늬를 장식한 합과 잔이 있어서 눈에 띄었는데, 진한 녹색을 띄는 팔각의 유리병에는 굽 바닥에 '건륭년제' 라고 새겨져 있었다. 아마도 남편 황인점이 청나라를 다녀오면서 옹주를 위해 사온 선물로 추정된다.
- 영조의 딸들 중 가장 무난한 삶을 살았다. 정빈 이씨의 소생 중 화억옹주는 돌을 넘기지 못한 채 사망했고, 화순옹주는 친모와 친동기들을 어릴 때 잃고 남편마저 먼저 사망하자 그를 따라 자식없이 39세의 나이에 사실상 자살로 사망했다.[11] 영빈 이씨의 소생 중 세 딸은 아기 때 죽고 화평옹주는 22세 때 난산으로 사망, 화협옹주는 20세의 나이로 자식없이 홍역으로 사망, 화완옹주는 72세로 장수했지만 딸과 남편을 일찍 보내고 정조 즉위 후 폐서인이 되었다. 귀인 조씨의 장녀이자 화유옹주의 친언니는 아기 때 죽었다. 숙의 문씨의 소생 중 장녀 화령옹주 역시 69세로 장수하고 1남 2녀를 두었지만 친모가 정조 즉위 후 사사당하면서, 본인도 폐서인 될 뻔했다가 옹주 지위만 간신히 유지하고 아들은 후사없이 일찍 사망했다. 숙의 문씨의 차녀 화길옹주 역시 1남 2녀를 두었지만, 19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다. 이처럼 영조의 딸들 중 20대 이전에 사망하거나 후사가 없거나 죄에 연루된 옹주들이 많은데 비해, 화유옹주는 이러한 불운들 중 어떠한 것도 해당되지 않은 채로 살았다.[12]
- 한중록에 세자빈 시절의 혜경궁 홍씨와 나란히 앉았다가 인원왕후에게 혼났다는 기록이 있다.[13] 그 덕분에 효종의 후궁 안빈 이씨와 함께 조선 왕실의 엄격한 예법을 방증하는 인물로 자주 언급된다.
4. 가족 관계
- 시가( 창원 황씨)
[1]
음력
영조 16년
9월 29일
[2]
음력
정조 1년
5월 21일
[3]
부천시 향토문화재 제7호
[4]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작동 산28-6번지 원래는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작동 126번지에 있었으나, 도로 건설로 인하여
1992년에 현재 위치로 이장되었다.
[5]
왕실 족보인 《선원계보기략》에서 귀인 조씨의 장녀는 요절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6]
경기도 부천시에 소재한 신생옹주지묘의 주인공이 화유옹주의 친언니다. 화유옹주는 조씨의 둘째딸
[7]
화유옹주가 하가한 장수황씨 시가에서 영빈의 제례를 맡고있다
[8]
정조실록 3권, 정조 1년 5월 21일 을유 1번째기사.
#
[9]
12명의 옹주들 중 9명이 아버지인 영조보다 먼저 사망했다.
[10]
영조가 승하한 1776년(영조 52)이다.
[11]
남편의 죽음에 상심한 나머지 스스로 곡기를 끊은지 열흘만에 사망했다.
[12]
향년 38세, 슬하 1남 1녀, 친모 귀인 조씨와 본인 모두 죄에 연루될 일이 없었음. 본인 명이 다소 짧은 듯한 게 아쉬울 따름이나 어릴 때 죽은 형제자매들이 워낙 많으니...
[13]
신분이 높은 사람과 나란하거나 마주보지 않고 ㄱ자로 꺾어 앉는 곡좌(曲坐)라는 예법이 있다. 왕, 왕비, 대비 정도가 아니고서야 서로 마주보거나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었다. 아무리 같은 무품이라고 해도 세자빈은 차기 중전이자 세자의 정실이고, 옹주는 왕의 서녀에 불과하기 때문에 신분 자체가 다르다. 게다가 옹주는
외명부의 두 번째 서열인 무품 하계에 불과하지만 세자빈은 내명부에서 세자궁의 수장인 무품 상계[16]로, 왕비나 세자빈은 남편과 같은 서열로 간주하고, 조선의 법에서
내명부가 외명부보다 높다. 즉, 세자빈은 왕의 적녀인 공주보다도 상전이며, 나라에서 세자빈보다 높은 사람은 중전, 왕, 왕대비, 대왕대비 정도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를 묵인하면 차기 중전이자 세자의 정실인 세자빈과 그 남편이자 차기 임금인 세자의 권위를 모두 무시하는 꼴이 되니, 대비 입장에서는 혼내야만 하는 상황이다.
[14]
측실에게 딸을 한명 보았는데 그 딸은
순원왕후의 사촌 동생 김손근(金遜根)에게 시집을 갔고, 후에 도적에 의해 피살됨.
[15]
1781년(정조 5)
영희전 참봉으로 관직에 올라 양천현령, 재령군수 등의 관직을 두루 거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