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21 03:07:43

헤르만 그라프

제2차 세계 대전 전투기 에이스 일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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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56b94> 1위 에리히 하르트만 독일 352대 Bf109 세계 1위
2위 게르하르트 바르크호른 독일 301대 Fw190 세계 2위
3위 귄터 랄 독일 275대 Bf109 전후 서독 공군 총감 부임
4위 오토 키텔 독일 267대 Fw190 Fw190 톱 에이스
5위 발터 노보트니 독일 258대 Fw190
6위 빌헬름 바츠 독일 237대 Bf109
7위 에리히 루도르퍼 독일 222대
8위 하인츠 베어 독일 220대
9위 헤르만 그라프 독일 212대 Bf109 세계 최초 적기 200기 격추
10위 하인리히 에를러 독일 208대
▼ 11~2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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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그라프
Hermann Graf

1912년 10월 24일 ~ 1988년 11월 4일

1. 개요2. 생애
2.1. 전쟁 이전2.2. 개전 초반2.3. JG 52에 발을 들이다.2.4. 전성기2.5. 나치의 선전 도구가 되다.2.6. 전선으로의 복귀2.7. 의혹으로 점철된 포로생활2.8. 사망
3. 여담4. 매체에서의 등장

1. 개요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군인이자 전투기 조종사이다. 슈퍼 에이스. 다이아몬드 곡엽 검 기사 철십자 훈장 수훈자이다.

에리히 하르트만 요하네스 슈타인호프등 유명한 슈퍼 에이스들을 배출한 동부전선의 명문 비행단인 JG52의 마지막 지휘관이자 세계 최초로 200기 격추를 달성한 인물이며 1개월간 격추수 최고 기록 보유자이기도 하다.

상당히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다 간 사람으로 이름이 알려진 독일군의 에이스 파일럿 치고는 항목이 상당히 늦게 생성 되었다. 이건 순전히 이 사람이 유명세에 비해 인기가 없기 때문이다. 이유는 후술한다.

2. 생애

2.1. 전쟁 이전

헤르만 그라프는 1912년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 지방의 소도시 엥겐에서 가난한 대장장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장장이 일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이는 집안이 워낙 찢어지게 가난 했던 탓(...). 그나마 읽고 쓰기 정도의 초등 교육과정이나마 받을수 있어 까막눈 신세는 면한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였다. 어쩌면 평범한 노동자로 남았을 지도 모르는 삶을 살던 그라프에게 변화가 찾아온건 겸손한 태도와 성실함, 뛰어난 업무능력으로 추천을 받아 비록 말단이지만 지방 행정관서의 공무원으로 채용된 것.

공무원이 되어 경제 사정에 다소나마 여유가 생긴 그라프는 공무원들의 교양 스포츠였던 글라이더를 접하며 비행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고, 1933년에 글라이더 조종 면허를 취득한 뒤엔 항공기 조종에 관심을 가져 1936년에 항공기 조종 면허까지 취득한다. 항공기 면허를 취득한 그라프는 독일 공군에 예비역 하사관으로 등록되어 기본적인 전투기 조종훈련을 받게 되는데, 이게 바로 그와 군대가 연을 맺게 된 계기였다.

2.2. 개전 초반

독일의 폴란드 침공 당시, 그라프는 군대에 소집되어 기종 전환 훈련을 끝내고 하사 계급으로 1939년 5월 31일부터 제51전투항공단의 2중대에 배속되어있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중사로 진급한 그라프는 Bf 109E-1에 탑승해[1] 21회의 출격을 했지만 적기 격추는 커녕 총 한방 쏴볼 기회조차 없었다고 한다. 폴란드를 점령한 후, 그라프는 1940년 1월 20일자로 메르제부르크의 공군 훈련소로 전속 되었다.[2]

2.3. JG 52에 발을 들이다.

소위로 진급한 그라프는 10월 6일자로 JG 52 제9중대에 배속되었는데, 착임한지 일주일 만에 루마니아 공군의 훈련교관을 맡게 되면서 잠시 JG 28로 전속 되었다가 12월 말에 다시 JG 52로 복귀했다.

JG 52로 복귀한 이후 1941년 5월엔 영국군 수비병력이 방어하고 있던 크레타 섬 공습에 참여해 꽤 많은 출격횟수를 기록했고, 6월에 비행단이 우크라이나 지방으로 이동함에 따라 다시 동부전선에 참전하게 된다.

같은 비행단의 동료들이 약체 소련 공군을 상대로 급속도로 격추기록을 쌓아가고 있던 와중에도 그라프는 단 1기의 격추로 기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8월 4일에 아군의 슈투카 급강하 폭격기를 호위하는 임무에 나섰다가 소련의 I-16 전투기 한대를 잡아내며 드디어 대망의 첫 격추를 기록한다. 그 격추의 과정에서 그라프는 참전 2년만에 첫 격추의 기회를 잡아 흥분했던 탓인지 기총의 안전장치도 풀지 않고 공격하려 들었다가 당황한 나머지 역습당할 위기에 처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고, 다행이 동료기의 원호로 위기에서 벗어난 덕에 다시 기회를 잡고 침착하게 싸워 얻어낸 것이었다. 비행단의 동료들은 그라프의 첫 격추를 축하해줬지만, 헤르만 그라프 본인은 부끄러움과 수치심 속에 마음을 다 잡고 심기일전[3]하여 다음날에도 또 한대의 격추를 기록했고, 8월이 가기 전에 이어진 몇 차례의 출격에서 2대를 추가로 격추해 8월 한 달간 4기의 격추수를 기록해 2급 철십자장을 서훈 받았지만 주변에 1급 철십자장은 물론 기사철십자장 서훈자도 넘쳐나던 판이라 그다지 주목 받진 못했다. 하지만 이건 그야말로 시작에 불과 했다.

2.4. 전성기

천신만고 끝에 기록한 첫 격추와 그뒤로 이어진 몇 차례의 승리에서 뭔가 감은 잡은 것인지 헤르만 그라프는 9월에 4기, 10월에 12기, 11월 10기, 12월엔 12기의 격추를 추가로 기록. 첫 격추를 기록한지 4개월 만에 40대 격추를 돌파하는, 2년여간 수백 회의 출격횟수를 찍으면서도 1대의 적기도 격추하지 못한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믿을수 없는 놀라운 기량을 선보이며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리지게 만들더니, 그 전공으로 단기간에 2급 철십자장(41년 8월), 1급 철십자장(41년 10월), 기사철십자장(42년 1월)을 연이어 받으며 비행단의 새로운 에이스 파일럿으로 단단히 자리매김했다.

이후로도 그의 신들린 격추 행진은 계속되어 42년 3월 23일에 50기 격추를 기록, 5월 14일에는 100기 격추를 돌파.[4] 9월엔 150기 격추를 넘어서서 그 전공으로 다이아몬드 곡엽 검 기사철십자장을 수여받고 돌아와 9월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50기를 추가로 격추. 9월 한달에만 도합 무려 61기(!!!)의 적기를 떨궈 버리면서[5] 세계 최초로 200기 격추를 돌파(9월 25일 199기 격추후 26일 3기를 연달아 격추하며 202기 격추 달성) 해 버린다!

이 전인미답의 대기록을 작성 할때 그라프의 기록을 보면 가히 압권이라고 할만 한데, 하루에 5기 이상을 격추 한 기록이 7번[6], 하룻동안의 격추수로만 더블 에이스[7] 달성, 1개월(42년 9월)간 적기 61기 격추, 최초의 격추기록으로 부터 200기 격추 돌파까지 걸린 기간 1년 1개월이다.

굳이 비교를 하면 인류 역사상 최고의 에이스라는 에리히 하르트만, 그와 함께 인류 역사상 단 둘 뿐인 300기 이상을 격추한 에이스 게르하르트 바르크호른 보다 기록을 쌓아 올린 페이스가 빠르다.[8]

2.5. 나치의 선전 도구가 되다.

적기 200기 격추 돌파라는 전인미답의 대기록을 작성한 희대의 파일럿에게 이목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였고, 통산 202기의 격추를 기록한 그라프는 곧장 본국으로 불러 들여 졌다. 그는 곧 '위대한 업적을 이룩한 대영웅의 비행전술을 신예 파일럿들에게 전수해 독일 공군 전체의 발전에 기여한다.'는 명목으로 Ergänzungs-Jagdgruppe Ost[9]의 총 책임자로 임명 됐지만. 실상은 이런 저런 선전 행사에 불러 들이기 편한 후방의 적당한 직책을 맡긴 것에 불과했다.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일을 배워 대장장이로 전전하다 근면 성실함 하나로 공무원으로 채용되고, 거기서 배운 글라이더 비행을 기반으로 삼아 항공기 조종사로, 다시 독일 공군의 전투기 조종사로. 그리고 별다른 활약도 없이 묵묵히 종군하다 참전 2년에 만에 첫 격추를 기록하곤 단 1년에 만에 그 누구도 이뤄내지 못한 대기록을 쌓아올린 드라마틱한 그의 인생은 그 자체로도 나치가 바라던 영웅상에 부합되기 충분했고, 더구나 그는 대전 초반 헬무트 뷔크, 베르너 묄더스와의 치열한 격추 경쟁으로 유명했던 아돌프 갈란트같은 엘리트 군인도 아니였고, 한스 요아힘 마르세이유처럼 사생활이 문란하지도 않았다.
이정도면 나치 독일이 원하던 이상적인 영웅상 바로 그 자체인 인물이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고 이런 그를 독일군 수뇌부는 가만 놔둘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

전선을 떠난 그라프는 여러 지방을 순회 하며 강연을 하고, 독일 공군 축구팀인 'Rote Jäger'[10]의 골키퍼를 맡아 친선 시합을 벌이고 다니는 등 본업과는 전혀 상관 없는 행사에 동원되기 시작했다. 문제는 헤르만 그라프 본인이 이런 생활을 전혀 싫어하지 않았다는 점.[11]

오히려 헤르만 그라프는 나치의 선전도구가 되는 대가로 본인에게 주어진 여러가지 특권을 남발하며 주위의 반감을 사는 행동을 범하곤 했다. 이 행동 가운데 가장 유명했던 것은 바로 자신에게 주어진 인사 명령권을 이용해 공군 내의 각 부대에서 축구 좀 한다는 사람들은 병/장교를 가리지 않고 마구 차출해 독일 공군 축구 드림팀을 꾸려 자신의 덕심을 충족한 것[12]. 직권 남용으로 되도 않는 짓을 하다 감옥까지 가는 부류들과는 비교하기도 미안할 정도로 매우 소박한 수준이지만 부대에 꼭 필요한 인재를, 다른 이유도 아니고 축구 잘한다는 죄목으로 눈뜨고 뺏기는 입장에선 상당히 빡치는 일이었다.

2.6. 전선으로의 복귀

이렇듯 이전엔 꿈도 못꾸던 사치를 누리며 호화로운 생활을 영유하던 그라프였지만 곧 그의 직권 남용과 전횡에 그를 성토하는 목소리도 커져 갔고, 결국 1943년 여름에 영국제 고속 쌍발기인 드 해빌랜드 모스키토 전투기와 연합군의 폭격기를 효과적으로 요격하기 위한 전술 실험 부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되면서 전선으로 복귀한다. 그라프 휘하의 실험 부대는 43년 8월 15일 부로 JG 50으로 개칭 되었고 그라프가 초대 사령관을 맡아 Me 163, Me 262같은 신형 제트 전투기의 운용 시험도 하는등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으나 정작 본업인 모스키토 전투기나 연합군의 중폭격기 요격에선 그라프 본인이 직접 출격해 1대의 모스키토 전투기와 2대의 B-17 중폭격기를 잡아낸 것 외엔 이렇다할 실적을 올리지 못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전선에 복귀하게 된 계기는 43년 10월 8일, JG 1의 사령관을 맡고 있던 한스 필리프가 미군의 P-47 썬더볼트 전투기에 격추당해 전사하면서 생긴 지휘권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 자신의 휘하에 있던 알프레트 그리슬라브스키에게 JG 50의 지휘권을 넘기고 JG 1의 임시 항공단장으로 활동하게 된것이다.[13] 이 시기 연합군의 2차 슈바인푸르트 공습이 일어났고 77기의 연합군 폭격기가 격추당했으나 독일 공군도 46기의 전투기가 격추당하는 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라프는 인사이동 명령에 의해 JG 11의 지휘관이 되었고, 이 시기에 3기의 중폭격기를 추가로 격추했지만 1944년 3월 29일의 공중전에서 1기의 P-51 머스탱 호위 전투기를 격추한 직후 다른 P-51 과 공중 충돌해 추락, 가까스로 탈출에는 성공했으나 중상을 입고 말았다.

부상에서 회복한 그라프는 그를 영웅으로 만들어준 친정 부대인 JG 52의 사령관으로 발령받아 동부전선으로 돌아가게 된다.

2.7. 의혹으로 점철된 포로생활

JG 52의 사령관으로서 그라프가 상관으로부터 받은 마지막 명령은 같은 비행단의 에리히 하르트만과 함께 서쪽으로 탈출해 미영 연합군에게 항복하라는 것이였다. 하지만 그라프는 하르트만과 의논한 결과 자신들의 안위만 생각할수 없다는데 동의하고 비행단의 기밀 자료와 잔여 물자를 파기하고 JG 52 부대원 모두 자동차를 이용해 전선을 이탈해 서쪽을 향해 달려 미군에 항복했다.

미군은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우르르 나타난 이 독일의 장교 집단을 신사적으로 대하는 듯 했지만 곧 연합군이 소련과 맺어둔 '부대 단위로 항복한 포로의 경우 해당 부대가 참전한 전선의 교전국에 해당 포로의 신병을 인도한다.'는 규정의 조약에 따라 항복한 JG 52 부대원 전체를 소련에 넘겨버렸다.

붉은 군대의 공군만을 상대로 202기의 격추를 기록한 그라프였던 만큼 그의 포로생활이 순탄치 못할 것임은 명약관화했지만, 놀랍게도 그라프는 최소 10년 가까이 포로 생활을 해야 했던 비행단의 동료들과 달리 포로가 된지 5년도 지나지 않은 49년 12월 25일에 석방되어 귀국했다.
이 놀랍도록 빠른 귀향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었고, 으레 따라붙은 '어째서?' 라는 의문에 그라프는 오로지 침묵으로 일관할 따름이었다. 예외적인 빠른 석방과 그라프의 침묵은 그가 포로생활 중에 군인으로서의 자존심과 긍지를 버리고 소련에 굴복한 대가가 아닌가 하는 의혹을 불러 일으켰고, 소련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또다른 에이스 한스 한[14] 이 석방된 뒤 저술한 자서전 'Ich spreche die Wahrheit : 내가 말하는 진실'에서 그라프의 행적을 성토하며 의혹은 사실이 되고야 말았다.

한스 한의 폭로에 따르면, 그라프는 소련의 회유와 협박에 못이겨 무고한 소련 인민들을 폭살한 죄를 인정하며 이를 반성한다는 내용의 자술서를 쓰고, 소련 공산당에 입당했으며, 그 대가로 다른 포로들과 달리 수용소라고 불리기도 민망할 정도의 편안한 시설에서 안락한 생활을 했었다는 것이었다. 곧 그라프에게는 비난과 성토의 목소리가 쏟아졌고, 해명 요구가 빗발쳤으나 이번에도 그라프는 침묵으로 일관했고 그의 침묵은 곧 수긍으로 받아들여져 결국 그는 '비겁자' 내지는 '변절자'로 낙인 찍힌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갔다.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잊혀져 가던 그라프가 다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것은 같은 비행단 동료이자 세계 최고의 격추왕인 에리히 하르트만이 장장 10년 6개월에 이르는 포로생활 끝에 석방되어 돌아온 뒤였다. 독일로 돌아온 하르트만은 놀랍게도 한스 한의 폭로는 사실과 다르며 , 그라프는 변절하지 않았으며 단지 소련의 속임수에 넘어간 희생양이였다고 주장하며 "헤르만 그라프가 억울한 대우를 받고 있다."며 그를 변호한 것.

하르트만에 의하면 소련은 하르트만과 그라프가 회유와 협박에 굴복하지 않자 방법을 바꿔 그들을 내버려 두는 대신 비행단의 동료들을 괴롭히기 시작했으며, 자신들로 인해 가혹한 대우를 받고 있는 동료들의 모습을 보며 괴로워하는 그들에게 '다가오는 전승 기념일에 적국 최고의 파일럿으로서 몇 번의 시범비행을 보여주기만 하면 부하들을 훨씬 시설이 좋은 수용소로 이감시켜 주는 것은 물론 처우도 개선해주겠다.'는 제안을 해왔고 이를 그라프가 마지못해 수락했는데[15], 그라프가 제안을 수락하자 소련은 러시아어로 작성된 몇가지 '절차상 필요한 서류'를 내밀곤 그라프의 서명을 받아냈다. 그런데 이 서류들이 사실은 전쟁 중의 전쟁범죄 행위를 인정한다는 내용의 자백서와 공산당 입당 지원서였고, 뒤늦게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그라프가 항의하자 콧방귀를 뀌며 JG 52의 포로들 중 그라프만을 똑 떼어내 더 시설과 대우가 좋은 수용소로 이감시켜 버렸다는 것.[16]

하르트만의 변호로 다시한번 그라프에게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었지만, 그라프는 이번에도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침묵으로 일관할 따름이였다.

결국 그에 대한 평가는 한스 한의 폭로에 따라 변절자 내지는 비겁자로 인식하는 쪽과 하르트만의 변호에 좀 더 무게를 두고 옹호하는 쪽으로 극명하게 갈리며, 그라프를 맹비난 하던 한스 한과 그라프를 변호하던 하르트만, 그리고 그라프 본인이 모두 사망한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진실이 무엇이였는지 영원히 알수 없게 되어 버렸다.

2.8. 사망

1965년에 발병한 파킨슨병으로 고생하다 1988년 4월 11일에 고향인 엠겐에서 사망했다.[17]

3. 여담

헤르만 그라프의 위로 형이 둘 있었는데, 그중 큰 형인 빌헬름 그라프는 포병으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철십자 훈장을 받은 참전 용사다. 빌헬름 그라프는 헤르만이 6살이 되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왔는데, 헤르만 그라프는 이때서야 자신의 큰 형을 처음으로 만났다.

세계 최초로 적기 200기 격추를 달성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단기간에 빠른 속도로 스코어를 쌓아 올린 사람이다. 이 때문에 그가 후방을 전전하며 군의 홍보 활동에 동원되지 않고 전선에 남아 계속 전투에 참가 했다면 에리히 하르트만의 기록을 뛰어 넘었을지도 모른다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다.

전투기 파일럿으로서는 특이하다면 특이하게도, 지상 부대와의 작전 연계를 매우 중요시한 파일럿이다. 한번은 기지에서 대기 하던중, 우연히 지상 부대와의 무전 교신을 듣게 된적이 있는데, JG 52의 작전지역 인근에 전개한 육군의 돌격포 중대 하나가 Il-2 공격기 편대로 부터 공습을 받아 위기에 처했다는 내용인 것을 알게 되자마자 격납고로 달려가 연료와 무장 상태만을 점검하곤 단독으로 출격. 슈투르모빅 3대를 격추시켜 돌격포 부대를 구해낸 일화도 있다. 물론 명령도 없이 단독으로 출격한 그는 심하게 문책 당한 것은 물론 군법회의에 회부될 뻔 했지만, 그의 단독 행동이 개인적인 목적이 아닌 위기에 처한 아군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과 그의 발빠른 조치가 아니였다면 돌격포 부대는 전멸을 면치 못했을 것이고, 돌격포 세력이 일소당한 아군의 보병 부대 또한 심각한 위기에 처했을 것이 자명한 상황이였다는 점이 참작되어 근신 처분만으로 끝났다.

어린 시절부터 운동겸 취미 삼아 즐겼던 축구에 대한 사랑이 남다른 축덕이였으며, 실력도 대단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축덕질에 동원되어 이리저리 끌려 다닌 이력이 있는 프리츠 발터는 헤르만 그라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그는 어떤 포지션에서도 풀타임으로 경기를 소화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선수였고, 특히 골키퍼로 뛸 때는 당장 국가대표로 기용해도 될만큼 대단한 실력이였다. 만약 전쟁이 아니였다면 그는 위대한 축구 선수로 이름을 남겼을 것." 월드컵 우승팀 주장이 이렇게 말할 정도니 축구 실력이 대단하긴 대단했던 모양.

포로 수용소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온 직후 한동안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었으나, 어려서부터 남다른 축구사랑으로 유명했던 인물답게 축구 관계자와의 인맥을 통해 직업을 얻고 그나마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이때 도움을 준 사람이 무려 제프 헤르베르거(Sepp herberger). 제2차 세계 대전 때 헤르베르거는 그라프를 통해 축구 선수들에게 연락을 취하기도 하고 그라프에게 부탁해서 축구 선수들은 위험이 적은 후방에서 뛰도록 배려하기도 했다. 축구 선수로 대성할 자질이 있던 청년이 전쟁에 휘말려 전쟁 영웅으로 이름 날리다 패전과 더불어 영락한 모습에 안타까워하다 평소 안면이 있던 롤란트 엔틀러(Roland Endler)라는 이름의 전자제품 제조회사의 사장을 소개 시켜 줬다고. 참고로 저 '롤란트 엔틀러'라는 사람도 어마무시한 축덕으로, FC 바이에른 뮌헨/역사 항목에서 그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폴란드 대표팀에서 활약했던 전설적인 공격수 에른스트 빌리모프스키와 친한 친구였고 그에게 큰 은혜를 베풀었다. 빌리모프스키의 어머니 파울리나가 러시아 출신 유대인들과 친하게 지낸 혐의로 아우슈비츠에 끌려갔는데 그라프의 도움으로 파울리나는 그 악명높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나올 수 있었다.

4. 매체에서의 등장

그 눈부신 활약과 화려한 전적에 비해 일찌기 전선을 오랫동안 후방을 전전하며 선전 활동에 동원된 점이나 전후의 행적 논란으로 인해 인기가 더럽게 없는 인물이다. 그에 따라 여타 매체에서의 등장도 전무.

오히려 파일럿 본인보다 그의 탑승기나 마킹을 재현한 프라모델 킷이나 에이비에이션 아트가 인기가 많은데, 아이러니하게도 이건 그가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면서 군이 홍보 목적으로 그의 탑승기를 한껏 화려하게 치장하도록 했기 때문.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이후 그의 탑승기들은 기수에 장식성 강한 붉은 튤립을 그려넣고 수직 미익에 눈에 확 뜨이는 화려한 100기, 150기 격추를 상징하는 철십자 훈장 데코레이션에 수많은 격추봉이 그려져 있어 개성 만점인데다 상당히 멋져 보이기 까지 하기 때문에 멋있으면 실적이 별로던가 실적이 뛰어나면 외양이 너무 평범하거나 한 다른 에이스들의 기체 보다 인기가 좋은듯 하다.

워 썬더에서 Bf 109 F-4 의 JG 54 도색으로 등장한다.


[1] 2차대전 직전만 해도 세계 각국의 공군에는 병사 계급의 파일럿도 있을 정도로 항공기 조종사에 대한 대우가 높지 않았다. 그도 그럴게 비행기 자체가 개발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비교적 사고가 잦았고, 별다른 탈출 장치도 없어 심각한 고장이나 피격 당하는 순간 죽음이 확정인데다, 여압도 잘 되지 않아 항상 춥고 비좁은데서 싸워야 했던 참으로 가혹한 조건이었다. 때문에 당시엔 진짜로 귀족이던 진성 장교들은 엔간하면 파일럿을 하지 않았다. [2] 훈련소로 돌아간 이유에 대해선 자료마다 서술이 다르다. 전투기 파일럿으로서 함량 미달이란 이유로 재훈련을 받으러 갔다는 자료가 있는가 하면 비행술 교관으로 간 것이라고 서술하는 자료도 있다. 다만 이후에도 루마니아 공군의 훈련을 맡았다는 것이나 동년 5월에 소위로 진급한 것 등을 보면 아무래도 후자의 서술이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다만, 만성적인 인력난에 시달리던 대전 당시의 독일 공군의 사정을 감안하면, 당시의 그라프에 대한 평가는 '교관으로 기용해도 될 정도로 비행의 기본기는 탄탄하지만, 전투기 파일럿으로 일선에서 굴려먹기엔 약간 아쉬운' 정도 였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3] 말이 축하지 실상은 소련 공군기의 성능과 조종사들의 기량이 형편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수준 이하의 상대에게 완벽한 공격 기회를 잡고도 본인의 삽질로 죽다 살아난 그라프를 놀리는 것에 가까웠다고 한다. [4] 독일 공군 전체에서 7번째로 100기 이상을 격추한 기록이다. [5] 월간 격추 최고 기록이다. [6] 42년 4월 30일 6기, 5월 2일 7기, 5월 8일 7기, 5월 13일 6기, 5월 14일 8기, 9월 2일 5기, 9월 23일 10기. [7] 10기 이상을 격추한 파일럿. [8] 에리히 하르트만의 경우, 헤르만 그라프 보다 활약한 시기도 늦고 이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 뛰어난 성능의 기체에 향상된 기량의 적들을 상대로 독일 공군이 밀리기 시작한 무렵부터 대기록을 쌓아 올렸다는 점에서 경우가 다르긴 하지만, 게르하르트 바르크호른의 경우는 활동 시기도 비슷하고 첫 격추를 기록한 시기도 오히려 헤르만 그라프보다 한달 빠른 반면, 200기 격추를 기록한 시점(43년 11월)은 헤르만 그라프보다 1년이나 늦다. [9] 동부 전투비행단 보충대. 혹은 동부 보충 비행대. [10] 붉은 사냥꾼. 독일 공군 축구팀이라지만 좋은거라면 뭐든 자기 손에 있어야만 직성이 풀리던 헤르만 괴링 덕분에 대전 당시엔 독일 국가대표 팀과 동격으로 취급 됐다고한다. [11] 물론 그의 지독하게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감안하면 생전 처음 누려보는 사치와 자신을 영웅으로 떠받드는 주변 분위기에 휩쓸리기 쉬웠을 법도 하다. [12] 이때 헤르만 그라프에게 차출당한 사람들 중 하나가 1954년 월드컵에서 서독 대표팀의 우승 주장으로 활약하게 되는 프리츠 발터였다. 당시 발터는 독일 공군 공수부대에 복무하다가 그라프에게 차출되었고 헤르만 그라프가 JG 52의 사령관으로 복귀하기 전까지 그라프에게 계속 붙들려 있었다. [13] 공식적으로는 아직 JG 50의 사령관 직에 남아있었다. [14] 108기 격추를 기록한 JG 54의 에이스. 1943년에 교전 도중 격추되어 소련의 포로가 되었다. [15] 헤르만 그라프는 JG 52의 지휘관이였던 만큼 동료들에게 느끼는 책임감의 무게가 달랐을 것이다. [16] 이는 그라프가 동료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고 스스로를 변호할 기회를 없애 버리기 위함이었던 걸로 짐작된다. [17] 사후 2차 대전 참전 전투조종사 전우회에 남아있던 전우들은 그의 명예를 복권시키고 그를 다시 협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결정했다.